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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수행의 요법 6월 4일 ~ 6월 13일
◇ 정전의 구성
①총서편 (개교의 동기, 교법의 총설) : 서론, 총론, 원론 - 교리 전체와 원불교의 방향 제시
②교의편 (일원상진리, 신앙문 교리, 수행문 교리, 인생의 요도 공부의 요도, 사대강령) : 각론 - 교리 각각 설명
③수행편 : 실천방법론
여기서 말하는 수행은 신앙과 상대되는 개념의 수행이 아니다.
수행편에 신앙방법도 포함되어 있다. - 불공하는 법, 심고와 기도 등
교의편에서는 교리 각론을 말씀해주셨고, 이것을 종합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가깝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수행편에서 제시하신 것이다.
◇ 일상수행의 요법(日常修行-要法)
1. 대의
① 수행편의 총론, 서론
: 총서편의 시작은 개교의 동기, 교의편의 시작은 일원상이다.
수행편의 시작은 일상수행의 요법이다. 실천방법론의 총론을 밝히신 것이다.
그래서 일상수행의 요법을 구성심 조항, 교강 9조 라고도 불렀었다.
② 교리편 교리의 실천방법론을 간략하게 기술
2. 내용
⑴ 1,2,3조
심지는 요란함/어리석음/그름이 없다.
경계를 따라서 요란함/어리석음/그름이 있어진다.
없게 해서 자성의 정/혜/계 를 세우자
- 심지(心地 마음땅) = 심전(心田 마음밭)
심지를 최초로 쓰신 분은 육조대사이다.
심지무란 자성정 心地無亂 自性定
심지무취 자성혜 心地無痴 自性惠
심지무비 자성계 心地無非 自性戒
대종사님은 정전에서 심전이라고 쓰셨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眞如: 불교에서 의미하는 중생심의 근원이 되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우리들의 현실적인 마음이 일어난 그 근원을 심지라고 표현했다.
땅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생성의 근원이다. 보도블럭 사이사이에도 풀이 난다. 흙이 있다고 하면 생물이 자란다. 흙은 모든 생물을 자라게 하는 바탕이 된다. 남자정화단원 한명이 몽골에 갔다. 몽골인구가 4백만이고 땅은 우리나라에 27배라고 한다. 황사가 일어나는 모래언덕에 가서 사진을 찍어서 밴드에 올렸다. 엄청난 모래언덕인데,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다. 그걸 보고 수고한다는 댓글을 달아야 하는데, 나밖에 댓글을 안 달더라. ‘모래언덕을 보니 풀 한포기 없다. 그래서 흙의 은혜를 느끼게 한다.’ 고 댓글을 달았다.
심지는 온갖 마음이 다 나오는 바탕이다. 온갖 마음을 금강경에서는 삼천 대천세계, 항하수 모래수 에 비유한다. 원래 바탕은 요란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고, 그르지 않다. 심지는 현실적인 마음이 나오는 바탕을 말한다.
- 심지자리에는 경계가 들어서 요란해지고 어리석어지고 글러진다.
경계는 내경, 외경으로 나눌 수 있다.
내경은 근본적으로 볼 때는 무명 업장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는 관념과 상이다.
교역자광장을 들어가서 보면 엉터리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요란해지더라. 안 보면 되는데, 보니 요란해진다. 내가 원광학원 이사장을 하고 나왔다는 상 때문에 내 마음에 복잡해지고 요란해진다. 놔 버리면 요란해질 것이 없다.
외경은 육경, 색성향미촉법 이다. 육근(안이비설신의)이 육경을 당해서 육식이 일어난다. 육식이 일어나서 요란해지고 어리석어지고 글러진다.
본래 우리 마음, 심지는 요란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그름도 없다고 했는데, 일원상의 진리장에서는 ‘공적영지의 광명’, ‘진공묘유의 조화’라고 말씀하셨다.
- 경계를 따라 요란해지고 어리석어지고 글러졌다고 했는데, 없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경계 알아차리기
경계를 경계인줄 알아차리면 요란한 것이 그냥 없어진다. 경계인줄 모르고 계속 끌려가니까 요란해진다.
