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교직 여행
인천교육대학을 갓 졸업하고 짧은 스포츠머리에 부모님이 새로 사준 양복을 입고 1968년 3월 새내기 교사로 발령을 받아 사회인이 무엇인지, 교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이들 앞에 선지 어언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 인생의 전환기를 맺는 시기에 다다르게 되었다. 물론 후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그들의 포부를 열어주는 세대교체의 흐름에 동참한다는 마음이 그래도 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였다.
그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좋아 중등교사를 마다하고 초등교사로서 가르치는 열정과 의욕으로 교직에 임하면서 교사로서, 교감, 교육전문직, 교장으로서 근무하다보니 어느덧 정년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르게 되니 그 동안 포부를 갖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였다고 자부하기도 하였으나 순간의 모순 된 일들로 좌절감도 또한 많았던 교직생활의 과정이었다.
어려서부터 선생님이 되겠다는 희망을 갖고 중학교 때부터 하숙생활, 자취생활로 16년이란 세월을 보내며 교직의 꿈을 갖고 생활하였다.
인천교육대학에서 졸업장을 받던 날은 세찬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왠 눈이 많이 내려 내고향 강화군 교동도의 남산포 부두에 정박한 갑제호 여객선은 꽁꽁 얼음으로 얼어서 꼼짝도 못하였다, 이러한 교통 두절로 졸업식도 참석 못하게 되였다. 늦게 날이 풀려 갑제호 여객선을 타고 얼음바다를 훼치며 무려 10시간의 항해 끝에 인천 게이브리 선착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자취방에 들어오니 임자가 없던 졸업 축하의 꽃다발들이 가지런히 책상위에 놓여 있어 싸늘한 방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어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내렸다. 다음 날 아침 바로 대학으로가 늦게 교무처에서 섬(백령도, 서검도, 당진, 교동도) 출신 졸업생 7명이 함께 졸업장과 발령장을 받게 되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있다. 10대는 학창시절, 20대의 혈기왕성한 시기에 교직의 첫발을 딛고 근무하다 월남전 참전 후 귀국으로 다시 교직에 복직한 후의 인생은 교육이라는 교육자의 삶으로, 가정의 가장으로의 삶, 50대는 며느리를 얻어 가정의 행복한 새 울타리의 보급자리 마련의 성숙한 삶, 60대부터는 교육의 굴레를 벗어나는 준비의 삶과 자유의 삶으로 여생을 보내는 인생의 여정이었다. 이제 40여년의 교직을 마감하는 순간에 그 동안의 교직 생활을 다시 회상하여 본다.
나이 20대 첫 발령를 받아 교직 생활의 밑거름을 다지는 교직의 적응기 시대이며, 사회생활의 터전을 다지는 시기였다. 첫 발령을 받아 부임지로 양평군의 단월면에 소재한 부안초등학교로 떠나게 되었다. 인천의 자취방을 정리하고 청량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이불 봇다리와 간단 생활도구를 꾸려 가지고 가게 되었다. 1968년 3월 그 해는 왜 그렇게 춥고, 왠 눈이 그렇게 많이 왔는지 모르겠다. 온 산야는 하얀 눈으로 덮혀 있었다. 양평으로 가는 길이 험하기 그지없고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방향감각을 알아볼 수 없었다. 부임지에 다다르니 해는 서산으로 진지 오래되어 어둠만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있어 이것이 인생이요, 교직의 길인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월면 소재지의 여인숙에 짐을 풀고 하루를 보낸 후 이른 아침 학교에 첫 출근을 하였다. 교직생활의 시작이었다. 산골의 조그만 농촌, 산촌학교로 작은 학교였다. 학교가 크건, 작건, 도시와 멀리 떨어진 학교이건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일에만 관심이 있을 정도로 다른 데로의 시간을 돌린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숙집은 학교앞 게울 건너에 위치하였다. 당시 교감님과 송강립 동창하고 한방에서 셋이 기거하였다. 불편하기 그지 없어 하숙방을 옮겼다. 사랑채를 둘로 나누어 아래는 송, 위는 내가 쓰기로 하였다. 그리고 무례함을 달래기 위해 집 근처 교회에도 나가보았다. 토요일이면 동료 직원들은 다 집으로 귀향하고 나 혼자만이 하숙방을 지키게 되었다. 인근 산에도 올라가보고 냇가에서 세탁도 해보고, 하숙집 농사일도 거들러 주어보았고, 누애의 먹이인 뽕도 따보았고, 목욕도 하며 그저 생활하였다. 군 영장 통지서도 계속 나왔다. 마음의 안정을 잡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이일 저일 궂은 일은 다하여 보았다. 그러나 농촌학교라 일숙직이 없었다. 그러나 서류상은 있는 것 같았다. 일요일에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청부의 말이었다. 속사정은 잘 모르나 지금에 생각하니 이해할 것 같았다. 이러한 고독을 이겨 보고자 인근의 교회에도 나가 보았다. 친절하게 안내하여 주고 신앙의 기쁨도 느껴보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교의 집안으로 오래 다닐 수 없었다. 고독의 나날이 지속되면서 고향이 그리워졌다. 고향으로 전근하려는 마음을 먹고 낙도 강화로 보내달라고 하였으나 1년은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근가는 방법은 행정내신이였다. 이 방법으로 1년만에 고향인 강화교동 지석초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집에서 다닌다는 기쁨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그리운 학생들과의 헤어짐의 아쉬움을 뿌리치고 초임교를 떠나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지석초교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모든 일에 열정을 갖고 고향의 후배들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근무하였다. 모든 분들이 선배이고 친지 분이고 친구들이 여서 모든 행동에 조심스러웠다. 내가 맡은 학생들이 귀엽고 나를 잘 따라 주었다. 학교에서는 모든 굿은일을 마다하고 노력하였고 일요일도 학교에 출근하였는가하면 가사일을 돌보며 교직의 포부를 키워갔다. 그러나 군 복무 미필이 나를 괘롭혔다. 교동 파출소의 예비군 담당자에게 외지로 출장을 갈 때 신고를 해야 되나 신고를 하지 않고 출장을 다녀왔다고 인격적인 모독을 일삼으며 뇌물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것에 더 마음이 괘롭고 학교에 수시로 드나들며 군화를 신은 채 실내를 들어오는 것에 환멸을 느꼈고, 나를 저의 부하나 되는 듯 반말을 하며 눈총을 주었다. 이러한 괘로움을 당하느니 차라리 군입영이 났다는 생각이 들어 군 입영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경찰관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 싶은 심정이다. 군 입대하던 날 교동 남산포에 나의 제자들이 울며 이별의 손을 흔들어 주며 나를 배웅하여 주어 고맙기 그지없었으며 특히 갑제호 여객선이 포구를 한 바퀴 돌며 붕붕하는 뱃고동 소리는 처량하고 슬프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원주의 38사단에 입영하여 훈련을 받고 논산의 입소대대 작전 정보 정훈과에 배치를 받아 1년간 군복무를 하였다. 그러나 월남전이 한창 치열하던 시기라 정훈 행정병과의 월남 파병 착출로 특명이 났다. 6일간의 휴가를 얻어 내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바로 강원도 오음리로 가게 되었다, 6주간의 파월장병 훈련을 마치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가 부산 부두에서 환송식을 마치고 군함에 올라 근 1주일간의 항해 끝에 월남의 나트랑에 도착하여 파월 17제대로 월남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월남에 도착한 우리는 적응 훈련으로 근 2달간 야간 매복 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하루는 중령한 분이 나타나 교직에 종사하다 군에 입대한 장병을 호출하였다. 15명 정도의 초, 중. 고. 대학에 근무하던 장병들이 나와 시험을 보게 되었다. 2시간 후 나를 호출과 동시에 따불백을 들고 싸이공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오게 되었다. 주월한국군 사령부 부관참모부 소속으로 사령관 공관에 근무하게 되었다. 매일 연속되는 전사 보고와 부상병 호송 등이 나를 가슴 졸이게 하였고, 부모님들과 처는 매일 뉴스를 들으며 나의 무사귀환을 바란다는 편지를 받곤 하였다. 인생의 많은 교훈을 이 곳에서 쌓아가며 외국의 정취도 마음것 느끼며 생활을 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나의 주 업무는 사령관 연설문 작성은 물론 공관 행정 업무 경비업무를 하며 근 2년간의 파병 근무를 마치고 싸이공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 공군 비행장으로 귀환하였다,
1주일간의 휴가 후 고향 지석초교 강당에서 친지 친구들의 축하 속에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3일 후 제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 후 고향에 근무하고 싶었으나 자리가 나지 않아 김포군의 수남초교로 교직에 복직하게 되었다. 처와 함께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다.
