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와 함께 - 정양
봄나들이 삼아 쑥이나 캐러 나섰습니다
시냇가에 방죽길에 논두렁길에 햇살이 밟히는 마른 풀밭에 기죽은 세월을 깔고 앉아서 손시리던 유년(幼年)을 다듬습니다
어른거리는 아지랭이와 눈이 맞아서 아내는 저만치 눈이 맞아서 먼 산그늘은 하늘빛으로 수런거리고
불지르고 싶은 불길처럼 쓰러지고 싶은 마른 풀밭에 서로 손을 잡으면 아무 풀이나 다 움이 트고 있었습니다
* 진달래 캐러 왔다가 - 정양
뜰에 옮기려고 진달래 캐러 산에 왔다가 진달래꽃 흐드러진 산자락 삽자루에 기대어 넋놓고 꽃구경만 한다
마음 다 비운 듯이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래도 꽃들이 심상치 않다 화장끼도 화냥끼도 없이 그냥 바람난 바람난 게 무언 줄도 모르고 그냥 바람난 아슬아슬한 여자애들만 같다
누가 진실로 마음 비우고 하염없이 바라본다면 그 곁에 다가와 비로소 맘놓고 곱게 필 진달래꽃
꽂았던 삽 뽑아들고 돌아보지도 말고 그냥 돌아갈거나 그냥 돌아가고픈 속을 환히 알고 있는지 어디 한번 일 저질러보라고 깔깔거리는 산자락마다 흐드러지는 진달래꽃
* 벚꽃길 - 정양
알부민이나 로얄제리 같은 귀한 것들은 아무데나 내둘리면 금방 상해버린다고, 꽁꽁 냉동보관이나 해야 가까스로 견뎌낸다고, 사람 사랑하는 일도 그와 같다고, 눈감고 입다물고 겨우내 묵은 벚나무들 줄지어 서 있던 길 보고 싶은 옷깃이나 꽁꽁 여미며 나는 그 길을 지나다녔네
그 길 그 하늘에 저 숨막히는 눈부신 꽃잎들 보아, 무슨 독한 맘먹고 볼 테면 보라고 못 견디어 휘날리는가
다 들켜도 짓밟혀도 좋다고 벚꽃은 저렇게 휘날리려고 피는가보다
* 사루비아 - 정양
너를 안으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거센 물길로 지친 산길로 너를 보내고 물길도 산길도 오만가지로 다 막히고 미친 바람만 그렇게도 불어쌓더니 선사(先史)의 어느 가을 햇살을 훔치어 너는 반짝이며 돌아오느냐 오만가지 그리움으로 눈이 부시어 미치다 만 햇살로 돌아오느냐 잊을 일도 버릴 일도 이제는 없는 햇살만 햇살만 뜰에 남아서 숨 막히어 훔쳐보는 사루비아꽃 새빨간 거짓말처럼 사루비아는 한사코 피어 있다
* 저녁놀 - 정양
울타리마다 내버리듯 남은 인정을 널어놓고 떠나던 길 묵은 쌀빚 받으러 가는 고향길에 노을이 탄다
수수밭머리 낯익은 눈 녹는 모습 산기슭 들판머리로 눈 덮힌 노을
노을이여 긴 겨울잠 속에 숨어 흐르는 검은 피를 가리고 핏빛 살냄새를 가리고 횟배 앓던 유년의 어지럼증을 저 빛깔들을 거슬러오는 동화여
노을 비끼는 수수밭머리 들판머리로 왜 이리 들개처럼 내닫고만 싶은가 검은 살냄새 두르고 외로운 짐승처럼 울고 싶은가
나에게로 오는 휴식처럼 사랑처럼 서러운 빛깔들처럼 서러운 묵은 빚 받으러 오는 노을이 탄다
* 가을햇살 - 정양
산모퉁이 빈집 바랭이풀이 토방까지 술취한 여자처럼 쓰러져 있다. 초가을 햇살이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누가 보든 말든 두엄자리 옆 호박잎들은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먹고 비탈길 칡넝쿨은 너풀너풀 그 햇살을 뒤적거리고 바랭이풀 함부로 쓰러진 텃밭에 팔랑거리는 메주콩잎이 띄엄띄엄 서서 연신 아는 체를 하고 있다 대숲에는 댓잎들이 보일 듯 말 듯 자디잘게 그 햇살을 쪼아먹는데
해갈이하는 먹감나무는 온통 눈부시게 반짝거려서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을 감추고 있다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낯을 붉히며 도망도 못 가고 두근거린다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가 지난 지가 언제인데도 염제의 기승은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아침 저녁에는 제법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지만 한낮에는 여전히 삼십도를 넘나드는 무더위에 우리의 기력은 데친 시금치처럼 축 늘어진다. 지난 여름의 혹서는 얼마나 끔찍했으며 때아닌 호우는 얼마나 광포했는가. 그럼에도 염제는 물러설 내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다. 이제는 기강이변이 '이변'이 아니라 일상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시인은 노염 속에서도 가을의 기미를 놓치지 않는다. 모두가 짜증내는 늦더위의 강렬한 햇살에서 곡식과 과일이 알차게 여물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시인에게만 주어진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도시의 번잡한 일상을 살다보면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 권능은 산과 들을 대할 때 기지개를 켜며 깨어난다. 그때 시인의 시야는 가없이 확대되고 후각과 촉각은 더할 수없이 예민해지며 마음 또한 무한정 너그러워진다. 자연 앞에 선 시인의 감각과 의식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처음으로 알몸이 된 숫처녀처럼 흥분과 욕망으로 불타오른다. 밭두덕에 지천으로 자라는 바랭이풀이나, 두엄자리 옆 호박잎, 그리고 대숲의 댓잎이 예전과 다르게 정답게 느껴지고 그들의 수런거림이 다정한 연인의 속삭임같이 여겨지는 것도 시인의 감각과 의식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눈에 띄는 사물들은 새롭거나 신기할 게 아무것도 없는 잡초거나 호박잎, 먹감나무 따위의 농촌을 구성하는 일상적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시인의 오관과 의식의 투망에 걸리면서 새로운 색깔과 향기를 발한다. 시인의 눈에 호박잎은 "누가 보든말든 /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먹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갓난아이로 보이고, 얽히고 설킨 채 뒤엉켜 있는 칡넝쿨 또한 "너풀너풀 / 그 햇살을 뒤적거리는" 개구재이 소년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그것들은 도시에서 아귀다툼하며 생존경쟁을 하는 인간과 달리 따가운 가을햇살을 사이좋게 나눠 받으며 속을 살찌운다. 그러면서 자신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인에게 "연신 아는 체를" 하며 반겨주는 넉넉한 마음도 잊지 않는 것이다. 이 시의 미덕은 의태부사의 적절하고도 교묘한 활용에서 찾을 수 있다. "두엄자리 옆 호박잎들은 /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먹고 / 비탈길 칡넝쿨은 너풀너풀 / 그 햇살을 뒤적거리고 / (...) / 팔랑거리는 메주콩잎이 띄엄띄엄 서서" 와 같은 구절의 의태부사가 창조해내는 시적 효과는 매우 정감적이고 따뜻하다. 특히"해갈이하는 먹감나무는 온통/눈부시게 반짝거려서/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을 감추고 있다/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이/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낯을 붉히며/도망도 못 가고 두근거린다"에서처럼 '드문드문'이란 의태부사의 중첩과 반복, '햇감'과 '햇살' 등 유사한 음운의 반복을 통한 밝은 이미지의 창출, '도둑ㄱ질'과 '도망'이 노리는 일종의 두운 효과 같은 것들은 이 시인의 탁월한 언어감각을 증명해주는 훌륭한 보기들이다. 우리 시에서 의성어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 특별한 시적 효과를 거두거나, 유성음으로 운율의 효과를 거둔 적은 많아도 의태부사나 무성음을 이용한 사례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 그것은 의성어나 유성음보다 의태어나 무성음이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이 시인은 의태부사와 무성음의 파격적 반복을 통해 뜻밖의 효과를 거두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그냥 눈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가만히 소리 내어 몇 번이고 읊조려야 한다. 그러면 눈부신 초가을의 햇살 속에서 짙푸르다 못해 서서히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감잎에 숨어 발갛게 익어가는 햇감의 수줍은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그 정경은 무더위에 쇠잔해진 우리의 기력을 되살리는 청량제가 되어 새로운 의욕으로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시인이 발견한 가을햇살 속에서 햇감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도 조금씩 영글어가는 것 같다. (장영우)
* 내 살던 뒤안에 - 정양
