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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인물 유자광 이야기의 전승양상과 의식
<차례>
Ⅰ. 머리말
Ⅱ. 간신에서 민중적 영웅까지, 유자광 전승의 양상
Ⅲ. 유자광 전승에 내포된 현실인식
Ⅳ. 맺음말
【국문초록】
이 글은 호남 지역의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유자광에 대한 이야기가 어떤 양상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유자광은 유규의 孽子로 태어나 그 신분적 한계를 극복한 인물이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自薦을 통하여 세조에게 발탁된 이후에 예종 대에는 남이의 獄事에 관계되어 翊戴功臣에 책록되고, 연산군 대에는 무오사화를 일으켰으며, 중종반정에도 참여하여 다시 靖國功臣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사림이 대거 등용되면서 탄핵되어 유배된 뒤 유배지에서 생을 다하였다. 유자광의 파란만장한 행적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이 전승되었다. 그 이야기들은 묘사하고 있는 유자광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얼자라는 신분적 한계를 비뚤어진 방식으로 분출한 간신의 모습으로 그리는 경우이다. 海東野言, 陰崖日記, 東閣雜記 등의 문헌에 전승되는 이야기에서 유자광은 남을 시기하고, 모함하며, 음험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성품을 지니게 된 이유를 신문문제로 돌리고 있다. 둘째, 신분문제를 능력과 노력으로 극복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어우야담에 나타난 유자광은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지닌 뛰어난 능력을 계발하여 마음껏 펼친 건강한 인물로 그려진다. 셋째, 남원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민중적 영웅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는 남원지역의 구비설화에서 나타나는데, 남원과 관련된 신비한 태몽을 지닌 유자광이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고, 적장자인 형으로 하여금 미천한 신분의 모친상을 치르게 하는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유자광의 모습은 모두 實事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이야기를 생성하고 전승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 내지는 기호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지향의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남원지역에서 유자광을 민중적 영웅으로 인식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기실 남원지역에서 전승되는 유자광 이야기의 핵심은 유자광의 초월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그 능력과 그 발휘가 그를 영웅으로 인식할만한 충분한 근거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영웅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의 능력이 남원이라는 지역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남원은 영광유씨의 시조 유자택이 이주하면서 형성된 영광유씨의 세거지이자 유자광이 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알려진 지역이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태몽과 능력발휘는 모두 남원이라는 지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고죽리라는 지명은 그의 출생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이처럼 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인물이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한계 속에서 간신으로 낙인이 찍혔다는 사실이 그를 영웅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본다.
주제어 : 유자광, 간신, 영웅, 남원, 지역과의 관련성
Ⅰ. 머리말
이 글은 호남 지역의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유자광에 대한 이야기가 어떤 양상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그에 담긴 의식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호남 지역에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견훤․이성계 등 국가를 창건한 인물의 이야기, 김덕령․신원충․정여립․전봉준 등 민중 영웅적 성격을 지닌 인물의 이야기, 정평구와 같은 건달형 인물에 관한 이야기 등이 그 사례이다. 이 이야기들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조망된 바 있다. 호남 지역을 세분화 하여 특정한 시․군․도 단위의 행정구역에 중심적으로 전승되는 인물전설을 살핀 경우도 있었고, 이성계․이서구․진묵대사․장보고 등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호남 지역의 인물 전설을 망라해 고찰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 연구에 따르면 호남 지역에 전승되는 각 인물의 이야기는 한국 인물설화의 특정한 하위 유형으로서 보편성을 지니는 동시에 호남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호남 지역의 역사 인물 이야기는 건국신화, 민중영웅전설, 건달형 인물전설이라는 한국 설화의 하위 범주에 귀속되면서, 서사의 내면에는 백제의 고토로서 지니는 역사․문화적 자부심, 이성계의 고향이면서도 그에 의해 정치적 헤게모니의 변방으로 밀려난 것에 대한 분노,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비범한 지역 인물에 대한 자부심과 연민, 정평구에게 찾아볼 수 있는 호탕하고 여유로운 野的 기질 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다각도로 이루어진 선행 연구의 성과를 일반화 한다면, 이러한 특성은 유자광 이야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유자광은 호남을 구성하는 하위 행정구역의 하나인 남원 출신으로 남원 지역에는 그의 출생과 비범한 능력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남원 지역의 유자광 이야기를 주목한 연구도 있었다. 이들 연구는 주로 이야기에 내재된, 혹은 이야기를 전승하는 사람들(민중)의 의식을 고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따르면 유자광은 서얼이라는 신분 문제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극복한 인물이며, 그 이야기를 전승하는 민중들은 유자광을 통해 자신들의 신분 문제를 인식하고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유자광 이야기는 대하소설 혼불에도 수용되어 있는데, 최명희가 유자광을 민중영웅의 한 전범으로 제시한 것이라는 주장도 이러한 연구 경향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연구의 결과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 이를 따르면 남원지역의 유자광 이야기는 도처에 전승되는 민중적 영웅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라는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이들 선행 논의를 일반화하기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제기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설화에 나타난 유자광을 민중적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자광’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영웅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海東野言, 陰崖日記, 東閣雜記, 海東雜錄, 燃藜室記述 등의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그려지는 유자광은 영웅보다는 간신에 가까운 인물이고, 이러한 이미지야말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유자광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간신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유자광이 영웅의 모습으로 전승되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여기에 작동하는 지역적 특수성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전승하는 의식은 어떤 것일까.
