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것은 돈이요, 얻은 것은 문화예술
민문자
사람이 한평생을 살다 보면 삶의 방향이 바뀔 때가 있다. 어릴 때야 부모님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면 되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오로지 자신의 판단으로 어려운 결정도 해야 한다. 어느 길을 가야 할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어느 길을 택해야 좋을지 막막할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도전정신’이 아닐까?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다. 용기 있는 자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가난한 농부의 맏딸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당장 고등학교 진학문제부터 순탄치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숙부의 도움으로 여고를 졸업하였으나 대학진학은 언감생심 마음을 비워야 했다. 하지만 진학 욕심을 잠재우고 시험만이라도 보아본다는 마음으로 어른들 몰래 청주교육대학에 응시했더니 떡하니 붙어버렸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시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전긍긍 애만 때웠는데 인천에 계신 숙부에게까지 이 소식이 전달되자 등록금을 내려보내 주셨다. 그래서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짧았지만 교사로서 아름다운 여러 가지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당시는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하는 것이 대세인 시절이었다.
서울의 남편과 결혼 후 첫 사업이 실패되자 두 번째부터는 함께 힘을 모아 드디어 사십 대 중반에는 제법 큰 회사를 경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여러 대학의 최고경영자과정에서 주경야독하면서 여러 분야의 인사들과 친교를 맺으며 삶의 지평을 넓혀 갔다. 숙부와 숙모가 우리 형제는 물론 일가친척을 보살펴 주셨듯이 우리도 어려움에 봉착한 주변을 돌보며 사업이 번창하는가 했는데 사업상 어떤 판단이 잘못이었던지 1994년에 회사가 도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열심히 사업에만 신경 쓰느라 돈 쓸 시간이 없어 생활비 외에는 우리 부부 봉급은 차곡차곡 금융기관에 상당한 액수가 저축되어 있었지만 모두 회사채권으로 압류되어 빈손이 되었다. 이럴 때 좌절하지 않을 사람 있을까? 우두머니가 된 남편이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릴까 전전긍긍하면서 추슬러주며 자신을 곧추세워야 했다. 극한 상황에서는 여자가 모성애가 있어서 그런지 더 강한 모양이다.
남편이 실의에 빠진 상태에 돈이 되는 것은 다 사라지고 돈 안 되는 회사가 하나 남았다. 문명사업으로 번 돈으로 문화사업에 봉사한다는 남편의 신념으로 경영하던 주간 신문사였다. 직원이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에서 살려보기로 하고 사무실에 나가 직원들에게 우리 다 함께 열심히 해보자고 했다. 모회사가 도산되기 전에는 남편의 도우미 정도였지만 이제는 오로지 모두 자신의 판단이 필요한 대표로서 행동해야 할 막중한 책임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작은 회사지만 경영이 만만치가 않았다. 신문사 대표는 돈을 만들어 직원 월급을 주어야 했고 회사 경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 주어야 했다. 신문구독료 외 광고수입이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영업사원들에게 의존하려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부담만 가중되었다.
할 수 없이 직접 나서야 했다. 그래서 서강대 경영대학원 STEP 과정에 등록하고 다시 주경야독하면서 여기저기 포럼에도 참석하고 직접 광고영업을 하여 회사를 이끌어 나갔다. 이때 설득력이 있고 대중 앞에서도 스피치를 잘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마침 한국언어문화원의 ‘3분 스피치’ 광고가 신문에 나왔다. 곧바로 등록하고 공부하면서 좋은 분들과 인연을 많이 맺었다. 여기에서 만난 친구가 수필공부를 같이하자고 해서 수필공부를 하다 보니 용산구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고 이어 김병권 선생님 추천으로 『한국수필』로 등단하였다. 다시 시에 관심을 두게 되어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시 창작 강의를 하시던 고정공채 시인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어 2004년 『서울문학』에서 시 등단을 하게 되었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더 알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이제 수필과 시 등단으로 문인의 길에 들어섰으니 제대로 알고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래서 환갑이 넘은 나이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학하고 국문학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이때 실버넷뉴스 3기 기자로 출발하여 초대 실버넷뉴스 문학관장을 역임하고 10년 근속 상을 타는 영광까지 누리며 정열적으로 활동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와 동문들과 함께 문학기행이며 해외여행, 영화관람과 토론회에도 열심히 참가하였다. 여러 가지 행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국어국문학과 선배 졸업식에서 송사를 한 일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6학년 졸업생들을 위해 송사를 낭독할 때에는 선생님이 써주신 글이었지만 이번에는 온전한 내 글이었다. 또 한가지 잊지 못할 것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백일장대회인 『통문』에 졸시 「백두산 천지」가 뽑힌 것이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세월은 쉼 없이 흘러 그동안 자식들은 성장해서 자신들의 삶을 일구며 노쇠한 우리 부부를 부양하게 되었다. 신문사도 삼십 년을 지켜온 직원이 맡아 하게 하고 일선에서 물러나 이제는 전업 학생이 되어 매일이 바쁘다.
