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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소설가협회 2012년 연간집 <경남소설> 제 7호에 발표한 박영희 소설가의 단편소설 <바람이 분다>를 올립니다.
단편소설 바람이 분다 박영희
5월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시작으로 스승의 날과 아버님 기일, 장인어른 칠순잔치와 부처님 오신 날까지 있는 그 오월. 볕은 따뜻하고 옷차림은 가볍지만 마음은 무겁고 지갑은 하염없이 가벼워지게 하는 오월이기도 하다. 지출이 심한 5월을 위해 형오씨는 아내 기정씨가 건네는 용돈에서 매달 10만원을 뚝, 떼서 따로 모아두고 있다. 거금 십 만원은 형오씨에겐 있는 사람 백 만 원보다 더 큰 돈이지만 그게 그대로 통장에 남아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카드 결제금액이 모자라면 누구에게도 돈 얘기하기 쪽 빨려서 빼 쓰고는 고작 몇 만원 남아있으려나 어쩌려나 싶어 통장잔액보기가 민망할 정도다. 그 돈이 어떤 돈이냐면 형오씨가 기정씨에게 온갖 잔소리를 다 들으면서 투쟁해서 얻어 낸 용돈이다. 사실 중년의 남자가 그것도 회사의 꽃이라는 과장님께서 직원들과 뭐 간단하게 한 잔하자고 모이다보면 또 분위기에 따라서 이차도 가고 3차도 간다. 과장이나 되어가지고 직원들이 조금씩 각출한 돈으로 기분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차는 그렇게 경비로 썼다면 이차 정도는 과장인 형오씨가 한 턱 쏴야 되는 것이 모양새로 보나 스타일로 보나 체면 서는 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기정씨는 현금으로 주는 돈 말고 카드로 결제라도 하면 딩동, 서비스 멘트가 바로 기정씨 휴대폰으로 날아가는지 득달같이 전화해서 어디냐, 왜 당신이 내느냐, 는 잔소리를 국지성 폭우처럼 해댄다. 다다다! 카드 긁는 소리가 늘 말 달리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아마도 아내의 잔소리가 바로 전화선으로 달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예 전화를 받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론 꺼버릴 때도 있다. 술자리에서 마누라 잔소리 듣고 분위기 깨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직책이 오르고 년도가 바뀌면 용돈도 좀 올려주면 좋으련만 기정씨는 돈 관계는 칼 같다. 거래처와 직장, 동창들과 이런 저런 친구들하고의 모임이 좀 많나 말이다. 상조금내고 축의금 내다보면 현금이 늘 모자란다. 어쩌다 현금서비스로 십 만원 인출하면 이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며칠이 시끄럽다. 아내 기정씨의 짠순이 때문에 이만큼이나마 산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고마워하지만 너무 짼짼 거리는 소리가 이제는 지겨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 아내에게 반기를 드는 형오씨는 풍문으로만 듣던 그 중년의 일탈이란 종양이 퍼진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슬슬 들었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지랄발광의 용량을 몸무게만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니 형오씨도 그 범주에 들어간단 말이지. 이건 괜히 해 보는 소리가 아니고 진짜 맞는 말이다. 유명 사회학자가 토크쇼에서 한 얘기를 귀담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지랄의 용량을 사춘기시절에 다 소모하지 않으면 중년에도 한다는데 가만히 더듬어보니 형오씨는 정말 착한 학생이었고 어머니 이강자 여사에게도 무지 착한 아들이었다. 그러니깐 꽁지내린 태풍처럼 그 지랄이 사춘기 시절에 살짝만 하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이란 말인가. 형오씨는 아내의 잔소리에 늘 알았어, 미안! 하던 멘트를 요즘 들어. 됐거든 됐어, 아 됐다고!! 로 바뀐 것은 확실하다. 입사동기 구매부 박 과장이 그랬나. 누가 그랬든 아내의 잔소리가 지겨워지면 중년의 일탈이 시작되는 징조라고 했다. 그러면 아내의 잔소리가 그리워지는 나이는 중년의 일탈이 끝이라는 거지. 그러면 여성호르몬이 어마어마하게 나온다는 그 시절이 코앞이라는 것이기도 하다는 소리다. 수컷의 시절이 끝나고 멜로드라마에도 눈물이 쏟는다는 그 시절이라니. 생각만 으로도 서글퍼진다. * 고작 오월이 이틀 지났을 뿐인데도 아내 기정씨의 신경줄이 팽팽해졌다는 듯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오월은 할 수만 있다면 아내의 짜증을 짜장면 비비듯 확 섞어 후루룩 빨아들이고 싶은 달이다. 그래도 대꾸하지 않고 당신 고마워! 하는 닭살 돋는 멘트를 풍선껌 불듯이 불어대면 또 무난하게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보면 결혼생활 15년이 연습기간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아내 기정씨는 형오씨에게 딱 맞게 진화했고 형오씨도 기정씨에게 딱 이게 길들여져 버렸다. 그런데 그게 이제 슬슬하기가 싫어졌다는 게 문제였다. 어쩌라고? 이렇게 대놓고 튕겨보고 싶다는 것이다. 