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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방시조
발간사
우리는 바람이 실어온 눈부신 사계(四季)를 함께 목도(目睹)하며 행복한 가치를 동행하는 진정한 문학 동인입니다
토방시조 창간호를 발간하기까지 돌이켜보면 2012년 봄부터 대전평생교육원 시민대학에서 ‘행복한 시문학’강좌가 개설되어 손종호교수(충남대 국문과), 박헌오(대전문학관 관장), 정순진교수 (대전대학 문창과), 김영희(작가)님의 지도를 받으며 시와 시조를 공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동안 많은 회원이 시와 시조로 문단에 등단하는 기쁨을 누렸으며
‘행복한 시문학’반은 2018년 ‘자유시’반과 ‘시조’반이 재편성되기까지 문집으로 5집까지(자유시, 시조) 함께 발간하였습니다.
시조는 700년을 이어온 격조와 운치가 넘치는 3장6구 12소절 45자 내외의 형식과 운율을 가진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정형시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얼이 깃들어 있고 우리 민족의 성정이 녹아있는 시조가 많이 보급되어 하루바삐 우리나라 국민시(國民詩)로 정착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조를 사랑하고 시조 짓기를 열심히 배웁니다.
기다리는 수업시간 , 합평의 열기 , 서로를 채우고 격려하던 지난 기억들...
무술년(戊戌年), 우리들은 그렇게 아름다운 동행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함께 공부한 문우님들과 한 마음 한 뜻으로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나아가 시조의 저변확대를 위하여 그동안 갈고 닦은 작품을 모아 시조집 ‘토방시조’ 창간호의 힘찬 돛을 올립니다.
아울러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조를 더욱 사랑하고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정진할 것을 다짐합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적으로 지도해주신 박헌오 교수님께 다할 수 없는 예를 올리며 창간호를 빛내주신 대전시조협회 유준호 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018. 12 주영자
축 사
대전 시민대학에서 ‘행복한 시문학생활’이란 이름으로 개설된 학습과정에 함께 참여하여 시조를 공부하기 시작한지 어언 7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행복한 동행’이란 소책자를 엮어 왔는데 이제는 어엿이 여문 동인지로 출발하자는 열망으로 ‘토방시조’라는 이름으로 소박한 시조동인지를 내기로 결의하고 그 첫 동인지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진정 기쁜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자연스럽게 맺어진 결실이요 멀리까지 함께 가자는 문우들의 기약이 담겼습니다.
아마도 문우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말도 드물 것입니다.
토방에 모여앉아 한 편씩 시를 짓고 감상하는 글벗이라면 비할 데 없이 순수하고 따뜻한 우정이 거기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비 맞지 않는 토방에 모여 앉아 시의 밥상에서 겸상하는 문우가 되어 더러는 외출을 했다가도 잊지 않고 의미 있는 날에는 동참하고, 뒤늦게 함께한 이도 동화되어 한 문우의 동아리를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허물 수 없는 인연이 된 것입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엄동설한도 염도 넘어가고, 개화기도 결실기도 맞지만 한결같은 동행이 되어 상생의 길, 천년을 이어온 민족시조 계승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헌신적으로 노력한 분들이 솔선수범하여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좋은 문우의 동아리로 남을 것이며, 날로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하여 나누는 보람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시가는 유일하게 ‘시조’라는 것을—, 그 시조가 우리 국민들에게 소외받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시조를 버릴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빛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국인의 맥박과 호홉과 가락과 정서가 담긴 시조를 소양으로 삼아야 합니다. 문화적 주체성을 바탕으로 삼고 유행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외로워도 소외받는 시조부흥에 앞장서려는 것입니다. 왜 선조들이 시조를 즐겨 짓고 불러왔는지 시조를 배우면서 실감합니다.
그 맛과 멋과 고결함을 느끼면서 진가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토방시조 동인들이 민족문화를 꽃피우는데 소중한 역할을 다할 것으로 믿습니다.
‘토방시조’동인지 탄생의 기쁨과 희망과 열정을 오래오래 간직할 것입니다. 토방시조 동인회의 무궁한 발전과 동인들의 건승하심을 손 모아 빕니다.
2018. 12 함께 있어 행복한 박 헌 오
초대시
꽃은 져도 다시 핀다.
유 준 호
꽃은 져도 지난 해 모습으로 다시 핀다.
딴 세상 다녀와도 본디 향 잃지 않고
빛나게 찡한 기쁨에 이승 거듭 즐긴다.
꽃은 져도 저승 순례 마치고 다시 핀다.
죽음의 깊은 연못 헤엄쳐 건너와서
생글한 새봄 터뜨려 한 생애 거푸 연다.
벼 그루터기
벼 베어낸 논바닥이 공동묘지 뫼 같다.
겨우내 눈얼음이 껴안은 그루터기
농부가 자기 살점을 이식한 흉터이다.
[프로필]
전)한국시조문학작가협회 부회장. 전)가람문학회장 현)대전시조시인협회 회장,
세계문학상(시조)대상, 대전광역시문화상, 대전펜문학상, 한국시조협회문학상 등
시집 : 바람 한 필, 사월 꽃나무들 외 5권. 평설집 : 운률의 미학을 찾아
초대시
환상통
박 헌 오
열의 손 백손가락 마디마디 꽃이 핀다
한없이 꺾어줘도 남아있는 생명의 흙
흙속에 천(千)의 얼굴을 물레질로 빚어낸다
잘려나간 아픔 잊고 기쁨을 그려 가면
소복이 자라나는 경이로운 회상의 숲
고운 날 떠난 향기가 모두모여 불 지핀다.
별들의 궁전에서 새나오는 웃음소리
망각을 갈아엎고 불어넣는 풀무질
깊은 꿈 살아 있음에 고열 견딘 적멸(寂滅)이다.