참새떼가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감꽃들이 새소리처럼 깔려 있었다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 감나무 가지 끝에서 구렁이가 햇빛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치잉칭 풀리고 있었다 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고 있었다
아아, 그 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가 꿈자리마다 사나운 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 몰매 속 몰매 속 눈 감는 틈을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이, 빛나는 머언 실개울이 환성들이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익는 흙담을 끼고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가뭄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 팔매질하며 아이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감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 두근거리며 감꽃들이 피어 있었다
■ 근자, 이렇게 아름답고 충격을 주는 시를 대해본 적이 없다. '꽤 힘들여 썼구나' 싶은 시는 더러 대한 적이 있어도 이렇게 오래오래 인상에 남겨주는 시를 대하기는 퍽 오래간만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나 한 사람만의 기호 탓일까. 우리의 현대시가 해방을 분수령으로하여 그 이전의 역사를 대충 30년으로 잡는다면, 해방 후의 역사도 어느새 해방 전과 거의 맞먹는 30년이란 연륜이 흐르고 있다. 그 동안 김광섭, 유치환, 서정주, 박목월, 김현승, 박남수, 김춘수, 김수영, 조병화, 신동집, 정한모 등 많은 거봉들이 있지만 그 뒤를 잇는 젊은 시인들(30,40대면 별로 젊지도 않지만)의 수 또한 헤아릴 수 없을만치 많고, 이들 중 비교적 신인층이라 보아지는 鄭洋시인의 詩는, 우리 한국현대시를 정통으로 추진시켜나가고 있는 희귀한 존재라 보아진다. 한국의 서정시가 여기까지 발전해왔음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담담하고 명확한 한 행 한 행의 전개가 얼마나 암시적이며 신선한 느낌을 가져다주는가. 현대를 노래한다고 턱없이 낱말과 낱말을 엮어나가는 추상적 심상세계에 비한다면 이것은 살아 있는 생명, 생활, 그리고 내용 자체다. 또, 오늘날 한국적인 시를 찾는다고 일약 토속세계로만 눈을 돌리는 경향이 많은 가운데, 鄭洋詩人과 같이 일상 속에서 조용히 한국적인 것을 찾는 작업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무엇 때문에 시를 쓰는가? 새로운 시의 시험을 위해서? (소위 시험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새로운 시의 개척자로 자부하는 시인들의 작업도 대단한 것은 없지만). 아니다. 우리들이 시를 쓰는 것은 '우리들의 시에 의의를 가져다주는 그런 생활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새로운 시험은 그 다음에 오는 문제이다. 시험이라는 미명 아래 엉터리시를 써가며 저널리즘의 한 모퉁이에서 賣名이나 하고 한국현대시를 좀먹고 우리의 방향감각을 빼앗는 그런 무리들을 경계해야 한다. 미셀 레리스가 <게임의 법칙>에서 시를 가리켜 게임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들이 그것을 그냥 받아들여 <시는 게임이다> 하는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어떤 한 개인의 본능만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전체적인 문화, 전통의 수준문제인 것이다. 다소곳이 가슴 두근대며 수치심을 품고 있는 것은 이 땅의 여성만이 아니다. 자연 자체가 이 땅 여성의 성정을 닮고 있는 것인지, 이 땅의 여성이 자연을 닮고 있는 것인지, 하여튼 우리는 여기서부터 늘 출발해야 하고 또 이 출발점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김윤성)
* 물 끓이기 -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 정양의 「물 끓이기」에서 중심이 되는 이미지는 '냄비 속의 맹물'로, 시인은 어느 날 국수를 삶기 위해 물을 끓이다가 이러저러한 상념에 빠져든다. '맹물'을 '끓'이다가 시인은 문득 자신이 '끓어오를 일 너무 많'으나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즉, 시인은 '끓'는 '물'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문제는 '끓어오를 일'의 빌미가 되는 것들은 '작고 천한 모기'와 같은 것들.'말단'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무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작고 하찮은 것들이 사람들을 '끓어오르'게 하고 '열받'게 한다. 결국에는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이고 '열받는 사람만 쑥스'러워질 것임을 빤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끓어오르'기도 하고 '열받'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사의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너무 크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은 너무 크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추상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인 것으로 인해 흥분을 하기도 하고 화도 내기는 하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원인 제공자는 뒤편에서 작디작은 세상사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힘일 수 있고, 따라서 사람들이 '열받'고 '끓어오르'지 않기 위해서는 '세계'의 개혁은 근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직도/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이고 '열받는 사람만 쑥스'러워지는 '세상'에서,'다산 선생'과 '김수영 시인'이 살던 때와 비교해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세상'에서 시인은 여전히 '끓어오르'고 '열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시인은 '끓어오르'고 '열받'을 일이 없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꿈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고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란 어떤 것이겠는가.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란 감정 표출의 자유가 존중되는 세상일 것이다. 시인이 꿈꾸는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란 바로 '그런 세상'인 것이다. 즉, 이 시의 끝 부분에서 시인이 암시하고 있는 듯, 그는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맘놓고 넘'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의 염원을 反語的으로 읽을 수도 있다. '끓어올라 넘치'는 식의 감정 표출의 자유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라는 시인의 물음은 수사적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그러한 세상이란 얼마나 아름답지 못한 것이냐라는 말로 풀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인이 무의식적으로나마 '끓어올라 넘'칠 일이 아예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시인의 꿈은 이처럼 아주 거창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시인은 끝까지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와 관련하여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시의 앞부분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듯이 '맹물은/끓어도 넘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뒤집어 읽으면, 세상에는 아무리 끓어도 넘칠 수 없는 '맹물'과 같은 것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한 '맹물'과 같은 것이 무엇인가. 이는 곧 시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말하자면,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 '맹물'에서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삶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맹물'과도 같은 자신의 현재 삶을 뛰어넘어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맘놓고 넘'칠 수 있기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경렬)