이 글에서는 유자광 이야기의 전승 양상을 다시 검토해 보고 위와 같은 물음에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지역적 특수성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의 자료와 비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유자광 이야기는 한국구비문학대계 남원군편에 보고된 몇 편과 유영대교수가 남원군에서 조사하여 논문에 부록으로 제시한 몇 편 등 매우 제한적으로 남아있을 뿐이고, 다른 지역에서는 조사된 바가 없는 것 같다. 이에 實史를 바탕으로 한 전승 유형인 해동야언과 야담집인 於于野譚의 유자광 이야기를 아울러 검토하고자 한다.8) 이들과 견주었을 때 두드러지는 남원지역 자료의 특징이 도출된다면,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Ⅱ. 간신에서 민중적 영웅까지, 유자광 전승의 양상
유자광은 누구 못지않게 유명세를 떨친 인물이다. 이 유명세는 물론 오명이다. 유규의 孽子로서 자천을 통하여 세조에게 발탁된 이후에 예종 대에는 남이의 獄事에 관계되어 翊戴功臣에 책록되고, 연산군 대에는 무오사화를 일으켰으며, 중종반정에도 참여하여 다시 靖國功臣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그의 행적을 곱씹어보면 간신․소인배․기회주의자라는 세간의 평가는 일견 타당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유자광의 자취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승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1. 얼자로 태어난 울분을 비뚤어지게 분출한 간신 유자광
남곤이 기술하고, 허봉이 남긴 해동의 유자광 이야기(「柳子光傳」)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서 국조인물고 등의 문헌에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수록되어 있는 만큼 유자광의 일생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傳’은 ‘열전’에서 비롯한 것으로 史官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었으며 전에 오를 수 있는 인물도 역사에서 평가를 받을 만한 공적을 남긴 인물로 한정되었다. 그러다가 후대에 사관이 아닌 문인․학자들도 전을 짓게 되었고, 전에 기록될 수 있는 인물도 역사적인 인물에서 효자, 간신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전의 작가층이 확대되고 대상 인물의 범위가 넓어진 것은, 어떤 인물의 업적을 기록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서 세인으로 하여금 교훈과 감계로 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충신이나 효자, 열녀와 같은 미덕의 소유자가 아닌, 간신․반역자와 같은 부정적 인물들이 전에 오르는 것은 전의 교훈적이고 감계적인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해동의 유자광 이야기는 이러한 목적에서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유자광의 출신과 유년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고, 立身과 政治的 行步- 특히 무오사화 - 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유자광 그야말로 소인배에 악랄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柳子光은 府尹 柳規의 孽子이다. 날쌔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에 오르기를 원숭이처럼 하였다. 어려서부터 無賴子가 되어 도박을 하여 재물을 다투었고 밤이나 새벽에 길을 떠돌면서 여자를 만나면 끌고 가서 간음하였다. 유규는 그 출신이 미천하고 또 방종하고 패려함이 이와 같으므로 자주 매를 가하면서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위의 인용은 유자광의 출신과 유년기에 대한 기술인데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武人으로서 뛰어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날쌘 몸놀림과 강한 완력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어릴 때부터 도박을 일삼고 부녀자를 겁간하는 등 패악한 짓을 일삼았다고 하여 그의 무뢰배로서의 행적을 간략하지만 강도 높게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문제가 되어 급기야는 부친과의 관계가 어그러졌다고 했는데, 그 저면에서 얼자라는 그의 출신 성분을 문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자광에 대한 부정적 기술은 계속 이어진다.
항시 호걸의 선비라고 자처하였는데, 그 성품이 음흉하여 사람을 잘 해치고자 하였고, 사람이 재능이 있어 이름과 은총이 자기보다 나으면 반드시 모함하였다. …… 유자광은 이를 갈며 원한을 품었는데, 김종직이 왕의 총우가 융성하자 유자광은 도리어 스스로 交分을 청하였고, 종직이 죽어서는 만사를 지어 곡하였으며 심지어 王通과 韓愈에까지 비교하였다. …… 또 성종 때에 環翠亭의 기문을 김종직이 써서 현판을 달았는데 아울러 철회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은 전자 咸陽의 원한을 갚은 것이다.
인용에 따르면 유자광은 음흉한 기회주의자에 다름 아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명성을 시기하고 모함하여 해치고자 할 뿐만 아니라 가슴에 원한을 품고 있어도 그 상대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으면 도리어 몸을 숙이고 가깝게 지내고자 하는 표리부동한 인물의 전형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복수할 뜻을 품고 있다가 훗날 기회를 엿봐 실행에 옮기고야 마는 소인배이기도 하다. 특히 김종직이 유자광 자신이 함양 관아에 써 붙인 글을 떼어 낸 일에 대한 복수를 같은 방식으로 되갚았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가 옹졸한 성품을 지녔다고 말하고 있다. 해동에 따르면 김종직에 대한 악감정은 그의 문집에 실린 「弔義帝文」과 그것을 史草에 옮긴 김일손에게까지 미쳐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주장에는 무오사화는 유자광 개인적인 원한과 비뚤어진 성품에서 비롯한 사건이라는 시각이 내재되어 있다.