눈과 귀가 없어도 보이고 들리는 이
한번 품은 사랑꽃과 영원토록 사는 이
눈부신 백자항아리 환생하신 헬렌켈러.
여치 잠
여치는 잠을 잘 때
코를 골며 자나봐
코고는 소리 듣고
운다고?
노래한다고?
좋겠다
고운 소리라서
타박 않고 듣잖아
< 약력 >
대전시민대학 강사, (사)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대전문협 수석부회장, 충남시인협회 부회장, (전)대전문학관 초대관장, (전)대전시조시인협회 회장,
저서: 이론서『현대시조창작』<공저>, 시집『하늘이 들고나온 노란 시집』등 7권,
강수원
* 꽃 속의 길
* 동백꽃
* 외국 노동자
* 이슬
* 사막 유랑
꽃 속의 길
살갗에 타오르는 머나먼 순례의 길
비바람 몰아치는 황량한 숲길에서
자궁을 비우는 고통
기쁨으로 맞는다
태양을 안으려고 동맥을 세우고서
애절한 몸짓으로 피 흘려 보이더니
몽우리 곱게 여미고
미소짓는 양귀비
고샅길 찾아가는 머나먼 여행길에
가슴은 붉게 익어 가쁜 숨 몰아쉰다
곱다란 꽃 속의 길도
험난함이 가없다
동백꽃
마음을 열어 놓고 물소리 따라간다
별 밭에 걸어놓은 동지의 빨간 등불
바람에 불이 붙어서
타고 있는 달 같은 꽃
눈 속에 속살 빨간 입술이 오물 대고
해무에 입 맞추며 바다를 품어 주니
향 그른 유혹의 겨울
동박새가 찾아온다
꽃 심에 받아들인 사랑의 결정체는
온 산이 뒤틀리는 파고를 못 견디고
통꽃이 떨어져서도
울지 않는 몽환이다
외국 노동자
빨리해 새끼들아 백번도 더 들은 말
귀로서 들었지만 머리채 흔들린다
어머닌 만리 밖에서
밤을 새워 기도한다
가져온 언어들을 벽속에 가둬두고
몸으로 말하려니 등 짐이 오죽하랴
아이들 조막손으로
아빠에게 편지 쓴다
살아온 문화 차이 향수병 견뎌야지
가족들 꿈을 위해 맡은 일 버혀 내며
혀 잘린 앵무새처럼
수화(手話)하기 땀난다
이슬
달빛이 밤새도록 빚어놓은 감로수가
고향 집 문고리에 둥굴게 올라붙어
어머니 부엌 가실 때
손 붙잡고 들어간다
별빛이 사랑 하다 헤어진 이슬방울
연 잎에 내려 앉아 무지개 되었더니
보내고 안타까워서
빨리 오라 손짓한다
아침 해 한 잎 띠워 슬픈 잠 자고나니
날벌레 소풍처럼 바람에 사라진다
이슬은 날마다 와서
하루 살다 떠난다
사막 유랑
황량한 사막에서 새 생명 꽃 피우면
바람을 타고 오는 시원의 조각구름
별똥별 지나가면서
여린 미소 짓는다
혼자서 찾아가는 희미한 하늘 길을
낙타 등 올라타고 천천히 걸어갈 때
영롱한 별빛 보내어
마중하는 어미 별
사막에 둥실떠서 길 밝히는 보름달이
굴곡진 하루해가 떠난 길 이어주며
꿈꾸는 신기루 찾아
은하 타고 달린다
보드란 초록 바람 얼굴을 스쳐오면
나그네 쉬어가는 사랑의 오아시스
등 짐을 벗어놓고서
밤하늘에 안긴다
별똥별 주워들어 하늘에 돌려주고
이슬은 실에 꿰어 목에다 걸어주고
어머니 만나러가는
낙타의 눈 반짝인다
문경훈
*봄비 내리면
*노랑 붓꽃
*더위야 물렀거라 (1)
*훈민정음
*런닝머신
*숲속의 작은 의자
*왜가리
*혹한 속의 모성(母性)
봄비 내리면
안개비 살포시
대지 가슴 적시면
앙상한 나뭇가지 퍼런 힘줄 새잎 내고
개나리 수줍은 미소 온 세상이 노랗다
강물 위에 보슬비
동그라미 돋아나면
부들 아래 개구리 알 깨어나 꼬물대고
물오리 수중 발레로 꽃망울을 터뜨린다
창가에 소곤소곤
빗소리에 선잠 깨니
꿈길에 만난 님이 손 놓고 간 데 없어
황급히 창 열고 보니 싱긋 웃는 백목련
노랑 붓꽃
펼쳐 논 강물 화선지
한숨 짓는 청년 화가
버들치 산그림자
해오라기 곁에 두고
해어름 어깨 적셔도 물감만 풀어댄다
오월은 아픈 계절
첫사랑 새록새록
그 눈동자 하얀 미소
붓을 놓친 손 떨림
개어낸 샛노란 추억 강변 가득 일렁인다
더위야 물렀거라 (1)
파자마에 선풍기
수박화채 곁에 두고
사랑 꿈 가득 담은
책 한 권 펼쳐드니
피서가 따로 있으랴 몸과 마음 시원하다
오늘은 이몽룡 되어
담장을 넘어볼까
사랑의 파노라마
삼매경에 잊은 폭염
더위도 청춘의 빛깔 가슴을 채색한다
훈민정음
-한글날 572돌에 부쳐
해례본에 담겨있는 독창적인 제자원리
언어학자 이견(異見)없는 세계 으뜸 소리글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 민족문화 빛난다
천지인(天地人)이 어울린 모음의 합용원리
사람이 으뜸이라 음양에 두루 통한
서양을 훨씬 앞서는 인간중심 돋보인다
누구나 쉽게 익혀 편리한 문자 생활
유네스코 문맹퇴치상 그 이름 세종대왕상
한글이 세계공용어 될 날 그리 멀지 않았다
