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소리
송명화
사라져간다는 말에는 어렴풋한 안타까움이 스며있다. 우리 소리박물관의 전시실에서 개구리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수련과 개구리가 있는 연못을 화면에 띄운 키오스크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제는 보존해야 할 무형의 유산이 되었단 말인가. 어릴 적 시골에서 시끄럽게 듣던 개구리 소리를 사람들은 제때 찾아 나서야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소리란 공중에 흩어지는 것이니 녹음하여 보존하는 것이 맞겠지만 소리가 담고 있는 추억과 정서와 향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보존해야 할 것은 소리만일까.
달빛이 부서진다. 갓 모내기를 한 논에 담긴 물이 찰랑거린다. 논둑에 앉아 말 금한 논물을 들여다본다. 빗물 젖은 벼 포기가 생생하게 깨어있다. 보이지 않으나 개구리들이 떼로 모여 노는 모양이다. 논 옆으로 제법 모양을 갖춘 도랑이 흐르고 그 옆에 이제는 밭으로 변한 땅에 제재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마솥에 물을 데워 목욕 솥으로 쓴 기억이 있고, 이모를 따라가서 동네 언니들과 귀신 놀이를 하며 놀았던 추억이 어렴풋하다. 나무 적재소 뒤꼍에 서 있는 늙은 감나무도 나와 같은 청중이 되어 개구리의 음악회를 즐긴다. 어둠 때문인지 만물도 생각도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선창은 매번 단호하고 높았다. 와르르를 까르르를 쏟아지는 코러스가 동네를 감싸고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무리 지능 덕분에 개구리 소리는 꽉 찬 느낌을 준다. 선생님이 돌림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시킬 때처럼 옆의 개구리가 소리를 낼 때 소리를 내지 않고, 소리를 내지 않을 때 소리를 내는 식으로 전체 코러스를 완성한다. 암컷을 부르는 수컷의 세레나데이니 어울려 부르더라도 자신의 소리를 따로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야 미물이라 한들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열심이다. 어울림과 구별됨이 어우러지니 더욱 점수를 주고 싶다. 이슬비가 그쳤다. “깩깨글깩깩 깨그깨그깨그 거걸거걸거걸 개개개개 개굴개굴 개객개객….” 무성음과 유성음이 얽혀 쏟아지는 수다에 함께 즐거워진다. 개구리의 합창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불러낸다.
개구리 소리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는다. 초등학교로 가는 등굣길 양쪽에 문방구가 둘 있었다. 등하교 때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주인을 불러대던 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물건을 고르고 셈을 치르는 동안에도 친구들과 재잘대거나 문방구 주인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고자질하느라 여념이 없던 귀염둥이들의 목소리는 에너지를 꽉 채운 발동기 같았다. 내 막내 여동생의 가방을 대신 들고 다니던 방앗간 집 쌍둥이와 뒷집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공중을 날았고, 멀리 있는 동네에서 걸어온 아이들이 인사를 나누느라 분주하던 등굣길과 하굣길은 북적거렸다. 조용해진 늦은 오후에도 아이들의 생기가 남아 있어 동네는 외롭지 않았다.
청개구리들의 노래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높고 맑게 뻗쳐나가는 호루라기 소리로 도입부를 시작한다. 매일 밤 연습이 쌓일 때마다 합창은 한층 세련되어진다. 와르르 쏟아지는 함성 속에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반 대항 합창대회 연습을 하느라고 늦게까지 학교에서 연습하던 때 가장 열성인 사람은 반마다 선생님이셨다. 합창을 마무리하는 생물은 맹꽁이다. 환경부에 의해 멸종위기야생동물로 지정된 녀석은 늙어서 공이 조금 우그러진 호루라기처럼 두껍고 쉰 소리를 낸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 하나로 시작과 끝이 정해지고, 통솔과 배려가 구분되었다. 앞에서 고군분투하신 선생님이 고마워 그 시절 아이들은 졸업식장에서 개구리처럼 울었다. 선생님의 호루라기가 가장 빛을 발하는 날은 따로 있었다. 해마다 추석 전날 열리는 운동회였다.
축제였다. 이웃 동네에 흩어져 있는 학부모들과 귀향한 졸업생들, 학교와 관계없는 주민들까지도 모여들었다. 운동장 한쪽에 설치된 천막에서는 부녀회 회원들이 바쁘게 국밥을 끓여냈다. 졸업생들의 릴레이가 추억을 소환하는 사이, 동네 대항 줄다리기를 하기 위해 장정들과 여인네들, 처녀와 총각들이 운동장 가운데서 자리를 잡는다. 세차게 깃발을 흔드는 청백 책임교사의 신호에 맞춰 영차영차 구령을 맞추며 줄을 당긴다. 드디어 신호총이 울리고 쏟아져 나오던 함성과 탄식들……. 가만히 듣다 보면 개구리의 합창에서 어른들의 함성이 걸어 나온다. 학교를 매개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살아가던 그 어른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주변 초등학교 세 개가 통폐합되어 이곳으로 모였다. 전교생이 마흔여섯인데 저학년은 세 명씩이라고 한다. 동생들의 모교인 이 학교에 들러 아이들이 기르는 가축이나 식물들, 동상들을 살피는 것은 지금도 나의 즐거움이지만 산책할 때 아이들을 본 적은 드물다. 통학버스로 주변 마을의 학생들을 모아서 등하교시키는 형편이니 학교 앞 문방구는 잊힌 과거가 되어버렸다. 주변 동네 중에서는 교통중심지였고, 오일장이 열렸으며, 초중고가 있던 마을이었지만 이제 젊은이를 찾기 어려워졌다. 동네의 반 정도가 빈집인 형편이고, 그나마 거주하고 있는 분들도 노인이 대부분이니. 동네 사람들은 이 학교조차도 어찌 될까 애면글면한다.
요즘 들어 시골에 올 때마다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설렌다. 혹여 그들의 음악회가 끝났다고 해도 아쉬워할 일이 아님을 안다. 아무쪼록 녀석들의 바람이 잘 이루어지고, 새로운 생명이 논마다 꼬물거리게 될 때 그땐 또 얼마나 미쁠 것인가.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세상의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어디서나 아기를 보면 사람들의 눈길이 모여든다. 예전처럼 다가가 쓰다듬고 말 건네지는 못하지만, 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대견해 한다. 어른들의 가슴마다 휑한 허전함이 숨어있다. 아무리 동네를 정비해도 아이들의 부산한 기운이 결핍된 동네는 풀죽은 광목이 불같다. 아련한 추억이 되어가는 젊은 날의 기운 넘치던 동네에 방송하는 이장님의 목청조차 예전 같지 않다. 아기 울음소리, 아이들 노는 소리, 청장년들 일하는 소리, 노인들 너털웃음 소리가 담 넘어 넘실대던 옛날이 대한 뉴스처럼 그립다. 사람이 그립다.
개구리 소리는 공동체의 기록이다. 낮에도 고적하던 동네가 개구리 합창을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어르신들이 녀석들 덕분에 꿈결에도 다채로운 음향으로 호사를 한다. 잊힌 영광이 그리워 성산, 죽곡, 정자리, 인담, 석계리, 두문리 개구리들이 다 모여 운동회를 한다. 무논 가득 아이들의 웃음이 와그르르 쏟아진다. 빳빳이 살아나는 기상이 옛날처럼 동네를 감싼다. 개구리가 다시 울음주머니에 힘을 준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