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향기
박 혜 숙
봄이 왔다.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다던 셀리의 시구처럼 설렘, 희망을 안고 봄은 한 걸음씩 우리 곁으로 오고 있다. 무채색 겨울이 가고 분홍, 보라, 연두로 물들어가는 봄이 오면, 우린 겨우내 입었던 두꺼운 외투부터 벗는다.
옷장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꺼내 입고 봄바람을 맞으러 산으로 들로 나간다.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하얀 빛으로 변하고 남쪽부터 꽃은 위도를 타고 퐁퐁 튀어 오른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을 이기고 꽃망울이 순서대로 터진다. 진달래를 이어 철쭉이 피었고 곧 아카시꽃이 필 것이다.
메마른 숲 사이로 파랗게 자라고 있는 새순과 제비꽃이 어찌나 귀여운지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같이 간 친구가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감상에 젖은 모습이 우스웠던가 보다. 제비꽃과 네 보랏빛 등산복이 잘 어울려! 보라색을 무척 좋아하나 봐? 순간 생각은 초등학교 교실로 날아오른다.
내 크레용은 12색 짧은 곽에 연필처럼 끝이 가느다란 것이었다. 미술 시간 크레용으로 스케치 북에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데, 문제가 생겼다. ‘어머니 심부름’이란 제목인데, 내 치마색이 없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칠했는데, 보랏빛 치마를 입은 나를 그려 넣을 수가 없다. 끙끙대다가 교실을 둘러보니, 언니가 서울서 직장에 다니는 친구 크레용이 눈에 들어 왔다. 36색! 끝까지 둥글고 굵직하게 생긴 것이 긴 크레용 곽에 꽉 차 있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도 진보라 연보라 두 개나 있고, 초록도 몇 가지인지! 난 사탕을 2개 주고, 보랏빛 크레용을 빌렸다. 유일하게 제일 좋은 크레용을 갖고 있는 그 애는 거만하게 조금만 쓰라고 하며 보라색 크레용을 내밀었다.
끝날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그림을 칠판 아래 진열시켰다. 우리 모두는 오늘 그림에 뽑힌 사람은 학교 대표로 사생 대회에 내보낸다고 하여 어느 날보다 긴장하고 있다. 나도 36색의 크레용만 있었으면 더 잘 그릴 수 있었다. 한 장을 뽑도록 내 그림은 그 자리에서 울고 있고, 내 가슴은 콩닥거렸다. 뽑힌 친구에 대한 질투가 솟아오른다.
그런데, 마지막 한 장으로 내 것을 집어 드시는 것이 아닌가? 오늘 방과 후부터 이 두 사람은 매일 그림 한 장씩을 그리고 집에 가라는 당부를 하시고, 뽑힌 그림을 교실 뒤 학습란에 붙이셨다. 모처럼 붙은 내 그림이 어찌나 대견한지. 난 그 그림을 보느라고 청소도 건성으로 했다.
모두 다 돌아간 교실에서 36색의 크레용을 가진 친구와 나란히 앉아 기다리자니,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손에는 4절 켄트지와 56색 기다란 크레용 두 곽을 가지고 오셔서 마음껏 그려 보라고 하셨다.
나는 보랏빛이 연보라, 진보라, 자주 보라가 든 크레용을 보며 환성을 질렀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잔뜩 그리고 오매불망하던 보랏빛을 칠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아이들이 보라색 옷을 입고, 줄넘기도 하고, 공 던지기도 하며 노는 모습이었다. 다 그린 그림을 자신 있게 선생님께 내 밀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림을 한참 훑어보다 내 얼굴을 들여다보기를 몇 번 하시더니 말씀하셨다.
“너, 어디 아프니?”
다음 날 그림을 그리라고 남긴 학생은 36색 크레용을 가진 친구뿐이었고, 난 학교 대표로 대회에도 못나가는 탈락자가 되고 말았다. 그 때 난 너무 약해 보여 대회에 안 데려 간 것으로 해석하며 서운함을 달랬다. 그 선생님은 무뚝뚝한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열성은 많아도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는 편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다. 선생님이 그림을 보며 나에게 아프냐고 했던 이유를 중학교에 들어 와서 알게 되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소녀가 도라지꽃을 보며 “난 보랏빛이 좋아.”란 대목에 밑줄을 그으라고 하시더니, 이것은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이라는 것이다. 아니, 보랏빛 도라지꽃은 나도 제일 좋아하는 꽃인데 왜? 왜?
보랏빛의 꽃말이 고귀 외에 신성함 죽음이 깃든 의미가 있는 줄을 그 때서야 알았다. 아! 그래서 나보고 아프냐고 물었던 말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옛날엔 보라색을 구하기 어려워 그 색을 사용하는 것 자체로 지체 높은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고 한다.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귀족들의 자주보라 빛 망토 하나를 만들려면 조개 2만 마리에서 물감을 채취해야 해서 금값보다도 보라 물감이 비쌌다고 한다.
또 보라색이 파랑색(하늘의 상징)과 빨강색(인간, 피를 상징)의 혼색이어서 신과 인간의 조화를 상징하는 그래서 신성하고 고귀함을 상징하는 색이라고도 한다. 핏빛보다 검은 보라색이란 의미에서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보랏빛을 좋아한다. 고귀하고 우아해 보이는 중간색 보랏빛! 자목련이 눈부시게 피어, 가슴을 철렁이게 한다. 그 때가 되면 3층 교실 창 아래까지 피어올랐던 자목련을 떠올리며 꽃그늘 아래서 벨테르의 편지를 읽을 것이다.
그리고 오월이 오면 라일락이 보랏빛 향기를 품어댈 거다. 라일락 향기를 제대로 맡아 보자고 유리창을 열었다 탁 닫으며 향기에 취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보랏빛 등산복을 입고, 제비꽃을 내려다보며 우리는 보랏빛 향기에 취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