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 선생 문집 서문艮齋先生文集序
이광정李光庭
공자께서 일찍이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이웃이 있다.”라고 말하였으니, 예로부터 성현이 나오는 것은 진실로 자주 있지 않았고 그가 출생함에 반드시 총명하고 어진 인재들이 주위에서 도와주기 마련이다. 살아 있을 때는 가르침을 받아 강론(講論)하고 갈고 닦아 성취하여 그 학문을 세상에 밝히고, 죽으면 덕을 칭찬하고 풍모를 본받아 드러내고 서술하여 그 도를 후세에 전하니,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공자 이후로부터 낙건(洛建)의 여러 선생에 이르기까지 문하의 제자 가운데 직접 배우고 보좌한 이는 손꼽아 헤아릴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은 노선생(老先生 퇴계(退溪) 이황(李滉))에 이르러 크게 갖추어졌다. 이씨(二氏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의 사이비(似而非)를 물리치고 이기(理氣)와 공사(公私)의 근원을 밝혀 회옹(晦翁 주희(朱熹))이 전하지 못한 실마리를 세상에 확연히 크게 밝혔으니, 중원(中原)과 해외를 막론하고 적통(嫡統)의 전수가 귀의할 곳이 있게 되었다. 이 때를 당하여 조금이라도 뜻을 가진 선비라면 흔쾌히 기풍을 우러르며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여 제각기 자질의 고하에 따라 크거나 작거나 성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시종일관 직접 가르침을 받고 깊이 신뢰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이로는 반드시 월천(月川 조목(趙穆))과 간재(艮齋) 두 분 선생을 일컬으니, 그 조예의 깊이는 하찮은 후생들이 감히 논할 바가 아니다.
대개 간재 선생이 수업한 것은 총각 시절부터 노선생이 돌아가시던 날까지 12년간인데, 심한 질병이나 큰 사고가 아니면 일찍이 노선생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노선생께서 일찍이 이름을 지어 주며 기대하고 터득한 것이 정명(精明)한 것에 탄복하셨다. 일찍이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게 하여 그 운행의 묘법을 관찰하셨고, 돌아가시매 평소의 서적을 선생에게 맡기셨으니, 추중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선생의 학문은 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여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성정(性情)과 인도(人道)의 구분과, 이수(理數)의 미묘한 부분에서는 정밀하게 생각하고 애써 찾아 철저히 궁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생각하여 터득하지 못하면 반드시 질문하였고, 질문하여 터득하면 반드시 말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노선생의 평소 언행(言行)과 동정(動靜) 사이에서 또한 자세히 살펴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학문의 정밀하고 독실함이 이와 같았다. 스승을 잃은 뒤로 존신(尊信)하여 실행한 것은 오직 노선생의 평소 말씀과 행동이었다. 정여립(鄭汝立)이 세상을 속이고 도둑질하던 당시에 함께 객지에서 만났을 때 궤변으로 떠들어대는 그의 기세를 한마디 말로 꺾고, 서애(西厓) 옹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이 사람은 간사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시귀(蓍龜)처럼 밝았으니, 학문의 힘이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은 속일 수 없다.
선생은 과거 공부를 탐탁지 않게 여겨 산림에서 심성(心性)을 길렀고, 늘그막에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 제현과 함께 천거되어 조정에 나아갔다. 현달하지 못하고 돌아가시어 세상에 끝까지 쓰이지 못했으나 임진왜란 때에 도보로 근왕(勤王)하고 충의가 분발하여 행재소(行在所)에 소(疏)를 올려 왜적을 막는 방책을 논하였으니, 비록 당시 충신과 노장(老將)이라 하더라도 모두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 고을 원에 제수되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보살핀 것은 또한 어머니가 굶주린 자식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늘이 만약 수명을 더 빌려 주어 그가 배운 것을 실행하였다면 사람들에게 공덕을 끼친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리라.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남기신 글이 거의 절반 유실되었고 거듭 재난(災難)을 만나 미처 간행하여 세상에 전하지 못하였다. 이제 현손 상사 장진(長鎭)과 5세손 경태(慶泰) 등이 상자에 보관된 것을 모아 약간 권을 만들고 중간에 나[광정(光庭)]에게 보이며 잘못된 글자를 교정해 달라고 부탁하고, 또 말하기를 “바라건대 그 전말을 서문(序文)으로 남겨 주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늙고 아는 것이 없어 비슷한 글자를 구분하는 것도 어려운데, 어찌 감히 교정을 하고 서문을 짓는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선생의 〈문목(問目)〉과 〈기선록(記善錄)〉 등의 편을 읽어보니, 한서암(寒棲菴)과 농운정사(隴雲精舍) 사이에서 옷깃을 여미고 모시는 듯할 뿐만이 아니라 직접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듣는 듯하였고, 선생과 동문들이 왕래한 편지를 읽어보니, 또한 선생께서는 시종일관 노선생에게 배운 것으로 동지들에게 강명(講明)하였고 지킨 것이 모두 평소 이심전심으로 받은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른바 살아서는 그 학문을 밝히고 죽어서는 그 도(道)를 전한 것으로 거의 주자(朱子) 문하의 황ㆍ채(黃蔡)의 무리에 가깝도다. 선생은 또 일찍이 《심경질의(心經質疑)》를 지었는데 이미 경연에서 간행하였고, 《주역질의(周易質疑)》, 《사서질의(四書質疑)》, 《고문진보질의(古文眞寶質疑)》, 《가례주해(家禮註解)》 등의 책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영조 19년(1744) 계해 10월 상순에 후학 평원 이광정(李光庭)이 삼가 짓다.