김포의 오지인 9학급 규모의 전형적인 소규모학교이다. 교직원 모두는 인근에 거주하는 토착인으로 제일 젊은이가 바로 나였다. 모든 것이 나에게 일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래도 내라는 대답으로 교직에 보람을 갖고 성실히 근무하면서 선배들과의 인간관계 개선에 노력하고 학부모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여 객지에서의 생활에 충실하였다. 노후된 학교 건물에 퇴색된 교육환경, 미개발된 학교실습지, 기초학력의 부진, 개인주의적인 교직생활 등 많은 현안을 안고 있었다. 학급으로는 중간 복직이라 1학년을 맞게 되었다. 모두가 귀엽고 틔 없이 밝아 보이는 아이들은 허리에 매달리는가하면 등에 올라타고 재롱을 부리는가하면 집에서 가꾼 농산물을 익혀 갖고 와 같이 먹자고 서로 경쟁이나 하는 것처럼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을 보였다. 잊을 수 없는 일이였다. 또 6학년 담임을 하면서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품행 또한 착한 학생이 집이 가난해 중학교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해 전전 긍긍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월급을 그대로 등록금으로 납부해 준 자선의 기쁨도 이 곳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교내에 산재한 실습지의 개간으로 농산물을 재배와 가축 사육으로 자활기금을 확보하는 일, 도로변 꽃길 조성, 교실환경 개선에 선도한 일은 물론 김포군 관내 수업공개수업을 하면서 마음이 조급하다보니 오류 수업으로 협의 주제를 오류 수업 후의 대처 방법을 협의 한 일은 지금도 나의 머리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일들이다. 또한 행정적으로 학교별 의무 참가인 각종 자료제작 전시회, 연구대회는 물론 각종 대회와 연수회 참가 활동은 모두 나의 몫이 되었다.
특히 이곳이 고향인 조병욱 교감선생님과 김무훈, 이영선, 최경정, 한현옥, 한명자 선생님, 그리고 집 사람과 사이가 그렇게 좋았던 민봉순 선생님의 따듯한 배려에 감사한 마음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또한 이 곳에서 3년6개월간 근무하며 두 아들을 얻어 생활의 기틀을 다지는 시기였다.
단칸방에서 4식구가 살림을 하면서 어린 집 주인 남매의 생활의 반려자로 그들의 생활력에 감탄하며 지역 주민과 잘 어울리는 내자의 모습에 나는 교직에서 더 큰 보람을 갖고 근무할 수 있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진 탓인지 허물어져가는 독채를 얻어 생활하면서 산에서 나뭇잎과 썩어가는 나무를 주워 연료로 활용하는 내자의 근검 절약 생활에 더욱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이 집마저 도로 확장 공사로 철거된다기에 인천으로 이사를 하여 근 1년간 원거리 통근을 해야 하는 고달품도 있었으나 곧 인천석남학교로 발령을 받아 정들었던 이 곳농촌의 학교생활을 마감하고 도시에서의 교직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석남초등학교는 석남동의 야산에 홀로 위치하여 주변이 썰렁한 변두리 학교이다. 그러나 주변의 천마산에 어울려져 위치가 좋으며 특히 교내의 솔밭과 잘 정돈된 수목은 아름답기만 하였다. 당시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 전개된 시기로 구청의 지원을 받아 학교림이 잘 조성되었으며 당시 유성순 교장선생님의 투철한 교육 철학을 근거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을 시기에 이 곳에 근무하게된 것이 나로서는 큰 영광이었다. 특이할 만한 일은 체육에 체자도 모르는 내가 육상부를 맡으라는 일이였다. 육상에 대한 문헌을 탐독하고 나름대로 훈련을 하였으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육상대회에 출전하게 되어 학교에서 출전 경비 5,000원을 받아가지고 학생들을 인솔하였으나 경비가 남아 800원을 반납하게 되었다. 이 남은 돈을 다 지출하고 오지 왜 반납하느냐 하면서 경비 반납하는 사람 처음 보았다 하는 칭찬을 나에게 하였다. 이 때 칭찬의 의미를 되새기며 항상 학생들을 칭찬하는 습성이 나에게 돋아나 사랑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직원 취미 활동으로 배구를 모든 선생님이 즐겼다. 나는 운동에는 무재주라 써브를 넣지 못해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 또한 교직의 한 여정이라 지금도 그때를 상상하곤 한다.
또한 무더운 여름날 숙직할 때의 일이였다. 저녁 순찰을 돌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숙직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수돗물이 흘러 골이 패일 정도로 운동장으로 흘렀다. 너무 당황하여 교장 선생님에게 보고하면서 잘 못을 용서를 빌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럴 수도 있지’ 하시며 용서하시였다. 이를 계기로 나에게는 교직에서의 책임의식을 두텁게 하였다.
