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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농민전쟁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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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농민전쟁]은 엥겔스가 1848년 프랑스 2월혁명, 독일 3월혁명의 패배 이후, 패배의 원인을 물적 토대 내지 계급관계 속에서 냉정히 분석하여 미래 운동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썼다고 할 수 있다. 엥겔스는 농민전쟁 시기와 1848년 혁명기의 부르주아지가 매우 유사한 계급적 특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1870년의 제2판 서문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1870년의 우리 중간계급 상층은 1525년의 온건한 중간계급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했다. 부르주아지, 장인과 상인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변함이 없다. 그들은 대부르주아지로 상승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고 또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러한 희망과 공포 사이에 있는 그들은 투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의 귀중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고 투쟁이 끝났을 때는 승리자에게 달라붙으려 애를 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본성이다.”(혁명사16-17)
이러한 주장은 1848년 혁명 직전에 나온 [공산당선언]의 관점을 1848년 혁명의 실패를 경험하고도 엥겔스가 1870년까지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는 다음 구절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공업⋅상업⋅교통수단을 발전시키는 정도에 따라서 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출한다. 그리고 어떤 지점까지 오면−이 점은 반드시 모든 장소에서 동시적으로 혹은 동일한 발전단계에서 나타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부르주아지는 그들의 분신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순간부터 그들은 독자적인 정치적 지배를 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그들은 동맹자를 찾아야 하고, 사정에 따라 이들과 지배권력을 나누든지 또는 이들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주어야 한다.”(혁명사15-16) 엥겔스는 부르주아지가 맺는 동맹들이 반동적인 것이라고 못 박는다.(혁명사16)
반면에 엥겔스는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최대한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즉 1848년 이래 급속한 산업발달과 함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장했으며,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던, 노동자의 대표를 의회에 보내는 일을 독일의 노동자들이 해냈다”는 점을 강조한다.(혁명사17) 1874년에 이 2판 서문에 덧붙인 글에서는 독일 노동자들이 1870년의 전쟁으로 인한 시련, 특히 쇼비니즘의 광기에 동요되지 않고 전유럽의 노동자들의 해방이라는 목적을 지향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곤란한 시련을 받았으면서도 이처럼 훌륭하게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노동자는 어느 나라에도 없으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혁명사23) 나아가 엥겔스는 노동자들이 당국과 개별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에서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그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고용주와의 투쟁에서는, 이제는 노동자가 교육받은 계급이고 자본가는 무식한 얼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혁명사24)
엥겔스는 독일 노동자들이 다른 유럽 나라의 노동자들에 비해 두 가지 중요한 강점을 지닌다고 본다. 첫째, 그들은 유럽에서 가장 이론적인 민족에 속한다는 점이다. 엥겔스에 따르면 “현재 독일의 소위 ‘교육받은’ 계급이 완전히 상실해 버린 이론적 감각을 노동계급은 유지하고 있다. 독일의 과학적 사회주의−이제껏 존재한 유일한 과학적 사회주의−는, 그에 선행하는 독일철학, 특히 헤겔철학이 없었다면,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노동자들의 이론적 감각이 없었다면, 과학적 사회주의는 오늘날과 같은 그들의 피와 살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혁명사24) 둘째, 독일 노동운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운동을 발판 삼아 발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실수를 이젠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혁명사25)
