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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람
(야고보서 3장 1~12절) 찬송 422장, 425장
믿음의 성도들은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요 관점은,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의 왕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삶은, 거울을 보듯 투명하고, 깨끗한 삶이 요구됩니다.
내가 보고있는 거울에, 때가 묻어있으면, 자신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아니하듯 성도의 영적인 거울이 더러우면, 성도는 신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가 없게 됩니다.
믿음이란, 성도 인생의 더러운 것들을 걸레질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나, 저지른 죄를 가볍게 보려고 하며, 또 작게 보려고 하며, 때로는 과소평가를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고, 또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기적인 마음이 자신의 중심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줄로,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남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사랑받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 누구도 축복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를 축복해 주기를 원하며, 자신은 전혀 남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자신은 남을 섬기려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공동체는 언제나 시끄럽고, 문제가 많은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며, 나 정도의 믿음이라면,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내가 영적인 교만병에 걸린 사람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내에서나 사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부족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성을 아는 사람이어야, 회개를 해도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미성숙한 사람은, 자신이 완전하다고 착각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겸손과 무릎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낮아지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요, 인정받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또한 죄가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름다운교회 성도들은,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오순절 후 열 일곱 번째 주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12절의 본문 말씀으로 “온전한 사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고 함께 은혜를 누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왕이 궁중의 광대 둘을 불러다가 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오라고 명령을 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오도록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아가 훌륭한 것과 악한 것을 찾아 헤매던 이 두 익살꾼이 마침내 그 답이 들어있는 상자를 하나씩을 들고,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광대가 먼저 왕에게 나아가 절을 한 후, 상자를 내놓았는데, 열어보니 큼직한 글자로 “혀”라고 쓴 쪽지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 혀라는 뜻입니다.
다른 광대도 상자를 내어놓았는데, 그 상자를 열어 보니 거기에도 똑같이 큼직한 글자로 “혀”라고 쓰인 쪽지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도, 역시 “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도 “혀”요, 가장 악한 것도 “혀”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복 중의 하나입니다.
말, 즉 언어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언어는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언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언어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며,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언어을 가진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언어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글을 사용하여 기록을 남깁니다.
그 글이 무엇입니까?
문자란 언어를 기호로 형상화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문자가 있어서 사람은 모든 지식과 사상을 기록했고, 그것을 연구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언어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말이 없었다면, 글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언어가 없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만 보더라도 우선 성경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도 없고, 기도도 없고, 찬송도 없을 것입니다.
아예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사람에게 언어가 없다면, 사람은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언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최대의 복 중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죄로 타락하면서 언어도 함께 타락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답고 귀한 것일수록 부패하면, 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더러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언어가 그렇습니다.
이 귀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복이, 죄로 타락하게 되면, 우리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악하게 사용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왜, 교회에서 성도가 상처를 받습니까?
왜, 성도간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말 때문입니다.
말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 거듭남의 역사는, 우리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듭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가 우리들의 언어생활입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언어생활에서 거듭남의 역사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의 성숙한 성도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먼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책임도 더 무거움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이 누구입니까?
말로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말로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책임이 더 크니까 그러므로 선생되기를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어떤 말을 하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한 말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책임도 더 큽니다.
그러므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 말에, 자신의 도장을 찍으세요.
자신의 말에 보장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온전하냐가 곧 얼마나 그 사람의 말이 온전하냐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이사야서 6장의 말씀을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는 환상이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뵈웠을 때, 이사야는 내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고 하면서 두려워 떱니다.
그 때, 천사가 화저로 단에서 숯불을 취하여 이사야에게 날아와 이사야의 입에 되며, 말하기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이사야도 자신의 죄인 됨을 입술이 부정하다고 하였으며, 천사도 깨끗케 됨의 표시로 숯을 입에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죄의 대표도 입술이요, 깨끗케 됨의 대표도 입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장 많이 짓는 죄가 입술로 짓는 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말입니다.
남자는 하루 평균 20,000 마디 여자는 평균 30,000 마디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말을 하다보니 하는 말에 실수가 있게 되고, 말로 죄를 짓게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이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고, 강도질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말로서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우리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말이 진실하고, 말에 실수가 없는, 진정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은 형체가 보이지 않는 적은 것이지만, 그 말의 위력은 무엇보다 크고 무섭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량 빚을 값는다는 말처럼 가치 또한 엄청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말은, 말의 재갈과 같고, 배의 키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말의 재갈을 아세요?