[주1] 덕이 …… 있다 : 《논어》 〈이인(里仁)〉에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라고 하였다.
[주2] 낙건(洛建) : 정주학(程朱學)을 말한다. 정자(程子)는 낙양(洛陽)에서 살고 주자(朱子)는 복건(福建)에서 살며 강학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3] 이름을 지어 주며 : 1559년(명종14) 이덕홍(李德弘)이 19세 되던 해에 이황(李滉) 문하에 들어갔을 때 이황이 그의 비범함을 보고 이름을 덕홍(德弘), 자를 굉중(宏仲)이라 지어 준 것을 말한다. 《艮齋集 卷八 年譜 38年己未》
[주4] 간절히 …… 생각하여 : 자기에게 해당한 일을 간절히 묻고 자기의 능력으로 미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인(仁)을 실현하는 공부를 말한다. 《論語 子張》[
[주5] 정여립(鄭汝立)이 …… 꺾고 : 《연보》 1589년 조에 “이전에 정여립이 수찬이 되었을 때 홍종록(洪宗祿)의 집에서 만났는데, 그의 말이 교만하여 안하무인이었다. 이야기가 형이상(形而上)에 이르러 근거 없는 설로 옳은 체하기에 선생이 엄한 목소리로 ‘내가 선사께 들은 적이 있는데 수찬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오?’라고 하니, 정여립이 얼굴빛을 변하며 말을 다하지 못하고는 산수가 아름답다는 말로 돌려 선생의 말을 듣지 않는 듯이 하였다.”라고 하였다.
[주6] 시귀(蓍龜) : 점을 칠 때 쓰이는 시초(蓍草)와 거북 껍질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천하의 길흉을 결정하여 천하의 태평함을 이루는 것으로 시귀(蓍龜)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주7] 어지러운 …… 제수되어 : 이덕홍이 1593년(선조26) 3월에 영춘 현감(永春縣監)에 제수된 것을 말한다.
[주8] 경태(慶泰) : 이경태(李慶泰, 1689~1755)로, 자는 대유(大裕), 호는 묵와(黙窩)이다. 일찍 과거 공부를 폐하고 임하(林下)에서 독서하며 학문을 닦았다. 저서로 《묵와유고(黙窩遺稿)》가 있다.
[주9] 한서암(寒棲菴)과 농운정사(隴雲精舍) : 한서암은 이황이 1550년(명종5) 50세 때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와 퇴계 가에 집터를 잡고, 그 집 서쪽 시냇가에 지은 정사(精舍)이다. 농운정사는 1560년 도산서당을 낙성하고 이듬해 학생들의 숙소로 지은 건물이다.
[주10] 황ㆍ채(黃蔡) : 황간(黃榦, 1152~1221)과 채원정(蔡元定, 1135~1198)을 이른다. 황간은 자가 직경(直卿), 호가 면재(勉齋), 시호가 문숙(文肅)이며 민현(閩縣) 사람이다. 채원정은 자가 계통(季通), 호가 서산(西山), 시호가 문절(文節)이며 건양(建陽) 사람이다.
