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사 해우소 앞에 핀 코스모스 꽃들이 예뻐 사진을 찍었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다니셨다고 해서 언제든 꼭 한번 가봐야지 했었는데 오늘에서야 가봤다. 곤지암에서 부터 구불구불 한 길을 찾아 헤매며 아무나 보고 길을 물어보고 찾아갔다. 가는 도중에 누렇게 익은 벼들이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과 어울린 모습이 아름다워 길가에 차를 세우고 사진 찍었다.곤지암에서 한참을 찾아들어갔다. 이렇게 멀고 험한 산길을 어머니게서 어떻게 다니셨을까하고 놀라웠다. 절을 찾아 올라가니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들렸다. 잠겨진 비닐 끈을 풀고 안에 들어가 스님 염불에 맞춰 나도 염불을 했다. 아픈 식구를 생각하며 울다 염불을 하다가 , 예불이 끝나면 스님을 봡고 올려고 기다리다 스님을 뵈었다. 스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주지스님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다.
주지스님께 어머니께서 영원사에 다니시다 돌아가셨을 때 스님께서 아산병원에 오셔서 불공을 해주신 걸 뒤늣게나마 감사드렸다. 스님은 어머니를 기억하고 계셨다. 영원사에서 천호동 아산병원까지 오셔서 불공을 드려주신 것은 굉장한 조문이었던 셈이다.절이 곤지암 깊은 산속에 있지만 17년전엔 길이 훨씬 험했을 텐데 어떻게 걸어다니셨는지,,,
어머니께서 병중이셨던 할아버지를 병간호 하시다가 절에 오셔서 철야기도를 하시곤 했었다고 하셨다.스님을 뵈니 어머니를 만난듯 반가워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님은 비구스님이 계시던 호법면의 대덕사, 곤지암의 영원사, 용인에 있는 용담선원,이천 영월암 등 여러군데 절을 다니셨다. 스님께선 어머님이 전국 절을 다니셨다고 기억하셨다. 대덕사 스님께서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돌아가시자 그절에 같이 다니던 신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용인절도 어머니 돌아가신 후 같이 다니던 보살님들이 안산절로 가셨고 ,,,,
어머니는 이천에서 버스를 타고 곤지암까지 가신 후 거기서 걸어서 영원사에 가셨다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스님 뵌후 돌아오는데 속력을 내진 못했지만 큰길로 나오는데 거의 30분이나 걸렸다.대덕사에 가실 때는 버스가 없어서 택시타고 가시거나 그 먼길을 걸어가셨다고 한다 .주지스님께서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시는 걸 사양하고 그냥 돌아왔다. 7시가 넘으니 너무 어두워서 어디가 길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스님께서 매월 약사일에 오라고 하셨는데 너무 멀어 갈 수 있을지 ,,,
어머님의 구도의 길이 그렇게 멀고 험했다.구도의 끝에 어머님은 도인스님들의 경지에 이르셨다. 어저께 용화사에 갔었다. 법당엔 나혼자였다. 부처님 좌선 6년끝에 도를 이루셨고 성철스님 장좌불와 8년,한암스님께서 오대산에 들어가신 후 산에서 나오지않고 수도하셨고,,, 나는 이생엔 글렀고 다음 생도 기약이 없을 것인데 참 한심하다. 원제스님 말에 의하면 은사스님인 혜암 스님은 50여년간 평생을 좌선하고 누워서 주무신 적이 없다고 한다.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제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공안에 매달려 해보자 하고 혼자 법당에서 문닫을 시간이 다가올 때 까지 참선하다가 돌아왔다.어머니께서 <너는 참선을 해보거라> 하고 살아생전에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하다말다 세월이 다갔다.
석양에 비취는 논밭에 벼가 너무 아름다웠다.전생에 나는 그 길을 가 본적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곤지암에서 시골 산길로 들어서는데 너무 기분이 좋고 석양에 지는 해가 아름답고 호젖한 산길이 좋아서 전생에 가본 길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문학평론가가 되기 전에 작은 오빠가 대학생일 적일까 오빠하고 논에 가서 큰 병에 메뚜기를 잡아넣은 적이 있다. 메뚜기를 죽인 그 업보로 내가 아픈가,,,작은 오빠가 등록금을 못내서 휴학을 하고 집에 와 있었을 때 일인가보다. 오빠는 방에 누워서 하늘을 보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죽으면 잠만 자는건데 왜 자느냐고 하며 오빠는 잠도 잘 안자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방학 때 오빠가 잠시 집에오면 같은 방에서 지냈는데 오빠가 자는 걸 본 적이 없다 .그 시절에는 밤 12시면 전기가 나갔는데 오빠는 촛불을 키고 공부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오빠는 또 공부하고 있었다.평생 오빠가 자는 걸 본적이 없다. 너무 열심히 사신 탓인가 일찍 가셔서 너무 안타깝다.
오빠의 작품이 여러 권 있는데 아직도 읽어보지않았으니 참 못난 동생이다. 오빠네 아이들도 부모가 쓴 책을 읽지않고 모두 이과 쪽으로 갔다.옛날에는 문학을 하면 가난했으니까. 문학을 하신 오빠와 올케 모두 가난하게 살며 고생했다.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
절의 창건과 내력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왕7(638)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고려 문종22(1068)년에 혜소국사(慧炬國師)가 화재로 소실된 절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러 차례의 중수 기록이 있으나 가장 확실한 것은 순조25(1825)년에 영안부원군 金祖淳의 후원으로 仁巖 致鑑禪師가 중건한 것이다.
한편 절에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전하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전해지고 있다.
이 약사여래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해호선사가 창건 당시에 수마노석으로 만든 약사여래를 조성하여 봉안한 바 있었다.
그런데 후에 절이 모두 타고 약사여래만 남아있었다.
고려 문종22(1068)년 혜거국사가 불타버린 영원암을 중창할 때였다.
혜거스님의 꿈에 약사여래께서 나타나 "왜 나를 버려두고 갔느냐?"고 몹시 호통을 치셨는데 같은 날 신도들도 똑 같은 꿈을 꾸었다.
다음 날 윗 산인 안산으로 올라갔더니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석불 스스로 내려와 계시므로 서둘러 약사전을 짓고 봉안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자주 약사여래의 위신력을 보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