해동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유자광이 악명을 떨치게 된 남이의 옥사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성화 무자년에 世祖가 승하하고 睿宗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가 대궐 안에 숙직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혜성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 징조이다.” 하였다. 유자광이 본시부터 남이의 재주와 명성과 벼슬이 저보다 위에 있는 것을 시기하였었는데, 이날에 역시 입직하였다가 벽 너머로 그가 말하는 것을 엿듣고는 거기에다 말을 보태고 날조하여, 남이가 반역을 음모한다고 몰래 아뢰었다. 이에 獄事가 일어나 남이가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나이 26세였다.
유자광은 남이를 시기하고 있었는데 혜성의 출현을 두고 한 남이의 말을 훔쳐 듣고는 반역을 꾀한다고 고변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옥사가 일어나게 되었고, 남이는 26세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 역시 모든 책임의 소재를 유자광에게 돌리고 있으며, 그의 성품을 시기심이 많고 음험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처럼 해동, 동각잡기 등의 문헌에서 묘사되는 유자광은 악랄하고 간악한 인물인데, 그러한 성품은 얼자라는 신분적 한계에서 비롯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2. 얼자라는 한계를 능력으로 극복한 유자광
유자광 보다 약 100년가량 후대에 활동한 유몽인은 어우에 유자광에 대해 언급해 두었다. 여기에는 유자광의 출생 및 유년시절, 무오사화․중종반정 등 정치적 활동에 대한 언급, 사후 벌어질 일에 대해 방비 등이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다. 柳子光은 감사 柳規의 첩의 소생으로 남원에서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쳤다. 유규가 깎아지른 듯 빼어난 바위 하나를 보고는 유자광에게 이를 읊어보라고 하자, 유자광은 즉시 붓을 들어 다음가 같이 썼다. “뿌리가 구천에 서리었으니 그 기세는 삼한을 누르네.” 유규는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는 훗날 크게 성취함이 있을 줄 알았다. 날마다 漢書를 한 大傳씩 읽고 銀口魚를 백 마리씩 잡게하여, 이를 하루의 과업으로 삼게 했다. 유자광은 책읽기를 미루지 않았으며,고기를 잡는 데에도 그 수가 한 마리도 모자라지 않았다.
위의 인용은 유자광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인데 앞서 살핀 해동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유자광이 남원에서 살았다는 사실과 함께 그의 넘치는 재기를 그가 지었다는 시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부친은 그 시를 보고 유자광이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을 예견하고는 학업에 힘쓰도록 했고, 유자광은 부친의 말을 성실하게 이행했다고 한다. 도박을 일삼고, 부녀자를 간음하는 무뢰배는 찾아볼 수 없다. 부친과의 관계도 적대적이지 않고, 오히려 우호적이고 친근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시문에도 능한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해동과 어우의 공통적인 내용은 유자광이 유규의 정실 소생이 아닌 첩의 소생이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사실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해동에서는 그의 패악스러운 행위가 첩의 소생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어우에서는 그러한 신분적인 제약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기술하고 있다. 어우의 전승은 이후 네 개의 일화를 덧붙여 유자광의 재기․지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첫 번째 일화는 유자광이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고품대관에 이르렀다는 간략한 언술이다. 두 번째는 중조반정을 모의할 때 보인 유자광의 지혜와 임기응변에 대한 일화이다. 반정을 모의한 무리들이 유자광을 포섭하고자 할 때, 그의 장모가 대비전의 시녀라는 점을 주목하여 유자광이 모의 사실을 사전에 누설하지는 않을지 염려하여 시험하고자 했으나 유자광은 이를 무사히 넘긴다. 또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전령패가 없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자 지니고 다니던 油紙에 서명을 한 뒤 나눠가져 신속히 일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을 실행하려는데 너무 어두워 횃불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모아둔 짚단에 불을 붙이면 사방이 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일을 성공리에 도모할 수 있도록 했다고도 한다.
이 반정의 성공으로 수훈이 된 유자광은 丘史를 스스로 뽑게 했을 때 남원에서 자신을 업신여겼던 사람들을 뽑아 노비로 삼았다고 한다. 세 번째는 무오사화와 관련된 일화이다. 유자광이 제영시를 지어 함양에 걸어놓은 현판을 김종직이 부수었다는 점에서 원한을 품고 있다가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김일손의 무리를 죽이고, 김종직을 부관참시 했다는내용이다.
