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이 벗이 되어준 지리 종주, 그 놀라운 도전
1. 일자 : 2015. 5. 24 (일)
2. 장소 : 지리산(1915m)
3. 행로 및 시간
[성삼재(02:35) -> (무넹기) -> 노고단(03:30) -> 임걸령(04:20) -> 노루목(05:00, 1498m, 반야봉 1km) -> 삼도봉(05:22~27, 1550m) -> 화개재(05:44, 연하천 4.2km) -> 토끼봉(06:19, 1534m) -> (명선봉) -> 연하천 대피소(07:30) -> 형제봉(08:29, 1453m) -> 벽소령 대피소(09:01~24) -> 선비샘(10:16, 1532m) -> 칠선봉1(10:52) -> 칠선봉2(11:10~16) -> (영신봉) -> 세석(12:15) -> 촛대봉 갈림(12:33) -> 삼신봉(12:59~13:15) -> 전망대(13:31~48) -> 연하봉(13:55, 1730m, 장터목 0.8km) -> 장터목(14:10, 1653m) -> 제석봉(14:30, 1808m) -> 천왕봉(15:10) -> (천왕샘/개선문) -> 로터리 대피소(16:05, 1336m) -> 순두류(17:10)]
< 지리산 종주를 꿈꾸며 >
지난 5월 2일, 대간도 졸업했는데 당연히 하겠지 하며 호기 있게 나선 지리종주 길에서 체력 한계를 느끼며 거림으로 탈출하며‘빠른 시일 내에 다시 도전하리라!’라고 마음 속에 짐을 지워 놓았다. 약속의 짐이 생각보다 컸는지 아니면 지금을 놓치면 가을까지는 기회가 쉬이 오지 않으리란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는지, 예상보다 일찍 다시 지리종주 길에 나선다.
예전 기록을 뒤지다 2012년 한여름 1박 2일 일정으로 나선 종주 길의 준비사항 기록을 보다 피씩 웃음이 났다. ‘물 1.5리터, 코펠(중), 연료, 김밥 두 줄, 밥 2끼(얼림), 찌개거리(얼림), 참치 캔, 초콜릿, 휴지, 여분 옷(바람막이, 반바지, 윗옷 2, 속옷, 양말, 수건 2’한 여름에 이 무거운 걸 지고 올랐으니 17시간 25분이 소요되었지. ㅋㅋ 물론 여정에 반야봉도 들렸고 숙박을 하니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초보 티가 확 느껴진다.
배낭을 꾸린다. 얼린 물 한 병, 행동식 조금, 갈아 입은 속옷, 스틱 이게 전부다. 식사용 빵은 양재에서 사기로 한다. 3년 전에 비하면 몰라 보게 단촐하다. 어떤 일에 고수가 되어 간다는 건 심플해 지는 게 아닌가 한다.
물론 종주를 목표로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이라 몇 가지 대안을 마련해 둔다. 화엄사-반야봉-화개재-뱀사골-반선 코스도 만지작거려보고, 성삼재-장터목-백무동도 고려해 본다. 혹시나 해서 남원, 백무동, 진주 출발 버스 시간표도 메모하고 구간별 거리와 소요시간도 갈무리 해 둔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결국 산행은 쉬러 비우려 가는 것인데… 새로움에 도전은 늘 이런 저런 생각이 들게 한다.
< 희망사항 >
쉽지 않아도, 이런 저런 핑계거리가 많아도 해야 할 일은 결국 해야 한다. 기회란 아무 때나 오지 않는다. 더구나 하고픈 욕망은 시간이 지나며 옅어지게 마련이고, 뒷날 후회로 이어진다.
오늘은 기필코 간다. 지리를 종주한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홀가분해진다. 일요일 늦은 저녁 귀경 버스 안에서 느낄 성취감이 벌써부터 나를 행복의 나라로 이끈다. 이제 담담한 마음으로 성삼재의 새벽을 기다린다.
