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욕망은 가난해지지 않는다, 섬 산에서 일탈을 꿈꾸다. 거제지맥
1. 일자: 2017. 4. 22 (토)
2. 장소: 노자산(565m), 가라산(585m), 망산(397m)
3. 행로 / 시간
[거제자연휴양림(05:00) -> (2등산로) -> 노자산(05:50, 가라산 4.2km) -> 정자전망대(06:25) -> (벼슬바위/마늘바위/뫼바위) / (조식 07:35~08:18) -> 진마이재(08:29) -> 가라산(08:53, 저구고개 4.2km) -> 망등(09:11) -> 다대산성(09:49) -> 저구고개(10:22, 망산 4.3km) -> (각지미(268m) / 세발번디(318m) -> 내봉산(11:49, 359m) -> 망산(12:47 359m, 명사 1.8km) -> 명사초교(13:39), 14.7km]
< 거제지맥 산행을 준비하며 >
거제지맥에 간다. 거제도행이 처음이니 지맥의 주요 구간인 노자산~가라산~망산과도 첫 인연이다. 오래 전부터 꿈꾸던 곳이었으나 여러 시도가 이런저런 이유로 번번히 취소되어, 마음조리다 큰 맘 먹고 288 밴드에 공지를 올려 동지를 모으고 산악회에 단체로 신청을 했다. 길이 없으면 내어 가자는 마음이다. 너무 오래 마음에 담아 두면 짐이 된다.
옛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한때 정기 구독했던 월간 마운틴에 게재된‘거제도의 산’기사가 얼핏 생각나 먼지 쌓인 잡지를 뒤진 끝에 2011년 5월호를 찾아낸다. 거기엔 거제도와 그 섬에 위치한 산들의 상세한 기록이 있었다. 거제지맥은 섬 남쪽 명사 해변에서 시작하여 북부의 외포까지 연결되는 52km 거리의 능선이다. 거제 11명산 중 가장 조망이 좋다는 망산과 대금산을 양 끝으로 하여 가라산, 노자산, 북병산, 옥녀봉, 국사봉을 잇는다. (노자산과 옥녀봉은 지맥에서 빗겨있다. 나머지 4곳의 거제 명산은 계룡산, 선자산, 앵산, 산방산이다.)
거제 지도를 살핀다. 거제도는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해안선의 길이만 275km에 달하는 큰 섬이다. 막연한 추측보다 많은 걸 품고 있는 곳이다. 계획한 산들은 통영에서 거제대교를 건너 한참을 돌아 거제자연휴양림에서 시작하여 섬 서쪽 끝으로 향한다. 일단 첫 느낌은‘멀다’. 신사역에서 휴양림까지의 거리가 410km이니 부산보다 조금 더 멀지만 인연이 없어서인지 마음의 거리는 한참 더 멀게 느껴진다.
거제에는 산도 많지만 명승지도 여러 있다. 외도, 지심도, 매물도, 해금강, 장승포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을 이루는 관광지고, 거제포로수용소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가야 할 길을 4등분해 본다. 거제자연휴양림~노자산은 비고 360m를 치고 올라야 하며 2.2km 70분을 예상한다. (2등산로를 이용해 걸어 훨씬 짧았다.) 어스름을 치고 오르면 일출의 감동을 맞을 듯하다. 노자산~가라산은 이름난 바위지대를 지나는 길로 4.2km 2시간, 가라산~저구고개 4.2km 100분, 저구고개~명사초교 5.8km 2시간 반, 종합하면 15km, 휴식 포함 8시간의 적당한 산행이 될 듯하다.
< 희망사항 >
근 두 달 만에 떠나는 무박산행이다. 새벽 어스름 샛별이 보고 싶다. 별 중에 가장 이뿐 이름, 개밥바리기별로도 불리는 동틀 녘 동쪽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보고 싶다. 언제부터 드는 바램이다.
