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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甲子士禍) / 나라사랑문인협회 정기용
연산군 재위 10년 1504년.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쳐지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린 고의적인 참극이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는 사림들이 화를 입었지만 갑자사화 때는 훈구세력과 연산군을 중심으로 한 궁중세력과의 대립이었다. 무오사화로 신진 사림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훈구세력들은 차츰 국왕과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세금을 무겁게 매기는 한편 공신들의 토지와 노예를 거두어 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자의 큰 원인 중 하나는 연산군의 과도한 사치에 있었으므로 훈구파가 연산군에게 먼저 왕실의 경비를 축소할 것을 요구하면서 대립이 격화되었다.
연산군은 방탕한 놀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나라의 창고는 벌써부터 텅텅 비어 있었고, 궁중과 조정 대신들 간에는 대립하고 있었다. 궁중세력을 펴고 있던 간신 임사홍은 무서운 음모를 꾸미며, 이 기회에 조정의 원로대신들을 몰아내자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치며 “그렇지!” 하며 폐비 윤씨가 어떻게 죽었는지 상감께 이 사실을 알리면 원로대신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정의 원로대신들은 거의 다 폐비 윤씨의 억울한 죽음과 관계가 있었다.
그럼 여기에 연산군과 임사홍의 얽힌 야사를 보면 연산군은 자주 임사홍네 집을 찾았다. 술에 취에 흥청망청하던 연산군은 돌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병풍에 씌어진 글을 가리키며 “저것이 누구의 글씨요.” 그 순간 여흥에 취해 있던 임사홍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뿔싸! 내 진작 저 병풍을 치웠어야 했는데…….’ 임사홍이 당황하며 미처 대답을 못하는 사이 연산군은 천천히 병풍에 쓰인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나라 안의 일어나는 화는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만 막으려 만리장성을 쌓네.(不知禍起蕭墻內處策防胡萬里城) 요순임금과 같이 나라를 다스리면 천하는 절로 태평해지는 것을 어찌하여 진시황제는 백성을 괴롭히는가!(祖舜宗堯自太平秦皇何事苦蒼生)”
병풍의 글은 다름이 아닌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가 지은 것이다. 임사홍에게는 아들이 네 명이 있었는데 이들 중 둘은 임사홍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왕실의 공주나 옹주와 혼인을 시켰다. 임희재를 제외한 아들 셋은 부전자전이라는 말처럼 아비를 닮아 갖은 악행을 서슴치않고 저지르는 패륜아들이다. 특히 넷째 아들 숭재는 어느 대감의 첩을 빼앗아 연산군에게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희재 만은 자신의 아비와 달리 소신있는 선비의 길을 가며 연산군의 횡포를 가차없이 비판해서 일찍이 귀양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희재는 특히 문장에 탁월하고, 글씨 또한 잘 썼는데 지금 연산군이 보고 있는 병풍의 글씨도 희재가 직접 쓴 것이다. 임사홍은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입지가 한 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어허! 어찌 대답이 없는 것이오. 대감이 쓴 것이오?” 연산군은 심기가 뒤틀린 듯 임사홍을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아... 아니옵니다. 실은 소신의 자식 희재가 쓴 것이오.” “대감의 아들이...“어허! 대감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소? 쯧쯧! 글 솜씨는 둘째치더라도 내용이 영 거슬리는구려. 이는 분명 과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오?” 연산군은 한손으로 술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자식을 그대로 두었단 말이오?”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렇잖아도 소신 역시 그 놈이 탐탐치 않아 조만간 불러다 경을 칠 작정이었습니다.” 임사홍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공의 생각이 그렇다면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지. 내 친히 그 놈의 목을 베어주리다. 어서 그놈을 당장 잡아오시오.” “예. 전하” 임사홍은 연산군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다는 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즉시 희재를 잡아 대령했다.
연산군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임희재를 단칼에 베어 죽였다. 그러나 눈앞에서 자식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도 출세욕에 눈이 먼 임사홍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 후 점점 세도가 높아진 임사홍은 그간 눈에 가시처럼 여겨 왔던 조정 중신들과 선왕의 후궁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할 계략을 세웠다. 그 날도 연산군은 어김없이 임사홍의 집에서 계집을 끼고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전하, 오늘은 유난히도 모후(母后)생각이 간절하옵니다. 아마도 전하께서 모후를 많이 닮아 그런 모양이옵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기생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하오. 과인이 어마마마를 그리 닮았소? 하지만 듣자하니 어마마마는 방자하고 교만한데다가 투기가 심했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그런 일까지 당한 것이 아니요?” 연산군은 씁쓸하게 말했다.