< 구간별 거리와 시간 >
< 성삼재 가는 길 >
이번 산행은 토요 무박이다. 코스도 화대종주가 주인이고 성삼재~중산리는 곁다리다. 모처럼 한가한 토요일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그 한가함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본가에 가는 길 회사에서 전화가 오고, 점심을 먹고 눈을 붙이려 해도 오히려 정신은 더 말똥말똥,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은 변화에도 적응이 쉽지 않다. 토요 산행에 너무 길들여진 게 아닌가 한다.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저녁 7시가 되어 가는데 차창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옅은 현기증이 인다. 빛 좋은 광장에 홀로 남은 느낌, 행사는 끝나고 모두 흩어지고 나도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갈 곳이 없고…. 난 어디로 가고 있나, 또 어디로 가야 하나. 이유 모를 외로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밤 늦은 양재역, 어둠이 짙게 깔린다. 낯선 이들과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다행히 버스가 28인승이고 새 것이다. 눈을 감는다. 도시의 밤, 불빛이 빠르게 스쳐간다.
< 성삼재에서 벽소령 >
선잠을 자다 눈을 뜨니 차가 화엄사로 향한다. 사위가 어둡다. 먼 길을 가는 이들 20여명이 내린 버스 안은 정적이 감돈다. 익명이 주는 장단점이 교차한다. 2시 35분 성삼재, 트랭글을 커는 것으로 지리와의 은밀한 접속을 시작한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먼 길 나서는 이의 마음에는 설렘과 걱정이 교차한다. 머리가 아닌 목에 랜턴을 걸었더니 훨씬 편하다. 어둠에야 곧 적응하겠지 하며 부족한 빛에는 관심을 거둔다. 갈림길, 지름길로 치고 오를까 하다가 우회로를 택한다. 머지 않은 곳에 전망대가 있다. 바라 보는 시야에 남원의 새벽빛이 목격된다. 일탈님 사진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진다. 아! 바로 여기였구나, 사진 속 명소를 눈으로 확인한다. 곧이어 무넹기에 도착한다. 화엄사를 출발한 이들이 곧 올라설 곳이다. 화대종주는 내겐 아직 ‘먼 그대’다. 준비가 충분히 되었을 때 도전하리라 마음먹는다.
다시 갈림, 이번에도 도로를 따라 걷는다. 쫌 길다. 낯선 동물이 지나간다. 두려움이 잠시 인다. 이내 마음의 평온이 깃든다. 신새벽,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간다. 별과 하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 푸른 하늘이 오늘 내 종주에 벗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성삼재-노고단, 노고단-임걸령, 임걸령-화개재 3코스 모두를 45분만에 가자 했는데, 첫 구간부터 시간 초과다. 그래도 행복했다. 남원의 야경도 구경하고, 빛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별 구경을 했으니 말이다.
해가 뜨려면 아직 한참이 더 있어야 할 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산 길에 인파가 북적인다. 특히 산악 마라톤 대회가 있는지 작은 배낭을 메고 질주하는 이들로 계속 길 섶으로 피했다 다시 가기를 반복한다. 처음엔 신기했지만 나중엔 짜증이 났다. 꼭 이 새벽에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며 속도를 즐겨야 하는가? 양보가 지나쳐 민폐 수준이 된다.
노고단 오름 길 여유를 임걸령 길에서 만회하려 속도를 내 보지만 쉽지 않다. 임걸령에 도착했다. 샘터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수통에 담는다. 물 맛이 시원하다. 4시가 조금 지난 시간, 하늘에 옅은 구름이 걸린다. 별 들 사이를 구름이 빠른 속도로 지난다. 별은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가 촘촘하다. 너무 많은 별들이 하늘에 떠 있으니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하늘가 낮게 내려 앉은 카시오페아 만이 또렷이 구분된다. 별, 하늘에는 달력의 역할을 하는 무수한 표지기들이 걸려있다.
작은 언덕을 치고 오른다. 노루목 부근에 도착하니 여명이 밝아온다. 반야봉 1km, 마음이 살짝 동한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갔다 올까? 말에도 빈 말이 있지만, 생각에도 빈 생각이 있다. 반야봉 행은 빈 생각이었다. 삼도봉에 도착하니 일출이 감지된다. 작은 바위 돌에 올라 동녘을 바라보니 붉게 물든 해가 솟구치고 있다. 기대하지 않은 감동이 인다. 반대편 숲에는 푸르름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지리의 아침을 오늘은 삼도봉에서 맞는다.
