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槪觀)
20장 1절-18절.
1절: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주했다. 이 쪽 저 쪽 사이에 살면 어떻게 되느냐? 이 쪽 저 쪽의 물이 들기 쉽다.
2절: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뭔가 찜찜하다. 이 쪽 저 쪽 사이에 있으면 암만해도 이 쪽 저 쪽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고 안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결국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리고 가버렸다.
3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우리가 볼 때는 아브라함이 잘못한 것 같은데 아비멜렉이 죽는다고 한다. 무슨 이유일까?
4절: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아비멜렉이 하나님에 대해 조금은 아는 것 같다.
5절: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의 아내라고 했으면 문제가 안 생겼을 것인데 누이라고 해서 문제가 생겼다. 이걸 보면 아비멜렉보다는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있는 거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가나안이 아닌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행동으로 잘 했다. 잘못했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게 된 거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추해진다. 예수 믿는 사람의 생각이 점점 세상 쪽으로 내려가게 되면 세상에게 슬슬 뜻을 맞추게 된다.
부부간에 아내만 정조를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 남편도 정조를 지켜야 하는 건데, 결국 아브라함이 정조를 안 지킨 거다.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데 자신의 육신의 목숨이 두려워서 그 위치를 버렸으니 이게 남편으로서의 정조를 버린 거다. 성도의 신앙정신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면 이해타산이 자기 위주로 들어가게 되는 거다.
6절: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아비멜렉 왕은 그래도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마음이 정직하고 깨끗한 것 같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안 것일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이 온전한 마음이라고 했는데, 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마음인가, 아비멜렉 자기 기준에서 깨끗한 마음인가? 인간 자기 기준이다. 하나님의 기준이라면 남의 여자를 데리고 오지 않을 거다. 자기 기준으로 했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도덕성이 상당히 높다. 하나님은 안 믿는 사람들의 이런 면도 보고 계신다.
7절: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찌니라.’ ‘그가 기도하면 살고, 안 하면 너와 온 집 백성이 다 죽는다. 그는 선지자라.’ 아비멜렉은 안 믿는 사람이라서 이런 하나님인 줄을 모른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내를 보호하려고 아비멜렉으로 알 게 한 거다.
8절: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아비멜렉이 자기의 잘못을 즉시 바로 잡았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이다.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성도가 잘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결과적으로 성도를 보호하신다.
9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브라함이 이방 불신자로부터 설교 한 마디를 들은 거다. 불신자로부터 한 소리를 들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
10절-12절: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브라함의 처신이 뭔가 찜찜하다.
13절: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고 하게 되면 아내를 빼앗기고 아브라함 자기는 죽는다는 말이다. 이걸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우리가 생각할 때는 믿음이 없다. 여러분들 같으면 아브라함처럼 처신하겠느냐? 아브라함이 굉장히 겁이 많은가?
이게 변명의 말인데, 믿음의 사람의 생각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면, 세상 쪽으로 내려가면 사람이 추해지는구나. 자기의 생각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게 되면 자기의 이해타산이 세상성이 되는데, 이것이 신앙정조를 파는 거고, 하나님을 안 믿는 사상이 되는 거다. 안 그렇다가 반드시 그렇게 된다. 믿는 사람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는 사상이 되면 이런 일을 당하게 되는 거다.
14절-16절: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대로 거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아비멜렉 왕의 마음이 넓고 아브라함보다 믿음이 더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바로 하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돋보인다. 일처리를 잘 하는 것 같다.
17절-18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하나님 앞에 바로 하니 생산이 나오는 거다. 이 비사를 영적인 면으로 생각해 보면 지도자가 신앙사상에 범죄가 되면 생명적 후사가 없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이런 점을 생각해 봐라. 생명적 영적 후사가 없어진다.
그리고 안 믿는 일반인들이 영적 성도를 건드리면, 범죄를 하게 되면 그들의 태가 닫혀진다. 하나님의 저주로 후손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안 믿는 사람인데도 하나님 앞에 일처리를 참 잘 했다.
20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도는 골짜기에 거하지 않아야 함을 알 수 있다. 골짜기에 거하면 태도가 불분명해진다. 태도가 불분명하면 신앙정신 면에서 자꾸 문제가 생긴다. 이러면 자기 신앙생명의 태가 닫혀진다. 후사가 없어진다. 하나님의 생명이 임해야 후사가 임하는 거고 태가 열리는 건데 이게 없어진다.
어떤 사건이 있을 때 사건 자체만 보면 그것을 통해 자기를 볼 수 없다. 안 보인다. 남만 보인다. 그러나 영의 눈을 가지고 타의 입장을 내 입장으로 끌고 와서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사나?’ 하고 보면 자기의 신앙정신이 보인다. 행동이야 남이 한 거지만 그 행동을 하는 정신 사상 면을 보면 ‘내가 그와 같은 행동은 하지 않더라도 나의 정신은 그 사람과 같구나’ 하는 게 보인다. 이게 영의 눈이 밝은 성도다. 어떤 상황 사건에서도 자기를 빨리 보는 자가 복된 거다.
믿는 사람으로서 골짜기에 거하면 그 다음에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자기의 태도가 불분명해진다. 아브라함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더니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했다가 아내를 빼앗겼다. 태도가 분명하지 못하니 이런 피해가 온 거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아내와 그의 가족을 지켜주시기는 했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얼굴이 똥이 된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