교직생활에서 특별한 기능은 없으나 긍정적인 생활과 성실한 자세로 근무하였다는 사실로 뜻하지 않게 나에게 교육장 표창장을 받는 영광을 차자하였고 부장이라는 보직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투철한 교직의 사명을 갖고 학급 및 학년을 경영하는 중견교사로의 태동의 시기가 되었으며 현장의 문제점을 발굴하고 해결하여 보고자 하는 1인일 현장교육 연구 활동을 착수하게 되면서 교직의 반세기를 교육연구와 교육자료 제작에 나 나름의 이론을 정립 실천하는 기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3년간의 교직생활을 긍지와 보람을 갖고 생활하다보니 인천도화초등학교에서 추진하는 교육부지정 학교방송 연구시범학교로 선발․전출되었다.
도화초등학교는 경합지 학교로 많은 선생님들이 선호하는 학교이다.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다. 나는 음으로 양으로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연구부에 배속을 받아 학교 연구업무에 공부하며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하였다. 맹일학이와 신휘철이 동창도 함께 근무하였다. 우정이 두터워 지금도 회로애락을 같이하며 인연을 맺고 있다. 학교근무경력, 교육경력, 나이 학교업무 등을 고려하여 어쩌다보니 남들이 많이 희망하는 2학년 담임을 명받았다. 동료 교사들의 논총도 받았다. 당시는 촌지가 많았다고 한다. 아마 그런 여파인 것 같았다. 학부모와의 관계가 또한 조심스러웠다. 교원 조직 면에서도 술을 못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비주류이니 당연히 웃 사람에게 술대접도 못했으니 눈총을 많이 받았다. 그래도 비주류가 많이 있어 위안이 되고 이들과 잘 어울렸다. 주류들은 아마 매일 퇴근 후 술로 마음을 다스리곤 하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에 생각하니 주류들은 몇 명을 제외하곤 모두 중간 퇴직 또는 승진자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학교에는 값나가는 나무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가꾸지를 않아 제멋대로 자랐다. 교장님이 나무를 잘 좀 손질하라는 명을 받고 수업 후 나무 가꾸기 활동에도 먼지를 뒤집어 쓰며 학교 조경 사업에도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지금의 학교 경영자로서 그 때의 경험을 살려 가는 곳마다 학교의 조경에 신경을 쓰는 습성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겨내고 학교일과 가정 일에 충실하기로 하고 소신 것 업무추진에 임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연구계획을 수립 실천하는 자세로 임하여 대회에서 수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험자의 자문을 받아가며 근 18년간을 여름 방학이 되면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쭈그리고 앉아 희망과 포부를 갖고 연구보고서를 쓰고, 자료를 제작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이 계속되어 집사람의 꾸중도 듣고 또한 자녀들에게도 미안하였다. 그러나 당시 부장선생님인 정효영, 김인옥, 성필용, 조춘자부장님들이 나를 그런 의미에서 아껴주었던 것 같았다.
개인 현장교육연구, 학교방송 연구학교, 사회정화 시범학교 등에 필수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연구보고 운영체제. 이론 탐색 방법, 자료제작 방법, 연구 내용 적용 방법, 통계 분석 방법, 결론 제시 및 자료 추출 방법, 자료 일반화 방법, 연구수업 활동 등에서 많은 경험을 얻어 교육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굳건히 다지는 계기로 교육연구사로 근무하는 기초를 다진 시기인 것 같았다.
어느 날 출근하여 교실에 들어서니 학생 하나가 울고 있었다. 아침 일찍 등교한 학생이 장난을 치다 복도에서 부딪쳐 앞니 한 개가 부러지는 사고가 난 것이다. 우선 병원에서 차ㅣ료를 받도록 조치하고 가해자 학생이 치료비를 부담하였다. 치료를 다한 후 장래를 걱정하는 것이다. 육군사관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다는 하소연으로 사후 치료비를 요구하는 것이 였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보고 담임교사로서 난감하였다. 적정선에서 타협하여 마무리하였다. 이런 일이 발생한 후 생활지도에 신경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가하면 교직에 대한 회열을 느끼기도 하였다. 대접문화에 익숙지 못한 나로서 윗사람을 잘 모셔야 앞길이 열린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촌지 문화에 익숙지 못한 나로서 교직의 정도가 무엇인지 새삼 실감하게 되는 교육의 참 모습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저 나의 직무에 충실하고 동료와 인간관계 개선은 물론 삶의 길이 무엇인가? 교직의 길이 무엇인가? 를 생각하는 교직 여정의 진실한 모습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장래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면 관리자의 새로운 모습을 위로는 존경심을 아래로는 사랑을 베풀고 지원체제를 강화하는 관리자의 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다짐하여 보았다.
5년의 만기가 되어 다른 학교로 전근하게 되었다. 당시 학교 급지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또한 승진을 위한 점수가 무엇인지도 내신서를 쓰면서 알게 되었다. 모두들 선호하는 학교에 희망자가 많았다. 그러나 집에서 가까운 비경합지인 서화초등학교로 희망을 하여 발령을 받게 되었다.
누구도 선호하지 않는 인천서화초등학교로 발령을 받고 보니 교직생활의 중견인으로서 역할 활동에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곳에 왜 발령을 받았는지 한번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결론은 교직사회에 대한 적응력의 부족과 교육자적 자질은 물론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교직생활의 문제점 개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를 극복하고자 동료와의 인간관계를 개선하고 학생들의 학습력 증진의 노력에 앞서 전문적인 자질 향상에 노력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리고 매월 봉급의 20,000원 정도의 한도 내에서 전문 교육도서를 구입 탐독하여 교육의 영역별로 전문적인 식견 향상에 남다른 노력으로 현장교육연구활동과 교육자료 개발 창안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4년간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 현장교육 연구에 대한 나를 대로의 방향이 설정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푸른기장의 영예를 차지하기도하였으며 각종 연구대회 및 자료전시대회 즉 시대회, 전국대회에서 큰 공적을 남기고 오히려 연구를 하려는 동료와 선배 및 후배에 대한 지도 자문의 역할을 담당하고 이웃학교 선생님들이 찾아와 조견을 부탁받는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교육연구사로서의 발탁의 근원이 된 것 같았다.
이 곳 서화학교에 근무하면서 숙직시 중등 체육교사라는 선생님의 항의 전화에 불쾌감을 느꼈다. 체육교사라는 학부모는 6학년 모반 학생으로 체육시간에 뜀틀을 잘못 지도하여 허리를 다쳐 치료비를 부담하라는 것이였다. 또한 체육지도에 대한 설명도 늘어 놓았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야간이니 내일 담임교사와 상담하여 해결하여보면 어떻겠느냐 하니 당신이 선생이냐 하며 고함을 지르며 학교에 오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리고 말았다. 기다려도 오지는 않고 전화로만 계속거는 것이였다. 다음날 담임 교사에게 이 사실을 전하니 그 애는 활발하게 장난 만치고 있어 야속하기 그지 없었다. 경솔한 행동은 금물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에 대한 사랑의 매로 동료 선생님의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볼 때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치료비 보상 문제에 있어 약자는 교사라는 것을 또한 실감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항상 학생을 선도하되 매로서는 아니 되며 언어적 설득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선도적 학생지도가 이루어져야겠다는 마음을 다져보았다.