런닝머신
뛰거나
짓밟거나
사랑으로 품어 안고
소주병에
속울음
삭신이 다 닳도록
묵묵히
달려 나가는
아비들의 전생이다
숲속의 작은 의자
행인도 쉬어 가고
다람쥐 놀다 가는
오솔길 갈림목에
투박한 나무의자
앉으면 솔바람 일어 쌓인 피로 씻어준다
빈 의자 되기보다
서로 앉기 다투는데
고단한 삶 이야기
안아주는 위로자
남 위한 쉼터 되어서 사랑으로 낡아간다
왜가리
왜 가리
왜 가리
너를 두고 어이 가리
실개천
징검다리
불도저로 갈아 엎은
메마른
도시숲 향해
왜가리 왝왝댄다
혹한 속의 모성(母性)
무슨 미련 남았는지 대지 품에 못 안기고
찬바람에 가르랑대며 빈가지 꼭 붙드나
몰랐네, 떡갈나무 잎새
풍장(風葬) 당하는 그 마음
죽어서도 꼬막손 차마 놓지 못하시고
매서운 눈보라를 주검으로 막아내며
싹눈을 보듬고 어르는
낡고 해진 치맛자락
수의를 넓게 펼쳐 젖내기 감싸 안고
칼바람에 엉엉 울면 마른 젖 물리시는
어머니, 이젠 영면 하세요
봄바람이 감돕니다.
박득우
seraph777@hanmail.net
*수업풍경
*작대기
*보리타작
*그리움
*애가 타
수업풍경
책갈피
펼쳐놓고
시 향기를 훔쳤다
퇴고 시
어이할까
감정이입 따따부따
덜 익은
귤 맛 따라서
홍당무 된 지우개
작대기
낫 갈아
지게 지고
장단 맞춰 흥얼흥얼
어깨 짐
무거우면
버팀목 되어주고
늘그막
곁에 둔 정인
당신 없인 못 살아
보리타작
오뉴월
보리밭은
중무장 비상이다
홀태기
도리깨질
보리가시 징글맞다
한 세월
굳은 살 흔적
사랑 새긴 문장(紋章)이다
그리움
옛정의 흔적들은 점점 붉게 물들고
애 태는 보고픔에 타들어가는 속울음
그리움 철썩거리는 먼 바다로 노을 진다.
눈앞엔 뿌연 해무 하얀 장막 드리우고
가슴이 미어질 듯 속 깊이 삼킨 설움
참다가 숨이 차올라 터진 울음 파도친다.
애가 타
해 저문
싸리문엔
잡새들만 지저귀고
옛 정의
언저리엔
시린 가슴 녹슬었다
긴긴밤
애타는 설움
허리춤만 시리다.
박 숙자
*가을빛
*보람
*동행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겨울밤
*이른 봄에
*잠자리
*아쉬움
가을빛
사각대는 낙엽소리 귀 기울어 듣는다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딛는 발자국
단풍 숲 물들어가듯 그리움이 쌓여간다.
나뭇잎 사이사이 내려쬐는 고운 햇살
그이와 함께 가며 설레던 수많은 날
귓가에 솔솔 들리던 보물지도 꺼내본다
보람
헐렁한 옷차림에
푹 눌러쓴 밀짚모자
가을볕에 익어가는
황금빛 고향 물결
풍년에 한몫했다며
으쓱댄다 허수아비
동행
낙엽 한 잎 타고서 떠나는 가을 여행
마주잡은 손의 온기 가슴 점점 설레고
잔잔한 노랫소리에 내 마음은 흔들린다.
소슬한 바람결에 짝짓는 조각구름
모퉁이 돌아가다 마파람에 넘어져도
초록에 다시 일어나 함께 피는 그 꽃길
날리는 고은 옷깃 눈 감고 느껴보며
귓전에 맑은 음성 경쾌해진 발걸음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 가슴 다시 벅차온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바로 볼 수 없던 얼굴 하얀 이 드러내고
지그시 눈을 감고 하모니카 연주하면
쫀득한 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부드럽고 긴 머리 뭇 눈길 사로잡고
동글동글 여문 알 얇은 옷에 내비친다
호젓한 산밭에서 만난 가슴이 큰 옥수수.
겨울밤
새아씨 소곤대듯 몰래 뿌린 하얀 가루
벽난로 장작불에 둘러앉은 가족들
따뜻한 커피 잔 들고 그리움을 마신다.
깨소금 볶는 소리 밖에까지 툭툭 튄다
엉큼하게 찾아와 기웃대는 청설모
아련한 시간 여행은 무지개로 떠오른다.
이른 봄에
꽃들의 수런거림에 닫았던 창문 열면
기지개 활짝 펴며 오솔길이 손 내민다
먼저 온 아지랑이는 문밖에서 서성인다.
어깨를 들썩이며 콧노래 부르는데
밖으로 끌어내는 재주 많은 봄바람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살얼음이 깨진 가슴.
잠자리
댓돌 위에 벗어놓은 고무신에 잠자리
동그란 겹눈으로 사방을 살피다가
따뜻한 가을 햇살에 안경 벗고 눈 감는다
예쁘게 잠자는데 깨우지 않으려고
맨발로 가만가만 곁에 가 앉으려니
놀라서 파르르 떨며 달아나는 고추잠자리
아쉬움
멀리 온 삶의 여정 바쁘게만 살았다
마음 꽃은 한창인데 뉘 얹어준 은발인가
누에가 명주실 뽑듯 감긴 회억 풀어낸다.
