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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관운
03. 조선시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형성과 전개
● 사림파(士林派)의 동서분당(東西分黨, 1575년)-사림(士林)은 전원의 산림(山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학자로서 15세기 이후 조선 중기 중앙 정계를 주도한 정치집단이다. 고려 말기의 유학자 길재(吉再)가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영남 일대는 그의 제자가 많이 배출되어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훈구파에 대립하여 사림파(士林派)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사림은 유림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온건파 사대부를 계승했다.
길재의 제자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은 영남 유학의 사종(師宗)으로, 그의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이 배출되어 성종 때에는 중앙의 정치무대에 대거 등장했다. 이들을 사림파라 하는데, 관학자들과는 학문의 경향을 달리하고 있었으며, 주로 삼사(三司) 계통에서 언론문필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대개 유교의 이상 정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종래부터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와 불화가 생겨, 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기와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의 진출로 사화가 되풀이되어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한 사림파는 꾸준히 그 학통을 계속하면서 발전하여 갔다.
○ 김숙자(金叔滋, 1389년∼1456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불렸다. 선산 출신의 도학자이자 유학자이다. 광위(光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은유(金恩宥)이고, 아버지는 김관(金琯)이며, 어머니는 유인귀(兪仁貴)의 딸, 유씨이다.
김숙자는 12세 때부터 길재(吉再)로부터 『소학』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역학에 밝은 당시 조선 유학자 윤상(尹祥)이 황간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윤상은 그 열의를 보고 『주역』의 깊은 뜻을 힘써 가르쳐주었다.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령현감을 거쳐,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그 뒤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1456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에 죽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고 성리학의 계보 중,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효성이 지극해 『소학』의 법도를 따라서 어버이를 모셨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기를 권태롭게 여기지 않아, 친상(親喪) 중에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린 뒤에 가르치기까지 해, 학업을 받는 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가르칠 때에는 처음에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암송시킨 다음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효경(孝敬)』·『사서오경(四書五經)』·『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제자백가의 순을 밟았다.
『소학』을 앞세우면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고려의 유학자 길재에게서 물려받았으며,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 김종직(金宗直, 1431년∼1492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 권우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정계에 진출한 이는 정몽주,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과 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 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정여창(鄭汝昌, 1450년 음력 5월 5일∼1504년)은 조선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작가이다.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그해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사망한다. 그 뒤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된다.
사후 복권되고, 중종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학역재 정인지, 하성위 정현조, 정숭조, 선조임금의 생모 하동부대부인은 그의 일족들이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이관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경상남도 출신.
○ 김굉필(金宏弼, 1454년∼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자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주부(主簿),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주계정·이심원·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 이목(李穆, 1471년∼1498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중옹, 호는 한재,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일찍이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다.
태학에 있을 때, 성종이 병이 있어 대비가 무녀를 시켜 벽송정에서 기도를 베풀자, 이목이 태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무녀에게 곤장을 쳐서 쫓아냈다. 후에 성종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유생들은 모두 도망하였으나, 이목 홀로 도망하지 않아서 성종의 칭찬과 술을 받았다. 그는 늘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이로 인해 공주에 유배된 적도 있다.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권오복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는데, 형장에 나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絶命)의 노래를 지어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일찍이 공주에 귀양 갔던 인연으로 공주의 인사들이 충현서원(忠賢書院)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 권경유(權景裕, ?∼1498(연산군 4)) 조선의 문신. 자는 君饒(군요)·子汎(자범), 호는 癡軒(치헌), 判官(판관) 질(질)의 아들. 金宗直(김종직)의 문인. 進士(진사)로 1485년(성종16) 別試文科(별시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1490년 賜暇讀書(사가독서)를 하였다.연산군 때에 校理(교리)·堤川 縣監(제천현감) 등을 지냈고, 金馹孫(김일손)과 함께 史官(사관)으로 있을 때 스승 김종직의 「弔義帝文(조의제문)」을 史草(사초)에 실은 사실을 그 후 1498년(연산군 4) 柳子光(유자광)·李克墩(이극돈)이 연산군에게 말함으로써 戊午士禍(무오사화)가 일어나 국문을 당한 끝에 아들 沇(연), 김일손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中宗反正(중종반정:1506년) 후 都承旨(도승지)에 追贈(추증)되었다
○ 김안국(金安國, 1478년∼1543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박학하고 문장에 능한 성리학자로서 저서에 《모재집(慕齋集)》·《모재가훈(慕齋家訓)》·《동몽선습(童蒙先習)》,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성리대전언해(性理大全諺解)》·《정속언해(正俗諺解)》·《농서언해(農書諺解)》·《잠서언해(蠶書諺解)》·《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이 있다.
○ 김정국(金正國, 1485년∼1541년)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철학자, 성리학자, 서예가, 작가이다.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와 팔여사가,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의성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50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였으나 그 뒤 복직하여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 김일손(金馹孫, 1464년 ∼ 1498년 7월)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1498년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李克墩)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禍)를 입었다.
