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6장 1-6절
제목 : 배척
1. 내가 가장 상처받고,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일 가능성은 제로이다. 조금 알면 조금 상처 받고, 많이 알면 많이 상처 받는다. 그만큼 기대하고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배반당할 때, 우리는 외적으로 분노하거나 안으로 절망하는 것이다.
예수는 당신이 나고 자란 고향, 명절이면 으레 모여 같이 식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함께 기념했던 친척들, 자신과 함께 성장했던 친구들, 그가 목수로 일할 때 일거리를 주었던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하신다. 그때의 실망감이 어찌나 컸던지 마가는 예수가 놀랐다고 하고, 기적을 극소수에게만 일으키시고,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선지자의 운명에 대한 예수의 체념어린 말을 인용한다.
이 본문에서 초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고향 사람들의 배척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과 믿음의 상관관계이다.
2. 고향에 당도한 예수는 으레 안식일에 회당에 들러 가르친다. 고향민들은 가르침의 내용과 권위에 압도당한다. 연달아 던지는 세 개의 물음이 그 증거이다. 어디서 이 지혜를 얻었고, 이 지혜의 본질은 무엇이고, 어떻게 기적을 일으키는가? 그러나 이것은 물음이 아니라 의문이다. 그것은 이 의문의 주어를 보면 된다. “이 사람은.” 예수의 정체와 본질에 대한 탐색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예수가 행하는 일과 그의 가르치는 말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은 당연한 태도이다.
하지만 이들이 찾은 대답은 그의 출신 성분이다. 예수의 가족이다. 예수가 목수이었다는 것, 그리고 예수의 형제들의 이름에 관한 정보를 우리는 이들의 말을 통해 입수한다. 목수는 당시에는 나무만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돌이나 금속을, 그리고 건축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요즘도 그렇지만 혼자 일하지 않고 집단으로 움직인다. 동네 사람들은 예수가 일하는 것을 다 보았다. 그는 그냥 목수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이름에서 인상적인 것은 예수를 가리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 여러 견해가 있다. 요셉이 일찍 죽어서 그렇다느니, <찾아서 쓸 것> 등등의 이론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예수를 얕잡아 본 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성을 사람의 수에 치지도 않던 당시에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호칭한 것은 무시하는 발언일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예수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있다. 이를 가리켜 선입견이라고 한다. 제 아무리 다른 정보가 주입이 되더라도, 기존의 통념을 깨뜨릴만한 데이터가 축적되고 축적되어 마침내 그것으로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고수하는 것을 선입견이라 한다. 예수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고 마침내 죽은 여자 아이를 살리는 일련의 기적에서 본 바와 같이 지금 예수의 말과 행동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에 대한 응답은 회개하고 믿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예수로 보지 않고 그의 출신과 가정, 배경을 보고 판단했다. 소위 혈연, 학연, 지연, 인연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사람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잘 보지 않는다. 자신은 사람으로 봐달라면서 말이다. 한 사람이 선택하지 않은 것, 출생과 더불어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것, 그리하여 애써 노력하여 얻지 않은 것, 그냥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행세하고, 그렇지 않은 이를 괄시하는 것, 그 사람은, 그런 사회는 믿음이 없는 곳이고, 복된 소식이 아니라 슬픈 소식만 넘쳐 날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니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해야 하겠지.
3. 그래서 인가, 예수는 다른 곳과 달리 고향에서는 기적이 별로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은 구약적 배경을 갖고 있다. 바로 예레미야와 에스겔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을 때부터 자신들과 자신들의 메시지가 거부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cf. 트로이의 예언자의 운명) 두 사람 만이 아니라 모든 예언자들의 언행은 불편하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너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라. 그래야 산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 그래야 인간답게 산다.” 그래서 참 사람에게는 반드시 거절과 거부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가는 희한한 표현을 사용한다.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다.”(5절) 그리고 “놀라셨다.”(6절) 하나님이신 분도, 그 많은 기적을 행하시던 분도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힘을 못 쓰신다는, 그러니까 기독교의 통상적인 교리인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못하실 리 없는 하나님이 정말 못하신다. 왜?
대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존중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로마 황제는 타인의 자유와 의사와 상관없이 강요한다. 무력으로 침공하고 짓밟는다. 하지만 다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오히려 자신의 의지와 의사를 타인에게 맞춘다. 우리를 섬기러 오셨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막 10:45)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십분 존중하신다. 자유를 준다는 명목으로 자유를 앗아가지 않는다. 당신의 권리와 권능이 침해받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우리를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존중하신다. 다시 한 번 마가복음의 예수의 정체에 관한 공식을 기억하자. 종으로 오신 왕, 예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복음이다.
다른 하나는 믿음이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살아낸다. 기적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는 지시이다.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전체 흐름에서 보면, 전반부는 기적이 압도적이지만, 후반부는 온통 십자가이다. 그리고 예수의 기적을 숱하게 보면서도 가깝게는 제자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잘 모른다. 나중에 보겠지만, 오히려 이용하려 든다.
그러므로 기적은 자동적으로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지만 말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은 기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산다. 기적 없이도 살지만, 믿음 없이는 살지 못한다. 때문에 공자도 「논어」에서 신뢰가 한 국가가 존립하는 국방과 경제에 우선한다고 했던 것이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많이 불렀던 노래처럼, 돈으로도 못가요, 지식으로도 못가요, 어여뻐도 못가요, 믿음으로 가는 하나님 나라!
4. 예수를 따른다고 하지만, 한쪽은 여전히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대한다. 그들에게 하나님과 교회는 자신의 연줄을 연장하고 확장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없다. 종됨이 없다. 다른 한쪽은 기적만 바라보고 산다. 기독교가 자신의 삶을 일거에 뒤바꿔줄 것으로 기대한다. 작게는 질병도 낫고, 월급도 오르고, 크게는 세상을 한방에 확 바꾸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다. 섬김이 없다. 이들 두 부류의 공통 특징은 누군가를 자신의 종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예수를 따르는 척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배척한다. 그런 예수가 그들에게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거부한 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까? 개역개정에서는 ‘배척’(4절), 새번역에서는 ‘달갑지 않게 여겼다’고 한 단어는 우리가 익히 들어본 ‘스캔들’이라는 단어의 헬라어이다. ‘스칸달론’이다. 여기서 그 의미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졌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를 거절함으로써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엎어진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는 한, 기적을 일으키는 술법사가 아니라 믿음으로 따라야 할 분으로 보지 않는 한, 언젠가 예수 신앙에서 이탈한다. 좋은 땅이 되어 열매 맺지 못하고, 자라다가 만 가시덤불만 무성한, 그래서 베어야 할 나무가 될 뿐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한, 한 사람을 자신의 이해관계 유무로 평가하고 대우하는 한, 그는 자신이 행한 대로 받을 것이다. 승승장구할 것 같아 보이지만, 그리고 어쩌면 세상에서는 끝까지 잘 먹고 잘 살는지 몰라도 적어도 하나님 나라에는 못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인데, 그는 사람답지 않게 살지 않았던가? 하나님 나라를 배척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배척당한다.
첫댓글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봄...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삶의 태도를 잃어버린 세대 속에 살아간다는 생각이 드니...예수의 고향이 바로 한국 땅이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