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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의 천지, 승리섬 ⑦
낙도본부총회 - 광포의 스승 슬하로 (상)
“길이 먼 것에 뜻이 나타나는 것일까.”(어서 1223쪽)
가마쿠라에서 사도에 계신 니치렌(日蓮) 대성인을 방문한
문하의 구도심을 찬탄하여 쓰신 어서의 한 구절이다.
낙도의 동지가 이 글에 담긴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학회본부에 모인 때는
1978년 10월 7일.
얼굴이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눈동자가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광선유포의 스승 슬하에 모인 기쁨과 긍지에 찬 모습이 빛나고 있었다.
노고하는 사람을 혼신의 힘을 다해
격려하는 일이 창가의 사명이다
각 섬에 빛을 비춘다
창가(創價)의 사상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지역공헌에 힘쓰는 낙도의 벗.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늘 다기진 섬 동지의 행복을 염원하며 편지나 메시지를 보내고, 휘호나 시를 써서, 또 바다를 건너 회합에 참석한 벗을 초대해 간담하는 등, 거듭 격려했다.
어떻게 하면 동지에게 더욱더 용기를 북돋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벗의 마음에 희망의 등불을 비출 수 있을까.
광포의 스승은 일기일회(一期一會, 일생에 한번 만나는 인연)라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사색하고 모든 방법을 써서 격려를 계속했다.
소설 《신·인간혁명》에 섬의 동지에게 보내는 진심을 적었다.
“창가학회 조직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진실한 불법(佛法)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가르치고, 사람들을 격려하고,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에 이르도록 손을 내밀고, 서로 절차탁마하기 위해 있다. 따라서 가장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 신심에 힘쓰는 사람일수록 가장 힘을 쏟아 격려하고 북돋아주어야 한다.
각 섬에 사는 학회원은 많지는 않지만 대도시에만 관심을 쏟고 각 섬에 빛을 비추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모든 사람의 행복을 구축한다’는 학회의 사명을 이룰 수 없다.
신이치는 전부터 섬의 동지가 희망에 불타 용기를 내어 발랄하게 전진하도록 격려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제28권 ‘승리섬’)
리더가 철저히 움직여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낙도본부 설치
선생님은 자신의 의견을 최고간부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검토를 거듭해 1974년 1월, 낙도본부(훗날 승리섬부)를 설치했다.
[당시의 이야기] - 미시마 세이시 씨
저는 낙도인 구마모토 아마쿠사 출신으로 낙도본부 초대 본부장을 맡았습니다.
낙도본부를 결성하기 전해 가을에 중심멤버가 이케다 선생님 슬하에 모였습니다. 선생님은 “앞으로는 낙도에 힘을 쏟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광선유포는 낙도부터! 낙도에서 본토로 광포의 흐름을 일으켜야 합니다!” 하고 힘차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오키나와의 야에야마, 미야코제도(諸島) 지도에 동행했습니다. 내외를 불문하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선생님의 모습과 지역문화를 중심으로 한 축제, 제정령추선법요 등 선생님이 하나하나 손을 쓰시는 모습이 앞으로 낙도광포의 본보기구나 하고 크게 감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그때까지 낙도는 ‘현에 딸린 한 조직’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섬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셨다고 생각합니다. “본부에서 직접 섬에 격려하러 가야 합니다.” 하고 우리에게 낙도멤버의 격려를 부탁하고 파견해주셨습니다. 낙도를 방문하고 돌아오면 상세하게 보고를 듣고 새롭게 격려의 손을 써주셨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배려로 낙도본부는 학회본부 직결의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에히메현 나카지마섬의 벗과 함께
낙도본부 결성에 즈음해 이케다 선생님은 직접 낙도의 동지와 간담하고 상황을 듣고 의견을 구했다.
그중 하나가 귤로 유명한 에히메현의 나카지마섬이었다.
낙도본부가 결성되기 두 달 전인 1973년 11월 11일, 이케다 선생님은 마쓰야마시에서 열린 에히메현 간부총회에 참석하고, 그뒤 나카지마섬에서 참석한 멤버들은 마쓰야마회관으로 갔다.
나카지마섬의 동지들이 회관에 도착하자 당시 이사장이 마중을 나와 말했다. “지금 선생님은 낙도에 사는 여러분을 위한 조직을 만들려고 구상하고 계십니다. 나카지마섬의 상황을 말씀해주십시오.”
