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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새해 정월 초하룻날
재경서흥회 총무직을 맡고 계신 쾌식(快埴) 이사가 경현록 등 여러문헌의 자료와 미디어에 보도된 글들을 종합 정리하여 '조선 5현의 수현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일대기'라는 제목으로 대종회카페에 한훤당 할아버지 관련 방대한 량의 글을 올렸기 두차례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도학(道學)의 으뜸스승'(近世道學之宗)으로 칭송(稱頌) 받으신 한훤당 할아버지의 일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용중에 프레시안에 2007년11월 6회에 걸쳐 연재된
기획연재물 ☞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 : 침묵, 미래와의 대화'에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현과 관련한 글들의 그림이미지와 내용을 일부 추가했습니다.
쾌식 종원은 한훤당할아버지 일대기와 관련, 기록된 행적과 사상을 모아, 남기신 말을 전하겠다는 마음에 이 일대기를 정리했다며 이종범교수의 글과 장도규(張都圭)교수의 학술논문 <한훤당 김굉필의 의리와 詩세계> 등을 많이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혔습니다.
조선 五賢의 首賢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일대기 2012년 정월 초 하룻날 16대손 쾌식은 삼가 할아버님의 행적을 역는다. < 500년 세월의 침묵과 소통을 향한 고유문 > 16세손 쾌식은 삼가 애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영전에 올립니다. 할아버지께서 51세라는 나이에 못난 세상을 만나 참형을 당하지 않고 좋은 세상을 만나 좀 더 천수를 누렸더라면, 그 고매한 뜻으로 사림의 영수로서 학문을 완성하셨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공부자님께서도 57세에 천하주유를 하여 69세 고향에 돌아 올 때까지 12년의 천하 주유가 있어, 유학을 완성하는 하늘의 뜻인가 하옵니다. 못다 남긴 그 뜻은 침묵과 소통으로 500년을 미로를 찾으라는 숙제인가! 후손 쾌식은 500년을 훌쩍넘어 삼가 여러 선현님들의 글을 모아 한훤당할아버지의 관련 글을 통하여 기록된 행적과 사상을 모아, 혼탁한 세상에서 혼연히 살아가는 방법을 안내하고자 남기신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할아버님께서 말씀하기를“옛날 학자들은 자기를 위한 학문을 일상생활에서 찾았다. 본성 안에 인·의·예·지가 모두 갖추어졌고, 그 마음을 지키고 길렀다. 힘써 노력하는 방법이 공경함이라는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옛날 학자는 자기를 위해 공부하였지만, 지금 학자는 남을 위해서 공부한다.”‘자기를 위한 학문’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 즉 수기(修己)에 관한 학문을 말하며‘남을 위해서 하는 학문’이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라고 전하고 있어 평생을 소학이라는 수신서를 위하여 몸소 실천하신 만고에 사표가 되신것이다. 한원당 할아버지의 뜻을 기리고자 이 글을 정리하여, “도학사상의 창시자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찾아... 小考”로 명명하여, “서흥김씨의 뿌리를 찾아서”에 이어 “寒氷契 선비정신의 表象”과 함께 점(./태허)사상 연구라는 글을 지어 할아버지님의 영전에 올립니다. - 목 차 - 서문. 연보 1. 교육사상과 선비정신 2. 도학자로서의 활동과 유묵 3. 성장환경과 생애 4. 문묘배향 과 도학의 창시자로서의 시대적 배경 5. 소학의 실천이 敬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6. 스승 김종직과 만남과 헤어짐 7. 1) 무오 당적으로 몰려 희천으로 유배를 갔다. 조광조를 만나다. 2) 제자 반우형이 희천을 찾다. 8. 마지막 가는 길에 더욱 초연하였다. 1) 순천의 유배생활 2) 순천에서의 임종 “도학사상 창시자 한훤당 김굉필을 찾아...小考” 한훤당 할아버지 연보
본관(本貫) 서흥(瑞興), 자(字) 대유(大猷), 호(號) 한훤당(寒暄堂), 시호(諡號) 문경(文敬) 1454년(단종 2) 한양정릉(現 종로구 정동) 출생, 1472년(성종 3) 순천박씨와 혼인. 처외가가 있는 가천에서 그곳의 김맹성과 사제의 연을 맺음 1475년(성종 1) 김종직 함양군수 부임 (김종직의 사돈인 김맹성의 추천으로 김종직과 사제의 연을 맺음) 1477년(성종 8) 선산향교 모임 참가(김종직이 선산김씨이며, 선산부사로 재임중) 1478년(성종 9) 김맹성 고향으로 돌아옴(지지당에 글올리다 보냄) 1480년(성종 11) 생원시 급제, '정지교부계' 결성 1485년(성종 16) 김종직에게 '풍간'시를 보냄(이조참판직을 제수하지 말 것을 권유) 김종직이 서운해 함 1486년(성종 17) 이조참판으로 있던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 올려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사제지간에 사이가 벌어졌다. 1487년(성종 18) 부친상을 치루고 시묘 살이를 함 1490년(성종 21년)부친시묘를 마침 1490년(성종 21) 탁영 김일손이 스승과 김굉필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알고 김굉필 찾아와 스승과 문제를 제기(탁영은 17년 연하임)하였으나 김굉필이 답변을 한 흔적이 없이 김일손과 함께 가야산 유람 1490년(성종 21년)모친을 서울로 모심, 1490년(성종 21년)용문산(미원현) 강학소를 설치하여 후학양성에 전념함 1491년(성종 22)주계군 이심원(효령대군의 증손자)이 남효온과 함께 강학 장소를 방문 1492년(성종 23) 남효온(39세)임종(남효온 병석에 방문하였으나 화해하지 못함) 1493년(성종 24) 용문(미원현)강학소 정리 및 고향으로 낙향 정종대왕의 고손자인 명양부정(鳴陽副正) 이현손(李賢孫)이 전송 (김선생을 보내며 시를 지음) 1494년(성종 25) 경상감사의 유일 천거, 남부참봉 1495년(연산 1) 전생서 참봉 1496년(연산 2) 군자감 주부와 사헌부 감찰을 지냄 1497년(연산 3) 형조좌랑 1498년(연산 4)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문도라는 이유로 연루되어 희천으로 유배 1500년(연산 6) 순천으로 배소를 옮김 1504년(연산 10)10월 갑자사화로 유배지에서 참수당하여 순천의 철물시에 효수 1504년(연산 10)11월 - 김굉필의 자식(언숙, 은상, 은서, 언학). 형제는 곤장백대를 처 먼곳으로 귀양 보내라. 1506년(중종 원년) 10월 신원됨. 김굉필의 자(언숙, 은상, 은서, 언학)4형제와 딸(남부참봉하박, 훈련원정 이장배, 사헌부감찰 정응상, 사인 강문숙, 충의위 정성린) 5명있다.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그 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1517년(중종12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등의 상소와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하여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내게되었다. 그러나 1519년(중종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사림파의 반대세력에 의하여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 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됨 1575년(선조 8년) 영의정(네이트 백과사전/ 판서공 사단비명P119쪽 태동고전연구소 장 임창순) 증직이되고, 1577년(선조 10년) 문경공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鄭汝昌)· 조광조·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어 이조5현의 수현이 되셨다. 임진년 정월 초하루(양력 2012. 1. 23.) 16대손 쾌식은 여러님들의 글을 받들어 삼가 할아버님의 행적을 역다. 1. 교육사상과 선비정신 한훤당 김굉필은 정몽주 이후 도학을 스스로 얻어 전 생애를 통하여 도학정신의 구현과 참된 스승의 모습을 보여준 근세 도학(道學)의 창도자(倡道者)이자,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교육자였다. 학문으로 볼 때 한훤당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 및 후배에 속하며 우리나라 도학의 정통을 계승하였지만, 그의 학문적 경향이 스승 김종직과는 달리 시문(詩文)보다는 실천(實踐)을 중시하여 덕을 이루고 도(道)를 성취한 것은, 스승의후광 (後光)보다는 몸소 체험하여 자기 스스로 깨달은 공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실천적 의리정신과 인격수양을 통하여 이룬 교육자로서의 업적 때문에 근세 도학지종(道學之宗)으로 존중되는 것이며 광해군(光海君)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굉필은 평생 열심히 공부하였다. 남효온이 '파루를 친 뒤에야 침소에 들었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고 전하고, 선조 치세 초반 임금의 명을 받은 유희춘(제자 유계린의 아들)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의 언행과 약간의 글을 모은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에 나온다. 남명조식도 이장곤에게 들었다면서 "김굉필 선생께서는 일찍이 뜻을 같이 하는 벗과 함께 지내면서 첫닭이 울면 함께 앉아 콧숨을 헤아리는 호흡법(數息)을 행하셨다. 남들은 겨우 밥 한차례 지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자세가 흐트러졌으나, 유독 선생만은 횟수를 낱낱이 헤아렸고 먼동이 트도록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先生相與執友同棲 鷄初鳴 共坐數息 他人纔過一炊皆失 獨先生歷歷枚校 向明不失 (南冥集 書景賢錄後) 한훤당의 도학적 풍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로 경자상소가 있다. 한훤당 김굉필은 경자상소에서 불상을 몰래 돌려놓고,‘불상이 저절로 돌아섰다.’고 거짓 선전한 원각사 중의 우두머리를 철저히 신문하여 시가에서 사형을 집행할 것과 나라의 생업을 좀먹는 승도(僧徒)의 숙정을 청하였다. 또한 언로를 열어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신하를 신문하지 말고, 사교의 우두머리를 처벌하시어 나라의 기강을 바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 귀양을 가 있을 때, 한훤당은 미개한 풍속의 교화에 힘쓰고 소학에 기초 한 유학사상을 펼쳐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기를 청하여 평안도의 학풍이 열리게 되었다. 