[주11] 심경질의(心經質疑)를 …… 간행하였고 : 《심경질의》는 일명 《강록(講錄)》, 《석의(釋疑)》, 《어록(語錄)》으로 이덕홍(李德弘)과 이함형(李咸亨) 등이 중국 송(宋)나라 진서산(眞西山)이 지은 《심경부주(心經附註)》 가운데 어려운 문구에 대하여 스승 이황(李滉)에게 묻고 답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1681년(숙종7) 경에 4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효종ㆍ현종이 숙독하였고 숙종도 경연에서 많이 참고한 것으로, 1681년(숙종7)에 교리 이돈(李墪)이 간행하기를 청하였고, 부제학 이익상(李翊相)이 상소하여 송시열에게 교정을 시키도록 하였는데, 그 과정에 영남에 소재한 이본을 구하여 이산서원(伊山書院)의 1본과 예안(禮安) 김만휴(金萬烋 이덕홍(李德弘)의 외손)가 소장한 1본을 찾아 대교(對校)하여 보고서야 이동이 없어 퇴계 문하에서 나온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23일 동안 교정을 하여 그해 9월 18일에 교정본을 봉진(封進)하여 간행하였다.
[주12] 이광정(李光庭) : 1674~1756.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이다. 1696년(숙종22) 진사가 되었으며, 영조 때에 참봉ㆍ감역ㆍ세마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영남 문원(文苑)의 모범이며 세교(世敎)를 떨쳤던 인물로 전해온다. 저서로 《눌은집》 등이 있다.
艮齋先生文集序[李光庭]
夫子嘗言德不孤而有隣。自古聖賢之生固不數。而其生也。必有聰明淑哲之才。相與鄰聚而輔相之。生則指受口講。刮磨成就。而使其學明於世。沒則讚德摹光。形容叙述。而使其道傳於後。信乎德之必有鄰也。自夫子以下。 至洛建諸先生。門弟之親炙而羽翼之者。可歷指而數也。吾東方性理之學。至我老先生而大備焉。斥二氏似是之非。析理氣公私之原。使晦翁不傳之緖。廓然大明於世。卽無論中州與海外。嫡統之傳。有所歸矣。當是時。士之稍有志尙者。無不斐然向風。登門請業。各隨其才分之高下。而成就有大小。若其終始親炙。篤信不怠者。必稱月川,艮齋二先生。其所造之淺深。非後生膚末輩所敢容議。而盖艮齋先生之受業。粤自童丱。至老先生易簀之日。十二年之間。非有甚疾病大事故。未嘗不在老先生之側。老先生盖嘗命名而期許之。歎其見得之精明。而嘗命造璣衡。以觀其運行之妙。其終也。以平日書籍。屬之先生。其見重如此。先生之爲學。盖切問近思。不得不措。故其於性情人道之分。理數肯綮之際。無不精思力尋。直窮到底。思而不得。則必資於問。問而有得。則必形於言。而於老先生平日言行動靜之間。亦莫不審視而謹記之。其學之精篤如此。而山頹之後。所尊信而服行之者。一惟老先生之雅言雅行也。當汝立之欺盜於世。與遇逆旅。能以一言折其僞辯張大之氣。而貽書厓翁曰。此姦人也。先見之明。灼如蓍龜。學力所到。不可誣也。先生不屑擧業。養性山林。晩與寒岡諸賢同被薦。亦旣登朝矣。未及顯而卒。用不究於世。然龍蛇之亂。徒步勤王。忠義奮發。其上行在䟽。論禦倭方略。雖當時藎臣宿將。皆慮不及此。而受縣於板蕩之際。撫摩字育。又無異慈母之哺飢子也。使假之以年。得行其所學。功德之及人者。又未可量也。先生沒而遺書散佚殆半。重以喪禍。未及榟傳於世。今其玄孫上舍長鎭,五世孫慶泰等。裒稡巾衍所藏。爲若干卷。間以示 光庭。求校讐其訛字。且曰。願有以序其顚末也。光庭老洫無知識。猶眩於亥豕銀根之辨。何敢勘定而有所言乎。盖讀先生問目,記善錄等篇。不翅如攝齊從容於寒栖隴雲之間。親承其提耳面命之音旨也。讀先生與同門所往復。又知先生終始以所學於老先生者。講明於同志。而所守者。皆平日單傳密付之訓也。所謂生則明其學。死則傳其道。殆朱門黃,蔡之流也歟。先生又嘗有心經質疑。已自經筵刊行于世。而周易,四子書古文質疑家禮註釋等書。藏于家。上之十九年癸亥陽月上浣。後學平原李光庭。謹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