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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동쪽 (3): 에덴 동산, 교육행정학, 수업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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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즉 신을 믿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에덴 동산 이야기에 들어있는 인생관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권유할까? 에덴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다 같은 질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대답, 혹은 내 견해를 흘려버린 것 같다. 예컨대 나는 “교회나 절에 나가되, 잘 나가면 된다”거나 “이런 따위의 글을 쓰되, (아주) 잘 쓰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하나마나한 대답으로 보일지도 모르며,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대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에덴의 바깥인 이 세상 자체가 “죄(고, 무지)의 상태요, 속죄하여야 할 상태이며, 문제 상태”요, “전면적으로 부정”하여야 할 상태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무시무시한 대답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 말이, 예컨대 당장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당연히 나는 모른다. 질문은, 물론, 에덴 동산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모른다거나 잘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다음과 같은 점은 어느 정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 관한 믿음이 삶의 다른 국면으로 흘러넘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서만 그 믿음을 발휘할 뿐, 교회 가는 길이나 가정, 학교, 회사, 투표장에서는 그 믿음을 슬며시 거두어들이는 것 -- 이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예배 볼 때에만, 목사님을 상대할 때에만 그 믿음을 발휘하고, 다른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에는 그 믿음을 슬며시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많이들 들었을 것이다. 아마 목사님들한테서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려니 약간 쑥스러워진다. “당신이 목사야? 당신, 지금 설교해?”
물론 위와 같은 목사님의 말은 맞는 말이요, 좋은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위의 말, 즉 에덴 동산에 관한 믿음이 삶의 다른 국면으로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목사님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나는 역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글 읽는 사람이요,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연구하는 사람이다. 나는 실천가라기보다 이론가이다. “삶의 다른 국면”은 “삶의 다른 국면을 살아가는 데”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삶의 다른 국면을 이해하는 데”로 해석될 수도 있다. 즉, “교회 가는 길이나 가정, 학교, 회사, 투표장에서 (그리고 교회 자체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데”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곳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로 해석될 수도 있다. 나에 의해 이해의 대상이 된 ‘그곳들’, 즉 ‘교회 가는 길이나 가정, 학교, 회사, 투표장 (그리고 교회 자체)’은 물론 삶의 모든 국면을 나타내되, 삶의 모든 국면은 다음과 같이 파악될 수도 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되었다. 이제 아담과 이브는 진짜 사람이 된 것이며, 에덴의 동쪽은 사람의 세상이 된 것이다. 사람의 세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물론 신의 세상이 아닌 것이되, 한 마디로 나타내어야 한다면, 문명이라는 말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혹은 역사라는 말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낙원 추방과 더불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며 문명이 건설되는 것이다. 자세하게 나누어 말하자면, 정치, 경제, 교육, 예술 등이 시작되고 건설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종교가 시작되고 건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삶의 다른 국면’, ‘삶의 모든 국면’은 정치, 경제 등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 관한 믿음이 삶의 다른 국면으로 흘러넘쳐야 한다는 말은, 그 믿음이 정치, 경제 등등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점을 의미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에덴 동산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있되, 그 믿음이 그의 정치 이론이나 경제 이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어떤 곳인가? 유혹 — 소소한 많은 유혹들과 하나의 커다란 유혹 — 이 있는 곳이다.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였지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특히 도덕적, 종교적 측면에 주목하여 대답하는 것인 듯하다. 이곳은 도덕과 종교가 있는 곳이요, 나아가서 정치, 교육 등이 있는 곳으로, 문명의 세계이다. 이 대답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정치, 교육이라는 것들, 즉 문명이라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 질문이 물론 위에서 말한 정치, 교육 등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질문이다. 소수에 속하는 한 부류의 사람들은 에덴 동산, 즉 신의 존재에 입각하여 이 질문에 대답하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입각하지 않은 채 대답한다. 역사를 거슬러 과거로 과거로 돌아가보면 무엇이 나올까? 즉 인간의 역사나 문명의 맞은편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만 상태, 즉 유인원의 상태가 나오리라고 대답하며, 소수의 사람들은 에덴 동산이 나오리라고 대답한다.