특수학급을 1년 담임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모두 6명으로 학습부진아3명, 정신지체아, 자폐아 각1명으로 구성되었다. 결론적으로 투철한 교육관과 자기를 통제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의지가 무엇보다 요구되었다. 자페성 질환과 정신지체인 한 학생은 외형적으로는 정상인과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 사랑의지는 남다르다, 가정 살림을 잊고 오직 자녀의 뒤 바라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볼 때 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입으로 가래를 뽑으며 금방이라도 어떻게 되는 느낌을 받으며 가슴을 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럴수록 더욱 침착성을 잃지 않고 더욱 그를 아끼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학교 일보다는 대외 활동이 많아져 학생들과 학교에 오히려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각종 써클활동에 협의회 참석, 교육청 및 연구원 업무 보조 활동, 강사활동 등으로 원고정리와 워크숍활동, 협의 자료 작성, 학교 환경 게시물 제작, 연구보고서 대필 및 각종 지원활동 등으로 분주한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활동은 관리자이신 방제희 교장선생님과 김종호 교감선생님(후에 두 분은 교육장님)의 넓으신 이해로 이루어 졌으며 모든 교직활동을 즐거운 마음을 갖고 참여하면서 오늘이 잊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보람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는 휴일도 방학도 없는 분주한 생활로 가정을 버린 생활이었고 모든 것은 집사람이 이해를 해주고 또는 의지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자식들과 집사람에게 미안하기 한이 없었다. 더 고마운 것은 두 자식이 곧게 성장하여 준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다.
이곳에서 5년 시간이 흘러 만기가 되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서너 학교에서 픽업활동이 있었으나 동인천에 위치한 유서 깊은 축현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곳으로 오니 교육경력도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이곳에서 교무부장에 교육실습부장으로 업무가 주워졌으며 이때부터 증치교사라는 명칭으로 학급 담임이 없는 무임소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교장선생님이신 이규동 교장선생님 나를 반갑게 대해 주시고 더욱 의욕을 갖고 업무에 충실하였으며 또한 교감 승진이라는 의식을 나에게 품어 주셨다.
이곳에 근무하면서 건물이 일본 식민지 시대에 건축한 건물로 노후 되어 재건축과 운동장 지하 주차장의 건설 문제였다. 동인천역 주변의 교통 혼잡으로 이를 해소하고자 운동장에 지하 주차장을 건설한다는 문제로 학교와 지역주민과의 갈등 문제 해소를 위해 교육적으로 반대 운동을 학부모와 함께 추진하는데 교육자의 양심으로 난감하였으나 원만한 타협으로 지하 주차장 건설문제는 없는 것으로 돌리고 학교 건물을 새로 신축하게 되었다.
100여년 된 학교 건물을 철거하는 것을 보면서 건물 지하는 온통 반공호로 연결되었으며 목재 및 벽돌하나 버리지 않고 재생하기 위해 기계를 사용치 않고 인부들의 손으로 철거를 하였다. 일제 시대의 자제들로 목재는 가구 공장으로, 벽돌은 고건물 신축 재료로 활용된다고 한다. 자원 절약의 중요성을 또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습부장으로 120여명이 실습을 나왔다. 경력교사들에게 배정하고 나름대로의 교육프로그램을 작성하여 그들에게 교직의 중요성과 교직의 기대감을 심어주도록 참관실습, 수업실습, 실무실습을 주도하였다. 지금도 당신 실습생들이 현직에 근무하면서 당시를 추억하며 보람있었다는 말을 할 때 담당자로서 긍지를 갖게 되었다.
학교 신축이 한창 일 때 전임교장님의 장학관 전보로 주영태 교장선생님을 모시게 되었다. 인자한 인품으로 직원들을 위로하고 순탄한 학교경영으로 축현학교의 발전을 모색하였다. 특히 건물 완공으로 100여년의 물건들을 이전 실별로 재 배치하는 일은 고역이였다. 현대식 건물에 낡은 비품을 배치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모순이 였으나 교육재정의 궁핌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그 당시 고통을 이기며 교육실습을 주도하고 싸리지의 전통교육 활동과 건물 완공으로 환경 개선에 동고동락을 같이하며 협동심이 남다른 선배 동료 후배들의 모습이 선하며 그들의 무궁한 발전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축현초등학교에서 5년의 근무를 마치고 승진의욕의 포부를 갖고 주변의 격려와 권유로 영종도에 있는 도서벽지의 소규모 5학급인 금산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동창인 임충근 선생님과 함께 가게 되어 서로 위안은 되었다. 그곳으로 가는 해에는 왜 그렇게 춥던지 출퇴근에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그곳에도 교직의 동료와 학생들이 있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복식학급으로 3학년 6명, 4학년5명으로 구성된 학급을 담당하게 되었다. 애들이 순진하고 잘 따라 왔다. 지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재 연구의 충실과 자료 활용의 극대화로 교체 지도하고 예체능 교과는 통합하여 지도하였다. 그래도 보람을 느끼며 지도하였으나 절간 같은 학교의 전원에 도취되어 그런대로 즐거움을 갖고 근무하였다.
출퇴근의 고통은 있었으나 당분간은 자동차를 이곳에 같고 들어와 영종 부두에 세워두고 다니거나 아니면 버스, 그리고 기사님의 도움을 받아 다니기도 하였다. 그 분들이 참 고맙고 잊을 수 없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교직원 동료들의 우애와 깊은 정으로 즐거운 교직생활의 기쁨을 간직하였다. 그리고 선배님 한 분이 교통사고로 큰 고통을 겪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었으며, 나 역시 차 운전에 조심하는 생활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금산의 남쪽에 자리 잡은 학교는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운동장은 잔디밭으로 되어있고 이곳에서 남여 혼성팀으로 축구 경기를 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았다. 넓은 교지에는 호박과 채소를 비롯한 고추 등을 재배하여 농산물 재배의 기쁨을 생에 처음으로 경험해 보기도 하였다. 일과 후에는 학교 뒷산에 올라 인천 해안의 아름다음과 국제공항 건설 예정지로 향하는 연육교 공사 현장이 눈앞에 보이며, 인천항으로 드나드는 외항선의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런가하면 야산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으며 외로운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
또한 이곳에 오면서 바로 불거진 것은 학생수 감소로 분교 격하의 문제였다. 마음이 뒤숭숭하였다. 학생 지도와 공문서 처리, 학교회계업무, 교직원 봉급처리 등으로 분주하였으나 교육청으로부터 분교 격하 결정이나 영종초교로 모든 학교 장부와 회계업무를 인수하고 돌아오니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분교 격하로 하는 수 없이 1년을 근무하고 다른 동료들은 그대로 근무하고, 교장, 교감님이 발령이 나고 교사 중 나 혼자 인천남부초등학교로 발령을 받고 나오게 되었다. 교직원 동료와 학생, 학부모들의 분교 격하 아쉬움을 경험하며, 인생에 있어 매우 유익하고 사람 사는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1년이었다.
