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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편재하신 하나님(<창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야곱은 자신의 어리석은 꾀로 인하여 부득불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런 추방으로 인해 그의 마음속에 생겼던 슬픔은 우리로서는 다 상상해 볼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다른 가정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할지라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바친 제단이 있는 곳과 또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예배자들과 합석할 수 있는 곳에 머무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의 가정이야말로 그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일한 가정이었습니다. 설혹 그런 집안이 있었다 할지라도 야곱이 알 도리가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밧단아람에 이르기까지 아예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만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오아시스를 지나서는 또 다른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야곱을 마치 한 나라의 제비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제비가 처음에 해변을 떠나 멀리 날아갔는데도 아직 휴식처를 찾지 못했는데 그래도 지친 날개를 저어 멀리 멀리 오랫동안 날아가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야곱이 거하던 이방 세계에 널리 유포된 사상은 이방인들의 신들이 오직 지방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사의 신은 아스글론의 신이 아니며, 브엘세바의 신은 벧엘의 하나님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은 산들의 신이지 골짜기의 신이 아닙니다. 야곱으로 말하면, 그가 이교도와 오랫동안 굉장한 접촉을 가진지라, 어쩌면 자기 조상의 하나님이 이교도들의 신들과는 같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이상, 자기 마음속에는 다음과 같은 걱정스러운 생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났으니, 이제는 아버지가 섬기던 하나님도 떠나게 되었고 다시는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게 되었으며, 영원히 여호와의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으며 축복받은 자들의 회중에서 끊어지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때 야곱은 충분히 성장한 신자가 아니었으며, 은혜의 세계의 어린아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꾀에 쉽게 동조한 것을 보면 그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였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이 가정의 보호를 떠나 무정하고 불친절한 세계에 홀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 사소한 사건이 아닙니다. 방랑자 자신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것조차 모를지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그 방랑자의 가는 길을 따라오고 있다는 이 사실은 방랑자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입니다. 여호와의 날개가 이삭의 장막 안에서 푹신한 침대 위에 감싸주듯이, 진실로 돌로 베개하고 있는 그의 잠자리에도 감싸주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저 아름다운 꿈이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진리로 인해 그가 놀란 듯 하였지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그의 위로가 되었는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과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눈을 떠서 새 빛을 보았습니다. 고난의 밤은 지나가고 자신만만한 대낮이 시작한 것을 아는 듯 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외쳤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 성령님께서 나로 하여금 설교하게 하시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귀담아 듣게 해 주신다면, 야곱에게는 물론 우리에게도 그토록 유익 되리라고 보는 주제를 말씀해 드릴까 하는 바입니다. 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지금 이 자리에 특별히 계시기를 비나이다. 당신이 이곳에 계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고서 당신의 존전에서 두렵고 떨리게 하옵소서! 나는 세 가지 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편재성 곧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는 교리입니다. 둘째는 그 편재성의 인식 곧 하나님이 어디나 계시는 것을 발견하기에 필수적인 영을 논하겠습니다. 셋째는 이 편재성의 인식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어디나 계신다는 확신에서 우러나온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언급이 되겠습니다.
Ⅰ. 첫째로, 하나님의 편재성의 교리를 말해 봅시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초대교회에 사악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 이단은 오랫동안 큰 혼란과 과열한 논쟁을 야기시켰습니다. 악의 대표자인 사단이 선의 대표자인 하나님과 동등한 세력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임재의 교리를 교란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단들의 교리는 현재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편재성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기 이전에 먼저 필히 자연 세계에서부터 빠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그들의 설교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위대한 우주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항상 가르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땅에 거하는 대왕으로 보았습니다. 아니, 그들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큰 간격이 고정되어 있어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자비의 생각도 우리에게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과오는 이미 오래 전에 그 정체가 탄로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외 없이 하나님은 저 높고 높은 천국에 계시듯 저 낮고 낮은 음부에도 계시며, 밤도 없이 날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저 순결한 영들 가운데 거하시듯이 죄 많은 사람들 가운데도 거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와 지옥까지 가득 채우심을 믿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이 있는 바로 그 가운데도 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좋아하고 있으므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까지도 하나님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 밑을 알지 못하는 암석의 내부에도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격노하는 바다나 딱딱한 화강암이 조그마한 구멍이나 틈도 내지 못하는 그런 암반 속에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열려진 곳과 틈 속에 하나님이 계심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물질을 관통하며 모든 물질이 충만히 있는 그런 곳에도 하나님 자신으로 역시 그곳을 가득 채우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살며 움직이며 있나니 만물이 그 안에 있고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런데 우리가 이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 교리를 강조하는 것이 때로는 썩 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눈에 보다 분명하게 진리를 나타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세 가지 왕국에서 어디서나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세 가지 왕국이란 자연의 왕국, 섭리의 왕국, 은혜의 왕국입니다. 개개의 왕국에 대해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는 구나."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에도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원하시면 저 한적한 곳으로 가 보십시오. 사람의 발이 닿도록 준비나 해 놓은 듯이 아름다운 카펫을 깐 듯 한 이끼 낀 숲 속을 거닐어 보십시오. 거기는 불청객의 방문으로 노루가 놀라 펄쩍 뜁니다. 야생 조류들은 아직 사람의 험상궂은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해 날아 갈 줄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비틀린 나무 가지 사이를 걷노라면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성전의 자연 아취는 석공의 노력도 들이지 아니했고 토기장이의 칠하는 수고도 들이지 아니한 채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찬양과 기도가 모이는 곳
고요가 숨죽이고 그늘 내리네
하나님을 따르는 자 위해
당신께서 아름다운 것을 만드셨도다."