긴 시간 나도 모르게 곶감 빼듯 도둑맞고
못 채운 욕심보는 다시 백년 준비하며
철부지 세월 붙잡고 언제까지 꿈만 꿀까
배말순
baems3@hanmail.net
*보리수단
*상처
*벌초 가는 길
*비
*저녁
*허수아비
*오솔길
보리수단
나리꽃 졸고 있는 물맞이 유두절
그늘도 시드는 숲 몸 사리는 참매미
웃자란 계수나무는 맥없이 늘어졌다.
햇보리 탱글탱글 쫄깃함을 입더니
새콤한 오미자청 얼음 동동 만나서
아직 먼 염천 하늘을 기운차려 가잔다.
상처
벌레에 물린 자리 손톱 세워 긁어대니
피 맺힌 자국은 씻어내도 다시 붉다
세상사 덧난 자국도 긁을수록 불어난다.
벌초 가는 길
여름과 가을사이
찾아가는 그 산길
물봉선 수줍어서
자줏빛 감춘 표정.
산국화
가득 안아주는
하늘같은 거울 본다.
비
빗방울 맞아보라
외로움도 툭툭 진다
자작나무 빽빽하게
떨고 있는 가을 잎
접었던 손가락 펴서
야윈 얼굴 닦는다.
저녁
찬바람 파고들어
도토리 맥 못 춘다
날개를 오물여도
등이 시린 귀뚜라미
늦은 비 무거워진 잎
갈참나무 힘겹다.
청국장 끓고 있는
눈이 빨간 아궁이
갈치도막 지글대는
석쇠도 그리운데
그런 거 못 드신다던
엄마 마음 이제 안다.
허수아비
이사 떠난 별자리
찾아오는 가을바람
구름이불 날아와
덮어주는 들샘가
무명 옷 다 헤진 아비
된서리가 꽃만 같다.
오솔길
청록 빛 가지마다 눈부신 주목 열매
태양 아래 익어서 붉디붉은 입술 물고
천년 향 멀리 돌아서 너에게로 가고 있다.
달큰한 계수나무 시름찬 잎 날리는가
장구밥 열매 찾아 신명나게 두드리다
모아둔 여정의 꿈들 씨앗 속에 아물린다.
연봉월
gksrmf0202@hanmail.net
*밤 비
*장미의 혼
*만 학
*빗방울
*경 칩
*봄 인사
밤 비
별들이 눈을 감고
주르르 흘린 눈물
가로등에 걸린 현(絃)
빗금으로 탄주하고
창문을 흔드는 빗소리
빗장 열어 맞이한다.
장미의 혼
담장에 기대서서
기다리는 긴긴 날
참아온 높이만큼
붉게 찍힌 입술자국
타올라 날리는 영혼
낙화마저 뜨겁다.
만 학
만학도의 눈망울
초롱초롱 모였다
달빛에 안긴 글씨
얼굴마다 어룽진다
반딧불
반짝반짝 돌며
죽비 들고 잠 쫒는다.
빗방울
개구쟁이 빗방울
구름차 타고 와서
빼꼼이 내민 얼굴
토독이는 아기 망치
소나기
두더지 놀이
얼른 숨고 내밀고…….
경 칩
옷 벗은 어린 가지
들려오는 기침소리
버들가지 흥청대다
가만히 눈을 뜨면
쪼그린
다리가 아파
펄쩍 뛴다 개구리‒.
봄 인사
또옥 똑 여보세요?
파릇파릇 내미는 손
살바람 찾아오면
콩닥이는 여린 가슴
꽃잎이
까치발 서서
인사하다 톡! 치네
연타
010 9229 6157
* 인연
* 지혜의 별
* 봄의 길목에서
* 내안의 길을 찾아서
* 방초
* 흔적 없는 나
* 환지본처
인연
맑은 샘 솟아올라 봄꽃에 입 맞추고
심산의 계곡 물 산천 경계 두루 도니
어느새 장하물결이 하늘바다 다다르네
피어오른 물안개 태 허공과 한 몸 되니
산 너머 숲의 주인 복된 햇살 가득안고
대지는 뭇 생명들을 대적광전에 들여놓다
지혜의 별
지난 밤 내려앉은 무심의 텃밭에서
밤하늘 뭇별들이 이별을 거론한다
저 먼 곳 은하 우주에 가는 빛이 바로 너라
봄의 길목에서
여닫는 문틈 사이
고이 비치는 임의 등불
뜰 앞의 이슬방울
자취 없이 굴러가니
한 가람
숲길 따라서
봄소식이 걸어오네
내안의 길을 찾아서
초발심 바랑 안에 억겁 세월 동여 메고
풍경소리 찾아서 암자에 당도하니
고요뿐 적막을 벗삼은 빈절이 반기네
아침에 눈을 뜨니 온곳을 모르겠네
지난 밤 그 인연은 몽중의 환(幻)이로다
화로 위 된장국 곁에 “퍼드세요” 주걱 하나
세속의 정 하염없어 그침없는 물소리
사계절 돌고 돌아 봄이 다시 찾아드니
지난 밤 몽매한 그림자 종적 없이 떠났네
방초
휘몰이 칼바람도 온 몸으로 마주하다
따사론 햇살 따라 만고의 법 손에 들고
금생의 참 주인공은 요달하여 안주하네
이슬과 한 몸 되어 수줍게 맞는 새벽
만산의 단풍잎을 다 벗어나 홀로 서니
대 광명 푸른 하늘이 거침없는 벗이로다
흔적 없는 나
무성한 무명 잡초 벌 나비 떠난 이 곳
마음 밭 새 고랑에 백화 종자 묻어두니
빈 마음 처처불공에 이 자리가 만다라
소슬바람 문을 닫고 홀로 온 밤 새고 간다
가을 낙엽 심심산중 가람 문 두드리니
반백년 찰라 지간에 어인 몸이 떠있느냐
환지본처
풍경 넘은 새벽 달빛 몽중 사미 일으키니
무명업식 눈 비비며 세찬 바람 마주하네
마음 밖 풀벌레 소리 영원으로 지고 있다
어이타 뭇 중생들 참 주인을 모르는가
허공은 가득하고 법신 미소 만발인데
평생을 변함이 없는 본향 찾아 헤맨다
*환지본처 –본래 그 자리
윤옥희
yoh1990@hanmail.net
*숨은 별
*첫사랑
*첫시집
*역사의 길
*어울림
숨은 별
고운 꿈 끌어안고 건너가는 징검다리
쉼 없이 헤매며 반세기를 흘러온 길
숨은 별
어디에 있나
추억 속을 뒤적인다.
