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신앙내용 정리 – 우리의 봉헌에 관련된 내용들
1. 안녕하십니까? 흔히 일정한 시간을 시작할 때, 이렇게 인사를 하지만, 처음에 사용할 만한 적당한 인사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2. 지난 4월부터 시작한 예비신자교리를 마치고 미사에 세례식을 거행하기 전에, <종합교리>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종합교리>를 한다고는 했습니다만, 이 표현이 합당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예비자교리를 주로 한 건, (**금요일반**) 사람들을 상대로 한 것인데, 제가 맡지 않았던 (**다른 반**)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분이 채운 그 시간을 지내고, 모처럼 길게 만나는 시간인데, 제가 어떤 내용을 말하면 지금까지 지내온 기간을 정리하고 종합하는 것이겠습니까? 더더구나 이 자리에는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되지 않은 분들, 이미 세례를 받은 분들도 있을 거라면, 합당한 표현은 더욱 더 아닐 것입니다.
3. 교육을 통해서 배우고 익힌 내용을 신앙의 시간에 맞춰서 정리하고 다시 말하는 것이 이 시간이지만, 인간의 지성이 발전하면서 정리한 기준에 따르면, 신앙에 대해서 얘기하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첫 번째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왜 배워야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나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예비신자교리를 하는 사람에게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사랑은 현실인간의 삶이 끝난 다음에 부활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일이 우리의 삶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세상의 삶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4.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처음 보여주신 ‘부활(復活)의 의미’를 먼저 생각하고 말할 순서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이 무엇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우리말사전에 부활(復活)이라는 말은 ‘①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남’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일은 산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부활이 가능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을 듣는 여러분이나 저는 ‘아직 죽었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부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또 부활이 어떤 모양이거나 어떤 체험일지 알지 못할 것이고, 올바르게 설명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5. 저도 만난 적은 없지만, 이 세상에 부활의 모습을 실현한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시라고 우리는 신앙에서 배웁니다. 제가 그 놀라운 일이 일어난 순간을 체험했거나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분은 하느님이셨으면서도 인간육신의 모습을 취하시고 인간의 세계에 들어오신 분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세계를 찾아서 들어오신 그분의 세상 삶이 순탄했고 그분의 삶에 아무런 굴곡이 없었느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입니다.
6.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 우리와 같은 삶을 살면서 ‘사람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동족들에게서 치워지는’ 삶의 따돌림이었고, 로마제국의 힘을 빌린 ‘하느님을 모독하는자’로서 십자가형이었으며, 십자가위에서 죽으신 다음에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지낼 축제인 빠스카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합당한 예우와 예절과 절차도 없이 서둘러 무덤에 넣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분을 가까이에서 봤지만, 전혀 그분의 존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사람들은, 그분이 하느님의 뜻을 알려준다던 일을 싫어했다는 것이고, 그분을 이 땅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서둘러 치우면서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입구를 막습니다.
7. 그랬는데, 사람들이 생각한 대로 그 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그 무덤의 무거운 돌을 밀어내셨고, 그분을 다시 생명의 나라로, 육신과 영혼이 합쳐진 삶의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분도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조금 더 가까이 계셨던 그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분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를 지낸 우리에게 가장 큰 원체험(原體驗)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세상육신의 삶이 멈췄다가 다시 살아난 본보기를 보이신 유일하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이 그러한 본보기를 보이신 것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을 알려주고, 그 부활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사람이 그대로 받아들였을까요?
8. 예수님은 그렇게 놀라운 영광을 부활이라는 모습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으로도 불리는 분이셨기에 그 일이 그분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분에게 그 일이 가능한 것은 그분께서 세상의 삶에서 보여주신 일들이 그 일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세상에서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을 때, 보여주신 일들을 복음서는 믿음을 담아 우리가 보고 그 일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기록합니다. 그분, 예수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일은 ①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이었고, ②사람으로서 세상에서 착하고 선하게 사는 방법이었으며, ③사람이 세상의 자기 삶을 통해서 하느님께 다가설 수 있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받아들이지 않은 몇몇 인간들은 그분을 제 멋대로 다루고 죽게 합니다. 로마제국의 행정장관, 총독 빌라도의 손을 빌려 죽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면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세상에 오시어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일을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드러낸 삶의 모습을 요즘말로 해석하면, 사람이면 너나 할 것 없이 특별한 일을 하지 말고, 해서도 안 되고, 보통의 모습으로만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얘기일까요?
