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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아양마(衙養馬)
정의
각 군현에서 분양받아 기르는 말.
개설
말은 전근대 주요 운송 수단으로서 기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군대의 기동력을 좌우하는 요소로서 활용도가 매우 높았다. 조선 정부는 1392년(태조 1)에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사복시(司僕寺)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마정(馬政)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각 도에 관설목장(官設牧場)을 설치하거나 각 군현에 말을 배정하여 말을 사육하도록 하였다.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 공물(貢物)을 현물로 납부하던 공납제(貢納制)에서는 각 군현에 분양한 말을 서울로 거두어들일 때 수송 과정에 필요한 비용은 사복시가 아닌 해당 군현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마장가목(馬裝價木)·고실가(故失價)·견군가(牽軍價) 등의 수송 관련 비용이 대동미(大同米)에 포함되어 지급되었다.
내용 및 특징
현물 공납제 하에서는 사복시에서 각 군현에 분양했던 소나 말을 서울로 거두어들일 때 드는 비용에 대해서는 규정을 마련해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와 관련된 비용을 각 군현에 부담시켜 추가적으로 징수하였다. 예를 들어 사복시에는 각 군현에서 분양마를 상납할 때 말을 치장하는 데 드는 비용인 마장가목을 징수하였다. 또 분양마를 잃어버릴 경우 이를 변상하는 고실가도 책정해 두었다. 1594년(선조 27) 경기감사 김수(金睟)는 사복시에서 분양마 고실가를 시가(時價)의 2배나 책정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선조실록』 37년 2월 16일].
대동법에서는 각 군현에서 분양마를 상납할 때 마장가목 2필을 해당 관의 유치미(留置米)에서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고실가에 대해서는 말 1필에 속전(贖錢) 60냥을 변상하되 30냥은 말을 길렀던 사양자(飼養者)가 부담하고 30냥은 유치미에서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충청도·전라도에 배정한 분양마를 사복시에 상납할 때에는 말 1필에 말몰이꾼인 견군(牽軍) 1명씩을 배정하여 그 역가(役價)를 해당 관의 대동미에서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분양마 고실가는 말 1필에 가포(價布) 40필을 책징하되, 20필은 해당 관의 대동미에서 지급하고 20필은 사양자가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경비는 불시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임시비에 속하는 것이었다.
『속대전』 「병전(兵典)」 구목(廐牧)에 따르면, 각 군현에 분양한 말이 죽거나 여위거나 또는 길들지 않았으면 수령을 논죄하였다. 1필이면 엄중히 추문하고, 2필이면 1자급을 강등하며, 3필이면 2자급을 강등하고, 4필이면 파직하였다. 말이 죽었을 경우에는 살아 있는 말로서 추징하였다. 말이 죽거나 여위어서 응당 2자급을 강등할 경우, 당상관이면 자급을 강등하고 당하관이면 녹봉을 감봉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내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말의 육성과 관리는 상당 부분 지방관아와 민간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지방유치미 내에 민간의 말을 빌려 사용하는 쇄마(刷馬) 비용뿐 아니라 말을 상납할 때 드는 비용이나 잃어버렸을 때 내는 비용 등을 포함시켰다. 이는 말의 상납 및 관리 비용을 지방 경비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조선후기에는 고마법이 성립하여 관에서 직접 말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민간의 말을 사용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고마청과 같은 민고의 출현 역시 이러한 지방 재정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Ⅲ』, 일조각, 1988.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6.
양대(涼臺)
정의
갓의 챙에 해당하는 둥근 테 부분.
개설
양대는 주로 제주도에서 생산되었으며 개성·안성 등지에서도 생산되었다. 양대로 만드는 갓은 조선시대 남성의 생활필수품으로서 없어서는 안 될 품목이었다. 본래 양대의 무역에는 양대전(凉臺廛)이 중간상인으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9세기부터 개성상인(開城商人)이 성장하면서 양대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자 중 하나였다. 갓은 챙에 해당하는 양대와 갓의 위 둥근 부분인 총모로 나뉜다.
갓을 만드는 작업은 크게 3단계로 나뉘었다. 첫째, 대나무를 잘게 쪼개 만든 가는 실로 레코드판처럼 만드는 작업(양대), 둘째, 말총을 엮어 총모를 만드는 작업, 셋째, 이 둘을 합쳐 명주를 입히고 옻칠로 완성하는 작업이었다. 이 3가지 과정은 서로 재료가 다르고 솜씨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보통 생산지를 달리하여 따로 진행되었다.
갓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필수품이고, 그만큼 상품성이 높았다. 갓의 두 요소인 양대와 총모는 모두 제주도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며, 육지에서 생산되는 곡식과 교역되는 중요한 상품이었다[『정조실록』 10년 10월 5일]. 양대가 육지로 반출될 때는 주로 강진과 해남 등지를 거쳤으므로, 이곳은 양대의 집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중간상인을 거쳐 서울의 양대전으로 전매(專賣)되었다. 양대전은 양대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시전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엽이 되면 개성상인들이 강진과 해남 등지로 진출하여 제주도에서 건너오는 양대를 매점(買占)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전국의 각 도시에 직접 전매하여 서울의 양대전은 상품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성상인의 양대도고(都庫) 행위는 차차 그 상품이 북상하는 길을 따라 그것이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나 기타 중요 상업 도시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즉, 개성상인들은 해남·강진 이외에 개성·안성과 같은 곳에서도 양대를 매점한 것이었다. 이는 제주 지역 양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양대가 서울로 운반되는 것을, 그 주요 관문이던 안성이나 개성에서 매점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전과 같은 관상도고를 대신해서 개성상인과 같은 상인들이 점차 유통계를 장악해 가고 있음을 보이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변천
갓 중에서 양대는 늘 일정한 크기가 아니었고, 유행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졌다. 광해군대에는 큰 갓이 유행하다가 숙종대에는 다시 좁아졌다. 영·정조대를 거쳐 순조대에는 역사상 가장 넓어 지름이 70~80cm에 이르기도 하였다.
1884년 의제개혁 때 간소화 규정에 따라 역사상 가장 좁게 만들어졌다가 개화와 함께 소멸하였다.
참고문헌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4.
정형지, 「조선 후기 교제창의 설치와 운영: 18세기 나리포창 사례를 중심으로」, 『이대사원』 28, 1995.
양입위출(量入爲出)
정의
재정 수입을 기준으로 지출 경비를 맞추고 어떤 일이 있어도 거둔 것 안에서 지출하고자 한 재정 운영의 원리.
개설
근대적 세입(歲入)과 세출(歲出) 예산안에 비견되는 조선시대의 문서는 공안(貢案)과 횡간(橫看)이었다. 『대전회통』 「호전(戶典)」의 첫 항목에 기재된 경비 조항에 의하면, 『경국대전』 작성 당시 중앙의 경비는 횡간과 공안을 활용하였다.