한 우물 파라하신 아버지 그 말씀
밤 가시 찔린 후에 알밤을 얻어내듯
노을빛
사위는 가슴
수많은 별 돋아난다.
첫사랑
손바닥 만한 빈터에 집 한 채 지었더라
첫 문을 열어보고 마당에 들어설 때
분 통속
골무만한 방
쌀개미가 빙빙 돈다.
큰 눈망울 굴리는 황소의 천둥소리
전복 속에 진주가 은밀히 숨어있듯
호박벌
벌침을 숨기고
꽃 속으로 파고들다
첫시집
황해를 품은 임이 대쪽같이 바라보다
시의 싹 살펴보며 알알이 가꾸는 맘
절창을 가득 싣고서
우주라도 돌고 싶다
그대 위한 꽃이랄까 품속의 진주랄까
한평생 품어온 꿈 잔불로 익히는 삶
첫 시집 내 놓은 마음
바위처럼 무겁다
일월이 바뀐대도 변함없는 나의 절규
팔순에 꽃을 피워 향기의 강이 될까
세월의 경계를 넘어
미리내로 흐른다.
역사의 길
남과 북 첫 만남을 그리던 평화의 집
빙판을 걸어왔다 뼈 속에 숨겼던 말
첫걸음
감격스런 순간
다가선 한발 걸음
칠십 년 묶였던 땅 발밑에 시린 상처
철조망 걷어낸 장미꽃 울안에는
칼자국
빼곡한 능선
꿈을 적신 비가 온다.
어울림
수만 년 지난 세월 바람길 난 산과 바다
허공을 돌고 도는 인연은 생명 되어
나목이 꽃을 피우고
매미들이 우짖는 숲
바람이 날개 타고 달뜨는 하늘이여
저 달 지면 해가 솟아 깨어나는 사람들
지구는 어울려 사는
조화로운 세상이다.
이선희
sunhee2458@naver.com
*가을 붓질
*때 바뀐 기생초
*무초 2 (수양버들)
*매미의 삶
*밤바다와 태풍
*문학의 조우
가을 붓질
설악에 첫 점찍고 한라에 마무리한
산하를 휘달려온 운필의 가쁜 숨결
달인은 화폭 끝에서
가을 붓을 놓는다.
때 바뀐 기생초
긴 여름 호된 가뭄 못 피운 꽃망울 안고
계절 넘어 정착한 곳 때 지난 가을밭
오로지 꿈을 향한 몸부림
피어났다 때를 잊고
잡초들만 기승하는 고즈넉한 밭고랑
코스모스 못 온 자리에 노란 물결 일렁인다
볼 시린 소슬바람에도
유종의 미 지켜냈다.
무초 2 (수양버들)
수양대군 넋이 되어 냇가에 발붙였나
평생의 죄 머리 숙여 참회하며 사는가
온몸을 영초로 내어주고
적덕하는 수양버들
살바람 춘설도 가슴으로 품어 안고
뼈 없이 늘인 가지 연녹색 수포 띄고
봄 편지 한 다발 안고
달려오는 파발이다.
매미의 삶
칠년의 고행 끝에 가수로 등극하어
두 주 짧은 생이라도 목청을 다 쏟는구나
회갑이 지나는데도
나는 목청 못 틔웠다.
밤바다와 태풍
천근같은 어둠이 만경창파 짓누르고
깊은 밤 질풍노도 누굴 향한 원성인가
등대는 가슴 졸이며
뜬눈으로 지새운다.
밤새도록 비명소리 웅장한 바다 놀에
깊은 물 속 투숙객들 선잠으로 시달리고
간밤의 격정 다 녹이는
아침 햇님 큰 목소리.
문학의 조우
바람 등에 실려 가는
에움길 구름의 인연
청운에 꿈들을
수면 가득 묻어두고
노을 녘 달려가련다
문학의 꿈 그 정점으로
장 라온
gokran@daum.net
*설화(雪花)
*새해맞이
*춘몽
*저승 꽃
*배롱나무
*갈바람
*대전 아리랑(我理朗)
설화(雪花)
청솔 잎에 설화 송이 사락사락 쌓이면,
산천의 눈 나비는 지천으로 손짓하고
애잔한 임의 품속에 잦아드는 사랑가
새해맞이
시루봉 산자락에 여명이 밝아 올 때
장라온 늘 청춘 열정의 닻 올리고
설원은 화선지 되어 무지개 꿈 그린다.
보문산 등성이에 붉은 해 불끈 솟아
세월의 아픈 흔적 어루만져 치유하고,
장라온 어깨 위에는 사랑의 짐 출렁인다.