한훤당 김굉필이 배소에서 행한 교육활동으로는 어천에서 찾아온 조광조에게 그의 학문을 전수함으로써 도학정치사상을 심어준 것이 주목된다. 한훤당이 평안도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된 뒤, 순천에서 한훤당과 사제관계를 맺은 최산두와 유계린은 16세기 호남지역의 사림 형성에 있어서, 그리고 한훤당 김굉필의 학통을 다음 세대까지 이어주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한훤당 김굉필의 학연이 최산두, 유계린 등을 거쳐 김인후, 유희춘 등에게 이어짐으로써 이후 호남 지역의 사림 흥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훤당의 학문과 사상이 호남지역에 접목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순천에서의 유배 생활에 기인한 것이지만, 유배지의 후진들에게 비친 그의 면모는 같은 배소의 동료와는 대조적이었다. 풍류를 즐긴 시문장가 조위와 달리 한훤당이 풍류 모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칙신 제향(飭身制行)의 엄격함을 알 수 있다. 한훤당이 순천 유배지의 유림사회에 남긴 교육의 영향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바, 수기 치인(修己治人)의 도학이념을 실천 궁행(實踐躬行)했던 한훤당 김굉필의 교육의지는 유배지 순천에서도 다름없었다. 또한, 한훤당의 교육사상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한빙계와 가범, 도동서원규목 등이 있다.‘한빙계’는 사헌부 감찰시절 수장령인 반우형에게 사제의 연을 맺고 써준 것인데 그 내용은 도덕적 정신 함양을 중시하고 있으며 학습하는 마음 자세로 항상 ‘주일부이(主一不二)’의 상태를 지니도록 하였고, 독서 할 때는 정독과 숙독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한훤당 김굉필은 개인별 능력에 따라 강독의 과정을 다르게 하였고, 교육방법으로 특히 주목할 것은 ‘소학’을 표준삼아 기초로부터 점점 높은 수준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배워나가는 ‘하학상달의 점전적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훤당의 교육의 방향은 고상한 이론보다는 일상생활의 몸가짐으로서 실천을 더욱 중시하고 있다. 한훤당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소학서에 제시된 규범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 아니라 한순간도 소학서를 놓지 않았으며 그의 생활은 소학의 실천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훤당은‘예기’의 내측편을 본떠서 가범(家範)을 짓고 의절(儀節)을 마련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되 훈계하는 방법으로는 인륜을 더욱 중하게 하였다고 한다. 남녀종들에게도 내외가 분명하게 하였으며, 그들 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맡기되 절하고 꿇어앉고 일하는 것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게 함으로써 가족과 전혀 차이가 없게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현풍 도동서원 강당 중정당에 게시되어 있는 도동서원 규목은 전체 8개조로 되어 있으며, 서원학규로서의 구성형태, 구성내용에서 볼 때 조선조 중기의 서원학규로서 잘 정비된 것이고 문경공 김굉필의 학문과 교육사상을 이어받은 강학공동제(講學共同體)로서의 서원임이 분명하다. 이 규목의 특색은 조항을 8개조로 묶어 그 자세하고 구체적인 금방사항(禁防事項)의 대부분은 그 밑의 항(項)으로 포함시키되, 그것도 느닷없이 금지조항을 내어놓은 형태를 취하지 아니하고 원칙이나 이상을 적극적으로 먼저 제시해서 그 실현에 방해되는 사항을 금지하는 표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서원의 중추적 기능을 교육(강습)에다 두는 근본 태도와 수미일관(首尾一貫)해 있다고 하겠다. 2. 도학자로서의 활동와 유묵 한훤당 김굉필은 제자인 정암 조광조와 함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덕치를 이상으로 하고, 민본을 향한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이른바 학문적 양심 곧 도학을 강조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음풍농월이 아니라 ‘以詩正心’시로서 마음을 바르게 하는 시들이 주를 이룬다. 한훤당이 남긴 시가 20편, 상소문1편, 제문2편, 일반산문인 한빙계 1편, 시조 1편이 전부이다. 하지만 이 자료도 퇴계선생과 같은 분들이 한훤당의 자료를 유추하고 추적한 끝에 정리된 자료이다. 한훤당 김굉필은 두 군데에 흔적을 남겼다. 금강산의 발령(髮嶺) 아래 송라암(松蘿庵)의 벽에는 '절구 한 수를 적고 김대유 이름 석 자를 새겼으며,' 개성의 영취산(靈鷲山) 현화사(玄化寺) 석탑에도 '이름을 적어 놓았다.' 남효온의「유금강산기(遊金鋼山記)」와 「송경록(松京錄)」에 전한다.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처하였다. 남효온의 증언이다. 김굉필은 손에서『소학』을 놓아 본 적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국가 일을 물으면 '소학동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으며,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다른 책을 읽었다.『사우명행록』 물론 서른살까지『소학』만 보았다는 것은 과장이다. 성종 8년(1477) 여름 김종직이 지도하는 선산향교 공부모임에서도 중국 상고의 사적이 실려 있는 '삼분오전(三墳五典)' 즉 『서경』을 열심히 읽었다. 또한 유호인이 김굉필에게 건넨 시에「상사(上舍) 김굉필이 선정암에서 역사를 읽다」가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역사책을 즐겨 하였을지 모른다. 상사는 대과를 준비하는 생원이나 진사를 일컫는 호칭이다. 김굉필은 호를 갖지 않았다. 처음에 '비를 만나도 겉은 젖지만 안은 젖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옹(簑翁)을 생각하였으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혼연(渾然)한 처세의 길이 아니다'고 하여 바로 취소하였다. 조식이 수집한 김굉필의 몇 가지 일화 모음인 「유사추보(遺事追補)」에 있다. 한훤당(寒暄堂)은 합천 야로현 처가 마을 개천 건너 바위 아래 지은 조그만 서재의 당호(堂號)였을 따름인데, 말년이 되자 사람들이 호로 삼았다. 한때 젊은 시절에는 거친 숨을 몰아 쉰 적이 없지 않았다. 여름을 못가에서 보낼 때 지은 「못가의 누각에서 읊다」를 보자. 月鎖無邊地 달빛은 끝없는 대지에 자물쇠를 채우고 池涵不住天 못은 머물지 않는 하늘을 머금었네 我來消畏日 내 이곳에 와서 여름날 보내니 絶勝馭冷然 빼어난 경치가 좋아 바람 타고 다님과 같구나 달빛이 대지를 가두고, 못은 하늘을 머금고 있다고 하였다. 자신의 뜻과 포부를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넓게 가져야 하겠다는 기상으로 읽힌다. 처가 마을에서 가까운 가야산에 올라가 공부할 때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가야산 옥명스님이 조성한 득검지(得劍池) 옆의 나월헌(蘿月軒)이나 조현당(釣賢堂)에서 지냈을 것이다. 그는 항상 고요하였다. 김굉필은 사교가 별로 없었다. 역시 남효온이 전한다. "일찍이 집밖으로는 읍(邑) 근처에도 나가지 않았다." 한동안 '농부 차림'의 초립(草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실제 농사도 지었던 모양이다. 유호인의「김굉필과 헤어지며」앞부분에 나온다.
萬本蒼髥抱壟斜 만 그루 소나무가 비탈진 밭두렁을 에워싸는 곳에 一區耕鑿長桑麻한 배미 땅을 파고 갈아서 뽕과 삼을 키우누나 경사지를 일궈 뽕나무를 심고 삼[麻]을 키웠던 것이다. 김굉필의 몇 편 되지 않는 중 수작으로 꼽히는「서회(書懷-회포를 씀)」는 세상과의 인연을 당분간 접고 살겠다는 심정을 읊은 것인데, 혹시 유호인에 대한 대답이었는지 모른다. 處獨居閒絶往還 홀로 한가롭게 사니 오고 가는 이도 끊기고 只呼明月照孤寒 다만 외롭고 차게 비추는 밝은 달을 불러보네 煩君莫問生涯事 그대는 번거롭게 나의 살림살이 묻지 말게 數頃烟波數疊山 두어 이랑 뜰을 메운 자욱한 물안개와 겹겹의 산뿐 김굉필은 말이 없었고 또한 자신을 숨겼다. 역시 남효온이 전한다. 김굉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도(道)가 더욱 높아졌는데, 세태를 돌이킬 수 없음과 세도가 실행하지 못함을 알고 빛을 숨기고 자취를 흐렸는데 사람들 역시 이를 알아주었다. 『사우명행록』 빛을 감추고 자취를 흐렸다는 도광회적(韜光晦迹)은 조조(曹操)의 참모들이 유비(劉備)를 미리 제거하려고 하자 재능을 숨기며 몸을 낮춰서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고사의 도광양회(韜光養晦)와 같다. 따라서 세상과의 인연을 접는 은둔(隱遁) 혹은 둔세(遯世)와는 차원이 다르다. 중국이 개혁과 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진하면서 외부세계에 알리지 않으려고 하면서 즐겨 사용한 단어가 바로 도광양회였다. 김굉필이 자신의 의사를 마냥 감춘 것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송도를 같이 유람한 신영희에게 절교를 선언한 적이 있었다.『연려실기술』「연산조 고사본말」의〈무오당적(戊午黨籍)〉에 있다. "남효온과 이총, 이정은, 허반은 청담(淸談)의 폐해를 입은 진나라 사습(士習)이 있어서 10년이 못가서 화가 미칠 것이니 그대들과 더 이상 왕래하지 않겠다." 일찍이 성균관에서 만난 후로 기맥을 통한 남효온이 세상을 거리낌 없이 비판하며 죽림우사를 결성하고 이총과 허반등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 못마땅하여 이들을 중국 동진 말기 청담파에 견주고 절교를 선언한 것이다. 일찍이 주희도 청담파를 '겉으로는 청고(淸高)하지만 실은 관직을 구하고 권세를 좋아하며 뇌물을 받았다'고 하며 질타한 바 있었다. 남효온 등의 비분강개가 초래할 위험에 대한 경고였지만 자못 심각하다. 훗날 문인과 후손이 여러 차례에 걸쳐 보완 편찬한 『경현록』에 시 12수와 부(賦) 1편이 전한다. 이 중 김맹성(金孟性)에게 올린 시가 네 수나 되는데, 전부 성종 9년(1478)에 지었다. 처외가인 성주의 가천(加川)에 들렸다가 그곳 출신 김맹성을 처음 만났다. 성주 가천은 김굉필의 생가가 있는 현풍과 처가가 있는 합천의 길목이라서 이후로도 자주 만났다. 젊은 시절 황학산의 능여사(能如寺)에서 김종직과 같이 공부한 평생지기이며 나중에는 사돈까지 맺은 김맹성은 지지당(止止堂)을 당호로 삼았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萬事無心學坐忘 만사에 무심하게 잡념 없애는 공부를 하다가 尋思止止牓新堂 깊이 생각하여 새 집 이름을 지지라고 지었네 自然泰宇天光發 우주는 자연이라 하늘의 빛도 절로라네 廣矣仁居義路長 광활하다 어진 삶이여 길도다 의로운 길이여 '지지(止止)'는 하늘을 보면 욕심을 그친다는 앙지(仰止)와 『대학』의 '멈춤(止)을 알아야 뜻을 정할 수 있다'는 다짐이 함께 담겨 있다. 성종 7년(1476) 김맹성이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조정에 나간 후 성종 9년(1478)삭탈관직당한 김맹성에게 올린「지지당에 올린다」라는 글이다. 徙隣欲向高陽地 이제 고령 땅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기겠으니 詩病時時得細鍼 틈나는 대로 시병에 가는 침을 놓아주소서 반가움이 앞서 '그동안 시문 짓기가 힘들었는데, 이제 경사(經史)를 연마하도록 따끔하게 가르침을 주소서' 한 것으로 들으면 그만이다. 두사람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김굉필의「마음을 적은 두 수를 지지당께 올리다」가 있는데 첫 번째가 이렇다. 日邊揮翰玉堂春 임금 곁 옥당의 봄날에 붓을 휘두르니 靄靄靑雲鬧後塵 푸른 구름 자욱하더니 뒤따라 먼지를 일으켰지요 嶺外枕書茅屋夜 영남에 와서 띳집에서 책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밤 娟娟孤月屬斯人 곱고 고운 외로운 달은 이제 저의 차지랍니다 김굉필은 위로와 사과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만 '조정에서 먼지를 일으켰다'고 하고 '외로운 달은 자기 차지이다' 하였다. 어찌 들으면 서운할 성도 싶다. 이렇게 읽힌다. '곤혹스러움에 예쁜 달마저 쓸쓸히 여기실 터이니 제가 대신 즐기겠습니다.' 김맹성은 긴장했다. 다음은 「김굉필에게」중 첫 수다. 灑落胸中物外春 깨끗한 그대 마음 세상 밖의 봄이로다
