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사유 (崔士柔)
1372년(공민왕 21) ~ 1458년(세조 4),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휘지(徽之)로 낭장(郎將) 선보(善甫)의 증손으로, 조부는 서승(署承)을 지낸 충(忠)이고, 부친은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역임한 윤문(潤文)이묘, 모친은 어백유(魚伯游)의 따님이다
정종(定宗) 1년(139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진사(進士)에 모두 합격하고, 태종(太宗) 2년(140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409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1414년(태종 12) 장흥고 사(長興庫使)가 되었는데, 이 때 질이 나쁜 종이를 납궐(納闕)한 죄로 의금부(義禁府)에 하옥(下獄)되었다가, 1415년(태종 15) 의성 현령(義城縣令)과 이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제수되어 청백리로 일컬어졌다.
1432년(세종 14) 사간원 좌헌납(司諫院左獻納)에 제수되고, 이듬해 상정 색녹사(詳定色錄事) 한유린(韓有隣)과 책봉도감 녹사(冊封都監錄事) 허완(許完)에게 7등급을 초과하여 참직(參職)을 제수하자, 3등급을 초과할 수 없는 초천법(超遷法) 규정을 들어 이의 시정을 상소하였다. 1455년(세조 1) 지사(知事)에 임명되고 누천(累遷)하여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퇴거하여 경사(經史)를 읽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뒤에 수직(壽職: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은전으로 주는 벼슬)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458년(세조 4) 8월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12월에 고승령(古僧嶺) 북쪽에 묻히었다. 경기도 삭령(朔寧) 동촌(東村) 왕표고개(王表古介)에 있는 할아버지 최충(崔忠)의 묘소 하단이다. 아들은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정난좌익좌리공신(靖難佐翼佐理功臣)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沆)이다.
司藝府君行蹟
嗚呼。先君氣稟英明。賦質剛毅。自其髫稚。志于道義。博文約禮。據德依仁。謹言愼行。修己正心。奉先思孝。接下思恭。克儉于家。克勤于邦。夷淸惠和。德無不宏。由果求藝。才無不全。故能爲進士。仍爲生員。早登金榜。高步玉堂。爲御史於柏府。激濁揚淸。爲補闕於薇垣。面折廷爭。爲星卽於兩曺。剗治是能。爲茂宰於二縣。淸白是稱。以經明行修。爲司藝於成均。以年富德卲。爲知事於承文。以年之高。又加通政。以子之功。追贈正憲。其生也冔冔。其卒也顯顯。公嘗因疾。十餘載屛居于村舍。而以山水文籍自娛。又因老。十餘年退處于京第。而以棋局詩話相樂。未嘗戚戚於貧賤。又未嘗汲汲於富貴。此公修己立身以道之大略也。公生于壬子月日。終于乙亥八月十七日。享年八十四歲。是年十二月十九日。安厝于古僧嶺北。乃朔寧東村王表古介。祖諱忠墳墓穴下端也。嗚呼。先君鍾其秀氣。全其美德。官至二品之貴。壽享八帙之多。光增先代。慶流後裔。何其美矣。嗚呼痛哉。 < 太虛亭文集卷之二 / 補遺 >
아! 나의 선친은 기품이 영명하고 기질이 강직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도의(道義)에 뜻을 두어 글을 널리 배우고 예의로 요약하였으며, 덕(德)을 근거로 삼고 인(仁)에 의지하였으며, 말을 삼가고 행실을 신중히 하였으며, 몸을 닦고 마음을 바로 가지었으며, 선조를 받들 적에는 효도를 생각하고 아랫사람을 접할 적에는 겸손하려고 생각하였다.
집에서는 검소하고 나라에서는 부지런하였다. 백이(伯夷)처럼 청렴하고 유하혜(柳下惠)처럼 온화하여 덕이 크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중유(仲由)처럼 과단성이 있고 염구(冉求)처럼 재능이 있어서 재주가 온전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연이어 생원(生員)이 되었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서 도도히 걸었다.
사헌부(司憲府)의 어사가 되어 탁한 사람은 축출하고 청한 사람은 들추어냈으며, 사간원(司諫院)의 보궐(補闕)이 되어 임금의 면전에서 간쟁하였다.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이 되었을 적에는 폐단을 도려내 다스리는 것을 잘하였고 두 고을의 수령이 되었을 적에는 청백리로 일컬어졌다. 경전에 밝고 행실이 닦아졌기 때문에 성균관(成均館)의 사예(司藝)가 되었고, 나이가 젊고 덕이 높았기 때문에 승문원(承文院)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연세가 높은 관계로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아들의 공로로 정헌 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이 추증(追贈)되었다. 살아서는 조용하였고 죽어서는 드러났다.
공은 일찍이 병환으로 10여 년간 시골의 집으로 물러나 산수와 서적을 즐기며 살았고, 또 늙음으로 인해 10여 년간 서울의 집으로 물러나 바둑과 시로 서로 즐기며 살았으나 빈천을 슬프게 여기거나 또 부귀에 급급한 적도 없었다. 이상이 공이 도(道)로써 자신을 닦고 입신(立身)한 대략적인 것이다.
공은 임자년(壬子年, 1372년 공민왕 21년) 월일에 태어나 을해년(乙亥年, 1455년 세조 원년) 8월 17일에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나 이해 12월 19일에 고승령(古僧嶺) 북쪽에 묻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삭령(朔寧) 동촌(東村) 왕표고개(王表古介)에 있는 할아버지 최충(崔忠)의 묘소 하단이다. 아! 선친이 수려한 기를 받아 그 미덕을 온전히 갖춤으로써 벼슬은 2품의 귀에 이르고 수명은 팔순의 다년을 누렸다. 이에 선조를 더 빛내고 경사를 후손에게 물려주었으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매우 애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