“아니옵니다.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정숙하고 온화한 분이었습니다. 일이 그리 된 것은 다 모함을 받아서 이옵니다.” 임사홍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말했다.
“모함이라니! 과인이 모르는 일이 있었단 말이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모후께서 사사를 받게 된 것을 어서 말해보시오.” 임사홍은 일부로 망설이는 척하자 연산군은 다급히 재촉했다. “실은 선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엄귀인과 정귀인 때문입니다.” “무어라! 엄귀인과 정귀인이 내 어머니를 모함했단 말이오?” “황공하옵니다만 그러하온 줄 아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폐비를 적극 주청한 자들이 아직도 조정에서 활개를 치고 있으니 이 어찌 횡망한 일이 아니옵니까?”
술잔을 쥐고 있던 연산군의 손아귀가 부르르 떨리며 “내 어찌 그 자들을 살려두겠소. 내 그것들부터 쳐 죽이리라. 대감은 모후의 폐비를 찬성한 놈들부터 이름을 한 놈도 빼지 말고 적어 올리시오.” 임사홍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며 자신이 미리 작성해 두었던 살생부를 바치면서 갑자사화는 시작이 된다. 간신 임사홍은 사화의 주범으로 우선 폐비 윤씨의 어머니인 신씨를 찾기 시작하였다.
신씨는 장흥에서 귀양살이를 마치고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20여 년 동안 혼자 살고 있었다. 혹시 자기에게 해를 끼칠 신하가 있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임사홍은 묻고 물어서 기어코 신씨를 찾아냈으며 한양으로 데리고 왔다. 그 날 연산군은 또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얼굴이 빨갛게 되어 있을 때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전하! 마마의 외조모님께서 오셨습니다.” 하고 임사홍이 말하자 연산군은 얼굴을 찡그리며 “나한테 외조모가 계시오?” “계시다마다요.” 연산군은 뜻밖의 신씨를 만나 그동안의 일을 낱낱이 들었다. 신씨는 딸이 사약을 받고 낡은 피 묻은 한삼자락까지 내보였다. 피 묻은 한삼자락을 내보이며 “중전마마께서 세상을 떠날 때 마마께옵서 등극(임금 자리에 오름)하시면 꼭 전해드리라는 유언을 하셨습니다.
외조모 신씨의 말을 들은 연산군은 눈이 뒤집히다시피 하였다.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가 궁궐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것이다. 부부인 신씨는 앞가슴을 치며 통곡하자 “25년 전 오늘 어머니께서 무슨 일로 쫓겨나셨는지요?” 부부인 신씨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호소한다. “지금은 어엿한 귀인으로 대궐에 계시지만 정소용, 엄숙의 두 후궁들의 모함으로 쫓겨나신 거랍니다.”
“그럼 정소용, 엄숙의 두 계집의 모함으로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세자도 상감을 제쳐 놓고 저의 아들인 안양군, 봉안군으로 세우려고 했고요.”
“그렇다면 역적 행위가 아닙니까?” “역적이고 말고요. 역적 가운데 상 역적이지요.” “알겠습니다. 하마터면 깜박 잊을 뻔 했습니다. 이 원수는 꼭 갚아 올리겠습니다. 숙의 정씨, 숙의 엄씨 이런 죽일 것들이 있나!
마침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연산군은 궁궐이 떠나가라고 고함을 치며 “숙의 엄씨와 숙의 정씨를 당장 내 앞에 들라 이르라.”라 했다. 이윽고 전갈은 받은 두 숙의가 연산군 앞에 나타났다. “너희들이 우리 어머니를 모함하여 궁궐에서 쫒아내고 사약을 받게 하였지? 오늘이 바로 25년 전 두 계집의 참소로 우리 어마마마께서 대궐에서 쫓겨나시던 바로 그 날이다.” 이 말이 끝나자 두 귀인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저 지독하고 악랄한 두 계집을 난장(亂杖)을 쳐서 넋을 날려라.”