* 겨울 - 정양 이 겨울 눈 내리는 들판은 더 넓어지고 있을 것이다. 빈 들에 사무치는 아우성으로 바람소리는 파랗게 날이 서고 있을 것이다. 목숨이란 어차피 천벌인 것을 백성들이 갈수록 천해진다 쿨룩거리며 사랑채는 겨울밤이 더 길어질 것이다. 대처로 떠나 잘된 이들도 갈수록 천해져서 떠돌고 이 겨울 고향 강물은 더 깊어지고 있을 것이다. * 첫 눈 - 정양 한번 빚진 도깨비는 갚아도 갚아도 갚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한평생 그걸 갚는다고 한다 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 흉년의 허기도 그 비슷했던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소용없는 사람아 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버리는 저 첫눈 보아라 몇 평생 갚아도 모자랄 폭폭한 빚더미처럼 먼 산마루에만 희끗거리며 눈이 쌓인다 * 눈길 1 - 정양 흐린 하늘 밑 들 건너 마을이 자꾸 멀어 보인다 눈에 묻힌 길은 아예 잃어버렸다 들판을 무작정 가로지른다 발목이 아무 데나 푹푹 빠진다 잃어버린 길 위에 까마귀 떼 까마귀 떼도 길을 잃었나보다 어디로 날아가지도 않고 눈밭에 우두커니들 서 있거나 느릿느릿 서성거린다 길이 보여도 길을 잃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고 길이란 잃어버리려고 있는 거라고 구구구구 두런거리며 눈 덮인 들판을 조금씩 비껴주는 까마귀 떼 들끓는 검은 피에 취하여 차라리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여는 까마귀를 따라간다 또 눈이 오려는지 먼 마을 연기가 낮게 깔린다 ■ 광막한 눈길을 헤매는 화자의 심사가 흑백의 선명한 대조에 의해 잘 드러나 있다. 길을 잃어버린 그는 어쩌면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는 길을 잃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불길한 까마귀가 <눈길을 여는> 안내자로 변하는 것은 이런 깨달음이 있고 나서이다. 과연 까마귀를 따라간 그의 눈에 낮게 깔리는 <마을연기>가 들어온다. 모든 것을 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찾아지는 길이 있는 법이다. * 싸락눈 - 정양 검불 덮힌 마늘밭 언 마늘씨를 캐먹으며 아이들은 속이 쓰리다. 싸락눈 몰아오는 흐린 하늘 밑 손바닥으로 혓바닥으로 싸락눈을 받아먹으며 아이들은 또 어디로들 갔는지 어디로들 가서 쓰리고 긴 겨울을 캐고 있는지 흐린 하늘을 휩쓸며 희끗희끗 또 싸락눈 이 내린다. * 양말을 벗으며 - 정양 머리맡에 양말을 벗어놓으면 꿈자리가 사나운 법이라면서 양말 벗어던지는 내 버릇을 어머니는 생전에 늘 못마땅해 하 셨습니다 젊어서 객지로 떠돌닐 적에는 돈이나 떨어지면 어 머니가 보고 싶었고 머리맡에 양말 벗어던지는 그 버릇은 나 이 들도록 무심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나이 들수록 꿈자리는 더 사납고 오늘밤도 꿈자리보다 더 모질고 사나운 중년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며 문득 사무치도 록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 무게 - 정양 쇠창살로 얽힌 개차가 왔다 개값이 금값되는 복더위를 미처 못 기다리고 이 이른봄에 김씨는 개를 팔아치울 작정이다 앉은저울이 나오고 김씨가 먼저 저울 위에 올라선다 그렇게 사납던 개들이 개장수 앞에서는 오금을 못 편다 오들오들 떠는 개들을 김씨가 차례로 끌고 나온다 앉은저울 위에 김씨는 엉거주춤 개를 보듬고 앉아서 저울눈을 헤아린다 김씨 몸무게를 빼고 남은 무게가 개값이란다 오들오들 주인 품에 안기어 무게를 잰 개들은 저마다 주인 몸무게를 빼고 무더기로 개차에 실리어 떠나고 김씨는 다시 저울 위에 올라 혼자 무게를 잰다 마지막 무게가 저울추에 매달려 적막하게 흔들리고 있다 * 들길에서 - 정양 눈발에 가리어 더 아득한 들 건너 마을로 눈이 온다 눈은 내릴 만큼 내려서 더 내려도 표도 안 나는 이 들판에 아직은 지워버릴 일이 더 있다는 듯이 바람 한 점 안 묻히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눈이 온다 두어 개피 남은 성냥을 그어대다가 불도 못 붙인 담배만 입에 물고, 입에 문 담배를 잊어버리며 눈이 온다 저 들 건너 마을 누구네 군불더미 속에는 시방도 깜박 잊어먹은 고구마들이 까맣게 타고 있는지 누구네 되창문을 열어제끼고 펑펑펑 쏟아지는 눈구경으로 깜박 잊은 굶주림들이 하얗게 얼고 있는지 누구네 막힌 고래를 못 뚫어서 생솔 타는 연기들은 매운 눈물을 흘리며 눈을 맞는지, 매운 눈물을 글썽이다가 펑펑펑펑 쏟아지는 눈물로 한세상을 매운재처럼 삭아가는지 눈을 맞으며 눈사람되는 자랑도 잊어버리고 신나던 미끄럼도 눈싸움도 잊어버리고 월사금 못 내어 쫓겨오던 이 들녘의 머스매들아 고개 숙이고 쫓겨오던 지지배들아, 마흔 살 먹은 눈사람으로 이 들길에 들어섰다가 이제는 또 무슨 땅 꺼지는 아픔으로 나는 이길을 쫓겨올거나 우리네 무거운 발자국들이 벼포기처럼 찍히어 눈에 덮였다 반절쯤 쓰러지는 허수아비도 한쪽 팔이 눈에 덮이어 눈도 코도 귀때기도 다 지워버리고 아직도 내버릴 그 무엇이 남아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눈을 맞는다 * 천정을 보며 - 정양 우리네 사는 일 따뜻하여 잠 아니 올 때 내 기억 밖에서 흘러가던 바람소리 어쩌다 되돌아와서 내 영혼의 우수의 석경을 닦는다. 추적추적 궂은비가 내리는 새벽에 비로소 잠이 들던 친구의 피곤한 꿈자리를 지나서 높고 가난하고 또 쓸쓸한 우리 스승의 숙명의 한많은 걸음걸이나 시늉하며 따라가다가 문득 오랫만에 참으로 오랫만에 죽음이라는 걸 생각하면서 엄청난 차부일지 어쩔지 좀처럼 요약되지 않는 우리네 사랑이여 예감이여 뉘우침이 모두 그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쓸쓸한 휴식이 되어 아무려면 괜히 목숨이 탈까 목숨이 탈까 사랑이여!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서 소식 없는 울리 곁에서 수없이 떠나간 사람들의 남긴 시간을 보자. 우리의 살다 남는 시간을 보자. 피곤한 음계를 오르내리며 한세상 가고 우리의 생활은 바람의 절망의 저 건너편에서 시작되어도 우러네 초라한 희노래락 모두 맘에 들어라. 내 기억 밖에서 흘러가던 바람소리 다시 기억 밖으로 흘러가고 모든 자랑의 사랑의 절망의 뉘우침의 저 바람소리엔 주석이 필요치 않다. * 눈 오는 날 - 정양 낮잠을 자다가 잘못 걸린 전화를 받는다 무슨 지랄로 집구석에만 자빠졌느냐 나잇살이나 넉넉히 들어 보이는 술 취한 목소리가 해라쪼로 나를 당장 나오라고 한다 여기는 군산집, 세상에는 지금 눈이 쌓였다고 한다 눈이 펑펑펑펑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펑펑펑펑 쏟아지던 그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금방 찾아낼 것 같은 그 목소리는 눈 내리는 군산집은, 눈 내리는 이 도시의 어디쯤이냐 술 취한 눈을 맞으며 기웃거리는 골목길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해라쪼로 자꾸만 눈이 내렸다
* 개펄냄새 - 정양
어금니 갈아 끼우는 동안 한 달 가가이 조개 속살을 먹고 살았다 이 세상에는 무슨 조개들이 그리 많은지 노랑조개나 모시조개, 꼬막이나 생합이나 바지락 말고도 이름 모를 벼라별 조개들을 먹는 김에 다 먹어 보았다. 초장에 찍어 날것으로도 먹고 구워도 먹고 쌀과 녹두를 섞어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그 중에 제일로 많이 먹은게 흔하고 값싸고 맛있는 바지락이다. 먹을 때는 전혀 몰랏는데 삼시세끼 조갯살만 먹고 한 일주일 지나면서부터는 트림을 하거나 방구가 나올 때마다 희한하게도 그 속에서 매콤시큼한 개펄냄새가 나곤 했다
사람살이에 가장 요긴한 것들을 하늘은 애당초 흔전만전 차려 놓앗다고 하거니와 햇빛이나 땅덩이나 물이나 공기도 물론 그렇거니와 땅에서 나는 풀 중에서도 이 세상에 흔전만전 자라서 흔전만전 번지는 쑥잎이 사람 몸에 제일로 좋다고도 하거니와, 잡아도 잡아도 흔전만전 잡히는 개펄의 그 바지락이 아닌게아니라 오장을 윤택하게 하고 눈도 밝아지고 정력에도 좋고 술독 푸는 데도 그만이라고들 한다.ㅊ
이빨 다 갈아 끼운 뒤에도 나는 변산반도 그 옆구리에 있는 사람들 바글바글 모여드는 바지락집을 시도 때도 없이 자주 찾아가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트림을 해도 똥을 누어도 정다운 개펄냄새가 나지 않는다 바지락집 오가는 바닷가 흔전만전 누워 있는 개펄 위에는 바다새들이 쑤월거리며 흔전만전 그리운 냄새를 쪼아먹고 있다.