1746년(영조 22) 『속대전』의 편찬 이후 대동사목(大同事目)을 참고로 활용한다[參用]는 조항이 추가되었고, 1785년(정조 9) 『대전통편』에 이르면 다시 『탁지정례』를 참고로 활용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조선의 재정 운영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것은 양입위출의 원칙이었다. 양입위출과 대비되는 개념은 양출위입(量出爲入)이었다. 양입위출은 재정 수입을 기준으로 재정 지출을 맞추는 것이고, 양출위입은 재정 지출을 기준으로 재정 수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전자는 거둔 만큼 쓰는 것이고, 후자는 쓸 만큼 거두는 것을 뜻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의 재정 운영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것은 양입위출의 원칙이었다. 이것의 의미는 첫째, 확보된 조세의 수입에 따라 지출하는 것을 뜻하였다. 이는 국가가 백성에게 거둘 수 있는 재정 규모를 미리 예측하고 그에 맞춰 지출을 짜는 방식을 말하였다. 둘째, 거둔 세금이 부족하다고 해서 백성에게 추가로 세금을 더 거두는 첩징(疊徵)과 가징(加徵)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것이었다. 양입위출과 양출위입은 재정 수입과 지출을 맞추어 균형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양출위입은 재정 운영을 문란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단순히 재정 지출과 수입의 균형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수입과 지출의 균형뿐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기준점으로서의 재정 수입을 강조한 것이었다. 규정된 세입 이상을 수취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의 양입위출은 현실에서 첩징과 가징의 금지를 뜻하였다. 이것은 심지어 인조 초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 추진 당시에 이 법의 즉각적인 실시에 반대했던 김장생(金長生)도 요청한 사항이었다. 그는 공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첩징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였다.
셋째, 조세의 수취 규모가 백성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낮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 의미인 첩징이나 가징의 금지가 수취액의 고정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이 세 번째 의미는 고정된 세입의 실질적인 규모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측면에서 양입위출과 양출위입의 개념상에 약간의 혼란을 불러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대동법이 성립될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유형원(柳馨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동법의 원칙을 양입위출이 아닌 양출위입으로 이해하였다.
이런 인식이 빚어진 이유는 대동법의 성립 과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즉, 공물변통론(貢物變通論)의 하나인 대동법이 또 다른 유력한 공물변통론이었던 공안개정론(貢案改正論)과 경쟁하면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공안개정론의 가장 중심적 주장은 공안의 개정을 통하여 공물과 진상, 특히 진상 액수를 줄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경작지의 결(結)당 수취 액수의 인하를 주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충청도대동사목』과 『전라도대동사목』에 따르면 대동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대동법 실시 이전의 정부의 공적 지출 규모가 축소되지는 않았다. 비록 공물과 진상 수취와 관련된 중간 과정의 불합리와 비리가 제거되기는 하였지만, 최종적으로 국가에서 거두어들이는 몫 자체가 줄지는 않았던 것이다. 대동법에서의 결당 수취 액수는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왕실과 중앙정부가 지출하던 몫을 계속해서 조달할 수 있을 만큼 수취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실제로 대동법의 윈칙은 지출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양출위입이었던 셈이다.
대동법과 공안개정론은 모두 양입위출을 재정 원칙으로 하였다. 중요한 점은 같은 원칙에 대하여 양자의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대동법이 ‘입(入)’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공안개정론은 ‘출(出)’에 강조점을 두었다. 대동법에서 가장 강조했던 것은 규정된 양을 한 번 거둔 후 다시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동사목』의 많은 규정들은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걷지 않으려면 미리 정해진 규정에 따라 지출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했다. 수취량을 객관화하기 위해서 세금을 경작지인 전결에 따라 부과해야 했고, 세금은 현물이 아닌 쌀·포 등 당시 화폐의 기능을 하던 물품으로 거두도록 법적으로 규정해야 했다. 반면에 공안개정론은 어공(御供)·진상·경각사(京各司)의 지출에 대해서 절약을 강조하였다.
대동법은 조선건국 이래의 재정 원칙인 양입위출의 원칙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전통적 입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변통의 모습을 취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변천
대동법의 재정사(財政史)적 의미는 양입위출의 원리에서 ‘입(入)’의 객관적 수취 기준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법적 강제성을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토지에 준하여 결당 12두(斗)의 대동세를 거두되, 지역을 고려하여 쌀과 포목으로 일괄 수취하는 방식으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요컨대 공물 부과 기준으로서의 전결과 수취 단위로서의 미·포는 대동법이 작동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것은 양입위출이라는 규정과 결합해서만 그럴 수 있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탁지정례(度支定例)』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Ⅰ』, 일조각, 1984.
박도식, 『조선 전기 공납제 연구』, 혜안, 2011.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강제훈, 「조선시대 재무제도 연구」, 『추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한국행정학회, 2010.
김선경, 「반계 유형원의 이상국가 기획론」, 『한국사연구』 125, 2004.
이정철, 「대동미·포의 구성: 『호서대동절목』·『전남도대동사목』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19, 2005.
이정철, 「반계(磻溪) 유형원의 대동법 인식: 조선 후기 개혁론의 “두 가지 입장”에 대해서」, 『역사학보』 206, 2010.
이정철, 「조선시대 공물변통론에서 포저(蒲渚) 조익(趙翼)의 위치와 역할」, 『대동문화연구』 70, 2010.
양호(養戶)
정의
경작지를 조세 수취 단위로 구획하는 과정에서, 향촌의 토호가 자신이 내야 할 전세와 대동미 등을 다른 농민들이 대신 내도록 조작하던 관행.
개설
조선후기 대부분의 농민은 50부(負) 이하의 경작지를 소유한 소농·빈농층이었다. 이 때문에 수령이 농민에게 일일이 결세(結稅)를 징수하는 것보다 이를 하나로 묶어서 징수하는 것이 편리하였다. 또 대부분의 결세가 현물이었기 때문에 농민들도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적으로 현물을 납부하기보다는 공동으로 납부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이에 정부는 여러 개의 전결을 8결(結) 단위로 묶어 부(夫)라 하고, 부마다 중간 수납자로 호수(戶首)를 뽑아 부에 책정된 결세를 수납하게 하였다. 이를 작부제(作夫制)라 하였다. 작부제 운영 과정에서 토호(土豪)·서리 등에 의해 양호(養戶)·방결(防結) 등의 중간 수탈 구조가 형성되었다. 양호는 1명의 호수가 여러 부(夫)의 호수를 겸하는 것으로, 부세(賦稅)를 내야 할 토지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의 수취 체제는 8결을 1부(夫)로 하고, 농민 중 살림이 넉넉하고 부지런하며 성실한[饒實勤幹者] 1명을 호수로 선정하여 8결에 부과된 각종 납세액을 책임지고 거두게 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토호나 관리가 교묘히 편승하여 스스로 호수가 되어 양호의 기능을 발휘하였다.
토호들은 타인의 토지를 취합하여 스스로 호수가 되거나 타인을 호수로 내세운 다음 해당 경작자에게 토지에 부과되는 결역(結役)을 과도하게 징수하였다. 그 후에 상당 부분을 관가에 납부하지 않고 자기의 수입으로 삼았다. 한편 향촌 서리들은 경작지를 8결 단위로 구획할 때, 일반 민결(民結)을 잡역을 면제 받는 제역촌(除役村)으로 옮겨 기재하는 방식으로 민결에서 내야 할 조세를 착복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그 민결에서 부담해야 할 조세는 다른 농민에게서 거두었다.
이와 같이 토호·서리 등은 경작지를 구획하는 과정에서 그 이익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양호의 규모는 많을 경우 거의 100여 결이었고, 적더라도 30~40결이었는데, 보통 1결에서 조 100두(斗)씩을 거두었다.
양호의 폐단은 비단 전세(田稅)에만 국한되지 않고 환곡(還穀)·군역(軍役) 관련 행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이들은 대부분 환곡을 받아서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군포(軍布)의 전삼세(田三稅)를 납부하고는 가을이 되어도 환곡을 갚지 않았다. 또 군역 부담자의 반 이상이 이향(吏鄕)의 양호가 되어 군역을 모면한다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양호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대호(代戶)가 있었다. 대호는 호수로 차출된 사람을 대신하여 호수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양호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양호는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토지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었다. 즉, 양호를 하기 위해서는 경작지를 8결 단위로 구획하는 과정에서 호수가 되어야 하고, 호수는 납세자 중에서 선정하므로 납세 대상 토지를 갖지 않고서는 양호를 할 수 없었다. 반면 방결(防結)은 양호와 달리 자신이 세금을 내야 할 토지가 없더라도 경제력을 갖춘 이속(吏屬)이면 할 수 있었다.