무감들은 지엄한 왕명이었으나 움직일 줄 몰랐다. “왜들 꾸물거리고 있는 게야. 왕명을 거역할쏘냐? 어서 난장을 쳐라.” 무감들은 땅에 엎드려 식은 땀을 흘리며 “상감마마께서 통촉하옵소서.” “그러하옵니다. 여쭈어 보시면 다 아실 것 입니다. 명색이 서모인데 아래 것들 앞에서 난장이라니요.” 정귀인과 엄귀인이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이미 연산군은 이성을 잃고 코웃음을 치며 무감들에게 소리치며 꾸짖었다. “너희들도 목을 베어 거리에 효수를 해야 알겠느냐?” 왕비의 전갈을 받은 인수대비가 내관을 거느리고 부리나케 달려갔지만 이미 목불인견의 불상사는 벌어지고 있었다.
연산군은 무감들을 호령하며 두 귀인을 엎어 놓고 사정없이 난장을 쳤지만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저런 죽일 놈 같은니 어찌하여 사정을 두고 매질을 하느냐? 다시 사정을 두어 매질하는 놈은 그 놈의 목부터 베어라.” 두 귀인이 살려달라고 사정을 하고 있을 때 인수대비가 나타났다. “이 놈들... 어느 놈이냐? 선왕마마의 후궁에게 손을 대다니...” 인수대비는 무감들을 호령하여 꾸짖었다. “어마마마”
두 귀인은 인수대비를 보자 통곡하였으나 연산군은 노하여 호령하며 “누가 대왕대비전에 고하였느냐?”하자 인수대비는 노기를 띈 채 호령하며 “나는 눈도 귀도 없는 줄 아오? 불쌍한 두 귀인을 구하러 쫒아왔소.” “아니 할마마마 듣자하니 할머니께서 언문교지(諺文敎旨)로 제 어머니를 죽게 하였더니 그 유감이 지금껏 풀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제가 하고자하는 일에 간섭치 마십시오. 할머니도 다를께 뭐가 있습니까?
벌벌 떨고 있는 두 귀인을 인수대비가 가로 막자 연산군은 몽둥이를 치켜든 채 인수대비를 동댕이쳤다. 연산군이 무감들의 몽둥이를 빼앗아 들자 인수대비가 만류하려다가 이 꼴을 당한 것이다. 할머니 인수대비는 이렇게 넘어지고 두 귀인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두 귀인은 연산군에게 “우리가 잘못하였으니 지난 일은 물로 씻어버리고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그럼 앞으로 하라시는대로 무슨 일이든지 다하겠습니다. 안양군, 봉안군 두 아우를 생각해서라도 살려주십시오.” 하고 사정하였으나 연산군은 안양군, 봉안군 소리에 더욱 분노를 느껴 “나를 죽인 다음 안양군, 봉안군을 임금 자리에 내 세우려고 했다지.
호령과 동시에 몽둥이가 정귀인의 정수리 위로 떨어지니 ‘악’하며 정귀인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쓰러지며 또 한번 내려치는 몽둥이에 엄귀인이 쓰러져 연산군은 스스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두 귀인을 죽여 버렸다. 연산군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날로 안양군과 봉안군을 곤장 18대씩 때려 족쇄를 채운 채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연산군은 이 일이 있은 후 복수의 일념에 불을 태웠다. 연산은 정귀인과 엄귀인을 죽인 뒤 줄곧 조정에 명하여 폐비 윤씨의 휘호를 극진히 올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응교 이행 등이 이미 추숭하는 예가 극도에 이르렀으니 다시 더 올릴 수 없다고 하자 이들을 잡아 국문하고 원방으로 귀양 보냈다. 한편 대왕대비 전에서는 난리가 났다.
연산군의 광태를 보고 진노하면서 부왕의 고명(윤비 사사에 관하여 백년 안에 재론하지 말라는 것)을 저버리는 불효를 잊는 패륜아라는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가슴팍을 향해 술상을 던지는 패덕을 저지르고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패륜을 저지르자 얼마 안 되어 인수대비는 병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연산군은 한번도 할머니의 문후를 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날마다 장녹수와 미희들을 불러 유흥을 즐겼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4월 27일 대비전은 인수대비가 혼수상태에서 오락가락하며 정신을 잃었다 깼다하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나지막한 말을 이어갔다. “내 나이 예순일곱이오. 살기도 오래 살았지만 지하에 계시는 영혼들을 어떻게 뵈어야 할지... 이대로 가면 종묘사직이 위태하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소. 남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상감이 하루 속히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인수대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인수대비 한씨는 세조대왕의 맏아들 덕종의 비로 책봉된 후 월산대군, 성종임금 두 아들을 두었다가 그 두 아들이 세상을 먼저 뜨고 지금까지 홀로 살아오다가 손자인 연산군의 천륜을 거역하는 행패에 낙상을 한 후 그것이 원인이 되어 승하한 것이다. 인수대비가 승하하자 제일 먼저 슬퍼한 사람은 왕비였다. 좋은 일이던 굳은 일이던 할마마마에게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임종보다는 죽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왕비는 김상궁을 시켜 할마마마께서 승하하셨으니 입곡(入哭)하시라고 전갈을 넣었으나 연산은 입곡을 하지 않았다. 그때 임사홍이 조용히 나타나 “국사도 중요하오나 경춘전에 납시어 입곡하시옵소서.”라고 간하니 연산은 마음에 없었으나 억지로 체면과 체통을 생각하며 경춘전에 나아갔다.