내가 지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일관성이다. 에덴 동산을 믿는 사람은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정치, 교육 등을 포함하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일관된 견해를 보여야 한다. 내가 지금 주목하고 있는 것은 특히 이론적 일관성이다. 그 사람은, 그 여러 국면에서 개인적으로 처신하고 행동하는 데에서만이 아니라, 그 여러 국면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에서 일관성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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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의 오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어느 정도 나눌 수 있었다. 세미나실에 컴퓨터를 설치하는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되어 이번 주에는 잡담 시간이 많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잡담 시간을 하필 이런 이야기로 채울 만한 계기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계기라는 것은, 지난 주에 서울의 어느 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교육학자 한 사람이 우리 학교에 와서 우리 학교 교수들을 상대로 특강을 한 것을 말한다. 특강의 제목은 ‘가르침의 의미’였다. 특강을 하러 삼례까지 내려와 준 교육학자는 교육행정학전공자이다. 그의 전공이 특강 공고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것을 안다. 만나본 지 20년 이상이 지나기는 했지만, 내가 조금 아는 사람이다. 교육학에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육행정학전공자가 ‘가르침의 의미’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특강을 기획한 사람은 우리 과의 K교수, 기독교인 바로 그 K교수이다. 내가 K교수에게 물었다. 이 분을 초빙한 것은 무엇 때문이지요?
K교수는 특강을 수강한 교수님들의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고 말했다. 강의가 끝난 후 수강자들에게 강의자를 평가해주기를 요청하는 모양인데, 대단히 좋은 평가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 과의 교수 중에서는 두 사람이 수강을 하였는데, 이 두 사람도 좋은 평을 내어놓았다. 이번 주에는 톨게이트 근처에 있는 다슬기 전문점에서 다슬기탕(7천원)과 다슬기 수제비(7천원)를 먹었다. 특강을 수강한 두 사람은 다슬기탕을 먹으면서 그 강의의 내용 중 인상적인 부분을 말해주기도 하고 그 강의가 어떻게 좋았는지를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여기에 옮겨놓지는 않겠다. 지금 내 관심은 단지 강의자의 전공과 강의 내용의 상치(相馳) — 그러고 보니 강의자는 이른바 ‘상치 교사’였던 셈이다 — 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상치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다슬기탕집에서, 그런 강의를 기획한 사람을 문책하였던 것은 아니다. 정반대다. 나는 K교수의 기획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것도 바로 그 상치의 측면을 높이 평가했다. 정말이다. 심지어 나는 K교수에게 -- K교수도 공교롭게 강의자와 같은 교육행정학전공자이다 -- 이 강의자처럼 ‘가르침의 의미’라거나 수업 이론 같은 것으로 관심을 넓혀볼 것을 권유했다. 나는 감히 ‘충고’라는 말까지 사용하였다. 수업 이론이건, 어떤 이론이건, 통상적으로 교육행정학의 영역에 포함되지는 않는 영역으로 관심을 넓히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 아니 분명하게 충고하였다. 당신이 인정하여 초청한 이 강의자처럼 해 나가 보라고 충고한 것이다.
