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밥집 새댁
속이 출출 하면 보리밥을 먹으러 간다. 조방 터 돼지국밥 골목 모퉁이 돌아서 두 번째집 그곳에 내가 즐겨 찾는 보리밥집이 있다. 꽁보리밥, 섞은 보리밥, 소피 국밥 세 가지 중 나는 10년 넘게 꽁보리밥만 주문한다. 노상에 줄을 그어 주차장을 만들어놓아 바로 문 앞에 주차가 가능하다.
무청 버무림이 식탁마다 듬뿍 차려져 있다. 고춧가루가 띄엄띄엄 보이니 김치 같긴 한데 김치라기에는 숨이 덜 죽어 너무 풋풋하다. 조리는 하였으나 데치지 않았으니 나물도 아니다, 된장찌개, 풋고추, 갈치구이, 그리고 보리숭늉 한 대접이 기본으로 나온다.
주인아주머니나 서빙 하는 새댁이나 세월이 무색하다. 갈 때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세월마저 무덤덤 변함이 없다. 처음 새댁을 보았을 때 재종 동생과 너무 닮아 이름을 부를 뻔 하였으나 놀라기만 하고 입을 열지는 못했다.
새댁의 패션은 검정 나팔바지. 검정 티셔츠. 검정 앞치마. 흰 테 돌린 검정 스니커즈로 변함이 없다.
주인아주머니의 딸이라기에는 시각적 DNA에 차이가 크다. 고용인이라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너무 열심히 일한다. 며느리가 아닐까 짐작할 뿐 어깨에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양 볼을 가리고 있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워 볼 때마다 새댁이다.
생된장과 고추장은 무청과 함께 기본차림이다. 여름에는 선풍기가 바람을 일으켜 주지만 겨울에는 소피국통과 숭늉솥에서 오르는 김이 실내를 데워준다. 지금은 한 그릇에 5천 원이지만 지난겨울까지만 해도 4천5백원에 주차비 5백원을 부담해 주었다.
코로나19 영향이 이 집에도 미쳤다. 밥값도 5백 원 오르고 주차비도 천원으로 손님 부담이 되었다. 나로서는 1,500원을 더 부담하게 되었으니 종전비 25%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 셈이다. 그러나 나는 마다하지 않고 간다. 그만한 가성비가 충분하다는 계산이었다.
캡사이신은 본래 무색이건마는 붉은 고추장에 매운맛이 있음을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농도를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고, 무청 버무림이 삼삼하여 넉넉하게 비벼 먹을 수 있다. 포만감 가득하게 먹어도 체중이 증가할까 염려 하지 않는다. 보리밥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보리알갱이가 입안에서 뱅글뱅글 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촉감이 오히려 좋다.
특히 비릿한 3지 갈치를 뼈째 씹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조미하지 않은 냉동갈치에 소금만 살짝 뿌려 프라이팬에 구워낸다. 한 동강이 정량이지만 나는 추가로 하나를 더 부탁한다. 얼마 전부터는 아예 두 동강을 얹어 온다. 인심 쓰느라 몸통 부분을 주는데 솔직히 꼬리가 바삭하고 더 맛이 좋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 친절을 거절하는 것 같아서 꼬리 부분을 강조하여 주문하지는 않는다.
나만큼이나 보리밥을 즐기고 갈치구이를 좋아하는 시인이 있어 함께 간적이 있다. 그는 행정관료 이기도 하다. “칼치 한 동가리 더 주소.” 관료적 어투가 새댁의 비위를 건드렸던가 보다. “없는데예.” 대답에 찬바람이 쌩 불었다.
나는 눈을 찡긋 해 보이며 무언의 사정을 해 보였다. 내장이 덧붙은 목덜미 부분을 가져왔다. 내 윙크는 알아들었으나 낯선 손님의 어투에 기분이 내키지 않는 서비스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몸통을 그에게 양보하고 추가로 가져온 목덜미를 내 앞으로 당겨 놓은 적이 있었다.
보리밥집에서 서빙을 한다고 허투루 대할 수 없는 단호함을 보여주었다. 평소에도 웃음기 없는 표정에서 사근거리는 이미지는 찾기 어려웠지만 손님의 주문에 망설임 없이 반항적 반응을 보였다. 기껏 타협한 결과로 맛없는 부분을 가져오다니 족보 있는 고집임을 짐작했다.
보리밥집과 멀지 않은 장소에 볼일이 생겼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오히려 적당한 시간이라 보리밥집에 들렸다. 붐비는 시간대를 피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속도가 워낙 느려서 혼자서 4인용 테이블을 독차지하고 앉는 것이 미안했다.
마침 두어 군데 빈자리가 있어 부담 없이 착석하였다. 그런데 갈치가 한 토막이다. 마지막이란다. 한 토막이 정량이니 할 말은 없다. 새댁이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싱긋 웃어주었다. 어쩔 수 없지않느냐는 나의 팬터마임이었다. 평소처럼 무청을 수북히 올리고 된장찌개와 고추장을 섞어 비볐다.
10여 년을 드나들면서 이 집 새댁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손에는 막 구워 기름이 쪼글쪼글 튀는 갈치 한 토막이 들려 있었다. 무표정했던 평소에 비해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추가로 구워낸 갈치보다 새댁의 미소가 훨씬 예뻤다. 이렇게 유쾌한 음식은 참 오랜만이었다.
이제 점심시간을 접으려는 마지막 손님에게 아주 특별한 서비스로 갈치 허리통 한 토막을 별도로 구워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마움과 맛스러움이 조그만 접시 위에 누워있었다.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감동이었다. 사람은 저마다 상대를 놀라게 하는 위력을 가졌다는 묘한 생각이 스쳤다.
호텔 그릴에서 스테이크를 구워낸들 이보다 예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예 이 장면을 작정하고 마지막 갈치 토막이었음을 강조했던 것일까.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새 기름을 두르고 구워내 오리다. 서비스에 위트까지 담겼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표정에 굴곡이 없음은 이런 유머 감각이 넉넉했던 덕분이었을까.
굳이 호들갑스러울 필요는 없다. 꽁보리밥에 보리숭늉을 끓여 낸다고 유머도 해학도 없으라는 법은 없다. 히히덕거리지 않으면서 위트를 감추었다. 저렴한 보리밥을 먹으러 오는 고객을 풍성한 마음으로 맞이한다. 메뉴는 단출해도 무청 버무림은 넉넉해서 찾는 이는 누구도 불만이 없다. 그녀의 무표정에 서린 여유가 소박한 비단결로 짜여져 있음을 그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