< 삼도봉에서의 일출 >
일출의 감동도 잠시 다시 인파 속으로 몸을 섞는다. 화개재로 향하는 일명 550 계단, 아침 빛에 물든 초록의 향연이 싱그럽다. 여러 번 걸어 본 길이지만 오늘은 새삼 정겹다. 푸른 하늘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화개재, 반석 9.2km 라는 표지판에 눈 길이 간다. 작은 평원에 누런 풀들이 일어나고 있다. 전망대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카메라에 담고 길을 이어간다. 빠르게 걸어도 시간을 좀처럼 따라 잡지 못하고 있다.
< 화개재의 아침과 하늘 >
여명이 아침 빛과 교차하는 시간, 하늘에 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벌써 여름이 느껴진다. 초록이 생동하는 나무의 잔 가지의 빗금 뒤에서 장엄한 하늘이 보인다. 일출의 붉은 잔재 위에 코발트 빛 하늘의 색감이 은근하다.
하늘 맞닿은 능선 길, 봄볕이 마실 나온 듯한 포근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일상사 눅눅한 가슴을 하늘 가득히 널고픈 아침이다. 화개재에서 시작된 토끼봉 오름은 꽤 길고 거칠다. 거친 쉼을 내쉬며 오른 봉우리는 잠시 낮아지더니 마의 명선봉 오름으로 다시 진을 빼 놓는다. 갈수록 걸음의 속도가 늦어진다. 설악 길을 걷다 보면 암봉이라 힘은 더 들지만 변화무쌍한 풍경에 넋을 잃고 힘겨움을 잊고 걷곤 하는데, 이놈의 지리 길은 그 풍경이 그 풍경, 도무지 변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쉬이 지쳐간다. 간간이 고개 들어 보는 하늘이 유일한 낙이다. ㅎㅎ
< 지리산 그 지리한 능선 길에서 올라다 본 하늘 >
길지 않은 계단에 올라선다. 네이버 등산 동호회 표찰을 단 중년 남성이 몹시 힘겨워 하길래 명선봉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 주고 힘내라 말한다. 막상 계단을 올라서 지도를 살피니 명선봉은 아직 멀었다. 괜한 희망을 주었다 보다. 그분이 뒤쫓아 올세라 얼른 발 걸음을 옮긴다.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 건 내 희망사항이었을 게다. ㅎㅎ
명선봉을 넘어 연하천 대피소로 향하는 데크 길에 당도했다. 내게 이 길은 희망의 등로다. 머지 않아 연하천이 기다리고 있으리란 희망이 솟는 길이다.
< 연하천 대피소에서 / 형제봉 풍경 >
당초 4시간을 희망 목표로 늦어도 4시 30분 안에는 도착하자던 연하천 길은 생각만큼 녹녹하디 않았다. 쉼 없이 걸었는데도 5시간이 걸렸다. 시간을 만회하고자 아침 식사는 벽소령에서 하기로 한다. 연하천에서 식사를 하고 퍼질러 앉으면 종주의 꿈은 멀어 질 수 있다. ㅋㅋ
평탄한 길이 잠시 이어지더니 음정 갈림을 지나며 오름이 시작된다. 삼각봉 대피소 건물도 작은 바위전망대도 나온다. 오전 8시도 안 되었는데 햇살은 눈이 부시다. 숲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형제봉으로 향하는 길, 허기가 느껴진다. 긴 오르막이 시작된다. 올라서니 트랭글이 부저를 울린다. 형제봉이겠거니 하고 길을 가다 보니 범상치 않은 바위가 보이고 그 밑으로는 형제봉 팻말이 있다. 어디가 진짜 형제봉인지 모르겠다. 뒤에 것 주변으로 풍광이 더 좋은 것으로 판단컨대 후자가 맞을 듯 하다.