* 어금니 - 정양
미당선생 고향에 묻히는 날 어금니 뽑으러 나는 치과에 간다 함께 조문 가자던 친지들이 하필 오늘 뽑느냐고투덜거리며 전화를 끊는다
투덜거리지들 마시라, 핑계가 아니다 미당선생과 내 어금니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미당선생은 따뜻한 산자락에 묻히고 내 어금니는 내 단골치과 피묻은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소주병도 척척 까던 어금니였다 미움도 절망도 야물게 씹어삼키던 이 세상 험한 꼴들을 이를 악물고 용서하던 어금니였다 오랜 세월 시리고 욱신거리고 부어오르고 악취 머금고 치과에 드나들면서 뽑지 말고 어떻게든 살려보자던 이제는 혀만 닿아도 캄캄하게 아픈 어금니
욱신거리며 조문 가는 대신 야물게 씹어삼킬 것들을 위하여 이를 악물고 용서할 것들을 위하여 이 세상 캄캄하게 아픈 것들을 위하여 나는 이 어금니부터 오늘 꼭 뽑아내고 싶다
차창 밖 눈녹는 겨울햇살이 어금니 속에 시리게 꽂힌다
* 낙지회 - 정양
젓가락에 입천장에 잇몸에 아무데나 쩍쩍 늘어붙는 토막살들이 토막토막 꿈틀거린다
죽어버린 줄도 모르나 보다 저렇게 칼질을 당하고도 아직도 산 줄로 아나 보다 죽은 줄을 모르니까 토막난 게 아픈가 보다
토막난 노래 토막난 역사 토막난 사랑 토막난 분노들이 산 것처럼 꿈틀거려서 남도의 선술집 구석구석 소주맛을 돋구고 있다
쩍쩍 늘어붙는 토막살을 씹는다 씹어도 씹어도 늘어붙는 토막난 꿈들이 마지막까지 꿈틀거린다
■ 이것은 <작가> 5.6월 호에 실린 시로서, 술집에서 낙지회를 시켜놓고 접시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생명체를 내려다보면서 하는 노래이다. 이 시를 단순한 술안주의 노래로 읽히지 않게 하는 구절이 "토막난 노래 토막난 역사/ 토막난 사랑 토막난 분노"인데 단순이미지로 차용된 것은 아닐까 싶게 그 순차성이 없이 무분별해 보이는 이 구절은 그러나 우리의 오늘을 내려다보는 데 다소 끔찍스러운 정밀성이 있다. 부분이 부분들의 연쇄에서 절단이 나면 그것은 전체로 보아 죽음이 된다. 마치 미세한 부속품들이 연결되어 있는 시계와 같이 나사못 하나가 기능을 멈추면 시계 전체가 죽는 것이다. 그런데 죽은 시계 안에서 여전히 헛바퀴를 돌면서 작동하고 있는 부품이 자기는 살아 있는 것으로 알고 다른 것들에게 분노한다. 우리 사회에서, 혹은 역사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광경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가만히 보면 어느 곳을 뜯어봐도 그런 것은 있다. 나는 문학에서도 그것을 느낀다. 우리 근대시는 그 출발의 시점에서 극히 혼돈의 양상을 보여왔다. 그것은 장르로서의 정체성을 뒷받침해줄 만한 전통이 불투명했던 데 기인한다. 오늘의 시인들에게까지 규정적 힘을 발휘하는 우리말 근대시의 시작은 정지용, 임화, 김기림, 백석 등인 것 같은데 어쨌든 제약할 힘이자 의존할 모범으로서의 확소한 시적 양식이 불투명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 겪었던 식민지적 현실에 대응되는 우리문학의 자기망각의 역사 그것이다. (김형수)
* 참숯 - 정양
간장독에 띄울 숯을 사러 읍내에 간다 나무 타다 만 게 숯인데 나무토막 태워서 쓰자고 해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는 참숯만 써야 한단다
읍내 장터를 다 뒤져도 숯이 없다 가슴속 한 세상 더글거리는 타다 만 숯덩이들은 쓸모가 없겠지 육십릿길 더 달려간 도회지 시장통에서 가까스로 숯을 만난다 휘발유값이 몇배는 더 들겠다
불길이 한참 이글거릴 때 바람구멍을 꽉 막아야 참숯이 된다고, 참숯은 냄새도 연기도 없다고 숯가게 할아버지 설명이 길다 참숯은 냄새까지 연기까지 감쪽같이 태우나 보다
이글거리기도 전에 숨통이 막힌 내 청춘은 그나마 참숯이 되어 있는지 언제쯤 냄새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릴지 어쩔지
간장독에 둥둥 떠서 한평생 이글거리지도 못할 까만 비닐봉지 속 숯토막들이 못 견디게 서걱거린다
* 土炭 - 정양
고라실 논바닥을 두어 평 긁어내고 아이들 키만큼 파들어가면 거기 거무튀튀한 흙이 층층이 쌓여 있다 그걸 캐어 말리면 더글더글한 흙빛도 섞인 거칠거칠한 토탄이 된다
그렇게 캐어 말린 흙들이 거짓말처럼 아궁이에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화롯불도 못 담게 버글버글 싱겁게 불길이 죽는다 땔감이 귀하던 흉년의 들녘 사람들은 농사도 못 지은 흙을 며칠씩 힘겹게 파서 허망하게 태워먹곤 했다
그 흙이 오래 묻혀 있으면 탄화작용이, 탄소알갱이가 어떻고 석탄이 되고 석유가 되고 더러는 금강석도 된다는 담임선생님의 과학적 설명이 믿기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마치는 쓸쓸한 눈빛이 자꾸 맘에 걸려서 그 흙을 캐어 태워먹는 일이 두고두고 께름칙했다
시를 쓰다가 문득 그 토탄이 맘에 걸린다 선생님의 쓸쓸하던 눈빛이 맘에 걸린다 석탄이 금강석이 되든 말든 내 사랑도 없는 듯 묻혀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 그 꿈 다 잊으려고 - 정양
밤마다 꿈을 꾸어도 아침마다 대개는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토막씩 말도 안되게 남아 있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잊어도 좋을 꿈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꿈꾸며 살 날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잊었나 사는 것이 잊어버리는 연습이라면 말도 안되게 남은 꿈들은 언제 다 잊을 것인가
그 꿈 다 잊으려고 아침마다 잠이 모자라나보다 아침마다 말도 안되는 몇토막 그리움으로 모자란 채로 나는 남는다
* 이슬 - 정양
생전의 슬픔이 저렇게 이슬로 맺히다던가 원한도 미움도 그리움도 저렇게 이슬로 내린다던가
발길에 채이는 이슬을 이슬털이 씻김굿 삼고 젖은 바지 걷으며 바라보는 눈부시는 풀밭의 아침
우리네 슬픔이 저렇게 반짝일 수 있다면 미움이 그리움이 저렇게 눈부시게 아름답다면
못 견디게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맘놓이리
*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파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충돌하는 목소리/윤재웅/동일한 텍스트에서 시점의 교란이 미덕일 수 있는가? 상충적인 혹은 완전히 이질적인 목소리가 한 텍스트 안에 등장하는 것은 파킨이 설파한 화자 고유의 기능을 무력화 하는 것인가? 텍스트의 내부와 외부를 오가는 화자의 유동성이 텍스트 이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목소리의 위치가 다르다면 '심미 대상'도 달라지는가? 이 같은 질문은 화자와 관련된 텍스트 분석에 있어서 중요한 제목들의 지극히 적은 일부분들이다. 논점들은 상상 외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무수한 의문이나 이론들이 텍스트 자체에 앞서 선행하는 경우는 없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일차 텍스트이다. 이론과 원리와 비평은 텍스트로부터 출발한다. 화자에 대한 모든 논의도 그것이 텍스트를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는 한 현학일 뿐이다.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텍스트를 보다 완전하고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화자 시학은 언제나 이 점을 중시해야 한다. 앞으로 전개되는 논의는 이를 위한 조그만 시도이다. 먼저 하나의 시 텍스트 속에서 충돌하는 두 화자의 병치가 텍스트 미학을 어떻게 구축하는가 하는 실례를 보이겠다. 그 다음의 분석적 시도는 화자가 텍스트의 안팎을 오가는 가능성과 그것이 미치는 의미론적 이해의 변화 양상을 추적해감으로써 텍스트 분석에서의 화자 논의의 긴요함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양의 네 번째 시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에 실려 있는 이 시는 화자 논의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준다. 텍스트 속의 발화 행위자는 명백하게 둘이다. 그러나 두 행위자는 같은 시간대에 있지 않다. 같은 장소에서 둘이 만나는 방식은 전에 있었던 행위자의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이다. 그 기록이 바로 이 시의 제목인 토막말이다. 삽압 텍스트로서의 토막말은 텍스트의 발화를 이끌어가는 주화자(主話者)로서는 전후 문맥을 알 수 없는 보조화자의 담화이다. 그것은 '낯선' 방식으로 주화자에게 다가온다. 간명하게 이야기한다면 이 텍스트는 화자가 다른 화자의 발화를 '인용'하는 경우이다. 화자 속에는 또 다른 화자가 있다. 그런데 그 또 다른 화자는 화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으며 화자에 의해 '체험된 것을 선택하여 드러내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둘은 성격상 서로 충돌한다. 주화자가 이성적이고 섬세하며 절제의 미덕을 몸에 익힌 교양인이라면, 보조화자는 정감적이고 우직하며 사랑의 결핍과 열정을 거리낌없이 표방하는 개성의 소유자다. 또한 주화자는 세계를 심미적으로 이해하려는 담화의 수행자이지만 보조화자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비속적인 담화의 수행자이다. 둘의 성격이 충돌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두 담화의 수행자는 비록 '주,보조'의 역할을 나누어 맡고 있지만, 텍스트의 무게중심은 어느 한 쪽에 쏠리지 않는다. 주화자의 심미적 담화는 보조화자의 '무지막지하게 아름다운' 담화에 충격을 받고 있음을 토로한다. 충격의 본질은 '낯섦'이다. 그것은 심미적 교양인의 의식 속으로 쳐들어와서 순식간에 그것을 지배해버린다. 그러므로 밑도 끝도 없이 무지막지한 토막말은 단순한 인용담화 이상의 기능을 한다. 텍스트의 심미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다. 가을바다의 쓸쓸한 배경에 대한 주화자의 정서적 감회는 이로써 더욱 처연해진다. 해변에 커다랗게 쓰여진 무지막지한 '막말'이 주화자의 의식 속에서 구성되는 세련된 담화를 역설적으로 지배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인용된 '막말'이 다른 글씨체로 인쇄되었다는 '실제적으로 보여지는 형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막말'은 오히려 복잡한 방식으로 심미성을 추구하는 시의 세계에 일대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아주 낯설게 '의식을 때리는 형식'으로 자리집는다. 그 한 사례가 메시지로서의 '막말'이 지향하고 있는 청자(혹은 독자)이다. '막말'의 청자(독자)가 '하늘'일지도 모른다는 주화자의 생각은 비단 그 글자들이 대문짝만하게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담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 곧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독자의 한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씌여진 글'로서의 "막말'은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규범의 한 전제가 되는 청자(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들려주는 말이며 하늘에게만 보이고 싶은 글이다.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오면 금세 몸이 저릴(휩쓸려 사라질), 그러나 너무도 간절하게 사무치는 동경의 형식이다. 이런 명백하게 비문학적인 텍스트가 누천의 전통을 자랑하는 문학텍스트를 압도하는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 형식임을 작관하는 순간, 세계는 갑자기 낯설어져버리는 것이다. 화자의 의식은 다음과 같이 전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시보다 아름답구나!' 이런 추정이 텍스트를 한층 재미있게 만든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성격상 상호 대립되는 화자가 텍스트의 보다 높은 미적 효과를 위해 협력하는 방식은 서정시의 경우에서 흔치 않다. 이것은 텍스트 구성에 있어서의 화자의 기능에 대한 각별한 통찰이 있어야 가능하다. 만약에 위의 인용 텍스트가 "가을 바닷가에/누가 써놓고 간 말"을 활용하지 않았다면 구조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이야말로 텍스트를 구성하는 주요 제재로서 보조담화가 아닌 중심 담화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서정시의 화자가 반드시 단일하고 통일된 성격을 지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시인이나 독자들은 다같이 화자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 고려해야만 한다. 위에서 논의한 주화자와 보조화자의 개념은 순전히 기능적인 측면만이 고려된 것이다. 이것은 분석을 위한 단순한 도구이지 모든 발화 텍스트에 엄존하는 실체가 아니다. 개개의 텍스트를 보다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화자를 논의한다면 거기에 맞는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다. (서사연구저널 <내러티브> 창간호 2000년 봄)
* 들 건너 불빛 - 정양
밤 깊은 들판은 지척인지 천리인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지척이 천리인 내 사랑은 헤아리기가 더 어렵습니다
지척에도 천리에도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창밖을 자주 내다봅니다 천리 밖에도 진눈깨비인가요 쌓이지도 못하는 진눈깨비만 오다 말다 방안을 기웃거립니다
하나둘씩 꺼지고 아직도 남은 들 건너 마을 불빛 두어 개 지척도 천리도 한꺼번에 사무칠 눈보라가 그리운 불빛 두어 개 지척인 듯 천리인 듯 밤새 깜박이는 들 건너 불빛
* 지척인지 천리인지 - 정양
소식 끊어진 천리가 안타깝던가 만날 길 없는 지척이 더 적막하던가
지척이 천리인 저 눈발 보아라 천리보다 지척보다 더 사무치는 눈발
정처없는 꿈이 삭아서 지척이란 저렇게도 아득하구나
눈 부비며 바라보아도 지척인지 천리인지 눈이 흐리다.