간 크게시리. 기정씨는 어머님 눈치 살피느라 전전긍긍이고 어머님은 대놓고 말하지 않고 뭐가 불만이신지 요 며칠 동안 냉랭한 얼굴이다. 화장대 앞 책상달력에 아내 기정씨가 붉게 동그라미로 표시해둔 그 날이 눈앞에 그려졌지만 모른 체 했다. 형오씨는 신록의 푸르름과 아카시아의 향내보다 체념이 먼저 밀려왔다. 5월의 가정의 달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가장이 죽는 달처럼 느껴졌다. 달력을 쳐다만 보는데도 방울토마토만큼 겨우 일으켜 세운 성욕마저 건포도처럼 시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습관처럼 오월에는 한 번도 아내를 안은 적이 없었다. 이게 바로 어깨 힘주고 나보고 어쩌라고,를 속 시원하게 못한 후유증인가? 잘 모르겠다. 어머니도 그렇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용돈만 드려도 고맙다고 하시더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잘 삐치시고 이런 저런 욕구도 많아졌다. 아내 기정씨가 학습지 선생을 하면서부터 어머니 강자씨는 아이들을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 했다. 그건 입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너무 고마운 일이다. 막내 보민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원에 다니느라 늦게 오고부터 어머니의 바깥 모임이 부쩍 잦아졌다. 아버지 눈치도 보지 않고 보니 완전히 살맛이 난다는 것이다. 내가 너거 아버지 시집살이 한 것만도 억울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나가보니 다들 재미나게 살더라. 내만 축구 등신처럼 살았더라고 어찌나 염불처럼 외어대는지 어머니가 지칭하는 축구가 차이는 축구를 말하는 것인지 차는 축구를 말하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거실에 있자니 어머니 눈치가 보여 일찌감치 안방으로 들어와 TV를 보고 누웠다. 아내 기정씨가 욕실에서 화장을 지우고 나와 화장대에서 희멀건 마사지거즈를 얼굴에 붙이고 안방을 돌아다녔다. 눈 코 입만 뻥, 뚫려있는 꼴을 보려니 무슨 귀신 탈바가지 쓴 꼴이라 모로 돌아누워 아스날과 맨유의 축구 경기만 골똘히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 이번 어버이 날 선물 말이야. 뭐 생각하고 있는 것 있어?” “뭘? 뭘 생각해. 여태 당신이 다 알아서 했잖아?” 맞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시어른들과 처가의 어르신들 선물은 아내 기정씨가 어떻게 다 알아서 했다. 형오씨가 한다는 것은 큰돈은 아니지만 푼돈 정도 용돈이랍시고 건네는 것으로 아들노릇 남편노릇 사위노릇 근근이 지켜오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왜 생각하고 있냐고 묻는 의향이 궁금했다. “아니, 내 말은 혹시 업체에서 받은 상품권이라도 꼬불쳐 놓은 것 있냐는 소리지.” “상품권?” 그러면 그렇지. 이 여우같은 마누라가 어떻게 냄새를 맡은 것인지 아니면 본 것인가 순간 머리를 굴리다 아이고, 내가 한두 번 속았나 말이다. 넘겨짚어 보는 거겠지만 이제 당할 내가 아니다. 마누라는 마주보고 누워라고 마누라, 라고 불렀겠지만 오늘은 딱 무시하고 돌아누워 버리고 싶다. 이번에는 진짜로 형오씨가 자신을 위해서 쓸 것이다. 지난 번 회사에서 간 봄 산행을 생각하면 오뉴월 멸치젓갈 삭듯이 삭아버린 자존심이 생각나 가슴에 열불이 확 일어난다. “괜히 넘겨 집지마시지. 먹고 죽을래도 없거든. 근데 왜 상품권 타령이야. 여태 현금으로 드렸잖아.” “아니, 어머님이 모임에서 그 왜 목욕탕 할머니와 하는 산악회 모임 말이야. 여태 아무런 말씀 없으시더니 놀러 몇 번 다녀오시더니 기분이 나쁘신지 말도 안하시고 그런다. 내가 왜 그러시냐고 물어도 아무것도 아니다. 하시더니 말하면 해줄래, 이러시지 뭐야? 그래서 내가 어머니 뭐 갖고 싶은 것 있으세요. 어버이날 선물해드릴게요. 해도 아무 말 안하시고 나가시네.” “형숙이한테 전화해서 알아보면 되잖아.” “아가씨한테.” “둘이 사귀는 것처럼 맨날 전화하고 그러는데 형숙이는 알거 아냐.” “그럼 지금 문자해볼까.” 형오씨 밑으로 세 살 터울 여동생이지만 희한하게 어머니와 꿍짝이 맞았다. 형오씨는 별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아내 기정의 흉을 보더라도 네, 그렇군요. 형숙이 흉을 보아도 오, 그래요 정도다. 장단을 맞추어 주질 않는 탓에 어머니는 돌부처하고 얘기 하는 게 낫다고 늘 말하시곤 했다. 그러니 일에 쫒기는 기정씨나 형오씨보다 자연스레 전업주부인 형숙씨에게 더 어머니는 속을 내 보이신다. 저렇게 뚱하게 계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고 또 형오씨나 기정씨가 천하에 둘도 없는 아들 며느리에서 한 달을 씹어도 분이 안 풀릴 몹쓸 인간이 될 확률이 높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모녀지간에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실컷 전화로 얘기 하다가도 형숙은 다시 찾아와서는 낮 시간을 보내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알거 아니냐고. 기정씨의 스마트폰을 잡은 손이 터치하느라 바쁘다. “이제야 알았네.” 아스날이 맨유를 이기다니 이건 확실한 이변이다. 