9.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을 향하여 ‘나는 네가 싫어(!)’ 하는 감정만 드러낸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은 그들이 하느님을 거부하는 일이었고, 하느님을 향하여 인간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를 보낸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행동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이 일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그렇게 삽니다.
10. 그런 대우를 겪으신 예수님은 우리나라 땅은 아니지만, 대략 2000년 전에는 로마제국의 일부로 병합돼 있던 땅, 과거에는 유대지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렸던 곳에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신 그분은 성장하면서, 로마제국을 향하여 사람들이 바라던 혁명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현실을 뜯어고친 개혁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으면서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대한 존재라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도 있지만, 그분의 뜻이 어떤 것인지 알아들었으면서도 거부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하면, 자유로워지고, 자유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이 선택한 그 길은 구원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타락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저런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공동체나 무리를 이루는 군상(群像,=떼를 지어 모인 사람들)들 속에서 나는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 우리들 앞에 펼쳐진 삶입니다.
13.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에 맞춰 살 것이냐, 우리가 내 귀로 듣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도 그 정신과는 멀리 떨어진 삶을 살 것이냐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선택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지켜야 할 것들을 제대로 대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삶을 통해서 덕을 쌓을 것입니다. 물론 억지로 하는 마음은 없어야 하는 일입니다. 억지로 한다는 일로서는 우리의 삶에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4.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서 엇나가는 방법을 일부러 배워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삶을 스스로 판단해서 자신의 기초를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만들고, 행복을 누리기 원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15. 믿고 따라야 할 교리의 내용을 제대로 알고, 삶으로 드러내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축복이 실현될 것입니다. 이렇게 높고도 좋은 목적을 이루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담은 십계명이고, 교회가 실천하기를 바라는 교회법에 담긴 몇 가지 사항입니다.
16.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에 어떤 모양으로 드러나겠습니까? 신앙이 사람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오늘은, 교리시간의 종합이나 끝부분에 이르러서 하는 일이니,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연결되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다고 여기고, 실제로 바로 그것을 위해서 움직이기도 하는 돈, 다른 말로는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봉헌의 문제로 이야기를 한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7. 사람의 삶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이 돈이 사람의 삶에 힘을 갖게 된 것은 실제로는 ‘사람의 약속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을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잊고 삽니다. 그러한 만큼 현실에서 그(=돈)가 가진 힘은 막강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되기도 하고, 죽이게 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며, 웬만한 세상의 사람들은 오로지 그것을 얻거나 그것을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18. 돈을 사용하는 모습을 신앙인이 드러내야 할 모습에 연결해서 뭔가 말할 기회를 마련해야겠다는 의도로 준비한 것이 이 시간의 시작이었습니다. 시작부터 지금 말씀드리는 돈에 대한 얘기 전까지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기본이 되는 신앙을 세상의 삶에 연결할 때, 돈은 자기가 가진 힘을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내느냐는 것입니다.
19. 세상에 사는 그 어떤 사람도 이 돈의 위력 앞에서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내가 원하든지 아니면 원하지 않든지 돈이 나를 상대로 해서 드러내는 힘은 그 경계를 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에서 살아야 할 시간이 저마다 다르니 이 세상에서 살아야 삶의 끝이 언제인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필요한 것이 돈이니, 모으거나 효과적으로 써야 한다고 말하고, 그 일에 문제는 없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이 돈이기도 하고, 여러분의 가정이나 우리 본당의 여러 가지 모습을 바꾸고 좋게 꾸미기 위해서도 이 돈의 힘은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0. 신앙인들이 모여서 함께 할 행사의 진행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돈이기도 하고, 전기비용이나 직원들의 급료를 지불하는데도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돈입니다. 성당의 마당을 깨끗하고 평탄하게 바꾸는 일에도 돈은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냉난방의 시설을 위해서도 먼저 필요했던 것이 돈이었습니다. 이러한 돈은 성당이라는 곳에 모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21. 첫째 모습은 ‘우리 신자들이 성당에 와서, 미사 때 봉헌하는 <헌금>입니다. 둘째는 개인의 참여보다는 가정이나 가구단위로 협조해달라고 청하고 실제로 가정단위(=우리본당에 몇몇 한 가정에 2명씩 교무금을 내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로 납부하는 <교무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가정에 소득이 있다고 해서 2명이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가끔씩 가정에 경사가 났다거나 그에 속한 사람들이 특별하게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경우 그 일에 감사하는 뜻으로 봉헌하는 <감사헌금>도 볼 수 있습니다.