* 세상의 남루를 껴안는 쓸쓸함의 깊이 - 강연호 - 정양 시선집 <눈 내리는 마을>
이제쯤 정 양 시인에 대한 사적인 인상을 밝히면서 글을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시인 정 양이 아니라 사람 정 양을 직접 뵌 것이 '97년이니까 벌써 5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이고 그 시간은 그리 짧지 않아서 이런저런 행사와 뒤풀이 자리에서 시인과 마주하여 술잔을 나누기도 했으므로, 조금은 무례할 수밖에 없는 이 글머리를 그가 한바탕 너털웃음으로 넘길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궁리가 들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대뜸 정색을 하고 그의 작품들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시도한다면 그는 더 크게 웃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다. 무례한 김에 좀더 솔직하자면 20년의 연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남다르게 친한 척하고 싶은, 정말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작용했을 것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키가 훤칠했으나 다소 구부정했고, 덩치가 좋았으나 이미 질풍노도의 젊음은 아니었다. 아예 버릇없이 말하자면 그의 풍모에서 시인이자 교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항용 말하는 위엄이나 어른을 느끼기도 어려웠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이런저런 가늠을 속으로 하게 마련이므로, 나는 익히 들은 바대로 그의 주변에 동료와 후배들, 심지어 새파란 문청들까지 들끓는 이유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그의 성품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만나서도 그 자리를 편하게 이끄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낯서음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한 작위나 꾸밈이 아니라 진솔하게 자연스럽기는 또한 쉽다고 할 일이 아니다. 사람 정양에게는 그런 자연스러움 속에 큰 넉넉함이 깃들어 있다. 그의 지인들이 그를 흔히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 그늘 무성한 나무 아래 어찌 사람이 모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확실해졌지만 내가 그에게서 위엄이나 어른을 느끼지 못한 것은, 그가 진짜 위엄을 갖춘 어른이면서도 그것을 풍모에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짜 빛은 빛나지 않는 법이므로 아마 그는 체질적으로 그러지 못할 것이다.
2 하지만 이 자리는 사람 정양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시인 정양을, 더 정확히는 정양의 작품들에 대해 말하는 자리이므로 이번에 나온 그의 시집 <눈 내리는 마을>(모아드림 2001)을 펼치지 않을 수 없다. <눈 내리는 마을>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인 자신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1부의 작품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네 권의 옛시집에서 추려낸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시선집을 통해 시인 정양의 시세계와 그 출발에서 현재까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는 셈이다.
여기서 나는 그의 시세계가 이러저러한 지속과 변모를 보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 시인의 작품세계가 일정한 지속성을 보여주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 있는 일일 테고, 뚜렷한 변모가 있었다면 그것 역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쓰기는 때로 지속을 위한 지속이나 변모를 위한 변모를 낳기도 한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시에 매달려 그것을 인위적으로 제작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는 말이다. 시인 정양은 그러한 시쓰기의 의도나 전략을 처음부터 아예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 자신이 머리말에서 "시에 관한 한 억지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라고 한 것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그의 작품들에서 구태여 지속을 찾는다면 세상의 남루를 껴안는 시선의 따뜻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변모를 찾는다면 젊은날의 긴장과 불화에서 벗어나 이제 그것들조차 내면에서 녹여내는 연륜의 깊이가 묻어난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사람 정양이 아니라 시인 정양을 말해야 한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는 사람 정양이 곧 시인 정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드문 시인이다. 세상에 글 쓰는 사람도 많고 시인도 적지 않지만, 글이 곧 그 사람 자체인 경우를 솔직히 나는 많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직접 만나지 않고 작품으로만 접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뻔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 정양의 작품에서 나는 사람 정양을 늘 발견한다.
시와 삶의 일치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정양 시인은 진짜 어른이지만, 내가 그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하는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다. 엉뚱하게도 나는 사람 좋은 그의 모습에서 아주 드물게 문득 나타났다 사라지는 쓸쓸함의 흔적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 쓸쓸함의 흔적들이 모여서 사람 정양의 진짜 풍모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그 드문 순간을 그는 아니나다를까 금방 너털웃음으로 흘려버리곤 한다. 그러나 삶의 쓸쓸함은 그렇게 흘낏 지나칠 때 더 가슴을 치는 게 아니던가. 적어도 내게는 그 미세하게 지나쳐간 흔적들이 오히려 그를 더욱 어른이게 하고 그와 더불어 있고 싶게 만드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람 정양에게서 발견하는 예의 쓸쓸함을 시인 정양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시집 <눈 내리는 마을>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 중에서, 기왕에 발표하지 않은 것들을 모은 1부의 시들을 통해서도 그것은 금방 확인된다.
아줌마, 얼마나 더 가면 지평선이 나와요
여그가 바로 지평선이어라우 여그는 천지사방이 다 지평선이어라우 바람 들옹게 되창문이나 좀 닫으쇼 잉
그렇구나 이 세상에는 천지사방 지평선 아닌 데가 없겠구나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다 가물거리겠구나 <지평선> 부분
그 흙이 오래 묻혀 있으면 탄화작용이, 탄소알갱이가 어떻고 석탄이 되고 석유가 되고 더러는 금강석도 된다는 담임선생님의 과학적 설명이 믿기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마치는 쓸쓸한 눈빛이 자꾸 맘에 걸려서 그 흙을 캐어 태워먹는 일이 두고두고 꺼림칙했다
그 토탄이 선생님의 쓸쓸하던 눈빛이 문득 맘에 걸린다 석탄이 되든 금강석이 되든 말든 내 사랑도 이 세상에 없는 듯 묻혀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토탄> 부분
시 <지평선>은 만경강 건너 지평선이 보인다는 곳을 찾아간 시인이 주막집 아줌마에게 지평선이 어디냐고 묻는 정황을 갖고 있다. 지평선이 어디냐고 묻는 일의 어리석음이여, 과연 아줌마는 천지사방이 다 지평선이라며 바람 들어오니 문이나 닫으라고 핀잔을 준다. 하지만 질문의 어리석음은 시인의 어리석음이 아니다. 시인은 지금 "보고 싶은 것들"이 있는 사람이지만, 보고 싶은 감정을 "언제/어디서서나 다 가물거리겠다"는 새삼스러운 인식으로 달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을 역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나 다 가물거리지만 정작 지금 눈 앞에 직접 현현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것이 세상의 모든 보고 싶은 것들의 속성이 아니겠는가. 인용한 두 번째 작품 <토탄>에서 "내 사랑도 이 세상에 없는 듯/ 묻혀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는 시인의 눈빛이 "선생님의 쓸쓸하던 눈빛"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세상살이의 이 쓸쓸한 단면을 어떻게 달리 포착할 수 있겠는가. 그 쓸쓸함은 섣부른 감수성에서 얻어진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신산스러움과 분노, 그리움 등을 한 데 녹여 껴안아 그것들이 내면에서 곰삭을 때 얻게 되는 쓸쓸함이다. 작품 속의 <선생님>이나 화자처럼, 글을 읽는 나도 함께 그 쓸쓸함을 얻고 싶다.