대동법 실시 전에는 양호의 주체가 토호였는데 대동법 실시 후에는 토호 외에도 품관(品官)이 양호의 주체로 나타났다. 품관이 양호의 주체로 나타난 것은 종래 방납으로 영리를 취해 오다가 대동법 실시로 방납 활동이 중지되자 영리의 방법을 양호로 전환한 것이었다.
변천
양호의 폐단에 대해 1700년(숙종 26) 7월 호조 판서 이인엽(李寅燁)은 “이른바 양호란 읍내(邑內)에 사는 관속(官屬)들이 각 면(面)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전세·대동미·삼수미 등 토지에 부가되는 세금을 사적으로 취하고 관가(官家)에 납부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대동세·전세가 많은 것은 실로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관가에서는 토지 주인에게 독촉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백성 입장에서는 더러 세금을 이중으로 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환곡을 분급할 때에도 토호들은 각 면의 민호에 편승하여 받아먹지만, 관가에서 환곡을 돌려받을 때에는 이름만 보고 징수하는 까닭에 환곡을 받지 않은 민호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징수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형원과 이익은 양호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두머리로 3명을 뽑던 중국 위나라의 삼장제(三長制)를 소개하고 그 실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에는 “민결을 겁탈하여 역가(役價)를 강제로 징수하는 속칭 양호라 불리는 자들은 장물(臟物)의 경중을 헤아려 도형(徒刑)·유형(流刑)으로 그 죄를 다스린다.” 하는 조항 등 5개의 금제(禁制)가 설정되었다.
토호배들이 호수의 역을 수행하는 경우 그들은 이를 통하여 거대한 이익을 사적으로 취하였다. 그들은 결당 조(租) 50두의 국역(國役)보다 2배나 많은 양을 징수하였고,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백두(百斗)의 예(例)’라고 표현한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또 경우에 따라 그들은 수십 개의 8결, 즉 주비(注非)를 맡아 호수직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향촌에서 존재한 거대한 중간 수탈 권력이었다. 비록 토호배까지는 아니어도 일반 호수들도 약간의 모리를 행함은 매우 흔한 현상이었다. 『거관대요(居官大要)』 가운데 “호수가 하나의 변칠을 부리면 곧 양호가 된다.” 하면서 “양호란 민간의 높고 낮은 호수들이 하지 않는 자가 없다.” 한 것은 호수의 성격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호수의 민호에 대한 수탈과 가징(加徵)이 가능한 이유는 이들 호수와 민호와의 관계가 향촌의 질서 속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으며, 또한 그 역(役)의 수행이 향촌에서 관행적으로 허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경작지를 8결 단위로 묶던 작부제(作夫制)는 중앙의 조세 수취에 대응하는 향촌 고유의 대응 방식이었으며, 그 시행은 향촌의 계급 질서나 관행에 의거할 수밖에 없었다.
양호는 대동법 실시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양호의 폐단은 어떤 면에서 궁방전(宮房田)의 폐단과 유사하였다. 비록 사회적으로 궁방과 양호는 명백히 달랐지만, 양자 모두 특권과 관행이 인정되던 신분제 사회의 산물이었다. 궁방에게서 공식적으로 대동미·대동포 수취가 면제되었다면, 양호는 폐단이나 문제점의 형태로 지속되었다.
대동법은 각 군현의 전결 규모에 따라 공물가를 정하였다는 점에서, 현물 공납제에서 뚫지 못했던 각 군현의 외피를 깨뜨리는 데는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각 군현에 부과된 공물을 각 군현 내부에서도 전결 소유에 비례하게 수취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각 군현 내부까지 파악하거나 장악할 수는 없었다고 하겠다.
18세기 말 내지는 19세기 초엽부터 조세 수취 체제는 봉건적 조세의 최종적 형태인 도결(都結)로 변화해 갔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거관대요(居官大要)』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장동표, 『조선 후기 지방 재정 연구』, 국학자료원, 1999.
김갑주, 「조선 후기의 양호(養戶)」(상), 『역사학보』 85, 1980.
김갑주, 「조선 후기의 양호(養戶)」(하), 『역사학보』 86, 1980.
이영훈, 「조선 후기 팔결작부제에 대한 연구」, 『한국사연구』 29, 1980.
정선남, 「18·19세기 전결세의 수취 제도와 그 운영」, 『한국사론』 22, 1990.
어공(御供)
정의
조선시대 왕과 왕실 구성원에게 의식주 관련 물건을 바치는 일 또는 그 물건.
개설
임금에게 올리는 어선(御膳) 및 궐내 각 전궁에게 올리는 음식물은 사옹원(司饔院)에서, 모피·비단·면포·면화 등 직물·의류는 상의원(尙衣院)에서, 수박인 서과(西瓜) 등의 과일은 사포서(司圃署)에서, 갱미(粳米) 등 곡물류는 사도시(司䆃寺)에서, 생선·고기·땔감 등은 사재감(司宰監)에서, 복식·등촉 등은 내자시(內資寺)에서, 약주·녹용·진상의대(衣襨)는 내섬시(內贍寺)에서, 석자(席子)·지물(紙物) 등은 장흥고(長興庫)에서 담당하였다. 특히 주원(廚院)으로 불리는 사옹원과 상방(尙房), 즉 상의원은 어공을 담당하던 주요 기관이었다.
내용 및 특징
멥쌀·황대두(黃大豆)·대구·소금·김·미역·간장·참기름·꿀·참외·수박·술·종이·돗자리·비단·목화·가죽신·오미자 등 의식주와 관련된 다양한 물품이 어공으로 조달되었다. 왕 이하 왕실 각 전궁에 매일·매달·탄일·절일 등 다양한 주기로 공상물이 조달되었다.
어공은 공물이나 진상으로 조달되었다. 특히 별공(別貢)으로 조달되는 것이 많았다. 별공은 상공(常貢)과 달리 공안(貢案)에 등록되지 않았는데 징수되는 공물이었다. 공물은 전세와 관련하여 원정공물과 전세조공물로 나뉘었다. 원정공물은 원래의 공물인 토산공물을 가리켰다. 전세조공물은 전세의 일부를 쌀이나 콩 대신에 면포·마포·유(油)·밀(蜜) 등으로 받는 것이었다. 전세조공물은 범주상 전세에 속하므로 호조에서 담당하였다. 전세조공물로 거둔 품목, 즉 멥쌀·주미(酒米)인 중미(中米)·황대두·황두·장두(醬豆) 등은 왕실 제향이나 어공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에 의하면, “황해도에서 생산되는 쌀은 낟알이 길고, 성질이 차져서 다른 지방 쌀과는 다르므로, 궁중에서 어공으로 쓰는 것은 이 지방 쌀뿐이다.”라고 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탁지지(度支志)』 「외편」(권9), 판적사(版籍司) 공헌부(貢獻部)에도 관청의 축일공상(逐日供上) 등 어공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시대 물선진상을 담당하는 관원들이 어공을 빙자해서 민가의 물품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또한 어공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방납(防納)이 생겨나서, 국가의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1636년(인조 14)에 대사간 윤황(尹煌)은 어공을 시장에서 사서 바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시장에서 구입하면 깨끗하지 않다는 반대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어공을 일시 중단하거나 감소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중단되거나 축소된 어공은 1644년(인조 22) 이후 복구되었다. 대동법 실시 이후에는 어공도 다른 공물처럼 서울 각사(各司)의 책임 아래 공물주인을 통해서 서울에서 직접 마련되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실시된 후에도 여전히 현물로 상납되는 어공이 존재하였다.
