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 수호조약(朝美 修好條約)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천진(天津)에 알려지자 영국 프랑스, 독일 외교관들이 조선으로 나와 같은 조약을 맺으려 하였다. 조 독(朝獨), 조영(朝英) 수호조약이 6월에 제물포에서 맺어졌으나 영국국회에서 비준이 거부되고 독일도 이에 동의하여 11월 28일 조약문을 다시 수정하여 한양에서 조인을 다시 하게 된다. 이어서 조이(朝伊), 조러(朝露) 조약이 1884년 6월과 7월 각각 조인되었다. 프랑스로서도 많은 성직자를 보내어 서둘러 6월 5일 천진주재 영사 딜롱(Dillon)을 인천 제물포로 보내어 같은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천주교 전파를 금지하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는 중국 청나라 사신 마 건충의 제언에 단번에 거절되었다. 조선국내에 5명의 성직자가 있고 앞으로도 많은 수의 성직자가 입국해야 할 프랑스 입장에서는 조선과 조약을 맺어야 할 입장이었다. 조선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후 9월 16일 대원군에 명령이 의하여 전국 곳곳에 세워 놓은 척화비를 고종왕의 명령으로 철거하여 프랑스 성직자들은 그냥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프랑스 성직자들은 조일수호조약 후 인천, 원산의 개항장에 일본기선이 자유롭게 진출입하는 것을 보고 1882년부터 일본배를 이용하여 몇 명씩 조선신학생을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영국령 패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보내고 있었다. 1884년 말까지 3년 동안 21명의 신학생을 그곳으로 보내 수학을 하게 하였으나 기후가 조선 신학생과 맞지 않아 7명의 병사자와 4명의 중퇴자가 나와 브랑 白 주교는 더 이상 신학생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1885년부터 경기도 여주군 부흥골에 신학교를 세워 그곳에서 신학생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방침에 따라 패낭신학생은 귀국하여 여주에서 용산으로 이주한 용산산학교에서 배출한 신부까지 1896년 후 10명이 약현성당에서 신품을 받게 된다. 강 성삼, 이 내수, 김 원영, 강 도영, 김 성학, 정 규하, 한 기근, 홍 병철, 김 문옥, 김 승연이었다. 이 중에 초기에 신품성사를 받은 신부는 강 성삼, 강 도영, 정규하 신부로서 세 신부는 풍수원 성당 정 규하, 안성 미리내, 강 도영, 마산 명례 본당은 강 성삼 신부의 사목지가 된다. 정 규하 신부와 강 도영 신부는 풍수원, 미리내 성지의 초석을 놓는데 많은 공로를 쌓았지만 명례로 가신 강 성삼 신부는 오래 근무하지 못하고 선종하신다..
명동 언덕을 사서 주교관만 짓고 성당 터를 정지작업 모습
성당을 건립 봉헌
봉헌 미사 후 뮈텔 주교, 성직자, 신학생, 평신도 조선교우 기념촬영
당시 미사 참례 후 파견하는 평신도
조선교구에서는 머지않아 종교의 자유가 얻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브랑 白 주교는 1883년 명례방 언덕의 땅을 김 가밀로의 명으로 사들여 성당을 신축할 땅을 준비하였다. 그해 연말까지 신자 수는 1만 2천 명이었다. 1885년까지 1883년 입국한 포아넬(Poisnel. 박 도행, 신부, 조스(Josse. 趙) 신부, 1885년 입국한 코스트(Coste. 고 선선 ) 신부 마라발(Maraval. 서 용필) 신부 보드네(Baudounet. 윤 사물) 신부였다. 이때 10명의 신부가 입국하여 왕성하게 사목에 열중하고 있었으나 아직 신분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브랑 白 주교는 5년 전에 입국하여 조선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뮈텔 민 신부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으로 전임시켜 그로 하여금 본국 정부와 손을 잡고 조불수호조약을 맺는 일을 추진시켰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1886년 5월 6일에 전권대신 코고르당을 한양으로 보내 조선의 전권대신 김 만식과 교섭하여 6월 4일 결국 조불수호조약을 조인하게 된다. 이 조약 9조 2항에 양 국민이 서로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뜻의 두 교회(敎誨)라는 글자를 넣었다. 이 글자로 조선에 있어서 선교의 자유를 억지로나마 얻게 된 것이다. 