지금 나는 정양 시인의 속내를 다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 연륜의 깊이를 어찌 다 읽어낼 수 있겠는가. 그의 작품들에서 묻어나는 연륜의 깊이는 때로 "가릴 것도 제대로 못 가리고/ 낯도 안 붉히고 나는 늙는다" (<낯도 안 붉히고>)는 자책이나 "나이 들수록 속절없이 산천은 곱다"(<봄나들이>)는 회한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연륜이란 말의 엄격한 의미는 육체적 나이만으로는 얻어질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깨달음을 동반해야 비로소 연륜의 깊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인은 세상의 남루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남루 안에서 그것을 함께 견뎌냄으로써 깊이를 얻고자 한다. 그는 사람들이 "피차 견딜 만한 말투"로 서로 하대를 하는 자리에서 "빈 속에 주는 대로 받아마신 소주가 / 나도 아직은 견딜 만"(<산토끼탕>)하다고 말한다. 그 때는 과연 내리는 눈발조차,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 해라쪼로 자꾸만" (<눈 오는 날>)내릴 것이다.
이번의 시선집 <눈 내리는 마을>을 통해 새삼 확인하는 바이지만, 정양 시인의 작품들은 대부분 자신과 이웃의 사소하면서도 고만고만한 일상을 포착하고 있어 요란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어떤 큰 목소리나 날카로운 외침보다 더 넉넉한 울림을 전하고 있는 이유는, 세상의 남루 속에서 그것을 껴안아 견디는 시인의 시선이 언제나 깊고 그윽하기 때문일 것이다.
3 두서없는 글을 결론 삼아 글 번호를 달리 달아보지만 애초에 분석적 시읽기의 방식을 택하지 않고 시인의 풍모에 대한 개인적 인상으로 글을 시작한 나로서는 이제 딱히 덧붙일 말이 없을 것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 내 모든 얘기를 털어놓을 때가 있는 사람이므로,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다음 시를 함께 읽어보고자 한다.
건성으로라도 무엇을 물어온다면 무엇이든 열심히 말하리라. 물어보는 그것이 한 평생 감추고 사는 것일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탁 까놓고 말하리라 한숨 섞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한숨 쉬는 대목은 부러뜨려 술을 권하고 덩달아서 길게 한숨을 쉬리라 이 세상 끝까지 상관하고 싶은 한숨을 쉬면서 내 진실과 그늘 아름다움과 슬픔과 절망과 고통들을 죄다 털어놓고 말리라 이 세상 끝까지 다 저물기 전에 아줌마가 어서 한가해지기를 기다린다 <선술집에서> 부분
별다른 부기나 설명이 필요 없는 이 작품에서처럼 나도 정양 시인이 한가해지기를 기다린다. 그가 한가해졌을 때 그를 만나 내 이러저러한 속내 털어놓고 싶다. 아니 그는 한가하든 한가하지 않든 누구든지 와서 자신을 털어놓을 때 같이 웃고 고민하고 울어줄 것이다. 문제는 그의 한가함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내 진실과 그늘'을 죄다 털어놓을 자신이 있을지 없을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문예연구 29호 2001년 여름>
* 서평/업 그레이드 된 촌말의 담담함과 여유로움 - 문화저널
정 양 시선집 <눈 내리는 마을>이 후천년의 1년 새해의 밝음과 함께 나왔다. 이 시인은 전천년의 68년에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니 시력(詩歷)30년만에 시선집을 발간한 것이다.
그는 7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기도 했으며 그 동안 <까마귀떼>(80) <수수깡을 씹으며>(84) <빈집의 꿈>(93)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97) 등 네 권의 시집을 출판했다. 이 시선집은 이 시집들에서 가려뽑고 거기에 최근에 쓴 몇 편을 덧붙인 것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게 하고 싶어서 이 선집을 엮는다. 지우고 말 고치고 줄 바꾸고 더러는 제목까지 바꾸면서 추려낼 것들을 추려보았다"고 쓰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허울이 있기에 그는 이미 발표된 시를 다시 퇴고했는가. <난로 앞에서>를 예로 살피기로 한다.
퇴근시간 지난 식어가는 난로 앞에 앉는다
(생략)
작년에도 이맘때쯤 그렇게도 눈 내리고 사람도 사람들도 보고 싶더니
(생략)
서랍 속 휴지를 털어 식은 난로에 불을 지피면
(생략)
묵은 시간들이 불붙어 기억의 마른 살가죽에 타오르는 불꽃
(생략)
이 작품은 가장 많은 퇴고가 이루어진 시이다. 먼저 보이는 것이 마침표의 생략이다. 이뿐 아니라 이 시인의 전부의 작품에 마침표가 없다. <수수깡을 씹으며> 이후에 마침표가 사라진 것이다. 이는 시가 글쓰기라기보다 말하기의 일종이라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시는 하고 싶은 말을 그 즉석에서 뱉는 민중의 언어이지 고치고 또 고치고 그래서 거짓이 섞이는 선비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언어를 다듬고 또 다듬는다. 이렇게 다듬어서 시는 행이 나누어지고 연이 나누어진다. 행이 쉼이고 연이 맺음이다. 그런데 구태여 마침표를 찍어 또 못질할 필요가 없다. 이 쉼과 맺음을 하면서도 시의 말은 물이 흐르듯이 촌놈이 지껄이듯이 밑도 끝도 없이 죽죽 이어져야 한다. 역사도 그렇게 이어지고 그렇게 흘러간다. 이것이 이 시인의 시집에서 마침표가 사라진 이유인 듯싶다.
그의 시작품에는 마침표뿐 아니라 물음표도 말없음표도 없다. 구차스럽고 부자연스럽게 이런 문장부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말하기를 할 수 있다는 여유로움과 담담함이 이의 쓰임을 사양했을 것이다.
'작년에도 이맘때쯤 그렇게도 눈 내리고"의 1행은 원래 '작년에도 이맘때쯤/그렇게도 눈 내리고'의 2행으로 되어 있다. 2행이 1행이 된 것이다. 이 작품 말고도 상당수의 작품들이 시행이 축소되어 이 선시집에 수록되었다. 시가 산문과 다른 점은 그 형태상 행가름에 있다. 시는 산문보다 느린 템포의 언어이다. 산문은 죽죽 말하지만 시는 행의 끝에서 쉬고 다음 행에서 다시 시작하는, 쉬엄쉬엄 말하는 언어이다. 다시 시작하는 다음 시행의 첫 어휘는 강조되어진다. 이 작품에서 이 시구가 원시처럼 2행으로 되었다면 '그렇게도'에 강조점이 놓여 '도대체 얼마나 눈이 많이 왔기에'라고 우리를 감탄하게 유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작품은 이 강조점을 버렸다. 감탄이 지나치면 수다스럽고, 강조가 지나치면 허사가 된다. 이 거친 삶을 살면서 그는 놀람을 진정시키고 이를 내적성찰로 다스릴 수 있는 여유로움과 담담함을 얻은 것이다.
"퇴근시간 지난/식어가는 난로 앞에 앉는다"의 '지난'은 원시에서는 '지나서'이다. 이 '지나서'가 '지난'으로 단지 한 어휘의 어미 하나가 바뀌면서 이 시작품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원시에서 퇴근시간이 지난 주체는 화자이고 식어가는 것의 주체는 난로이다. 그러나 이 시선집에서 형식상으로 퇴근시간이 지난 것의 주체가 난로로 바뀌었다. 그러나 난로는 식어가는 시간만 있을 뿐 퇴근시간이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이 퇴근시간과 식어가는 시간은 나와 난로가 공유하는 시간이다. 나는 난로가 되고 난로는 내가 되어 이 둘은 하나가 된다. 나는 난로 앞에 앉으면서 바로 내 앞에 앉는 것이다. 이는 자기성찰의 시간이다.
"서랍 속 휴지를 털어"도 원시에는 "휴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로 되어 있다. '휴지를 털어' 불을 지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휴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 불을 지피는 것은 시인만이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시인은 시인되기를 거부하면서 우리 일상의 "사람도 사람들도보고 싶"어하고 우리 곁에서 우리의 일상언어를 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역시 시인이다. 비록 우리와 같이 휴지를 태우지만 불 붙는 것은 '묵은 시간들'이다. '기억의 마른 살가죽에 타오르는 불꽃'인 것이다.