영원한 나의 맨유가, 박지성이 있는 맨유가 아스날에게 패하다니. 곧 박지성도 맨유를 떠나겠구먼. 승부의 세계는 진짜 냉정하네. 영원한 강자는 없다더니··· 영원히 넓은 아량과 사랑만을 베풀었던 이강자 여사의 모정도 없는 것인지. 왠지 우리의 캡틴 나의 캡틴이 있는 맨유가 지다니 내 일같이 씁쓸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 뭔데?” 그사이 케이블 TV에 푹 빠져 다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참고 있는 형오씨의 발을 둥근 공 차듯이 툭, 찬다. 내 앉을 자리에 다리 치우라는 소리다. 한마디로. “그렇게 불이 나게 목욕탕 할머니랑 다니시더니 저번 산행에서 삐치신 게 있으신가봐. 그래서 이 번 달 산행도 가지 않고 누워 계신거고.” “이유가 뭔데?” “옷! 그것도 고어텍스.” “등산 잠바? 있으시잖아. 그 색깔 보라색. 올 봄에 사다드린 것.” “참 나, 등산 잠바수준이 아니고요. 엄청 비싼 고어텍스라니깐요.” “잠바나 고어텍스나? 야외활동복! 그게 그거지. 뭐 별스런 게 있나?” “있다고요. 그것도 많이.” “어떤 걸 사달라시는데.” “수입 이탈리아제.” “참 나 원. 그 나이에 어머님도 꼭 그렇게 비싼 등산복이 있어야 산에 가시나.” “자기 그때 일 잊었어. 내가 백화점 세일기간 때 보라색 점퍼 사다 드렸더니 싫다고 하셨잖아.” “사다드린 건 알지만 뭐라 하셨는데?” “내가 스타일이 있지. 이걸 입고 어떻게 모임에 가냐고 했잖아.” *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 생신이 다가오길래 백화점 들른 김에 세일도 하고 해서 어머니 봄 잠바를 아내 기정씨가 사다드렸다. 그것도 카드로 3개월 할부까지 해서. 그랬더니 입어보지도 않고 차라리 돈으로 주지했다. 그래서 기정씨 보기도 그렇고 해서 형오씨가 언성을 좀 높였다. “어머니 그냥 입으세요. 태환애미가 그래도 어머니 생각해서 사다 드렸는데 색깔도 좋네요.” 뜨악하게 쳐다보는 표정이 아쭈 이것봐라. 니 여편네 편드냐는 듯 한 얘기다. “얘! 요즘 이렇게 유행지나 세일하는 거 입고 나가면 영감들이 어디 손이라도 잡아 준다디?” “예? 무슨 손요?” 눈치도 없이, 사실 눈썰미조차도 없는 형오씨가 반문했다. “요즘 영감들이 얼마나 세련되고 눈썰미가 있는데. 아들 대기업과장이고 며느리도 선생하며 돈 번다는데 내가 이런 옷 입고 가면 대번에 안다. 사는 게 그렇나 하고 말이다. 요즘 할매들이 얼마나 잘 차려입고 나오는 줄 알기나 아나 모르겠다. 노인대학이고 복지센터에 가면 멋쟁이 영감 할마시들 뿐이다. 내가 영 먹고 못 살면 이런 얘기도 안한다. 살 때 좋은 것 한 번 사면 결혼식하고 상가 집 갈 때 빼고 다 입고 다닌다 아니가. 메이커를 턱하고 입고 가야 영감들이 언덕바지 올라갈 때 힘들면 손 내밀어 탁, 잡아 준다고 그 말이다.” “차~암 어머니도.” 형오씨 입가에 웃음이 실실 새나왔다. 이 할마시 연애하나? 감은 잡았지만 확실하다. 헐~ 이강자여사!! 좋겠다. 할마시 청춘이다. 청춘. 사랑은 아무나하나 말이다. 나이 들어서도 저런 감정을 갖는다는 게 살아있다는 증거겠지. 그래도 우리 집에서 제일 살맛나는 사람은 분명 이강자여사시다. 보드라운 데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는 할마시가 그래도 영감들에게 잘 보이려고 옷 타령이라니. 도리어 그런 어머니가 형오씨 눈에는 귀엽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나 해 드릴 걸. 그 속내를 몰라드린 게 불효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속으로 다가오는 어버이날에는 꼭 해드려서 좋아하는 영감님 골라 가면서 손 실컷 잡게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그 날이 다가오니 월급쟁이 수준에 무리는 무리다. 아무리 눈 질끈 감고 해드리려고 해도 사실은 사실이다. “요즘 추세가 그래요. 오죽하면 태환이도 잠바 사 달라고 저렇게 평균올린다고 늦도록 공부할까?” “학생이 공부하는 것 당연하지. 왜? 또 평균 올리면 뭐 사준다고 했어,” “그럼 어떡해. 요즘 애들 다 입고 다니는 바람막이 사줘야지. 우리애만 안 입고 다니면 왕따 당한다고.” “있잖아. 졸업 기념으로 형숙이가 백화점 데리고 가서 사 줬다며. 근데 뭔 바람막이.” “그건 패딩잠바고 이건 바람막이라고요? 말 그대로 봄가을에 입는 바람막이.” 돌아버리겠네. 무슨 팩인지 거즈인지 마사지 한다고 얼굴에다 달걀귀신 같은 탈을 덮어쓰고 따박따박 말하는 꼬락서니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속에 불이난다. 어머니도 등산복타령 아들놈도 무슨 바람막이인지 뭔지 사달라고 하고 마누라는 저번 회사 야유회 가면서 홈쇼핑에서 사면 여러 벌 할 것을 굳이 백화점에 가서 비싸게 모자에서 배낭까지 일체 맞춰 입고 나선지가 엊그제다. 사실 형오씨도 근사한 고어텍스 때깔나게 갖춰입고 어깨 다리 힘주면서 뒷산이라도 오르고 싶다. 지금 입고 있는 검은색 등산복은 형숙이가 지네 서방이 살찌고 나서 안 어울린다고 바지랑 점퍼를 가지고 온 것을 몇 년 동안 입고, 등산화도 몇 년 전에 사 신은 것을 지금도 잘 신고 다닌다. “에이시! 골고루들 한다.” “카드 줘.” “왜? 형숙이도 현금 드릴 거잖아, 그러면 돈 모아서 사시게 당신이 돈 드리면 되잖아.” “그게요. 돈하고 카드하고 같이 필요하거든요. 어머님이 직접 가셔서 사셔야 된데요. 그것도 어떤 친구 아들이 한다는 백화점 매장에서요.” 형오씨는 담배가 급하게 땡겼다. 3분 동안 윗니 아랫니 혓바닥 까지 골고루 닦고 오늘은 반주도 사양한 채 축구를 보면서 아주 고요히 평화롭게 잠들라 했는데 그놈의 고어텍스인가, 바람막이 인가 하는 것 때문에 속이 시끄러워 잠이고 뭐고 다 달아나 버렸다. * 참 세상 좋아졌지. 