23. 또 모든 사람이 다 관심을 갖는 일은 아닙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사무실을 경유하여, 미사 때에 자신이나 자신이 기억하는 대상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해주거나 기억해줄 것을 청하면서 봉헌하는 <미사예물>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4가지 내용이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내 손을 떠날 때에는 일반적으로 권장하는 금액의 내용이 있지만, 그 금액이 얼마가 돼야 적당한지에 대한 것은 성경에도 또 교회법전에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23. 민감한 문제일 수도 있는, 돈에 관련된 얘기를 나눠서 할 순서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분들에는 예비신자들도 있어서, 교회공동체에 소속되는 과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이 공동체를 천주교라는 부르는 것에 대한 웃지 못할 얘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섬기는 우리 종교를 왜 천주교라고 부르는지 알어? 잘 모르겠는데, 왜 그렇게 부르는지 너는 알어? 너는 그것도 모르냐? 사람들이 예물을 봉헌한다면서 내는 헌금에 천 원짜리가 하도 많아서 그렇게 부른데!!’ 말이 되는 소리일까요? 이렇게 하는 표현이 말이 된다면, 이것은 스스로 우리의 품격(品格)을 낮추는 행동일 것입니다. 이 단계를 벗어나려면, 신자들의 주머니에서 오천 원짜리나 만 원짜리 혹은 오만 원짜리 지폐나 수표가 나와야 할까요? 그래서 천주교가 아니라, 오천원교, 만원교, 오만원교...수표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면 될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24. <교무금>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살이에서 내가 움직이고 내가 버는 것이 돈이고 그것은 오로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돈인데, 그렇게 내가 버는 것들 가운데서 10개중에 1개는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제관들에게 가졌다바치던 것이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하던 일종의 법칙이 있었습니다. 신정일치국가에서 통했을 얘기겠지만, 그것을 십일조(十一條)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내가 벌어들인 모든 수입의 1/10은 하느님의 것이니, 그것을 하느님께 바쳐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지금의 우리시대에 적용하고 사람들이 그대로 실천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참여하는 사람들이 내는 여러 가지 명목의 돈으로 교회공동체는 한없이 부자가 되고 그렇게 봉헌하는 사람들은 가난뱅이가 될까요?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려면, 부자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가난뱅이는 무엇을 말하는지 그 뜻이 정해져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봉헌자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머리를 씁니다. 내가 내는 돈이 십일조라면 그 액수는 너무나 많아, 내가 세상에서 써야 할 돈이 한두 곳이 아닌데, 예전에는 십일조라는 것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내가 벌어들인 것의 1/20이나 1/30이나 1/40이나 1/50만 내도될거야.... 지금 당장 못하면 나중에 미뤄서 한꺼번에 내도 될 걸!! 그것도 안 되면, 내가 협조하지 않고, 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겠어? 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소리를 하고 그 타협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행동하곤 합니다.
25. <감사헌금>에 대한 얘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의 삶과는 연결되지 않는 소리를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것은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도와서 그렇게 된 것이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이 내게 무슨 특별한 일을 해주었다고, 내가 힘들여 벌어들인 이 재화를 돈으로 바꿔서 교회동체나 성당에 바쳐야 하는가? 내가 내지 않는다고 무슨 문제가 생길 것이고,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행동할 사람으로 보여......하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특별한 일이 생기는데 하느님이나 교회나 성당이 해준 직접적인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럼 그렇게 행동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할 법한 말을 뒤집어놓거나 다르게 말할 논리를 신앙에서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26. <미사예물>에 대한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미사예물은 우리본당의 경우, 사무실을 통해서 사제에게 가도록 돼 있는 예물입니다. 그것은 다른 본당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이라는 말의 뜻을, 우리말 사전에서는 ‘사례(=감사하는)의 뜻으로 주는 금품’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만, 성당에서 사용하는 표현인 미사예물은 미사와 연결해서 사제에게 사례하는 의미로 주는 뜻만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의미가 특별한 단어입니다. 