그는 우리같이 우리의 촌말을 부리어 쓰고 있다. 그러나 '마른 살가죽'응 '기억의 마른 살가죽'이다. 다른 시작품에서도 이런 촌놈의 말은 업그레이드되어 긴장한다. '무슨 독한 맘 먹고 오늘은 볼 테면 보라고' 휘날리는 것은 벚꽃이고 '엉망진창으로 타오르던 것'은 진달래꽃이고 개나리꽃이고'태워먹는 것이 두고두고 꺼림칙'한 것은 토탄(土炭)이다. 이 시선집은 이렇게 우리 촌말을 업그레이드하여 긴장시키면서도 담담함과 여유로움을 쓰고 있다. 이것들이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이 시선집에서 벗어버린 허울의 결과이다.
그는 지금까지 다섯권의 시집과 여러 권이 저서를 출간하면서도 남들 서너번씩 하는 출판기념회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촐한 자리라도 마련했으면 한다.
* 투명함과 그리움의 시 - 김명인 - 鄭洋의 시세계
"일없이 고향에 와서 저무는 보리밭에 비가 내린다"
<윤흥길에게>라는 獻詞를 달고 있는 작품 <고향에 와서>를 통해 鄭洋은 귀향의 참담함과 삶의 고단한 소모를 비에 가탁해서 충격적으로 노래한다. 그것은 <집도 세간도 팔아먹고 / 꿈이고 청춘이고 다 털린> 다음에도, 더욱 팽개쳐버리듯 버리고만 싶은 旅程으로 나타나 있으며, 그래도 갚아야 할 무엇이 남아, 고향 보리밭머리를 적시려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과정으로 표현되어 있다. 첫시집 <까마귀떼>에 실려 있는 50여 편의 작품 중에서 유독 위의 작품으로 이 글의 端初를 풀어가려는 필자의 의도는 결국 이 한 편의 시가 정양의 작품세계를 어느 정도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 속의 <비>는 話者와 동일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의 경과는 곧 화자가 살아내는 삶의 실존적인 축도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산자락에 젖어 저무는 비>를 바라보면서 문득 각성해서 깨닫게 되는 피폐된 고향 속의 자신과, <불어나서 / 무식하게> 흘러갈 뿐인 무력한 일상의 회한, 그리고 차갑고 끈끈하게 젖어오는 젊음의 實在에 부딪힌다.
궁핍하고 막막한 실존은 고향을 축으로하여 돌아옴과 떠남을 동시에 생각하게 하지만, 이미 귀향은 스스로의 발목을 그곳에 가두어, 다시는 풀 수 없게 되어버린 덫이기도 한 것이다.
정양의 시는 이처럼 고향이라는 덫에 걸리어 요동하는 삶의 아픔과 분노, 그 무력함과 부끄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주어진 세계의 고통과 갈등조차도 함께 포용하려는 열망과 사랑의 노래이기도 하다.
한 평자에 의해서 그의 시가 서정주나 윤동주,김수영의 시세계와 대비되어 해석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이와 같은 특징적인 일면을 지적한 데 지나지 않는다.서정주의 초기시에 나타나는 실존의 유난스러운 충동과 고뇌뿐만 아니라, 중기시의 달관과 체념까지도, 때때로 그는 고향이라는 벗어던질 수 없는 숙명에서 우러나는 몸부림과 슬픔으로 끌어안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각성과 부끄러움, 연민과 분노를 각각 尹東柱와 金洙暎의 특징으로 지적할 때, 鄭洋의 시도 같은 맥락으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鄭洋의 시를 간단하게 서정주나 윤동주 또는 김수영의 문맥 정도로 처리하거나, 그 혼합된 양상과 동일한 바탕으로 이해해버린다면 그것은 결코 그의 시를 올바르게 파악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보다 범박하게 말해서 그의 시세계는 위의 세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와 또 다른 차원에서 청정하고 무구하게 우리를 감동시켜, 물량화되어가는 세태 속에서 생래적인 삶의 불꽃을 피워내게 한다. 암울한 시대와 주제를 함께 응시하면서 끝까지 맑음과 슬기를 놓치지 않는 것은 이 시인의 시적 천분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가 동시대의 황량한 삶에서 건져올리는 제 몫의 깨끗한 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아아, 그 때 나는 두근거리며 /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가 / 꿈자리마다 사나운
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 / 몰매 속 몰매 속 눈 감는 틈을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 햇살이 빛나는 머언
실개울이 환성들이 /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내 살던 뒤안에> 일부
유년이 회억되고 있는 이 시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완강한 세계에 어떻게 부딪혀서 무엇을 시로 건져내고 있는가를 암시받게 된다.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엔 몰매처럼 고통스럽고 끈끈한 상처만이 남아 있지만, 그와 같은 어두움에 부서져오면서도 그는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그리움과 소중한 밝음을 자기의 것으로 온전하게 간직한다.
일체의 것들이 凋落해버리는 시대 속에서는 모든 것이 서럽게 흩어져갈 뿐이며, 남아 있는 것이란 낱낱이 파편이 되어 딩구는 기억에 얽혀 있는 憐憫에 불과하다. 그러나 鄭洋은 상처의 아픔이나 한탄에 집착하는 대신 흠없는 영혼의 깨끗한 동경을 선택함으로써, 그가 겪어 온 절망과 쓰라림의 심도를 한층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티없는 無償性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오히려 슬프고 전율스럽기조차 하다. 바로 이같은 청정함이야말로 이 시인으로 하여 궁핍과 절망의 상황을 뛰어넘어, 시적인 明澄性을 획득하게 만들어주는 역동적인 힘의 근거라고 생각된다.
시적 실체로서의 鄭洋은 고향이라는 둘레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앞서 그 점을 <고향이라는 덫에 걸려 요동하는 삶>이라고 파악했거니와, 비록 일상사가 작품의 소재로 한정될 때에도 그는 언제나 고향을 의식하고 그 곳을 노래한다. 그렇다면 반도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인의 남다른 고향 집착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의 초기시에는 유년에서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고통에 가득찼던 시절의 시련과 상실, 그리고 방황과 소외의 현장으로서의 고향이 기록되어 있다.
"노을이여, 긴 겨울잠 속에 숨어 흐르는 /
검은 피를 가리고 피빛 / 살냄새를 가리고 /
횟배앓던 유년의 어지럼증을 / 저 빛깔들을 거슬러오는 동화여" <저녁놀> 일부
이 시에는 유년시절의 간단없던 배고픔이 짙은 피빛깔의 노을로 형상화되어 있다. 참기 어려운 굶주림에서 바라보게 되는 선연한 노을은 어디든지 닥치는대로 내닫고만 싶은 동물적인 충동을 불타오르게 한다. 또한 노을은 그러한 충동을 자극함으로써 화자로하여금 잠시잠깐의 휴식처럼 배고픔을 잊게도 하고 한 빛깔로 거슬러오는 동화의 세계에 잠기게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을이 저 홀로 그 순간에 속한 것이듯 망각 또한 찰라에 지나지 못한다.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힘으로 동원되고 있는 고향의 자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그의 시가 사람 사는 일의 서러움과 아픔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처럼 한 생애의 순간으로서 지나가버리고 마는 소멸하는 자연에 그가 몸 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취의 시간은 곧 사라져버리고 언제나 그는 <모진 일 모질게 피어 / 한 세상 가도가도 외롭더라> (꽃) 라고 스스로의 처지를 실토하게 된다. 첫시집의 표제시 <까마귀떼>에서도 그는 실세계의 고통스러움과 그 속에 파묻혀 그래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를 <내 아는 세상일 / 신바닥으로 짓이기면 / 신등으로 시린 진흙만 / 묻어오르고> 라고 짧게 요약한다. 난삽하지 않은 표현과 상징이 통철한 절망에 결합되어 끝까지 긴장과 밀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시는 그대로가 절박하고 절실한 생존의 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무슨 치욕에 겨워 / 개처럼 끌려가서 / 맞아죽는 꿈> (<꿈노래>)이라고 노래할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암담하기만 한 세상에 대해서 한결같이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삶에 대해서 그의 괴롭고 안타까운 실존의 쓰라린 고백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의 한 방편으로만 존재하는 고향이라면 그것은 버려야 할 대상일지언정 특별히 간직되거나 집착해야 할 곳은 아니다. 그는 소멸해가는 것들과 그 땅의 척박스러움 속으로 오히려 깊이 침몰함으로써 스스로 어둡게 느끼는 만큼이나 그 세계 속에서 끝까지 살아가려는 삶의 굳은 의지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을 확보해 낸다. 그것은 주어진 아픔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그것들을 소중하게 쓰다듬음으로써 자신의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그의 의식적인 노력과 독특한 세계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떠도니는 강산 /어느 곳에다 / 껄끄러운 흉허물들 / 부려 놓으리 / 천 갈래로 만 갈래로 부러진 / 바람가지를 얽어서 / 까치집 짓드키 덩그라니 / 걸어 놓고 /
가난이랑 그리움이랑 죄다 / 부려 놓으리 / 떠도니는 강산 / 어느 곳에다 / 흉한 일 모진 일 다 / 부려 놓고 / 맘놓고 맘놓고 귀양 떠나리" <빈 까치집>
<고향>이라는 시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 시의 공간적인 배경 또한 고향으로 읽혀진다. 그리고 <천 갈래로 만 갈래로 부러진 / 바람가지를 얽어서>에서 보이듯이 여기서도 예외없이 껄끄럽고 흉허물 많은 절망적인 삶이 노래된다. 그러나 이 시가 단지 부정적인 절망만으로 읽혀지지 않는 것은 삶의 부러진 부분들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얽어내고 그 속에 <가난이랑 그리움이랑> 죄다 부려 놓겠다는 화자의 곡진한 소망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해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절망을 긍정하여 그들로부터 그 극기의 힘을 추출해내고 그 극복에 이르려고 애쓰는 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귀양 떠나리>에 앞서 <맘놓고>를 두 번 반복함으로써 그와 같은 태도를 은연중에 강조해 보인다. 이 구절은 결국 도달해가야할 죽음에 앞서서 베풀어지는 모든 삶을 소중하게 다잡고, 그 속에서 욕심없이 살아가려는 그는 고행적 결의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 파묻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의 눈물겨운 궁핍조차도 그는 벌거벗은 마음으로 껴안을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는 거칠고 메마른 삶에의 辛苦가 때때로 나날이 새로와지는 집념과 사랑의 바람이 되고 있음을 은밀히 기쁨으로 노래한다.