춘몽
느티나무 꼭대기
다시 꽂는 청춘 깃대
청산 넘어 엿보던
메지구름 밀어내고
멧부리 춘몽을 누빈
스란치마 늘여 입다.
※ 메지구름~비를 머금은 검은 조각 구름
저승 꽃
백목련 환한 꽃잎
춘풍에 졸음 쫓고
수줍은 봄 나비들
눈 맞추며 속삭인다
피었다 지는 날에는
하얀 혼(魂) 되어 떠나가리.
배롱나무
영귀루 계자 난간
토담 너머 배롱 꽃
하늬바람 간지럼에
매혹되어 붉어진 볼
염천에 갈아입는 옷
꽃잎 겹겹 벗는다.
미운 님 기다리며
백 일을 피고 지고
검붉은 꽃 덩어리
실망에 찬 혈흔인가
곡풍에 수피(樹皮)를 뉘어
이슬 덮고 잠든다.
※ 영귀루 : 대전숭현서원 누각
갈바람
그리움의 생채기
지운 줄만 알았는데
뒹구는 주홍단풍
갈바람이 내려놓고
토라진 심연의 아픔
불꽃 다시 피운다.
대전 아리랑(我理朗)
현충원(忠)
한라에서 백두까지 평화의 싹 움트고
매서운 눈보라가 압록강 밖 물러갈 때
한 동포 어깨를 걸고 아리 아리랑 춤추리.
효월드(孝)
내 성씨 시조 찾아 만성보(萬姓洑) 건너갈 제
혈연의 맥 새긴 유래 팔 벌려 반겨준다.
충효예(忠孝禮) 뿌리를 밝힌 아리랑에 안기리.
숭현서원(禮)
회덕의 팔현 모셔 춘추제향 올릴 제
청금록 유생들 영귀루서 읊는 시창
서원골 선비의 전통 이어가리 아리랑
계족산 맨발황톳길(仁)
명품백리 숲길 따라 황톳길 밟는 맨발
계족산성 흔드는 백제군의 핏빛 함성
황토 빛 충절의 후예 왕성한 몸 아리랑
추억과 낭만의 대청호반길)(知)
로하스 해피 로드 풀숲에 감춘 세월
갈대의 머리 위로 휘날리는 낙엽 비
대청호 수면에 잠긴 옛 풍경을 낚는다.
※ 로하스: 건강과 지속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생화태도를 뜻 함
조국성
*컬링경기
*해빙기
*나무는 헤맨다
*해수욕장
*성문을 열어라
컬링경기
투명한 길을 가는 어처구니 있는 맷돌
동그란 중심 자리 새 주인은 누구인가
서로가 시샘하면서 자리다툼 이어진다.
걸림돌 치우면서 미끄러운 길을 열면
툴툴툴 앞을 막고 엉덩이를 들이민다
마지막 안방 차지는 영악한 자 차지다.
해빙기
문이란 문 죄다 열고
벽이란 벽 몽땅 헐고
된바람 밀어내고
살바람 맞이한다
인심이 펄펄 끓으니
매얼음*도 녹는다.
* 매얼음 – 매우 단단하게 꽁꽁 언 얼음.
나무는 헤맨다
기름진 땅 만나려 중력을 따라가다
젖은 틈 파고들어 영토를 넓혀간다
뿌리는
줄기를 위해 어둔 땅속 헤맨다.
생명을 구걸하러 햇볕을 찾아가다
양지에 꿇어앉아 손바닥을 벌린다
줄기는
열매를 위해 무주공산 헤맨다.
삶의 터 찾으려고 비탈을 굴러가다
정착할 터를 잡고 자립을 시작한다
열매는
가계를 위해 문패 찾아 헤맨다.
해수욕장
구름도 땡볕 아래
비 오듯 땀 흘리고
바다도 못 견디어
몸부림치는 여름날
더위도
피서 떠나고
샛바람을 맞는다.
성문을 열어라
성벽은 높을수록 바람이 잠잠하고
성문은 지킬수록 출입이 뜸해지니
성안은 해가 갈수록 적막 속에 잠긴다.
뒷문은 닫을수록 구린내만 쌓이고
앞문은 잠글수록 지린내만 고이니
성내는 인적이 끊겨 쉬파리만 설친다.