네 번째는 유자광 자신이 사후에 부관참시 당할 것을 예견하고 그에 방비했다는 것이다. 유자광은 자신을 닮은 노비를 데려다가 후대하고, 그가 죽자 대부의 예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즈음에 처자에게 자신의 무덤을 평장하도록 하고, 조정에서 자신의 묏자리를 묻거든 노비의 묘를 가르쳐 주도록 귀띔했다는 것이다. 이후 유자광이 사림에게 화를 입히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는 의론이 일어나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었는데, 가솔들이 유자광이 미리 방비한 대로 따라 유자광의 묘는 무사했다고 한다. 유자광이 앞날을 예견하고 방비를 했다는 것은 유자광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기객관화와 지혜가 결합된 결과 그는 사후에 맞닥뜨리게 될 문제를 잘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네 개의 일화는 대체로 유자광의 뛰어난 능력-지혜로움-을 설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시선은 해동의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긍정적이다. 유자광이 가슴에 쌓아둔 원한을 반드시 풀었다는 사실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일화에서 언급되어 있지만 그것도 유자광의 일방적인 패악스러움은 아니다. 가령 두 번째 일화에서 수훈이 된 유자광이 남원에서 자신을 업신여긴 사람들을 노비로 삼았다는 구절은 불특정다수의 인물에게 행패를 부렸다는 해동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일화에서 유자광은 얼자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부친의 권고에 따라 정진하여 관직에도 올랐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문장에 능하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그에게 거만하게 구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하고 있다.15) 이 일은 두 번째 일화에서 보이는 丘史 사건의 복선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을 두고 유자광이 잘한 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얼자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서 무뢰배가 되었다는 해동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세 번째 일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서는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 가깝게 지내고자 했다는 등의 언급이 생략되어 있고, 김종직이 큰 이유 없이 유자광이 건 현판을 부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어 유자광의 복수를 다루는 시선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조위의 매계집으로 넘기고, 부관참시라는 연결고리를 찾아 유자광의 기지가 돋보이는 네 번째 일화를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우가 전승하고 있는 유자광 이야기는 세간에 알려진 유자광의 이미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거의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은 전승 주체-작자-의 이해관계 내지는 사고의 경향 등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3. 남원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민중적 영웅 유자광
대계의 유자광 이야기는 앞서 살펴본 해동, 어우의 유자광 전승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대계에서는 유자광의 정치적 행보 보다는 그의 출생과 초월적 능력 발휘 및 모친의 치상과 관련된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고, 사후 일에 대한 방비에 대해서도 약간의 언급이 되어 있다. 몇 개의 각편으로 존재하는 유자광 이야기를 재구해보고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대계에 전승되는 5개의 각편을 유자광의 일대기로 재구하면 다음과 같다.
㈎ -1 유자광의 부친이 길몽을 꾸었다.
-2 유자광의 부친이 종과 관계하여 유자광을 낳았다.
-3 유자광이 태어날 때 고을의 대나무가 말랐다.
㈏ 유자광은 축지법을 하기도 하고, 물 위를 걸어서 건너기도 했다.
㈐ 유자광이 생모의 상을 당하자, 본처 소생인 이복형으로 하여금 머리를 풀고 상주 노릇을 하게 했다.
㈑ 유자광은 자신이 죽은 뒤 묏자리를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여, 부관참시를 피했다.
위의 단락의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는 출생, ㈏는 초월적인 능력, ㈐는 모친의 치상, ㈑는 사후의 방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단락을 세부적으로 살펴보겠다. 우선 ㈎는 유자광의 출생담이다. ㈎-1에서 유자광의 부친은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꿈의 내용은 문으로 해가 들어오거나(대계, p.54), 남원산성이 입으로 들어오기도 하고(대계, 201쪽), 남원 고산봉을 삼키는 것(대계,p.401)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吉夢으로 뛰어난 자식을 얻을 꿈이다. ㈎-2에서 유자광의 부친은 꿈이 암시하는 바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본부인과 관계하지 못하고, 마침 곁에 있던 종과 관계함으로써 그를 통해 실현한다.
그 결과 ㈎-3과 같이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때 고을의 대나무가 누렇게 말라버렸다고 한다. ㈎는 영웅과 같은 비범한 인물에게 보이는 ‘비정상적인 잉태와 출생’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는 유자광이 지닌 비범한 능력에 대한 단락이다. 유자광은 축지법을 해 남원에서 자고 아침에 서울에 가서 조회에 참석했다고 하기도 하고(대계, p.55), 요천에서 갓 잡은 민물고기를 수라에 올리도록 진상했다고도 한다(대계, p.203). 그런 한편, 불어난 강물에 나뭇잎 한 장이나 나막신한 짝을 띄워 놓고 그것을 밟고 강을 건너기도 했다고 한다(대계, p.56; p.202; p.307; p.406). 이러한 유자광의 능력은 모두 일상의 영역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행위로서 ㈎에서 제시된 유자광의 영웅적 면모를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는 유자광이 모친상을 당해 치상을 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대개 ㈏에서 보이는 도강 능력과 관련되어 제시된다.
유자광은 상을 당해서 요천 건너편에 살던 적자인 이복형을 찾아가 자신의 집에 갈 것을 권한다. 형을 업은 채 불어난 요천을 건너던 유자광은 강 복판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모친이 작고했음을 알리고, 머리를 풀고 상주가 되면 무사히 강을 건널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강에 빠뜨리겠다고 겁박한다. 이에 유자광의 형은 그의 치상 제안을 받아들이고 천민 출신인 유자광 모친상에 상주 역할을 하게 된다. ㈎에서 제기된 유자광의 신분문제가 가문의 적자와의 대립을 통해서 일정 부분 해소를 이루는 것으로서 유자광을 민중 영웅으로 인식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고 하겠다.