<살아남기 위하여 싸울 수 있는 / 기쁨으로 참을 수 있는 기쁨으로 / 피부에 젖는 밤바람은 무겁다> (<병후.3>)
이러한 표현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어째서 그가 그토록 질기게 <저 어둠 속 가뭄타는 열매처럼> 쓰라리기만 한 고향의 삶에 매달리게 되는가를 알게 된다. 鄭洋에게 있어서 고향은 그를 키워 온 기반이자 삶의 전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은 그에게서 소중한 것들을 다 빼앗아가버리지만 동시에 그에게 탯줄을 주고 뿌리내려 잎을 피우게 한 성장의 터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못 떠나는 혼들이 모여 사는 곳 / 못 떠나는 악에 바치어 / 겨울이 깊다>(<귀향>) 고 토로할 때에도 그것은 그 땅에서 살도록 처형되어 있는 삶에 대한 원한과 애정을 함께 읽게 하는 것이다. <도깨비불>이라는 작품은 이 점과 관련하여 고향에 집착하는 이 시인의 써늘한 광기와도 같은 완강함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아무도 못 떠난다고 / 마지막 피 한 점까지 붙들어매는 / 무섭고 아름다운 춤 / 소낙비처럼 가슴에도 못이 박혀서 / 장구소리로 산산히 부서지는 춤 / 외약다리 한 번 못 감아보고 / 발걸음마다 오줌재리던 / 넋나가는 춤>
<아무도 못 떠난다고 / 마지막 피 한 점까지 붙들어매는> 춤에의 도취는 그러나 고향에 대한 무지한 집착이나 맹목적인 체념으로 읽혀져서는 안 된다. 물론 고향의 땅과 역사 속에서 그렇듯이 절망적으로 부딪혀서 깨어져버린 것은 성장기의 소담스러운 꿈이지만, 鄭洋은 퇴영적인 한과 체념에 무력하게 주저앉아버리는 대신, 자신을 키워 온 그 땅에 대한 집착을 삶의 무구한 그리움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남루할 뿐인 현실의 비탄과 고통에서 벗어난다. 즉 억세고 완강하게 어떠한 삶의 행복도 보장해주려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의 실상이지만 시인은 그 꺼꾸로 주어지는 삶을 온전하게 살아냄으로써 강퍅한 현실에도 좌절하지 않는 타고난 그리움을 지켜가는 것이다.
이 점은 그의 시가 이른바 한을 바탕으로 한 재래의 서정시들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근거라고도 할 수 있다.
<한여름밤 마른번개는 / 어둠이며 수목이며 별빛의 / 목청을 털고 / 그대 앉은 곁에 다시 / 어둠으로 내릴 때 / 그대 눈빛 유서처럼 / 가슴에 적힐 때 / 내 바람피우던 바람은 / 저 어둠 속 가뭄타는 열매처럼 / 고단했던가 / 잠자리마다 남은 나이마다 쓸쓸한/오랜 방황이/식은땀되어 임종의/남루에 젖겠지 무겁겠지>
위의 시는 <병후.2>의 일절이다. 열병처럼 스쳐 지나온 처절한 젊음의 混融스러움이 진정된 뒤에 마주치는 삶은 현세적인 자연과 인생의 마지막 소멸, 곧 죽음의 자각에 연결된다. 죽음에서 바라볼 때 그토록 가슴 설레이게 한 젊음조차도 쓸쓸한 바람의 방황처럼 텅 빈 것으로 체험된다.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凋落해버린 일체의 과거를 <번개>에 순간적으로 조응해 보여주는 이 시는 그러므로 세속적인 갈등을 이미 해소해버린 어떤 달관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밤마다 잠못이루게 하던 방황은 한낱 남루로 여겨지고 시시로 가슴을 적셔오던 절망 또한 존재의 끝에서는 지극히 범상한 일상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괴롭고 쓸쓸한 삶의 경험이 순간의 <번개> 속에서 더욱 철저하게 털려질수록 시인은 절망적인 삶이 가려놓은 칠흙 어둠 너머에 빛나는 투명한 별빛을 의식한다. <바람이여 / 내 가슴 속 탁한 빛깔의 / 얽힌 나이테를 / 어둠이며 수목이며 별빛의 / 남은 목청으로 풀어라>라고 진술해 보일 때 거기에는 어떠한 어둠으로도 정복되지 않는 꿈꾸는 삶의 그리움에 가득찬 의욕이 내재해 있다. 마모되어간 것은 격정적이며 충동적인 젊음의 시간일 뿐,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서도 그리움은 이처럼 끝까지 남아 있다. 이러한 그리움이야말로 이 시로 하여금 삶의 단순한 찌들림이나 체념, 또는 달관의 자리로부터 다함없는 감수성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힘의 원동력인 것이다.
때때로 시인은 스스로의 외로움도 받아들이고 애써 절망을 체험하려는 역설적인 욕구도 내보인다. 다가오는 고난을 견고한 인고로 이겨가려는 이러한 자세는 남은 생애 동안에도 허허로운 마음으로 그리움을 간직해가려는 이 시인의 소망스러운 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지극히 아름답고 투명하게, 절망 속에서도 새롭게 돋아나는 삶에의 긍정이 노래되고 있다.
<내 육성이 갈리는 자리미다 / 새 살 새로 돋아 아무는 / 어둠은 총총 / 그대 눈빛을 심는다>
鄭洋의 시를 지탱해주는 언어는 이와같이 티없고 간절하다. 비록 고통스러운 현실이 노래되고 있을 때에도 그는 언제나 투명한 감각, 사물의 즉물적인 아름다움을 놓치는 법이 없다. 이것은 그가 체험의 과도한 범람 속에서도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삶의 공명대를 통해서 사태의 진면목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주체할 수 없는 삶의 비감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이겨내려는 극기의 정신을 소유함으로써 시와 시 아닌 것을 훌륭히 구별해낸다. <싸락눈>,<귀향>,<장보기>,<겨울밤에> 등의 시들은 모두 다 삶의 절제와 관련하여 정양의 투명한 시각을 예시해 준다. 이들 시는 한결같은 자세와 조용한 견딤으로 삶의 음영을 채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검불 덮힌 마늘밭 / 언 마늘씨를 캐먹으며 / 아이들은 속이 쓰리다 / /싸락눈 몰아오는 / 흐린 하늘 밑/ / 손바닥으로 혓바닥으로 / 싸락눈을 받아먹으며 / 아이들은 또 어디로들 갔는지 / 어디로들 가서 / 쓰리고 긴 겨울을 캐고 있는지 //
흐린 하늘을 휩쓸며 / 또 싸락눈이 내린다> (<싸락눈>)
위의 시는 어두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애틋한 그리움이 선명한 시적 인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絶糧의 긴 겨울을 견뎌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쌀낱 같은 싸락눈으로 하여 배고픈 겨울은 부드러운 환상 속으로 감추어진다. 그리하여 화자의 바램을 더욱 절실한 것으로 고정시키는 환상은 현실의 어두움을 보다 연화시켜 소망의 아름다움으로 색칠하는 것이다.
우리는 鄭洋의 시세계가 그의 고향에 대하여 유별나게 집착하는 것을, 그리고 그의 과작을 탓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이제까지의 그의 노력은 그의 집착과 과작에 값할 만큼의 깊이와 폭을 누려왔고 그 성과는 뛰어난 작품으로 수렴되어 있다. 깨어 있는 삶은 언제나 다양하고 유다른 깊이를 그 속에 마련해두고 있는 것이다.
* 정양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197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 시집 <수수깡을 씹으며> <까마귀떼>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등.
김용대 그림 |
첫댓글 출처 : http://blog.empas.com/deoinga/186958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