말의 재갈은 적은 것이지만, 그것을 잡고, 당기면, 말이 꼼짝도 못합니다.
그래서 기수가 말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배의 키도 마찬가지입니다.
키는 비록 적은 것이지만, 그 키를 통해서 큰배를 움직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 혹은, 한 사람의 생애가 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언어를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너무 자주 입에 올립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심성 자체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 중에 하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옛날 선조들이 읊조리던 시조에서부터 오늘날의 시와 노래에까지 태양을 노래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달을 많이 노래했습니다.
서양의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라는 노래 가사 정도는 아니더라도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취니"라고 하는 이 정도라도 해를 노랫말로 하거나 시조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달만 노래했습니다.
아이들의 동요 중에서도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이라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가만히 들어보면, 분명히 대낮의 하늘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붉게 타는 태양이 있을 진데, 저자는 왜 애써 태양을 외면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 달을 찾고 있는 것일까요?
그만큼 달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렇게 달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달은, 물론 낭만적이요, 은은한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달은, 태양만큼 밝지를 못합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은 긍정적이거나 적극적이질 못합니다.
달은 어둡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의 조상들로부터 이어진 민족성을 가지다 보니 하는 말도, 어찌 보면 부정적인 말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녀들에게 쉽게 하는 말을 생각해 보면, "너 안 일어날거냐, 아침은 안 먹을 거냐, 학교는 안 갈 거냐"라고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지만, 전부 부정적인 말투인 것입니다.
긍정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을 부정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죽겠다는 말은 얼마나 자주 합니까?
슬퍼 죽겠다는 것이야 그렇다고 해도, 기뻐서 죽겠고, 심지어 좋아서 죽겠다 고까지 합니다.
언론은 또 얼마나 더 부정적입니까?
저는 제 기억에 제가 신문을 읽고 난 후 신문이 지금이 난세가 아니라고, 위기가 아니라고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큰 일 났것 같은 기사만을 보아온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들과 오늘날 우리들까지도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우리들의 심성도, 언어도, 부정적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성도들만이라도 언어의 습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창조적인 말, 긍정적인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망한다, 망한다고 하다 보면, 정말 망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부터 언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말의 악한 영향력을 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건조한 곳이지만, 이른 비와 늦은 비라고 해서 가을과 봄에 각각 한 달 가량의 우기가 있습니다.
이 때는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온 들녘에 풀과 엉겅퀴, 그리고 가시나무 같은 것이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우기가 끝나면, 곧 땅이 메마르기 시작하는데, 원래가 건조한 곳이라, 땅이 바삭 말라 버립니다.
이 때, 성냥 한 개피 만이라도 가져다 불을 부치면, 온 들녘이 불바다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해마다 겪는 산불을 경험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건조기에는, 담배불 하나가 불씨가 되어 온 산을 다 태워 버립니다.
우리들의 말 한마디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부모가 무심코 던진 "너는 쓸모 없는 놈이다."라고 하는 한 마디가 그 말을 듣는 그 아이의 한 평생을 불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형제의 가슴에 한평생 못이 되어 괴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사람의 언어인데, 그런데 이 언어습관이나 생활이 내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오늘 본문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든 짐승이 다 길들여지는데, 인간의 혀는 잘 길들여지지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를 길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서커스에 이용되는 동물들을 보면, 호랑이, 사자, 코끼리, 곰, 모든 동물들이 다 길들려 져서 재주를 부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온갖 동물들이 다 길들여집니다.
그런데, 인간의 혀는 길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잘 나가다가 결정적 순간에, 잘못된 말들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다 나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던 그 입술로 운전대를 잡기만 하면, 상대 운전자를 향해 욕설을 퍼붓습니다.
이런 모순된 점이, 우리 인간들에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온천에서는 찬물이 안 나옵니다.
그리고 찬물이 나오는 샘에서는 뜨거운 물이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법칙입니다.
생수 나오는 곳에서 물통 갖다 놓고 십 년을 기다려도 더운 물은 절대로 올라오지 않습니다.
나무도 무화과나무는 평생 무화과 열매만 열립니다.
물론 포도나무는 포도만 열립니다.
절대로 다른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혀만은, 제멋대로입니다.