연산군은 임사홍에게 빈청의 대소사를 모조리 도맡아 거행하라는 분부를 내리고, 복상기간은 줄여서 27일상으로 거행할 것이며 완원군을 데려다가 과인대신 조객을 응대하라 했다. “이 바쁜 세상에 무슨 삼년상이냐!” 하며 삼년상을 지낼 필요없다 했다. 인수대비의 시호는 소혜(昭惠), 휘호는 휘숙명의(徽肅明懿)로 올려졌다. 연산은 입직 승지에게 어머니 윤씨의 폐비 시말과 사약의 경위를 적은 시말단자(始末單子)를 적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왕명이 전해지자 춘추관에서는 폐비사약 시말단자를 뽑아 올렸다. 윤씨의 죄를 얽으려고 한 사람과 윤씨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벌을 받은 사람, 그리고 사사할 때 간쟁하지 못하고 어명을 받아 그대로 복종한 사람들의 명단을 모조리 뽑아 올렸다. 폐비 윤씨는 사후 22년 만에 아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로 복위되고, 묘호는 회릉으로 개칭되었으나 아들 연산군이 쫓겨난 중종반정 이후 윤씨는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고, 회릉은 회묘로 격하되어 능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
무오사화로 언론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황에서 연산군의 국정운영은 방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에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 간언을 하는 이도 없었다. 더군다나 대신들은 한결같이 연산의 비위에 맞는 인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행위를 일삼았다. 매일같이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뽑아 올린 수백 명의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큰 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 종친간의 상간(相姦)을 범했고, 여염집 아낙을 궐내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연산군의 사치와 행각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으나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회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염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國庫)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의 향락과 사치에 마음이 빼앗겨 급기야는 자신들의 경제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 이상은 묵과할 수없다고 느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한 것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졌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여기에 이런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인 임사홍은 일찍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의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임사홍은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세력과 잔여 사림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럼 임사홍은 어떤 사람인가!
조선 연산군 때에 세도가이며 그의 아들 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의 남편으로 풍천위(豊川尉)가 되고, 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에 장가들어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따라서 임사홍은 1498년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 이후 척신으로 권세를 독점하고 있던 유자광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었으며, 사재감 정(司宰監正), 도승지 등을 지냈다. 또 한문과 중국어에 능하여 관압사 선위사 등으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벼슬에 있는 동안 자주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며 유자광같이 극형을 당하게 되자 왕의 특사로 귀양 정도로 그친 일이 수차 있었다.
중신들의 제거를 꾀하기 위하여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손을 잡고 연산군의 생모 윤비가 죽은 내막을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으며, 1506년 중종반정때 처형되었다. 폐비 윤씨사건은 성종이 차후에 100년까지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긴 적이 있어 그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에 알릴 경우 윤씨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에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하게 되었다. 이런 살인극이 갑자사화를 만들었고, 갑자사화를 계기로 연산군의 황음(荒淫)은 극에 달했으며, 충언을 하는 대신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 대신들의 목에 신언패(愼言牌)를 차도록 하였다.
신언패에는 입(口)은 재화를 부르는 문, 혀(舌)는 목을 베는 칼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이어 신문고와 상소를 폐지하였으며, 원각사의 승려를 내쫒고 기생들을 머물게 했다. 또 각 고을에 운평(運平)을 두어 기생을 머물게 했는데 그 수가 1천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 용모와 재예에 뛰어난 기녀를 뽑아 대전 안으로 들이고 각자 이름을 붙여 주었다. 또한 임금의 실정을 간하는 사간원도 없애버렸다. 이렇듯 폭정이 계속되자 대신들은 굳이 입을 다물고 감히 연산군의 실정을 간(諫)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내시 김처선(金處善)이 죽음을 무릅쓰고 연산군에게 간하였다.