하루에 명산 3곳을 오른다. 섬 산 어딘들 후진 곳이 있으랴 마는 오늘 오를 세 산은 모두 한가락씩 한다. 망산, 바다의 변화를 관찰하던 전망대. 그 관찰 대상이 왜구든 고기잡이 나간 어선이든 조망이 좋단 말일 것이다. 가라산, 비단 같이 아름다운 거제 최고봉. 노자산, 진시황의 불노초 전설로 살아 있는 곳. 섬 산을 걸으며 전하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첫 인연을 맺기가 어려워 그렇지 이번 산행을 하고 나면 거제도와의 마음의 거리가 한결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선답자들의 일치된 조언은, 거제지맥의 산들은 높이로만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 한다. 남들은 북병산을 거쳐 좀 더 먼 거리를 걷는데 반해 단축산행을 하는 꼴이니 남아 도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의미 있는 산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모처럼 떠나는 섬 산행, 날씨가 좋아 바다 일출도 보고 망망대해의 푸른 바다를 굽어 볼 수 있는 행운이 오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 거제도 가는 길에 >
바쁜 오후를 보내고 귀가해 좀 쉬었다 신사행 전철에 몸을 맡긴다. 남들은 집으로 향하는 시간 길을 나선다. 늦지 않게 도착한 신사역에서 아이넷님과 함께 버스에 오른다. 최종 참가자는 4명, 바람님의 부재가 아쉽다. 값을 치른 한자리는 누군가 편하게 가기로 하고 낯선 이 옆에 앉는다. 우려했던 버스는 비교적 새 것이고 무엇보다 앞뒤 공간이 좁지 않아 다행이다. 죽전에서 산수담님과 한설지님이 합류한다. 버스는 소등되고 곧 사위가 어두워진다. 억지로 잠을 청해보지만 늘 그렇듯 쉽지 않다. 차창으로 본 하늘에는 별이 없다. 일단 한 가지 바램은 물 건너 갔다.
고성 공룡나라 휴게소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나니 그제서야 졸음이 쏟아진다. 산악인 엄홍길과 이름이 두 자 같은 대장이 코스 안내를 한다. 장광설이다. 나름 본인 머리 속에 있는 길을 상세히 풀어내는데 너무 정보가 많아 안 들은 만 못했다. 주요 포인트와 주의사항 위주의 깔끔한 안내가 아쉽다. 평소의 나도 그랬던 건 아닌가 하고 내 모습을 비추어본다. 무엇이든 과한 건 모자람만 못하다.
어둠 속에서 거제대교를 건넌다. 아직 들머리까진 조금 더 가야 한다. 조금 더 눈을 붙인다. 늦게 든 잠이 쏟아진다. 비몽사몽간 망산을 내려와 명사 해변을 걷는 내 모습을 그린다.
(여기까지는 산행을 준비하면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거제휴양림에서 노자산 >
제대로 된 지맥 종주를 꿈꾸는 이들은 먼저 내리고, 축축한 아침 공기를 안은 거제자연휴양림 도로 앞에 선다. 시간은 막 5시가 지난다. 간단히 행장을 정비하고 랜턴을 켜고 도로를 오른다. 트랭글이 말썽을 부린다. 한참을 실랑이 끝에 겨우 작동이 된다. 그 사이 500미터 정도를 올라왔다. 머리에 든 기억을 되살려 우측 길로 가자 한다. 휴양림 막사 뒤로 난 2등산로 접어든다. 대개의 사람들은 보다 선명하게 난 1등산로로 가게 마련인데 그 경우 노자산까지 길게는 1.6km 왕복해야 한다. 등로는 이내 휴양림 산책로의 흔적에서 벗어난다. 어둠 속 비탈로 발걸음을 옮긴다. 휴양림에서 노자산까지, 거리는 예상보다 많이 짧을 것 같은데 길 사정은 무척 가파르다. 긴 버스여행으로 다리가 경직된 상태에서 비탈을 치고 오르니 힘듦이 더하다. 산수담님과 한설지님은 잘도 걷는다.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데다 타고난 체력이 남다르다. 아이넷님은 너무 많이 남을 시간 걱정을 한다. 우리가 택한 B코스는 북병산을 건너 뛴 코스로 A코스보다 8km가 짧아 시간 여유가 많다. B코스 동행자 10여명이 무리 지어 걷는다. 일차 목표는 ‘노자산에서 일출을’이다.