내가 밥 먹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람이 ‘오늘 한번 사준 것이 낫다’고 말한 것이 나에게 경계이다. 이것이 경계인 것을 알아차리니, ‘비교하면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공부다. 실제적인 공부를 이렇게 해야 한다.
둘째, 경계 분석하기
내가 분석하니, 비교하면 은혜로운 것도 안 은혜로운 것으로 변하는 것을 알았다.
정사(正邪)에 대한 명확한 판단 분석을 해야 한다. 바른 것과 삿된 것에 대한 분명한 분석을 해야 한다.
순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없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셋째, 경계 취사하기
취사하기는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버리려고 보면 아까운 생각이 들어 매달리고 잡혀가게 된다.
작업취사조목에서 낙을 버리고 고로 들어가는 원인을 공부했는데, 그 중 ‘철석같이 굳은 습관’을 취사하기가 녹록하고 쉽지 않다.
- 없게 하는 공부를 하게 되면 그 결과가 첫째, 자성의 정(定)이 생긴다. 이 定은 안정, 정정이 된다. 편안해진다. 요란함이 가시고 나면 아주 편안해진다.
이 정은 마음이 확정되는 것이다. 팔조에서의 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 확실하게 믿음을 정하는 것이다. 결정이 되고 나면 안정이 된다. 결정이 되기 전에는 자꾸 왔다갔다하므로 사람마음이 어수선해진다.
둘째, 자성의 혜(慧)가 생긴다. 혜는 지혜, 밝음이다. 어디서 꾸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는 밝음을 캐내고 찾아내는 것이다.
셋째, 자성의 계(戒). 계는 바름과 정의이다.
- 1,2,3조의 특징
⒜ 생활속에서 삼학 수행을 하는 것이다.
⒝ 피경이 아닌 대경 공부이다.
난 피경공부를 상당히 한다. 복잡한 건이 생기면 계속 고민하면 나만 손해보는 것이다. 안 보고 안 들으면 평안하다.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이 해결되고 끝났다. 어제 ‘전라북도에 있는 정부지원 제한 걸린 대학이 다시 심사하게 되어 전전긍긍한다.’는 뉴스가 나오더라. 그 뉴스는 내가 대경을 하더라도 마음이 요란해지지 않고 편안했다. 왜냐하면 원광대학교는 준비를 잘 해놔서 해당이 되지 않으니 평안하다. 만약 원광대학교가 지원제한 대학에 걸렸다면 내가 편안하겠는가. 안보고 안 듣는 게 낫다.
감당하지 못할 경계가 있으면 피하라. 오히려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일상수행요법 이 삼조는 피하지 말고 대경공부를 하면서 생활속에서 삼대력을 얻어나가라는 것이다.
⒞ 한마음속에서 삼학을 병진하는 것이다.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1조는 정신수양, 2조는 사리연구, 3조는 작업취사이다. 이 세 가지를 몰아서 말하면 이 한마음속에 온전하게 생각도 하고 취사하는 것이다. 밝히고 멈추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학이 병진되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일상수행 요법은 수행편의 서론에 해당되므로 간단한 실천조목으로 교리전체를 제시하신 것이다.
일상수행 요법만 정리를 잘 해놓으면 각 과목에 대해서는 재미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리가 터질 것이다.
교의편 교리 전체의 내용을 다 알아야 하지만, 특히 사대강령을 밖으로 실천하는 교단과 자신이 되어질 때 대종사님의 바른 법을 세상에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같이 매진하기를 바란다.
⑵ 4조: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팔조의 교리를 실천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신분의성과 불신탐욕나우는 인격형성의 구성요소이다.
인성에 있어서 긍정적 요소가 되는 신분의성을 적극적으로 확충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긍정적 요소를 키워 나가는 것이 신분의석을 확충시키는 길이다.
팔조에서 말하는 신은 일반적인 신심이 아니라, 삼학으로 공부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확실한 마음을 세우는 것이다. 분은 신을 세우고도 공부가 지리멸렬하게 잘 안될 수 있는데, 자기스스로에게 화내는 것이고, 의는 내 공부길이 맞는가에 대한 의심이고 그것을 맞추어 가는 것이다. 의두성리의 의와는 다른 것이다. 성은 공부길이 맞으면 정성을 들여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회전공부를 해야 한다. 신분의성, 신분의성을 계속 돌리면 우리 마음속에서 불신탐욕나우를 제거하는 길이 된다.
