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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63. [역경의 열매] 주철기 (1-14) ‘공의가 마르지 않는’ 세상 위해 인생 2막
청운의 꿈을 품고 시작했던 외교관 공직생활을 마친 것은 2006년 말이다. 그해 12월까지 한국·프랑스 수교 120주년의 마지막 문화행사를 주재하고 귀국한 지 4일 만에 퇴임식을 가졌다. 참석한 동료와 후배들 앞에서 34년간의 공직생활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외교관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근무해 온 자부심, 그리고 은퇴 후에 무엇을 할지는 모르나 어떤 부문에서든 나라와 외교를 위해 돕겠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난다.
그간 폭주한 업무 속에서 퇴임 이후를 구상하기는 어려웠다. 은퇴 후 수개월은 다소 방황의 시간이었다. 갑자기 길어진 하루를 보내기 위해 여기저기 도서관도 찾아다녔다.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데 할 일이 없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60세 이후 삶의 소명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해 2월 출석하고 있는 사랑의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담임목사님은 장로 직분에 피택됐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순간 돌아가신 어머님 모습이 떠올랐다. 원주 중부장로교회의 종신권사이셨던 어머니는 기도의 여인이었다. 일찍 돌아가실 것을 아셨는지 자녀들을 위해 하루 세 번 정해 놓고 기도하셨다. 어머님은 내가 사역자의 길을 가기를 원하셨으나 나는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어머님이 천국에서도 아들의 장로 피택에 기뻐하실 모습을 연상하며 그 자리에서 직분을 받겠다고 말씀드렸다.
이후 하나님은 다시 두 가지 일을 허락하셨다. 하나는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직이었으며 또 하나는 유엔글로벌콤팩트를 창설하고 그 협회를 이끄는 것이다. 유엔글로벌콤팩트는 유엔과 기업이 협력해 기업이 인권, 노동권, 환경 존중 및 부패방지를 잘해 국제개발에도 기여하자는 운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운동의 출범이 늦어지다가 외교통상부와 유엔개발계획(UNDP)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설립에 앞장섰다. 수개월간 회사를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뜻있는 분들과 함께 출범, 지금은 187개 회원사가 참여하는 조직이 됐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아모스 5장 24절의 말씀을 떠올린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돼 기쁘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와 경제개발, 그리고 문화 창달까지 이룬 나라가 되었고 이제 가치를 세련되게 다듬을 수 있다면 세계를 영적으로 주도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런 가운데 2008년 5월에는 중국 옌볜과기대를 방문했다. 투먼에서 두만강 물을 만지며 북한의 고통받는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고, 백두산 천지에 올라 북한의 변화와 한민족이 복음으로 하나 되는 일을 위해 쓰임 받기를 기도드렸다. 이북 출신인 나는 북한의 교회 재건과 특히 어머님이 다니시던 원산교회의 재건을 기도하고 있다. 유럽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주로 근무했던 경력으로 유럽 재복음화를 위해서도 기도 중이다. 아프리카 니제르를 단기선교차 방문했고 현지 선교사를 도와 복음전도의 시간도 가졌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의 어떠한 지식보다 깊고 높기에,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더 아는 공부를 시작하고 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 [역경의 열매] 주철기 (1) '공의가 마르지 않는' 세상 위해 인생 2막
* [역경의 열매] 주철기 (2) 신앙 굳건한 부모님 밑에서 믿음 쌓아
* [역경의 열매] 주철기 (3) 큰형 부도로 돈 잃었지만 우애 지켜내
* [역경의 열매] 주철기 (4) 대입낙방 재수 통해 겸손과 끈기 배워
* [역경의 열매] 주철기 (5) 프랑스 연수 2년간 매일같이 성경공부
* [역경의 열매] 주철기 (6) 약소국 위상 높이려 가족도 외교 전선에
* [역경의 열매] 주철기 (7) 리비아와 수교위해 치열한 외교전
* [역경의 열매] 주철기 (8) 코스타리카 전보 가정교회 열어 예배
* [역경의 열매] 주철기 (9) 당시 반기문 과장의 실력·인품에 반해
* [역경의 열매] 주철기 (10) 냉전기 국제외교 중심에서 담대하게 행동
* [역경의 열매] 주철기 (11)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 통해 새로 태어나
* [역경의 열매] 주철기 (12) 포르투갈서 남북 대사관 하나돼 협력
* [역경의 열매] 주철기 (13) 아내 혈소판감소증 투병 기도로 완치
* [역경의 열매] 주철기 (14·끝) 유럽·아프리카 선교위해 여생 보낼 것
◇주철기 전 대사=1946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서울대, 벨지움자유브루셀대, 프랑스국제행정대학원 졸업,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주제네바 차석 대사, 주모로코·모리타니 대사, 주프랑스 대사 겸 유네스코 대사 역임, 현재 유엔글로벌콤팩트 부회장 겸 사무총장, 웨일즈복음주의신학교 이사
***[역경의 열매] 주철기 (2) 신앙 굳건한 부모님 밑에서 믿음 쌓아
나는 1946년 이북 원산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명사십리 바로 옆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주병온은 함흥 출신이었고, 공부를 잘해 집안의 희망이었다. 평양의 평의중학을 다니실 때 큰아버지 한 분이 같이 가셔서 물장수를 하면서 아버님 학비를 댔다. 어머니는 흥남 출신으로 일찍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다. 손위 누님을 일찍 여의면서 어머니는 다음 아기가 잘 자라면 목회자로 키울 것을 기도했고 나는 원산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북한 상황이 변해 아버지가 먼저 남쪽으로 피신하셨다. 이후 어머니는 형과 세 살 난 나를 끌고 갓난 동생을 업고 임진강을 건너 월남했다. 남쪽에서 아버지를 찾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동생을 등에 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나를 오른손으로 끌고 형은 쌀자루를 메고 걷는 피란민이었다.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무너진 동회 건물 안내판에서 아버지가 남긴 주소를 찾아다녔다. 결국 충청도 어느 절 마당에서 “아버지” 하고 부를 때 아버지께서 문을 여시던 장면은 지금도 영화처럼 떠오른다.
우리는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피란생활을 했다. 무너진 집에 머물면서 쇠고기무국을 국군이 나누어주어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국군 사망자의 시체를 많이 봤는데 결혼한 이후에도 한동안 자다가 전투하는 꿈을 꾸며 진땀을 흘렸다. 6형제 중 나만 키가 작은 편인데, 6·25 전쟁 때 어린 나이에 수천리를 걸어 다녀서 그렇다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듣곤 했다.
