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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일시: 2015년 8월 22일 (토)
o 날씨: 흐림
o 산행경로: 청학동 주차장 - 탐방지원센터 - 삼신봉 - 심신산정 - 청학봉 - 상불재 - 삼성궁 - 원점회귀
o 산행거리: 12.4km
o 소요시간: 5시간 15분 (휴식 1시간)
o 지역: 경남 하동 (지리산 청학동)
o 일행: 나홀로
o 산행정보: 삼신봉
오늘의 산행지는 지리산 삼신봉이다. 삼신봉은 지리산 봉우리 중에서 영신봉에서 낙남정맥을 따라 남쪽으로 길게 뻗은 남부능선상의 중심봉이다. 지리산 남부능선은 지리산 주능선과 T자를 이루고 있으며, 빨치산 능선이라고도 부른다. 마지막까지 빨치산들이 저항하였던 곳이다. 삼신봉은 동으로는 묵계치를, 서쪽으로는 상불재, 남으로는 청학동을, 북쪽으로는 수곡재와 세석을 이어주는 사통팔달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지리산 주능선의 최고 전망대로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지리산의 웅대한 자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조망처이기도 하고, 악양으로 흘러 내리는 형제봉 능선과 멀리 탁 트인 남해 바다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삼신봉을 중심으로 서쪽 봉우리는 내삼신봉(삼신산정, 1354m), 동쪽은 외삼신봉(1288m) 이다.
휴가를 이용하여 고향으로 가던 길에 삼신봉을 산행하기로 하고 청학동을 기점으로 하여 원점회귀하는 코스를 택하였다. 단성IC를 나와 청학동으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한 산길이 알려진대로 오지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청학동은 이미 상업화로 물들어 가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 청학동마을 입구
이른 시간이라 주차장은 의외로 한적하다. 주차장 옆에는 하동군 관광안내소가 설치되어 있다.
▼ 청학동 주차장
주차장에서 산행 들머리인 청학동 탐방지원센터까지는 도로를 따라 약 수백미터를 올라가야 한다. 마을 곳곳에는 서당이나 서원, 예절학교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여러군데 건물을 신축하거나 증개축하는 모습이 보인다. 건물의 모습은 기와집, 너와집 등 '우리의 옛것'을 본뜬 모습이 대부분이다. 새롭게 신축되거나 증개축되는 건물들이 청학동 본연의 모습을 가꾸는데 사용되어야 할 텐데....
▼ 청학동 마을 전경
청학동 탐방지원센터로 올라가는 길에서는 외삼신봉을 제외한 삼신봉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 올려다본 삼신봉 방향 (왼쪽 바위 봉우리가 쇠통바위)
▼ 청학동 탐방지원센터
청학동 탐방지원센터에서 삼신봉까지는 약 2.4km의 거리다. 초입에는 큰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계곡을 따라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을 걷노라니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탐방지원센터에서 700m 지점에 샘물이 있다. 계곡옆 돌무덤사이에 작은 샘은 토속적인 모습이며, 지나가는 산객들의 목을 축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 샘터
샘을 지나 숲속길을 조금더 걷다보면 어느듯 사방이 열리면서 정상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신봉 정상은 등산로를 따라 약간 우회하여 올라야 한다. 우회하는 등산로에서는 남해방향의 조망이 한눈에 들어온다.삼신봉 정상 바로 아래에 삼신봉 삼거리 이정표가 있는데, 직진하면 쌍계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세석평원으로 가게 된다.
▼ 삼신봉 삼거리
삼신봉 삼거리에서 북동쪽으로 우뚝(?)솟은 봉우리가 삼신봉(1284m)이다. 삼신봉에는 이미 한무리의 산악회 회원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산우는 세석평원을 거쳐 천왕봉을 오른후 중산리로 내려갈 모양이다.