“이 늙은 놈은 네 분의 임금을 섬겼습니다. 이 몸이 비록 재주는 없아오나 경서와 사서를 대강 읽을 줄 아옵니다. 하지만 고금에 상감처럼 패륜을 저지른 이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부르르 몸을 떨며 “네 놈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보니 아직도 쓴맛을 덜 본 게로구나.” 연산군은 곁에 있던 시위의 활을 빼앗아 김처선을 향해 화살을 날리니 화살은 김처선의 갈빗대에 꽂혔다. 하지만 김처선은 꼿꼿이 허리를 편 채 간을 그치지 않았다. “조신(朝臣)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내시가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저 놈이 그래도 입이 살았구나.”
연산군은 다시 화살을 제어 김처선을 쏘니 김처선은 날아온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연산군은 분이 덜 풀린 얼굴로 김처선에게 달려와 칼로 그의 다리를 베어 버렸다. “네 놈이 그렇게 독야청청 한다면 일어서서 걸어봐라.”
김처선은 연산군을 바라보며 태연히 대답했다. “상감은 다리가 끊어져도 걸을 수 있습니까?” 연산군은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고 김처선의 목을 베어 버렸다.
성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들을 죽이고 그의 아들마저 곤장을 쳐 항쇄족쇄를 채워 변방으로 보내어 죽인 연산군은 말 그대로 짐승이오, 미쳐버린 광인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어머니를 고자질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시말단자를 살피다가 앞에 있는 신하를 향해 말하였다. “이세좌? 이세좌가 우리 어머니에게 사약을 가져갔어? 지금 이세좌는 어디 있느냐?” “지난번 무안과 온성을 거쳐 귀양살이를 하는 중입니다.” “그놈에게 의금부에 영을 내려 즉시 사약을 내리라고 일러라.” 이세좌는 단순히 선왕의 뜻에 따라 사약을 받들고 나갔던 죄로 대역죄의 이름으로 사약을 받게 되었다.
어명을 받고 금부도사가 이세좌에게 사약을 내리러 거제도로 향하자 궁중에서는 적지 않은 공론이 있었다. 내관들은 입을 모아 왕과 부부인 신씨를 비난했다. “이거 기절초풍할 노릇이구먼. 아무리 이 나라의 상감이지만 이번 일은 너무 하시었소. 모두가 부부인 신씨의 늙은이 할망구 때문이오. 그 늙은이가 언제 죽지요! 피에 굶주린 늙은이가 어서 없어져야 한숨 놓을 겁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이 소문은 부부인 신씨의 귀에 들어가니 신씨는 곧 상감에게 아뢰었다. “상감, 되지 못한 궁녀들이 입방아를 찧지 않습니까! 이 할망구가 피에 굶주렸다는 등 상감이 미쳤다는 등의 얘기를 하고 있소.
연산군은 외할머니를 다독거리며 다음날 조정의 요직을 갈아 치웠다. 앞으로 피의 홍수를 이를 참살극을 벌이자면 폐비 윤씨 사건 당시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인물들로 채워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다음날 좌의정에 유순, 우의정에 허침, 우찬성에 장귀손, 좌참찬에 시준, 예조판서에 김감, 병조판서에 윤구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 후 연산군은 의금부에 영을 내려 26간(二十六奸)이라고 지적한 폐비윤씨 사사 때에 관계된 신하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게 하였다.
연산군 즉위 10년 4월은 무시무시한 피바람이 휘몰아치는 그야말로 잔인한 날이었다. 연산군은 폐비사약 시말단자에 실린 스물여섯명의 연루자를 참수하거나 부관참시 하라고 영을 내린 뒤 다시 왕과 부부인 신씨를 비방한 궁녀들을 잡아들이게 하여 전향(田香) 수근비(水斤妃) 등을 포함한 궁녀 팔십 여명을 한꺼번에 하옥시키고, 윤필상을 비롯한 이십육 명의 집으로 군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잡아오게 명을 내렸다. 오라를 받고 끌려가는 원임대신들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 나라의 조정은 누가 돌보라고 이처럼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느냐하며 탄식을 하였다. 연산군은 이십육 명의 가족과 그의 처가에까지도 화풀이를 하였고, 전향과 수근비 두 궁녀들을 본보기로 처형하였다.