1904년(광무 8)에는 어공 및 왕실의 토지개간·천택(川澤)·제언 등을 관리하는 어공원(御供院)이 궁내부(宮內府) 아래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1907년(광무 11) 2월에는 어공과 사전(祀典) 거행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임시 기관인 공진소(供進所)가 궁내부 안에 설치되었다. 이는 통감부 설치 이후 일제에 의한 황실 재산의 침탈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기관으로, 1907년 11월에 폐지되었다. 공진소가 관장하던 어공 사무는 궁내부의 전선사(典膳司)로 이관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탁지지(度支志)』
『상방정례(尙房定例)』
『한말근대법령자료집(韓末近代法令資料集)』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 일조각, 1984.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여객주인(旅客主人)
정의
지방에서 올라온 상인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상인 간의 거래를 주선하던 중간상인.
개설
여객주인은 사상도고(私商都賈)를 대표하는 상인 중 하나로서, 지방에서 올라온 상인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들의 물품을 보관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상인의 거래를 주선해 주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상인과 여객주인의 관계에서 여객주인은 그다지 우위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여객주인을 통한 상품유통이 일반화되면서 상인은 여객주인에게 예속되어 갔다. 이에 따라 여객주인은 권력과 유착하며 자신의 독점 권한을 더욱 확장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의 주인(主人)층은 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경주인(京主人)과 사적으로 영업하는 사주인(私主人)으로 구분되었다. 공물의 방납(防納)이 성행했던 시기에 성장하였던 사주인은 대동법의 실시와 더불어 점차 쇠퇴하였다. 이들이 담당했던 기능들은 조선후기에 공물주인(貢物主人)·세곡주인(稅穀主人)·선주인(船主人)·여객주인 등으로 분화되어 갔다.
주인 영업이 처음부터 세곡주인·강주인·여객주인 등으로 구분되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기능이 분화되기 이전에는 선인(船人)이나 선상(船商)을 접대하는 것이 주된 영업이었다는 점에서, 주인이 접대하는 대상에 따라 명칭이 정해지기보다는 영업이 행해지는 장소에 따라 경강주인·강주인·포구주인·진주인(津主人) 등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포구 상업의 발달에 따라 한강 일대의 경강(京江)을 오가는 선인들이 세곡 운송 선인, 일반 선박의 사공·격군(格軍)·선상·여객상고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이에 따라 주인 영업도 분화된 것이었다. 선주인은 선척의 주인이었고, 여객주인은 여객상고의 주인으로, 엄밀히 따지면 다른 영업체였기 때문에 주인권(主人權)을 팔 때에도 여객주인과 선주인 역을 따로 명시하였다.
여객주인의 주요한 영업 내용인 여객상고의 접대와 매매 중개업은 처음에는 분리되어 있었다. 선주인인 점주는 여객을 접대하는 대가로 약간의 금품을 받을 뿐이며, 구문은 상품유통을 매개하는 거간이 차지하였다. 이처럼 주인층과 거간이 각각 기능적으로 독립된 영업체이긴 하였으나, 두 영업을 한 사람이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객주인의 영업 내용은 이와 같이 거간과 선주인 영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감안할 때 여객주인업의 기원은 종전 선인에 대한 접대만을 담당했던 선주인들이 상품거래를 중개하는 거간업까지 영업 내용을 확장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선주인들이 거간업까지 겸하면서 여객주인으로 불리는 시기는 17세기 중엽으로 추정되었다.
여객주인은 선상에게 자금을 제공하여 선상의 물품에 대한 판매 권한인 주인권을 획득하였다. 선상들은 자금 부족이나 부채를 갚기 위하여 자신을 여객주인에게 판매하였기 때문에 주인-객상(客商) 관계가 성립하였다[『정조실록』 15년 1월 22일]. 그리고 이러한 객상을 여객상고라고 하였다. 선상이 여객주인에게 자신을 여객상고로 판매하는 가격은 대체로 50냥 내외였으며, 이로써 성립한 주인-객상 관계는 판매한 여객상고 자신은 물론 후손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초기의 여객주인권은 관권(官權)과 전혀 관계없이 전적으로 여객상고와 여객주인 사이의 개별 계약을 통하여 발생하였다. 특히 초기 객상-주인 관계는 여객상고의 필요, 즉 궁가(宮家)나 재상가에 대한 채무를 갚고 궁가·재상가의 침학을 방지하기 위하여 성립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7세기 중엽까지는 이러한 필요가 없는 선상들은 굳이 여객주인을 정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여객주인과 여객상고의 관계가 강한 예속성을 띠지 않고 주인을 정하지 않은 선상들이 많았을 때는 여객주인의 신분이 낮았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이 많았다.
변천
18세기 이후 상품화폐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여객주인과 상인 간의 관계가 점차 고정되고 하나의 권리로 정착되었다. 선상들은 자금 부족을 충당하거나 부채를 갚기 위하여 자신을 여객주인에게 판매하였으며, 판매한 상인뿐만 아니라 그 후손도 여객주인에게 예속되었다. 이처럼 여객주인권은 상인과 주인 사이에 개별적인 계약을 통해 성립하였다. 이는 곧 주인권이 경제적 권리로 성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여객주인권은 매매·상속·양도가 자유로운 재산권이었고, 법적으로 보호를 받았다. 만약 상인이 자기의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상품 판매를 위탁할 경우 그 상인은 ‘노비가 주인을 배반했을 때의 벌’을 적용하여 처벌을 받았다.
점차 포구에서 여객주인이 없으면 매매가 곤란할 정도로, 여객주인은 상품유통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에 따라 여객주인의 상인에 대한 지배권도 점차 강화되었다. 상인은 시세와 상관없이 반드시 주인을 통하여 매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한편 18세기 중엽 여객주인이 필수적인 존재가 되면서 여객주인권도 개별 상인과 주인 사이에 성립하던 것에서 점차 1개 군현이나 면 전체의 상인을 대상으로 주인권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변하였다. 한 지역 전체의 선상과 선인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지역주인권이 성립한 것이었다.
이처럼 여객주인의 경제적 권리가 확대되면서 18세기 말, 19세기 초를 기점으로 주인권이 질적으로 변화하였다. 이전까지 경강주인(京江主人)은 주로 준양반과 양인이었으나 이후 부민(富民)·양반관료·궁방(宮房)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외방주인(外方主人)은 이전까지 대개 호민(豪民)이었으나 이후 중앙의 양반관료나 궁방·아문과 결탁한 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여객주인은 이러한 권력과의 결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상인들이 싣고 온 상품에 대한 독점을 기초로 가격을 조종하는 도고상인(都庫商人)으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유통 구조가 확립되었다.
여객주인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유통 체계는 정상적인 상품-화폐 관계의 발전을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주인층의 유통 참여 방식이 권력기관에 의존한 폭력적 수탈의 성격을 띠었고, 상업 세력은 더욱 권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여객주인은 독점 지향성과 특권 지향성을 갖는 존재였다. 독점성은 유통 과정상의 독점성, 포구 내의 지역별·상품별 전관제(專管制), 권력기관의 보호로 유지되며, 특권성은 독점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개항 이후 여객주인의 전망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여객주인의 독점과 특권이 개항 이후 매판(買辦)의 실마리가 된다고 보는 견해였다. 이와 달리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즉, 개항을 계기로 물품의 종류별 주인권이 성립하였고, 이는 상품유통의 기구로서 주인권의 전문성이 강화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의 전근대적이고 폭력적인 독점의 형태가 해소될 전망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즉, 여객주인의 독점이 점차 해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았다.