▼ 삼신봉 정상
삼신봉에서는 사방팔방의 조망이 아주 좋다. 특히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지난 6월의 지리산 주능선 종주 코스를 다시 한번 짚어 볼수 있었다. 가까이는 천왕봉이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이고 그 왼쪽으로 제석봉을 시작으로 노고단까지의 울퉁불퉁(?)한 능선이 손에 잡힐 듯 하다. 망원경을 꺼내어 능선을 살펴보니 세석산장과 벽소령산장이 한층 가깝게 다가오고, 세석평원은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다. 주능선 종주때에는 나무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전체 숲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삼신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 삼신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방향 (왼쪽부터 영신봉, 세석평원, 촛대봉, 연하봉, 장터목, 제석봉, 천왕봉)
▼ 삼신봉에서 바라본 노고단 (왼쪽 멀리)과 반야봉 (중간 왼쪽)
삼신봉에서는 사방팔방의 조망이 좋기 때문에 천왕봉 오른쪽으로 황매산도 보이고, 그 앞으로는 웅석봉의 능선도 늠름한 모습이다.
▼ 삼신봉에서 바라본 웅석봉(중간) 황매산(중간 왼쪽 멀리)
▼ 지리산 주능선 파노라마. 삼신산정(왼쪽앞) ~ 천왕봉(오른쪽 뒤)
▼ 천왕봉을 배경으로 한 컷
삼신봉에서 바라본 남해 방향의 조망은 수많은 산들이 구름과 안개와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다. 금오산은 멀리 구름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고, 형제봉은 구름을 휘감고 있다.
▼ 삼신봉에서 바라본 남해방향 (왼쪽 멀리 금오산(?), 오른쪽 뒤는 형제봉 능선)
▼ 산악회 회원들
삼신봉에서의 조망에 취하여 한참동안을 지체하였지만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산악회 회원들이 세석평원 방향으로 출발한후 나홀로 삼신봉 정상에서 사방팔방 조망을 다시한번 가슴에 담은후 내삼신봉(삼신산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삼신봉에서 바라본 내삼신봉(삼신산정, 뒷쪽 봉우리). 가야할 방향이다.
삼신봉에서 내삼신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삼신봉 삼거리로 내려온후 직진하면 된다. 초반에 오르막이 있지만 비교적 평탄하다. 숲속길이라 내삼신봉에 도착할때 까지는 주변 조망이 거의 어렵다.
▼ 내삼신봉으로 가는길에 돌아본 삼신봉과 천왕봉(뒤)
삼신봉에서 내삼신봉(삼신산정)까지는 약 1.4km의 거리다. 내삼신봉의 정상석은 삼신산정(1354m)으로 되어 있는데, 삼신봉 능선에서 최고 높은 봉우리라는 뜻인듯 하다. 최고봉이긴 하지만 주봉은 삼신봉이다.
내삼신봉(삼신산정)의 조망도 삼신봉에 못지 않다. 사방팔방이 한눈에 들어오고, 삼신봉에서는 내삼신봉에 가려 보이지 않던 형제봉 능선과 그 뒤로 백운산도 멀리 조망된다.
▼ 내삼신봉(삼신산정) 정상 (천황봉을 배경으로)
▼ 내삼신봉(삼신산정)에서 뒤돌아본 삼신봉(중앙)과 외삼신봉(오른쪽)
▼ 내삼신봉(삼신산정)에서 바라본 청학동 방향 (저수지는 묵계제)
▼ 내삼신봉에서 바라본 백운산 방향. 구름에 쌓여 있는 모습이 별천지를 보는 듯 하다.
남해바다 방향을 조망하니 금오산(?)은 여전히 구름위에 떠있고, 강산은 하늘과 한몸이다.
▼ 내삼신봉에서 바라본 형제봉(오른쪽 뒤)과 금오산 (중간 오른쪽 멀리)
내삼신봉(삼신산정)서 바라보는 지리산 주능선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단지 천황봉은 한발 뒤로 물러섰고, 노고단과 반야봉은 바짝 다가선 느낌이다. 흐린날씨와 안개 때문에 조금더 흐릿한 모습이다.