이 말을 했다가 저 말을 합니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이 못 되어서 그는 한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면서 저주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혀로 두 말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만 그렇게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한 번쯤은 다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온전한 언어생활을 훈련해야 합니다.
온전한 언어습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언어생활에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몇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주님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경건한 언어생활의 첫 번째 비결은, 항상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말은, 우리들이 어울리는 사람이나 공동체에 따라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계속 귀에 들어오는 말이 내 입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계속해서 듣고 접하는 말을 나도 하게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여행을 가는데, 버스 안의 스피커에서 내가 알고 있는 흘러간 유행가가 나왔습니다.
소위 뽕짝이 틀어진 것입니다.
약간은 짜증이 났지만, 젊었을 때 학우들과 함께 즐겁게 불렀던 유행가였기에 익히 잘 알고 있는 곡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에 내 자신이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놀랍게도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을 따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듣는 것이 무섭습니다.
우리는 듣는 대로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경건한 언어를 늘 접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송으로, 하나님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경건한 말을 하게 됩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겨있기 때문에 언제나 입만 열면, 그런 언어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둘째, 정확하고 유익한 말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성경적으로 거짓말은 큰 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말 하다가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정확한 말, 진실한 말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남의 말을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보았더라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남의 말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어느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잠깐 쉬고 있는데, 여자 집사님 한 분이 교회에서 넘어져 다리가 골절이 되어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서 가까운 교인에게 어떻게 다쳤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교회에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가다가 버스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가했는데, 또 나중에 알고보니 버스에서 넘어진 것도 아니고, 집에서 교회를 나가려고 나오다가 넘어져서 입원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사실과는 전혀 다른 말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 때, 생각했습니다.
이 말이 넘어져 다친 이야기이니까 다행이지, 만약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변질된 문제로 야기되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말이란, 돌아다니다 보면, 변질되고, 부풀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를 없애려면, 남의 말은, 아예 하자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별히 좋지 못한 말을 들었을 때는 듣는 것으로 끝내고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 돌아다니다가 내게 와서 끝나 버리는 그런 사람이 온전한 성도입니다.
그리고 정확한 말이라 하더라도 유익이 안 되는 말은, 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확한 말이라고 다 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 말을 전함으로 과연 그에게 또는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목사님, 000이 목사님 더러 이렇다고 말했어요. 나를 비난했다고 일러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비난한 사람보다 고자질하는 그 사람이 더 싫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든지 모르면, 그만인데, 제가 그 사실을 알고 나면, 그 사람을 대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대화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성자가 아닙니다.
알고 나면, 그 것을 극복하는데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옮길 필요가 없습니다.
성숙한 언어생활은, 정확하지 않는 말과, 유익하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좋은 말, 복된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찬양의 말을..., 사람을 향해서는 축복과 칭찬의 말을..,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말씀 속에 얼마나 복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까?
이런 말씀들은 죽을 때까지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끝없이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해 찬양과 감사의 말을 하루에 얼마나 많이 하시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믿음의 성도는 항상 감사하고,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남을 향해하는 칭찬과 축복의 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 성도들은 이런 말에는 어색해 하고 인색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 자신의 복을 구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하실 때, 어디든지 가거든 그 집과 가정의 평안을 빌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 집이 복을 받기에 합당하면, 내가 빌어준 그 복이 그 집안에 임할 것이요,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세요.
자신이 복 받기 위해서도 남의 복을 많이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복을 받지 못할만한 사람들에게 복을 많이 빌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이 다 내게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래서 복을 빌어주는 것은 아니어야 하겠지만, 성도는 남의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아름다운교회 성도 여러분,
복음보다 더 아름답고 고운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복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아름다운 복음을 우리 아름다운교회 성도들의 입술로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 성도들의 입술을 참으로 아름답게 만듭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말들, 즉 하나님께는 감사하고, 이웃에게는 칭찬하며, 복을 빌어주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이런 복음의 말들은, 아무리 많이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말들인 것입니다.
오히려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이런 좋은 말들이 모든 가정을 복되게 만들고, 교회를 은혜롭게 만들고, 사회를 윤택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성도의 모습은 경건한 언어생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 아름다운교회 성도 모두가 경건한 언어생활을 통하여 거듭나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늘 경건생활에 힘씀으로 경건한 말을 하며, 정확하고 유익한 말을 하며, 무의식중에서라도 복된 말, 유익한 말들을 하는 아름다운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