멤버들은 놀라면서도 나카지마섬과 쓰와지섬, 누와섬 등 여섯개 섬으로 이루어진 총블록을 무대로 활동하는 모습을 말했다.
[당시의 이야기] - 후나쓰키 아키라 씨
그 간담에는 총블럭장, 총블럭위원인 다케나와 씨 부부와 제가 참석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2층에서 내려오신 이케다 선생님은 “함께 근행합시다.”라며 감사하게도 밖에서 기다리던 아내와 부모님도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하시며 함께 근행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근행을 마치고 우리 쪽으로 돌아앉아 맨앞에 있던 제게 ‘이걸 자네에게 주겠다’며 간부총회에서 선생님이 가슴에 달았던 멋진 흉장을 주시고 “나카지마섬의 총지휘관이 되어주세요. 나카지마섬을 부탁합니다. 건강하세요.” 하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섬의 광포를 책임지고 일어서자고 결심했습니다.
그 뒤 선생님과 30분 이상 간담했습니다. 총블럭장인 다케나와 씨가 “선생님, 나카지마섬에 꼭 와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자 선생님은 “나카지마에는 비행기로 가나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배로 갑니다!” “고속여객선을 타고 갑니다!” 하고 모두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지도를 갖고 오세요.” 하고 지도를 펼쳐 마쓰야마 앞바다에 있는 나카지마섬을 비롯해 우리 총블럭의 섬들을 보며 “이런, 아주 가깝지 않은가. 다음에 우와섬 방면으로 갈 때 나카지마섬에도 가고 싶군요. 그런데 숙박할 곳은 있나요? 근행할 장소는 있나요?” 하고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날을 원점으로 나카지마섬의 멤버들이 섬 사람들에게 신뢰와 공감을 넓히며 모든 것에 승리하자고 단결해 섬의 광포를 위해 꿋꿋이 달렸습니다.
나카지마섬의 벗과 간담하고서 두달 뒤, 낙도본부를 결성했다. 선생님은 “낙도본부의 간부는 철저히 낙도를 돌며 격려에 힘을 쏟기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지도했다.
그 말을 가슴에 품고 낙도본부장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나카지마섬이었다.
멤버들은 낙도광포의 선두에 서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구습으로 인한 몰이해의 벽을 부수고 지금은 세이쿄신문 구독을 늘리는 등 늘 총에히메를 이끄는 모범적인 확대를 해냈다.
또 중심자인 다케나와 씨 부부는 선생님과 나눈 간담을 원점으로 삼아 ‘숙박할 곳’ ‘근행할 장소’ 그리고 섬 광포의 거점인 광포의 회합장소 건설을 결의하고 9개월 뒤 1974년 7월에 낙성기념근행회를 개최했다.
1985년 2월에는 선생님이 마쓰야마공항을 향해 하강하는 비행기 안에서 누와섬과 나카지마섬을 촬영했다. 동지들은 선생님이 섬을 촬영해주신 것은 직접 섬을 방문하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기뻐하며 꿋꿋이 투쟁했다.
사이좋게 상식 풍부하게
큰마음으로 나아가자
진심어린 환대
낙도본부를 결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25일, 기리시마섬의 규슈종합연수원에서 제1회 대표자회의를 개최했다.
규슈의 각 지역에서 모인 멤버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이케다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오셨어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선생님은 벗과 악수를 나누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 진심에 동지는 감동이 복받쳐 섬의 광포를 더욱 굳게 맹세했다.
그리고 대표자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도 선생님은 멤버들을 배웅하러 나왔다.
“여러분에게 섬을 부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움직인 만큼, 대화한 만큼 광선유포는 전진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활약을 그리고 섬의 번영을 힘껏 기원하겠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목을 보내겠습니다. 마음만은 늘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을 쭉 지켜보겠습니다.”
“내가 사는 섬의 모든 사람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사이좋게 상식 풍부하게 큰마음으로 나아가주십시오. 신뢰의 거목이 되어 섬사람들을 포용하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벗의 마음에 희망의 등불을 비추고자 혼신을 다해 격려를 거듭했다.
섬의 발전을 위해
각 섬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각 방면에 낙도장과 지역장, 섬장을 두었다.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리더 스스로 섬에 건너가 격려를 거듭했다.