05:50,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노자산 정상에 선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사람을 보냈다는 명소로, 바위와 바다 절경이 어우러져 있고 늙지 않는 신선이 산다고 전한다. 어둠이 서서히 걷힌다. 사방이 미세먼지로 뿌옇다. 이 먼 청정지역까지 황사/미세먼지의 영향이 닿고 있으니 환경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그래도 남동쪽 바다 위로 희미하게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여명이 밝아오는 구름 인 하늘에 붉은 기운이 돈다. 사실 날마다 겪는 일인데도 인간이 일출을 보고 감동하는 건 그 자체가 감동이다. 그만큼 밤과 어둠이 주는 불확실성이 크다는 반증이리라. 내일이 있으리란 희망과 그 희망이 사실로 증명됨은 큰 감동, 맞다. 이 아침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그렇다.
거제 4인방이 노자산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어렵게 길을 나선 분들이다. 그래서 더욱 고맙다. 정상석 뒤편으로 걸음을 옮긴다. 색다른 바다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포구 마을의 평온한 풍경이 인상적이다. 고요함이 깃든다. 새벽에 지나온 통영 방면의 바다와 산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사방이 바다다. 늘 산에서 산만 바라보던 산꾼에게 바다는 그야말로 로망이다. 앞으로 전개될 거제의 산과 바다 풍경에 대한 기대가 급상승한다. 바람이 산들 불어온다. 상쾌한 기운이 사방에서 느껴진다. 아이넷님은 이 맛에 산에 다닌다 한다. 왜 아니겠는가? 바다를 향해 가는 마음에 풍선을 매단다.
노자산에서 가사산까지는 4.2km 거리다.
< 노자산에서의 아침 (바다 사진은 망산에서 본 것이다) >
< 노자산에서 가라산 >
길을 내려선다. 상쾌한 공기가 가슴 속 깊게 전해진다. 해는 점점 더 크게 떠오른다. 노자산 일출의 아쉬움은 점점 옅어진다. 학등고개에서 올라오는 갈림을 지나며 숲 풍경은 화려해진다. 숲에 빛이 들어온다. 잔디가 깔린 듯 짙은 녹색 융단과 이제 막 잎을 틔우기 시작한 나목이 공존한다. 색의 조화가 싱그럽다.
잠시 후 정자 위에 선다. 한때는 지붕까지 있는 화려한 명소였건만 어찌된 연유인지 지금은 쇠기둥 페인트가 다 벗겨진 체 방치된 곳이 되었다. 그래도 망루 위에 서니 지나온 능선의 풍경이 한 눈에 조망된다. 시원하다.
바위지대가 이어진다. 일출의 잔재가 곳곳에 묻어난다. 먼 바다 위에 섬들이 점점이 떠 있다. 일명 망망대해 위 일점선도(一點仙島)는 이곳에도 있었다. 벼슬바위/마늘바위/뫼바위 각각 이름은 달라도 화려한 조망은 공통적이다. 황홀한 풍경에 넋을 잃고 한참 동안 머물고 간다. 몽돌해변과 저 멀리 외도 풍경도 인상적이다.
< 일출의 잔재 / 바위 전망대에서 >
뫼바위를 끝으로 암릉지대는 벗어난다. 등로가 평탄해진다. 진달래가 진 숲은 화려함은 없지만 연한 초록 기운이 진동한다. 여리게 돋아나는 어린 순을 바라보는 눈에 생기가 돈다. 배가 고파온다. 숲 평탄한 곳에 자리를 편다. 라면이 끓여지고 산수담님이 지고 온 막걸리 한잔씩이 돌아간다. 두런두런 지나온 길을 이야기 한다. 공통된 의견은 오길 잘했다는 것이다.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아 그렇지 산에 와 후회는 없다.