내가 그렇게 나이 먹은 사람도 아니고 고작해야 40대 중반인데 소통이 전혀 불가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전 형오씨가 자랄 때는 청바지 한 벌 가지고 있으면 사계절 단벌 외출옷이 되었다. 그런 형오씨도 딱 한 번 헷가닥 한 적이 있었다. 한 번도 입 밖에 내보지 못한 비밀이기도 했다. 용돈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시기였기에 영어에 어두운 어머니께 엄마 이건 아주 비싼 건데요. 코싸인 값과 마블링 값이라며 우겨 돈을 삥땅 했었다. 그게 뭐냐고 물어오면 코싸인은 수학책값이고 마블링 값은 미술교재비라고 속였다. 그런 알토란같은 돈을 모아 산 것이 나이키 운동화였다. 흰색에 검정로고가 새겨진 운동화를 신고 나가면 삼국지의 장비가 든 칼날같은 문신을 내 발에 신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세상 어디로 가도 기죽지 않을 것 같아 빵빵하게 시내로 나돌아 다녔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 목숨과도 같은 신발을 어느 날 잃어버렸다. 첫사랑에게 이별의 말을 듣는 순간보다 더 가슴이 메어졌었다. 그것이 한이 되어 중학동창모임 이름을 끝까지 고집을 부려 나이키로 정해버렸다. 그래. 사 드리자. 사 드리지 뭐. 어머니 옷 그거 얼마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예전 그때 어머니도 목돈 들여 형오씨에게 신발을 사 주었었다. 잃어버리고 나니 이 놈 저놈 신고 다니는 나이키 운동화가 다 내 것 같았다. 먹먹한 마음에 삼일을 이불을 쓰고 들어 누웠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신발공장에 취직해서 받은 첫 월급으로 형오씨에게 나이키 운동화를 사 주었었다. 그때 돈으로 오 만원 정도였지 싶다. 그 돈이면 형오씨 1분기 등록금과 맞먹는 돈이었다. 어머니도 그렇게 사 주셨는데 어머니 등산복 그거 얼마 한다고 못 사드릴까 싶다. 잠바가 비싸도 몇 백 만 원 하는 것도 아닌 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사드리지 싶어 마음을 정하고 베란다 문을 닫고 거실에 들어서자 현관 도어룩 여는 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누구더라 싶어 현관문을 뻔히 쳐다보자 머리카락을 도끼날처럼 빳빳하게 세운 머리통이 쑥 들어온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북한의 김정은도 벌벌 떤다는, 동네 아저씨도 청년도 고개 숙이고 지나가는 바로 그 중학교 2학년에 수학하시는 우리 집 아들놈이 아닌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얼굴로 해맑게 웃던 녀석의 초등학교 졸업사진이 아직도 휴대폰 메인화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놈이 참말 술 담배 끊고 날 잡아 만든 그 놈인지 형오씨는 아득하게 아들놈을 바라본다. 머리에는 헤어 무슨가 젤인가를 발라 옆머리 죽이고 앞머리는 치켜세우고서는, 바짝 줄인 교복 바지에 윗 와이셔츠가 런닝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다. 언제부터 이런 꼬락서니를 하고 다녔는지 더듬어 보았다. 그동안 프로젝트를 맡아 늘 외근이고 출장에다 늦게 퇴근하다 보니 아들 얼굴 보는 게 고작 일요일 밥 먹을 때 본 것뿐이다. 황소 혓바닥으로 핥아놓은 머리를 한 아들 놈도 이 시간에 거실에 형오씨가 서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인지 현관 앞에서 멈춰 선 채 들어설까 물러설까 하듯 쳐다본다. “어어·· 아빠?” “어·· 그래. 너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어디 돌아다니다 지금 오는 거야.” 서로 누구세요, 안 한 게 다행인 만남이었다. 너무 급작스러워 서로간에 말이 절로 더듬거려졌다. 그래도 가장의 위엄을 이럴 때 보여야 하는 게 적절할 것 같아서 목소리 착, 깔면서 나 지금 열 받았다. 그러니 너 지금 고분고분하게 자수하고 들어가라고 예의있는 서브를 날렸다. “공부하고 오는 길이라고요. 아빤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그래요.” “모르긴 뭘 몰라. 그래 공부하고 온다는 놈이 머리 꼬락서니는 그게 뭐냐.” “요즘 스타일이라고요.” “공부하는데 스타일이 뭐가 필요해?” “진짜로 학원에서 보충수업하고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왔어요.” 녀석이 꼬박꼬박 대꾸하는 모습에 방금 피운 담배가 급 땡기다 못해 씹어서라도 넘겨야 할 만큼 억이 찬다. 이건 아니었다. 작년만 하더라도 큰소리 한 번에 눈물까지 글썽이던 놈이 아닌가. 머리통 컸다고 이것 봐라 싶어 목소리 톤을 최대한 올렸다. 나는 네가 오늘 한 일들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절대로 받아내지 못할 강력한 스매싱을 날렸다. “이노무 자슥이! 아빠한테 꼭 고렇게 대꾸해야 되냐. 응?” “진짜라고요. 다음 주가 중간고사라고요.” “그래? 네가 가는 독서실은 담배 피우는 놈만 가나? 뭣 땜에 니 몸에서 담배냄새가 진동하느냐 말이다.” “그게 아빠! 휴게실에서 형들이···.” 녀석이 순간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다. 