이런 평가의 배경에는 1870년의 파리코뮌 경험과 독일 노동자 정치세력의 급속한 성장이 있다. 위 글이 나온 직후인 1875년 친정부 라살주의 성향의 전독일노동자협회(ADAV)와 맑스주의 성향의 사회민주노동당(SDAP)이 결합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SAP)이 결성된다. 1878년 비스마르크가 주도하여 만든 사회주의자 진압법에 의해 탄압을 받지만, 오히려 꾸준히 성장해 1890년에는 선거에서 20%에 접근하는 득표율로 제1당이 되고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폐기시키기에 이른다. 엥겔스가 독일의 노동운동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높이 평가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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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엥겔스는 1870년에도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련한 난제들을 명확히 지적한다. “프롤레타리아트조차도 1525년과 몇 가지 유사한 점을 보여 준다. 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임금에만 의존해서 생활하는 주민의 계급은 아직까지 독일 인민의 소수이다. 이 계급은 또한 동맹자를 찾아야 한다. 이 동맹자는 오직 프티부르주아지, 도시의 하층 프롤레타리아트, 소농 및 농업노동자 사이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혁명사17) 엥겔스는 이 가운데 프티부르주아지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본다. 또 룸펜프롤레타리아트는 동맹자들 중 최악의 동맹자로 매수당하기 쉬워서 “노동자의 지도자로서 이같은 시궁창 프롤레타리아트를 호위병 또는 지지자로서 이용하는 자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운동에 대한 배반자임을 증명하는 것”(혁명사17)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농업노동자들을 운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당대 독일 노동운동의 가장 긴급한 과제라고 본다.(혁명사19)
엥겔스는 농민전쟁과 1848년 혁명 실패의 주요 원인을 우선 중간세력의 배반에서 찾는다. “1848년 및 1849년에 도처에서 배반행위를 했던 계급 또는 계급분파는, 물론 한층 낮은 발전단계에서이지만 이미 1525년에도 배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혁명사27) 농민전쟁에서는 중간세력의 배반보다 귀족과 제후 등 봉건 지배세력의 체계적 배신이 좀 더 큰 문제였다. 즉 농민전쟁 발발 초기부터 봉건지배세력은 군사적 열세를 ‘철저한 배신과 비밀스러운 음모’로 만회한다. “이것이야말로 농민전쟁 전 기간 동안의 귀족과 제후들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이며, 분산된 농민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것이다.”(혁명사83) 이에 대응하는 혁명세력은, 그 지도자인 뮌처조차, “도대체 군사적 지식이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115)
무엇보다 농민세력의 분산은 가장 치명적인 패배 원인이었다. 이와 관련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지방적 영방적 분권화,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지방적 영방적인 편협성이 어떻게 운동 전체를 파괴시켰는가, 중간계급도 농민도 평민도 어떻게 집중된 국민적 행동을 취할 수 없었던가, 농민은 어떻게 각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행동을 취하고 항상 인근의 반란농민에 대한 원조를 거절하고 그 결과 개개의 전투에서 대개는 반란 농민 전체의 10분의 1도 못되는 군대에 의해 차례차례 격파되었던가−이러한 것들은 이제까지 서술하여온 바로부터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혁명사125) 엥겔스는 이러한 지역적 편협성이 1848년 혁명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혁명사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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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는 1848년 혁명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조직적 성장을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민전쟁을 이끈 뮌처의 선구적인 사상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그에 따르면 원시기독교적 천년왕국파 및 재침례교파의 학설을 흡수한 뮌처는 공산주의 개념을 어느 정도 명확히 정식화했고, “그 이후에 그것은 인민의 모든 대반란에서 나타났고 결국에는 서서히 근대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혁명사45) 또한 뮌처는 기독교의 형식 아래 범신론을 설교하였다. 그는 심지어 성서까지도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살아 있는 유일한 계시는 이성, 즉 모든 시대에 모든 인민 사이에 존재하는 계시이다. 