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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투스(IXΘΥΣ)
요한복음 21:11
여러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이론은 다름 아닌 제롬의 친구인 어거스틴이 주장하였다. 그는 153이란 1에서부터 삼각형의 수인 17 사이에 있는 모든 수를 더한 합계임을 알아차리고 이 문제를 수학적인 해법으로 풀어나가는 분야를 개척하였다. (만일 1에서 17까지의 수를 한 줄에 한 가지씩 점으로 찍어 나타내면, 그 모양을 삼각형을 형성한다, Hoskyns' diagram, 553). 어거스틴은 17=10+7 이라는 계산법을 제시했다.
10은 십계명을 상징하고, 7은 하나님의 칠 배의 영이다(Tract. in Jo., 122). 좀더 단순하게 10과 7은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중요한 숫자였다. Pirqe Ἀbot 5:1-9에는 10이 나타나는 신성한 역사의 기록들에 대한 목록이 나타나있다. 즉 10개의 말씀으로써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이고,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10대이다. 아담은 10가지 고난으로 시험을 받았고, 애굽에서는 10가지 재앙이 내려졌다. 바닷가에서 10가지, 지성소에서 10가지 기적이 일어났다.
10-11절은 계속해서 일곱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곱 가지 일이 무식한 자와 관계있고, 일곱 가지 일이 지혜자와 관련되어 있다. 일곱 가지 죄를 범한 세상에 일곱 가지 종류의 형벌이 내려진다. 형벌과 범죄는 항목별로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그랜트는 153이란 숫자가 구성 요소로부터 의미가 파생된 상징이라고 보았다. 두 개의 신성한 숫자의 합계인 17이 삼각형으로 이루어질 때 그 중요성은 더욱 증가한다. 이러한 점에서 153은 완전함에 대한 수적 상징으로 추론되었고, 여기에서 완전함은 교회의 완전함을 가리켰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수학적 의미에 그 숫자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을 추가했다. 153=3x50+3. 3은 삼위일체의 수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은 그 공식을 약간 수정하여 100은 이방인의 충만함을 상징하고, 50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그리고 3은 삼위일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In Jo. Ⅻ: PG, 74, col. 745).
듀츠의 루퍼트(Rupert of Deutz)는 이 개념을 가정에 대입시켰다. 100은 결혼한 사람을, 50은 과부를, 그리고 3은 처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Brown, 2:1075) 이러한 의견들은 현대인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인들도 매력을 느끼는 gematria라는 신비적인 방법이 있다.
Gematria란 geometry(기하학)에서 파생된 용어이지만 언어학의 분야에서 사용된다. 그것은 각각의 알파벳이 특정한 수를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예를 들면 a=1, b=2, c=3 등등). 헬라어와 히브리어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각 알파벳이 수를 상징한다. 따라서 어떤 이름(혹은 단어)이든지 알파벳의 총계를 낼 수 있고 그 숫자로 어떠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
다이스만(Deissmann)은 폼페이의 유적 벽에 그려진 그림에서 “나는 이름이 545인 소녀를 사랑한다”는 글을 예로 인용했다(Light from the Ancient East, 276). gematria를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예는 계시록 13:18에 666으로 기록된 적그리스도의 숫자이다. 사용된 알파벳의 수를 더해 666이 되는 이름은 무수히 많은데, 가장 그럴듯한 후보로는 히브리어로 쓰인 네로 황제(Nero Caesar)라는 이름이다. 아마 이것은 유대의 묵시 문화권에서 처음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에머튼(J. A. Emerton)은 153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들의 약점을 인식하고서 이와 같은 방법을 해결책을 강구했다. 그는 에스겔 47장 가운데 특별히 10절이 요한복음 21장 저자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은 사해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 강에 고기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 어부들은 강가에 설 것이고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들의 그물을 칠 것이다.
히브리어 엔(עו)은 “샘”이란 뜻이다. 알파벳의 수를 합하면 게디(דיגּ)는 17을 에글라임(עגליס)은 153이 된다.이 두 가지 숫자는 수학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에머튼은 예언에 따라 물고기의 숫자를 어부들이 서서 메시아 시대의 완성 때에 그들의 그물을 치는 장소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The Hundred and Fifty-Three Fishes in John ⅩⅪ. 11.” 86-89).
아크로이드(P. R. Ackroyd)는 에머튼의 견해에 따랐다. 그는 에스겔 47장에서 암시하고 있는 장소 이름은 헬라어로 기록해보면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옮기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70인역이 택한 것은 엥가디(ηγγαδι)=33와 아갈레임(Ἀγαλλειμ)=120인 것을 주목했다. 두 수를 합하면 153이 된다(“The 153 Fishes in John XXI. 11 - A Further Note,” 94). 에머튼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크로이드가 인용한 두 개의 음역이 각기 다른 70인역 사본에서 이끌어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본도 두 가지를 동시에 제공해 주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히브리어 본문에서 제공된 17과 153 사이의 관련은 헬라어 본문에서 사라져 버린다(“Gematria in John XXI. 11,” 335-36). 따라서 그는 히브리어 본문에 기초하여 자신이 맨 처음 내놓은 견해를 고수했다.