여러분은 엄숙하게 선언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는구나!" 여러분은 생각만 해도 여러분 홀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부끼는 모든 꽃송이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사실을 증거합니다. 미풍에 들려오는 곤충 소리가 납니다. 사람의 발밑에 시들어 떨어진 잎사귀 속에 광택을 드러낸 딱정벌레가 기어갑니다. 숲 속에 죽어 가 겨울의 수많은 잔해들이 놓여 있습니다. 나무속에서 노래하는 새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각기 과연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에 의해 마음의 깨우침을 받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오직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로 생각되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자로 생각되어집니다. 임재 의식을 깨닫고 자극을 받은 사람만이 경배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많은 사람이 모이고 운집하는 곳에 가보면 거기도 하나님이 계심을 필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런던 다리의 난간으로 가서 잠시 동안이라도 서서 급하게 오고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십시오. 한 시간에도 수천 명씩 몰려오고 몰려갑니다. 그저 쓸어 갑니다. 포장한 도로를 따라 수많은 남녀노소들이 지친 걸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도 계십니다. 다만 이 세상과 이 세상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시는 위에 계시는 하나님과 온 세상에 살고 있는 그들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잊지 맙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시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구나. 정맥을 통해 돌고 있는 피 한 방울방울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들의 뺨에 나타난 그 하나하나의 불그스레한 표정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맥박이나 호흡의 한 순간순간의 헐떡임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배불리 함을 입고 옷을 주어 입으며 버젓이 생존해 있다는 삶 자체가 여러분을 분명히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증인으로 만듭니다. 수많은 경외심이 마음에 모여듭니다. 혹 여러분은 사람이 무수히 운집한 치프사이드나, 보로우나 도는 시끄러운 화이프차플에 와 있어서 오직 하나님과만 상대한 철저히 외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분주 복잡한 곳에 있지만 여러분은 저 북미의 대초원에 홀로 길을 걷는 듯, 또는 사람의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는 아프리카의 어느 사막에 들어선 듯 적적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저 깊은 바다에 흰 돛을 달고 날아 보십시오. 오, 사정없이 일어오는 물거품을 헤치고 날아가 보십시오. 그런 가운데도 당신의 영혼이 올바른 위치를 스스로 취하고 있다면, 당신은 "아, 여기도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구나!"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폭풍우와 우레가 만군의 하나님의 대행진의 북처럼 우르릉거리고, 하늘은 놀라운 번개의 번쩍이는 창살에 마치 부상이나 당한 듯이 보이는 그때에도, 여러분은 그 폭풍 가운데서도 "분명 하나님이 그 손으로 물결을 잡으시사, 거기 계시는 도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비록 여러분이 탄 배가 휘청거리며 흔들리면서 태풍에 나부끼는 작은 바다 새처럼 될 때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신다고 간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무사히 상륙하여 온 천지가 고요해지고 흰 구름이 서서히 솟아나 바람 끝에 유유히 나돌며, 만물이 소나기를 거친 이후 푸르고 싱싱하며, 폭풍우 후에 맑게 해가 비치고, 강풍 후에 고요한 평화가 깃들 때에 여러분은 한결 더 즐거운 마음으로 "정녕,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구나!"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 더 말할 필요는 느끼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가 보십시오. 하나님의 지극히 놀라운 작품을 보고 이렇게 외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도다! 백발같이 흰 알프스의 정상에! 오, 장엄한 구름, 그 캄캄한 가슴 속에 하나님이 계시도다! 오, 휘몰아치는 허리케인, 가쁘게 내쉬는 입김 가운데도 정녕 하나님이 계시도다!"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도다." 하나님이 이 가운데 계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도, 즉 빨간 사과 속에, 작은 들꽃 속에, 깊은 바다 속의 조개 속에도, 어두운 광산 굴 속에서 파낸 반짝거리는 쇠붙이 속에도, 하늘 저 멀리서 속삭이는 별의 무리에도, 또 땅 위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서는 금방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는 혜성에도 하나님은 정녕 계십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당신은 어디나 계시옵니다. 순간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것들에나 무서운 것에서도 또 지나쳐 버리는 것들이나 영원히 존재해 있는 것들에서도 우리의 미약한 눈은 늘 지각하지 못하지만 당신은 정녕 여기 계시옵니다.