내삼신봉(삼신산정)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한 다음 발걸음을 상불재 방향으로 옮긴다. 내삼신봉에서 상불재까지는 약 2.5km의 거리다. 이 구간은 조릿대가 등산로 좌우를 에워싸고 있다. 6.25 동란때 지리산을 헤매던 수많은 빨치산들의 피가 이 조릿대에 물들지 않았을까.....
▼ 내삼신봉(삼신산정) 모습
내삼신봉에서 상불재로 가는 중간 중간에 송정굴, 쇠통바위, 청학봉 등 몇가지 포인트가 있다. 사전에 알고 가면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려러니 하고 지나치기 쉽다. 나도 산행도중에는 알지 못하였으나 산행기록을 정리하면서 유심이 보았던 포인트가 송정굴, 쇠통바위와 독바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이도 사진을 남겼다...
▼ 송정굴. 조선시대 문신인 송정 하수일 선생이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피해 기거했다는 곳이다.
송정굴은 큰 바위덩어리 밑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다. 바위 꼭대기의 조망이 좋을 것 같아 올라가보고 싶었으나 수풀이 무성하고, 바위면이 날카롭게 깍여 있어 사람이 오르기는 어려운 곳이다.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 뒤돌아본 삼신봉 능선. 저 능선위의 바위 아래에 송정굴이 있다.
송정굴을 지나면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쇠통바위가 나온다. 커다란 암석위의 바위 모습이 자물쇠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커다란 암석 아래에는 석문이 있어 누구나 지나가다가 호기심을 가질만한 곳이다.
▼ 쇠통바위 통천문
통천문을 통과하여야 쇠통바위로 오를 수 있다. 아래에서 보고 있자니 통천문이 천문산의 그것과 닮았다는 느낌이다. 크기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작지만 모양새나 느낌이 유사하다. 통천문을 통과하면 아래로는 청학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바위벽을 타고 오르면 통천문 위로 올라갈수 있다.
▼ 쇠통바위 (바위 중간에 패인 홈이 자물쇠를 닮았다)
쇠통바위의 쇠통(자물쇠)이 청학동의 열쇠바위가 만나는날 천지가 개벽하여 신세계가 열린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 쇠통바위와 위에서 본 통천문 모습 (펌)
쇠통바위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바위벽을 타고 올라야 한다. 왼쪽으로는 떨어지면 통천문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주변에 산객들이 많으면 군중심리로 같이 올라갈텐데....혼자라 더욱 조심스럽다.
▼ 쇠통바위로 올라가는 바위길. 왼쪽 바위위에 쇠통바위가 있다.
쇠통바위는 청학동에서도 잘 보인다. 삼신봉 능선위로 뽀족하게 튀어나온 바위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쇠통바위 위에서도 청학동을 비롯하여 주변의 조망이 좋다. 쇠통바위 위는 면적이 넓지는 않지만 몇사람이 앉아서 쉴만한 공간은 있다. 바람이 불거나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조금 위험할것 같다. 쇠통바위를 뒤로 상불재로 향한다. 중간에 산봉우리라는 느낌이 없는데 트랭글이 요란하게 울린다. 청학봉이다. 등산로 옆의 이정표에도 아무런 표시가 없는데....
▼ 청학봉
이제는 상불재를 거쳐 삼성궁으로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뒤돌아 보니 쇠통바위가 산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고 있다.
▼ 뒤돌아본 쇠통바위 모습
▼ 뒤돌아본 삼신봉 능선.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린다. 중간이 내삼신봉(삼신산정) 그 뒤가 삼신봉인듯 한데...
상불재를 조금 앞두고 등산로 옆으로 백운산 방향이 나무사이로 언듯언듯 보인다. 조망포인트를 찾아보니 주변에 뽀족한 바위가 하나 보이고 그뒤로 넓직한(?) 암반이 보인다. 여기가 독바위(?)인 모양이다. 베낭을 풀고 요기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구름을 품고 있는 백운산이 심심찮은 눈요기를 제공해 준다. 구름에 가려 보일듯 말듯한 산정상부가 더욱 신비롭다.