소규모 학교에 근무하다 규모가 큰 인천남부초등학교로 발령을 받고 보니 처음에는 어딘가 모르게 직원간 정을 느낄 수 없었으나 차츰 몸에 익숙하고 보니 예전의 교사로서 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이 곳 학교에서는 보직이 없이 학급 담임으로만 충실하는 여유로운 생활이었으나, 대외적으로 교육청, 연구원에서 출장의뢰에 학교에 미안하기도 하였다. 인천시 교육청에서 처음으로 전문직을 공채로 뽑는다고 하면서 전문직 공채에 응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에 두려움이 앞섰지만 교육학 및 일반 교육행정에 대한 참고자료를 구입 탐독을 하면서 새로 학생이 된 마음으로 나름대로 공부를 하였다. 약 15일간 공부를 하면서 아직까지 이론과 실제의 거리가 너무 멀었으며 오직 경험에 의한 교육활동을 한 것 같았다. 새로 알아낸 이론들이 너무 많아 아직까지 교직생활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아버님이 병환이 심각한 상태였다.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집으로 모시고 가라는 것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생각도 나지 않았다. 퇴원하여 집으로 모시고 온 아버님의 병환이 나으시기를 오직 기원할 뿐이다. 이러한 가운데 전문직 공채에 첫 번째 합격의 영광은 물론 교감 자격 연수 대상자로 선정이 동시에 기쁨의 영광을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기쁨보다는 아버님의 병환으로 온 가족들이 경황이 없었다.
95년 3월 1일자로 인천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로 발령을 받아 조사연구부에 배속되어 근무를 시작하였다. 업무로는 현장교육연구지도 관리, 인천의 생활 사회과 교과서 개발, 연구원 업무계획 수립, 전국 시도 공동자료 개발, 연구시범학교 지도 업무, 인천교육사 발간 업무 등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벚꽃이 만발하고 산천초목이 푸른색으로 변하는 4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가족, 친지, 친구, 직장 동료, 교직의 모든 선후배, 고향의 이웃과 어른들 등의 도움으로 고향의 선산에 모시고 나니 아버님의 빈자리가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연구원에 근무하면서 무엇보다 보람있는 일이 많았다. 특히 인천교육사 발간, 전국현장교육연구대회에서 3연패1위, 인천의 생활 사회과 교과서의 개발 연구, 연구시범학교 지도 및 각종 교원 연수자료의 개발보급 등이다. 그리고 김교대원장님, 이성구원장님과 조사연구부에 같이 근무하던 조주호 부장님, 이기문 부장님, 류광현 부장님과 동료인 장관진, 나삼수, 차춘길, 최혜숙 연구사와 김지연 사서, 차혜경 사무원, 행정실의 최광무, 신정기 부장님, 이용학 팀장님, 고동환 팀장님, 조효진 행정주사 등과 과학교육부, 자료제작보급부, 교원연수부, 진로교육부에 근무하던 모든 분들이 나의 머리 속에 오래 간직 될 것이다.
인천교육사는 총 페이지는 1534페이지로 1995년 8월11일 인쇄 발행하여 전국의 공공 및 사립도서관과 각시도교육청, 인천지역 초, 중, 고교 및 각 사업소, 시청 및 구청 등에 배부를 하여 인천교육사의 일면을 만드는데 남다른 감회와 보람을 갖게 되였다. 인천교육사의 내용은 인천 교육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 집대성하여 펴냄으로써 인천 교육 발자취를 체계적으로 정리, 사책인 자료를 보존함으로 과거를 조명해보고, 미래의 인천 교육을 전망해 나가고자 ‘인천교육사’ 발행 취지였다.
인천 교육사의 내용으로는 인천 교육의 발전 과정을 시대순으로 정리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실증적 자료를 많이 모아서 편찬하고, ‘인천교육사’의 기술 범위는 교육감이 관할하는 교육 활동에 한한 내용으로 집단 사고에 의하여 편찬하되 영역을 부를 달리하여 편찬하였으며, 후일에도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도록 기존 자료를 정리 분석하는 면에서 편찬 방침을 정하고 발간한 사업으로 나에게는 큰 보람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전국현장교육연구대회에서 3연패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얻었다. 물론 대회 참가자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담당자로서 대회 참가들과 대화와 자문 문헌 탐독을 통한 정보와 선행 연구자료의 정보제공 등으로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 발상으로 하나의 연구논문을 완성하는 일은 학위논문 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내고 62편 제출에 30편 이상의 푸른기장을 수상하는 영광으로 전국1위의 연패 달성에 담당자로서 큰 보람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초 중등교사들이 찾아오고 있어 보람으로 여기며 평생 연구에 몰두한 나로서는 그런대로 성심 것 자문에 응하고 흥미와 보람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인천의 생활 사회과 교과서의 개발이다. 지역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개발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다. 그러나 교육 전문직으로서 보람과 긍지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교과서 및 지도서를 개발하면서 실무 책임자로써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교과서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교과서는 학생들이 학습할 교재로서 문장 하나하나, 낱말 하나하나가 모두 학습과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이며 사진이나 도표, 삽화 등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느꼈다. 교과서를 개발하는 담당자들의 노고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교과서를 개발하는 기회가 또 없을까? 하는 기다림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과 지역화의 의미를 새롭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교육과정의 개정과 교과용 도서의 편찬 기능을 교육부가 가지고 있는 중앙 집권식 교육과정 체제이므로 교육과정의 지역화는 중앙 집권식 교육과정을 보완, 운영한다는 의미로서 항상 중요시되어 왔다. 21세기를 맞은 현시점에서 한 세기를 정리하며 새로운 세기의 도래를 준비해야 하는 전환기에 개정된 제6차 사회과 교육과정의 적극적인 의미를 수용하여 사회과 지역 교과서를 시․도 지역에서 개발하는 일을 내 손으로 실현시켰다는 데 큰 보람과 긍지를 갖게 되었다. 또한 교과서를 개발하는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인천의 생활” 탐구 교과서는 교육부 사회과 교과서와 메칭을 시키면서 인천광역시 범위 안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전통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미래의 주역으로서 고장의 발전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기르는 근거를 제시하였다는 점에 보람과 긍지를 갖게 되었으며, 교과서 개발에 대한 자신감과 흥미가 생겨 열의를 갖고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회과 교과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학생들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을 인천이라는 지역사회 안에서 구체적인 경험을 통하여 학습함으로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가지며, 나아가 국가 발전에 기여 할 자질을 기르는 사회과 교육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에 따라, 이에 대한 깊은 연구가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하며 연차적으로 수정 보완이 이루어 져야할 것이다.