완승이 바로 코앞이라고 일러주는 순간이다. “뭐어? 독서실 어디고?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그걸 보고 있어.” “아~ 아빠!” “아니 이이가 정말! 당신 빨리 방에 들어가요.” 안방에서 언제 튀어 나왔는지 아내는 대뜸 형오씨를 밀어서 안방으로 닭 몰아넣듯이 몰아넣는다. 쪼르르 현관에 서 있는 아들 녀석에게 다가가서는 가방부터 뺏어 들고 아들 방으로 같이 들어간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환자가 부축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마누라만 아니었으면 확실히 이긴 게임이었다. 이긴 게임을 놓친 허탈감이 밀려왔지만 더 이상 왈가왈부하면 꼴만 우습 게 될 것 같아 입 다물어 버린다. 짐작은 PC방에서 온 것 같은데 믿자 그래. 자식을 믿지 누굴 믿겠냐. 아니어도 형오씨 마음 편하게 믿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주문처럼 구시렁거려본다. “어머! 아들 미안해. 아빤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 “아 정말 짜증나!!” 아들 녀석의 징징거리는 변명이 들리고 곧바로 냉장고 문을 열고 과일 접시를 들고 다시 아들 방으로 들어서며 비염섞인 소리로 우리 아들, 하며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달큰하다 못해 상큼하다. 저 목소리 나도 듣고 싶다. 돈 벌어오고 얌전히 있는 내겐 왜 저런 목소리를 내 주지 않는지 아내의 성대를 지시하는 두뇌가 오늘따라 참 궁금하다. “당신 참 너무한다. 지금 중간고사 기간에는 우리 아파트 상가 술집들이 파리만 날린다고 하더라. 친구 아빠들은 학원까지 아이들 마중까지 간다는데 당신 간이 배 밖에 나왔어 정말. 애는 평균 올리겠다고 야단인데 아빠가 도저히 도움이 안돼요.” 방으로 들어 온 이후부터 모든 책망이 형오씨에게 돌아온다.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 하도 해 있는 꼴이 눈에 거슬려 아버지라고 몇 마디 나무랐다고 가장을 이렇게 묵사발을 만들어도 되는지 섭섭함이 해일처럼 밀려든다. 초딩도 아닌데도 기운이 쏙 빠지면서 눈앞이 침침해져오는 것이 급 노안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시험 그것 중요하지. 중요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진다. 진짜로 중요한 게 뭔지 모두들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정말이지 두고 봐라 다음 번 교육감 선거하러 가나봐라 싶었다. “내가 뭐 알았나. 그래도 그렇지. 머리 좀 단정하게 하고 다니라고 해. 바지는 스타킹도 아니고 말이야.” “요즘 애들 다 그렇게 하고 다녀요. 모르면 제발 가만히 계세요. 당신은 왜 그렇게 센스가 없어. 진형이 아빠는 아들 기 살린다고 미장원도 같이 가고 쇼핑도 둘이 간다더라. 도대체 어느 시대 사람이야 당신은?” “오랜만에 일찍 들어왔더니 완전히 왕따네. 내가 이래서 일찍 들어오기 싫다니깐.” “싫으면 나가서 자든가?” 더 이상 대꾸하면 싸움이 날 것 같아 형오씨는 냉장고문을 열고 먹다 남은 소주를 글라스에 부어 원샷으로 마셨다. 상품권 주나봐라. 그래도 업체에서 명절 인사라고 준 것을 꼬불쳐 놓은 것이 있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아내 기정씨에게 주려다가 자기가 알아서 옷도 구두도 핸드백도 사는데 준들 고마운 줄이나 알까 싶어 끝까지 모른 척 해 버렸다. 그래서 아들 녀석 평균 오르면 몰래 바람막이라도 사 줄까 싶었는데 오늘 하는 짓을 보니 그것도 괘씸해서 주기 싫다. 이번에는 정말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로 다짐을 하면서 이번 봄 부서 단합대회 때의 김 대리의 등산복 입은 말쑥한 모습이 세삼 떠올랐다. *
초봄이었다. 회사 창립행사 기념으로 부서마다 극기 훈련 겸해서 등산을 가기로 게시판에 공고가 붙었다. 형오씨 부서도 가까운 해안도시 마산에 있는 무학산으로 산행을 가기로 정했다. 산행준비야 도시락만 있으면 된다. 대충 김밥만 사라고 해도 부서에서 간다고 하면 아내 기정씨는 며칠 전부터 식단을 짠다. 인터넷을 뒤져 온갖 도시락을 보고나서 내 남편 기 살리는 확실한 도시락이라며 새벽부터 설쳐댄 보람으로 부장님도 우리 제수씨는 늘 김 과장 몸 챙기네. 여전하지. 라고 인사정도는 확실하게 듣는다. 그것까진 오케이바리 엄청 기 살고 좋았다. 하지만 몇 시간 뒤 도시락으로 힘이 들어간 형오씨의 어깨를 한 번에 팍 꺾어버린 일이 있었다. 부서원들이 아홉시까지 무학산 입구인 서원곡주차장에 집결하기로 했다. 산행도 업무의 연장이라 생각하는 형오씨는 택시를 타고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부부들끼리 젊은 연인들과 혼자 오는 60대와 회사 야유회 겸 단합대회 성향의 모임이 있는지 주차장은 금방 팀들끼리 모여 웅성거린다. 형오씨는 가만히 등산객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색깔들이 너무 튄다. 사무실에서나 거리에서 보다 이곳 산의 초입에서 느끼는 강렬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언제부터인지 차림들이 노란색과 주황색 빨강색으로 변해 있었다. 검은색 점퍼에 검은색 바지에다 검은 모자 그것도 등산용이 아닌 챙이 있는 운동모자를 쓴 어두운 색깔로 치장한 사람은 형오씨 뿐이었다. 패션쇼장도 아니고 산에 오르는데 무슨 색깔들이 저리도 요란한지 다들 심하다 싶을 정도의 패션을 한 중년의 여자 무리들이 올라온다. 