이 외에도 gematira에 근거하여 153을 설명하려는 학자들은 여러 명 있었다.
크루스(H.Kruse)는 두 가지 가능한 설명을 내놓았다. 하나는 칼 하아하바(קחל חאחבח) “사랑의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브네이 하엘로힘(בני חאלחיס) “하나님의 자녀들”이다(“Magni Pisces Centum Quinquanginta Tres,” 143-47). 그는 전자가 이미 아렌츠(D. R. Ahrendts)에 의해 주장된 것임을 알지 못했다(ZWT 41[1898] 480).
또한 로메오(J. A. Romeo)는 동일한 방법으로 연구하여 독자적으로 후자를 주장했다(“Gemaria and John 21:11,” 263-64). 크루스는 첫 번째 설명을 더 좋아했지만, 그러한 표현은 요한의 저술 가운데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로메오는 후자의 설명에 집착하여 그것을 옳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 표현은 요 1:12와 11:52에 나타나며 그가 보기에 그 본문들은 21:1-14의 문맥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맥클레니(N. J. McEleny)는 그가 “Gematriachal Atbash”라 칭한 것에 기초하여 이보다 좀 더 복잡한 설명을 제시했다. Atbash란 알파벳 순서를 뒤집어 놓음으로써 단어에서 글자들을 재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영어의 예를 든다면, z는 a로, y는 b로, x는 c로 읽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에 이런 종류의 바꿔쓰기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이에 대한 예는 바벨을 세세크[דשׂשׂ]로 기록한 렘 25:26; 51:41에 나와 있다).
gematria가 “atbash”에 적용되면 z는 1을 의미하고, y=2, x=3을 가리키게 된다. 이런 원리 위에서 매클레니는 ΙΧΘΥΣ(익투스)의 단축형인 ΙΧΘ가 153의 값을 지닌다는 것을 발견했다. 익투스(ΙΧΘΥΣ)는 이미 널리 아려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Θεοῦ υἱὸς σωτήρ-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의 머리 글자를 모아놓은 말이다. 맥클레니는 단축형인 ΙΧΘ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요한복음 21장의 저자는 부활하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gematriachal atbash라는 방법에 따라 머리 글자의 형태로 감춰두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던 것과 무덤에서 일어나신 것을 목격한 자들은 물고기의 상징 아래에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동일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53 Great fishes [John 21:11] …,” 413-17).
맥클레니가 아무리 그런 예를 제시했더라도 요한복음 21장의 저자가 이 같은 종류의 난해한 저술을 기록했으리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런 설명은 일반적인 복음서 독자가 이해하기는 너무 복잡하고, 현대 학자들 대부분도 특별한 비결을 전수 받지 않고서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리시(M.Rissi)는 요한복음 21장에 관한 논문에서 위의 모든 주장들을 배제하고, 다
음과 같은 단 한 가지의 전제만으로도 고기잡이 기적을 이해하는 데에 단서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153이 17의 삼각형 숫자라는 것이다. 1-14절의 이야기와 요한복음 6장의 많은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 사이는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6장의 기사에서 빵 다섯 개는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12 바구니가 남을 정도로 많아졌다. 5+12=17. 따라서 153이란 숫자는 사역 기간에 많은 사람을 먹이신 기적과 부활의 기적을 이어주는 다리를 놓아주며, 전자에 깃들여 있는 신학적인 중요성을 후자에 전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고대 시대에 물고기는 다산과 생명, 그리고 불멸의 상징이었다. 성만찬에서 옛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먹었다면, 빵과 물고기를 먹는 것은 그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고, 주님의 죽음 이후에 그와의 교제를 다시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21장의 성만찬 식사는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념하는 것이다(“Voll grosser Fische…,” esp. 81-86).
이것은 이야기의 신학적 중요성을 공정하게 파악하려 하는 실제적인 해석이다. 21장의 이야기에 내포되어 있는 성만찬적인 요소에 대한 설명은 앞에 제시된 해석과 실제적으로는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과의 관련은 이야기 자체 내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시가 큰 고기를 잡은 표적을 공정하게 다루었는지, 그리고 그가 두 가지 주제를 단일한 이야기에 결합시키려 하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주님께서 해변에 나타나신 것은, 많은 물고기를 잡도록 기적을 베푸심으로써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지만, 지나치게 성만찬적 현시(現示)라는 측면으로만 몰고가지 말아야 한다. 그처럼 두 개의 주제가 결합될 때 상징 사이의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즉, 본문에는 교회가 민족들에게 성공적으로 선교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많은 고기를 끌어올리는 장면과 성만찬적 식사에서 빵과 더불어 물고기를 주는 모습이 함께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비유들의 상징 속에서 일관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구약과 신약의 예언자들이 말한 성만찬적 소망에 관한 묘사에서는 더더욱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요 21:1-14의 복합적인 진술 속에서 드러나는 그와 같은 모습들에 크게 마음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리시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많은 물고기를 잡는 표적 속에서 “기독교 선교의 확장과 보편성”에 대한 상징도 발견할 수 있다(Brown, 2:1075). 그랜트(Grant)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롬의 의견을 완전히 기각해야 한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단지 오피안(Oppian)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저자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그들의 작품은 사복음서보다 한 세기 후에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물고기의 종류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153에 상당히 근접한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고대의 작품이 제롬이 말한 고기의 종류에 관한 유사한 전승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 때까지 우리는 153의 비밀을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표적의 위대함에 관한 증언을 받아들여야 한다. <WBC주석 >
물고기 153 마리(요21:11)의 의미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끌어올리니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요 21:11).
