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 개혁정치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묘역이다.
조광조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125(상현동 산55-1)에 있다.
이곳 묘역의 산맥은 한남정맥 응봉(236m)에서 뻗어 내려왔다.
응봉쪽 산줄기는 수원의 주산 광교산의 탯줄과도 같다고 했다.
응봉(鷹峰)은 산모양이 매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정상이 매의 머리처럼 우뚝 솟았고, 양변의 산자락은 매가 날개를 펼친 것과 같은 형상이다.
이런 산의 정기를 받는 묘에서는 성격이 곧은 후손이 배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명산 응봉 남쪽 기슭에는 명사들의 유택이 몰려있다.세종의 장인인 안효공 심온의 묘가 있고
태종의 아들인 혜령군 이지의 묘, 양진당 정유의 묘 그리고 정암 조광조의 묘 등이 이곳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정암(靜庵)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묘소이다. 그는 어려서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운 이래로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한사람이 되었다. 중종 5년(1515) 사마시에 합격한 후, 새롭게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시대적인 분위기를 타고 관직에 나섰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유교로 정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고,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였다. 신진사류들과 함께 잘못된 제도의 개혁 및 그에 따를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노력하였지만 기성세력이었던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죽음에 이르렀다.”-조광조 묘역 안내문에서-
그 묘역에는 정암 조광조를 비롯하여 선조들의 묘가 같이 있다.
묘역 전체의 모습이 마치 왼손가락의 엄지와 검지로 집게 모양을 한 모양이다.
풍수에서는 이런 자리를 지혈(指穴)이라고 한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자리다.
7세 조육의 묘는 엄지손가락과 검지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이곳을 일반인들은 합곡혈이라고 한다.
풍수에서는 구혈(毬穴)이라고 한다.
8세 조충손은 검지 첫마디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홍기혈(紅旗穴)이다.
9세 조원강은 검지 두 번째 마디에 있다.10세 영조의 묘는 세 번째 마디에 있다.
둘 다 곡지혈(曲池穴)이라고 부른다.
엄지 끝부분에 해당되는 곳은 대부혈(大富穴)이라고 한다.
8세 조충손의 계배인 의령 남씨 묘가 있다.
다만 10세인 조광조의 묘는 선조 묘들보다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후손의 묘가 선조의 묘보다 위에 있는 것을 역장(逆葬)이라고 한다.
순서를 거슬렀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역장을 하면 큰 화를 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 동기감응론은 땅 속에 묻혀 있는 유골 상태에 따라 길흉에 영향을 준다.
묘지의 순서와는 상관이 없다. 살펴보면 명문가일수록 역장을 한 집안이 많다.
율곡 이이의 묘는 어머니 신사임당보다 위에 있다.
예학을 완성시킨 사계 김장생의 묘는 6대조인 양천 허씨보다 위에 있다.
창녕 성씨 우계 성혼의 묘 아래 아버지 성수침의 묘가 있고
대구 서씨 약봉 서성의 부모 묘 아래 조부모 묘가 있다.
한산 이씨 토정 이지함 묘 위에 아들의 묘가 있고
장수황씨 황희 정승 위에 증손의 묘가 있다,
또 청주한씨 한명희의 묘 위에 부인의 묘가 있다.
조광조는 본관이 한양(漢陽)이고, 한양에서 태어났다.
개국 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자(字)에서 알 수 있듯이 정암은 부모를 공경함에 있어서 남달랐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조석으로 공양하며
항상 묘를 대하여 앉았고 한가할 때에는 묘 주위를 돌아보는 것을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3년간 여묘(廬墓)를 살고도 애절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묘 옆에다 두어 간 초가집을 짓고 영구히 사모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또한 그 옆 시냇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고 섬돌을 구축하였다.
연(蓮)과 잣나무를 심고 항상 그 곳에 와 소일하며
효도와 아름다운 경치를 함께 즐겼다.
그는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한 인물로 그의 사후(死後) 그의 이상은 이황, 이이 등과
같은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되었다.
그는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구 관료를 몰아 내고 신진 사류를 대거 등용하여, 도학을 실천할 기틀을
마련하고, 유교를 정치와 백성을 교화시키는 근본으로 삼아 왕도 정치를
구현코자 하였으나, 기득 계층의 반발로 무산되고 본인은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조광조가 출세한 것이 너무 일러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 아직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충현(忠賢)도 많았으나
이름나기를 좋아하는 자도 섞이어서 의논하는 것이
너무 날카롭고 일하는 것도 점진적이지 않았으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기본을 삼지 않고
겉치레만을 앞세웠으니, 간사한 무리가 이를 갈며
기회를 만들어 틈을 엿보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신무문(神武門)이 밤중에 열려 어진 사람들이
모두 한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사기(士氣)가 몹시 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지게 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한탄이 더욱 심해졌다.”
-(율곡전서 [동호문답]에서)
조광조의 묘는 부인과 함께 합장 되었으며 묘역의 제일 윗쪽에 안장되었다.
정암 조광조의 묘소는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이씨(李氏)와 합장한 것이다.
묘 앞에는 대리석으로 묘표와 평상석·향로석·좌우에는 망주석·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표에는 貞夫人 贈 貞敬夫人 李氏祔가 먼저 쓰여 있고, 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 兼 同知經筵
成均館事 贈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 經筵弘文館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 文正公
靜庵 趙先生之墓라는 긴 관직명이 적혀 있다.