멀리 벽소령 대피소 지붕이 보인다. 지척일 듯 한 거리는 그러나 상당했다. 변화 없는 길이 한동안 계속되더니 거짓말처럼 대피소 건물이 나타난다. 건물이 만들어주는 그늘에 자리를 잡는다. 허겁지겁 준비한 음식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니 여름에나 판단다. 날씨는 이미 여름인데 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 연하천 대피소와 주변 풍경 >
< 벽소령에서 천왕봉 >
식사를 마치고 난 시간은 9시 30분 어름, 예상보다 1시간이 늦어지고 있다. 대간 종주꾼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화대종주 16시간은 둘째치고 성중종주 12시간이라는 목표도 점점 멀어져 간다. ‘28산악클럽은 14시간 주는데 뭐’라며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벽소령에서 세석까지는 개인적으로 지리종주 길에서 가장 힘겨운 코스다. 약 1km 평지 길이 이어진 이후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의 3개의 거봉을 올랐다 내려서야 하기 때문이다. 5km 남짓의 오르내림은 산꾼의 체력과 인내심을 시험하려 든다. 월초 종주 길에서도 이 구간에서 페이스 조절을 실패했기에 거림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나마 오늘은 컨디션이 당시보다는 좋다. 길의 대강도 알고 있는 터라 그나마 다행이다. 덕평봉을 우회해 선비샘에 닿는다. 물 맛이 그만이다. 돌로 주변을 잘 다듬은 샘터는 그야말로 지리의 오아시스다. 덕평봉 정상에 오르지 못하게 한 까닭이 선비샘을 그냥 지나칠까 봐가 아닌가 혼자 상상해 본다.
첫 고비는 무사히 넘었으나 칠선봉이 기다리고 있다. 길이 거칠다. 작은 너덜이 반복되고 전반적으로 걷기 힘든 돌 길이 반복된다. 산행 내내 홀로 걸은 적이 드물 정도로 오늘 지리에는 많은 이들이 찾았다. 지리 종주의 꿈은 나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바위 봉우리에 올라선다. 진한 초록빛 기운이 진동한다. 연무가 옅게 느껴지는 하늘은 여전히 구름을 안고 있다. 뒤돌아 보는 하늘이 참 곱다.
11시가 조금 안 된 시각, 칠선봉에 올라선다. 멀리 지리 정상부가 눈에 들어온다. 한 낮에 들어서니 기온이 급상승한다. 볕이 뜨거워진다. 전망대에 서서 가야 할 봉우리들을 가늠해본다. 아직 멀었다. ㅋㅋ
< 칠선봉에서 본 풍경 >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20여분을 더 걷자,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며 이정표는 다시 칠선봉을 알린다. 형제봉에 이어 두 번째의 헷갈리는 표지판이다. 바위 밑에 자리를 잡고 간식을 먹는다. 주위가 시끄러워져 살피니 웬 남자가 위험한 바위를 기어올라 동료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 소리친다. 포즈는 멋졌지만 그를 찍는 카메라는 핸드폰이다. 그 모습이 정겨워 보여 담아본다. 변화 없는 길에 작은 즐거움이었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길은 변화가 없다. 무념무상의 기분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이 험한 고난의 길을 무엇 때문에 나섰는가? 잠시 걷는 행위에 대한 회의가 든다. 영신봉으로 향하는 긴 계단이 나타난다. 삶도 그럴 것이다. 이유를 알고 사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저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 세석평전 / 촛대봉 >
영신봉에 올라선다. 길이 평탄해 진다. 저 멀리 세석 대피소 지붕이 보인다. 주변은 온통 철쭉 밭이다. 아직은 절정기가 아니지만 샘솟아 오르는 분홍 기운에 취한다. 버짐처럼 숲에 피어나는 철쭉은 이 평원의 주인이 곧 되리라. 계절의 앞서감을 예감해 보다. 이내 촛대바위를 향한다. 돌아서며 하늘을 배경으로 세석의 무르익는 봄을 한번 더 감상해 본다.
화려한 천상화원으로 변해가는 세석에 마지막 눈도장을 찍고 촛대봉으로 향한다. 마음 속 거리보다 실제는 더 멀었다. 시간상 촛대봉은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본다.