낙도 중에는 섬에 사는 회원이 1세대나 수세대밖에 없는 곳도 많았다. 고군분투하는 동지들을 격려하고 지역공헌을 전개하는 벗을 뒤에서 돕기 위해 담당 간부는 온 힘을 기울였다.
섬의 동지도 또한 지역발전을 위해 서로 지혜를 짜내어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있는 그대로 학회의 모습을 전하는 영상물 상영회와 도서 증정, 향토문화의 보존과 계승의 의미를 담은 페스티벌 등 연구를 거듭했다.
“섬사람들은 섬을 위해 공헌하는 학회의 모습을 보고 창가학회의 실상을 알고 학회를 깊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법을 체현하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의 행동이 광포를 확대하는 열쇠가 된다.
학회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로 박해의 폭풍우가 거세계 휘몰아친 지역에서도 학회원에 대한 신뢰가 깊어져 ‘비난’은 ‘상찬’으로 바뀌었다. 각 섬의 동지들은 광선유포를 향한 결의를 더욱더 불태웠다.”(소설 《신·인간혁명》 제28권 ‘승리섬’)
학회본부에 집결
도쿄 시나노마치에서는 제1회 낙도본부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모인 낙도에서 온 벗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78년 10월 7일, 창가문화회관에서 개최한 총회에는 전국의 약 120개 섬에서 대표가 모였다. 처음 학회본부를 방문한 멤버도 많았다.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광포의 스승 곁으로 달려온 벗의 얼굴은 기쁨에 넘쳤다.
존귀한 낙도의 동지를 맞이하는 진심을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처음 상경한 분들도 많았다. 힘든 생활 속에서 생활비를 아껴 어렵게 모은 돈을 몽땅 털어 달려온 동지도 분명히 계시리라.
주위가 학회를 몰이해하여 고통받으면서도 다시 새롭게 결의를 다지려고 온 벗도 있었다. 나는 전날부터 잇달아 보고를 받으면서 참석자의 무사고를 기원하고 모두를 기다렸다.” (‘수필 신·인간혁명’)
그리고 이날 선생님은 낙도멤버의 격려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혼의 대관식을 해주고 싶다
낙도본부총회에 앞서 열린 ‘오키나와지부장회’ 참석자와 창가부인회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낙도의 부인부 대표와 간담시간을 가졌다. 그 후 낙도본부총회가 열린 창가문화회관으로 가는 도중에 본부 주변을 오가는 낙도의 벗에게 말을 건네며 격려했다.
만나고 싶었어요!
오후 6시 전, 회합장소의 옆문이 열리자 “우와” 하고 함성이 일었다. 이케다 선생님이 모습을 나타냈다. 선생님은 그대로 참석자들 사이를 지나갔다. “잘 오셨어요! 잘 오셨습니다! 만나고 싶었어요!”라고 말을 건네며 악수를 나누고 한사람 한사람의 모습을 눈에 새겨 넣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이 존귀한 분들의 마음을 아플 정도로 느꼈다. 그 한분 한분에게 혼의 대관식을 해드리고 싶었다.” (‘수필 신·인간혁명’)
선생님은 장내를 돌고 나서 마이크를 잡았다.
“낙도본부 제1회 총회 축하합니다! 멀리서 잘 오셨습니다.”
처음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본 멤버도 많았다. 따뜻한 목소리의 울림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벗도 있었다.
“먼저 여러분과 함께 근행을 하겠습니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근행을 시작했다. 환희에 넘친 경쾌한 근행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간부인사에 이어 선생님의 스피치로 옮겼다. 선생님의 재촉으로 참석자들이 선생님을 둘러싸듯이 앉았다. 형식에 얽매인 분위기가 아닌 가족모임 같은 따뜻함이 장내를 감쌌다.
“어느 섬에서 오셨나요?”라는 선생님의 물음에 사회자가 각 섬의 이름을 잇달아 소개했다. 그때마다 멤버들은 자랑스럽게 일어나 박수를 치며 서로 격려했다. 아름다운 광경은 잠시 동안 계속됐다. “드디어 이날을 맞이했군요!” 하고 벗의 얼굴은 환희에 넘쳤다.