부모님은 강원도 원주에 정착해 천일사라는 잡화점을 하며 당시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외가 친척들은 흥남 철수 작전 시 모두 배를 타고 나와 거제도 수용소로 갔다. 외가 역시 모두 원주에서 터전을 닦았다.
친가 쪽은 대부분 서울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신 일이 없는 온화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외가 어른들과 함께 원주에 야학을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성화여중고를 창설해 이사장을 지내셨다. 교회에서는 집사로 섬겼는데 어머니의 강력한 교회 봉사를 늘 조용히 도와주셨다. 당시 우리는 원주제일장로교회에 출석했다.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에 나갔고 주일학교에서 찬양과 성경을 배웠다.
어렸을 때 당시 세계 장로교 분리에 따라 교회도 둘로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다. 보수 신앙을 따른 부모님은 신앙 노선을 같이한 사역자 및 성도들과 함께 나와 우리 집 별채에서 교회를 새로 시작했다. 원주중부장로교회였다. 이후 집 앞에 교회를 새로 건축했고 집은 교회 마당처럼 쓰였다. 집에 큰 솥을 몇 개씩이나 걸어놓고 애찬 행사 등에 항상 사용했다.
어머니는 중보기도와 봉사와 헌금으로 교회를 성심으로 섬겼다. 신학생들의 학업도 많이 도운 것으로 안다. 어머니를 따라 심방도 가고 크리스마스 새벽송도 도는 등 순전한 어린 시절 신앙생활을 했다. 행복했다. 전쟁 통에서도 가족이 다시 만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좋은 교회와 물질적 안정을 주셨던 것들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어찌 우리 가족뿐이었겠는가? 민족의 시련 속에 수많은 실향민이 있었다. 그들은 남한에서 새 출발을 했고 강한 의지로 재기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가 원주의 성냥공장을 인수했는데 사업이 확장되면서 어려움이 따랐다. 게다가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게 된 이모부와의 불화도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3) 큰형 부도로 돈 잃었지만 우애 지켜내
우리 형제들은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집이 동대문 근처라 동신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 아버님은 나의 서울중학교 입학시험 소집일에 나를 학교로 데려가시다가 다쳐 다리를 절게 되셨다. 만원버스에서 미처 못 내린 나를 부르며 버스를 따라 뛰시다가 다치셨다. 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버님은 또 큰 성냥공장을 인수하셨는데 여러 번 화재가 발생해 어려움을 겪으셨다. 거기에다 아버님은 성화여고 재단에 들어간 재산 환수 문제로 노심초사하셨다. 이는 결국 아버님이 1973년 돌아가시는 원인이 됐다. 갓 결혼해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던 큰형이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도우려 내려갔지만 아버님의 크나큰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어머님은 믿음의 여장부로 반석같이 의연한 분이셨지만 아버님 돌아가시고 2년 만에 작고하셨다.
나는 프랑스 연수 중에 돌아와 장례를 치러야 했다. 6형제는 남았지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이 늘 마음 아팠다. 이런 가운데 학교의 교장이었던 친척 어르신과 큰형 간에 재산 문제로 법정 소송까지 가게 됐다. 친척 간에 재산 관계로 싸움이 나니 집안끼리 대립하게 됐다.
큰형은 청년상공회의소장도 했었는데 분쟁이 계속되면서 교회 출석도 안 하게 됐다. 또 당시 분위기 속에서 술도 많이 마셨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중부장로교회가 시작됐던 우리 집 사랑채 자리가 언제부터인지 대형 술 배달 유통 창고가 되어 있었다.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못 꺼내고 속으로 애만 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큰형이 미국에 나타났다. 재판에서 이겼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든 것을 잃고 부도가 나 미국으로 피신해온 것이었다. 술에 찌들어 고통 받는 형의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후 형은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친구의 안내로 기도원에 들어가 눈물로 회개하고 새사람의 길을 걸었다.
LA 흑인지역 시장 슈퍼의 종업원으로 시작해 교회를 섬기며 재기의 길을 걷는 것을 봤다. 미국에서 귀국하려 하자 국내에서는 내가 형을 빼돌렸다고 벼르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예 딴 나라로 전근 가라고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담담하게 귀국했다.
이후 형님 앞 연대보증으로 피해를 본 친척의 잇단 항의를 받았다. 나는 동생들과 협의해 급한 대로 자금을 모아 피해 가정에 전달하면서 급한 불을 껐다. 나 역시 몇 년 이상 대출금을 갚느라 고생했지만 집안 평화를 회복할 수 있었다.
큰형은 신앙의 연단기를 크게 겪고 현재 LA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현지 교회 안수집사로 오래 섬겼으며 온 가족이 예수를 잘 믿고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돈이 만사가 아님을 배웠다. 재산 때문에 형제나 친척 간에 싸우기보다 버리는 것이, 또 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며 평화의 길임을 배웠다. 형제 친척 간 갈등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녹아지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현재 우리 형제들은 사업가와 교수, 변호사 등을 하면서 연단을 거쳐 살고 있다. 주위에서는 어머니의 하루 세 번 기도의 결과라고 한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역경의 열매] 주철기 (4) 대입낙방 재수 통해 겸손과 끈기 배워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마침 외삼촌이 원주에서 서점을 운영하셔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곳으로 달려가 책을 읽거나 빌려 보았다. 푸르타르크 영웅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삼국지, 슈바이처 전기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앞으로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에서 슈바이처와 같이 선교사로 봉사하겠다는 비전을 키웠다. 그와 같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어머님도 그런 뜻을 좋아하셨다. 그러나 나의 사춘기는 놀기에 바빴다. 역사와 국어는 좋아했으나 수학 성적은 날로 떨어졌다. 학교에서는 그래도 서울대 의대에 입학원서를 써주었다. 결과는 나를 포함해 많은 동급생이 입시에 실패하였다. 수학이 문제였다.