불신탐욕나우는 우리 인격을 파괴시키는 부정적 요소이다.
계속해서 신분의성을 챙겨서 회전공부를 해 나가는 것이 4조를 실천하는 길이다.
⑶ 5조: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5조가 대단히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은보은 실천방법이다.
교리편에서 보은의 강령을 천지은-응용무념의 도, 부모은-무자력자 보호, 동포은-상부상조, 법률은- 준법지계, 하나하나 말씀해주셨다. 수행편에서 한 문장으로 종합적으로 사은보은실천이 된다고 제시하신 조목이다.
대종사님은 어떤 성자이신가. 대종사님은 ‘은혜의 성자’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20여 년간의 구도과정을 거쳐서 대각을 얻으셨는데, 그 대각 속에는 우주 허공법계속에 가득 차있는 은혜를 발견하셔서 그 은혜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대단히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다. 우주만유가 다 은적(恩的) 네트워크로 형성됨을 발견하시고 그 진리와 이치를 제시해주신 것이 대종사님의 대각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사은보은 실천의 핵심적인 길이다.
식사할 때 합장하고 기도하는데 ‘천지,부모,동포,법률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공양받으면서 사은전에 감사하다는 말을 요약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원망은 배은이고 감사는 보은이다. 5조 실천은 배은하지 말고 보은하자는 것이다.
-원망을 왜 하게 되는가.
첫째, 피은보은배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은된 내력, 보은된 내력, 배은된 내력을 모르면 원망하게 된다.
둘째, 시비이해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비와 해가 되면 원망하게 된다. 비와 해가 바로 경계이다. 시와 이는 좋은 경계이다.
해로울 때, 다른 말로 하면, 시련이다. 인격은 시련속에서 단련된다. 시련이 없이 살 수 있는 삶이 있겠는가. 살다보면 시련이 있다. 그 때 챙기지 못하면 원망하게 된다.
셋째,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여수(與受)관계를 가지고 사는데, 아무리 잘 해주려고 하더라도 기대치만큼 만족을 하지 못할 때 원망하게 된다. 되도록 상대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서 조그마한 거라도 감사할 수 있도록 해야 이 조목을 실천할 수 있다.
‘감사’라고 하는 단어 자체가 굉장한 위력과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단어 중에서 가장 감성적인 단어이다.
최근 실험을 통해서 감사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예 1> tv pd가 실험한 내용: 찬밥을 두 그릇에 따로 담아두고 한쪽은 “감사해요”, 다른 한쪽은 “짜증나”라고 붙이고 그대로하루에 몇 번 말하게 하고 보름 후에 보니 ‘감사해요’ 쪽은 하얀 곰팡이가 이쁘게 피었고, ‘짜증나’쪽은 검은 곰팡이가 피고 밥 아래부분도 썩었다.
예 2>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책: 감사, 사랑을 써서 보여준 물을 얼리니 육각수모양의 아름다운 수정체가 생겼다. 반대로 물에 욕을 하고 얼리니 육각수가 깨졌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물을 얼리니 다시 육각수가 생겼다.
‘감사와 사랑’이란 단어를 물을 보여주기만 했는데, 나는 사랑보다는 감사가 더 파괴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기독교의 단어이고, 감사는 원불교 단어이다.) 사랑은 좋은 단어이지만 사랑해서 안 될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생활에서 나타나는 고뇌의 근원을 살펴보면 사랑 때문이다. 가요에도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도 사랑을 에로스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으로 구분한다. 사랑보다 훨씬 감성적이고 경쟁력이 있는 단어가 감사이다.
어느 책을 보니, 아이들이 태어나면 제일 처음 가르치는 단어가 ‘엄마, 아빠’이고 그 다음이 ‘고마워요.’이다. 문화적으로 발전된 민족이나 그렇지 않은 민족이나 같다.
- 감사하는 방법
⒜ 가장 사소한 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기
멀리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이 참 쉽다. 시비이해관계, 왕래자체가 뜸하기 때문에, 전화 한 통만 해도 반갑고 고맙다. 감사하기가 어려운 것은 가장 가까이에서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 받을 때 보다 베풀 때 감사하기
모든 사람들은 받을 때는 감사하지만, 베풀 때, 즉, 지출을 할 때 감사해야 한다.