요한복음 21장에는 베드로가 잡은 고기가 백쉰세 마리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왜 153마리를 잡았다고 굳이 그 숫자를 밝히고 있을까요? 그 의미는 무엇인가?
Ⅰ. 요한복음 21장에 물고기에 대한 표현이 각각 다릅니다. *5절에서는 '고기’(프로스파기온), *6절에서는 '물고기'(익투스) *9절에서는 '생선'(옵사리온)이라 표현되어있고 헬라어로도 각기 다르다. *프로스파기온은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하는 생선. *익투스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나오는 일반적인 생선. *옵사리온은 말린 생선, 또는 작은 생선. |
Ⅱ. 이 153이라는 숫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1. 아르메니아의 히에론(Hieron : 300년) 그는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 153은 인류 전체의 인종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2. 유고슬라비아의 제롬(Jerome : 345-419) 바다 안에는 153종류의 물고기들이 있다. 그물은 교회를 의미하고, 153마리의 물고기는 구원받게 될 모든 인류를 의미한다는 것. 3. 북아프리카 누미아의 어거스틴(Augustine/Augustinus: 354~430년) *10은 10계명(출 20:2-17;신5:6-21)상징, 율법의미, *7은 은혜(롬12:6-8)를 의미. *율법수 10 + 은혜수 7 = 17. ※ 1에서부터 17까지 차례로 더하면(1+2+3+4+5...+17) 153. 따라서 153은 율법든 은혜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의 숫자로 봄 4.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Cyrillus/Cyril: 380~444년) *153이라는 숫자 - 100 + 50 + 3의 세 단위로 조합된다. *100-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이방인들의 완전한 충만수. * 50-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될 유대인 남은 자들 상징. *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153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될 완전수를 상징한다는 것. 5.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153은 수학에서 'Triple Cube Number'라고 부르는 수이다.153이란 숫자는 *1의 세제곱 ----- 1 - 가장 작은 단위의 공간 즉 개인(1인) 지칭하는 상징 *5의 세제곱 -----125 - 중간 규모의 구원 대상이다 가정 ,무리등 상징. *3의 세제곱 ----- 27. 합의 숫자 153 -큰 규모의 구원대 민족, 나라등 상징 세제곱이란 가로 세로 높이 곱한수 공간, 즉 하나님이 임재하신 공간을 의미 6.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아들들'(베니 하 엘로힘)- 게마트리아 합 153이다. *신학자마다 해석이 다르고 많은 주장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모든 인류의 숫자를 상징한다 Ⅲ. 익투스의 의미 그리스어로 익투스는 물고기라는 뜻. 대문자(IXΘγ∑-> IXΘUS)로 쓰면 기독교의 중요한 의미가 된다. * 예수(Iησουζ,이에수스), * 그리스도(Xρτστοζ,크리스토스), * 하나님(θεου,데오스), * 아들(γιοζ,휘오스), * 구세주(∑ωτηρ,소테르)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시다. |
결론
그러나
어떤 사례이든 주장의 근거가 극히 부분적이기에
153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숫자로 여기는 것이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 참고자료
물고기는 헬라어 익투스(IXΘΥΣ)로 1세기 로마의 카타콤(Catacombs)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고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되었다. 초대 교회 시대에(주후64년부터 250년간) 로마는 교회를 향하여 큰 박해를 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서로의 신분을 은밀하게 밝히기 위하여 물고기를 나타내는 그림을 그려 보이거나 물고기 모형의 조각품을 소지하고 다니기도 했다.
한 그리스도인이 물고기의 반을 그려 놓으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절반을 거기에 그려 넣음으로써 서로가 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카타콤은 공동묘지의 역할과 함께 일종의 지하 도시로서 외부의 침략에서 은신할 수 있는 미로였다. 미로에서 길을 찾는 표식이 바로 물고기 모양이었다. 물고기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장소를 찾아 왔다.
물고기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된 것은 성경의 사건들(요6:1-13,21:1-13;마17:24-27)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세주’라는 그리스어의 첫 글자를 따서 모으면
[ 예수(Iησους, 이에수스),
그리스도(Xρτστος,크리스토스),
하나님(θεου,데우),
아들(γιος,휘오스),
구세주(∑ωτηρ,소테르) ] -> 그리스어로 익투스(IXΘγ∑-> IXΘUS)라는 단어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