괜히 주눅이 들어 절로 뒤로 물러서진다. “과장님” 언제 왔는지 사무실 미스 김이 다가온다. 역시 미스 김도 화사하다. 빨간색 손수건을 목에 두른 모습이 더 앳되어 보인다. “다른 분들은 아직 오지 않았나 봐요.” “조금 있으면 다들 오겠지 뭐. 기다리기 뭐한데 저쪽 벤치 옆에 가서 자판기커피나 한 잔 하지.” 미스 김의 묵직한 배낭을 대신 들어주며 커피 자판기 앞으로 다가갔다. 미스 김이 잔돈이 있다며 먼저 커피를 뽑아서 건넨다. 달달하고 텁텁한 것이 빈속을 타고 넘어간다. 멀리서 손을 드는 것을 보니 김 차장과 손 대리다. 그럭저럭 약속시간 한 10분 차이로 부장님이 이 대리의 차를 타고 마지막으로 오는 것으로 다들 집결했다. 직책만큼이나 배가 나와야 어울릴 부장님은 완전히 대학생 스타일이다. 원체 운동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회사 사무실에서 보는 양복차림이 아닌 등산복 차림의 부장님을 보자 형오씨 보다 더 어려 보인다. 총 인원은 8명이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였다. “다들 모였으니 무리한 산행은 피하고 여기서부터 산 정상으로 해서 대산 쪽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둘레길로 오는 것으로 하지. 그러면 딱 시간상 맞는 것 같네. 아! 그리고 미리 김 과장 내려와서 뒤풀이할 수 있도록 식당은 예약해 두었나?” “네. 옻닭 백숙집으로 정해서 예약해 두었습니다. 네 시 정도면 산행이 마무리 되지 않을까요?” “잘했어. 그럼 출발하지.” 직원들 앞에 선 김 부장은 데리고 있는 부서의 인원들을 한번 쓰윽 쳐다본다. 차림새를 확인하기라도 할 태세다. 물 좋은 클럽에 갈 때 옷차림을 점검하는 십대도 아니고 부장님의 시선이 형오씨에게 와서 눈길을 거둔다. 왠지 좀 거북하다. 부장의 눈길을 따라 형오씨도 부서 직원들의 옷차림을 주욱 훑어보니 다들 칼라풀하고 모자에 선글라스와 장갑과 가방까지 풀세트로 맞쳐 입었다. 형오씨만 언제나 검정옷 차림그대로다. 하긴 체육대회나 등산에도 언제나 몇 년째 그 차림이다. 돈이 없다기보다 형오씨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이 겉만 번지르하면 뭐하나 속이 꽉 차야지 싶어 옷차림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무던한 사람이었다. 반찬이야 투정을 좀 하는 편이다. 두 번 세 번 올라오면 젓가락질이 안 간다. 옷이야 있으면 입고 없으면 그만인 스타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결혼하기까지 어머니가 사다주는 옷이면 아무렇게나 입고 다녔다. 결혼한 이후로 아내 기정씨가 백화점에 가서 철마다 사다 안겨주었다. 그것도 몇 년 전이었다. 워낙 옷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내색을 하자 그것도 기정씨가 그만 두었다. 대신 자신의 옷과 아이들 옷을 사러 뻔질나게 백화점을 들락거렸다. 그러다보니 형오씨의 옷차림의 늘 고정적이었다. 검정바지에 흰 와이셔츠. 봄이면 분홍의 넥타이와 여름이면 청색의 땡땡이가 잔잔하게 들어간 것을 하고 상가 집에 갈 때 검정 넥타이와 짙은 겨울용 넥타이가 가진 게 전부였다. * 지금부터 오르막이다. 산행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몇 번 산행을 다녀봐서 느낀 것이지만 무학산은 도심과 연결되어 있고 산과 계곡이 어우러져 있는 아기자기한 산이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거리인데 바쁘다는 핑계로 최근엔 와 보지도 못한 곳이다. 둘레길을 만들었다고 야단이어도 한 번 와보지 못했다. 시에서 정비를 잘 했는지 계단과 정자가 정돈이 잘 되어 있는 것이 예전보다 산행이 편했다. 벌써 산을 내려오는 사람과 정자를 차지하고 간식을 먹는 산행꾼들도 보인다. 아침을 우유로 대충 때워서 그런지 속이 허하다. 다들 조금씩 숨이 차는지 미스 김이 제일 뒤에 처졌다. 일단 걱정바위에서 좀 쉬었다가 물이라도 마시고 올라가야겠다. 무슨 대회도 아닐 것이고 천천히 오르면 될 일이니 여유있게 주위도 살펴보면서 오르고 싶다. 봄비가 온 뒤라서인지 계곡물도 제법 흐른다. 활엽수 잎들이 푸르른 잎들을 마음껏 쏟아내고 있다. 모두들 각자의 생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다. 오르막만 계속 이어진다. 김 대리가 먼저 자리를 잡는다. “부장님!! 저기 걱정바위에서 조금 쉬다 가입시더.” “젊은 사람들이 무슨···. 조금 올랐다고 벌써 헉헉거려. 나는 자네 시절 부장님 모시고 지리산에 덕유산 일 년에 서 너 번은 꼭 올라 다녔다고.” “어제 술을 한 잔 해서 그런지 영 몸이 말을 안 듣네요.” “다들 정신력이지, 안 그래? 박 과장.” 숨이 턱턱 막히고 눈앞이 노래지는 터에 김 부장이 형오씨에게 의견을 구한다. 이쯤에서 우리 부장님의 젊은 시절 어마어마하게 술을 드셔도 다음 날 제일 먼저 와서 제 자리에 깔끔하게 앉아 업무를 칼같이 보더라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해야 할 시점이다. 정말이지 우리 부장도 개 아니면 어린애일까? 이 말은 우리모친 이강자 여사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다. 남자는 개 아니면 애다. 그러니 달래고 달래야 된다. 어떻게 달래냐면 개도 뼈다귀가 있어야하고 애도 젖 아니면 과자가 있어야 되듯이 부장에게는 바로 눈 내리깔고 손 좀 비비면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요. 