< 가라산 가는 숲에서 / 가라산 정상 >
시간이 어찌 가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많이 남는 건 시간이니 말이다. 정자를 지난다. 길가 이정을 만난다. 이곳이 진마이재 인가 보다. 가라산 0.8km, 내출 1.5km, 학동고개 4.1km. 시간은 08:35. 숫자가 의미는 희미하다. 자유롭게 숲 길을 걷는 재미에 푹 빠진다.
진마이재에서 가라산 오름은 초반 좀 거칠다. 비고가 만만치 않아 숨을 헐떡였다. 긴 계단을 올라선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아주 먼 곳까지 이어지는 거제지맥의 능선이 보인다. 내가 걸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만큼 지맥은 멀고 길다. 다시 평온한 숲이 이어진다. 정상이 가까워 올수록 숲은 짙어진다. 그 끝에는 가라산이 있었다. 정상은 헬기장이다. 봄 햇살이 강하게 내려앉는다. 학동마을 해변 풍경이 근사하다. 반대편으론 율포만의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길 양 옆으로 푸른 바다를 끼고 산행할 수 있는 곳, 그리 많지 않을지어다.
< 가라산에서 저구고개 >
이제 저구고개까지는 긴 내리막이다. 비고는 약 500미터, 고개까지 거리는 4.2km 거리상 단순히 내리막만 있지는 않을 듯하다. 평지와 오르내림이 반복되리라. 길의 대강을 알고 나니 마음이 편해진다. 오늘 산행에서 주요 구간별 거리는 노자산~가라산 4.2km, 가라산~저구 4.2km, 저구~망산 4.3km로 비슷해 외우기 쉬워 좋다.
가라산 초반 내림은 제법 거칠다. 세미 암릉구간이다. 비탈과 계단을 한참 내려서자 시야가 확 트이는 절벽이 나타난다. 전화가 와 잠시 받는 사이, 먼저 간 아이넷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얼른 오란다. 무슨 일 있나 하고 걸음에 속도를 낸다. 깜짝 놀란다. 일행은 한눈에 보기에도 기가 막힌 벼랑에 서 있다. 전망 좋기로 이름난 망등이다. 율포만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개방감이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다. 내려다 본 풍경이 오래 전 홍도 깃대봉에서 하산 할 때 본 포구 모습과 닮아 있다. 그때도 햇살에 반사되는 포구 풍광은 근사했다. 게다가 완만하게 굽이치며 바다로 접어드는 산등성이도 멋지다. 소나무의 짙은 녹색과 새순이 돋아나는 활엽수가 만들어내는 색의 조화가 현기증이 날만큼 풍요롭다.
< 망등 전망대에서 >
망등을 내려서 다시 숲으로 들어선다. 햇빛조차 희미하게 들어오는 농밀한 숲길이 이어진다. 낮은 섬 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도 변화가 없어 걸음에 속도가 난다. 무너진 성곽이 보인다. 다대산성이다. 길가에 자리를 펴고 잠시 쉬어간다. 남은 간식을 나눠 먹는다. 아아넷님이 지리태극종주 이야길 꺼낸다. 마음이 잠시 동한다. 특히 안 가본 바래봉 구간과 밤머리재 구간이 당긴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몸 컨디션 보아 가며 정하면 된다. 6월 정기산행은 1박 3일로 영남알프스 종주를 계획한다는 내 마음을 전한다. 이것 역시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다. 시간이 결정을 구체화 하리라 믿는다.
10:22, 저구고개를 지난다. 널찍한 도로를 내려서면 명사해수욕장과 바다가 보인다. 봄 햇살이 도로에 내려앉는다. 바다엔 고깃배들이 떠 있다. 한가한 휴일 풍경이다. 지체하면 마음이 변할까 서둘러 산으로 올라선다.