▼ 독바위에서 바라본 형제봉(앞)과 백운산(뒤)
서남쪽 먼곳을 바라보니 조계산과 무등산(?) 자락이 흐릿하게 보이는 듯하다.
▼ 독바위에서 당겨본 조계산(중간 멀리)과 무등산 자락 (오른쪽 멀리)
드디어 상불재에 도착했다. 상불재에서 삼성궁까지는 2.3km 의 내리막길이다.
▼ 상불재
상불재에서 삼성궁으로 내려가는 초입은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때로는 밧줄을 잡아야 한다. 초입을 벗어나면 계곡을 따라 삼성궁까지 이어진다. 등산로가 물길이고 물길이 등산로가 되기도 한다. 비가 많이 내리면 이등산로도 이용하기 어려울 것 같다. 중간에 세수를 하고 손발을 씻어면서 땀을 식히고...
삼성궁에 다다를때쯤 다시한번 급경사 내리막이 나타난다. 급경사를 지나 계곡을 한번 건너니 삼성궁의 모습이 보인다. 삼성궁을 끼고있는 계곡에는 폭포가 쏟아지고 있고...... 건너편 삼성궁에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 등산로에서 바라본 삼성궁 모습
▼ 삼성궁 소개 (펌)
▼ 정면에서 바라본 삼성궁 모습
▼ 삼성궁 매표소 입구
삼성궁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입장료(대인 7000원)을 지불하고 입장해야 한다. 오늘은 지친다리를 위해 자세하게 삼성궁을 살펴보는 것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 삼성궁 입구
삼성궁을 지나 원점으로 회귀하는 길가에 김봉곤 촌장의 몽양당이 보인다. 요즘 TV에 자주 얼굴을 비치는 사람이라 모습이 궁금하여 몽양당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방학이 지나뒤라 인적은 없고 한분 아주머니가 가볍게 목례를 한다. 아마도 김봉곤 촌장 부인인 듯하다. 부인의 얼굴에 '유자식 상팔자'에 출연하고 있는 딸과 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 김봉곤 촌장의 몽양당
삼성궁에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 곳곳에 몽양당, 고목당 등 서당과 서원이 많이 보인다. 고목당 미치지 못한 곳에 청학동 민속박물관 단천이 있고, 그 뒤로 지리산 대안학교 단천도 보인다.
▼ 청학동 민속박물관 단천. 중간뒤로 보이는 붉은색 기와집이 '지리산 대안학교 단천'이다.
▼ 올려다본 삼신봉 능선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니 주차장에는 관광버스와 관광객들이 가득하다. 산악회 버스도 있고 관광객 버스도 있고....주차장 옆 식당에는 이런 저런 모임이 한창이다. 점심시간도 되고 해서 산채비빔밥을 시켰는데, 메인은 그냥 그렇고 따로 나오는 반찬이 구미를 당긴다. 적은양이지만 정갈한 맛이다.
▼ 하동군 여행 안내도
[청학동 이야기] 지리산에 있다는 청학동(靑鶴洞)은 설화 속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유토피아이다. 청학동은 신라 멸망 이후 외적의 침략을 자주 당하자 피난성향의 백성과 세상에 불만이 있던 사람들이 은둔하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유는 밭을 갈고 글이나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생계유지만으로 만족하는 소박한 형태의 유토피아이다.