조불조약은 이듬해 5월 30일 콜랑 드 프랑시가 와서 김 윤식과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하였다. 그 이후 프랑스 성직자들도 지난 50년 동안 쓰고 다니던 방갓을 벗어버리고 검은 신부복을 입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목 및 전교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단 한양에서만 통용되었고 그 외 지방에서는 통용되지 못하였으나 조선교구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조불 수호조약으로 전교의 자유를 얻게 된 조선교구의 브랑 白 주교는 조선출생자의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여주 부흥골에 만들었던 신학교를 1887년 남대문 밖 용산으로 옮긴다. 또한 명동 언덕 땅을 매입한 것을 이어서 외국인 성직자가 순교한 한강 새남터의 서북방향 함벽정의 넓은 땅을 교우 최 시몬의 이름으로 사들여 이곳으로 신학교를 옮기게 하고 이곳을 예수성심신학원이라 이름 짓는다. 이 당시를 전후하여 이미 11명의 성직자가 입국하여 1만 4천 명의 신자를 사목하고 있었으며 신자수는 하루게 다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이에 브랑 白 주교는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행동의 자유가 허용된 한양지방으로 신학교를 옮겨 조선출신 신부를 양성시키고자 노력하여 성심학원의 원장은 1880년 11월에 입국한 류비어 류달영(柳達英) 신부로 정하였으며 교사는 1885년 5월에 입국하여 여주 부흥골에서 7명의 신학생을 가르친 마라발(Maraval, 서 약술) 신부였다. 신학생은 7명의 신학생과 패낭에서 귀국한 4명의 학생이 합류하고 다시 패낭에서 추가로 입국한 6명이 합류하여 총 17명이었지만 해마다 신학생 숫자는 늘어갔다. 브랑 白 주교는 함벽정 언덕에 터를 닦아 서양식 2층 붉은 벽돌로 건축할 계획을 세우고 이 일을 1885년에 입국한 코스트 高 宜善) 신부에게 맡겼다. 고 신부는 프랑스에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다시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품성사를 받은 어학과 건축학에 뛰어난 신부였다. 그는 리텔 李 明福 주교가 착수한 韓佛字典, 韓語文典 편찬을 완성한 후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간하는 일에도 크게 이바지한 신부였다.
신축 봉헌된 용산 신학교
또한 조불조약이 비준됨으로써 조선교구에도 전교의 자유가 생기자 브랑 白 주교는 1887년부터 코스트 高 신부에게 명동 언덕을 깎아 1890년까지 주교관과 성당 터를 조성하도록 한 후 벽돌을 생산하도록 하였는데 조선에는 붉은 벽돌을 만들던 곳이 전무하여 벽돌을 만드는 일이 급선무 였기에 코스트 高 신부는 교우 김 홍민 요안과 김 덕순에게 시켜 벽돌을 만들만한 진흙을 찾으라는 지시를 하였다. 그들은 병인박해 당시 순교하여 베르뇌 주교 등이 임시로 묻혔던 용산 왜고개 골짜기 진흙을 파서 실험을 해보니 안성맞춤이었다. 코스트 高 신부는 왜고개 골짜기 땅을 매입하여 공장을 마련하고 중국인 연와공 기술자를 고용하여 서양식 벽돌을 만들어 1890년 명동 언덕에 주교관과 이듬해 용산 함벽정 자리에 2층 신학교를 세우고 다시 서소문 밖 처형장소에서 가까운 수랫골의 땅을 사들여 1890년 그곳에 강당을 세우고 서족 언덕에는 벽돌집 약현 성당을 1892년 준공하게 된다.
서소문 밖 순교터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워진 약현(藥峴)성당
조선 천주교회는 신교의 자유를 얻은 후 한양 한복판 높은 곳을 비롯하여 순교지 가까운 곳마다 교회를 상징하는 건물을 세워 승리의 개가를 올리게 된다. 여러기지 종교사업을 벌이며 고군분투하던 브랑 白 주교는 1890년 2월 2일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대미사를 장엄하게 지내고 며칠 후 중병을 얻어 그달 21일 46세로 선종하게 된다. 이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이던 뮈텔 閔 신부가 그해 8월 조선교구 8대 주교로 임명되어 성성식이 그해 9월 21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그 자리에서 신학교 후임교장이 된 델페쉬(Delpech) 신부는 뮈텔 閔 주교에게 활짝 피어라 순교의 꽃(Florete flores Martyrum)이라는 표언(標言)을 수여함으로써 숱한 순교자들의 피로써 물들여진 조선에 있어서 천주의 꽃이 만개되기를 빌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