특히 생활 경험의 소재를 찾아 지역 교과서를 가지고 학습함으로써 경험과 그 결과로 얻어지는 사회적 지식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자각과 인천을 사랑하는 심정을 길러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제도와 사회적 현상을 보는 안목을 길러 주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 지역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인천 지역의 역사적 사실이나, 사회, 문화, 경제 등 분야에서 학생들에게 꼭 인식시켜야 할 여러 가지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회과 교과서의 개발과 관련된 보람과 긍지를 바탕으로 오늘의 ‘인천의 생활’ 교과서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높게 부여하고 싶은 마음을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다. 지난 1년간 ‘인천의 생활’ 교과서 및 교사용 지도서를 개발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개발을 완료하고 보니 보람과 긍지가 앞선다. 그 동안 교과서 및 지도서를 개발하는데 물론 교육부 김만곤 편수관과 개발팀 선생님들의 도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집필진들에게 더욱 고마움을 금할 수 없어, 그 고마움을 이 글을 통해 밝혀 두고자 한다.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불가능한 일이라도 가능한 이로 성취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는 경험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제 더욱 좋은 사회과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교육과정에 명시된 인간상 구현과 사회 현상에 대한 지적호기심을 갖고 탐구하고 싶은 교과서, 재미있고 가르치기 쉬운 교과서, 학습자의 특성에 적합하고 사고력과 창의력을 기를 수 있는 교과서가 개발되도록 깊은 연구가 계속 이루어지면 하는 소망이다.
3년6개월의 교육과학 연구원 근무를 마치고 학교 관리자로서 부원초교, 영종초교, 축현초교 교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교감으로 근무하면서 지난날 교사 시절을 생각하고 직원들을 위해 근무에 충실하도록 복지 지원행정의 강화와 교수-학습의 질 향상을 위한 교내 장학은 물론 각종 자료의 지원 보급의 신속함과 학교장의 학교경영에 무엇보다 충실히 조력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특히 교감으로 직책을 수행하면서 직원과의 관계, 대인관계에 있어 언행과 행동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교육과학연구원 근무를 통해 초 중등교원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남의 말로는 발이 넓어진 것이다. 교감 승진의 축전, 축하 화분, 전화 등 학교의 전화가 불통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들의 축하 우정의 만남과 현장연구지도로 찾아오는 선생님들이 많아 회식자리가 빈번해 졌고 1,2차 등으로 집에는 11시를 넘어야 들어올 정도로 빈번하였다. 그 결과 마음의 결단의식이 부족하고, 남의 인정에 약한 나로서, 먹지 못하는 술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품위손상의 마음 아픈 상처를 받기도 하여 교직 여정의 큰 실수를 범하는 사례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인생을 반성하고 이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삶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가족과 형제간, 친구간 우애는 물론 교직의 동료, 선배, 후배들이 나의 교직에 대한 책무성과 전문성, 그리고 성품에 대한 인정이 더욱 고마움을 다지는 계기가 되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의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교직기간 까지 언행과 행동의 조심은 물론 나의 본 천성으로 돌아가 책무를 완수하고 명예로운 그날까지 성실한 삶과 대인관계에 조심하는 생활을 다짐하고 매일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는 습성이 생기게 되었다.
축현초등학교에 교감으로 근무하면서 교직의 큰 보람을 갖게 되었다. 동인천역 앞 인현동 지역 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시 교육청의 학교 이전 재배치계획에 의거 연수구 옥련동에 새 교사를 신축 이전하는 일이다. 10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축현학교가 시대의 변화와 시세확장에 따른 인구 이동으로 동인천 주변 상권이 약화되면서 급격한 학생수 감소로 부득이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자리에는 학생교육문화회관이 들어서 당시의 파란만장한 학교의 모습을 되새겨 보곤 한다. 학교 이전 시 모든 교구, 학습자료, 도서, 비품 등 일체를 정리하여 100여대의 덤프트럭으로 이사하는 일이다. 이사 준비를 근 1년간 준비하고 이사하는 날 앤 눈이 내리는지 많은 교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그 당시 현 직원들은 신임지로 발령이 나 가고 남은 직원 5명(권성길, 김기수, 김선옥, 차희영, 한난영 선생님)이 고생을 많이 했다. 새로 부임하는 선생님들을 미리 부임케 하여 이사짐을 정리하고 정 위치에 재배치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텅빈 관리실, 특별실, 교실을 정리하는데 많이들 고생을 했지요, 당시 선생님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머리를 스쳐갑니다.
당시 교장선생님이신 김부겸, 방제세, 정사랑 교장선생님의 따뜻한 배려와 성상호, 윤기춘, 남궁길, 박명래, 류재현, 정성분, 고복순, 이봉희, 이용금, 오영미, 박현미, 박현순, 한경애, 김 진, 조윤경, 최서영, 변지희, 변현숙, 조경애, 윤미라, 홍건순, 홍명수, 왕윤실, 박동훈, 조경희, 이현복, 김정연, 이효진, 주미영, 남선자, 최강은 등 선생님의 성실한 근무와 열정적인 교육애에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다른 학교로 전근하여 근무하고 있겠죠, 지금 축현학교 교정을 들어설 때 청량산의 경치와 아담하게 자리 잡은 학교는 이전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며, 건물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이 보였다.
3년6개월간의 교감으로서 직무 수행을 끝으로 강화의 마니산에 위치한 8학급의 소규모 학교인 화도초등학교로 교장 승임 발령을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축현학교 직원들의 축하와 동창 및 선 후배 선생님들의 격려 속에 승진의 기쁨을 누렸다. 특히 고향의 모든 분들이 프랭카드를 걸어 축하를 해 주었다. 상당이 고마웠다. 축현학교 직원들과의 끈끈한 정은 축하와 함께 헤어짐에 있어 정말 아쉬웠다. 송별회에서 눈시울이 불거질 정도로 회식이 끝남에도 일어서지 않고 침묵에 들 잠겨있었다. 정말 고맙기 한이 없었다. 특히 이 곳에 부임이후 축현학교 선생님들과 학부모 단체장, 그리고 많은 친구와 옛 근무지 동료들이 찾아오거나 축전 전화 화원 등으로 축하와 위로에 더욱 고마웠다.