[당시의 이야기] - 가와이 노리코 씨
낙도총회가 열린 해 3월, 우리 홋카이도의 리시리섬 그리고 이웃한 레분섬에 이케다 선생님이 시를 보내주셨습니다.
“아득한/ 리시리섬의/ 벗을 생각하며/ 아침저녁으로/ 나무(南無)하며 기원한다”
“레분에/ 단호히 수호하는/ 광선의/ 그대 있고 벗이 있어/ 나무(南無)하며 바라본다”
선생님은 매우 바쁜 집무시간에 짬을 내어 일본의 가장 북쪽에 있는 우리에게 진심 어린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깊은 마음에 ‘총회까지 투쟁하고 모이자!’고 낙도광포의 결의는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총회에서 선생님은 “오늘은 어느 섬에서 오셨나요?” “잘 오셨어요.”하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따뜻한 격려를 받고 고속여객선과 열차를 타고 먼 길을 달려온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그 순간 ‘생애 스승과 함께하자’고 결의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는 제1차 종문(宗門)사건의 와중이었습니다.
그 뒤 제가 사는 리시리섬도 장마(障魔)의 폭풍우가 거세게 휘몰아쳤지만 그때마다 이케다 선생님과 새긴 원점을 떠올리며 정의로운 대화를 전개했습니다. 제2차 종문사건을 거쳐 정사(正邪)의 현증(現證)은 엄연히 나타나 지금은 리시리섬에 닛켄종의 절은 없습니다.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신뢰를 넓힌 학회는 이해와 공감의 유대를 크게 넓혔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복운의 역사를 구축하고 싶다
한 개의 섬은 한 나라를 의미
선생님은 자랑스럽게 일어선 멤버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그리고 “멀리서 학회본부에 모인 여러분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만족하고 더욱 젊어지기 바랍니다. 또 추억을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진심으로 바라는 일입니다.”라고 각 섬을 생각하는 듯이 말했다.
“저는 지금이라도 당장 각 섬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낙도에 사시는 벗이 행복하기를 늘 바라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이 사랑하는 섬으로 용감하게 달려가 함께 섬을 발전시키고 복운을 쌓는 역사를 구축하고 싶습니다. 예전부터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스승의 진심을 느끼고 낙도의 벗은 감동이 복받쳤다.
이어서 선생님은 오늘의 총회 개최를 기념해 10월 7일을 중심으로 내년에는 제2회 총회를, 내후년에는 제3회 총회를 열어 해마다 낙도본부의 즐거운 전통으로 만들자고 제안해 찬동과 기쁨의 박수가 울려 퍼졌다.
선생님은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은 광선유포 제1기를 추진하고 훌륭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실증이 바로 오늘의 훌륭한 모습입니다. 오늘 제1회 총회를 마디로 섬의 광선유포 제2기를 향해 용약 출발하기 바랍니다.”
모두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섬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라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섬의 번영을 위해 활약하는 여러분은 태양이 뜨면 지구 전체가 밝아지는 것처럼 신심 강성한 학회원이 한 사람만 있으면 섬 전체가 희망에 감싸이고 환희에 넘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은 한사람 한사람이 그러한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기 바랍니다.”
[당시의 이야기] - 다카토이 미즈코 씨
1968년 9월 14일, 처음으로 옷카나이에 지도하러 오신 선생님을 뵙고, 구도하던 ‘인생의 스승’을 만난 것이 저의 원점입니다.
그 10년 뒤 제1회 낙도총회에서는 지부부인부장으로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섬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라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힘찬 말씀에 ‘그렇다. 이 섬은 일본의 축소판이다. 섬의 광포가 추진되면 일본의 광포가 추진된다!’고 결의하고, 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리시리후지’를 우러러보며 학회 이해의 유대를 넓혔습니다.
총회 2년 뒤,제1차 종문사건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속에 ‘리시리섬 우호 페스티벌’을 개최해 우인과 내빈을 포함해 약 900명이 모였습니다. 섬으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큰 행사가 되었습니다. 모두 환희에 넘쳐 리시리섬 우호확대의 빛나는 대승리의 역사를 남겼습니다.
일상의 행동
선생님은 더욱 힘차게 말했다.
“각자의 섬에서는 어디까지나 견실하게 광선유포의 길을 걷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이 신심 강성한 학회원이 되십시오. 무엇보다 일상생활에서 현명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섬은 좁은 사회이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누구와도 사이좋게 협조하고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크게 포용하며 인간성 풍부하게 전진하기 바랍니다.”