처음 맛본 인생의 실패였다. 소위 명문 입시학원에도 응시했으나 또 떨어졌다. 나는 철저히 부서졌다. 이후 다른 학원을 찾아 맨 앞자리에 앉아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다. 새로운 각오로 시작했고 수학 실력도 조금씩 향상됐다. 배움에 성실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가운데 나의 미래는 의사보다 역사학과 신학을 겸비한 쪽이 아닌가 싶었다. 결국 한국의 토인비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해 입시에서는 서울대 사학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졸업 후 신학대학에 갈 생각으로 종교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동숭동 낭만 시절 2년 만인 1967년 군에 입대했다. 곧 이어 청와대 테러 침투 사건과 울진·삼척 공비 사건이 터졌고 이 바람에 훈련 강도가 심해졌다. 복무기간도 36개월로 늘어났다. 그 무렵 목 뒤 종기를 치료하려다 무심코 부대 의무병에게 페니실린 주사를 맞았다가 쇼크가 일어나 죽을 뻔한 적도 있다. 군의관도 없을 때라 민간 병원에 택시로 실려가 5시간 동안 치료를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절제 없던 생활에 대한 징계가 아니었는지 싶다. 군에서 사회적 경험을 겪으며 앙드레 말로와 카뮈, 베르그송 등의 영향을 받으며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행동하는 지성인은 외교관과 연결됐다. 만주를 누비며 통일을 위해 뛰는 모습을 그렸다. 유엔을 통한 세계평화 기여의 꿈도 그렸다.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크게 실망하셨다. 어머니는 기도해보자고 하신 후 기도 응답을 말씀하셨다. 아들에게 주신 비전이 다른 것 같고 외국을 많이 다니게 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복학 후 역사 공부는 게을리 하고 고시 공부에 열중하면서 교수님의 꾸지람도 들었다. 갑작스런 진로 전환이라 물어볼 선배도 부족해 나름대로 준비해나갔다. 72년 시험을 앞둔 마지막 두 달은 낙산의 고시연구원에 들어가 매일 연탄가스를 마시며 공부했다. 시험 당일 첫 번 문제를 대할 때 눈앞이 캄캄했으나 끈기로 끝까지 버텼다. 시험 때 매 시간 기도드렸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보니 첫 시간 성적이 제일 나빴고 점차 좋아졌다.
얼마 후 친구가 찾아와 시험에 합격한 것을 알려주었다.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날아갈 것 같았다. 부모님께서도 기뻐하셨다. 그해 8월부터 나의 외교관 생활은 시작됐다. 대학입시 실패가 나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었고, 성실하면 보답이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 군 생활은 참을성을 길러 주었다. 좋은 이상을 품으면 바람직한 열매를 맺는다. 인생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께서 늘 새로운 길, 회복의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5) 프랑스 연수 2년간 매일같이 성경공부
초년 외교관 생활은 바쁘게 지나갔다. 1974년 해외 연수를 갈 때가 됐다. 당시 우리나라 사정이 좋지 않아 외국 정부 초청에 한해 해외 연수를 할 수 있었다. 나는 프랑스 정부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외교부 동료 이경우 강광원 사무관과 함께 파리로 떠났다. 그때 비행기를 처음 타봤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환경과 그림 같은 건물, 특히 루브르 박물관은 경이로웠다.
국제행정대학원(지금의 ENA)에서는 2년간 재미있게 공부했다. 당시 한국은 국민소득 280달러 정도로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와 같은 수준이었고, 학교에서는 한국이 섬유 등 경공업을 일으키려고 애쓰는 나라 정도로 가르쳤다.
그때는 공무원이나 교포 모두 어려웠다. 당시 재불 한국인은 프랑스 전역에 400여명뿐이었다. 한국식당도 겨우 하나 정도 있었고 한인 교회는 아예 없었다. 연수 떠나기 이전에 나는 직장 친구의 소개로 대학생 성경공부 모임인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에 나갔다. 파리에 갈 때도 UBF의 기도 후원을 받고 떠났다. 기숙사에서 매일 성경공부를 하며 같이 간 친구들에게 성경공부를 하자고 조르곤 했다.
불경 테이프를 즐겨 듣던 친구는 “와이라노, 이거. 내가 이곳에 공부하러 왔지, 성경 배우러 왔나” 하며 신경질을 냈다. 그랬던 친구가 지금은 그리스도의 좋은 제자가 되어 기도의 동역자로 전도에 힘쓰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파리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프랑스의 압도적인 문화에 흡수돼갔다. 프랑스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과 예술 작품이 가득했다. 나는 한마디로 인본주의의 극치를 맛보고 있었다. 프랑스는 동시에 20세기 초반 종교와 정치의 분리 이후 극심한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 또한 그 세속화에 편승,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며 파리가 주는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 무렵 UBF와의 관계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국인 유학생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연수원 대우도 좋아졌는데 아프리카 방문차 파리를 경유하다가 외교관 연수생들의 초라한 생활을 전해들은 당시 김동조 외무장관의 지시로 환경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외국 정부의 장학금이 아닌 한국 정부의 자금으로 연수생들을 보냈다. 대한항공이 파리에 취항을 시작할 무렵 나는 파리를 떠날 때가 다가왔다. 프랑스어도 많이 늘었고 유럽 학생들과 비교하면서 실력 면에 자신이 있다고 느꼈다. 별도로 파리1대학에서 역사 공부도 하면서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 외교관들과 사귀기도 했다.
귀국한 때는 76년 봄으로 나는 곧바로 아프리카 관련 업무를 시작했다. 그 무렵 친지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앳되고 순수하고 매력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고 그날부터 매일 만나며 서로를 알아 갔다. 아내는 처음에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이야기할수록 당당하고 성실한 모습이 좋아졌다고 한다.
나는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하자고 했다. 외교관들은 보통 짧은 만남을 통해 결혼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모험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인연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렇게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돼 북아프리카 튀니지 3등 서기관으로 발령이 났다. 프랑스로 다시 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76년 8월 튀니지의 튀니스 공항에 도착했다. 아프리카 최북단이었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6) 약소국 위상 높이려 가족도 외교 전선에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기후도 좋았다. 그러나 여름은 더웠다. 사하라 사막의 열풍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살림은 서민촌 아파트에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냉장고도 없이 두 달을 지내야 했다. 동네 가게에서 우유를 사 먹고 일주일 동안 설사를 하는 것으로 튀니지 생활을 시작했다.
튀니지는 겨울에는 난방을 해야 했다. 기술자 부족으로 공관이나 대사관저 보일러가 고장이라도 나면 긴급 대처가 어려웠다. 고장난 통신장비를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안간힘을 썼고 또 중지된 보일러를 만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가 이공계 출신이 아닌 것을 한스러워했다. 시간이 가면서 미국대사관 영선반장의 도움을 받거나 유능한 현지 기술자를 찾아 문제들을 극복했다.
공관원 5인 가족 외 교포는 정부 파견 의사를 포함해 2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작은 곳에서는 끈끈한 이웃관계도 생기지만 갈등도 쉽게 생겼다. 생소한 곳에 정착하면서 외교관 가정에는 다양한 어려움이 닥칠 수 있어 늘 조심해야 한다.