凌雲逸翮逈離塵 구름 뚫고 솟은 날개 속세를 떠났다네 爲問當時題柱客 묻노라 그때 기둥에 글을 적은 나그네가 누구였으며
須知他日棄繻人 다른 날 비단 버린 사람까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일세 앞 두 행은 김굉필이 세속에 뜻이 없는 듯 시원스레 살아가는 모습을 적은 것이리라. 그런데 후반 두 행은 다른 뜻이 깔려 있는 듯하다. 3행 '기둥에 글을 적은 나그네'는 촉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장안으로 가면서 다리 기둥에 '높은 수레를 타지 않으면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고 하였다'는 고사에 있고, 4행 '비단 버린 사람'은 한나라의 종군(終軍)이란 사람이 관문을 통과하며 증빙으로 받은 비단 한쪽을 '황제의 사절이 되면 비단 쪽지가 무슨 소용인가 하며 버렸다'는 고사를 옮겼다. 모두 장안에 들어가 출세하여 돌아온 내용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고사를 인용하였을까? 이런 뜻을 담은 것이 분명하다. '그대는 조정의 파란을 겪지 않으니 좋겠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강호에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니 우선 조정에서 뜻을 펼 생각을 하여야 한다.' 김굉필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이렇듯 성종 9년(1478) 한 해에 여러 차례 시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이후로 다시 시문을 교환하였다거나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해「연보」기사에 '이후로 문장을 짓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김굉필은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자 문하에 들었다. 처음에 곽승화(郭承華)와 같이 간 모양이다. 훗날 임진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고조이다. 예로부터의 관행에 따라 예물과 글을 바치는 속수집지(束脩執贄)의 예를 올렸을 것인데, 두 사람의 글은 없고 김종직의 「김·곽 두 수재(秀才)에게 답하다」두 수가 전한다. 수재는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이다. 김종직이 첫 수에 적었다. "궁벽한 땅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니 무슨 행운인가, 진주 같은 작품 현란하게 펼쳐 보이네." 반가움이 물씬하다. 다음은 두 번째다. 看君詩語玉生煙 그대의 시들은 옥에서 연기가 나듯 陳榻從今不要懸 이제부터 진탑을 걸어놓을 것 없겠네 莫把殷盤窮詰屈 부디 은나라 반경을 끝까지 캐물으려 하지 말고
須知方寸湛天淵 마음을 천연처럼 맑게 하여야 함을 알아야 할 걸세 진탑(陳榻)은 후한(後漢)의 명신인 진번(陳蕃)이 다른 사람은 받아주지 않으면서 오직 서치(徐穉) 한 사람만 오면 특별히 걸상을 내려놓았다는 '진번하탑(陳蕃下榻)'의 줄임이다. '그대들이 앉을 의자를 마련하겠으니 올려놓을 틈도 없이 자주 찾아오라' 한 것이다. 천연은 높은 하늘과 맑은 연못으로 『시경』「대아편(大雅)」'솔개는 솟아 하늘을 벗어나고 물고기는 못에서 뛰어놀고 있네'의 줄임이고,「반경」은 탕왕의 첫 도읍지가 홍수로 사람이 살기 어렵게 되자 천도를 단행한 반경이라는 임금의 업적을 서술한 『서경』「상서(商書)」의 편명으로 예로부터 난해한 글로 꼽혔다. 김종직은 난해한 글보다는 마음을 높고 맑게 가지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런데 정녕 「반경」이 난해하므로 캐묻지 말라고 하였을까? 내가 천도를 하려는 것은 장차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이어 가려고 함이지 너희를 위협하려는 것이겠느냐, 오히려 너희를 받들고 기르고자 함이다. 김굉필은 김종직에게 배우면서『소학』을 다시 살폈다. 주희의 문인인 유청지(劉淸之)가 초학자가 원시유교의 수행관(修行觀)과 성리학의 형이상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경전과 선현의 논설과 언행을 가려 뽑은 책이었다. 일찍부터 학자의 필독서로 장려하고 널리 보급하였지만, 여전히 『대학』의 입문서 내지는 과거 급제에 필요한 기초과목 정도로 치부되었었다. 김굉필 역시 벌써 『소학』을 독파했을 것이다.
김종직은 『소학』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의당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광풍제월'은 초목은 비 온 뒤끝 바람에 더욱 번득이며 달빛은 비가 갠 뒤에 더욱 맑다는 뜻으로 흔히 성리학적 우주론을 처음 제창한 북송의 대학자 주돈이의 쇄락(灑落)한 인품을 말한다. 주돈이가 창도하여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이르기도 한다. 성리학도 수신에서 시작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경현록』에 「소학을 읽고」가 있다. 業文猶未諳天機 글공부를 하였어도 아직 천기를 몰랐는데 小學書中悟昨非 『소학』에서 지난 잘못을 깨달았네 從此盡心供子職 이로부터 정성껏 자식 도리를 다하며 區區何用羨輕肥 이제 구차하게 좋은 옷 살찐 말을 부러워하지 않으리 천기(天機)는 우주자연의 미묘한 조화를 말한다. 근대의 자연과학적 천문학이 아니라 추상적 천명의 인식틀이다. 즉 인간의 근원인 하늘을 공부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제 비로소 일상적 도덕실천이 중요함을 깨달았다는 고백이었다. 3행 '정성껏 자식 도리를 다하며'는 주자학을 원나라의 국정 교학으로 삼은 대학자 허형(許衡)의 '『소학』을 신명과 같이 믿겠으며 부모와 같이 공경하겠다'는 어록을 인용하였다. '우리 임금이 요순이 되고 우리 백성이 인수(仁壽)의 영역에 들게 하는 기본이 『소학』에 있다'는 명언을 남긴 허형이었다. 수기가 곧 치인이라는 것이다. 김종직도 반가웠다. "이 말은 성인을 만드는 근기(根基)이니, 노재(魯齋) 이후 어찌 또 그런 사람이 없겠는가." 노재는 허형의 호다. 그런데 세 번째 행이「점필재연보」에는 '앞으로 절로 명교(名敎)의 즐거움이 있으리니'로 되어 있다. 인륜과 명분의 가르침을 오로지 추구하겠다는 뜻이니 맥락은 비슷하다. 혹여 '허형을 곧바로 인용하기 보다는…' 하며 고칠 것을 주문하였는지 모르지만 『경현록』의 표현이 절실하다. 김종직이 모친상을 마치고 조정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김굉필이 다섯 수를 올려 소망을 올렸다. 김굉필의 시는 전하지 않고 김종직의 답장 「김굉필에게」다섯 수만 전한다. 첫 수가 이렇게 시작한다. 白首叨蒙一札頒 백수가 외람되게 임금님 전교를 받았으니 幽居空寄讓廉間 시골에 살면서 청렴과 겸양을 내세울 것은 아닌 듯 君言醫國太早計 그대 나라를 고치라는 말은 너무 이른 계책이 아닌지 吾道從來骪骳難 우리 도는 예로부터 굽혀 있기도 어려웠다네 벼슬을 사양하고 은둔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에 조정에 나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의 나라를 고치라는 의국(醫國)의 계책은 아직 때가 아니다,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교의 이상은 구현에 앞서 보존하기조차 어려운 날이 많았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김굉필이 어떤 말을 하였는지 어렴풋이 살필 수 있다. 아마 조정에 나설 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마당에 이왕 나서실 것 같으면 나라를 고치는 일에 매진하여 주시라는 바람을 적었을 것이다. 다소 격렬하게 시대의 병폐를 지적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을 것이다. 또한 김종직은 도를 실현하는 일이 어렵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그럴 만한 힘이 없음도 토로하였다. 大事吾何敢擔當 대사를 어찌 내가 감당하리 膏盲從古少良方 고질병엔 예로부터 좋은 처방이 없었다네 細氈顧問如將備 장차 임금의 고문에 참여할 때에 要取君詩誦五章 반드시 그대 시 다섯 장을 외우리라 자신은 시대의 변화와 나라의 개혁과 같은 국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능력이 없음을 숨기지 않고 다만 '그대의 뜻은 잊지 않겠노라' 하였다. 김굉필이 열성적으로 건의하였다면 김종직은 무척 미온적으로 반응한 셈이 된다. 그러면서 셋째 수에서 "세간의 만사가 참으로 소가 싸우는 것 같다"는 말로 때가 되지 않았음을 말하면서 이렇게 당부하였다. 莫學韓公送五窮 한공이 오궁 보낸 것은 배우지를 말고 且同宋玉賦雄風 장차 송옥의 웅풍부 같은 글을 짓게나 '한공의 오궁(五窮)'은 한유가 자신에게 부족한 지혜, 학문, 문장, 운명, 교유 등 다섯 가지를 한탄하며 글을 지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송옥의 웅풍부(雄風賦)'는 초나라 굴원의 제자인 송옥이 초나라 임금의 교만과 사치를 풍자하며 지은 노래였다. '학문 지혜의 부족을 탓하거나 교유와 문장을 멀리하지 말고 세상과 임금을 향한 기상을 드러내라.' 이렇게 들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 간곡하게 건의할 것이 아니라 조정에 당당히 나서 임금에게 직접 주장하라.' 심상치 않다. 성종 16년(1485)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자, 김굉필이 시를 보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 전한다. 