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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とうごう しげのり) 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태평양 전쟁 전쟁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다. A급 전범 중 유일한 한국인이다. 본명은 조선식 이름인 박무덕(朴茂德). 독일 대사, 소련 대사를 거쳐 외무대신을 두 번 지냈다. 임진왜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부대에 연행되어 일본에 끌려온 도공 박평의(朴平意,1558∼1623)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박평의의 12대손 박수승(朴壽勝, 1855∼1936)으로 사족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도자기로 번 돈으로 도고(東鄕)라는 일본 성씨를 사서 완전히 귀화하였다. 박무덕(朴茂德, 1882∼1950)은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라는 이름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독문과에 진학하였다. 아버지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현의회 의원을 꿈꾼 적도 있었기 때문에 수재인 아들이 법과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를 하고 지사(知事)라도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택한 독문과였으나 아버지의 기대대로 서른한 살에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아버지 수승은 상당히 기뻐했다 한다. 비록 내무관료의 길은 아닐지라도 그야말로 신분과 팔자를 바꾸는 큰일을 해낸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졸업 후 1912년에 외무성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외교관으로 데뷔하였다. 그는 스위스, 독일, 소련 등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1941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입각했다.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태평양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부세력에 부딪혀 뜻이 관철되지 않자 사임한다. 그리고 패전이 가까워 도조 내각이 총사퇴하고 스즈키 간타로(鈴本貫太郞)내각이 들어섰을 때 전쟁을 종결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은 도고 시게노리밖에 없다고 하여 다시 외무대신이 되었다. 포츠담 선언을 두고 시게노리는 군부세력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그는 어전회의에서 천황에게 직접 건의하여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함으로써 전쟁을 종결로 이끌었다. 그러나 전범재판에서 그는 진주만 폭격 당시 외무대신으로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20년 금고형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뒤 옥중에서 황달이 악화되어 1950년 7월,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감옥에 있을 때 13대 심수관은 면회를 가 위로했다고 한다. 도고는 A급 전범으로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되어 있다.
도고 시게노리는 조선 총독부 청사의 설계자문을 맡아 기초설계를 했던 G. 랄란데(G. de Lalande)의 미망인 에디타와 1921년 베를린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은 모두 외교관이 되었다. 장녀의 남편은 모토시로(本城)씨였으나 도고가로 입적했다. 그는 주미대사와 외무차관이 되었고 아들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외무성에 들어가 주 네덜란드 대사를 역임하게 된다. 도고 집안은 일본 외교가의 명문이 되었다.
미산(美山)마을 심수관요에서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시교육위원회에서 세운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입구 키 큰 나무 아래에는 작은 동상이 서있고 아담한 기념관 안에는 그의 일생을 보여주는 사진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한쪽 빈 공간의 통유리창 너머로는 그의 선조들이 일하던 노보리 가마터가 보인다. 홀에는 몇 개의 테이블이 있고 자료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게 해놓았다. 그가 옥중에서 쓴 수기인 ‘시대의 일면(一面)’도 있고 기념관에서 발간한 각종 팸플릿도 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미산마을 입구엔 ‘미야마(美山)의 아이들아 지지 말아라. 힘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겨라. 도고 선배를 본받아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고 학생들이 행진할 때는 운에 맞추어 이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도고 시게노리는 조선 도공 후예의 또 다른 변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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