튀니지는 동양 사람이 거의 없어 집을 나설 때마다 ‘관심’을 받았다. 아내의 경우 동네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옆으로 찢어진 눈을 흉내 냈다. 동네 아이들은 어지간히 우리가 신기했었나보다. 아내는 내 염려와는 달리 개의치 않고 다녔다. 동네 아이들은 아파트 문과 계단에도 고무줄을 설치해 놓고 당황하는 우리를 보며 재미있어했다.
최근 튀니지는 재스민 혁명으로 중동 민주화의 시발점이 됐지만 70년대에도 저항의 목소리가 존재했다. 당시 부르기바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한 저항으로 큰 소요가 발생해 비상사태가 선포됐었다. 수상한 테러용의자 차량을 공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는데 마침 큰아이가 고열이 심해 해열제를 사야 했다. 나는 무장군인들에게 통사정을 하며 바리케이드 몇 개를 통과했지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 돌아와야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그 테러리스트 차량이 내가 탄 차와 같은 흰색 푸조 303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하마터면 위험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튀니지는 하루에 다섯번 모스크의 기도 신호가 나오는 이슬람국가다. 그러나 교회도 존재한다. 우리는 튀니스의 개신교국제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는 정부가 허용한 유일한 교회다. 교포 몇 명도 그곳에 나왔다. 결혼 전 아내는 가톨릭 교인이었다. 나는 결혼해도 당신이 좋을 대로 성당에 나가도 된다면서 아내를 설득했었다. 튀니스에서 나는 교회로, 아내는 성당으로 갔다. 하지만 부부가 떨어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좋지 않았다. 나는 결국 기도했다. “주님, 우리 부부가 한 교회에 다니게 해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국적별 찬양대회를 개최했다. 한국 교포들을 주축으로 한 찬양연습이 있었다. 대회 당일에는 식당 조리사 아가씨도 함께 찬양했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한국팀이 찬양을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그 아가씨를 아내로 오인했다. 그 다음 주부터 아내가 스스로 교회에 나왔다. 기도가 이루어진 셈이다.
당시 중동 시장개척을 위한 손님들이 자주 들렀다. 손님은 모두 집으로 초청해 대접하는 것이 상례였다. 한 번은 신원개발 관계자 등 손님을 위한 요리를 하다가 집사람이 감전을 당해 쓰러지기도 했다. 만삭이 된 집사람이 공무를 도우러 나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력이 미약했을 때 한국 외교관들은 가족을 포함해 모두 힘을 합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이 컸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7) 리비아와 수교위해 치열한 외교전
당시 한국 대사관은 리비아와의 관계 개선을 책임지고 있었다. 리비아는 중동의 석유강국이었다. 그러나 북한과 수교 관계에 있었고 우리에겐 적대적이었다. 관계개선이 필요했다. 특히 우리 기업의 중동 진출이 시작될 무렵이라 리비아와의 관계 설정은 필수 과제였다.
수교를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우선 리비아 입국 비자 발급이 문제였고 다음엔 리비아 외교부 및 정부 관리들과의 접촉이 필요했다. 나는 주로 교섭 차 리비아를 방문했던 대사님을 모시고 다녔다.
튀니스에서 트리폴리까지 가는 비행기 편이 있기는 했지만 트리폴리 현지서 차가 필요했기 때문에 주로 육로로 다녔다. 차로 8시간을 달려 국경을 통과하고 다시 서너 시간을 달려 트리폴리에 도착했다. 국경에는 수많은 차가 검사와 통관절차를 기다리고 있어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공관장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기지를 발휘했다. 국경 수비대장을 찾아갔다. 얼른 ‘화살기도(짧은 기도)’를 드렸다.
초소대장을 보자마자 짧은 아랍어로 “브라더” 하고 끌어안으며 친한 척했다. 그리고 “남한 대사를 모시고 왔다”고 했다. 수비대장은 웃는 표정으로 반가워하며 대사를 모셔오라 했다. 그가 우리에게 차를 대접하는 동안 통관 수속은 우리 차 기사의 재치로 빠르게 끝났다. 나는 다시 수비대장을 끌어안고 인사한 후 트리폴리로 떠났다. 돌아올 때는 역순이었다.
면담도 쉽지 않았다. 외무성에 미리 면담 요청을 했지만 답이 없었다. 결국 직접 부딪치기로 했다. 비서에게 한국 대사가 왔다고 하자 장관은 선뜻 문을 열어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리비아 사람들은 상대방 얼굴을 마주보고 “아니오” 하지 못했다.
그때 한국 기업의 진출 필요성을 역설했고 두 나라 간 관계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리비아에는 한국 건설회사의 솜씨가 좋다는 평이 많았다. 부대 막사 건설을 할 때 한국 기술자들은 한밤중이라도 군부대가 요청하면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좋아했다. 우리는 군사령관도 만났고 대우건설이나 삼성건설 등의 진출도 지원했다.
그래도 수교 진전이 없자 친한 실업인이 리비아가 필요로 하는 의사, 간호사 요원 파견을 제의하라고 귀띔했다. 우리는 리비아 사회보건성과 접촉했다. 외무성 경제국장도 만나 설명했다. 그때 북한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보건장관을 현지로 파견해 이를 무마하려 했다. 당시는 남북한 외교전(戰) 시대였다. 걱정이 됐다.
얼마 후 리비아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전에 만났던 경제국장이었는데 차관으로 승진해 있었다. 그는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해 수교에 앞서 양국간 영사관계를 맺는 데 동의한다고 알려 주었다. 뛸 듯 기뻤다. 대사님은 총영사관을 개설하겠다고 답했다. 차관은 좋다며 축하해 주었다.
두 달 만에 총영사관 개설을 위해 유능한 참사관이 영사로 튀니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리비아는 총영사관 개설이 아닌 영사관 개설만을 허용한다는 문서를 느닷없이 보내왔다. 당황스러웠지만 총영사 대신 영사가 부임할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2년만인 1980년 한국은 리비아와 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시키며 중동 비동맹 외교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북아프리카 리비아와 튀니지 등은 일명 ‘마그레브’ 지역으로 초기 기독교가 왕성했던 곳이다. 재복음화의 길이 열리기를 기도한다. 최근 민주화 열풍은 남의 일 같지 않다. 난민들이 넘치는 튀니지와 리비아 국경은 33년 전 바로 내가 기도하며 다녔던 곳이다. 주님의 뜻을 알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8) 코스타리카 전보 가정교회 열어 예배
튀니지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명령이 떨어졌다. ‘코스타리카 2등 서기관’. 들어보지도 못했던 나라였다. 공관원도 대사를 포함해 2명뿐이었다. 교포는 10여 가족 남짓 됐다. 큰 곳으로 가고 싶었는데 어찌하랴. 나라의 명령인 것을.