참석자는 마음에 새기듯이 스승의 말을 들었다.
선생님은 염원하듯 말했다.
“사소한 일로 다투거나 서로 미워하거나 배타적이 되면 절대 안 됩니다. 또 고립되어도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간의 눈으로 보아도 ‘역시 훌륭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총명한 활약을 부탁합니다. 그것이 광선유포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확신하고 가까운 곳부터 착실히 신심의 뿌리를 내리기 바랍니다.”
동지의 눈동자가 빛났다. 사랑하는 섬에서 투쟁하겠다는 사명감을 더욱 깊고 강하게 북돋웠다.
가까운 곳부터
착실히 신심의 뿌리를 내리자
미야기현 아지섬부터
총회에는 도호쿠의 낙도에서도 멤버들이 모였다.
그중 하나인 미야기현의 아지섬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지금까지 대규모 개발도 이루어지지 않아 자연상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섬이다.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해수욕장이 있어 여름에는 많은 피서객이 섬을 찾는다. 또 역사적으로는 러시아와 첫 교역을 한 곳이어서 말고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역사를 느끼는 장소이기도 하다.
면적 약 6제곱킬로미터인 작은 아지섬에서는 섬주민끼리 밀접한 유대를 맺고 있으며 주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학회에 입회하는 벗이 나왔을 때도 그 반응이 나타났다.
[당시의 이야기] - 아베 가네오 씨
1955년, 아지섬에 있는 우리 집에 어본존을 모셨을 때는 심한 험담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업에 종사하는 우리 집에는 고기잡이배가 있는데 그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학회활동에 힘썼습니다. 어획량에서 섬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실증을 내면서 주위의 야유와 잡음을 잠재웠습니다.
당시는 저도 ‘바보 취급을 당할 성 싶으냐’며 당당히 맞서고, 혈기왕성하게 행동하며 도발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총회에서 ‘다투거나 서로 미워하거나 배타적으로 행동하면 절대 안 된다’는 이케다 선생님의 지도를 듣고 나서 반성하고 섬 발전에 힘쓰자고 결심했습니다.
근해의 어획량이 줄어 물고기를 잡는 것만으로는 타산이 맞지 않게 되었을 무렵, 섬에서 처음으로 양식업을 시작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미래에 남길 섬의 산업기반을 구축한다는 마음으로 기원하고 도전해 미역양식을 궤도에 올려놓았습니다.
맛도 호평을 받아 하나둘씩 양식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늘어 섬의 기간산업으로 정착하였습니다.
1984년에는 아지섬우호제를 개최해 섬 밖의 사람들까지 합쳐 420명이 참석해 학회를 널리 알리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지금 여든일곱이 되어 일에서는 손을 뗐지만 전복과 성게잡이 금지기간이 끝나면 물질을 해서 따온 해산물로 식탁을 풍성하게 채웁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웃는 것이 가장 큰 공덕이라고 날마다 실감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기원하면서 저답게 섬에서 희망의 등대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미래 영원히 번영하는
복운의 뿌리를!
<개목초>의 한 구절
총회 마지막에 선생님은 유명한 <개목초>의 한 구절을 배독했다.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는 제난(諸難)이 있을지라도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佛界)에 이르리라. 천(天)의 가호가 없음을 의심하지 말 것이며 현세가 안온하지 않음을 한탄하지 말지어다. 나의 제자에게 조석으로 가르쳐왔건만 의심을 일으켜서 모두 버렸으리라.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어서 234쪽)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의 혼을 뒤흔드는 심정으로 말했다.
“여러분도 다시금 신심의 극리를 설한 이 구절을 생명에 깊이 새기고, 일가친척이 미래 영원히 번영할 수 있도록 복운의 뿌리가 되어 활약하기 바랍니다. 섬 여러분에게 부디 안부 전해주십시오.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울려 퍼지며 제1회 낙도본부총회가 끝났다. 이 10월 7일이 훗날 ‘낙도본부의 날’(현재 승리섬부의 날)이 되었다.
‘10·7’의 맹세를 가슴에 품고 승리섬부의 벗은 사명의 천지에서 복운의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승리의 거목이, 행복의 꽃이 이 섬에도 저 섬에도 크게 자라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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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