㈑는 유자광의 죽음에 대한 단락이다. 유자광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제시되지 않고, 다만 사후 난적으로 몰려 묘가 파헤쳐질 것을 염려하여 임실지역의 어딘지 모를 장소에 묘를 쓰도록 하고, 아내는 물론 자식들에게도 그 자리를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어우의 마지막에 보이는 일화와 유사하다. 그렇지만 이야기에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는 핵심 코드인 유자광의 비범한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유자광의 미래를 예지하는 특별한 능력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고 본다. 이처럼 대계의 유자광 전승은 해동, 어우와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해동과 어우의 전승이 유자광의 신분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정치적 입지 다지기와 정쟁에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대계는 신분문제를 그의 비정상적인 잉태와 출생과정, 그리고 그에서 비롯한 그의 비범한 능력을 중심으로 영웅에 비견할 수 있는 특별한 인물로서의 자질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그의 특별한 능력이 남원이라는 지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Ⅲ. 유자광 전승에 내포된 현실인식
위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유자광 이야기는 크게 세 개의 전승 군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해동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유자광을 간신으로 표상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어우로 유자광을 신분의 한계를 지녔지만 그 능력을 펼친 인물로 그리는 유형이다. 세 번째는 구비로 이는 지역에 기반하며 초현실적이고 비범한 인물로서의 유자광을 부각시키는 유형이다. 각 유형들은 어떠한 전승의식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사림의 명분론과 유자광 깎아내리기
첫 번째 유형은 유자광의 행적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원인을 얼자라는 신분에서 찾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얼자로서의 열등의식이 그를 무뢰자로 만들었고, 그것이 곧 남이의 옥사나 무오사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훈신과 신진세력 간의 갈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여러 사람의 목숨과 관계된 책임을 모두 한 개인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사건과 이 유형이 전승하고 있는 사건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존재한다.
임금이 유자광을 불러서 보니, 유자광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신이 內兵曹에 입직하였더니 南怡도 兼司僕將으로 입직하였는데, 남이가 어두움을 타서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세조께서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이 아들과 다름이 없었는데 이제 나라에 큰 喪事가 있어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우니, 아마도 姦臣이 作亂하면 우리들은 개죽음할 것이다. 마땅히 너와 더불어 충성을 다해 세조의 은혜를 갚아야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어떤 간사한 사람이 있어 亂을 일으키겠는가?’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金國光이 정사를 오로지하여 재물을 탐하니 이같은 무리는 죽이는 것이 옳다. 또 盧思愼은 매우 不肖한자인데, 너도 아느냐?’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하였습니다.
오늘 저녁에 남이가 신의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彗星이 이제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는데, 너도 보았느냐?’ 하기에 신이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이제 天河 가운데에 있는데 光芒이 모두 희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다.’ 하기에 신이 ≪綱目≫을 가져와서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보이니, 그 註에 이르기를, ‘광망이 희면 將軍이 叛逆하고 두 해에 큰 兵亂이 있다.’고 하였는데, 남이가 탄식하기를, ‘이것 역시 반드시 應함이 있을 것이다.’ 하고, 조금 오랜 뒤에 또 말하기를, ‘내가 擧事하고자 하는데, 이제 주상이 선전관으로 하여금 재상의 집에 奔競하는 자를 매우 엄하게 살피니, 재상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壽康宮은 허술하여 거사할 수 없고 반드시 景福宮이라야 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 같은 큰일을 우리들이 어찌 능히 홀로 하겠는가? 네가 또 어떤 사람과 더불어 謀議하였느냐? 또한 주상이 반드시 창덕궁에 오래 머물 것이다.’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내가 장차 경복궁으로 옮기게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남이가, ‘이는 어렵지 않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런 말을 내가 홀로 너와 더불어 말하였으니, 네가 비록 고할지라도 내가 숨기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고, 내가 비록 고할지라도 네가 숨기면 내가 죽을 것이므로, 이같은 말은 세 사람이 모여도 말할 수 없다. 또 세조가 民丁을 다 뽑아서 군사를 삼았으므로 백성의 원망이 지극히 깊으니 기회를 잃을 수 없다.
나는 豪傑이다.’ 하였는데, 신이술을 대접하려고 하자 이미 취했다고 말하며 마시지 아니하고 갔습니다.” …중략… 임금이 유자광과 남이를 面質하도록 명하니, 유자광이 남이를 불러서 남이가 말한 것을 갖추 말하였다. 남이가 비로소 유자광이 와서 계달한 것을 알고 놀라, 머리로 땅을 치며 말하기를, “유자광이 본래 신에게 불평을 가졌기 때문에 신을 誣告한 것입니다. 신은 忠義한 선비로 평생에 岳飛로 자처하였는데,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위의 인용은 유자광이 남이를 고변했다는 예종 즉위년 10월의 기사이다. 이 기사의 내용은 앞서 살펴본 남이의 옥사 이야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유자광이 남이의 말을 엿듣고 과장하고, 없는 말을 보태어 무고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유자광이 내병조에 들었을 때, 남이가 다가와 김국광․노사신 등의 간신이 작란을 일으키면, 자신은 물론이고 유자광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세조와의 인연을 내세우며 자신과 함께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혜성의 출현과 그 해석 역시 남이가 유자광을 방문하여 이야기 한 것이지 유자광이 몰래 엿들은 것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남이는 자신이 거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으며, 이에 유자광은 남이를 고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유자광이 남이에게 불만과 시기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오직 남이의 입을 통해서만 거론될 뿐이다. 유자광이 남이의 옥사를 과장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남이 자신이다. 남이는 鞫問 과정에서 김국광, 노사신, 한계희, 한명회 등 훈구세력과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뿐만 아니라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며 함께 浮上한, 같은 신진 세력인 귀성군 이준을 경계하기도 했던 정치적 야망이 있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던 남이가 역모에 걸려 들 것은 어쩌면 시간 문제였을 지도 모른다.