세상에서 예물을 설명하는 이 말과는 달리, 미사예물은 내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뭔가 이루어지게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 대상이 살아있다면 생미사로 신청하고, 그 대상이 세상을 떠난 분이라면 위령미사로 기억하여, 내 대신 내가 참여하는 미사에서 그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가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청하면서 미사 전에 봉헌하는 예물이지, 일이 다 끝난 다음에 ‘감사의 뜻’으로 건네는 물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작이 잘못된 선택을 하면 과정도 다르고 뜻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예물에 대한 금액에도 규정액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금액이 많거나 적은 것과는 상관없이 신청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제가 기도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예물을 봉헌하려면 어느 정도는 돼야 한다는 기준이나 금액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일은 ‘예물을 내고 그 미사에 나를 위해서 사제가 기도한다고 해서, 내가 돈을 내고 그 미사를 산다(=buy)’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27. 지금까지 <네 가지 사항>에 대해서 일반적인 얘기를 했습니다만, 말 그대로 이제는 금액에 대한 얘기를 조금 다른 차원에서 말해야 할 듯합니다. 우리가 드러내는 세상의 모든 삶을 거래관계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거래관계로 하는 일이라면, 내가 낸 만큼 돌려받거나 내가 냈다고 하는 금액에 이자를 붙여 받으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봉헌하는 일을 거래관계로 해석하면 심각한 문제에 빠집니다. 내가 헌금을 내면 얼마를 낼까요? 신약성경 사도행전2장과 4장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가졌던 집을 팔아서 그 돈을 모두 내놓고 다시 돌려받아서 쓰는 일은 없을 것이고, 돈으로 말하면 천 원짜리 몇 장이나 오천 원짜리 혹은 만 원이나 오만 원짜리를 낼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마련하는 것조차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말하는 내용은 내가 낸 것을 셈을 하고, 그에 이자를 덧붙여 받는 것을 기준으로 삶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계산하고 행동하지만, 하느님도 똑같이 인간에게 계산해서 돌려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28. 교회공동체의 유지와 발전, 그리고 그가 세상에 드러내야 할 사업(事業)을 위한 돈으로 사용하는 <‘교무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내는 교무금이라는 돈에 몇 천만 원이나 몇 억 원을 낼까요? 그런 사람은 없다고 단정할 일은 아니지만, 개연성(蓋然性.=절대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마 그럴 거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일)은 없는 일입니다. 그럼 다음 방법으로는 내가 얼마나 봉헌하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세상의 논리를 적용해서, ‘하느님이 내게 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냈으니 당신은 나에게 더 많은 세상의 재물을 돌려주셔야 합니다(!)’하고 말해도 가능할까요? 신앙인으로서 하는 일에 세상의 논리를 얼마나 적용하겠습니까? 흔히 하는 말로 로마식의 화폐단위를 적용하여, 한 달 동안 버는 금액에 대해서 십일조(1/10)이면 1달에 10일동안 버는 것을 봉헌하고, 삼십일조(=1/30)라면 1달에 하루 버는 것(=1데나리온)을 계산할 것입니다. 데나리온이라는 화폐의 단위를 요즘말로 번역하면, ‘일당(日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겠지만, 3만원인 사람? 5만원인 사람? 10만원을 1데나리온이라고 말한다면, 그의 3배나 4배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신자들이 <교무금>이라고 내는 돈을 평균이나 개인으로 계산해보면, 1데나리온의 금액만큼 봉헌하거나, 그것에서 많이 물러서서 1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을 봉헌할까 하는 판단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렇게라도 바쳤으니 교회는 유지되는 것이고 발전하는 것이니, 하느님은 내게 더 많은 축복을 베풀어주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까요? 인간의 셈법을 알 수 있는 본보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29. <감사헌금>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태도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재물인 돈을 싫어해(!)하고 말하거나, 하느님이라면서 내가 봉헌하는 돈의 액수에 관심이 있을까..하고 말할까요? 실제로 하느님에게 돈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다 알 것입니다. 신자들이 바치는 돈은 하느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활동하는 다른 사람과 그 일을 위해서 사용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지, 내가 내는 돈을 하느님이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담아 다른 소리를 하면서, 하느님에게는 돈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신약성경 마르코복음서7장에 보면, ‘내가 부모님께 해야 할 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 바쳤으니, 부모님은 내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으로, ‘코르반’이라고 외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고 내 맘대로 써도 좋은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표현인 그 말은 ‘사람이 자기 부모님을 공경하기 싫어서, 이것은 하느님의 것이라고 우기고,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욕심이 많은 자세를 드러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30. 미사예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에게는 돈이 필요 없지? 모든 것을 신자들이 다 해주니까 말이야......하면서, 하느님께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라고 청하면서 바친 예물의 일부를 신앙의 정신과 교회법의 규정에 따라 사제들이 사용하는 것인데, 내가 세상의 삶에서 몹시 아까워하거나 절대로 많이 낼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도, 내가 내는 돈을 받고 사제들이 나를 위해서 하느님께 정성을 다해 기도해주기를 청하는 자세는 어불성설입니다.