청학동에 관련된 설화는 이인로의 ≪파한집≫에 처음 그 기록이 보인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청학동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지리산에는 청학동이라는 데가 있는데 그곳은 좁고 험한 길을 기어서 몇 리를 들어가면 문득 농사를 짓기에 알맞은 널찍한 기름진 벌판이 벌려지는데 거기에는 청학이 깃들고 있어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옛날 세상을 시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들어가 살던 곳인 듯한데 아직도 무너진 담과 낡은 구덩이가 가시 덤불 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청학동은 길이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할 정도며, 사방이 비옥한 땅이고 속세를 피해 간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넉넉한 생활을 영위하던 땅이라는 것이다. 특히 청학동에는 청학(靑鶴)이란 새가 두각 되어 설명되는데, 그 새가 울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전해지는 새이다. 그러므로 청학에는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바램이 담겨 있고, 이는 역설적으로 당대 현실의 혼란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인로의 이 글은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연명은 벼슬 생활을 결연히 떨치고 전원생활에 들어갔으나 이곳의 생활에도 만족하질 못하고 인생무상과 고독의 세계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절박한 심정에서 그는 현세가 아닌 ‘무릉도원’이라는 환상적인 유토피아를 생각했다.
무릉도원은 원시, 자연상태를 추구한 이상향이며, 동양인의 시적 이미지 속에 상징화된 유토피아이며, 은일 고사의 이상향으로 관념된 동시에 우리에게 있어서도 친근하고 기조적인 유토피아로 부각되어 왔다. 때문에 그 이후에는 도화만 보면 무릉의 선경을 연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인로는 <도화원기>의 무릉도원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표명하고, 그와 비슷한 청학동의 세계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파한집≫에 보면 ≪오류선생집≫을 읽다가 <도화원기>를 되풀이하여 읽었음을 피력하고 있는 점으로도 그의 영향이 지대했음이 확인된다. 이렇게 이인로는 도연명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기에 그의 인생관과 행적을 예찬하며 그에 따라 비슷하게 행동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이인로가 쓴 <와도헌기(臥陶軒記)>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거처를 ‘은일시인 도잠이 누워있는 마루방’임을 뜻하는 ‘와도헌’이라 명명한 것에서 그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인로는 그가 항상 동경하고 있던 도연명의 의지를 실천하고자 실제로 지리산에 있는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 나선 일을 ≪파한집≫에 기록하고 있다.
최상국(崔相國)과 함께 세상과 인연을 끊어버리고 실제로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청학동이란 곳은 지리산 어느 곳에도 없었다. 다만 화개에서 신흥사(쌍계사)로 가는 길목에서 선경의 감격만을 적은 <유지리산>이라는 시를 바위에 적어 놓고 돌아왔을 뿐이다.
두류산 아득하다 저문 구름 낮게 깔려
골짜기와 바위들이 회계산인양 곱구나.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 찾자 하나
숲 저편선 쓸쓸히 잔나비 울음만 들려오네.
누대는 아득해라 삼산은 멀고 먼데
이끼 아래 새겨진 네 글자 희미하다.
몯노라 신선의 땅 그 어디메뇨
진 꽃잎 물에 떠서 근심만 겹게 하네
하루 종일 청학동을 찾아 헤매이다 어느새 뉘엿한 저물녘이 되었다. 낮게 깔리는 구름 속에 잠긴 봉우리와 골짜기들은 마치 꿈속에 회계산을 보는 듯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구름 속 어디엔가 청학동 신선의 계곡이 있다. 그러나 청학동 드는 입구는 끝내 찾을 길이 없고, 덧없는 인생이 슬프지 않느냐고 잔나비의 구슬픈 울음소리만 울려 퍼진다. 신선의 누대는 내 인연이 아니요, 삼산산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쌍계사 어귀 바위엔 ‘쌍계석문’이라 새긴 네 글자가 이끼에 덮혀 있다. 시내 위로 떠오는 진 꽃을 보며 이 물줄기 어디엔가 선원, 즉 무릉도원이 있지 않겠느냐며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고 있다.
이렇게 이인로는 마지막에 청학동을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더 말을 잇고 있는데, 어부가 다시는 무릉도원을 찾지 못하였다는 점을 들어 이상향은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바로 이인로의 <청학동기>는 한국판 <도화원기>라 할 수 있다. (이상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