촛대봉에서 장터목 지나 천왕봉까지의 풍경은 지리 최고다. 핵심은 개방감과 다이나믹이다. 그간의 밋밋한 전경이 확 트인 공간으로 바뀐다. 무엇보다 가야 할 길의 전모가 드러나 좋다. 게다가 연하선경과 제석봉 고사목으로 대표되는 이름난 풍광지도 도처에 있다.
장터목까지의 거리는 3.6km다. 체력이 고갈되어 가는 상태에서 무거운 다리를 끌고 가려니 힘에 겹다. 긴 비탈을 내려선다. 성삼재에서부터 이어온 인파는 여전하다. 아니 천왕봉이 가까워 질수록 더 많아진다. 삼신봉 오름 길에 허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이 엄습해온다. 트랭글이 삼신봉을 알린다. 바위 난간에 기대어 남은 간식을 허겁지겁 먹는다. 굽어보는 풍경에 지나온 촛대봉과 가야 할 중산리가 들어온다.
삼신봉에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실려 꽃 향기가 묻어난다. 후각은 원초적인 감각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다. 이 냄새의 정체는 무엇일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힘이 되어 준다.
음식 섭취에 소모된 에너지 탓으로 몸이 무겁다. 연하선경을 그리며 짐짓 힘을 내 본다. 멀리 연화봉이 보이는 전망바위에 올라선다. 마음 속으로 그리던 풍경이 펼쳐진다. 덕유산 중봉에서도 그리던 연하봉으로 향하는 평원길이다.
< 연하봉 가는 길의 전망바위에서 >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좌우대칭의 개방감 좋은 ‘꽃 길’이다. 장돌뱅이가 봇짐지고 희망의 땅으로 걸음을 내딛는 어느 영화에서 본 듯한 길이다. 배낭을 바위에 내려 놓고 드러눕는다. ‘더는 못 가’하는 심정으로 팔자로 뻗는다. 주위 시선이나 소음에는 개의치 않는다. 햇살을 모자로 가리고 15분 정도 오수를 즐겼다.
인파로 북적이는 바위를 벗어나 연화봉으로 향한다. 잠시나마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시간을 포기하고 쉼을 택한 건 잘한 일이다. 이름처럼 순한 연화봉을 지난다. 이제 장터목은 지척이다.
< 연화봉과 제석봉 전경 >
시간은 2시가 지난다. 이 속도로 간다면 아무리 빨라도 5시가 넘어 중산리에 도착한다. 택시를 타더라도 ‘대원사 6시’가 빡빡하다. 장터목에서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제석봉으로 오른다. 초입 비탈이 길게만 느껴진다. 천왕봉에 올랐다 하산하는 산꾼에 목소리에는 힘든 과정을 겪은 이들에게서 만이 느껴지는 힘이 있다. 난 이제 오른다. 몸은 무거워도 다리에는 아직 힘이 남아있다. 대간 종주꾼의 저력을 보여 줘야 한다.
통천문을 지나 지리의 정수리로 향하는 길, 굽어보는 풍경이 근사하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밝다. 진득한 오르막이다. 무념무상으로 걷는다. 혼자 걷는 외로움은 땀방울 속에 녹아 버린다.
신경준 선생은 ‘산수고’라는 책에서 ‘하나의 근원에서 만 길로 나뉘어지는 게 산’이라 했다. 천왕봉에 서니 이 말의 뜻이 분명해진다. 만물이 이곳에서 분기한다. 흐름과 솟음의 형세와 나뉘어지고 합함의 묘함이 한 눈에 들어온다. 등산은 그 행위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등수를 매기지도 않는다. 박수 쳐줄 관중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올라간 사람의 마음 속에 충만한과 커다랗게 마음을 채우는 기쁨과 보람이 느껴질 뿐이다.
산행 난이도 총합은 비슷하다 했다. 처음이 어려우면 나중이 쉽고 나중이 어려운 길은 이미 초반을 쉽게 보냈다는 증거다. 문뜩 다음에는 중산리에서 올라 지리를 종주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산정에 서니 성취감에 새로운 희망이 돋는다.