31. 내가 신앙인으로서 교회에 봉헌하는 이 돈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관심을 가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공동체에서는 신자들의 봉헌과 사용에 대해서 재정상황을 알리는 일도 합니다. 신앙공동체에 신자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헌금을 얼마를 냈고, 교무금은 얼마를 바쳤으며, 감사헌금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립니다. 하지만 미사예물에 대한 것은 공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고, 사제의 삶을 위해서 바치는 것이며, 그것은 교구청의 규정에 따라 다른 법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히브리백성들에게 부족들에게 땅을 나눠주실 때, 하느님의 제단에서 제사를 봉사하던 레위인들에게는 유산에 해당할 땅을 나누어주지 않고, 레위인들을 뺀 사람들이 나누어받은 땅을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레위인들에게 가져다 바치는 예물로 먹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미사예물이 그 옛날의 뜻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세부규정에 차이는 없습니다.
32. 내가 봉헌하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헌금과 교무금 또 감사헌금과 미사예물은 그 의미와 용도가 다릅니다. 앞의 세 가지는 그것을 다시 모아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하는 재원(財源)이 되지만, 뒤의 한 가지는 공동체와 그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제들의 삶을 위한 몫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에,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는 해당사항이 되지만, 뒤에 한가지인 미사예물에 대한 것은 정성을 담아서 봉헌하면 그 존재의 목적을 다하는 것입니다.
33. 봉헌에는 기쁨이 따라야 합니다. 즐거움이 따라야 합니다. 교회공동체에게 바치는 것에 돈 액수를 계산하면서, 세상의 기준에 따라 셈하는 일은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낸 것이니까,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수는 있어도 그 관심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차원은 다른 일입니다. 사람이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우겨도, 해도 좋은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으며, 그래도 하는 일에 손해가 뒤따르는 일도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인색하게 바치거나 아까워하면서 봉헌하는 것을 보고, 하느님께서는 과연 나에게 아낌없이 되돌려 베풀어주실 것인지를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많이 번다는 것을 교회공동체에서는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내가 얼마를 내도 아무 상관이 없지. 내가 번 돈을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친다는 교회에 많이 내야할 이유도 없으니, 조금만 내도되지 않겠어.... 내가 적게 낸다고 무슨 문제가 있을까? 사람은 모릅니다. 하지만, 내 삶의 모습과 그 안에 담긴 자세를 하느님은 아실 것입니다. 내가 어떤 정성으로 이 자리에 다가왔으며, 내가 하느님께 바친다면서 교회공동체에 하는 일의 정성과 그 크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내게 생길 일의 의미도 달라지겠지요?
34.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 다 적용된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하느님을 대하는 일에는 적용되지 않을 일인지 그에 대해서 따지거나 계산하는 자세는 과연 옳은 것인지는 우리가 따로 정확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바보일까요? 나는 아주 조금만...아까워하면서 아주 조금만 하고 교회공동체를 생각하면서 바치거나 행동했는데, 하느님은 내가 가진 마음자세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교회를 통하여 내가 주체하지 못할 만큼 많은 축복을 내려주셔야 할까요?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하느님은 과연 그렇게 움직이시는 분일까요? 우리는 하느님께 뭔가를 바치면서, 하느님을 향하여 얼마나 많은 감사를 요구하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35. 개신교신자들이 행동한다고 하는 ‘주일은 쉽니다. 주일에는 하느님을 위해서 산다’는 그 자세가 천주교신자들에게는 얼마나 있는지 몹시 궁금한 일입니다. 물론 모든 개신교신자들이 다 하는 행동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하는 얘기들 가운데서, 우리가 배울 것은 없을까요? <하느님,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바쁜지 아시지요? 지금은 세상의 것을 열심히 하고, 나중에 시간에 여유가 생기고, 세상에 할 일이 없고 늙었을 때, 그때 가서 시간을 좀 더 내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세상의 일만 열심히 한다고 제게 화를 내지는 마십시오. 제 마음 아시지요?> 하면 어떻게 될까요?
36. 루카복음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이야기에 나옵니다만,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면서 하느님에게서 축복을 얻을 수 있고 청하는 일에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37.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신앙인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안에 살기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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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설명
2015년 교리교안23---봉헌에 관련된 내용
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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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1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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