서원관에 살다가 교정원 부장으로 송대에서 살게 되었다. 내가 살고 그 뒤에는 송대가 기도실로 사용했다. 서원관에 살 때 냉장고 하나 없이 살고 송대에도 아무 것도 없었다. 지방에 계신 교무님 한 분이 올라와서 보시고 냉장고 하나는 있어야겠다고 기어이 사다주고 가셨다. 냉장고 전원 켜놓고도 삼일이 지나도 냉장고에 넣을 것이 없어서 빈 냉장고만 돌고 있다. 어느 학생이 포도를 조금 사왔는데, 엄청 반가웠다. “네가 어떻게 알고 포도를 사왔냐. 냉장고가 그냥 돌아가고 있었는데, 알고 사왔는가 보다. 너하고 나하고 심심상연하나보다.” 라고 칭찬했더니 소문이 났는지, 학생들이 가끔가다 사온다. 올 때마다 “어떻게 사왔냐. 너하고 나하고 심심상연한다.” 계속 칭찬했다. 냉장고 하나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해진다.
자기 환경조건으로 어떻게 삶을 영위하느냐에 따라 감사와 원망이 달라진다.
받을 때 하는 감사는 당연한 것이고, 진정한 감사는 베풀 때 하는 감사이다.
한 단계 더 들어가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단어가 ‘절대감사’이다. 구경의 감사, 감사의 구경처이다.
대종사님께서 구인선진님들에게 창생의 도탄을 책임지고 기도하라고 하시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셨다. 구인선진님들이 일제히 “예” 하셨다. 그 경지가 절대감사의 경지이다. 조건 없는 감사, 무조건 감사.
절대감사가 될 때, 감사의 구경에 도달하는 것이다.
절대감사를 써서, 결혼식 주례할 때 사람들에게 준다. 부부간 살다보면 원망할 일이 생기게 된다.
무조건 감사를 할 때 진정한 감사가 되는 것이다.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은 법신불 일원상이다. 신앙의 방법은 불공이다. 불공에는 진리불공, 당처불공이 있다. 신앙의 생활은 감사생활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신앙을 정리할 수 있다.
내가 감사에 도취되어 있다. 명함을 찍을 때 명함 제일 위에 ‘감사 디자이너’라고 적었다.
감사는 과거에 주어지는 덕행이 아니다. 감사는 미래를 설계하는 덕행이다. 감사를 하면 자기 스스로 미래를 멋지게 설계할 수 있다. 그게 바로 ‘디자이너’이다. 다른 사람들도 감사를 통해서 행복한 삶을 할 수 있게 만들어 간다. 그래서 행복 디자이너이다. 행복 디자이너나 감사 디자이너나 같은 말이다.
금산 권도갑 교무는 ‘감사발전소’라고 한다. 그런데 발전소보다는 디자이너가 훨씬 낫지?^^
늘 감사를 하면 그 자체가 행복이고 보은이 되는 것이다. 미래를 멋지게 설계하는 것이다.
불교는 자비인데, 자비와 감사를 비교해보자.
자비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종적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과거는 선천시대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다.
감사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할 수 있다. 종횡무진이다. 자비보다는 감사가 훨씬 더 경쟁력이 있는 단어이다.
원불교는 감사의 종교이다. 원불교의 상징적 단어는 감사이다.
이 감사를 통해서 일류사회를 감사의 세계로, 보은의 세계로 만들어 가는 책임이 있다.
감사라는 단어를 소중하게, 원불교의 고유단어로 키워나가자!
⒞ 6조: 타력생활을 자력생활으로 돌리자.
사요로 들어간다. 대종사님께서는 일상수행요법에서, 중요한 사은은 5조 하나로 말씀해주셨는데 사요는 각각 한 조목씩 말씀하셨다. 얼마나 사요를 중시하셨는지 알 수 있다. 사요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사람 사는 세계 속에서 사요처럼 중요한 것이 없는 것이다.
- 자력생활이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기 불공이다.
사요전체를 인간불공이라고 했는데, 당처불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을 대상으로 제정한 교리이다.