어쩌고 저쩌고 했다하면 많이 오래도록 괴롭다. 우리 부장님 생긴 것은 여유 그 자체다. 넉넉한 풍채에 머리숱도 아직 풍성하지만 소갈머리는 진짜 쪼잔하다. 내가 안다. 왜 모르겠냐. 같이 한 솥 밥 먹은 지가 십 년이 훨씬 넘었는데. “그렇죠.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젊은 시절 못 따라오죠. 그 시절 우리 부장님 대단했었지. 같이 술 마시면 밑의 부서원들이 다들 먼저 넘어져도 끄떡없었잖아요. 정신력하나는 끝내주셨지. 그래서 우리부장님 별명이 코리안 헐크잖아.” 옛날은 모든 것이 영광이요. 현재는 늘 초라하지. 믿거나 말거나 형오씨는 의미심장하게 직원들에게 몇 마디 튕기고 배낭에서 물을 찾아 마신다. 아내 기정씨가 올라가면서 간식으로 먹으라고 담아 둔 비닐봉지에는 바나나와 초코바가 들어있다. 낑낑대고 올라오는 미스 김 대신 부장에게 바나나와 초코바를 먼저 챙겨드린다. 그리고 형오씨도 바나나껍질을 벗겨 한 입 문다. “부장님 집사람이 챙겨 주는데요. 이거 한 번 드셔 보세요.” 김 대리가 언제 배낭에서 꺼냈는지 보온물통에서 따끈따끈한 홍삼 액기스를 종이 컵 가득 담아 내민다. “오, 그래! 우리 김 대리는 제수씨가 아주 야무진가봐. 이런 것도 챙겨오고 말이야.” “부장님과 같이 가신다고 어제저녁부터 다린 것이라네요. 저기 과장님도 한 잔 드세요.” 김 대리가 건네는 홍삼 즙이 담긴 컵을 얼떨결에 받아든다. 김 대리는 역시 대단해! 아무리 얄밉게 보려고 해도 얄밉지가 않다. 한마디로 인간이 싸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업무도 확실하고 눈치도 있다. 내 밑 직원이지만 견제를 하다가도 도와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다가도 견제하고 싶은 녀석이다. 사람이 사실 진국이라 내 윗사람이면 진짜 괜찮은 상사일 것 같다. 근데 왜 내 밑이냐고, 이런 김 대리 때문에 업무든 인간관계에서든 늘 긴장감이 일어 조심하려고 한다. 야외에 나오면 마음들이 풀어지는지 슬그머니 아내 자랑 자식 자랑 다들 한마디씩 쏟아낸다. 그러면 서로 흉허물 없이 맞장구쳐준다. 악의 없는 흉과 소문과 위안이 필요해서 오는 것이지. 딱히 무슨 산이 좋다고 밀린 잠 자지 않고 눈 비비고 이렇게 왔겠느냐 말이다. 흠흠 거리던 우리 부장 그 사이에 장갑을 끼고 벗어놓은 모자 쓰고 일어나신다. 농담 아니고 진짜로 체력 하나는 좋다. “다들 일어나지.” 부장님만 없으면 다른 부서장들도 좀 깔 건데. 역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윗사람과 가는 산행은 앙꼬없는 찐빵 맛이다. 편한 사람들 끼리 가야 씹는 맛이 있는데 직원들 눈치도 좀 그래 보인다. 키 낮은 소나무가 보이고 갈대숲이 시작된다. 갑자기 뒤 처져서 걷던 김 대리가 나무계단을 뛰다시피 오르더니 소나무 앞에 우뚝 선다. 그 포스는 김 대리의 넉살좋은 입담이 지금부터 시작된다는 징조인 것이다. “지금 마주 보이는 소나무가 보이십니까? 네. 이 소나무가 바로 365계단에 나 홀로 서 있는 지조있는 그 소나무입니다.” 365개의 나무계단 사이에 앞으로 자라면 잘 생길 것 같고 지금도 꽤 매력있는 소나무가 보인다. 시사상식이 정력보다 세다는 김 대리는 숨어있는 문화해설사이다. 정치 경제 문화 철학 과학(요건 좀 그렇지만) 물어보면 일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튀어나온다. 야인 김 스피커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다. 부장님 이하 모두들 박수를 보내자 힘을 얻은 우리의 김 대리는 무학산의 높이와 만날고개의 전설 그리고 무학산의 옛 이름이 풍장산이라고 불리었고 바다 건너 두산 중공업 자리에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펴는 꼴이라고 해서 무학산이라고 불리었다는 내력을 10분 만에 요약하여 알려주신다. 지나가는 등산객들도 말 잘 듣는 초딩자세다. 아 잘난 저 주둥이! 미워할 수 없는 저 낯짝! 저러니 김 대리가 좋다가도 불안해지는 것이다. 형오씨와는 동갑이지만 입사가 이 년 늦어 아직 대리를 달고 있지만 올 연말 아무리 봐도 김 대리는 과장급으로 승진 할 것이다. 부장 승진은 아득하고 직원들은 치고 올라오고 그건 자연스런 일이지만 형오씨는 왠지 자신의 자리가 여기서 그만 일 것 같은 불안감이 한기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낀다. * 너른마당을 거쳐 무학산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쉬다가 대산 쪽으로 향한다. 느릿하게 걸어서 인지 시간이 벌써 12시가 가까워진다. 대산 올라가는 바람고개 들머리 정자에서 점심을 먹으면 딱 좋을 장소였다. 형오씨는 아내 기정씨가 싸준 점심 도시락을 편다. 늘 그렇지만 아내 기정씨의 도시락 싸는 솜씨는 형오씨의 자랑이기도 하다. 잔소리가 많아서 그렇지 남편 기 세운다고 애쓰는 것을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건 진심이다. 일하고 피곤할 텐데도 그냥 대충해서 보낸 적이 없다. 새벽부터 어시장에서 장본 것으로 도시락을 쌌다. 삼단으로 된 도시락뚜껑을 열자 다들 환호성을 지른다. 여린 수삼뿌리 튀김과 전복튀김 닭밤과 청량고추와 마늘을 넣은 볶음과 수육과 문어숙회에다 오이소박이와 배추김치 겉절이까지 김밥과 초밥은 기본이고 부장님을 위해 찰밥까지 했다. 여러 명이 먹고도 남을 분량이다. “역시 김 과장 제수씨는 달라. 여전히 미인이시지.” 김 부장의 칭찬 한마디에 형오씨의 불안감이 불어오는 서풍에 멀찌감치 날아간다. 