이성에 성서를 비교하는 것은, 정신을 활자에 의해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말하는 성령은 우리들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성령은 우리들의 이성이다. 신앙이란 이성이 인간에게서 소생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이교도도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신앙, 즉 소생한 이성에 의해서 인간은 신과 같아지고 구제된다. 따라서 천국은 피안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구해져야 하며, 이 천국 즉 신의 왕국을 이곳 지상에 건설하는 일이 신자의 천직이다.”(혁명사53) 물론 뮌처 이전에 이미 수많은 이단자들이 종교의 외피를 쓰고 혁명 사상과 움직임을 만들어냈으나 좌절해왔다.(풍적수 한스, 분트슈, 아르멘 콘라트 등)
뮌처는 선교사로 활동하며 도시의 급진파들을 비롯해 곳곳에서 혁명세력을 길러냈다. 그의 정치강령은 공산주의에 접근해 있었는데, 엥겔스에 따르면 “근대 공산주의분파 중에, 2월혁명의 전야까지도, 16세기에 뮌처가 사용했던 것 이상으로 이론적 무기를 충실하게 구사한 분파는 단 하나도 없었다.”(혁명사54) 이로써 엥겔스는 생시몽, 오웬, 푸리에 등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의 원조들보다 앞서 독일에 공산주의의 전통이 세워져 있었음을 환기시키는 셈이다. 뮌처가 말하는 신의 왕국이란 “계급차별과 사유재산이 없는, 사회의 구성원에 대항하여 국가권력이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 사회상태였다. 현존의 모든 권력이 스스로 굴복하여 혁명에 가담하지 않는 한 전복시켜야 하고, 모든 노동과 모든 재산은 반드시 공유되어야 하며, 완전한 평등이 실현되어야 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기독교국의 구석구석까지 인민의 동맹이 결성되어야 했다.”(혁명사54)
그러나 뮌처는 군사적 지식의 결여 때문에만 아니라, 당대 사회의 제반 조건의 미비로 그러한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지 못한, 즉 시대를 앞지름으로써 태어난 비극적 인물인 셈이다. 이는 당시 황제 중심의 제국 통일을 추구하려던 후텐과 지킹엔 같은 귀족 기사들이 이미 시대에 뒤처짐으로써 겪는 비극과 대조된다. 맑스와 엥겔스는 1857년에 라살이 보낸 [프란츠 폰 지킹엔]에 대한 비판에서 이 점을 명확히 한다.
한편 종교개혁의 중심인물로 추앙받아온 루터에 대한 엥겔스의 평가는 매우 냉정하다. “루터는 1517년부터 1525년 사이에, 오늘날 독일 입헌주의자들이 1846년부터 1849년 사이에 겪었던 것과 동일한 변화를 겪었다. 이 변화란 모든 중간계급적 당파가 얼마동안은 운동의 선두에 서서 나아가지만, 그들의 배후에 서 있던 평민적 프롤레타리아적 당파에 의해 압도당한다는 것이다.”(혁명사46) 루터의 성서 번역은 평민들의 운동에 강력한 무기를 제공했지만, 작센 제후의 비호를 받으며 하룻밤에 유명해진 그는 중간계급과 귀족 및 제후의 편에 가담해, “농민의 반란뿐만 아니라, 성속의 권위에 대한 루터 자신의 반항까지도 부정하였다”.(혁명사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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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전략가의 부재, 지역적 편협성, 봉건지배세력의 체계적 배반 등으로 인해 농민전쟁은 수많은 농민들의 희생을 초래한 후 제후들에게만 유리한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농민들이 진압된 후 30여년의 종교분쟁을 거친 후 400에 달하는 제후들은 자국의 종교를 결정할 권한을 얻는다. 또 그들은 황제와 무관한 외교권을 사용하여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반민족적인 정책도 마다지 않는다. 필요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다른 제후국과 맞서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유럽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충돌이 독일 땅에서 벌어진다.(1618~1648년의 30년전쟁) 그 결과 독일 땅은 초토화된다. 페스트가 만연하고 인구 및 생산력은 중세초기로 격감한다. 특히 농민전쟁이 직접 전개되지 않은 프로이센 지역에서는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더욱 극성을 부린다. 농민전쟁의 실패는 19세기까지 독일의 후진성 내지 독일적 참상을 규정한다.
엥겔스가 저주의 말씀을 퍼부은 부르주아지의 운명은 아직 불확정상태다. 언제까지 위기를 넘기며 그 생명을 구가할지는 예측이 어렵다. 또 그가 혐오한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매수당하기 쉬운 속성은 어찌 보면 근로대중 전체에게 퍼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의 모습은 엥겔스가 1870년대에 목격한 고무적인 기운과 분명 거리가 있다. 그러나 엥겔스가 지적하는 계급관계와 각 계급들의 속성들은 오늘의 운동에서도 충분히 참조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특히 선구적 지식인 뮌처의 행적과 사고, 그리고 오늘날의 힘없는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던 1500년대 독일 농민들의 처참한 모습, 그럼에도 끈질기게 들고 일어났던 그들의 봉기를 목격하면서도 피가 끓지 않는다면 혹시라도 자신이 이미 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