화도초등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하던 날 마니산 기슭에 위치한 학교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 곳에서 나의 할일이 무엇인가 현황 파악에 들어갔다. 과거에는 7백여명의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이나 지금은 240여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학교의 외형은 참 아름다우나 내부적으로는 낙후되기 그지없다. 경기도 시절의 학교 교육시설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어 교직원들의 책상도 삐그덕 거리며 옛날의 교구와 비품들로 특히 4개 학교 통폐합 당시의 모든 물건들이 빈교실과 특별실 등 공간은 물론 창고에 쓸모없는 폐기 물품들로 가득차있었다. 환경 구성도 80년대 모습으로 낙후되었다.
우선 폐기 물품을 처리하는 일이다. 폐기 물품 목록을 작성하고 재활용물품, 폐기물품, 불용물품, 고철 등으로 분류하여 처리하는 일이다. 관리실의 교구, 비품을 정리하는 일이다. 쓸 물건은 하나도 없다. 물품 관리전환으로 정리하다보니 텅 빈 관리실이다. 비품 구조 설계로 관리실을 정비하고, 특별실을 정리하고 나니 딴 세상이 되었다. 기타 물품은 고물로 매각하거나 면사무소의 도움으로 폐품을 처리하는데 애를 먹었다. 기타 소각 물품은 면사무소의 승인을 얻어 논으로 같고 나가 소각처리 하였다. 무려 150대가 넘는 폐 컴퓨터는 매각 처리하여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았다. 당시 동료인 백충기 교감님과 김재기, 안형석, 이선녀, 정경희, 이신동, 안효욱, 황병학, 유호열, 김영만, 엄은희선생님, 박춘수, 최연수 실장님, 장미영영양사, 그리고 전형찬, 이관수, 이완섭, 서규환 기사님 고생 많이 했지, 그들과의 정이 지금도 끊어지지 않고 만남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1년 반을 근무하면서도 창고 한곳은 정리하지도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교육환경 개선으로 강화교육청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현대식 화장실 시설, 운동장 배수로 정비, 휴식공간 조성, 운동장 수목 정비, 방송실 시설, 유치원 환경개선, 구 급식실 철거 사택 신축, 급식실 시설 보완, 새로운 홈페이지 구축, 식물원조성, 로만시티 커틴 교체, 전자도서관 개관, 전광판 시설, 과학실 시설 보완과 학교 후문 진입로의 배수정비 등 현안사업을 만족치는 못했으나 어느 정도 정비 된 것 같았다. 그러나 혹시 행정처리가 잘 못되어 감사에 큰 지적은 받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다. 사택 신축에 업자가 완공을 눈앞에 두고 98% 정도 완공 날짜가 되어 믿고 공사대금을 지급하였다. 그 다음날로 연락이 두절되어 도망간 것이다. 나머지는 사비로 물자를 사다 마무리하고 말았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감사를 아무 탈 없이 넘긴 것 같았으나 현금의 이월액 정기예탁 안한 사항, 공작물 미 등재사항, 폐기물품조서 미 작성 등에 주의로 처분을 내려 많이 봐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학교경영관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반년만 더 있었다면 사무관리의 만전과 더욱 개선된 모습으로 변모하였을 것을 그저 아쉬워할 뿐이다. 후임 교장이 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골학교 운동회는 동내 잔치다. 운동회 준비를 하는 선생님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움직이는 체육진흥회장과 운영위원장, 그리고 김순미 어머니회장 참 고생이 많았지,
1년 반을 근무하면서 반은 관사에서 반은 인천 집에서 통근하는 것으로 근무를 하였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인생의 한 추억으로 오래 간직 될 것이다. 아침은 각자의 관사에서, 점심은 학교 식당에서, 저녁은 동료와 함께 인근 식당과 관사에서 해결하였다. 봄에는 마니산을 비롯한 인근의 산에 올라 산나물 채취, 여름은 산행으로, 가을은 도토리 주우며 퇴근 후를 보냈다. 그리고 겨울은 방학이라 인천에서 통근을 하였다. 긴 밤은 관사와 이웃학교 관사에서 조촐한 음식을 차려 놓고 가끔 즐거운 팔운동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화도, 양도, 조산교 모든 직원은 인천광역시 교육청지정 소규모학교 공동 교육과정 시범학교운영으로 모두 한 직장의 동료와 같았다. 끈끈한 정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지금 그들은 그곳에서 짧으면 5년 길면 7년간 고생으로 승진을 하여 관리자로 있어 내 마음이 흐뭇하다, 가끔 화도학교 인근을 지날 때 제2의 고향과 같은 그때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간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여생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말이다.
화도초등학교에서 1년 반의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2004.3.1자로 시내의 계양구 계산2동에 위치한 나의 교직여정의 마지막 학교인 인천안산초등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학교 규모는 62학급으로 2,300여명의 학생과 교직원 94명을 수용한 대규모 학교이다. 소규모 학교에 근무하다 갑자기 대규모 학교로 근무하게 되니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겁기도 하고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갔게 되었다.
특히 안산초교는 경인교육대학교 대용실습학교지정운영. 시교육청 지정인 영재학급운영과 창의 발명반 운영(시 중등교육과), ICT활용선도학교운영(시 정보실업과), 교실수업개선 중심학교운영(시 초등교육과)을 비롯한 상설 농구부 지정운영(서부교육청) 등 막중한 인천교육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학교이다, 그런가 하면 시 교육청, 인천교육연수원, 교육과학연구원, 서부교육청 등에서 주최하는 각종 연수회, 교과써클 활동 등이 본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으로 학교가 항상 분주하고, 교육의 활동적인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 학교로서 보람과 긍지를 갖고 지정학교의 운영에 나름대로의 철학과 소신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본교에 근무하는 교직원 모두에게 항상 미안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협조하여 주어 항상 고맙고 존경스럽게 생각하였다.
학교경영면에서 개별화 교육의 강화, 교원의 직능 개발, 교육환경의 현대화 등 3대 경영활동 방향을 설정하고 열심히 배우자, 참되게 행하자, 튼튼하게 자라자 라는 교육의 지표로 설정하고 학교 조직을 구성 학교 경영에 노력하였다.
우선 ICT정보활용능력을 극대화하고자 새로운 ICT정보활용 E-Learning 사이버 학습 홈페이지를 새로 구축하였습니다. 정보화의 물결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그 중요성을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은 우리 교육현장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러한 변화 속에 어떠한 부담 보다는 능동적인 자세로 대처하려는 의식의 함양과 교실 수업 개선을 선도하고 일반 학교에 운영 모델을 제시함과 동시에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력 향상과 학부모의 사교육비를 절감시키는데 도움을 주고자 관심을 갖고 중점 추진하였다.
