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양강 水系의 정자와 한시 목은 이색, 영천자 신잠, 노봉 민정중, 원교 이광사 등이 장흥으로 유배와서 지역의 전통과 특성을 진단하거나 후진들을 지도한 사실을 간단하게 살폈다. 이들이 장흥을 문림의 고장으로 만드는데 얼마나 이바지 했는지는 계량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떤 형태로든 문림조성에 음으로 양으로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예양강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우선 예양강은 장흥주민들과 애환을 같이 했다. 주민들에게 생명수와 아름다운 풍치를 제공했다. 그런가 하면 장흥의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하기도 했다. 강진 구역인 탐진강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제공하고, 고기를 잡게 하지만 태풍과 폭우가 오면 농가와 농지를 잠기게 하는 재앙이 들게 한 강이기도 했다. 조선의 선비 문화에서 정자나 서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자못 크다. 장흥의 선인들도 예양 또는 예수(汭水)와 탐진강에서 경승을 읊었다. 당대 저명인사들의 시(詩)에 그 체취가 묻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장흥의 향토사학자 고 청재(靑齋) 강수의(姜守義)선생의「향토학」에 게재된 몇 수의 한시와 현재 남아 있는 정자와 서원의 유래를 보자. <필자 주>
1) 예양강을 읊은 한시
(1) 佔畢齋 金宗直(1431~1492)의 湖南李節度使季仝 寄示冠山東亭四詩要和(24구 중 4구) 조선시대 사림의 종장 점필재 김종직이 한시를 남겼다. 그가 전라도관찰사와 전주부윤을 겸직할 때로 보이는데 아마도 1482년 이후로 보인다.관산동정에 부치다(寄示東亭)에서 「관산」은 장흥을 말한다. 다만 「동정」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 寄示冠山東亭 山川無限好 산과 시내는 한 없이 좋거니와 花月爲誰姸 꽃과 달은 누구를 위해 고운가 婦巖紅日側 부암엔 아침 해가 비스듬히 비추고 汭水白蘋開 예양강엔 흰 마름꽃이 피었네
(2) 秋江 南孝溫(1454~1492) 김종직(金宗直)·김시습(金時習)의 문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신(曺伸)·이윤종(李允宗)·주계정(朱溪正)·안응세(安應世) 등과 사궜다. 1478년(성종 9) 문종의 비(妃)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을 요구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세조 즉위와 정난공신(靖難功臣)의 명분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던 것이었으므로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샀다. 특히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은 그의 국문(鞫問)을 주장했다. 1480년 어머니의 당부로 마지못해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출사를 접었다.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이정은(李貞恩)·이총(李摠)·우선언(禹善言)·조자지(趙自知)·한경기(韓景琦) 등과 죽림칠현처럼 살고자 했다.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찾는 유랑생활로 여생을 마쳤다. 그는 장흥에 와서 사인정의 김필과 평화 다전등 습독공(習讀公․魏由亨)의 산정(山亭)을 드나들며 교유했다. 이 한시도東亭의 잔치 때 지은 것이다. 12구 鶴書란 漢나라 때 선비를 초청하는 편지를 鶴頭 모양의 전서체로 썼던 것을 뜻한다.
■ 汭陽江 留東亭 慶會 冠山雖麗非吾土 관산은 수려하지만 내 고향은 아니지 別來五年紅顔蒼 이별한 다섯 해에 홍안이 늙었구려 相逢數日又相別 만난 지 며칠 만에 또다시 헤어지니 淸淚浪浪落離觴 맑은 눈물 뚝뚝 이별 잔에 떨어지내 汭陽江水琉璃碧 예양강 흐르는 강물 유리처럼 푸르고 洛花春光歸半强 꽃진 뒤의 봄빛도 반 넘어 저물었네 聖朝一才無棄擲 성조는 한 인재도 버림이 없으니 如君詞藻孰能忘 그대 같은 문장을 누가 잊을까 雷陽春竹南人思 뇌양의 춘죽은 남인이 사모함이니 寇公應入中書堂 구공은 응당 중서당에 들어가리니 寄語努力加飧飯 말하노니 부디 저녁음식 많이 드시구려 鶴書赴龍今當忙 학서 당도할 날 이제는 응당 바쁘리니 春天祖席東亭上 봄날 동정 위에서 작별하는 이 자리 竹馬情懷太堪傷 죽마고우의 정회는 크게 상할 뿐이네
(3) 訥齋 朴祥(1474~1530)이 靈川子 申潛(1491~1554)의 詩에 和答(24구 중 마지막 2수)이다. 앞의 2구는 신잠의 작품이고, 뒤의 2구는 눌재의 화답이다.
春半招邀渡數溪 봄철 다 지나 부름 받고 시냇물 건너가니 寶林伽智白雲迷 보림사와 가지사는 흰 구름이 어른거리네
南望汭陽江上柳 남쪽으로 예양강변 버들을 바라보니 不聞鸎曲意酸然 꾀꼬리 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퍼진다
(4) 岐峯 白光弘(1522~1582)의 2수
■ 汭上路醉後 醉眠江上石 강 위의 바위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日落遠峯陰 해는 떨어져 먼 산에 그늘이 드리우누나 獨鳥前灘過 외로운 새 앞내를 지나가는데 沈沈煉雨林 연기 낀 숲은 침침하기만 하다
■ 汭陽東橋 橋上遊人花滿頭 다리 위에 노는 사람 머리에 꽃이 만발 城邊月出水悠悠 성 가에 달뜨고 물은 유유히 흐른다 輕風解作春衣吟 가벼운 바람 봄옷을 입게 하네 爲惜淸歡盡夜留 즐거움 아껴서 밤새도록 머므르네
(5) 秋江 南孝溫(1454~1492)과 澹軒 李夏坤(1677~1724)의 조대기(釣臺記)와 남유록(南遊錄)이 있다. 추강(秋江)이 장흥에서 한때를 보낸 시기는 미상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애원에 못이겨 생원시에 응시한 시기가 1482년이니 아마도 그 이후로 보이며 김필의 사인정의 바위를 조어대로 명명하고, 그 기를 남겼다. 담헌(澹軒)은 1722년 11월 12일부터 24일까지 장흥에 체류하면서예양강이 남쪽으로 흘러 성을 둘러 싼 것이 마치 띠와 같다(汭陽江南流 繞郭如帶)며 그의 저서 남유록에 강의 모습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