정암 조광조는 귀양지 전남 화순 능주에 위리안치되자
담장을 치고 북쪽을 바라 보고 임금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조광조에게 원한을 품은 훈구파가 세 정승에 오르자 이들에 의하여
12월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의금부 도사가 왕의 교지를 받들고 유배지에 이르자,
정암은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조용히 죽음에 임하되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목욕과 의관을 정제하고 뜰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임금의 옥체 안녕을 묻고 절하였다.
그런 뒤에,“임금을 사랑함이 아버지 사랑하는 것과 같고,
나라를 근심함은 내 집을 근심함과 같았다.” 라 하였고,
이어 말하기를, “하늘에 있는 붉은 해가 나의 붉은 마음을 비추리라.” 하고
이윽고 사약을 마시고 이불을 쓰고 있었으나 죽지 않아 목졸라 죽였다고
<해동야언>에 전한다.
일설에는 사약을 마시지 않고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고 하며,
그 날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 동서로 두 겹 남북으로 한 겹이었고,
남북에 둘러진 무지개 밖에 각각 두 줄기의 무지개가 있어
큰 띠를 늘어뜨린 것 같이 하늘에 뻗쳐 있었다고 <기미록>에 전한다.
이듬해 용인 선영에 장사지내니 후손으로는 5살 난 정(定)과
2살 난 용(容)이 있었으나, 정은 일찍 죽고 용은 벼슬하여
문천군수(文川郡守)에 이르렀으나, 후손이 없어 종질인 순남(舜男)으로
뒤를 이었다. 선조 2년 태학생(太學生) 홍인헌(洪仁憲)이 상소하여
공자의 묘(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고, 또 이준경(李浚慶)이 계청하니,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세에 정암의 불행을 보고, “첫째는 급제하여 너무 빠르게 벼슬에
진급한 것이요. 둘째는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요.
셋째는 귀양간 땅에서 최후를 마친 점이다.”라고 하였듯이,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다가 반대파에 의하여
38세의 젊은 나이로 조광조는 그렇게 갔다.
무덤으로 오르는 오솔길 옆에 거대한 신도비가 우뚝 서 있었다.
총높이 약 311㎝, 비신의 높이 244㎝, 폭 93㎝, 두께 34㎝다.
이 신도비가 세워진 것은 선조 18년(1585년)으로 조광조 사후 66년이
흐른 뒤였다.
앞면에 '文貞公靜庵趙先生神道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어명을 받고 비문을 지은 사람은 노수신(盧守愼)이고,
비문을 쓴 사람은 이산해(李山海)였다.
노수신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영의정에 이르렀던 대학자였다.
어명으로 자신이 신도비명을 짓게 된 이유를 비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은 지금 임금(선조)의 원년이다.
정암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다음해에 시호를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으며,정도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킨다는 뜻으로
문정(文正)이라고 내리셨다.이윽고 어명으로 그의 행동을
기록하게 하시고,서원과 사우 세우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는 천심을 나타내고 사람의 도리를 붙잡아 혁혁하게
사람의 이목에 비춰진 것이었으니
이 때문에 한 나라의 선비된 자들이 안심하게 되었다.
그뒤 11년 만에 진신포의(縉紳布衣)들이 모두 그 묘도(墓道)에 비각이 없다
하여서 모두들 나에게 와서 비명을 부탁하였다….”
서문에 나오는 ‘진신포의’ 중에서 진신은 옛날 벼슬하는 자가
홀(笏)을 꽂고 신(紳)을 드리웠기 때문에 관복을 입는 말이며,
포의는 베로 지은 옷으로 미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벼슬한 사람,안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신도비를 세울 것을 원하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인 것이다.
신도비에 새겨진 비문은 석비의 앞뒤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조광조의 생애를 비롯하여 그의 업적과 행장을 남김없이
기록하고 있는 비명은 다음과 같은 찬사로 끝맺음하고 있다.
“정성스럽고 한결같이 큰 자리에서 옛것을 참고하여
새것을 도모하였도다.왕도를 행하시고 백성을 안정시키니
바람처럼 움직여서 교화가 퍼져 갔도다.진실로 총명하여
사리를 통달하면 물욕(物慾)의 가리움도 저절로 없어지니
나의 병이 아니로다.그러나 소인들은 속으로 원을 품어
무리들이 이를 가니 꺼진 재가 다시 타도다.
얼굴 표정 바라보고 눈치를 엿보아서 어찌하면
이간하고 어찌하면 허물할까 자나 깨나 모의하네.
하지만 선생은 순리대로 살아가고 죽음도 편케 여겨
나라 위한 그 단충은 밝고 맑은 한수(漢水)이고 배어나는 샘이로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도다.
역대의 임금들이 은혜를 베푸시어 사방의 모든 선비 보호하고 호위하니
아직까지도 전한 것이 있도다.
공(功)은 비록 두어 해를 깊이깊이 닦았으나 은택(恩澤)은 백성에게
흘러서 내려가도다.온전함을 더욱 밝게 볼 수 있어 잘 모르는
그들에겐 내 이렇게 고하노니,두려워하지 말며 의심도 하지 말고,
어진 이와 현명한 이를 반드시 믿어 주오.
아아! 슬프도다!
성공하며 패하는 건 하느님께 맡겨두리.”
조광조의 유배 기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유배생활 한 달 만에 그는 중종이 내리는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와 마주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사약을 받아야 할 운명이라는 걸
알게 된 조광조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새옷을 갈아입고,
제자 장잠으로 하여금 지필묵을 준비하라 일렀다.
곧 그의 손끝에서는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가
붓을 타고 흘러 나왔다. 그 묘역입구에
절명시비가 있다.그 유명한 절명시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愛君如愛父)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白日臨下土)
거짓 없는 이내 정성을 환하게 비추리라(昭昭照丹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