외교관 생활은 순례자와 흡사하다. 한 곳에 부임받아 그곳 국민과 문화를 사랑하다 때가 되면 다른 곳으로 떠난다. 코스타리카 산호세에 도착하니 이복형 대사 내외가 맞아주었다. 나는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새 힘을 공급해 주셨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코스타리카는 군대가 없는 민주국가였다. 유엔에서도 언제나 한국의 핵심 우방이었다. 공관장은 정이 많은 분이었으나 업무에는 맹렬한 외교관이었다. 나라의 외교 목적은 반드시 관철해냈다. 미국 부호들의 파티에서 입을 꽉 다물더니 상좌를 차지하고 분위기를 주도한 당당한 모습은 늘 기억난다. 정치력이 뛰어나 주재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도 당선될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바삐 뛰어다녔다. 그런 과정 속에서 국가 위상과 외교 목적은 반드시 관철해낸다는 의지를 배웠다. 스페인어도 많이 늘었다. 마침 현지 교포 사회는 믿는 사람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려 했다. 우리는 첫 가정예배부터 참석했다. 나는 바로 그 다음 주부터 일과 후면 타자기를 이용해 주보를 만들었다. 우리는 돌아가며 기도를 인도했고 말씀은 설교 테이프로 들었다. 적은 수였지만 사랑과 은혜가 넘쳤다.
당시 중남미 교포들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다. 뜻을 품고 중남미로 향했으나 대부분 사업 실패나 사기를 당하고 오는 등 사연이 많았다. 태권도장으로 기반을 닦기 시작한 가정들도 있었고, 어떤 가정은 할 일이 없어 비닐 슬리퍼에 구슬 장식을 달아 가가호호 다니며 팔았다. 공관장 사모는 개인 차를 이용해 그런 부인들을 태우고 다니며 도와주곤 했다.
코스타리카 시장 개척도 주요한 업무였다. 한국 기업인들은 시장 개척을 위해 혼신을 다해 뛰었고 나 역시 뛰어다녔다. 공관에 행정 자동차가 없어 현지 자동차 딜러에 나온 포니 자동차를 개인 차로 구입해 몰고 다녔는데 한국 자동차 선전 효과도 봤다.
공관장이었던 이 대사가 미국 마이애미 총영사로 떠난 뒤 인근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혁명이 발생했다. 오랜 우파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로 좌경 성향의 청년들이 봉기한 것이다. 나는 현지 언론인들과 접촉하며 상황을 서울에 보고했다. 산디니스타 정부의 성향에 비추어 앞으로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고 판단해 대책을 건의했다. 정부는 서둘러 신정부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했고 이복형 주 마이애미 총영사가 이를 맡았다. 나는 그 비자 발급을 도왔다. 니카라과 신정부가 발급한 제2호 비자 발급이었다.
그러나 니카라과는 기본적으로 반미 성향 국가로 한동안 우리와 어려운 관계였다. 1979년 신임 이용훈 대사가 부임하고 현지 요인들과 만찬을 하던 날이 10월 29일이었다. 그날 오후 알고 지내던 AFP 특파원이 전화를 했다. 한국에 궁정 쿠데타가 났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유고 소식이었다. 차 안에서 긴급히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9) 당시 반기문 과장의 실력·인품에 반해
1980년 봄 귀국한 나는 외교부 인사계장을 맡았다. 인사 업무는 외교관 개인은 물론 가족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일이라 신중을 기해야 했다. 가능한 모든 요소를 고려하고 형평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당시는 정부 교체기여서 내외 환경이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퇴근 후 술자리가 잦았다. 보통 3차씩 가는 음주문화가 통상적이었고 상사가 술을 좋아하면 이래저래 술자리에 가야했다. 일도 많았고 술 때문에 퇴근 시간은 연일 늦었다. 그러면서 주일 성수는 열심히 했는데 경건함을 지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낙제점을 받았다.
평소 유엔 관계 업무를 하고 싶었던 나는 동기들이 과장 보직으로 나갈 때 유엔과 차석으로 전근을 자원했다. 외교부의 가장 바쁜 부서 중 하나였는데 거기엔 외교전략가인 이시영(전 유엔 대사) 국장과 반기문(현 유엔 사무총장) 과장이 있었다.
유엔과 차석으로 들어가 국제기구 업무를 시작하다 중미과장 보직을 받아 4개월 남짓 신임 과장으로 일했다. 그런데 장관이 나를 포함한 5명의 젊은 과장은 자리를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고참 서기관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데 젊은 서기관들이 과장에 보임된 것은 잘못된 인사였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유엔국에서 연락이 왔다. 반기문 과장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지금도 그런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반기문 과장은 실력이 탁월했고 인품도 좋아, 상사와 후배, 동료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나는 형님처럼 반 과장을 따랐다. 당시 한국은 외교 무대에서 북한과 대치 중이었다. 유엔과 비동맹회의에서 외교전이 치열했다. 국제회의가 열릴 때마다 공산권은 우리나라의 대표성에 도전했다. 특히 75년 비동맹회의에 북한은 가입했지만 우리나라는 가입하지 못하면서 비동맹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하며 북한의 입장을 지지했다.
82년 봄 인도 뉴델리에서 비동맹 외상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정부는 거기서 북한의 공작을 저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우리는 전략을 짰고 세계를 대상으로, 특히 온건 비동맹국을 설득하기 위해 치밀한 외교 교섭을 시작했다. 특사도 여러 곳으로 파송하고 수많은 친서도 발송했다. 매일 통금 30분 전 사무실을 떠나는 비상근무가 계속됐다.
중요한 외교문서는 타자기로 직접 작성했는데 오탈자 방지를 위해 오자가 나올 때마다 당시 500원의 벌금을 냈다. 외상회의가 다가오면서 반 과장이 인도 출장을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리기도 했지만 병상에서도 업무를 놓지 않았다.
이런 노력이었을까. 뉴델리 비동맹회의에서는 다수국의 지지를 받아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관철하려던 북한의 기도는 봉쇄됐고, 결국 이 조항이 삭제되면서 유연한 내용으로 변했다. 이후 비동맹 무대에서는 뉴델리 조항이 한반도 문제의 기본 입장으로 견지될 수 있었다.