참고문헌
고동환, 『조선 후기 서울 상업 발달사 연구』, 지식산업사, 1998.
고동환, 「18·19세기 외방포구의 상품 유통 발달」, 『한국사론』 13, 1985.
이병천, 「조선 후기 상품 유통과 여객주인」, 『경제사학』 6, 1983.
이영호, 「19세기 은진 강경포의 상품 유통 구조」, 『한국사론』 15, 1986.
이영호, 「19세기 포구 수세의 유형과 포구 유통의 성격」, 『한국학보』 41, 1985.
여미(餘米)
정의
대동미 중 각 관서에서 불시에 일어나는 수요와 흉년을 대비하여 책정한 쌀.
개설
『대동사목(大同事目)』에 따르면 백성에게 걷은 쌀·포(布)는 크게 중앙 각사로 올라가는 것, 각 군현의 관수(官需)로 쓰이는 것, 예비비인 여미로 나뉘어 처리되었다. 여미는 대동미(大同米) 총액 중 중앙 각사로 올라가는 경상납(京上納)과 각 군현의 관수로 쓰이는 영읍소용(營邑所用)을 제외한 몫이었다. 경상납과 영읍소용이 경상비에 해당한다면, 여미는 예비비에 해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여미는 현물 공납제에서 가렴(加斂)의 단서가 되었던 쇄마(刷馬)와 과외(課外)의 역(役)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여미의 목적은 대동법의 설치 목적과 연결되었다. 즉, 대동미를 거두어들인 후 대개는 추가적인 징수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이 민결 침탈로 이어지지 않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여미였다.
여미는 크게 2가지 기능이 있었다. 하나는 예비비 기능이었고, 다른 하나는 각 군현 사이 부담의 불균등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예비비의 기능도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중앙에서 불시로 요구하는 별복정(別卜定)에 대한 대비였고 다른 하나는 흉년에 대한 대비였다.
현물 공납제 아래서 각 군현이 불시 과외의 역에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동사목(大同事目)』에서는 이것을 위하여 여미라는 항목을 두었다. 대동법 운영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흉년이었다. 이에 흉년 시에는 각 군현에서 거두어야 하는 대동세 중 쌀 대신 포나 전(錢)을 대신 거두는 양을 늘리기도 하였다.
기록적인 흉년이었던 1671년(현종 12)을 시작으로 대동미를 줄여 준 사례는 27회에 이르렀다. 하지만 흉년을 대비하는 대동법 내부의 가장 큰 장치는 역시 여미의 책정이었다. 여미는 일차적으로 쇄마와 과외의 역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흉년에 대비해서 얼마나 남겨 두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여러 해에 걸쳐 묵은 곡식을 환곡으로 빌려주고 나중에 새 곡식으로 돌려받는 방식으로 여미를 축적했기 때문에 흉년에 대비한 여미의 양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비비 역할에 더하여 여미의 또 하나의 기능은 각 군현의 경제적 불균등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대동법에서는 각 군현의 불균등을 보완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각 군현의 전결(田結) 수에 따라 영읍소용과 여미의 크기에 차등을 둔 것이었다.
한편 여미는 지출뿐 아니라 보충에 대한 규정도 있었다. 병선(兵船)은 5년마다 새로 건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 기간을 넘겨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미리 책정되었던 예산은 여미로 이속(移屬)되었다. 각 군현의 감사지공미(監司支供米)도 지출되지 않았을 때에는 여미로 귀속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여미가 일종의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즉, 여미는 각 군현에서 집행되는 항목들의 예산상 과부족이나 집행 유무에 따른 예산 변동을 조절하였다.
각 군현에서 여미가 부족할 때는 선혜청에 보고하였고 선혜청에서는 서울의 경창(京倉)에 보관하고 있던 상납미(上納米)를 주거나 인근 읍의 여미, 또는 상평창 곡식으로 보충해 주었다. 이에 따른 저장 곡식량의 변동은 문서로 정리하여 1년에 4번 보고하였다. 비록 여미의 운영 자체는 지방의 관부에서 하였지만, 이러한 보고를 통해서 경외(京外)의 공물 운용이 통합적으로 관리되었다.
변천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지방군현에 유치미와 여미를 두는 규정이 확립된 것은 지방재정의 운영을 공식화한 조치였다. 다만 조선후기 중앙의 경비지출이 늘어나고 재정이 악화되면서 지방의 유치미분이 경상납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로써 지방 재정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참고문헌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Ⅲ』, 일조각, 1988.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이정철, 「대동미·포의 구성: 『호서대동절목』·『전남도대동사목』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19, 2005.
六反田豊, 「大同法における「留置米」「余米」「儲置米」槪念の檢討」, 『東洋史硏究』50-3, 1991.
역민식(役民式)
정의
조선전기 요역을 부과하는 기준과 체계.
개설
요역(徭役)은 수취제도의 한 형태였다. 전근대시기에 국가는 필요에 따라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할 수 있었다. 지배기구와 지배층이 사용할 각종 물자의 생산과 수송, 토목 공사 등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한 모든 분야에 무상의 강제 노동이 동원되어야 했다.
태조대에는 인정(人丁)을 기준으로 삼는 계정제(計丁制) 방식을 채택하였다[『태조실록』 1년 9월 24일]. 정종과 태종 연간에는 사람과 토지를 모두 기준으로 하는 계전계정(計田計丁)의 절충적 방식을 채택하였다[『태종실록』 6년 11월 17일]. 세종대부터는 계전제(計田制)를 채택하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그에 따라 토지 소유량에 따라 민가를 대·중·소·잔(殘)·잔잔(殘殘)의 5등급으로 나누고 이를 기준으로 요역을 부과하였다. 성종대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규정에 의해서 제도화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471년(성종 2)에 제정된 역민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성종실록』 2년 3월 19일]. 모든 수세전(收稅田) 8결마다 역부(役夫) 1명을 징발하여 사역할 수 있었다. 관찰사는 공역(公役)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돌아가며 역을 부과하였다. 일의 규모가 커서 별도로 징발[調發]할 필요가 있을 때는 6결마다 역부 1명을 추가로 차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민식은 일부가 수정·보완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내용
요역은 다양한 종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적용되는 내용에 따라서는 크게 전세미의 수송, 공물·진상물·잡물의 조달, 토목 공사, 지대(支待)·영접(迎接) 등으로 구분하였다.
전세미는 조운제도에 의하여 정기적으로 각 지방에서 경창(京倉)으로 운반되었다. 조운제와는 별개로 조창까지의 전세미 수송, 조창에서 조운선으로 짐을 싣는 일 등의 노역은 지방관부의 요역제 운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전세미를 수송하는 요역은 정기적인 요역에 속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전세 납부의 시기는 그해 11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였다. 이때 각 군현에서 조창까지 전세미를 운반하는 노역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차사원(差使員)으로 임명된 각 군현의 수령이 지휘·감독하였다.
공물·진상물·잡물을 조달하는 요역은 왕실을 비롯하여 중앙 각사와 지방관부에서 사용할 물자를 채집·생산·수송하는 것이었다.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의 구조 하에서 지배기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종 물자의 대부분은 백성의 세역(稅役) 부담에 의해 조달되었다. 공물·진상물의 경우도 대부분은 민가의 부담으로 마련되었다. 이와 같은 공물·진상물을 조달하기 위한 요역은 잡다한 요역 종목 가운데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민가에 큰 부담이 되었다.