교육환경 현대화 사업으로 학교 교육운영비의 부족으로 구청, 교육청 등에 현안사업비 요청에 의한 재원조달로 교실 후로링 마루 공사, 정보화 교육실 구축, 층계에서의 안전사고 미연 방지 시설, 화장실 시설 개선, 등하교 불편 해소를 위한 교문확장 및 후문 설치공사, 운동장 배수로 복원공사, 정보화 기자재 및 교수학습 자료와 매체 확충, 건물간 통행로 시설, 과학실 및 보건실 현대화 사업, 특수학급 시설, 발명공작실, 어학실, 미술실, 음악실, 도서실,교원 연수실, 수업 연구실, 수업협의실, 행정실, 교무실, 교장실, 현관 등 시설 개선에 노력하였으나 앞으로 더욱 노력이 요구되고 있어 아쉬운 마음이다.
또한 교수학습 방법 개선을 위해 학교 자체 예산으로 장학자료를 발간하여 활용도를 높이고 서부교육청 관할 학교에 일반화하는데 노력하였으며, 이는 모든 교직원이 퇴근 시간을 아랑곳 하지 않고 스스로 실천한 연구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나 자신도 교장실에서 앉아만 있지는 않고 교내외를 다니며 학교를 위해 무엇을 지원 요청해야 할까? 다른 학교와 비교하며 무엇이 부족한가?, 어떻게 학교를 경영할까?, 무엇을 도와드릴까? 궁리를 하며 안산학교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하나 그래도 부족한 점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님들에게 소외스러운 일들을 하지 않았나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면 이해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2004년 부임 당시 선생님들의 모습을 상상하여 보니 참으로 열심히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안산학교에는 일이 너무 많다고 소문이 나서 오고 싶지 않은 학교라고 하였으나 막상 이듬해에 저희 학교로의 희망이 넘쳐 5:1이라는 경쟁이였다고 하였다. 이는 바로 교육의 본질을 깨닫고 사랑의 교육 실천과 교수학습의 질 개선을 통한 연구 노력하는 학교풍토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자세로 어느 학교에서나 교직이 끝나는 그날까지 노력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특히 3년 6개월 동안 안산학교에서 동고동락을 같이 했던 동료들을 그려본다, 오영렬, 성백교, 김윤주 교감선생님, 주용석. 김재형, 이창렬 교무부장, 장순근, 두순자, 오남주, 강선주, 홍지선, 원미희, 김윤식, 장연진, 양경모, 이성순, 강경화, 김민홍, 강석철, 이명옥, 김지숙, 박세웅, 김정숙, 차용선, 이건호, 구복호, 고상경, 최정희, 박종남, 모영수 등 부장선생님들, 행정실에서 교육행정을 지원해준 김창숙 실장님, 현 이응권 실장님, 백승숙, 박태영 차석, 김문희, 조형윤 영양사, 박완순, 유영옥 위생원님, 김미숙, 유현정, 김희영 주사님, 백상흠, 유영수, 김병희 기사님, 우윤미 최춘희 보건교사, 모한나, 전혜정, 권은주 보조교사 등 1-4년간 업무부장 및 학년부장, 행정실업무, 급식업무, 보건업무, 과학업무, 정보업무, 발명 및 영재업무 등으로 참으로 고생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하신 이양순, 제혜숙, 장수진, 문경환, 이현경, 김동옥, 이미은, 남차순, 천부경, 김동욱, 박성근, 김수현, 심자연, 신정미, 권수혁, 서금숙, 김해양, 박동규, 고영란, 나미연, 강미선, 장미옥, 문상윤, 유은수, 곽지순, 권미순, 김미형, 김영옥, 김진선, 김행자. 윤선경, 이숙경, 이윤경, 정순이, 차난영, 김지연, 전금자, 전지영(교원대 파견) 그리고 몸이 불편하여 중도 교직을 그만 포기한 김수영 선생님, 등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하고 내 인생의 징표로 머리 속에 고이 이름을 간직하고 푼 마음이다.
그리고 현재 본교에 근무하고 있는 유선경, 이숙경, 정보라, 노명선, 남길현, 추미화, 김지영, 이윤미, 전지영, 정무택, 이현정, 김향리, 황인영, 김은하, 김난영, 이선영, 나성애, 박정현, 정하나, 박시화, 명기정 선생님, 신규 선생님들로 김효영, 이소영, 문금림, 김보람, 조미향, 조선형, 안균희, 김현경,
박태자, 유현희, 윤영란, 신민주, 석현아, 이은영, 홍헌주, 문석현, 박수진, 권혁매, 권혁경, 송은희, 임효진, 옥진주, 강효진, 김정자, 홍유경, 김수진, 임병택, 김은숙, 현 훈, 배영숙, 곽호식, 조은영, 박보은, 김 찬, 박정미, 최현숙,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만 정말로 빠른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은 무상하지는 않은 것 같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교직에 들어서며 교직생활, 군복무 특히 파월용사로서 월남에서의 군생활, 제대를 하고 다시 복직을 하여 교직의 길 어언40여년이 되었다. 오는 8월 31일이면 내 인생의 전부였던 교직을 떠나야 한다. 그간의 긴 교직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교사생활, 전문직 생활, 관리직 생활 등을 거치면서 즐거웠던 일, 괘로웠던 일, 보람 있었던 일 들이 인생이 끝나는 날 까지 잊을 수 없는 가슴 벅찬 감동과 환희의 순간들이 마치 영상의 필림처럼 그려진다. 인생을 반성하고 좋은 일은 좋은 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후회스러운 일들은 머리 속에서 지우며 여생을 보내리라 마음을 다져 본다.
내가 걸어온 어린시절과 교직 여행 시절의 흔적들을 영원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인천초등교육을 위해 ,학생들을 위해, 교직 후진들을 위해 노력한 일들을 밀알로 기억하고 싶은 마음으로 남은 여생을 못다한 효도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가정을 위해 노력하면서, 인천시내와 고향인 강화 교동을 오고가며 그리운 친구들과 정이 깃든 고향의 여러분들과 마음을 비우고 노년을 뜻 깊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제가 가고 싶지 않고, 타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섬으로 놀라가는 일과 배타는 것을 제일 싫어 했다. 그 이유는 90년대까지 교동의 교통사정은 매우 불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뱃고동 소리만 들으며 어린 시절과 학창생활을 보낸 고향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기대는 그래도 마음의 안식처를 얻은 또 하나의 기쁨이다. 교육의 동료들 자주 소식 전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교직생활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교장선생님의 일대기를 본것 같습니다. 먼저 평생을 교육에 헌신하신 교장님의 투철한 교직관에 경의를 표합니다. 젊어서부터 중견교사 전문직, 관리직등에서 나름 많은 공을 세우셨습니다.사진에서 뵌 인자한 얼굴이 떠 오릅니다. 강화에 모친을 모신 곳 이어서 남 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후진들에게 선배님으로서의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실것을 믿으며 내내 건강 하십시요 중대부중 최정범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