< 저구고개에서 명사초교 >
이제 거제지맥은 망산 구간만 남겨두었다. 그런데 마지막이 하이라이트다. 거리 5.8km, 고도표를 보니 봉우리 4개를 오르내려야 한다. 암릉 구간도 있다. 새벽에 대장이 빠르면 90분, 보통 2시간이면 된다 했으나 3시간도 빡빡해 보인다. 시간이야 어찌 되었건 망산 풍경이 기가 막히다 하니 기대를 가져본다.
평지에 익숙한 다리를 비탈에 적응시키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속도를 낸다. 산행 내내 우리를 따르던 분들과 멀어진다. 오르막 속도야 대간꾼을 따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거친 숨을 몰아 쉬고 비고 200미터를 이겨내고 나니 길은 조금 순해진다. 덩달아 해안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간간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준다. 더없이 고맙다.
< 각지미 / 세발번디 부근 전망대에서 >
걷느라 힘겨워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지도상으론 첫 봉우리가 각지미, 두 번째 봉우리가 세발번디 인데 걷는데 정신이 팔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길게 치고 올라 작은 봉우리를 지나 평탄하게 걷다 오른 곳이 각지미 인가 보다. 언제부턴가 풍경이 좋아진다. 조망이 시원한 전망대 위에 선다. 산수담님이 멀리 보이는 섬 끝이 해금강이라 일러 준다. 연무는 조금 남아있지만 풍광이 워낙 훌륭한 곳이다 보니 조그만 장애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려섰다 올라서고 또 내려서고, 아이넷님이 말한다. A코스 갔으면 고생도 많이 하고 시간에 쫓길 번 했다고. 섬 산행의 진수는 드넓은 바다와 그 바다를 끼고 도는 마을 풍경과.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 조망이라 했는데 이 모든 걸 한꺼번에 경험한다. 한 마디로 복 받은 날이다.
아이넷님의 설렁한 아재 개그를 들으며 힘을 낸다. 웃음은 어디서든 힘을 주는 마력이 있다. 11:49 내봉산에 올라선다. 작은 암봉이다. 누군가 플라스틱 병 안에‘내봉산’이라 쓴 종이를 넣어 바위 틈에 올려 놓았다. 일종의 정상석 역할을 한다. 옹기종기 섬들이 모여 있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외로운 바다에서 저희들끼리 의지해서 살고 있으리라 여겨지니 더욱 정감이 간다. 멀리 망산으로 향하는 능선이 이어진다. 부드럽게 길게 이어지는 산등성이는 저절로 발 길을 그곳으로 인도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허둥지둥 돌 비탈을 내려선다..
데크 전망대에 선다. 고도가 조금 더 내려왔고 바다와의 거리는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다. 데크 사진에 표기된 섬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내봉산에서 인상 깊게 본 섬이 대병대도였다. 그 우측으로 길게 난 큰 섬이 매물도다. 비경으로 이름난 섬들을 직접 볼 수 있어 좋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섬들을 조망할 수 있어 부근 산 이름이 ‘망산’인가보다. 감동 또 감격이 밀려온다.
< 대병대도 / 산 넘어 매물도 풍경 >
그림 같은 풍경을 멀리하고 망산으로 향한다. 내봉산에서 망산은 만만치 않은 거리지만 풍광이 워낙 훌륭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걷는다. 곳곳이 암릉 전망대고 계단에 올라 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더 없이 고요하다. 게다가 섬 봄 산의 잊지 못할 풍경 하나인 짙게 물들어 가는 숲 조망은 가히 탄성을 자아낼 만큼 멋졌다. 여러 차례 섬 산을 다녀봤지만 오늘은 특별하다. 우선 능선이 무척 길다. 독립 산도 세 개나 지난다. 조망 명소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게다가 마음 맞는 분들과 함께 한다. 소위 말하는 ‘흥행요소’모두 갖추었다. 함께 두런두런 담소하며 차분히 풍경을 감상하며 걸으며 내 눈 앞에 펼쳐진 많은 걸 즐긴다.