K교수는, 겸손한 목소리로, 그러나 역시 분명하게, 자기도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대답하였으며, 어느 정도라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말과 그 말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니, 내가 내 충고를 아직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는 충고의 말을 조금 연장하였다. 나는 ‘옆으로 넓혀나가는 것’과 ‘위로 올라가는 것’을 구분하였다. ‘관심을 넓힌다’는 말은 나 자신이 사용한 표현이지만, 내가 충고한 것은, 한 영역을 공부하다가 그와 관련되는 인접 영역으로 관심을 넓혀나가는 것이 아니다. 내 충고가 따르고 있는 모형은, 말하자면,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한 영역을 공부하되 제대로 하여, 그 공부를 통해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위로 올라가면, 인접 영역이 저절로 눈에 띠고 저절로 관심 범위 안에 들어올 것이다. 예컨대 교육행정학으로부터 직접 수업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교육행정학을 통해 위로 올라간 후 그 위에서 수업을 보고 수업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특강을 하러 서울에서 내려온 교육행정학자는 이렇게 하고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위로 올라갔다면, 어째서 수업이론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은 수업이론만이 아니라 교육학의 다른 영역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 정치학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윤리학, 경제학, 예술이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교육행정학이건, 수업이론이건, 정치학이건, 그것을 ‘제대로 공부한다‘는 것은 또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물론, 교육행정이나 수업, 정치 등을 설명하되, 에덴 동산(신)의 존재를 가정한 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에덴 동산의 인생관(세계관)을 따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라는 것은, 물론, 그 인생관이다. 그것은 하나의 근본적이고 거대한 관점이요, 근본적이고 거대한 이론, 근본적이고 거대한 사고방식으로, 삶의 모든 국면에 빛을 던져줄 수 있다. 삼국지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삼국지는 기껏해야 처세술에 빛을 던져줄 뿐이다. 2편에서, 사람을 가르는 중요한 구분은 삼국지를 읽었는가, 읽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 이야기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근거는 여기에 있다.
반복하거니와, 공부하는 사람이 에덴 동산의 인생관으로 올라가게 되면, 그는 그 관점을 동원하여 수업을 보고 정치를 보며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본다. 다만, 여기에서 에덴 동산의 인생관이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는 무엇, 기성의 무엇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그 관점을 동원하거나 적용하여 새로운 무엇, 예컨대 예술이나 도덕을 볼 때, 사실은 그 관점 자체가 보다 촘촘해거나 충실하게 되는 것이요, 다시 말해, 그 관점 자체가 변형, 발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관점 자체가 바로 그 때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앞에서는 이미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예컨대 교육행정에 관한 공부를 통하여 그 관점에 이른다고, 즉 그 관점을 형성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역시 파라독스가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그 관점이 엉성하게라도, 혹은 허술하게라도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교육행정학 공부는, 사실은,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그러한 엉성한 관점을 적용하는 것이요, 동원하는 것이다. 교육행정학이나 수업이론, 정치학, 예술 이론 등도 이미 있었던 것이며, 에덴 동산의 인생관도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미 있어온 그것들이 서로에 기대여 계속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행정이나 수업, 정치, 예술 등에 관한 수많은 발언들과 그 너머에 있는 하나의 관점이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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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에서 내려온 그 교육행정학자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도 안다. 나는 그가 교육행정학을 ‘제대로’ 공부하여 에덴 동산의 인생관에 오른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며, 그 관점을 동원하여, 가르침의 의미와 같은 수업 이론의 주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본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학문과 자신의 종교를 통합시킨 것이요, 양자 사이의 일관성을 확보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는 통합이 아니라 분열이 목격된다. 그들의 학문은 그들을 어디로도 올려보내지 못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전문가로, 자기 분야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아니,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 분야를 아는 것도 되지 못한다. 또한 그들에게서는 그들의 종교도 그냥 종교로 남아있을 뿐이다. 