굉장한 무용을 지니고 전공을 세운 남이가 보다 많은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이 그를 비극적인 영웅으로 형상화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와 함께 이후 사림이 주도하게 되는 정국에서 유자광이 의도적으로 폄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무오사화와 관련된 전승을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무오사화는 김일손의 사초에서 비롯한 것이다.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에 대한 정치적 비판은 물론이고, 의경세자의 후궁인 권귀인을 취하려 했다는 지극히 私的이고, 패륜적인 일까지도 그의 사초에서 발견되었다. 김일손이 압송되어 추국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견되었다. 이 글에 주석을 달고, 연산군이 이해하기 쉽도록 도운 인물이 바로 유자광이다. 그의 해석에 의해 김종직은 왕실을 능멸한 혐의가 인정되었고, 김일손과 김종직의 관계를 통해서 관계자들이 추려졌다.
그 결과 김종직의 문인들은 붕당을 형성하고 악행을 벌였다고 하여 화를 입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일부가 삼사로 넘겨졌다. 연산군 즉위 초부터 삼사는 수륙제의 시행, 폐비윤씨의 추증 문제 등에서 상소를 통한 간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직해 버리는 등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노사신을 대표로 한 훈구세력은 이와 같은 삼사에 대해 나름의 대응을 하였다. 대간을 잡아 가두라는 上敎에 대해 영걸한 임금의 威斷이라며 하여 찬성을 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손번, 조순 등은 더욱 강력한 말로 노사신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손번은 노사신이 임금의 총명함을 가리려고 한다고 간하고, 조순은 노사신을 극형에 처해야 하며, 그의 살덩이를 씹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연산군과 대신을 한 축으로 하고, 사림 출신인 삼사의 대간들을 한 축으로 한 첨예한 대립관계 속에서 김일손의 사초가 발견되었고, 이때 대간들은 왕이 사초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내세우면서 다시 한 번 연산군에 맞섰다. 이러한 행위는 보기에 따라서는 왕실을 능멸한 세력을 비호하는 것으로 비출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연산의 추국 의지와 유자광의 발 빠른 호응 속에서 사건이 마무리 되었고, 연산군은 “요사이 대간이 망령되게 공론이라 이르고 대사를 틀리게 의논드렸던 것은 경들이 함께 본 바이다. 또 선비들이 결탁하여 朋黨을 지어 악한 짓을 하였는데, 대간이 용렬하여 능히 들어 탄핵하지 못하므로 근일의 일을 이루게 된 것” 이라는 말로 그 책임을 대간들에게 넘겼다.
이처럼 무오사화는 복잡한 권력관계 속에서 추동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남곤은 이러한 사건을 비뚤어진 개인의 돌출적 행동으로 치부하여 유자광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무오사화가 일어나는데 유자광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소위 권력을 잡고 있던 훈구와 사림의 대립, 연산군․훈구와 삼사의 갈등 등 본질에 가까운 일들을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한 면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아마 해동의 유자광 이야기를 기술한 남곤이 모호한 입장에 처해있던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남곤은 김종직의 문인이면서, 기묘사화에 가담해 조광조 등을 숙청하는데 가담한 인물이다. 훈구와 손을 잡으면서도 유자광과는 분명한 선 긋기를 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해동은 남곤의 모호한 정치적 입장에서 비롯한 것으로, 유자광을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한 고변을 신분적 열등감에서 비롯한 도발적 행위로 해석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전승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김종직을 도학의 중추로 여겼던 사림이 집권했기 때문일 것이다.
2. 능력과 노력에 주목한 유자광의 재발견
두 번째 유형인 어우는 유자광을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몽인 당대의 역사관내지는 시대인식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유몽인이 유자광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으로 남긴 것은 이른바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하며 은거하기 시작한 때라고 여겨진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여항에 떠돌던 인물․풍속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수집․기록하였는데, 유자광의 이야기도 이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유몽인이 이 이야기를 수집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기록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유몽인 당대에 유자광을 간신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시각이 존재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간에서 유자광에 대한 평가가 나타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전란은 농민이 농토로부터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토지가 황폐화되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것은 물론이고, 피란하면서 떠났던 토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군역을 부담했던 농민 가운데 일부는 전사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전란은 조선의 농촌/향촌사회를 붕괴시켰고, 이것은 조정의 재정적 곤란함, 백성들의 굶주림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태를 해소하기 위해 시행된 납속책 등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납속 시에 주어지는 특권으로 신분제도가 느슨하게 된 것이다. 천민층의 일부는 면천되기도 했고, 서얼들의 허통도 이뤄질 수 있었다. 經國大典에 명문화된 ‘서얼금고’에서 비롯한 서얼의 사회진출 제약-능력을 지녀도 사회에 쓰이지 못하는-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일부 해소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 역시 일시적인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얼의 사회진출은 다시 벽에 부딪치게 되었고, 심지어는 허통으로 관직에 진출한 서얼들까지 삭과, 파직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얼이 지니고 있었을 사회진출에 대한 욕망은 더욱 배가되었고, 나아가 七庶之變과 같은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서얼로서 사회에 진출해 큰 족적을 남긴 유자광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어우에서 유자광은 남을 모략하는 소인배나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건강한 생명력을 지닌 인물로 나타난다. 그는 타고난 재주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계발한 인물인 것이다. 또한 추진력과 결단력, 지혜로 신분적인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은 그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요인이다. 얼자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고, 그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공신에 봉해진 그의 이력은 강인한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생명력은 죽음 뒤에도 이어져 그가 부관참시를 피했다는 이야기를 낳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죽음 뒤에 맞이하게 될 또 한 번의 죽음을 미리 알고 방비하는 모습은 임금이 내리는 죽음까지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경직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를 비꼬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 전쟁과 집권 명분을 위해 비생산적 이념 논쟁을 일삼는 지배층은 오히려 사회비판적인 시각의 고양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유자광과 같은 인물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중종 때 서얼이 문과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조광조의 주장, 선조 즉위년에 서얼 1600여명이 상소를 통해 서얼차대의 철폐를 요구한 사건, 일시적인 진출과 좌절 등의 사례에서 보이는 서얼의 사회진출 욕망 등 복합적 사회 여건과 서얼로서 큰 성공을 이룬 유자광의 사례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서로 상승효과를 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결국 능력이 있어도 신분이라는 굴레 때문에 쓰이지 못하는 시대의 부조리함을 포착한 유몽인의 비판의식이 내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이 어우와 같은 전승유형을 이룰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본다.