주영자
geumbitbada@hanmail.net
*봄 꿈
*초승달
*호랑나비
*꽃 지는 날
*낙엽의 서(書) 1
*산사에서
*손수건
*낙엽을 보내며
봄 꿈
도원(桃園)을 달려가는 가여운 꿈이었나
비에 젖은 낙화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방이
찰나인 것을
내 안에 봄 가네
지는 봄 이별 싫어 빗장을 걸어봤지
끄내끼 챙겨들고 묶어온다 농을 섞는
초록은
동색(同色)이로고
하릴없이 봄을 울려
초승달
무심히 찿아 와서
잠결에서 조우(遭遇)하는
정한 마음 애(愛) 시림만
대책 없이 떼써보다
인연에
발효(醱酵) 되지 않는
실반지로 떠가다
호랑나비
잊자며 목을 꺾는
능소화를 힘껏 안고
간신히 날아가는
무거움의 어리석음
무소유(無所有) 자유로운 걸 사랑으로 버겁다
꽃 지는 날
흩뿌리는 꽃비 속에
침묵을 서성이며
가지마다 자지러져
외로움 털어내는
그 꽃잎 볼이 터져라 설음 모아 불어낸다
사랑한 자리마다
몸져 눕는 낙화여
손 안에 숨긴 꽃잎
볼 부비다 잠들고
이 봄도 몰래 떠나며 그리움 적셔 놓다
낙엽의 서(書) 1
한창 때 눈부신 날
신명나게 휘어 놀고
붉어진 잎새 되어
스스로 부끄러운
초목도 사춘기(思春期)에는 할 일 없이 방황한다
더디게 화인 찍고
기억의 길 시침하며
정인(情人)두고 가야하는
고개 숙인 긴 적묵(寂黙)
태워서 산을 비우는 비장한 낙엽의 서(書)
산사에서
그립단 말 묻어가는
남겨진 발자국은
수척한 모습으로
소리 없이 따라오고
눈 터는 풍경소리만 고요를 쓸며 가다
일주문에 기대서서
설산을 바라보며
보내는 게 순리라는
세상의 이치(理致) 속에
허망해 비인 가슴이 사위어 재가 되고
잊음은 묶어놓고
적막은 놓아주고
이리하면 잠들 것을
답답한 소견머리
끝없는 모정(母情)의 추억 눈 오는 산사의 밤
손수건
딸아이 보러가며
깃털 걸음 떠서 난다
길은 아직 멀었는데
헤어질 때 아릴 마음
약한 맘
아니 보이려
미리 우는 어미 눈물
낙엽을 보내며
온전히 건사 못한
뉘우침에 폭폭하여
붉은 피 쏟아내고
떼로 뭉쳐 다비(茶毘)하는
이대로 작정한 떠남 만추의 강에 서다
신열로 타오르며
눈부시게 사랑하던
설악(雪嶽)의 시편(時篇)들을
빈산에 기탁(寄託)하고
다시금 돌아올 수 없는 시원(始原)으로 향하다
채동선
*황매산 철쭉
*서울 구경
*시곗바늘
*찍사의 비애
*목련꽃 필 무렵
황매산 철쭉
신들이 은거하는
하늘 아래
첫 마을
시든 몸을 재촉하여
꼭대기에 올라 보니
빨갛게
밑줄을 쫘악
바람이 긋고 간다
서울 구경
주근깨가 매력적인
가슴 큰
산골 처녀
서울 구경 나섰다가
길을 잃고 말았네
“아이참, 환장하것네.”
도처에는
봄! 봄! 봄!
시곗바늘
끊임없이 반복되는
짧은 만남
긴 이별
스쳐가는 인연은
붙잡아야 제 것인데
서로가 밀고 당기는
사랑의
고차방정식
찍사의 비애
그리움이 복제된
색 바랜
사진 한 장
조리개를 활짝 열고
눈물로 바라보면
얼룩진 나의 자리는
언제나
빈칸입니다
목련꽃 필 무렵
봄이었지 아마 우리 처음 만난 때가
누구보다 더 살갑게 손을 내어주던
당신의 하얀 미소가
왜 그리 곱던지요
참혹한 이별 뒤엔 그리움만 남는 걸
하염없이 부서진 당신을 떠나보내고
진종일 비를 맞으며
침묵으로 걸었지요
들리나요 당신, 적막한 봄의 소리가
보이나요 당신, 차가운 빛의 줄기가
가혹한 시련 못 이겨
붓대를 꺾습니다
최현주
*꽃다짐
*조금새끼
*명상
*무언(無言)
*동행 1
*동행 2
꽃다짐
볕 좋은 담장아래
봉선화 붉은 얼굴
잎사귀 곱게 빻아
소원을 동여매니
손톱에
활짝 핀 꽃 다짐
하현달로 야윈다.
조금새끼
해종일 바닷가를 새 다리로 누비는
허리가 굽으신 청산도 윗말 할매
휴식은
일과 일 사이
자면서도 풀을 뽑네.
바람에 주름진 몸 엉덩이 쳐들고서
푸성귀 다독이며 길러낸 조금새끼
해거름
뱃길 따라서
물비늘을 띄운다
명상
책장에 걸려있는
속 깊은 고물 시계
한 자씩 소리 내어
내 심중을 읽어내다
며칠째
미동도 없이
두 손 모아
참선 중이다.
무언(無言)
취한 몸 휘청이며 들어서는 면전에
무릎이 아프다는 아내의 볼멘 투정
슬며시
잠든 몸 뒤져
꿈 한 장을 덮는다.
아침부터 저린 발 종종대는 바쁜 아내
일상의 여린 시름 오롯이 등에 달고
가냘픈
어깨를 살펴
무심턴 손 얹는다.
동행 1
이마를 마주 보고 멸치를 고르면서
맺힌 맘 풀어놓고 끊긴 대화 이을 때
입가엔
고단한 하루가
싱글벙글 저문다
막걸리 따라주며 받아 든 사발에
속없는 멸치 하나 취한 듯 물려주고
웃음꽃
빨갛게 피워 물고
기대는 게 부부다
동행 2
등 굽은 노인이 편의점 모퉁이서
한 봉지 찬밥덩이 잇몸으로 베어물면
빈 수레
찬바람만 싣고
주인 곁을 지킨다.
뜨거운 커피 한 잔 가벼워진 주머니
목에 걸린 밥 한 덩이 힘주어 밀어 넣고
하루를
길 위에 묶어 매고
마냥 걷는 골목이다.