道在冬裘夏飮氷 도는 겨울에 가죽옷 입고 여름에 얼음을 마시는 것에 있는데 霽行潦止豈全能 비가 개면 가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을 완전하다 하겠습니까 蘭如從俗終當變 난초도 세속에 따르면 마침내 변하는 것이니 誰信牛耕馬可乘 이제 소가 밭 갈고 말을 탄다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뜻이 분명하다. 도는 일상으로 추구하여야 할 과제인데 지금 스승께오선 시세 탓만을 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하며, 그래서 지금 세상에서 스승이 변했다고 하니 누가 앞으로 말씀을 바로 따르겠습니까? 추궁한 것이다. 그런데 1행의 '겨울에 가죽옷 입고 여름에 얼음물 마시는 것'을 말한 주희의 의도를 세밀하게 살피면, 여기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일찍이 맹자는 존주(尊周)를 포기하고 도리어 제(齊)나라로 하여금 통일천하의 혁명에 나서도록 촉구하였는데, 이 때문에 북송의 사마광(司馬光) 등으로부터 존주를 향한 공자를 거역한 것으로 호되게 비판받은 바가 있었다. 이에 비하여 주희는 맹자를 옹호하였다. "공자는 주를 높였는데 맹자가 주를 존중하지 않은 것은 겨울에는 가죽옷 입고 여름에는 베옷을 입으며 배가 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즉 공자와 맹자가 살던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맹자는 존주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미 쇠락하여 명맥을 다해버린 주나라를 정성껏 지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앉아서 그 화를 끊임없이 당하게 만들어서 어찌할 것인가!' 만약 김굉필이 이러한 뜻을 담고 적었다면 '나라에 대한 충성, 임금에 대한 충성도 세도를 실천한 다음의 문제이며,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편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한 셈이 된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싸늘한 비판적 풍자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믿고 친한 사이라도 수용하기 쉽지 않은 풍간(諷諫)이었다. 김종직은 당혹스러웠다. 답장을 보냈다. 分外官聯到伐氷 분수 넘치는 벼슬이 이어져 얼음을 깨게 되었으나 匡君捄俗我可能 임금 바르게 하고 풍속 고치는 일 어찌 할 수 있을까 從敎後輩嘲迂拙 가르침 따르는 후배가 날 보고 못났다고 조롱하지만 勢利區區不足乘 시세와 이해를 따라 구차하게 편승하지는 않으리니 김종직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후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고, 또한 시세에 아부하며 이해득실에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척 서운하였다. 김굉필의 도발과 같은 비판, 쉽지 않는 사건이었다. 이런 사실이 널리 퍼진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리라. 그런데 남효온이 어떻게 알았을까? 『사우명행록』에 두 사람의 시를 옮기고 '마침내 갈렸다'고 적었다. 이듬해 성종 17년(1486) 이런 일이 있음을 알게 된 김일손은 무척 서운하였다. 「김굉필이 점필재선생께 올린 시를 따라 짓다」를 다섯 수나 지어 보냈는데 다음은 첫 번째다. 夏蟲那可語寒冰 여름 벌레 어찌 차가운 얼음을 말할까 大聖猶謙一未能 대성도 겸손하면 오히려 하나도 할 수 없는 일이 있거늘 欲識古人無犯隱 옛 사람은 은밀함을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았으면 하니 莫將牛馬說耕乘 앞으로 우마더러 밭 갈고 탄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성인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스승의 잘못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들춰내는 법은 없다고 항의한 것이다. 맹자가 성인이지만 제나라의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넌지시 비친 것도 같다. 김굉필은 모른 척하였다. 오히려 진주향교 교수를 자청한 김일손을 지켜보며 좋아하며 널리 알렸다. "김일손은 교수하는 근본을 깊이 체득하여 교학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부친상을 마친 다음 성종 21년(1490) 여름에는 가야산에도 같이 올랐다. 김굉필은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였다. 「길가의 소나무」이다. 一老蒼髥任路塵 늙은 소나무 하나 길가에 먼지 뒤집어쓰고 勞勞迎送往來賓 괴롭게도 오가는 길손을 맞이하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찬 겨울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을 經過人中見幾人 지나는 사람 중에서 몇이나 알 수 있을까 공자의 '차가운 겨울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나중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어록을 생각하며 지었을 것이다. 혼탁한 세상에 나의 곧은 뜻을 훗날 알리리라 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를 피력한 것이다. 소나무가 밀양에 있다고 하는데 김종직을 배알하고 오는 길에 지었을지 모른다. 김굉필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후진 양성의 길이었다. 남효온이 전한다. 김굉필이 후학을 불러와서 정성껏 쇄소(灑掃)의 예(禮)를 집행하니 육예(六藝)를 닦는 학자들이 앞뒤로 가득하였다.『추강냉화』 쇄소는 바른 행실의 기본으로, 배우는 사람은 바로 제집부터 쓸고 닦는 일부터 시작한다는 『소학』의 가르침이며, 육예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로서 과거시험과는 거리가 있는 기본교양이었다. 김굉필은 사람됨의 도리와 행실 그리고 선비의 덕목을 가르친 교사이며, 사숙(私塾)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는 아예 현풍의 모친까지 모시고 한양에서 터를 잡았다.
성종 22년(1491) 이심원이 강학 장소를 찾은 적이 있었다. 이때 지은「김대유에게 주다」가 전한다. 이심원은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 吾子固囂囂 그대는 본디 욕심 없이 세상 걱정하면서 세상을 위하여 강학에 열중하는 모습을 거문고 연주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많은 후진이 모이니 우리 동지의 힘이 커질 것을 기대하였다. 한 구절이 다음과 같다. 聽者日以多 듣는 사람 많아지고 我地日以廣 우리 터전 넓어가니 金聲與玉振 금성옥진이 아닌가 也應在吾黨 이제 우리 동지에게 보이리라 옛적에 악기를 연주할 때 처음에는 쇠북을 쳐서 시작하고 옥으로 만든 경쇠로 마무리한다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은 맹자가 '백이(伯夷)와 이윤(伊尹)과 유하혜(柳下惠) 세 성인을 집대성하고 때에 맞추었으니 시중(時中)의 성인이다'라고 공자를 찬양하면서 '쇠[金]로 소리를 내고 구슬[玉]로 거두었다'고 한 구절을 옮긴 것이다. 『맹자』「만장하(萬章下)」에 나온다. 김굉필을 공자에 비유하였으니 극찬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이심원은 남효온과 같이 왔다. 아마 김굉필과의 불화를 잊으라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효온은 서운한 감정을 풀지 않았다. 임종에 즈음하여 김굉필이 찾아오자 등도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세 수가 있는데 첫 번째가 이렇게 되어 있다. 靑丘文獻邦 청구는 문화가 높은 나라 古來多文士 예부터 문사가 많았지만 雕蟲競自售 조그마한 글재주를 내세우며 우쭐댈 뿐 未有尋至理 지극한 도리를 찾지 못하였네 大道終不泯 그래도 큰 도가 없어지지 않아 夫子生南紀 선생께서 남녘에서 실마리를 잡으셨다 龍門倡道學 용문에서 도학을 창도하니 從者相繼起 따르는 사람이 잇달아 일어났다 우리나라 학문은 문장을 위주로 하여 성리학의 근본이치를 몰랐는데 김굉필이 새로운 도학의 학풍을 열고 문파를 세웠음을 찬양한 것이다. 7행의 용문은 인망이 높은 귀인이지만 김굉필이 잠시 강학한 양평의 용문산일 수도 있다. 그리고 둘째 수에서 이렇게읊었다. 中間各分散 중간에 각자 흩어졌으니 利欲甘自毁 이욕으로 스스로 허물어짐이라 많이 모인 후학이 갑자기 흩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굉필의 낙향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인데, 혹여 과거시험을 생각하며 찾아온 제자들이 싫증을 냈거나, 김굉필을 시기한 임사홍과 같은 무리의 견제와 규찰이 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현손은 김굉필이 떠나면 정녕 의지할 스승이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북받쳤다. 평소 따르던 이심원은 '공신은 물러나야 한다'는 상소로 일가의 미움을 받고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고, 호방하고 거칠 것이 없이 살았던 남효온이 세상을 떠난 마당이었다. 셋째 수에 담았다. 醒狂老丘壑 성광은 깊은 계곡에서 늙어가고 秋江長已矣 추강이 세상 떠난 지 오래인데 先生今又去 선생 또한 가버리면 小子竟何倚 소자는 어디에 기대야 하는지 성광은 이심원, 추강은 남효온이다. 김굉필은 현풍과 합천을 오가며 지났다. 한때의 도전과 성취가 그대로 묻히는 듯하였다. 깊은 침묵에 젖어들었다. 그렇게 1년…… 성종 25년(1494) 겨울 경상감사 이극균(李克均)이 김굉필을 천거하였다. "성리학에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집중하며 행실과 실천이 반듯하다." 한양의 남부참봉(南部參奉)이 되었다. 40세 때였다. 정예관료라면 맡을 수 없는 미관말직이었지만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1년 후, 전생서(典牲暑)와 군자감(軍資監) 주부를 거쳐 사헌부 감찰과 형조좌랑으로 옮겼다. 그래도 겨우 정 6품이었다. 김굉필은 묵묵할 뿐 드러나지 않았다. 사림파와 국왕 및 훈구대신 사이에 대립구도가 확연하던 시기였음에도 어떠한 주장이나 언론을 전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료사회의 악습으로 신참에게 이상한 옷을 입히고 여러 가지 유희를 시키는 '귀복백희(鬼服百戱)'도 마다하지 않았다. 훗날 조식(曺植)은 '보통 사람과 다르게 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이해하였다. 연산군 3년(1497) 정월 예종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친동생인 한환(韓?)의 불법축재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사헌부 감찰의 직책을 수행한 것이지, 처음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낸 사안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환이 외척이었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조사했다는 징후도 없다. 