다른 사람에게 불공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 자기 불공을 제일 먼저 해야 한다. 자기불공은 자기가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력이 없는 사람은 사요의 인간불공을 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 자력이 있어야 사요의 인간불공을 할 수 있다.
사요불공을 할 수 있는 가장 기초는 자기가 자기에게 올린 불공으로 얻은 자력이다.
이것이 핵심인데 부수적인 것을 함께 생각해보자.
확실히 자력을 선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데, 자력이 없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옆의 사람이 귀찮게 된다.
나도 내 스스로 다 하려고 노력하는데, 풀 뽑는 것은 잘 안 된다. 숙소 앞에 있는 풀을 총부에서 기계로 밀어주면 좋겠는데 안 해주고, 내가 해야 한다. 자력 없는 내가 거기에 사니까, 원로원 직원도 귀찮고, 총부의 재정산업부 직원도 귀찮을 것이다.
확실하게 자기 자력을 세우면 옆 사람에게 불공이 된다. 부수적인 효과이다.
이치적으로 보면, 진리는 자력의 극치이다. 진리는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움직인다. 일원상 진리가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진리자리에 합일했을 때 자력양성이 끝난 것이다.
진리가 자력의 극치라는 표현은 기독교에선 ‘독생자’, 불교에서는 ‘독존’(부처님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씀하셨다.) 대종사는 ‘독로’(만세멸도 상독로)라고 말씀하셨다.
자력양성을 어느 정도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원상의 진리 자리에 합일했을 때 비로소 자력양성이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인과의 인치를 볼 때도 자력이 필요하다. 인과의 이치로 보면, 자력은 복을 축적하는 것이다. 반대로 타력은 빚을 추적하는 것이다.
남 도움 많이 받고 사는 것이 별로 안 좋은 것이다. 자기 생활은 철저하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단계까지 해나가야 한다.
일원상 서원문에서 보면, ‘은생어해’는 자력이고, ‘해생어은’은 타력이다.
자력을 할 때 은생어해이다. 자력을 할 때 힘들고 남이 해주면 쉽고 고마운 것이다. 자력은 힘은 들지만 뒤에 가서는 은혜로운 것으로 된다. 은생어해는 자력이고 평등이다.
해생어은은 타력이다. 타력을 많이 입고 살면 빚을 많이 지게 되고 뒤에 가서는 해로움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진정한 인권평등은 자력양성을 통해서 자력이 충만되었을 때 온다.
일상수행의 요법이 간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진리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원리가 숨어 있다.
⑷ 7조: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한 마디로 지자(智者)에 대한 불공방법이다. 스승삼는 공부이다. 스승삼을 줄 알아야 한다.
지자에게 배우는 자체가 불공이 된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기에 없으면 혼자 뭔 재미로 강의하겠는가. 혼자 강의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생각을 교감하면서 강의해야 한다. 이렇게 배우는 것 자체가 불공인 것이다.
이 7조는 조직에서 지자에 대한 역할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지자본위를 통해서 지자에게 배우는 불공을 해서 조직에서 지자의 역할을 극대화 시키면 그 조직은 발전하고, 진급한다.
지자가 리더가 되면 그 조직은 발전한다. 반대로 우자가 리더가 되면 그 조직은 퇴보한다.
7조는 조직과 사회의 문명을 촉진시키는 촉진제가 된다.
내가 직책을 다 놓고 생각해보니, 직책을 가지고 활동할 때가 좋았었다. 그 때는 몰랐었는데, 내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할 수도 없고, 해도 안 된다. 책임 맡은 사람이 중요하다. 옆에서 도와주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그 때가 그립더라.
대종사님께서 지향하시는 이상사회는 지자본위, 지자가 이끄는 사회이다.
지자본위의 사회를 만들어서 그 사회와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이 법을 내주신 것이다.
살다보면, 속터지는 일들이 많다. 지자가 아닌 사람을 앉혀 놓고 지자인양 그 일을 하고 있다. 전문가가 등용되지 않고 반대로 하면 속 터진다.
지자와 우자를 잘 구분하고 지자를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지도자의 능력이다.
교보에 하루 2만명에서 3만명이 왔다갔다 하는데, 우리 전서를 교보에서 팔면 좋은 것이다.