만약 그들이, 당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당신의 학문인 교육행정학과 연결되게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충고를 듣는다면, 그들은, 예컨대 누가 학교장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교육행정학의 질문에 대해, 기독교 목사님이 학교장이 되어야 한다는 대답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내가 아무리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그런 대답은 지나친 것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상력의 빈곤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빈곤은 그들의 기독교, 즉 에덴 동산 이야기가 ‘위’로 비유된 인생관, 즉 하나의 근본적이고 거대한 관점으로 올라서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결’을 짓자면, 그들은 자기들의 기독교를 평면적으로, 즉 직접적으로 교육행정학에 연결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상상력이 빈곤한 ‘지나친’ 의견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학문 자체가 빈곤하다. 그들은 자신의 공부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공부에 자신의 전부를 흠뻑 던져 넣는 경험을 하지 못해, 그 허전함을 채우고자 다른 것, 특히 종교를 찾는다. 그들이 종교를 찾는 것은 이런 이유이므로, 그들은 종교를 (학문이 추구하는) 이성이나 합리성, 이유 등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 즉 순전한 믿음, 계시, 정서적인 것 등으로 간주한다. 그들에게서는 학문과 종교의 분열이 체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기독교인 K교수에게 제공한 충고는, 그의 교육행정학과 그의 기독교가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지금 여기에 쓴 것처럼 자세하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다슬기집에서 이것과 거의 유사하게 말했다. 그러나, 내가, K교수는 분열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K교수는 이미 학문적 관심을 넓히되, 위로 올라감으로써 넓히는 그 일, 그리고 그 ‘위’를 자신의 신과 관련짓는 그 일 — 이런 일을 이미 착실하게 실행해 온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지 모른다. 이것은 공연한 소리가 아니다. 나는 K교수의 저서를 최소한 두 권은 읽어 보았으며, 그 저서에서 예컨대 마이클 폴라니와 마틴 부버 등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이클 폴라니의 ‘자득지’(Personal Knowledge)는 과학의 ‘위’에 있는 것이며, 마틴 부버의 ‘나-너의 관계’는 ‘나-그것의 관계’의 ‘위’에 있는 것이다. 그 ‘위’에 있는 것들은, 내가 지금까지 말한 그 ‘위’, 즉 에덴 동산이다. 그러므로 내가 K교수에게 준 충고는, 본인이 이미 착실히 수행해오고 있는 그 일을, 본인이 분명하게 의식하고, 장차 더욱 의식적으로 수행하라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수행’이 아니라 ‘의식’에 대해서는 K교수도 내 지적을 수용할지 모른다. 아무래도 그는 그러한 통합을 ‘의식적으로’ 수행하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통합의 수행이 남들의 눈에 잘 띠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의 통합이 눈에 잘 띠지 않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지 모른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좋은 기독교인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목사님들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종교가 교회 안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교회 가는 길이나 가정 생활, 직장 생활, 투표장 등등 삶의 모든 국면에서 발휘되게 하는 사람이다. 그의 처신이나 행동을 보면, 그는 영락없는 기독교인이요, 언제나 어디서나 기독교인 것이다. 그는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이되, 특히 자기 자신에게 원칙의 잣대를 엄중하게 들이대며, 남들에게는 상당히 관대한 편으로, 그를 규정짓는 또 다른 말은 따뜻하고 배려심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덴 동산의 인생관을 삶의 모든 국면에 넘쳐흐르게 하는 것(통합)이되, 목사님들의 가르침을 따라, 삶의 모든 국면을 ‘살아가는 데에’ 넘쳐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좋은 사람이다. 다만, 그것은 공부하는 사람의 지침인, 삶의 모든 국면을 ‘이해하는 데에’ 넘쳐흐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주의 오찬은 이것으로 끝났다. 우리는 다슬기집을 나와 삼례문화예술촌 인근에 있는 커피숍 ‘휴앤안’(休 and 安)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여기에는 내 쿠폰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번 주의 방문으로 도장을 무려 다섯 개나 찍게 되어 열 개를 다 채우고 말았다. 다음 번에 가면 커피 한 잔을 무료로 먹을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 떠올라 그것에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다슬기집을 나오기 직전에 젊은 여교수 S교수가 특강의 제목인 ‘가르침의 의미’를 거론하면서, 그것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의 의미’도 문제가 되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그 때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였을까? 다슬기집에서 내가 한 말을 근거로 대답한다면, 연구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문명, 즉 에덴의 동쪽, 즉 우리가 사는 이곳을 탐구하는 일이되, 그 일을 통하여 에덴의 경지에 올라, 그 경지에서, 우리가 사는 이곳의 또 다른 면모를 보아내는 일이다. 물론, 이 대답은 너무 엉성하고 너무 허술하다. 대답의 방향이 올바르다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이 간다. 그런 만큼 그 대답을 조금 더 촘촘하고 조금 더 충실하게 내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