또한 여러 사람과 활발히 교유 하였던 것도 아니었다. 김굉필이 갑자사화로 참형을 당하자 세월이 무서워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고 지었던 반우형의 조시(弔詩)「사화를 통곡한다(哭史禍)」서문에 나온다. 지금의 사습이 동한에서 절의를 내세우던 때와 흡사하여 기이한 화가 닥칠 것 같아 전일 동지와 많이 절교하였다. 동한 말기 절의의 선비들이 환관에 반대하다가 '당고(黨錮)의 화'를 당한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김굉필은 위기가 닥치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서운 참화가 있을 것을 예견하였던 김일손의 시국관과 거의 같았다. 김굉필은 한때 벼슬을 사임하고 현풍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임사홍의 아들이지만 부마가 된 형들과는 달리 김종직의 문인으로 학문을 갖춘 임희재(任熙載)가 이목(李穆)에게 '권오복도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이며, 김굉필도 이미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났음'을 알렸는데, 권오복이 연산군 2년(1496) 초에 합천현감으로 나갔으니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다. 무오사화로 압수된 편지에 나오는데 『연산군일기』4년 7월 14일에 있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올라왔다. 이즈음이었을 것이다. 신영희에게 권유하였다. "동한 말기와 같은 환란이 박두하였으니 속히 숨으라." 김굉필의 말을 듣고 직산으로 내려가서 훗날 기묘사림의 주역의 한 사람인 김정(金淨)등을 가르치며 여생을 마친 신영희가 지난 시절 사우를 회상하며 지은『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에 나온다. 그러면서 자신은 '정녕 진퇴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 혹은 '나 같은 사람은 진실로 화를 면할 수 없다' 하였다. 조식의「유사추보」가 전한다. 왜 돌아왔으며 떠나지 않았을까?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문종 치세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지냈던 최덕지(崔德之)(김총 부호군의 장인/ 서흥김씨 호남파 파조)를 모신 사원으로 그의 손자인 최충성(崔忠成)도 같이 모시고 있다. 문종 치세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는 영암 영보촌으로 낙향에 즈음해 성삼문ㆍ유성원ㆍ신숙주 등이 지은 시가 한 권에 이를 정도로 젊은 학인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다. 박팽년은 발문에서 '한 세상을 움직일 만한 공명과 부귀를 가졌더라도 변변찮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낮추고 겸손하여 자시 자신도 가눌 수 없을 듯해도 천하 후세의 인망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 있다' 하고, 후자의 인간상이 바로 최덕지라고 추앙하였다. 최덕지의 손자인 최충성은 김굉필보다 네 살 연하이지만 제자로 입문하여 '재질이 많고 행실이 독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의 문집『산당집(山堂集)』에 있는「정명론(正名論)」「성인백세사론(聖人百世師論)」「일언흥방론(一言興邦論)」등을 보면 그의 공부가 깊고 촘촘하였음을 말해준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지어 조정을 비방하고 국정을 논란하였다'는 죄목에 걸렸다. 양희지가 위로하였다. "반드시 살아 돌아올 것이니 응당 웃음 머금고 길을 떠나시고 부디 곤궁과 횡액 중에도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겠네." 유배지는 평안도 희천이었다. 묘향산을 넘어 청천강 상류에 있는 깊은 산중 고을이었다. 얼마 후 이의무(李宜茂)가 이웃 고을 어천역으로 유배를 왔다. 김굉필이 첫 벼슬로 남부참봉을 받았을 때 '행실과 학문이 있는 선비에게 참봉을 시키는 것은 유일(遺逸)을 찾는 본래 취지가 아니다'고 건의하여 전생서 주부로 옮기도록 배려한 인연이 있었다. 이의무가 반가워, 同來聊把手 같이 왔으니 잠시라도 손을 잡고 一別各傷神 각자 서로 아픈 상처를 씻어내자 하는, 시를 보냈다. 겨울이 오는 길목이었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있다가 김굉필을 방문하였는데 재미있는 소문이 들렸다. 그래서 지은 시가「김굉필이 어린낭자를 어여삐 여기다 수염을 많이 뽑혔다고 하니 놀리다」이다. 네 수나 되는데, 그중 처음이다. 幾許塵籠困未閑 먼지에 쌓인 피곤함에 틈도 없었을 것인데 天敎高臥塞西山 하늘을 가르치며 높이 누어 서산을 막고 있다가 最憐越女多情思 미인을 무척 예뻐하여 많은 정을 주고 있으니 留著騷人一笑間 두고두고 드러내 시인묵객의 웃음에 부치려네 배우는 학생은 무척 근엄하다고 여겼겠지만, 배우려는 생각이 없는 낭자는 김굉필을 무던히도 편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의무가 '운우지정(雲雨之情)'이라도 나누려는 것 아닌가, 놀린 것이다. 무서운 세월을 녹이는 미소가 절로 나오는 편한 글이다. 도학의 도통을 이은 대학자로서 왜? 이렇게 남긴 글과 문집의 자료가 적은가? 도학자로서 시와 문장을 짓는 일엔 몰두하지 않고 마음을 수양하는 도학에 몰두 한 영향과 당시“사화”로 한훤당선생이 김종직의 문도로 몰려 순천의 유배지에서 효수라는 참형의 화를 당하고, 자녀들은 태형과 귀양을 가고 재산을 적몰당하다. 보니 화를 두려워한 부인 순천박씨와 제자들이 문집과 서간문을 불태워 버렸고, 그 후 신원이 되어 퇴계선생과 퇴계의 제자인 순천부사 이정. 후손등이 자료를 일부 복원하였으나 자료를 보관하고 있던 종가와 도동서원의 전신인 쌍계서원이 선조 30년(1597년)정유재란으로 모두 소실되어 더욱 자료를 보관하지 못한 이유라 할 수 있다. 일부 자료는 외증손인 한강 정구선생과 후손인 김하석공등이 복원하였고 또한, 후학들의 문집이나 국가등의 편찬 계획에 의하여 자료가 복원되었다. 하지만 우리 역사상 도학을 개창한 분, 동방오현 중에서 첫자리에 있는 인물이다. 퇴계선생도 일찍이 한훤당을 가리켜‘近世道學之宗 ’라고 평했을 정도로 영남사림이라는 뚜렷한 경계를 마련한 인물이라 하였다. 그에게 오늘날 다시 찾아야 할 인간의 매력은 무엇일까? 아마도 '빛을 감추고 흔적을 숨기며 미래를 설계하는 진중한 포부'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을 밝히기란 쉽지 않다. 생애가 무척 단조로웠고,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배와 죽음 직전의 최후 몇 년을 제외하곤 극적 요소나 일화가 거의 없다. 3. 성장 환경과 생애 1) 한훤당은 본관이 서흥김씨로 서울 정릉동(지금의 덕수궁서쪽 정동)에서 태어났는데, 경상도와 인연한 것은 19세 때 경남 합천군 야로면 말곡 남교동에 사는 순천박씨의 집에 장가를 들면서이다. 이후 조그만 서재를 순천 박씨의 집옆 개천 건너의 작은 바위아래에 짓고 이 서재의 이름을 한훤당(寒喧堂)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충좌위 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인 청주한씨이다. 그의 선조는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는데, 증조부인 중곤(中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게 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 개국공신 조반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었는데,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분발하여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근기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처가), 성주의 가천(伽川: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한훤당이란 호가 원래 김굉필선생이 머물던 서재 이름이다. 한훤당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가야산을 오가며 성주의 처외가 인근에 있던 지지당 김맹성에 공부를 했고, 21세에 김맹성의 사돈인 점필재 김종직을 찾아가는데, 이 때 김종직과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33살 무렵에 스승과 결별한다. 스승과의 절의는 스승인 점필재가 이조참판이 되었지만, 조정에 건의하여 실시한 것이 없자 이것을 풍자하여 시를 쓰는데, 이것을 두고 점필재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퇴계선생은 “(두 사람이) 갈라졌다고 말한 것은 틀리지 않다. (…) 학문하는 방향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갈라질 수 있다.(…) 점필재 선생은 문장을 제일로 삼았는데, 한훤당은 인간의 의리를 제일로 여겼다”고 한 것에서 한훤당이 심성수양을 제일로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한훤당의 학문적 지향점이 최고로 드러나는 것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인데, 갑자사화(연산 10년 1504년) 때 형장으로 나아갈 때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손상되면 안된다.고 하고 수염을 물고 형장으로 나아갔다.고 하는데서 볼 수 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고,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성격은 잘 나타나,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2) 조상을 무조건 훌륭하게만 그리는 일은 그들을 마구 깎아내리는 일 못지 않게 위험한 짓이다. 구린내 나는 역사에 향수(香水)를 뿌리는 일이 아니라,‘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으면, 버릴 것을 배우는 것이다.(신봉승 선생이 지은 책『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에서) 우리나라에 대개 성씨가 부여된 것은 3국의 건국신화와 관련하여, 왕의 성이 창성되고 이 과정에서 각부 지역의 씨족이나 촌장에게 왕이 성씨를 賜姓함으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고려조에 와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賜姓의 역사는 왕권의 확립과 함께 공신들에 대한 포상과 외국인의 귀화성씨가 있으며, 이는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어져 왔다. 그 후 공신이나 포상의 의미로서 봉군이 되면 그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거나 지향에 따라 분관이 되어 나갔다. 