책을 눕혀 놓아야 경쟁력이 생긴다고 교보문고 상무가 말해주었다. 예전 종로서적은 책을 세워 놓고 직원이 주게 되었다. 도둑맞을 작정을 하고 눕혀 놓아서 독자가 직접 책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경쟁력이 높아진다.
처음에 책이 나오면 먼저 신간서적에 눕혀 놓고, 잘 나가면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고, 좀 시들해지면 화제의 서적 코너에 놓고 그다음에 시원찮으면 세워 놓고 끝난다. 내가 전서를 눕혀 놓고, 원불교 코너를 만들어 놓았다. 상무말로는 아침마다 책 훔치다가 들킨 사람들의 블랙리스트를 받는데, 원불교 교무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서울교구는 교보에서 전서를 사게 했더니, 불교쪽에서 항상 원불교 전서가 판매 1위였다.
매일 교보홈페이지에 가서 원불교 전서 판매순위를 확인했다. 대각개교절 즈음에는 전체 판매의 10위안에 들기도 해서 전서 사진도 딱 나오기도 했다. 내가 아는 학생들에게 그 전서 밑에 ‘인생의 고민이 있습니까? 인생의 고민이 있으신 사람은 이 책을 보십시오.’ 라고 리플을 달게 했다. 리플이 자꾸 달리면 사람들이 호기심이 생겨서 보게 되고 그러면서 더 팔리게 된다. 지자가 해야 할 일이다. 이걸 못한다면 지자겠는가.
교당에서만 장사하고 팔아서 되겠는가.
대산종사님께서 “지혜는 눈이요, 수족이요, 힘이요, 빛이요, 영생의 등불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지혜가 대단한 위력을 가진 것이다. 일은 결국 사람이 한다. 인재가 경쟁력이다.
한사람 한사람이 지자가 되어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그 단체는 발전해 나갈 것이다.
* 대산 1집 정전대의 팔조 중에서
2. 지자본위
-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
1) 의의
과거 불합리한 차별제도를 버리고 지우차별만 세워 놓아야 각자가 배우기에 힘써서 사람마다 지자가 되는 동시에 온 인류의 지식은 자연 평등하게 될 것이다.
2) 필요
① 지자를 본위로 하여야 반상(班常), 적서(嫡庶), 노소, 남녀와 인류의 차별이 없어지고 자연 지식평등이 되어질 것이다.
② 지식은 눈이요, 수족이요, 힘이요, 영생의 등불이다.
③ 성인(聖人)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 오늘은 모르는 것을 배워서 알고 살았는가.
⑸ 8조: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우자에 대한 지자의 불공이다.
지자본위가 배우는 불공, 스승삼는 불공이라면, 이 팔조는 반대는 제자삼아 가르치는 불공이다.
가르치는 것도 큰 기술이다. 가르쳐 봐야 행할 수 있다.
나는 교리공부를 가르치기 위해서 했다. 대산종사님께서 계속 가르치라고 하셨다.
내가 첫 발령이 산업부 원예주무였다. 나를 산업부에 데려 놓으시고는 대산종사님께서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오셨다 가셨다. 학생들 일하면 보시고 가셨다. 그러면, 힘내서 일하곤 했다. 그 덕에 사는 거였다. 저녁에 지압하러 올라가면 아이들 가르치라고 하셨다. 그 때 감산 윤정훈 법사님(?)이라고 한문에 능하신, 유명한 분이 계셨다. 구조실 앞에 공회당 조그마한 방(교감실)이 계셨다. 나하고 굉장히 친했다. 그 어른이 학생들 화장실을 점검하셨다. 신문지나 글씨 쓴 종이로 화장지로 사용하는지를 확인하시고 많이 혼내셨다. 또 신발 뒤를 꺽어 신는 것과 총부 구내에서 뒷짐 지고 다는 것을 많이 혼내셨다. 이 어른께서 총부도량은 대종사님 성령이 항상 굽어본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 도량에서 뒷짐을 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한문 철자집을 가르치는데도 대산종사님께서는 나보고 가르치라고 하셨다. 감산님은 이론만 아시지, 너는 실전을 하고 하니까, 네가 가르쳐야 학생들이 더 잘 받아들일 것이라고 하시면서 기를 북돋아 주셨다.