26간은 윤필상을 위시하여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이극균, 정인지, 김승경, 이세좌, 권주 등 26명이다. 이 가운데 한명회, 정인지,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김승경, 한치형 등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연산군은 의금부에 기별하여 윤필상을 잡아드렸다. 윤필상은 윤비를 폐하는데 제일 먼저 찬성했던 신하였다.
“너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할 때 세조대왕의 어명을 신속히 처리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파평군에 봉해졌다.” 윤필상은 성종때 영의정을 지냈고, 연산군 자신도 궤장(几杖)을 내려주었다. 궤장이란 늙어 벼슬에서 물러나는 공신에게 내리는 나무 궤와 지팡이로서 이것을 받은 대신은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런 네가 나의 어머니를 폐하라고 하였는가?”라고 묻자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윤호의 딸을 왕비로 앉히려는 욕심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 늙은이를 죽여 주옵소서.”
“시원하게 말을 하니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공도 많고 나이도 많으니 윤필상을 진도로 귀양 보내라.” 이때 유자광이 나타나 윤필상을 죽여 없애라고 연산군에게 적극 나서서 간하였다. “전하, 윤필상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만 여러 채가 되는데 모두가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은 것입니다.” 연산군은 유자광의 말을 듣고 결국 사약을 내리니 그의 나이 78세로 세상을 마쳤다. 윤필상의 집에서 적몰된 재물은 자그마치 집이 다섯 채, 피륙이 삼만 필, 그 밖에 수많은 금은보화가 있었다.
윤필상은 처음부터 재물을 모으기 위해 급급한 인물은 아니었다. 임금이 정사에는 뜻이 없고 호탕하자 차츰 그도 부패하기 시작했고, 왕이 주지육림 속에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대신들이 청렴결백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을 시작으로 폐비사약 시말단자에 뽑힌 스물여섯명의 연루자들이 차례로 가산(家産)이 적몰(籍沒)되었다. 이 같은 소용돌이가 있자 영의정 성준이 사임을 하였다. 아무리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있는 중신들이었지만 그래도 선비의 곧은 기상이 남아 있는 대신도 있었다. 연산군은 이 소식을 듣고 역정을 내며 당장에 영의정 성준을 묶어 어전으로 끌어 나오게 하였다.
연산군은 “국사다난한 이때 왜 사임하느냐?” 그 연유를 대라고 노기어린 말로 물으니 성준은 조용히 “전하, 죄없는 선비들을 왜 죽이시는 겁니까?”하며, “지난 무오년 사화만 하여도 몸서리가 쳐지거늘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으신지요? 대비마마께서 폐위되시어 사약을 받은 것은 선왕마마께서 행하시 온 겁니다. 어찌 죄없는 신하들만 허물하시옵니까? 신하들은 선왕마마의 뜻을 따를 뿐이었습니다. 전하, 허구한 날 약주와 탐색이요, 사람을 죽이는 일로 낙을 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어버이라고 하십니까? 실로 큰 문제이옵니다.
조금 전만하여도 일인지하이며 만인지상의 영의정 성준이 지금 의금부 옥청에 하옥되었다. 폐비사사 사건의 연루자를 모조리 잡아들이자 이를 심상치 않게 여겨 스스로 물러나겠다는데 그것도 도리어 화근이 되어 다음날 천리 밖 원지로 위리 안치되었다가 죽음을 맞았다.
좌의정을 지낸 이극균은 폐비 윤씨와는 관계없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이극균은 연산군이 방탕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른 말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그를 옭아 넣어 귀양을 보냈다가 사약을 받았다. “죄 없는 신하들을 마구 죽이면 나라가 망한다고 전하여라.” 이극균은 사약을 받아 마시며 외쳤다. 이 말은 들은 연산군은 펄펄뛰며 그 시체를 파내어 가루가 되도록 갈아버렸다. 이 밖에 권주, 김굉필, 이주 등 십여 명은 사형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찬, 남효온 등은 묘를 파헤쳐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현랑, 이수공, 곽종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까지 연좌시켜 적용시켰다.
연산군 10년(1504)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간에 걸쳐 벌어진 갑자사화는 그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정치투쟁이었지만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세력과 훈구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지만 연산군의 폭정은 왕권의 강화라기보다는 왕권을 볼모로 한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독재의 강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