따라서 현재의 본관은 지향의 토성을 따른 호족의 후손과, 봉군이 되어 지역의 땅을 왕으로부터 하사받아 지방관으로 자리하면서 후손이 그 고향에서 자리한 경우와 그 후손이 선조의 봉군을 관조로 하여 관향으로 삼은 경우와 본군을 분파로 하여 중시조로 삼은 경우가 있다. 서흥김씨는 신라 경주김씨의 후손으로 대안군(김은열)의 4자 렴(김해김씨(김해군)의 후예로 수성김씨(김품언/수성군)로 관향을 써오다, 서흥김씨 시조인 김보공의 손자인 천록이 고려조에 일본원정과 도원수 김방경(안동김씨 중시조)을 도와 서흥군으로 봉하여 짐으로 본인을 시조로 할 수 없다하여 할아버지를 시조로 하였다고 한다. 남한에 약 30,000명의 후손이 살고 있다. 이때부터 관향이 수성김씨(현재 수원김씨)에서 서흥김씨으로 바뀌, 수원김씨의 족보에서 사라졌고, 그 후손에 대한 기록이 書興金씨로 분관 표기가 되어 경주김씨(김해김씨로 분관)되고, 김해김씨(현 김녕김씨)에서 수성김씨(현 수원김씨)로 분관되었다가 수원김씨 족보에 3세 천록이 서흥군에 봉군되어 기록을 남기고 수원김씨 족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경순대왕의 4자인 대안군 은열공의 4자인 김렴으로 이어저 -> 장자인 김품언 -> 차자인 순보 -> 차자인 세우 -> 장자인 김보로 이어진 서흥김씨로 가기 까지의 가계를 잠간 살펴보면 은열(殷說(경순대왕의 4자로서 고려국 왕건의 외손자로서 고려국의 왕권을 확립한 광종의 처남이자 누나(낭랑공주)의 장남으로 생질이다.) -> 렴廉(염)은 역시 광종의 처 조카로서 호족을 숙청할 때 핵심인물로 지목된다. -> 품언(稟言)은 거란군의 토형의 공로로 수성군으로 봉하여 지고 왕으로부터 수성군을 하사받아 지방관을 봉임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손들이 아직도 옛 수성군인 지금의 성남 수성구 단대동 일대에 사고 있는 김성골이 있다.(지금의 수원시 이의동에는 김방경의 후손인 안동김씨의 집성촌이 있다. 최근 수원 광교신도시의 개발로 이산되었다.) - 순보(順輔)는 중서령(中書令: 고려때 서무를 총괄하고, 중서문하성의 종1품)을 하였고 - 세우(世羽)의 형인 세익은 좌승선(정3품)을 한 것으로 보아 세우도 관직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이 없다. - 보(寶)(서흥김씨 시조 1세)는 청룡위 중량장으로 - 덕인은 청용위 장군 - 그 아들 천록이 상장군 서흥군에 봉하여져 서흥김씨를 사성하게 되었다. 서흥김씨의 족보는 영조7년(1731년)에 간행된 신해보가 처음으로 간행된 족보이다. 이후 8차의 수보가 있었다. 3) 한훤당 할아버지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선생이 말하기를 서흥김씨는 안동김씨와 함께 경주로부터 계출되었고, 본도 같았는데, 서흥군(김천록)이 상락군(김방경)과 더불어 각기 봉읍을 받았기에 관향을 달리 하게 되었다. 라고 서흥김씨 보감 문헌고적편에 기술하고 있으며, 천록의 아들 세구(世丘)가 판도판서를 지냈으며, 손자 봉환(鳳還)은 1353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에 올라고 대사성공(봉환)이 복주(지금의 안동)자사로 있을 때,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임금의 행차를 복주로 옮기자, 공은 관민들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받들고 성을 굳게 지킴으로 적도를 막아 안녕을 이룩하니, 공민왕이 어필로 포서하고, 상으로 300명의 노비를 내리며 복주를 안동이라 개칭하였다. 또한 직위를 안집사로 하여 사패문서를 내렸으나 판사공의 부인 송씨가 과부로 홀로 살다. 無子할 때 모두 잃어 버렸다고. 한다. 甲戌년(1634년)년에 금산에 살고 있는 김응택(金應澤)이 현풍에 와서 말하기를 자기 선조는 중량장 김보의 형제로서 위로 5대가 보첩에 실려 있다.고 말하였다. 족보가 확정하지 못한 부분은 불행한 과거사의 흔적이 아닐 수 없다. 고려조 초기에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고려조의 태조 왕건(877-943, 재위 918.6-943.5 (25년))이 부인 29명 자녀 25남 9녀를 두고, 919년 43세에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각지역의 호족에 대한 융화정책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북진정책, 그리고, 백성을 순화할 정책으로 불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건국 이념으로 삼았다. 당시의 풍습은 경순왕의 백부 억렴의 딸이 왕건에게 출가를 하여 왕건에게 바쳐지고, 왕건은 그 답례로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받쳤음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정략적으로 신흥 왕조인 고려국의 국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략적인 결혼이 성행하고, 근친혼이 이루어 졌다. 자녀를 예물로 바치듯 서로 통혼을 함으로 귀족 세력을 규합하고 근친간 통혼을 함으로서, 귀족세력의 결속력을 다져 가는 과정에서 잦은 행패가 왕권을 위협하게 되고, 외척 세력의 세력화가 왕건 왕의 많은 자녀들을 권력싸움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국가가 어지러워 질 수 밖에 없었으며, 그 후 943년 왕건은 67세에 후손들에게 <훈요십조>를 내리고 세상을 떠난 후, 아들 광종(왕소 925-975 재위 949.3-975.5 (26년 2월)부인 2명, 자녀 2남3녀 ★3자(50세졸))이 호족세력들을 숙청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 이후,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큰누나의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 (937년 출생 1028년(고려 현종19년) 3월 4일 졸)등을 이용하였을 것이며, 대안군 김은열은 외숙의 후광을 입었을 것이며, 그 아들들이 신흥세력으로 등장하였을 일은 자명한 일이다. 경순왕에게는 아홉 아들 이외에 세딸이 있었는데, 첫째 딸은 제5대 경종의 왕비 獻肅夫人이 되었고, 낙랑공주는(왕건의 장녀로 혜종부터 광종4대 왕의 큰누이가 된다.) 따라서 낙랑공주는 광종과 남매간이자 사돈간이 되고, 대안군은 광종의 생질이자 경종과 외사촌 형제 및 처남 매부지간이 된다. 대안군의 아들들은 경종의 처 조카이자 생질이 된다. 훗날 족보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주김씨 가문에서 신라가 멸망함으로 하여 마의태자 김일 처럼 울분을 토하며, 성씨를 개명하였거나 경순왕의 후손을 주장하면서 대안군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경주김씨 문중을 통틀어 보면 대안군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문중이 주류를 이룬다. 그 이유는 공신이 되어 왕으로부터 녹봉을 받아 봉군이 된 자가 많았고, 그 후손이 조상의 봉군을 관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무신정권(문신경시와 왕권을 유린하는 과정에서 기록을 은폐하고, 당시 사회풍습이 먹고 사는 일과 국가 이념인 국교가 불교에 의존하다 보니, 백성들은 글을 알지 못하여 구전에 의존하였을 것이리라. 그래도 구전에 의한다면, 할아버지와 손자는 얘기를 하였을 것이고, 손자가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는 구전이 가능할 것으로 100년 정도는 구전으로 후손에게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교육학적으로 풍습과 민족성이 교체되는 시기를 약200년을 봄) 이씨조선이 고려 왕권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고려 태종에 의하여 고려조의 문헌과 기록이 소실되고, 고려조의 흔적지우기라는 과거사가 또한, 족보 바로 잡기에 어려움을 더 주고 있을 것이다. 4) 한훤당 김굉필과 서흥김씨 가문에 대한 자료가 임진왜란과 한훤당 김굉필공이 김종직선생의 문하라, 하여 사화에 연루되고, 그 자제들이 장배를 당하여, 복권되기까지 서흥김문의 가계에 관한 자료나, 글과 그림에 한훤당 할아버지가 능하였다. 는 기록은 있어나 그의 글과 그림이 멸문지화로 인하여 불태워 지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훤당 김굉필공의 묘소에 있는 신도비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위에 덮는 것은 하늘 하나 뿐이요, 아래로 싣고 있는 것은 땅하나 뿐인데, 道는 그 중간에 있어서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두 가지로 되지도 아니한다. 이미 옛(古)과 이제(今)가 없는데 어찌 중국과 외국의 구별이 있으랴. 사람으로서 이를 구하면, 곧 스스로 깨달아 지게 된다. 道라는 것은 무슨 道인가? 그 타고난 양심을 따르는 것이다. 먼곳에 가려면,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여야 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 회옹(주자)이 소학을 지었으니, 이는 성인이 되는 기초요. 光風 齊月이란 말로 스승은 나를 깨우쳤네, 가슴으로 간직하고, 몸으로 실천하여 오늘 에야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 행함이 일상생활에서 떠나지 않고, 미묘하게 하늘의 이치와 합치한다.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뻗고 근원이 깊으면 샘이 솟아 난다. 체험을 통하여 이를 꿰뚫어며 끝까지 연구하여 모든 것을 알았다. 잊지 아니하고 조장하지 아니하며, 지나치는 것도 모자라는 것도 없었다. 후손 쾌식은 삼가 애도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한다. 공께서 51세라는 나이가 아니라, 참형을 당하지 않고 좋은 세상을 만나 좀더 천수를 누렸더라면 학문을 완성하셨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공자님께서도 57세에 천하주유를 하여 69세 고향에 돌아 올 때까지 12년의 천하 주유가 유학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못다 남긴 그 뜻은 침묵과 소통으로 미로를 찾으라는 숙제인가!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단 한편의 부(賦), '추호라도 태산과 견줄 수 있다'는「추호가병태산부(秋毫可竝泰山賦)」가 있다. 이종범 교수가 이 부(賦)를 읽고 이런 글을 남겼다. 추호는 형체와 외관만 보면 보잘것없는 무의미한 존재이며, 태산은 웅장한 외형 때문에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의미의 존재였다. 그래서 흔히 현상의 천차만별을 추호와 태산으로 비유하곤 한다. 