산행 중에 먹는 점심은 애인과 먹는 점심 다음으로 맛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부서원들과 마주보고 먹는 식사는 늘 만찬과도 같은 풍성한 마음이 든다. 레스토랑 코스처럼 김 대리가 젓가락을 놓더니 배낭에서 포도주 한 병을 꺼낸다. “부장님! 산에서 먹는 포도주 맛 한 번 보시죠. 이 포도주가 청와대까지 들어가는 그 유명한 MB와인이랍니다. 서울 사는 처제가 선물로 보낸 것입니다.” “오 그래? 신의 물방울은 아니더라도 잘 익은 와인 맛 한번 볼까?” 부장이 요즘 들어 부쩍 포도주에 관심을 많다는 것을 훤히 안다는 듯이 와인마개를 딴다. 종이컵에 다들 조금씩 포도주를 따라 건배를 한다. 역시 김 대리의 안목은 깊다. 포도주는 달콤하고 분위기는 급상승이다. 와인병을 비우자 고 대리도 슬그머니 복분자 한 병을 꺼낸다. 산 위라 많이 마실 수는 없고 가볍게 입가심이나 하자고 가져왔단다. 술기운도 돌고 배도 부르고 마음도 넉넉하다. 휴식 후 커피로 피곤함을 달랜 후 다시 일어선다. 지금부터는 무학산 둘레길만 남았으니 다리 후들거림도 좀 덜할 것이다. 편백나무 숲길을 걷고 작은 폭포와 암자도 보면서 온 둘레길은 힘들지도 않고 정겨웠다. 세시가 훨씬 넘어 처음 모인 서원곡 계곡 주차장에 도착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뒤풀이만 남았다. 옻닭 백숙 집은 계곡쪽에 있었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예약한 방에 자리 잡자 곧바로 음식이 들어왔다. 맥주와 소주로 한 잔 하며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술이 돌고 분위기가 느슨해지자 부장님의 마무리 인사말씀이 있었다. “다들 오늘 수고가 많았어. 우리 부서원들 어디 데리고 다녀도 이제는 체력적으로나 스타일적으로나 빠지지 않아서 좋구먼.” 옆에 앉아있는 형오씨의 빈 술잔에 술을 한 잔 채우며 차분하게 농담처럼 한 말씀 하셨다. “김 과장! 오늘 산행계획 세우느라 애썼어. 그리고 말이지 등산복 좀 사 입지 그래. 요즘 뒷산에 올라도 다들 갖추고 다니는데 유행도 따라야 맛이지. 안 그래? 같이 다니는 사람 체면도 생각해야지.” 스타일! 우리 집 아들놈이 말하는 그 빌어먹을 스타일이 원인이었다. 이 불안감의 정체가 드디어 확실해진 것이다. 김 대리 탓이 아닌 형오씨의 비주얼적인 옷 스타일 탓인 것이다. 그래 맞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사회적으로 자리가 있으면 옷이라도 잘 차려 입어야 된다. 그건 백번 맞는 말이다. 옷차림이 빠지면 왠지 위축되고 사람이 없어 보인다. 우리 부장 솔직한 성질은 알지만 진짜 사람 쪽팔리게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것도 직원들 앞에서 말이다. 다들 머쓱해지는지 술잔만 만지작거린다. 술기운이 확 달아나버린 형오씨는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소주 맛 한 번 더럽게 씹다. 꼬불쳐 놓은 상품권이 어린 나무를 스치고 가는 서풍처럼 눈앞으로 휙, 지나간다. *
오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이다. 날씨도 쾌청하고 바람도 선선하다. 새벽부터 아내 기정씨가 형오씨 도시락 싼다고 일어나고 어머니가 일어나시고 아들 태환이가 화장실 다녀오고 다음으로 형오씨가 씻고 등산용 가방을 챙겼다. 아파트 문을 나서는 가족들의 옷차림이 모두 총 천연색이다. 아내 기정씨는 여고 동창생들 등산모임에 가고 어머니는 산악회 회원들 모임이 있고 아들은 친구들과 자전거동호회 모임으로 나서고 형오씨는 3월에 이어 회사 부서들끼리 하는 연례행사로 마지막 봄 산행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이다. 전에 없이 형오씨는 엘리베이트 안에 있는 거울을 통해 이리저리 옷매무세를 훑어본다. 등산복 로고가 적힌 사파리 모자에 청색 바람막이 잠바와 배낭 신발을 내려다본다. 고등학교 시절 나이키 신발을 산 이후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쓴 흔적이 역력한 복장이다. 확실히 사람이 달라 보인다. 아내 기정씨는 좀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형오씨는 싹 무시해버린다. 진작 이럴 걸 한 십년은 젊어 보인다. 형오씨 스스로 만족한 미소가 입가에 쓰윽 지나간다. 엘리베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형오씨 가족들은 에베레스트도 당장 오를 복장이다. 중무장한 채 안녕! 하며 각자의 길을 향해 흩어진다. 행복이 99%라도 모자라는 1%의 불안이 더 크다는 진실을 형오씨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머니 이강자 여사가 느끼는 손잡아 주지 않을 것 같은 그 불안감. 아내 기정씨의 사람 어디 기죽일 일 있어? 하는 불안감. 아들 태환이녀석의 등급이 있다고요. 메이커 딱 입고 나가면 우두머리가 된 기분이라고요. 내가 새롭게 태어난다니깐요. 비메이커 입으면 찌질이라고 놀려요,의 불안감이 시원하게 날려 보낸 아침이다. 다리에 힘 한번 불끈 주고 배낭을 추스르고 난 뒤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 말 달리는 소리가 다다다다, 들려온다. 수컷의 야성을 힘껏 뽐내는 기운이 초원을 가로질러 형오씨에게 달려드는 소리이기도 했다.*
박영희│경주 출생.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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