토목 공사 역시 여러 요역 종목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특히 성을 쌓거나 궁궐·관아를 수리하고, 물을 대기 위하여 댐이나 천방(川防)을 수축하며 산릉을 조성하고, 예장(禮葬)을 치르며 묘를 조성하는[造墓] 등의 역사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지대·영접의 요역은 왕·사신·관료의 왕래와 관련된 역민(役民)의 종목이었다. 예컨대 왕의 행차에는 많은 인력과 경비가 필요하였다. 강무(講武), 능소(陵所) 거둥, 온천 왕래 등 왕의 외방 행차가 있을 때에는 왕이 거둥하는 길목의 각 군현에서 토목 공사를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일할 수 있는 장정[人丁] 수나 백성이 소유한 토지[所耕田]의 크기에 따라 역민을 부과하였다. 이 2가지 기준은 개별 민가가 보유한 가족·노비의 노동력과 사적인 소유지의 크기를 반영하였으므로, 요역 부담의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되었다. 세종대 이후 토지 소유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요역이 부과되었고, 성종대의 역민식은 그것이 반영된 결과였다.
역민식은 곧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역민식의 운영은 1읍의 소경전 수를 헤아려 ‘역민부(役民簿)’를 작성하고, 전지 8결을 소유한 자는 역부 1명을 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8결 단위로 묶어 역부 1명을 내도록 하였다. 8결 작부는 백성의 소경전 결부에 따라 부과되었으므로 전결을 소유한 자라면 당연히 이를 납부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규정이었고, 그 운영의 실제는 사회적 세력의 강약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 결과 1결을 가진 소농민이 7결을 가진 세력 있는 양반의 토지분 요역까지 전담하는 경우가 있었다.
변천
요역의 종목에는 전세미 수송, 공물·진상물·잡물의 조달과 같이 비교적 정기적이고 정량적인 성격의 상시(常時) 잡역과 토목 공사, 지대·영접과 같이 부정기적이고 부정량적인 부류가 있었다. 조선후기 대동법은 이러한 요역의 여러 종목 가운데 일부를 전세화(田稅化)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세미 수송을 제외한 상시 잡역으로서 주로 공물·진상과 관련된 요역 종목이 여기에 흡수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역의 나머지 부분은 대체로 조선후기 각 지방별로 부과되던 잡역세의 징수로 점차 바뀌어갔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잡역세는 이전 시기에 지방적 특성을 가지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운영되던 요역 종목의 상당 부분이 물납화(物納化)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강제훈, 「조선초기 요역제에 대한 재검토: 요역의 종목구분과 역민규정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45, 1995.
김종철, 「조선초기 요역부과방식의 추이와 역민식의 확립」, 『역사교육』 51, 1992.
有井智德, 「朝鮮初期の徭役」, 『朝鮮學報』 30·31, 1962.
윤용출, 「15·16세기의 요역제」, 『부대사학』 10, 1986.
영조(嶺漕)
정의
조선후기 경상도의 전세와 대동미 등 세곡을 중앙으로 상납하기 위하여 실시된 조운제도.
개설
조선초기 경상도에는 남해안 김해·창원·사천 등 3곳에 삼조창(三漕倉)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1403년(태종 3) 대규모 해난사고로 인하여 경상도의 조운제는 폐지되었고[『태종실록』 3년 5월 5일], 16세기 후반까지 경상도의 세곡은 육로로 충주 경원창(慶原倉)에 수납되었다. 경원창은 이후 가흥창(可興倉)으로 변경되었다. 가흥창에 적재된 세곡은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의 감독 아래 남한강을 경유하여 호조로 상납되었다. 이에 따라 세곡의 주산지였던 진주·창원·김해·밀양 등에서는 운반비를 별도로 수취하여 낙동강 상류로 올라와 상주와 문경을 경유하여 가흥창에 수납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17세기 광해군대 들어오면서 궁궐의 영건사업으로 인하여 선운(船運)이 재개되기 시작하였고, 세곡 운송의 주체는 경강선인이었다. 특히 대동법 이후 대폭 늘어난 세곡량과 그에 따른 선가(船價)는 이들에게 치부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경강선인의 선운업이 활발해질수록 선박의 침몰사고도 자주 발생하였고, 경강상인들은 발선 기일을 넘기거나 적재량의 한도를 초과하는 등의 불법을 자행하였다. 결국 경상도의 세곡을 담당하던 경강선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적으로 세곡을 운송하고자 1760년(영조 36)과 1765년(영조 41)에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선과 조군을 배치하여 조운제를 정비하였다. 이렇게 완비된 경상도의 조운제는 19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8세기 전반 조정은 경강선의 비리행위와 그에 따른 선박 침몰사고를 해결하고자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1732년(영조 8) 병조판서 김재로(金在魯)는 안면도를 비롯한 연해 각 읍에 산재한 풍락목(風落木)을 이용하여 지토선(地土船)을 제작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세곡을 운송하자고 제안하였다. 경상도에서는 이 의견에 따라 「조선절목(造船節目)」을 반포하고, 지토선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절목」 반포 이후에도 세곡 운송은 그리 원활하지 못하였다. 지토선을 건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박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전라도의 선박은 부실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건조된 지 5년이 채 안 되어 33척 중 10석이 손실되어 23척만이 잔존하였다. 경상도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1736년(영조 12) 칠원현의 상황을 보면 새로 건조된 지토선이 파손되거나, 분실되어 버렸다. 심지어 지토선을 무단으로 매매하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경강선인이 저지른 비리행위와 침몰사고는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그 결과 1750년대에만 무려 7,000여 석의 세곡이 침몰되었다. 따라서 조정은 더 이상 경강선을 중심으로 한 세곡 운송의 체계를 고집할 수 없었다. 경상도의 세곡 운송 문제가 심각해지자 1759년(영조 35)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는 경상도의 세곡을 동전이나 무명으로 대납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도 김상로의 의견에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반면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은 곡식 따위를 팔아 돈을 마련하는 작전(作錢)과 본래 곡물로 납부하던 전답의 세금을 면포로 대신 바치는 작목(作木)의 편부를 경상감사에게 물어본 후 처리하자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홍봉한의 의견에 따라 영조는 우선 경상감사에게 민정을 파악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와 달리 경상감사 조엄(趙曮)은 조운제(漕運制)의 실시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근래 경강선인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대동을 먼저 운반하고 난 후 늦게 경상도로 내려오기 때문에 매번 발선 시기를 놓쳐 침몰하고, 그에 따른 증열미의 폐단이 심하다고 역설하면서, 조운 설치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조엄의 조운제 설치 주장에 대하여 중앙의 관료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좌의정 신만은 ‘폐단을 구제할 방도를 깊이 얻었다’라면서 바로 선혜청에게 절목을 만들어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고, 행사직 홍봉한과 이조 판서 민백상(閔百祥) 역시 조엄이 제시한 방안이 상세하고 치밀하니 우선 시도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결국 영조가 이들의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경상도의 조운제 설치안이 채택되었다. 그 결과 1760년(영조 36) 진주와 창원에 각각 가산창(駕山倉)과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되었고, 영조 1765년(영조 41) 밀양에 삼랑창(三浪倉)이 추가로 설치되었다[『정조실록』 7년 4월 28일]. 이로써 경상도 삼조창이 완비되었고, 이를 통하여 경상도 남해안 일대의 조운제가 전격 복구되었다.