○ 조광조(趙光祖, 1482년∼1520년)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후에 기묘명헌 중 한 사람이다.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관직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奇大升)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다.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白仁傑)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士林派)는 훈구파(勳舊派)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된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 남효온(南孝溫, 1454년∼1492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고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의령(宜靈),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이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 · 이맹전(李孟專) · 김시습 · 조려(趙旅) · 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장군 남이, 영의정을 지낸 남곤, 문신(文臣) 남포(南褒, 1489년∼1570년)의 친족척이다. 문신(文臣) 한산군(韓山君) 이손(李蓀)의 사돈으로 남효온의 딸이 이손의 3남 이온언의 부인이며 한산군(韓山君) 이손이 남효온의 집안을 보살펴줘서 추강집에 감사함을 기록했다.
○ 남곤(南袞, 1471년∼1527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유학자이며 정치인,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초기 사림파 정치인이었으며 성리학의 지식에 해박하였으며, 사장학과 경서 해석에도 재주가 있었다. 자(字)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지족당(知足堂)·지족(知足),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사림파 출신 인사 중 김전 등과 함께 심정·홍경주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것을 묵인, 동조하였다.
1494년(성종 2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제학, 이조참판,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의정부좌찬성과 우찬성, 예조판서를 거쳐 기묘사화 이후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여 의정부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사림파의 일원으로 갑자사화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 반정 이후 복귀했다. 그 뒤 김전과 함께 신진 사류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반대하였다. 1519년 훈구파와 손잡고 기묘사화에 협력하여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 방조하였으나, 남곤도 김종직 학파의 한사람이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청렴하였으나, 조광조 등을 처형하는 데 동조, 묵인했다는 이유로 사림의 집권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사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신자와 변절자로 몰려 지탄을 받았다. 후일 그의 외손자 송인은 조선 중종의 서녀 정순옹주의 부마가 되었다. 그의 고모부는 임원준이고, 경상남도 출신이다.
○ 송석충(宋碩忠) 1454(단종 2)∼1524(중종 1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야로(冶爐). 자는 원로(元老), 호는 눌재(訥齋). 아버지는 현령 윤(綸)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한창(韓昌)의 딸이다. 영천(榮川)에 거주하였다.
1478년(성종 9)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과거를 준비하는 한편 김굉필(金宏弼)·최보(崔溥)·박담손(朴聃孫)·신희연(申希演)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교유하던 인물들이 화를 입어 처벌받게 되자 평소 이들과 왕래하였던 서간을 강물에 던지고 병을 빙자하여 향리에 내려가 서사(書史 : 경서와 역사공부)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남효온(南孝溫)이 그를 평하기를 “성품이 강결하고 정직하며 명성과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천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 김전(金詮, 1458년∼1523년)은 조선 전기, 중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중륜(仲倫), 호는 나헌(懶軒)·능인(能人),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휘말려 남해로 유배당했으나 중종이 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고 곧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513년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한 이후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치자 반대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과 《속동문선(續東文選)》의 공저자의 한사람으로 청렴하여 집 한채 없었고, 전답하나 없이 오직 거문고와 술로서 스스로를 즐길 정도로 청렴결백하였고 문장도 잘했으나, 기묘사화를 일으킨 배후 인물의 한사람으로 지목, 남곤과 함께 사림파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안로(金安老)의 삼촌이자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증조부이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고조부가 된다. 또한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소윤(小尹)의 윤원형이 그의 손녀사위였다. 조카인 김안로와 손녀 사위 윤원형은 왕실의 인척인 훈구파였지만, 그는 김종직의 문하생인 사림파였다. 김종직의 문인.
○ 이심원(李深源, 1454년∼1504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자는 백연(伯淵), 호는 성광(醒狂), 默齋(묵재), 太平眞逸(태평진일)이다. 연산군 때 동생과 함께 화를 당한 대유학자이다. 효령대군 보의 증손으로 보성군 갑의 손자로서 평성도정 위(사후 평성군에 추증)의 장남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그의 제자인 김굉필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정암 조광조와는 동문수학한 선배였다. 성종 때부터 훈구파의 퇴진과 사림파의 등용과 양심적인 지역 은거 인사들의 등용을 주장하였으며, 고모부 임사홍의 비행과 비리를 성종에게 고했다가 할아버지 보성군으로부터 고소당하였으나, 성종이 그의 충심을 이해하고 반려하였다.
사림파에 대한 지지 선언으로 인사들의 단종 정순왕후 복권 여론을 이끌어냈다. 그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두 아들과 함께 사형당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정광필 등의 상소로 죄를 면하고, 주계군으로 증직되었다. 이후 홍록대부로 추증되어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졌다. 그의 행적은 『명신록(名臣錄)』, 『삼강행실(三綱行實)』, 『국조보감(國朝寶鑑)』등의 책에 기록하여 학문과 충절을 돋보이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