< 천왕봉 전경 >
< 천왕봉에서 중산리 >
천왕봉에서의 풍경 속에 이 길을 함께 했던 이들과의 추억이 깊어진다. 발 아래에선 초록의 기운이 약동한다. 이제 내려 가야 한다. 등산 길이 험했는데 하산 길이 편할 리 없다.
3시 10분, 2시간 만에 5.4km를 내려갈 수 있을까? 중산리의 고도가 500미터 어름이니 줄잡아 1400미터를 내려서야 한다. 계단과 돌 길이 이어진다. 정비를 했다 해도 돌밭을 걷는 발바닥이 아리다. 천왕샘에 고인 물을 짜듯이 한 모금 마신다. 날이 많이 가물었나 보다. 한참을 걸었다 생각했는데 겨우 1km를 왔다. 개선문을 지난다. 친구들과의 추억이 아른거린다. 무엇이 좋다고 이곳에서 환한 웃음으로 사진을 찍었을까?
4시 10분 로터리 대피소에 도착했다. 들머리가 어디인지 모르는 산꾼들의 다양한 군상이 목격된다. 그 중에는 이곳에서 자고 내일 천왕봉 일출을 보려는 이들도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기를 되찾는다. 물과 함께 산 초코파이의 달콤함이 새삼스럽다. 근 제대 이후 초코파이를 맛나게 먹기는 처음이다.
이정표를 살핀다. 당연 칼바위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공단 지킴이가 순두류 길을 권한다. ‘대원사 6시’를 생각하며 방향을 왼편으로 튼다. 선택의 대가는 달콤했다. 완만하고 잘 다듬어진 비탈이 길게 이어진다. 만약 순두류에서 중산리로 향하는 버스가 끊긴다면 3.5km 이상을 더 걸어야 하지만 이미 던져진 주사위다.
시원한 계곡물 소리가 들린다. 잠시 냇가에 내려가 세면을 한다. 얼굴에 소금기가 지워지는 것 만으로도 날아갈 듯하다.
순두류 초입을 알리는 문에 선다. 기념 촬영을 한다. 시간은 5시가 막 넘어선다. 융단 같이 푹신한 흙 길을 걸어 순두류에 도착했다. 길고 긴 여정이 마무리 된다. 특별히 감동스러운 것도 없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산에서 행복하셨습니까?’ 늘 그렇듯 행복했습니다. ㅎㅎ
< 에필로그 >
걷고 택시를 타고 해서 대원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6시가 훨씬 넘었다. 버스에 올라서니 일행들이 박수를 보낸다. 멋쩍었다. 28명 중 서너 명은 화대종주를 했고 나머지는 중산리고 하산했다 한다. 내가 마지막에 왔으니 등산 실력이 꼬라비다. 그래도 좋다. 지리 무박 종주는 요소시간이 어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산꾼으로서 또 하나의 통과의례를 마쳤다.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지켜져 흐뭇하다.
지난 주 속초 친구가 내 설악산 산행기를 읽고, 평소 읽은 책의 서평을 기록해 보라 권한다. 서평을 쓴 만한 재주는 없다. 요즘 읽는 책이 신영복 선생의 담론이다. 인상 깊은 몇 구절을 요약해 본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이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다. 동시에 미래창조다. 공부는 머리 - 가슴 - 발 순으로 한다. 생각은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다.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애정과 공감이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요, 가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다.’
등산이란 결코 머리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슴으로 느끼고 발로 확인하는 여정이리라. ^^
< 지리산 종주 산행 궤적 >
(휴식시간이 비정상적으로 긴 건 쉬기도 많이 쉬고 잠도 잔 이유도 있지만, 핸드폰 배터리가 꺼져 있던 100분 간의 시간이 휴식으로 처리된 것 때문이다.)
< 지리 종주 고도 표 >
첫댓글 좋은 산행에 좋은 글. 지리산에서 명동님 뒤 따라 가는 느낌. 꼬라비..28에서 종주하던 꼬라비의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