내용
삼조창에는 대동미의 물류량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호조가 아닌 선혜청이 경상도의 조운을 관리하였다. 조창에는 도차사원과 차사원이 임명되었는데, 도차사원은 세곡 수봉을 총 관리하는 임무를, 차사원은 조선을 이끌고 세곡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산창에는 창원부사와 구산첨사, 가산창에는 진주목사와 적량첨사, 삼랑창에는 밀양부사와 제포만호가 도차사원과 차사원을 각각 겸임하였다. 남해안 연읍은 각 조창에 소속되었는데 창원·김해·함안·칠원·진해·거제·웅천·의령·고성(동남면) 등 9읍, 진주 가산창에는 진주·곤양·하동·단성·남해·사천·고성(서북면) 등 7읍, 밀양 삼랑창에는 밀양·현풍·창녕·영산·양산 등 5읍이 소속되었다. 고성은 읍을 동남면과 서북면으로 나누어 가산창과 마산창에 분할 납부하였다. 그러나 거제와 고성의 동남면에서 마산창, 하동과 남해에서 가산창까지의 운송 거리는 매우 멀었다. 이러한 세곡 수납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통제영 견내량에 마산창의 속창을 설치하여 거제와 고성의 동남면의 세곡을, 남해의 노량진 인근에 가산창의 속창을 설치하고 하동과 남해의 세곡을 수납하게 하였다. 이곳에 보관된 세곡은 마산창과 가산창의 조운선이 지나갈 때 같이 적재하여 상납하도록 하였다.
조창은 『속대전(續大典)』의 규정대로 1월 30일에 개창하고, 2월 30일까지 소속 군현의 세곡을 모두 수봉한 다음 3월 25일 이내 조운선을 발선하여 5월 15일 내에 도착하게 하였다. 조창에는 조운선이 배치되었다. 당시 경상도에서 마련한 조운선은 조엄의 발언대로 총 60척이었다. 이 중 5척은 여유분으로 남겨 두고, 55척만을 3조창에 배속시켰다. 조운선은 총 55척으로 마산창·가산창·삼랑창에 각각 20척·20척·15척이 배치되었다. 조창에 소속된 조운선에는 선명(船名)을 부여하였는데, 천(天)·지(地)·현(玄)·황(黃) 등 천자문의 순서대로 지었다. 조운선이 배치됨에 따라 조군도 새롭게 차정되었다. 17세기 이래 조운선에는 사공 1명과 격군 15명 등 총 16명이 승선하고 있었으므로 이 규례에 따라 1척당 조군 16명씩 충원하였다.
삼조창에는 총 55척의 조운선이 배치되었기 때문에 조군은 총 880명이 차정되었다. 그중 사공은 반드시 바닷가에 사는 백성 중 근실한 자로, 격군은 해로를 잘 알아 운항을 잘하는 자로 뽑았다. 그리고 별도의 군적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조군의 군적은 군현의 선명별로 작성하였고, 여느 군안과 같이 성명·나이·거주지·부친 성명·얼굴 생김새·흉터 여부 등을 기록하였다. 조군을 차정하면서 이들의 생계유지를 위하여 보인(保人)도 별도로 충원하였다. 보인은 조군 1명당 2명씩 차정하였는데, 그에 따라 총 1,760명의 보인도 각 조창에 배속되었다. 아울러 조운선의 관리와 보호를 위하여 조운선 1척당 선직(船直) 2명도 선발하였다. 즉, 조운선 1척에는 조군 16명, 조보 32명, 선직 2명 등 50명씩이 배속되었다. 이에 따라 마산창과 가산창에는 조군·보인·선직이 각각 320명과 640명·40명, 삼랑창에는 240명·480명·30명 등 총 2,720명이 조운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경상도의 조운제는 양호의 조운제와는 운영 방식이 달랐다. 충청도와 전라도 조군의 경우에는 1704년(숙종 30) 납포화(納布化)가 전면 시행되면서 더 이상 조운선에 승선할 의무가 없었다. 이 조치 이후 이들은 1명당 2필의 역가를 납부하고 조군역에서 제외되었다. 이와는 달리 경상도의 조군은 조운선에 승선하여 세곡 운송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천
18세기 중엽 실시된 경상도의 조운제는 19세기 후반 이운사(利運社)가 설립되어 증기선으로 세곡을 운송하기 전까지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다만, 경상도 삼조창의 설치로 인하여 종래 조창(漕倉)의 역할을 대행하던 양산의 감동창과 진주의 장암창은 쇠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탁지지(度支志)』
『만기요람(萬機要覽)』
『영영사례(嶺營事例)』
『영남청사례(嶺南廳事例)』
羅愛子, 『韓國近代海運業史硏究』, 국학자료원, 1998.
崔完基, 『朝鮮後期 船運業史硏究』, 一潮閣, 1989.
문광균, 「조선후기 양산 甘同倉의 설치와 변천」, 『한국문화』 6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4.
문광균, 「17~18세기 경상도 세곡운송체계의 변화와 三漕倉의 설치」, 『대동문화연구』 86,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4.
문광균, 「조선후기 경상도 재정운영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원공물(元貢物)
정의
중앙 각사와 왕실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군현에 부과하던 공물.
개설
공물의 품목을 상세히 수록한 책으로는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관찬 지리지와 사찬 읍지가 있었다. 여기에 나타난 원공물은 크게 보면 광산물을 비롯하여 가죽 제품·죽 세공품·직물류·어물류·약재·목재·종이·과실류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품목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면포, 평안도·황해도의 명주, 함경도·강원도의 마포, 강원도의 목재, 황해도의 철물, 제주도의 말, 전주·남원의 종이, 임천·한산의 생모시, 안동의 돗자리, 강계의 인삼 등이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중세 사회의 부세제도는 민인에 대한 각종의 무상 수취를 통하여 국가의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조선전기에는 중앙의 관서와 왕실에서 필요한 물품을 여러 군현에서 공물의 형태로 거두어들였다. 원공물에는 각 군현에서 직접 준비하여 바치는 관비공물(官備貢物)과 각 군현의 민가에서 상납하는 민비공물(民備貢物)이 있었다.
내용
조선전기에는 호적이나 양안과 같이 국가의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미비하였다. 그러므로 수취제도를 현실에 맞게 운용하기는 어려웠고, 조선전기 공물을 비롯한 군역·요역 등 국가적 수취는 군현 단위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크고 부유한 군현보다 작고 가난한 군현에 더 과중한 부담으로 돌아갔다.
전세는 홍수·가뭄 등의 자연재해로 농사가 흉작이면 손실에 따라 감면해 주는 수손급손(隨損給損)이 적용되었지만, 공물은 원칙적으로 감면되지 않았다[『태종실록』 18년 7월 2일]. 비록 왕이 공물을 한시적으로 헤아려 감하거나 혹은 영구히 면제해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제도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은 임토작공에 따라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을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특산물이 나는 지역에만 공물을 분정하면 해당 지역만 집중적인 수탈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산출되지 않는 불산공물(不産貢物)도 분정하였다. 또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 중에는 원래 그 지방에서 산출되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산물이 줄거나 더 이상 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은 일단 공안에 등재되어 있으면 나고 나지 않고를 막론하고 납부해야만 하였다.
변천
국가는 임토작공의 원칙에 위배되더라도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징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공물 부담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수시로 부과하는 별복정공물(別卜定貢物)도 증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반 백성이 공물을 제때 마련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민가의 토지[所耕田] 소유 규모에 따라 쌀과 포(布)를 거두는 형태가 매우 이른 시기부터 나타났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새로운 공납제 운영 원리를 마련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 16세기 중반 이후, 각 군현의 전결 수를 헤아려 분정된 공물의 종류·물량에 따라 가격을 결정하는 사대동(私大同)·대동제역(大同除役) 등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현물상납을 대신한 공물가 징수의 확대·정착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초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현물화된 공물 상납이 일부 폐지되었다. 그 대신 토지 1결마다 쌀 12말씩 거두어 그중 일부를 공인(貢人)에게 지급함으로써 공물을 조달하는 체계가 마련되었다.