반 과장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92년 APEC 담당 심의관으로 근무할 때도 외교정책 실장이었던 그를 모셨다. 94년 오사카 APEC 정상회의에서는 우리 쌀 시장 보호를 위해, 역내 자유무역 이행 추진에 ‘융통성’을 부여한다는 조항을 반영시키기까지 반 실장의 부드럽지만 탁월한 외교력이 발휘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2006년 주프랑스 대사 시절에는 당시 반 외교통상부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진출에 필요한 불어권 지지 결집을 위해 뛰기도 했다. 반 사무총장이 세계 평화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10) 냉전기 국제외교 중심에서 담대하게 행동
외교관이 되면서 유엔에서 일하기를 꿈꿨다. 3년 고국 근무를 마치자 유엔대표부로 발령이 났다. 중간에 인사 문제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꿈만 같았다. 당시는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기 전이라 우리는 옵서버 대표부였다. 옵서버는 정회원들이 일하는 것을 보기만 한다. 유엔 무대에서 한국 문제를 주제로 토의하는 자리에 초대받지 않는 한 어떠한 발언도 할 수 없었다.
남북한 대표단은 교황청 대표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앉아 아는 체 모르는 체하며 만났다. 다른 국가 대표들의 한반도 관련 발언을 체크하곤 했다. 임시 외교부 대선배들은 유엔 근무를 의미 있게 보내려면 유엔 구석구석을 신발이 닳도록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다들 열심히 일했다.
유엔은 매일 기자들에 대한 정례 브리핑 직후 대표부 공관원들에게 이를 전해주는 정오 브리핑이 있었다. 12시 시작이라 점심 식사에 지장이 있었지만 나는 이 일을 인계 받아 유엔 동정을 수집해 보고하곤 했다. 그러다가 1983년 9월 1일 KAL 007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 벌어졌다. 269명이나 희생된 긴급 상황이었고 이 문제는 한국과 소련만이 아닌 냉전 최대의 이슈가 됐다.
9월 3일 긴급 안보리가 소집됐고 대표부는 김경원 대사 주재 하에 야간 긴급회의를 갖고 안보리 대책을 협의했다. 수일간에 걸친 안보리 회의에는 국제 미디어가 총출동하는 등 관심이 집중됐다. 김 대사의 발언을 필두로 소련의 만행을 규탄했고 관련 결의안 채택을 위해 치열한 국제 교섭을 벌였다. 안보리 투표에서 소련의 거부권이 행사됐지만 9표의 기본표를 얻은 것은 당시 자유 진영의 승리였다.
유엔총회 기간 중 이범석 당시 외무부 장관이 뉴욕에 도착했다. 그가 유엔회의장을 떠날 때 마침 북한 한시해 대사가 옆에 있었다. 그는 한 대사에게 인사말을 전했다. 한 대사는 피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까. 10월 9일 대통령 일행의 버마 테러 사건의 비보가 전해졌다. 쓰게 웃던 이 장관의 모습이 생생했다. 비통한 일이었다.
그 무렵 쿠바에서 77그룹 경제협력회의가 예정돼 있었다. 77그룹 회원국인 한국은 회의가 적성국인 쿠바에서 열린 까닭에 누군가 반드시 가야 했다. 버마 사태로 고위급 외교관들은 움직일 수 없어 경제위원회 담당이던 내가 수석대표로 가게 됐다.
회의 첫날 우리를 본 북한대사관 김모 참사관은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옆으로 끌고 갔다. 그는 “여기가 어딘데 어떻게 왔어.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걸” 하며 위협했다. 나는 의연히 대했다. 그리고 평소 가까웠던 유엔사무국 직원에게 적절한 보호를 요청했다. 주최 측인 쿠바 국립은행 간부들에게도 북한 측 행태를 지적하고 마땅한 보호를 요청했다. 우리는 저녁 호텔 방문 앞에 소파를 붙여 막아 놓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밤에는 이상한 전화를 받기도 했다. 다음날부터는 아무 일 없었다.
떠나기 전날 열린 쿠바 측 초청 전송 파티는 고궁에서 열렸다. 북한 측 사람도 여럿 왔다. 그중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자신을 격술요원이라 소개한 그는 나를 남조선 경제꾼으로 불렀다. 우리는 통일, 민족 문제 등을 이야기했다.
해외를 다니면 북한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잦다. 대개 대결의 장소였다. 그러다 제법 깊은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한민족이기 때문이다. 위험한 순간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알기에 담대히 행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11)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 통해 새로 태어나
유엔 근무 3년을 마치고 1986년 봄 귀국한 나는 다시 중미과장으로 일하게 됐다. 당시 우리 가족은 서울 반포동 남서울교회에 다녔는데 홍정길 목사님을 찾아 귀국 인사를 드렸다. 홍 목사님은 우리 집이 서초동에 더 가깝다며 사랑의교회를 권했다. 사랑의교회와는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부터 아내와 함께 제자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열정적인 부교역자와 12명이 한 조를 이루어 매주 특별성경훈련을 실시했다. 두세 번 빠지면 무조건 탈락인데 모두 열심히 참여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출세지향인 데다 냉정하며 차가운 성격이었다. 기도할 때면 나 자신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것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을 느끼곤 했다.
이런 나를 훈련받으라고 권한 것은 아내였는데 훈련이 거듭될수록 나의 이기적인 면과 맞닥뜨리게 됐다. 그때마다 눈물로 회개했다. 내 옆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주님이 전적으로 내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됐다. 나처럼 차가운 사람이 예배 때마다 무슨 눈물이 그리도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12명 제자들은 서로가 보기에도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었다. 구원의 확신을 다졌고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고 회개하면서 내면을 열어 소통했다. 술을 마시던 이들도 나를 포함해 모두 술을 끊게 됐다.
1년 후에는 옥한흠 목사님과 훈련을 받았다. 제자훈련은 평신도를 예수님 닮아 온전케 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도록 만드는 데 초점이 있었다. 사역훈련은 양성된 제자가 교역자 지도 아래 말씀을 가지고 소그룹으로 모여 다른 성도들을 섬기도록 훈련하는 과정이다.
나는 훈련 중에 다락방 순장으로 섬길 수 있었다. 출장도 많았지만 하나님 은혜로 출석에 지장이 없었다. 그때부터 모든 일을 기도로 감당하려고 노력했고, 제자훈련으로 거듭난 아내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당시는 유엔 에스캅(ESCAP) 정부간 고위급회의 업무를 담당하던 때였다.