3. 남원과의 관련성을 통한 유자광의 영웅화
구비의 유자광 이야기는 그가 신분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형상화 하는 방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뤄졌다. 구비는 유자광을 초현실적이고 비범한 인물로 그려낸다. 그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방편으로 비정상적인 출생담을 부연하고, 초월적인 능력을 부여했다. 실제 유자광의 출생은 고소설의 대표적인 영웅인 홍길동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게 닮아 있다. 유자광이 축지법이나 도강 능력 등 도술을 지녔다는 설명도 홍길동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지만, 유자광을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더 따져 볼 문제이다. 흔히 영웅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로 집단의 삶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수행하고, 그 때문에 집단의 존경을 받는 존재를 말한다. 이야기 속에서 유자광이 뛰어난 능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능력을 발휘하는 유자광의 행위는 적자인 이복형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모의 초상에서 상투를 풀고 상주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 행위는 어떤 특정한 집단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또한 그 행위로 인해서 누구의 존경을 받았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문법에서 영웅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점과 실제 이야기를 전승하는 사람들이 영웅으로 인식한다는 점은 별개의 문제이다. 실제 유자광은 영웅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승하는 사람들은 유자광을 영웅으로 인정한다. 그 이유는 이야기를 전승하는 사람들이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유자광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함으로서 그의 행위를 통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유자광 이야기는 민중적 영웅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자광의 영웅적 성격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지역과의 관련성이다. 실제 이 이야기는 남원이라는 특정한 지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물론 남원이 유자광의 고향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로 이야기의 면면에서 유자광과 남원의 관련성은 잘 나타나 있다. 우선 유자광의 출생을 암시하는 태몽에서부터 이러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야기에서 유자광의 부친은 남원산성, 또는 남원 고산봉을 삼키는 꿈을 꾸게 된다. 남원산성은 교룡산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유자광은 남원지역의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인물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자광이 태어날 때 고을의 대나무들이 모두 누렇게 말라버렸다고 한다. 이야기는 유자광이 정기를 타고나서), 또는 유자광이 날 때 정기가 세서(대계, p.306)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하며, 그 결과 그 고을은 누른대(고죽리, 황죽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대계의 유자광 전승에서 지역과의 관련성이 드러나는 부분은 유자광이 치상을 위해서 형을 겁박하는 장면, 그리고 진상할 민물고기를 잡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유자광이 형을 업고 건너게 되는 범람한 강, 고기를 잡는 강이 바로 남원을 북동-남서 방향으로 관통하는 요천이다. 이러한 화소들은 실사에 일정 부분 기반을 두고 지역과의 관련성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허구적 화소이다. 유자광이 태어난 1439년을 전후한 시기는 그의 부친인 유규는 물론 생모인 보령 최씨가 남원에 거주하던 때가 아니므로 그는 남원에서 출생할 수 없었다. 유자광의 뛰어난 영웅적 면모를 드러내기 위한 비정상적 잉태와 출생이라는 화소가 남원의 명산과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유자광의 모친상 화소 역시 이와 유사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실록에 나타나는 기사를 근거로 판단할 때 실로 유자광은 그 모친에 대한 정이 남달랐던 것 같다. 1478년 현석규를 모함한 혐의로 동래에 유배가게 된 유자광은 2년 뒤 병든 노모가 있는 남원으로 양이 시켜줄 것을 요청하고, 그것이 허락된다. 또한 1489년에는 고향에 홀로 남겨진 노모를 봉양하겠다며 사직 상소를 올리지만 그것이 윤허되지 않고, 성종은 유자광으로 하여금 그 모친을 서울로 맞아 봉양하게 하였다. 1494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상여가 한양에서 남원까지 내려갔으며, 사치스럽게 상을 치렀다고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자광의 성품으로 볼 때 이복형으로 하여금 치상하게 했다는 설정이 가능하고, 또 그로 인해서 신분에서 비롯한 한을 일정부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규의 장자이자 유자광의 이복형으로서, 이야기에서 치상을 하는 유자환은 유자광의 생모보다 27년이나 이른 1467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결국 이 화소는 유자광의 효성과 신분문제의 해소를 요천이라는 남원 지역의 하천과 결부시키고, 그 과정에서 유자광의 초월적 도강 능력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물고기를 진상했다는 이야기도 사실에 일정 부분 근거하되 요천과의 관련성을 지닌 화소로 바뀐 경우이다. 이봉준의 벽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함경도로 파견을 나갔던 유자광은 전복과 굴 등을 연산군에게 진상하였는데, 사사로이 진상하였다고 하여 권세형, 윤은보 등에 의해 탄핵을 받은 적이 있다. 이에 연산군은 좋은 물건을 진상하고 싶었을 뿐이라며 탄핵을 불허한다. 당시 유자광은 司饔院 제조로서 궁중의 음식을 관장하는 책임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진상은 임금에 대한 충정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이 남원의 요천과 결합되면서 유자광의 축지법이라는 초월적 능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계의 유자광 전승은 이야기의 핵심적인 요소인 유자광의 영웅적 면모, 초월적 능력 등을 뒷받침하는 화소가 남원지역이라는 배경적 기반과 긴요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역과의 관련성이 유자광 전승을 가능하게 하는 또 하나의 동력으로 기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전승집단의 전승의식이라는 측면에서 유자광이 민중들로부터 영웅에 버금가는 존재로 인식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지역과의 관련성뿐만 아니라 이야기에서 구현되는 그의 삶이 민중들에게 영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것은 모친의 치상과 관련해서 찾아볼 수 있다.