한진호
papam@dreamwiz.com
*그리움
*바람
*따뜻한 손
*후회(後悔)
*간월암과 무학
*석류
그리움
아득히 지난 세월 고이 간직한 첫 사랑
지금도 두근대는 추억의 그림자들
언제나 따뜻한 새알 품고 있는 옛집 있네
유유한 구름밭을 소를 몰아 갈던 날
산 너머 새참이고 그리운 임 오실까
오시다 길을 잃고서 별이 되어 반짝일까
밤마다 지우려도 별은 돋아 미소 짓고
바람결에 불어와 전해주는 그대 체취
소쩍새 울음소리는 분명 임의 목소리
바람
치맛자락 뒤집어 보는 사람 민망하다
기척 없이 슬며시 적삼 속 스며들어
고독한 과부 마음 훔쳐 하룻밤 유희한다
빈 가슴 채워주고 언 마음 녹이더니
엉큼한 수작 부려 밤의 여심 녹여내어
마음만 흔들어 놓고 바람으로 사라졌네
따뜻한 손
수년 째 링겔에 꽂혀 헤매는 친구다
쉽게 놓을 수 없는 따뜻한 손이다
무술년 행운의 장미 들고 병실을 찾는다
시침은 궤도를 잃고 눈빛은 초점을 잃다
웃음 살짝 질 때 시선은 설레였다
가족을 떠날 수 없어 멈칫하고 있는 걸까
때로는 허리에서 용틀임을 써본다
못 다한 이야기도 미련도 있을게다
이대로 놔줄 수 없는 따뜻한 손이 있다
후회(後悔)
육십 년대 풍미(風靡)했던 아메리칸 꿈 안고
반백 년의 세파 딛고 돌아온 친구여
한 맺힌 이마의 주름살 지난 한이 고여 있다
아슴한 얼굴에는 그리움 가득하고
마주잡은 손결은 뜨거운 우정이다
학창의 추억을 회상하며 술 한 잔 눈물겹다
살던 집은 추억 속에 눈시울만 아물아물
일가친척 흩어져 찾을 길 망막하다
서울의 늦가을 밤공기가 이렇게도 시리던가
간월암과 무학
간월도 앞 바다에 보름달이 내리면
달거리 끝낸 선녀가 목욕을 즐긴다
선녀를 탐한 바람이 풍랑을 일으킨다
얼비친 나래 펴고 하늘로 솟을 때
몸매에 취한 무학 넋 잃고 바라본다
바람이 이마를 때리니 부서지는 아미타
* 간월도: 서산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
그 안에 간월 암이 있고 이곳에서 무학 대사가 수행을
했다고 한다
석류
엄마의 정성으로 진주에서 루비까지
알알이 박혀있는 붉은 잇속의 보물
만지면 터질 듯 부푼 선홍색 유두였다
인고의 한평생에 눈물 젖은 젖가슴
바람의 손길 살포시 스치고 가면
청명한 하늘만큼 높아진 먼 옛날의 그리움
황인만
*가위
*청시사(靑柿舍)
*비 고인다
*모래
*인동초
*대나무 3송
*날갯짓
*끌
가위
빛바랜 아픔들을 싹둑 잘라 물려놓고
그대를 닮은 색동 한 귀퉁이 베어다
조각난 임의 아픔을 감쪽같이 깁는다
청시사(靑柿舍)
한 세상 눈물로 산 시인모습 그리워
어디쯤 눈물 한 방울 남아있나 찾아보니
청시사 옥돌비 속에 새 한 마리 숨어 있다
반갑소 손 내밀고 비문을 읊어주며
시 한수 앞세우고 탁주 집 가자하니
뒷짐 진 옥돌행장은 눈두덩만 닦는다
청빈한 기행시인 추억이 선연한데
무지한 외면 속에 아득히 묻혀간다
임 모습 볼 수 없지만 시(詩)로 사는 영혼이다.
비 고인다
이리 오너라, 안 계신다고 여쭈어라
어서 오너라, 닫았다고 여쭈어라
유성의 리베라호텔 거꾸러진 세월이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만장 들던 긴 행렬
납거미 가스통 안고 악을 쓰던 벼랑 끝
시이소 수평의 이치 아이에게 물으소
길고 긴 폐업 뉴스 양보 없는 닭싸움
무엇이 진실인지 알 바 없는 공방전
법으로 풀지 못한 매듭 밥그릇에 비 고인다
모래
어레미 마주잡고 키질하는 현장이다
무심히 퍼 올리는 강모래 한 삽의 삶
서로의 어깨를 털고 여며준다 터진 가슴
잡 모래 이름 없이 하늘 보며 울다가
크기대로 갈라놓고 힘자랑 하여보라
비바람 백년 세월에 고층빌딩 벽이 되다
인동초
뒷골목 다락방에 고운 별꽃 갈고 닦아
한겨울 매서워도 푸른빛 잃지 않고
참을 인(忍) 마디에 새긴 사랑인연 애 탄다
곱디 고운 백옥순정 수줍은 첫정에
햇님이 손 내밀어 금빛사랑 퍼주면
금은화 불사의 화신 곧은 의지 한얼이다
대나무 3송
마디마디 퍼 올리는 마른바람 젖은 바람
사계절 풀무질로 맑은소리 득음하여
그대를 맞이하는 날 고운 음률 뽑아내다
가죽이 소리 내듯 댓살은 바람 일어
한지 한 장 꼭두각시 쥐락펴락 만군호령
제갈량 적벽대전에 신풍으로 대승하다
황모 한 홉 모아 쥐고 죽대 속에 여며 박아
세필 대필 붓이 되어 운지법에 휘갈기면
문장에 혼 불 깃들어 사기열전 불 밝히다
날갯짓
바쁘게 쫓겨나온 남중고도 높은 세월
허기를 모르고 앞만 보고 달리다가
고목의 빈 둥지 안고 헛바람의 날갯짓
깃털이 뽑히고 발톱마저 무너져
까마득한 꼭대기 위아래가 천만리
어디로 뛰어야 할지 접지 못한 헛 날갯짓
끌
세치 혀 날카롭게 정수리 맞아가며
길 닦고 방을 들여 그대의 봄 맞을 자리
빠듯한 맞물림으로 한 생애 살으라고……
짝 맞춤 맞선자리 한 치도 오차 없게
구스르고 쪼아내어 찰떡커플 다듬으면
일순간 한 몸이 되는 끌끌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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