< 망산 가는 길에서 본 해변과 숲 풍경 >
12:47, 마침내 망산에 도착했다. 조금은 섭섭했다. 이 꿈 같은 풍경이 끝나 간다는 사실이 기쁨보다는 아쉬운 감정을 먼저 불러왔다. 인파에 섞여 망산의 천하제일 풍경을 안아 본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대포와 홍포 선착장이 빤히 내려다 보인다. 문뜩 이 아름다운 풍광을 곁에 두고 사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해안가 마을 각양각색의 지붕이 풍경에 화려함을 더 한다.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의 눈으로, 잠시 바라본 풍경으로 거제도의 전부를 품을 수 없지만, 아프고 힘겨웠던 이들의 역사를 어루만져줄 순 없지만, 내겐 한없이 아름다운 곳에서의 짧은 만남이‘첫 눈에 반한 여인’과의 오래 간직할 추억으로 남는다.
< 망산에서 / 명사포구 풍경 >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명사로 향한다. 거리가 1.8km로 짧지 않다. 최상급으로 화려한 쇼를 보고 난 뒤 바라보는 풍경은 별 감흥이 없다. 오히려 오랜 만에 밟아 보는 흙과 농밀한 숲이 반가울 뿐이다. 한참 동안 평탄한 길을 걷다 다시 돌 길에 접어든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바다를 본 자는 물에 대하여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늘 최고 수준의 섬 산 산행을 했다. 마음에 오래도록 담아 있을 게다. 잠깐의 화려함에 취해 치기 어른 판단을 하지 말고, 많은 것들을 품을 수 있는 너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
명사 포구와 해변이 내려다 보인다. 바다 풍경의 일부분이 된 양식장 시설물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선계(仙界)에서 놀다가 속계(俗界) 들어서는 느낌이다. 속세에도 즐거움은 있는 법, 회 한 접시에 소주 한 잔이 눈에 선하다.
< 에필로그 >
명사 포구에 선다. 바람에 섞여 코끝에 전해 드는 바다 내음이 진하다. 꽃 향기도 섞여있다. 그 향기는 늦동백 인지 길가에 흐드러진 제비꽃의 것인진 알 길이 없다. 알 수 없는 방향(芳香)에 정신은 흐드러지고, 농염하고도 화사한 섬의 볕은 머리부터 온 몸을 감싸 돈다. 바다가 내음이 더 짙어진다. 포구 주차장에서 걸음을 멈춘다. 해변가 바다에는 미역이 지천이고 물빛은 섬 숲을 닮아 있다. 섬을 대표하는 색은‘연초록’이다. 바야흐로 봄이 한창이다. 어리둥절한 이방인의 눈은 포구를 돌아 먼 수평선 아래로 빨려 든다. 바다가 주는 낭만적 분위기에 이내 취한다.
버스가 섬을 빠져나간다. 농어회와 곁들여 마신 소주 기운이 온 몸에 번진다. 차장으로 거제의 산하를 살핀다. 다르리란 생각은 편견이었다. 섬, 포로수용소, 침체된 조선경기…. 길에서 본 거제, 산과 마을과 논과 밭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우리네 여느 고장과 다를 바 없다. 자연과 어울려 부딪기며 사는 모습은 매한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다인데, 이 바다가 거제를‘평온함’곳으로 특징 지운다. 잘 차려진 잔칫상을 받아 맛나게 먹고 기분 좋게 취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한다.
인간의 욕망은 가난해지지 않는다. 살기 팍팍한 세상에 도리어 미니스커트와 립스틱이 잘 팔리는 건 같은 이치다. 작은 사치를 누가 욕하랴? 일상을 벗어나 산에서 끊임없이 작은 일탈을 꿈꾸며 살리라.
< 거제지맥 남쪽 구간 산행 궤적 >
첫댓글 좋은 추억 감사합니다.. ㅎ
기대보다 무척 좋았던 산행이었습니다.
다음에 다른 코스 또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