실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유자광은 모친의 장례식을 ‘분에 맞지 않게’ 성대하게 치렀다고 해서 탄핵을 받기도 했다. ‘분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서얼이 아닌 양반의 입장에서 그의 신분을 염두에 두었을 때 가능한 말이다. 이러한 논리는 대계의 이야기 문맥으로 환원시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감히 서 얼로서 적장자인 양반에게 신분이 낮은 庶母의 치상을 하게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민중들은 그렇게 인식하지 않은 것 같다. 기실 유자광의 정치적 행보와는 무관하게 서얼로서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영웅으로 인식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집단을 위해 활약하거나 공동의 숭앙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사회적인 통념이나 엄격한 제도의 벽을 깬 인물이고 그 자체로 영웅적인, 입지전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신분제도를 돌파해낸 유자광의 모습과 효성이 깊었던 유자광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민중들은 유자광의 생모보다 27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난 유자환을 설화 속으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초월적 능력을 지닌 천출 아우에게 굴복하고 머리를 풀고 상을 치르도록 만들었다. 이는 많은 서얼들과 민중들이 지니고 있었던 신분제에 대한 잠재의식이 발현된 결과일 것이다.
Ⅳ. 맺음말
유자광은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태어난 인물로서 스스로의 능력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라고 본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현재까지 간신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러한 유자광에 대한 이야기가 그 가문의 세거지인 남원지역에서는 인식의 층위를 달리하고 있음에 착목하여 그에 대한 이야기의 전반적인 전승 양상은 어떠하며, 거기에 내포된 전승의식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유자광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해동야언, 동각잡기, 해동야언, 해동잡독 등의 문헌에 전하는 유형이다.
이들 이야기에서는 남이의 옥사․무오사화 등을 사례로 들어 유자광을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간악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무뢰배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으며, 그러한 성품과 행위의 근본에는 얼자라는 신분적 콤플렉스가 작용한다고 보고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어우야담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는 생명력 넘치는 인물로 형상화 되어 있는 유형이다. 세 번째 유형은 남원 지역에 구비로 전승되는 이야기로 각편들을 재구하면, 남원지역 명산의 정기를 지니고 태어난 유자광이 축지법․도강능력 등의 초월적 능력을 발휘하고 적장자인 이복형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모의 상을 치르도록 함으로써 일정부분 신분적 한계에 대한 해원에 이르며, 사후의 방비를 한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들 세 유형의 이야기는 저마다 나름의 전승의식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유형의 경우 임금과 훈구세력, 신흥세력(무장세력, 삼사의 대간, 사림)의 대립을 유자광 개인의 비행의 산물로 설명하고,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의도적인 유자광 깎아내리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네 차례에 걸친 사화 끝에 결국 정국을 주도해나간 사림이 지니는 원칙론 내지는 명분론과 관계되며, 특히 공식적인 유자광의 전을 지은 남곤이 처한 모호한 입장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유형은 그의 재능과 노력에 초점을 맞춘 유자광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몽인이 어우야담에 유자광의 이야기를 수록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17세기 초중반 조선은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난 뒤로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경직화된 유교이념에 대한 회의, 신분제의 동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유몽인은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능력을 펼쳐 보인 유자광의 행적을 긍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능력이 있어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던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실제 유자광의 행적에 일정하게 관련을 맺으면서 남원지역과의 관련성을 토대로 유자광에게 초월적 능력을 부여하고, 신분을 극복한 사실과 효의 실천을 결부하여 그를 민중적 영웅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남원 지역에서 유자광이 영웅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곳이 영광유씨 가문의 세거지이자 유자광이 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낸 지역이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그 지역의 근거를 둔 인물이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한계 속에서 간신으로 낙인이 찍혔다는 사실, 그리고 정승의 자리에 오른 뒤 자신뿐만 아니라 천인인 모친의 신분적 해원까지도 이룬 사실이 그를 영웅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본다. 신분의 제약에 맞서 돌파를 시도했던 그의 저돌성이 시대가 흐르고, 전승 계층을 달리하면서 다양한 울림을 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