가르치는 것도 가르쳐 봐야 기술이 생긴다. 가르치는 것이 진정으로 배우는 것이 된다. 나는 가르치면서 한 공부이다.
삶의 경험도 풍부하고, 지식도 풍부한 사람이 단상에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풍부한 경험과 지식이 발현되지 않고, 느낌과 필링이 와 닿지 않는 경우도 있다. 표현을 못하는 것이다.
어느 선진님이 다른 선진님이 설교하러 나가실 때 “이 양반아, 이파리 더듬지 말고 줄거리 잡으시오.” 라고 하셨다는 일화가 있다. 표현을 해 봐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고, 표현을 잘 해야 듣는 사람도 잘 알아들을 수 있다.
가르치는 것도 표현을 잘 해서 잘 가르쳐야 하니 기술이다.
성자들은 가르치는 데에 있어 대가이다. 대종사님을 예를 들어 보면, 26세 대각하시고 53세 열반하실 때까지 28년간 제도사업을 하셨는데, 이 기간 동안 가르치는 일생이었다. 대종경은 대종사님의 언행록인데, 대종사님의 심신작용처리건, 감각감상건이 그대로 표현된 것인데, 일생을 가르치셨다.
알았으면, 안 만큼 가르치는 것이 가르치는 불공의 핵심이다. 성자들처럼 완성이 된 후에 가르칠 수 있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면 가르치지 못한다.
가르치는 방법은 ①말, ②글, ③실천, ④심법이다.
⑹ 9조: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공도자에 대한 불공이다. 공도자를 부처님처럼 숭배하자.
실천의 필요조건으로, 자신의 공익심 정도를 반성하고 대조해 봐야 한다. 대조의 표준은 빙공영사, 반공반사, 지공무사이다.* 지공무사가 되면 사적인 일도 다 공이 된다.
지공무사한 사람이 되자고 하는 것이다.
교당, 교단에서 지공무사한 사람이 많이 나오면 그 교당이 발전하게 되고, 교단도 발전한다.
개교의 동기 끝에 “광대무량한 낙원 세계”가 나오는데, 우리가 바라는 가장 이상사회인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는 공익정신이 잘 발현되는 사회이다. 사대강령의 마지막도 무아봉공이다.
무아봉공에 대한 대산종사님 말씀이 있다.
봉공은 첫째, 보은의 길이고, 둘째, 보은의 핵이고,(제대로 봉공하면 보은의 핵심을 실천하는 것이다.) 셋째, 가는 정 오는 정이라 하셨다. (우리는 오는 정을 먼저 바라는데, 가는 정 먼저이다.)
이런 법문 들으면 머리가 시원해진다. 마지막으로 인정이 메마른 이 세상에 새 도덕을 전해준다.
봉공, 공익이 이렇게 중요하다. ‘봉공’이라고 하는 한 단어 속에 사은 전체 실천을 포함시켰다. 깨달으신 분의 능력이시다. 대산종사님의 능력이시다.
“봉공은 보은의 길, 보은의 핵, 가는 정 오는 정, 인정이 메마른 이 세상에 새 도덕을 전해준다!”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를 만드는 것의 기본은 공익심이고, 공익심은 봉공으로 실천해야 한다. 자기를 없애고 공을 내세우고 앞세우는 것이다.
사요를 전체적으로 보면, 자력양성은 인간평등, 지자본위는 지식평등, 타자녀 교육은 교육평등, 공도자 숭배는 생활평등인데, 일상수행의 요법 4조목(6조~9조)을 통해서 대종사님은 이런 사회를 염원하시고 실현시키려 하셨다.
* 대산법어 교리편 53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공사(公私)의 표준은 빙공영사(憑公營私)인가, 선공후사(先公後私)인가를 대조하여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생활이 되도록 하는 데 있느니라.」
대산1집 수신강요2 34.정사(正邪), 공사(公私)의 표준
정도(正道) = 도명덕화(道明德化) 구세제중(求世濟衆)
사도(邪道) = 혹세무민(惑世誣民) 기인취재(欺人聚財)
공정(公正) = 선공후사(先公後私) 지공무사(至公無私)
사사(私邪) = 사리사욕(私利私慾) 빙공영사(憑公榮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