먼저 현상은 다르지만 본질 혹은 원리는 같다고 하였다. 5) 瑞興 金씨 寒喧堂(한훤당)의 家訓 그가 그의 자제들에게 훈계한 가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너희들은 마음으로 공경하며, 두려워함을 가지고, 감히 게으른 생각을 가지지 말며, 혹시 자기를 비난하더라도 절대로 따지지 말라」 둘째,「남의 나쁜 점을 말하는 것은 피를 입에 물고 남에게 뿜으면 내 입이 먼저 더러워지는 것과 같으니, 너희들은 이 말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 셋째,「관습에서 생기는 성격(性)은 조급하며, 타고난 천성은 바른 것이니, 천성을 따라서 이를 인도하여야 조급한 것이 바르게 되며, 바른 것이 밝아진다」 넷째,「오늘에 당연한 이치대로 행하고 내일에 당연한 이치대로 행하여 일상 생활에 당연한 이치대로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다섯째,「도란 것이 어찌 별다른 것이냐. 아들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마땅히 충성할 것이며, 나머지도 모두 이에 따라서 행하여 간다면, 모든 사물이 일상 생활에서 당연한 이치가 아님이 없을 뿐이다」 이로 인해 20여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으며, 유배지 교육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 복상(服喪)·솔가(率家)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한훤당의 가범(家範)’이라 하여 숭상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4. 문묘배향과 도학의 창시자로서의 시대적 배경 15세기 후반 훈구파의 권력은 세조의 정변과 찬탈을 끌어낸 만큼 그 장벽은 높고도 두터웠다. 그러나 16세기 기성 권력은 신진세력과 경쟁해야 할 정도로 권위와 역량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궁중정치의 음모와 배신이 기승을 부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정치의 주요 영역인 언론과 기록, 학술과 문장이 처한 여건이 너무 달랐다. 결코 공개적으로 건드릴 수 없는 세조 찬탈이라는 금기의 족쇄에 감긴 15세기 후반이야 말로 억압과 쇠락의 시대로서 말과 글이 비장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희망을 향한 교류와 소통은 먹빛으로 남았다. 이에 비하여 죽음과 맞바꾼 도전의 불꽃을 등대삼아 길을 살핀 16세기는 여러 면에서 해빙과 확산의 세월이었다. '도가 마침내 동쪽으로 왔다'는 '도과동(道果東)'의 뜻이 있는 도동서원은 선조 원년(1568) 비슬산 아래 쌍계동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8년(1605)에 이곳으로 옮겼다. 서원 앞 큰 은행나무는 조식과 이황의 문인으로 김굉필의 외증손이 되는 정구(鄭逑)가 심었다. 기록에 드러난 행적을 중심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학술적 문장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조정과 국왕을 비판한 적도 거의 없으며, 천거로 나선 조정에서 관직도 높지 않았으며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사실에 김굉필이 곤혹스러울 것이다. 또한 현란한 언변을 과시하다가 간혹 무거운 침묵을 겹칠 줄 아는 수사적 처세술을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날카로운 언변과 순발력 있는 논설을 내세운 적이 없는 김굉필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맥락에서 그의 언행과 침묵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그의 묵언과 과문(寡文)이야말로 내일과 호흡하며 미래를 설계하기 위하여 빛을 감추고 흔적을 숨겼던 고육책이었구나, 할 것이다. 김굉필 사후 13년, 그리고 '박경 옥사' 10년. 중종 12년(1517) 8월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으로 정몽주가 '동방 도학의 효시'라면 김굉필은 '성리학의 연원을 찾아낸 오직 한 사람으로 만세의 사표'라는 주장을 올렸다. 두 사람의 문묘종사를 건의하는 상소였다.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조광조, 김식 등 신진세력의 뜻이기도 하였다. 집권실세인 정광필·김전·남곤·심정 등은 반대하였다. "김굉필은 힘들게 절개를 지키고 깨끗하게 몸을 닦은 고절(苦節) 청수(淸修)의 선비일 따름이다." 김굉필 종사론이 신진사림의 세력 확대로 연결되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정광필은 '김굉필 종사론'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성리학의 정파(正派)를 얻은 현자'라고 치켜세웠었다. 자제를 김굉필에게 보내 배우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웃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지만 도(道)를 밝혔다고 하는 장소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정치적 이해득실로 말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공자의 학문을 밝게 들춰낸 적이 없다' 혹은 '글로 밝혀 후세에 전한 입언수후(立言垂後)의 공이 없다'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왜 글이 없으며, 무엇을 가르쳤는가는 애써 함구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조광조 등은 공자의 참뜻을 잠심(潛心) 혹은 전심(專心)하며 실천한 점을 내세워 반격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학술의 구체적 성과가 드러나지 않음을 달리 변명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정몽주만 종사하고 김굉필을 제외하기로 결론이 났고, 기묘사화 이후 더 이상 제기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김굉필과 김종직의 차별화가 진행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개성의 산사에서 같이 공부한 기준(奇遵)이 처음 밝혔다. 김굉필은 처음에는 김종직에게 수업하여 그 문호를 조금 알았지만, 송나라 유현이 남겨준 단서는 자득(自得)하였으며, 평소에 정도(正道)를 닦은 공(功)이 지극하였기에 사림들이 사모하여 착한 마음을 일으켰고 다투어 본받고자 하였다. 『중종실록』 12년 8월 8일 김굉필이 김종직에게 수업하였지만 송학의 참뜻은 스스로 얻었으며, 또한 존재로서 후진을 분발케 하였다는 것이다. 기준은 사도(師道)의 본질과 진흥을 묻는 책문(策問)에도 이렇게 답한 바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세의 스승으로 최충·이색·권근·김종직을 말하지만 최충은 공맹의 학문이 아니고, 이색은 문사(文詞)를 예쁘게 가꾸고 이록(利祿)을 취하고자 하였으며, 권근은 이학의 종장이라고 하지만 입신과 사업이 비루할 뿐이며, 김종직은 정몽주를 도학의 비조로 삼고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지만 사도를 진기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입사도(立師道)」 최충·이색·권근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도학을 전수한 김종직조차 스승의 길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고 평가한 것이다. 기준이 생각하는 참 스승은 문장과 과거 수업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실천을 인도하는 데에 있었다. 즉 학자의 천선(遷善)이라는 진정한 책무의 차원에서 살피면 김종직 또한 미진하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적지 않았으나 기준이 생각하는 진정한 스승은 김굉필이었는지 모른다. 김굉필과 김종직의 관계에 따른 평가는 훗날 더욱 굳어졌다. 김굉필 종사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거친 1년 후의 실록의 사론에 나온다. 김굉필은 처음에 당세의 명유(名儒)인 김종직의 문하에 수학하였는데, 그의 학문이 문장(文章)에 치우치므로 마음으로 꺼려하여 오로지 성학에 뜻을 두었다. 『중종실록』 13년 4월 28일 김굉필이 김종직과 결별한 것은 문장 중심인가, 도학 중심인가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이황과 조식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16세기 중엽 사림의 정론으로 굳어졌다. 김굉필을 동방 도학의 독보적 존재로 부각하고 김종직을 '문인'으로 치부한 평가에 대하여 김굉필은 미소 지을까? 아닐 것이다. 언제까지 갈라섬에 집착할 것인가 하며, 여태껏 경계 짓는 말과 글로 세상을 바꾸려 하는가 하지 않을까? 5. 소학의 실천이 敬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이상 몇 가지 관점에서 김굉필의 교육활동과 교육사상을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도학의 신념 위에 교육자로서 유배지에서까지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에 정성을 다하였고,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였으니, 현대에 있어서도 師表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이 聖人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을 통하여 인위적으로 계발될 수 있다고 주장한 김굉필의 선비정신을 오늘날 스승상의 요건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훤당은 말하기를“옛날 학자들은 자기를 위한 학문을 일상생활에서 찾았다. 본성 안에 인·의·예·지가 모두 갖추어졌고, 그 마음을 지키고 길렀다. 힘써 노력하는 방법이 공경함이라는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훤당이 일생동안 일관해서 힘써 노력한 모두가 이‘공경함 敬’이라는 한 글자에 있다.” 자기를 위한 학문이란『논어』헌문편(憲問篇)에서 나오는 말이다.“옛날 학자는 자기를 위해 공부하였지만, 지금 학자는 남을 위해서 공부한다.”‘자기를 위한 학문’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 즉 수기(修己)에 관한 학문을 말하며‘남을 위해서 하는 학문’이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공경함이란 마음을 바르게 해서 올바른 본성에 일치를 이루는 수양방법이다.『주역』곤 괘 문언전에서“군자는 공경함으로 그 마음을 바르게 하며, 정의로움으로 밖으로 나타나는 그 행동을 바르게 한다. 공경함과 정의로움이 일어서면 덕이 외롭지 않다”라고 하였다. 공경함은 안으로 그 마음을 바르게 지키는 수양 방법이며, 정의로움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밖으로 나타나는 그 행동으로 실천하는 방법이다. 공경함과 정의로움이 함께 일어서면 그 덕이 왕성해지고 큰 것을 기대하지 않아도 커지니, 덕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공경함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수양방법이며, 정의로움은 밖으로 나타나는 그 행동을 바르게 하는 실천방법이다.