그때도 유엔공업기구(UNIDO) 이사국 진출을 추진 중이었는데 태국에서 열린 총회에서 북한의 방해가 있었지만 교섭을 통해 목표를 관철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에스캅에 신탁기금을 설치해 다른 개발도상국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할 때였다.
에스캅 사무총장은 한국의 신장되는 위치를 감안해선지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되는 차기 에스캅 총회에서 한국 외무장관이 임시총회 의장을 맡을 것을 제안해 왔다. 정부는 이를 국위에 좋은 것으로 판단하고 수락했다.
수개월간 준비가 잘 됐고 장관 일행도 동남아로 떠났고 나도 인도네시아로 떠나기 전날, 갑자기 태국에서 연락이 왔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유엔 비회원국인 한국 장관의 임시총회 의장을 수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해 왔다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는 비동맹 맹주로 발언권이 컸다. 공산권의 반대도 있었을 것이다. 난감했다. 우리는 급히 에스캅 사무총장에게 회원국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므로 차질 없이 추진해 달라고 강력 요청했다. 나는 자카르타행 비행기를 타러 가면서 아내에게 강력한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자카르타에 도착해 우리는 에스캅 사무총장에게 연일 압력을 넣었고 인도네시아 외무성에 대해서도 원칙 고수 입장을 주장했다. 나는 호텔방에 엎드려 기도했다. 마침내 총회 개막 전날 밤 11시가 지나서 전화벨이 울렸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양보했다는 보고였다. 주님께 감사드렸다.
원칙이 이긴 것이지만 나에겐 참으로 강력한 기도 응답이었다. 나라를 세우는 것은 땀과 열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느꼈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12) 포르투갈서 남북 대사관 하나돼 협력
1989년 3월, 포르투갈 참사관으로 가게 됐다. 업무를 시작하면서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며 주님의 일을 생각하며 일할 것과 현지 교회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을 기도했다. 리스본의 한인교회 식구는 강병호 선교사 가족뿐이었다. 선교사님은 현지 마약촌 사람들을 섬겼다. 교회에는 코트라 관장 가족이 나왔고 교회가 성장해 우리가 떠날 때는 4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로 부흥했다.
현지 신학대학교에는 포르투갈어권 선교를 꿈꾸는 선교사 가정이 몇 명 있었다. 이분들과도 긴밀한 교제를 가졌다. 이점상 선교사는 기니비사우, 정명섭 선교사는 앙골라 등으로 선교 사역을 떠났다. 선교지를 위한 중보기도와 연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91년 6월, 주니어월드컵축구대회가 포르투갈에서 개최됐다. 한국팀은 역사적인 남북한 단일팀으로 구성됐다. 우리는 이들의 영접 준비 지시를 받았다. 파란색 한반도기를 제작하는 것을 비롯해 선수단과 기자단에게 제공할 음식 문제, 응원단 구성 등을 위해 일했다. 단일팀 영접이라 북한 대사관과도 협력했다. 북한 대사관원 2명과 우리 측 2명이 만나 실무협의를 가졌다. 리스본 시내 호텔을 예약하고 배추 확보에 돌입했다.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 연일 수송했다.
조광제 대사님이 갓 부임했는데 선수단이 오기 며칠 전엔 사모님도 도착했다. 그런데 사모님이 식당을 점검하던 중 의자에서 떨어져 허리 부상을 입었다. 우리는 긴급히 이점상 선교사를 모시고 치유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또 좋은 의사를 소개받아 병원에 휠체어를 타고 갔다가 걸어 나오게 됐다. 공관원 부인들과 교포 봉사자들이 한몸이 되어 뛰어다녔다.
선수단을 위한 차량대형도 북한 측과 정했다. 그 전엔 서로가 감시하는 형국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 측 외교범퍼 041, 북한 쪽은 042번 차량이 선수단 버스 뒤로 나란히 가는 대형을 편성했다.
6월 22일 남북한 선수단은 대한항공을 타고 모두 한반도 운동복을 입고 도착했다. 밖에는 남북한 혼합 환영단이 대기했고 나는 사전협의차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선수단은 모두가 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어서 누가 남한 대표이고 누가 북한 대표인지 구분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함께 도착한 남북한 공동대표단은 환영만찬에 참여하고 곧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남북한은 공동으로 응원 연습을 했다. 교포들은 경기가 열리는 곳마다 쫓아다녔다. 첫 상대였던 아르헨티나에는 1대 0으로 이겼다. 남북한이 같이 응원했다. 선수들이 잘했고 우리 응원단도 힘을 냈다. 두 번째는 아일랜드. 그때 북한선수단은 스타디움 다른 쪽으로 가서 따로 응원을 하였다. 경기는 1대 0으로 거의 패색이 짙었으나 종료 직전 가까스로 골을 넣어 비겼다. 그때 골을 넣은 북한 공격수는 우리 한 여성교민이 필사적으로 울다시피 응원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골을 넣었다고 말했다.
주최국 포르투갈에게는 0대 1로 졌으나 준결승에 나갔고, 8강전에서는 브라질을 만나 0대 5로 패했다. 6월말 단일팀은 북한 측 항공기를 타고 돌아갔다. 포르투갈에서의 남북한 간 한달 간의 짧은 협력의 시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남북단일팀 역사는 그 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내 마음에는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 남북한은 다시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에스겔서에 나오듯 두 나뭇가지가 합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13) 아내 혈소판감소증 투병 기도로 완치
포르투갈에서 브뤼셀의 EU 대표부로 발령이 났다. 브뤼셀에선 유럽공동체와의 미래관계를 그리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우리는 테르뷰렌 한인교회에서 또 다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삶을 시작했다. 성가대와 구역장 사역 등을 기쁘게 했다.
교회에서는 현지 한국 입양인들을 돌보았다. 이곳엔 6000여명의 한인 입양인이 있었는데 간혹 적응 실패로 자살하는 사례가 나왔다. 나는 이들을 위한 프랑스 성경 공부를 매주 맡았다. 오빠가 자살한 자매도 공부에 잘 나왔다. 이들은 어려움 속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후 한국에 지부도 만들었다. 나는 이들을 집에 초대해 한국 음식을 나누었다. 70여명이나 왔는데 정말 다양한 직업군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 복음의 전파와 사랑이 필요한 형제자매였다. 교회는 주말마다 브뤼셀 번화가에서 노방전도를 했다. 교회 청소년들이 율동과 찬양으로 섬겼다.