참고문헌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김동수, 「『세종실록』 지리지 산물항의 검토」, 『역사학연구』 12, 1993.
김동수,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초적 고찰」, 『성곡논총』 제24집, 1993.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월과군기(月課軍器)
정의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매달 의무적으로 바치던 군수품.
개설
조선초기에는 지방에서 매달 정해진 양의 군기(軍器)를 제조하고, 그 수량을 회계하여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월과군기제가 시행되었다. 매달 부과된다는 뜻에서 월과라고 하였다. 국가가 필요한 관군기(官軍器)를 조달하는 방법은 2가지였다. 첫째는 중앙의 군기감에서 서울의 공장[京工匠]들을 사역하여 군기를 제조·조달하는 방법이고, 둘째는 도 단위로 군기를 제조하게 하여 진상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군기에 관련된 진상은 명일(名日)에 바치는 명일진상과 매달 제조하여 바치는 월과진상이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왕조가 성립된 후 중앙에서는 군기감을 설치하여 군기 제조 방식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지방은 고려말 이래 군기 제조 체제가 그대로 지속되었다. 철물의 제련양은 늘어났으나, 군기 제조량은 증가되지 않는 등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모색된 것이 월과군기제였다. 정부는 1392년(태조 1) 군기 수요가 큰 서북면을 대상으로 도순문사의 책임 아래 월과제로 군기를 제조하도록 하였다. 전국적으로 시행되지 못한 월과군기제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1397년(태조 6)이었다. 도에 군사 단위로서 진이 설치되면서 월과군기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내용
영(營), 진(鎭)에는 소속되어 군기를 전문으로 제조하는 장인이 있었다. 이들은 보통 ‘월과장인’으로 불리며, 특히 영에 속한 월과장인의 경우 ‘속영장인’이라 불렀다. 장인에는 갑장(甲匠)·야장(冶匠)·궁인(弓人)·시인(矢人)·궁현(弓弦)장·목장·피장·칠장·유장(鍮匠)·마조(磨造)장 등이 있었다. 이들은 활·화살·창·검·환도(還刀)·철갑·지갑(紙甲) 그리고 가슴을 가리는 갑옷인 엄심(掩心) 등 군기를 매월 정해진 액수대로 제조하였다.
군기감에서는 군기의 견본을 제작하여 지방에 보내, 이에 따라 치밀하게 제조하도록 하였다. 1451년(단종 1)에는, 경기는 ‘기(畿)’, 나머지 도는 첫 자를 교서감에서 전자(篆字)로 쓰고, 공조에서 주인(鑄印)하여 각 도에 보내, 관찰사영에 보관하다가 제작된 군기에 찍도록 하였다. 도장을 찍기 어려운 칼과 철갑옷은 대신 글자를 새기도록 하였다.
변천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무기 생산 체제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유명무실했던 군기시(軍器寺)는 왜란 중 본래의 업무를 되찾고, 속오군(束伍軍)의 무기 조달도 관장하게 되었다. 군기시는 각종 원료를 공납 형태로 수취하여 무기를 제조하였고, 이를 각 읍에 나누어 주었다.
1603년(선조 36)에는 각 읍이 사용할 염초를 자체 생산하도록 하는 ‘각읍월과자초(煮硝)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규정된 각 읍의 월 생산액은 대읍 40근, 중읍 30근, 소읍 15근이었다. 이 월과법은 각 진의 화살 생산에도 적용되었다. 이것이 ‘각진월과궁전(弓箭)법’이다. 광해군 때에는 조총·화살·연환(鉛丸)을 각 읍에서 자체 조달하도록 하는 ‘각읍월과군기법’이 제정되었다. 정부는 각 읍에 총약환(銃藥丸)의 월별 생산액을 배정하고, 총약환의 법정가도 정하였다. 조총은 1자루에 쌀 3석 5두, 화약은 1근에 10두, 연환은 100개에 5두였다.
각읍월과군기법의 목적은 각 읍에서 의무적으로 군기를 자체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염초를 제외한 유황·연철 등을 각 읍이 직접 생산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를 구입해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각읍월과군기법의 시행은 철·유황·아연 등을 생산할 수 있는 광산 개발을 촉진하였고, 총약환의 상품화를 진전시켰다.
월과 조총·화약·연환은 상당한 이윤이 보장되는 상품이고, 전국 각 읍을 상대로 판로가 넓은 물종이었다. 서울의 부민(富民)들은 점차 총약환의 무기 제조장을 개설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우수한 공장(工匠)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무기 제조업이 성장하면서 지방에도 무기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생산·판매하는 수공업이 발달하고, 이를 매매하는 상인도 등장했다. 각 읍 수령들은 서울의 부민이 생산한 총약환을 구입하여 월과군기에 충당하였다. 월과군기가가 대동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수령들이 민결(民結)에서 염출하였고, 민간 제조업자들이 월과군기가를 받고 정기적으로 총약환을 제조 납품하는 등 사실상 공물의 방납 형태가 형성되었다.
1652년(효종 3)에 충청도에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각 읍의 월과군기가를 대동미에 포함시키는 ‘각읍월과총약환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그 후 전라도·경상도에 확대 적용되어, 전결 수에 따라 대·중·중소·소·잔읍에 월과총약환을 제조하는 데 드는 월과미가 차등 있게 배정되었다.
삼남 각 읍의 월과미를 1654년(효종 5)에 충청도, 1663년(현종 4)에 전라도, 1681년(숙종 7)에 경상도 대동미에 각각 포함시키면서 조총·화약·연환이 새로운 공물 물종으로 확정되었다. 경기도는 1624년(인조 2)에 총융청, 1626년(인조 4)에 수어청을 설치하면서 각읍월과군기법을 혁파하고, 총약환을 소속 군문에서 제조하게 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각읍월과군기법이 그대로 적용되었고, 황해도와 강원도는 1708년(숙종 34)에 적은 액수이지만 월과미가 상정가(詳定價)에 포함되었다.
1686년(숙종 12)부터는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을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세 군문에 균분하여 방납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는 서울의 민간 제조업자가 방납해 왔던 전국 각 읍의 월과군기 중,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 방납권을 세 군문에서 흡수한 것이었다. 또한 대동법이 적용되지 않는 각 도의 감영에서도 월과군기가와 생산가 사이의 차액을 얻기 위하여 관내 각 읍의 월과군기를 방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발한 민간 제조업자는 상진청(常賑廳)이나 군기시와 결탁하여 군문과 다투면서 총약환의 공인제(貢人制)를 성립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상진청과 결탁한 민간 제조업자는 1685년(숙종 11)에 삼남월과연환계(鉛丸契)를 창설하고, 1704년(숙종 30)에는 삼남월과화약계, 1710년(숙종 37)에는 해서월과총약환계를 성립시켰다. 이 3계는 1754년(영조 30)에 총융청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군기시와 결탁한 민간 제조업자는 1703년(숙종 29)부터 삼남월과조총과 화약 일부를 돈을 받고 만들어 납부하였고, 1708년(숙종 34)에는 강원도의 월과총납환을 공납하였다. 1725년(영조 1)부터는 평안도와 황해도, 1737년(영조 13)에는 삼남의 천보총(千步銃)을 돈을 받고 만들어 납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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