『경현록』수록. '굉필이 호란하게 적었다'는 '굉필호초(宏弼胡草)'로 보면 친필이 틀림없다. "매형의 절조를 가장 사랑하노니(最愛梅兄節) / 바람과 서리에도 시들지 않구나(風霜獨未凋) / 백년 사귀자고 기약하였건만(百年期作契) / 귀밑이 벌써 희어짐을 어이하fi(其奈鬢簫蕭)." 이 시는 정여창을 모시는 남계서원에서 베껴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정여창에게 건네준 시는 아닌지? 그렇다면 매형은 정여창인 셈이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의하면 김굉필은 '그림에 능하였다[善畵].' 그러나 작품은 남아 있지 않는데 최근 경주의 어느 고가에서 양양의 명승지인 청초호를 그린 이 그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편찬한 오세창(吳世昌)은 박규수와 같이 활동한 개화사상가 오경석(吳慶錫)의 아들로 한말에 애국 계몽 지사로 활동하고 훗날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는데, 서예가이며 감식가로서 또한 금석문 연구로 최고의 권위가 있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미술인 모임 서화협회를 발기하였다. 한편 김굉필은 '안견의 묵화 열 폭을 병풍으로 만들어 간직하였다.' 열 폭 그림은 검푸른 전나무와 늙은 소나무[蒼檜老松], 푸른 나무와 파릇한 버들[碧樹靑楊], 오래된 나무와 무성한 대숲[古木叢篁], 거문고와 학 그리고 소와 양[琴鶴牛羊], 낚싯줄을 드리우고 달을 보는 모습[垂綸翫月], 구름 낀 산 아래 초가[雲山草屋], 백리의 물길[百里長河], 천 척 폭포[千尺懸瀑]라고 한다. 이 병풍은 갑자사화로 집안이 적몰될 때 도화서(圖畵署)에 압수되었다가 민간에 흘러들어갔는데, 조식에게 배운 오운(吳澐)이 처가 집에서 얻어 김굉필의 손자인 김립에 전해주었다고 한다. 조식의 「한훤당의 그림 병풍에 적다[寒暄堂畵屛跋]」에 나온다. 조식은 병풍을 본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선생께서 이 병풍을 마주보고 누워계실 때나 눈길을 주고 감흥을 일으키실 적에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상쾌한 바람 같은 선생의 영혼이 흐릿하게 그림에 남아 있는 듯하고, 사모하는 마음 사이에 예전의 모습이 오히려 보이는 듯하다
瑤琴性所賞 거문고를 즐겨 탔지
김굉필에 대한 주위의 시선이 차츰 따가워졌다. 무엇 때문에 가르치는 일에 그토록 열심인가 하는 의심과 비방이 일어났던 것이다. 실제 임사홍은 김굉필을 무척 싫어하였다. 훗날의 실록기사에 나온다.
김굉필은 평생 한결같게 처신과 학문을 정자와 주자를 지표로 삼고 성학(聖學)에 잠심하여 얻는 바가 몹시 높았으며, 일동일정(一動一靜)이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이 중도의 규범을 지켰다. …… 폐조(廢朝) 때에 임사홍(任士洪)이 그것을 위선(僞善)이라 하여 살해하였다. 『중종실록』 13년 4월 28일
정여창이 넌지시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충고하였다. 고향이 서로 멀지 않아 일찍부터 자주 만났고, 성균관에도 같이 다녔으며, 서울에서는 회현방 한동네에서 살며 뜻이 같고 도가 같은 '지동도합(志同道合)'의 동지였다. 김굉필은 단호하였다.
중 육행(陸行)이 불법을 가르치는데 수업하는 제자가 천여 명이나 되자 한 벗이 '화를 입을 것이 두렵다' 하며 말리자, 육행은 '먼저 안 사람이 뒤늦게 안 사람을 깨우치고, 먼저 도를 깨달은 사람이 뒤늦게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는 법이니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릴 뿐이다. 또한 화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지 내가 어찌 관여하겠는가?' 하였다고 하니 육행은 비록 중이라서 취할 것은 없으나 그 말은 지극히 공평하다. 『추강냉화』
세상의 비방과 훗날의 화를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 생활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종 24년(1493)이었다. 문하를 출입하던 명양부정(鳴陽副正) 이현손(李賢孫)이 전송하였다. 정종의 후예로 13살 연하였다.「모친을 모시고 현풍으로 가는 김선생을 삼가 전송하다」
나는 안다네, 천하의 사물은 吾知天下之物
이치가 있고 분수가 있으며 有理有分
만상(萬象)이 모여 하나가 되는 이치란 理會萬而爲一
만 가지로 나뉘고 갈려도 헝클어짐이 없다네 分萬殊兮不紊
즉 현상이 아무리 달라도 관통하는 이치는 하나라는 성리학의 핵심이론인 '리일분수(理一分殊)'를 풀이한 것이다. '태극이 음양을 낳는다'는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로 부연하였다.
하나가 둘을 낳은 후에 以一生兩之後
사물은 만 가지가 같음이 없지만 物有萬其不同
그 소이를 미루어 따져보면 然推究其所以
마침내 근본이 같은 줄 훤하게 알리라 卒爛漫而同宗
우주자연과 삼라만상이 현상적으로는 크고 작음, 드러남과 감춤이 있지만 실체는 동본(同本) 동종(同宗)이라는 것이다. 즉 우주만물의 불변과 변용을 '하나의 리[理一]'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리는 '추상의 리'가 아니라 '구체의 리'였다. 모든 만물은 '형체가 있기 전의 도(道)'와 '형체가 있은 다음의 기(器)'를 아울러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똑같이 '리'로서 추상적 천명을 받았다. 그러나 인성의 구체적 발현은 달랐다. 원리와 현상을 혼동하고 제 안목, 제 지식에 들어온 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어찌 세상 사람들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쫓아 何世人遺本而逐末
천차만별에 현혹당할까 眩千差與萬別
어떤 이는 대롱으로 하늘을 살피고 或用管而窺天
어떤 이는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或用錐而指地
이것이 크고 저것이 작다고 싸우며 爭此大而彼小
시끄럽게 시시비비를 가리려고만 하니 閙非非而是是
우주와 자연의 가지런한 질서의 원리가 하나의 이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인간은 갈등하고 분란을 일으킨다고 진단한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현상의 불합리, 현실의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사물이 가지런하지 않음이 雖然物之不齊
또한 사물의 실상이라 物之實也
그러나 하늘이 부여한 도덕 가치인 인륜은 보편적이며 누구라도 흩뜨릴 수 없는 가치였다.
자줏빛이 어찌 붉은빛을 어지럽힐 것이며 紫豈可以亂朱
피가 어찌 곡식을 자라지 못하게 할 것인가 稗不可以亂穀
만일 이것을 혼동하여 하나라고 한다면 苟混同而一之
인륜과 풍속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恐亂倫而亂俗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의 다짐이었다. 그래도 본말을 혼동하고 말만 앞세우며 허장성세하고 있음이 한탄스러웠다.
「추호가병태산부」는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길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노래였다. 결코 추상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출세와 부귀를 목표로 하는 좁은 안목, 짧은 지식에 안주하며 교만하고 분쟁하는 모습에 대한 비판을 오롯이 드러내며 진실을 향한 실천의 금도(襟度)를 곳곳에 밝혔다.
또한 자제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절제된 표현도 좋다. 그러나 격분하거나 낙망하지 않았다. 하나의 사안, 하나의 사건을 넘어 인간의 본성과 실천, 선비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거시적 안목을 간직하려는 소망이 그만큼 간절하였음이리라.
특히 이 노래가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문장이 쉽고 간결하며 명쾌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지식 차원에서 바라보면 시시콜콜할지 모르지만 '피가 곡식을 방해하고, 자줏빛이 붉은빛을 흐릴 것인가' 등과 같이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예시도 삶의 현장에서 힘껏 찾은 끝에 나온 것이라 생각하면 차라리 감동적이다. 그러나 미완의 작품이었다. 마지막 구절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쉽구나, 단서를 구하지 않고 惜乎不求其端
마지막을 찾아보지 않으려 함이여 不訊其末
말만 크고 마땅함은 지나치니 言有大而過當
그림자를 엮어 바람을 가두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如繫影而促風
인륜에 대한 희망을 위하여 말에 앞서 실천하는 독실궁행(篤實躬行)에 유념하여야 한다고 한 것인데, 그렇다면 다음에 어떻게 하면 이러한 잘못된 마음과 생각을 마감할 것인가로 나아가야 할 것인데, 아쉽게도 여기에서 그쳤다.
만약 조금 더 나갔다면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조심하고 경계하여야 함을 덧붙였을 것이다. 아마 이런 구절이었을지 모르겠다. '군자는 제 몸에서 찾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서 구하는 법, 사람과 하늘이 만나자면 공구계신(恐懼戒愼)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야지.'
혹자는 문장의 평이함을 단점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르치기 위한, 아니면 초학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꾸민 글이라고 생각하면 전혀 느낌이 다르다. 어떻게 하면 초학자에게 우주와 인간, 원리와 현상의 관계는 무엇이며, 자연의 섭리나 조화를 따르지 못하는 사회의 불합리와 인간의 욕심, 아집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가르칠 수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송나라 학자의 자연철학 실천윤리를 곧바로 주입하기보다는 아무래도 운문(韻文)이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하고 지은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 노래는 학식의 깊이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교안(敎案)이었음에 틀림없다.
첫댓글 잘읽고갑니다두고두고마음새기며 쾌식님정말수고많습니다새해더욱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