그러다 큰 시련이 왔다. 아내의 건강 문제였다. 포르투갈에서 아내는 한 계단도 제대로 오르지 못해 병원에 자주 갔다. 이후 몸에 파란 멍이 생겼고 하혈도 했다. 아내는 혈소판 감소증을 앓고 있었다. 면역체계가 혈소판을 잡아먹는 무서운 병이었다. 한번 출혈이 되면 잘 지혈되지 않는 증상이었다. 1992년 여름, 아내는 치료차 귀국해 힘든 수술을 받았다. 몸속에서 출혈될 부분을 제거했다. 수술 중에 혈소판수치를 올리는 주사를 계속 맞아 수술 후 상처가 아무는 동안 혈소판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기도 했다. 수술 후 수척해진 아내가 브뤼셀에 돌아온 후 우리는 매일 밤 손을 붙잡고 치유를 간구했다.
내 생활도 달라졌다.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아내는 서울로 돌아와서는 본격적으로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교인들이 금요 철야기도회에서 중보기도를 해주었고, 병원에서의 긴 치료가 시작됐다. 병이 심각했기 때문에 하루에 스테로이드를 90알씩 먹었다. 이 때문에 아내는 누워서 잘 수도 없었고 얼굴은 둥그렇게 ‘문 페이스’가 됐다.
아내는 힘든 치료 과정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을 가졌고 찬송가 465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를 부르며 이겨냈다. 이후 단계별로 약을 줄여가기 시작했고 혈소판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5년여 투병의 긴 터널을 통과했던 것이다. 그동안 나라 일을 한다며 가족에게 자상하지 못했던 나를 회개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정책심의관과 국제경제국장으로 근무하며 외교정책 기획, APEC, ASEM 창설, 원자력·자원·환경 개발, OECD 가입 교섭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업무가 하도 많아 지뢰밭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후 2000년 ASEM 정상회의를 서울에 유치했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 국제회의장이 처음 생기게 된 것은 오랜 꿈의 실현이었다.
외교부는 신앙 선배들의 발의로 중앙부처에서 직장선교회가 가장 먼저 생겼다. 매월 서울 도렴동 종교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고 매주 성경공부로 직원들이 은혜를 받았다. 80년대 이후 목사님들의 설교 테이프를 모아 전 세계 공관으로 보냈다. 설교 테이프를 받은 공관원들은 이를 듣고 동료나 교포 사회에 또 돌렸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없었을 때 테이프 전송망은 기독교인 디아스포라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김장환 목사를 초청해 공관장 조찬기도회를 처음으로 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목사님은 매년 이를 개최해 주시니 그 사랑에 늘 감사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주철기 (14·끝) 유럽·아프리카 선교위해 여생 보낼 것
1997년 유엔 제네바 대표부 차석대사로 나갔다. 유엔기구와 ILO, WTO 등이 주요 일터였다. 유엔인권위원회와 WTO의 지역협정위원회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이나 EU가 체결한 각급 FTA의 WTO 협정 부합 여부를 검토했다. 미국과 EU 간 첨예한 대립을 조정, 완화하는 역할도 맡았다.
사랑의교회에서는 나와 아내를 전문인 선교사로 파송했다. 제네바 한인사회는 작았다. 세 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결국 하나가 됐다. 새 교회는 임영수(현 모새골 대표) 목사가 수개월간 이끈 후 이재철(현 100주년기념교회)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99년부터는 모로코 대사로 발령 받았다. 오랜만의 아랍국가 근무였다. 모로코는 사막이 아름다운 나라다. 이슬람 신정국가로 왕의 종교지도자적 위치가 중요했다. 주민들은 심성이 착해 대부분 우리를 좋아했다. 나와 가족은 모로코의 자연과 문화, 사람을 사랑했다. 부임했을 때는 IMF 사태로 대우의 현지 산업단지 조성 등 계획이 무산돼 모로코 국민의 상실감이 컸다. 이 때문에 야당 일부 인사는 노골적으로 정부와 한국을 비난했다. 나는 이 상처를 씻어내기 위해 교류 협력에 힘썼다. 모로코를 한국의 다목적 아프리카 진출 거점으로 하자고 건의했으며, 한국국제협력단(KOICA) 봉사단이 파견되도록 했다. 이후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점차 실적을 쌓기 시작했다.
모로코 정부는 교회를 한 곳만 허용했다. 한국과 미국교회는 주일날 각각 예배를 드렸다. 가끔씩 종교경찰의 감시를 받기도 했는데 3년 재임 중 일부 사역자들이 추방당할 위험도 있었다. 모로코는 5세기까지 기독교 지역이었다. 특히 베르베르족은 기독교 신앙을 소유했다. 귀국 후 지금까지 이 지역과 베르베르족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2003년 시작한 프랑스 대사직은 나의 마지막 포스트였다. 76년 유학 후 처음으로 프랑스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2006년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의 해는 일년 내내 행사를 치렀다. 한국 주관 130개 행사, 프랑스 주관 80개 행사가 교류됐다.
일제 때 독립운동 거점의 흔적을 찾아 그해 3월 1일 기념 현판 부착행사를 가졌다. 한국상공회의소를 만들고 기업인들과 주요 도시를 함께 찾았다. 외규장각 반환 문제의 실질적 해결 방안도 건의했었는데 최근 이 문제가 해결돼 기쁘다.
프랑스 한인교회들은 잘 연합된 가운데 한인사회와 유학생을 섬기고 프랑스 사회와 아프리카 프랑스어권 선교도 열심히 하고 있다. 교회들은 유럽의 쇠퇴한 기독교 실상을 안타까워하며 다시 불이 붙도록 기도하고 있다. 유럽은 이제 재복음화가 필요한 대륙이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교회들이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유럽교회는 뜻있는 한국 젊은이들의 헌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나는 세 가지 비전을 향해 남은 생을 살고 싶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위한 선교, 한·중·일 동북아 신앙공동체의 실현, 북한교회 재건 비전이다.
수많은 한국 외교관들이 세계 도처 어려운 지역에서 분투하고 있다. 국민소득 250달러 시대에서 시작해 2만달러 시대까지 외교 역사의 현장에서 일한 것을 감사드린다. 돌이켜보면 매일 매순간 주님께서 인도해 주셨다.
기도의 동역자인 아내에게 감사하고 자상하지 못한 아버지를 이해하며 잘 커준 두 아들에게도 감사한다. 이들이 더 큰 믿음의 가정을 이루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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