시를 쓰다 보니 시낭송 공부도 해야 했고 시화전에 작품도 내어야 했다. 남의 손을 빌려 그림을 그리고 보니 마음에도 안 들고 돈은 돈대로 나가므로 직접 그려볼 욕심으로 수묵화와 서예도 공부하게 되었다. 노년에 이르러 깨닫고 보니 인간이 가까이하고 즐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문화예술 분야였다.
남편과 함께 사십 대 후반부터 꾸준히 평생교육 개념으로 공부하면서 언젠가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공부해보리라 하던 꿈이 우연히 이루어졌다. 구로구청의 중요시책의 하나인 서울대-구로구 평생교육 강사 인큐베이팅과정과 심화과정을 서울대 사범대 교육행정연수원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우리 부부가 누렸다. 그리고 얼마후 서울시의 2013년 서울형뉴딜일자리의 하나로 평생교육 강사를 모집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응모하여 <문학의 집 ‧ 구로>와 <화원데이케어센타>에서 ‘스피치와 시낭송’을 강의 하면서 평생교육 강사로서의 2년을 보람있게 보냈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한국언어문화원>에서 표현력 개발 스피치와 <한국낭송문예협회>에서 시낭송을 십여 년간 끊임없이 공부한 것이 드디어 최대의 효용가치를 발휘하게 된 것이었다.
수강생들은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했다면서 그동안 ‘스피치와 시낭송’을 배운 것이 사회생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도 따르는 십여 명과 함께 다음카페 <구마루무지개>를 운영하며 매월 예술극장인 구로아트벨리의 <시사랑 노래사랑>의 무대에 서서 시낭송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시낭송으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자신감은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내 인생에서 잃은 것은 돈이요, 얻은 것은 사람과 문화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1994년에 우리 부부가 경영하던 회사가 도산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돈 많은 부자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시인으로 살라는 하늘의 은총이었는지 부부가 함께 공부하는 문학도가 되어 부부시집을 내면서 곱게 늙어가고 있다. 예술은 나와는 상관없는 먼 세상일인 줄 알았다.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오늘도 내일도 존경하는 스승을 찾아다니며 시 창작과 수필을 쓰고 수묵화를 그리며 한글서예와 한문서예를 늦은 나이지만 공부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자족한다.
민문자 약력
• 《한국수필》수필(2003), 《서울문학》詩(2004) 등단
• 한국문인협회 낭송문화진흥위원,
• 한국현대시인협회 홍보위원
• 우리시회 감사
• 한국수필가협회와 한국수필작가회 회원
• 시사랑 노래사랑 부회장
• 부부시집『반려자』,『꽃바람』• 수필집『인생의 등불』
• 칼럼집1 『인생에 리허설은 없다』
• 칼럼집2 『아름다운 서정가곡 태극기』
• 서재 : 민문자.시인.com
• 이메일 : mjmin7@naver.com
첫댓글 지질줄모르는 선생님의 열정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것 같습니다.
사업은 실패를 하셨지만, 주저앉지 않으시고 마음의 부자인 문화예술의 길을 선택하셔서
사업에 성공한 부자보다도 더 행복을 느끼시며 마음에 부자로 세상부럽지않게 사시는 선생님
문촌선생님과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