이제는 섭리의 왕국에 들어가도록 합시다. 다시 여기서도 하나님을 즐거워합시다. 나의 형제 여러분,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거꾸로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인류의 시조가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온 그 때를 한 번 회상해 봅시다. 그 때 이 땅에는 인구가 없었고 야생 동물의 갖가지 종족들이 마음대로 뛰어 놀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섬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는 짙은 안개만이 자욱이 뒤덮여 있고, 짐승들의 독무대였으리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되어지는 것이 없군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계심과 마찬가지로 그 때에도 계셨습니다. 이 거대한 정원에서 서늘할 때에 거닐으시는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귀는 아무데도 없었지만, 정녕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당신의 역사책을 펴 볼 것 같으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지상에는 잔학한 정복과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온통 이 땅을 붉은 피로 물들이고 한 발이나 깊은 땅 속까지 사람의 피와 흙이 뒤범벅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페이지마다 내란과 형제간의 암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왜 이와 같은 일이 그대로 묵과되어 왔던가요?" 그러나 좀 더 깊이 계속해서 읽어 가노라면, 내란들과 불을 뿜는 투쟁에 의해 도리어 자유가 어떻게 파수되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 최대의 유익은 "정녕 하나님께서 여기 계심"에 있다고 당신은 말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는 당신을 가공할 피를 부르는 싸움터로 끌어 들입니다. 피로 얼룩진 옷을 보게 합니다. 화염과 진한 연기들을 당신에게 열어 보여 줄 것입니다. 무기와 무기가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당신의 동료가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되면, 당신은 아마 "악마가 이곳에 있도다."라고 말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진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아니다. 비록 여기 악이 범람할지라도, 우리는 볼 수 없으나 정녕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도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필요한 것들이다. 이 모든 재난은 전능한 섭리의 수레바퀴의 진행 과정에 불과한 것이로다. 인간의 지혜로 그 깊은 것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모든 행위에 있으매 필히 그에 따른 결과가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예측할 수 있겠노라." 혹시 당신이 원하신다면, 역사상 이보다 더 무서운 장면들, 곧 박해의 역사를 더듬어 봅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고, 혹은 톱으로 켜졌던 피의 역사를 생각해 봅시다. 스미스 필드의 화형과 로러드 요새의 지하 감옥을 상기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택하신 씨들을 멸절시키려고 악마가 불과 칼과 각종 고문 형구들을 사용한 것을 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은 피로 얼룩진 비극의 역사를 읽고서 학대 받는 가련한 인간의 육체에 대한 상념에서 전율케 될지라도 진정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씨앗들은 거친 손길로 흩뜨려 놓을 때에 이 씨앗은 영원한 씨로 승화되며, 핍박을 받아 열매 맺은 나무에서 떨어지면 땅에 떨어져 새로운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사람이 죄악에 사무쳐 가장 흉악한 불경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도, 주는 정녕 거기 계시옵니다. 당신은 반역의 폭풍을 다스리시고, 당신의 뜻을 거역하고 전도하려는 무리들도 당신의 수중에 있나이다. 흔히 우리가 역사에서 참혹한 일들을 대할 때도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한 나라가 한 여자의 마음에 따라 부강하고, 쇠퇴하기도 하며, 혹은 한 어린아이의 생명에 따라 그 운명이 좌우된다고 말씀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한 왕국이 유명한 모험가의 의지에 따라 흥왕하고, 쇠잔하기도 한다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나라는 어리석은 현학자의 광신주의에 기초하여 세워져 있다고도 말할 것입니다. 첫째 원인을 변호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 다음 원인들까지 부인할 수 없을 터이므로, 여러분의 주장을 우선 옳다고 인정해 둡시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어떠한 사람이 거기 참여한 것보다도 더욱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음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 땅의 임금들보다도 하나님은 더욱 왕이십니다. 이 지상의 어떤 전사보다도 주님은 진정한 전사가 되십니다. 여러분이 역사의 페이지마다 기록된 모든 사실을 볼 때, 또 첫째 인이 개봉되기부터 마지막 일곱째 인이 떼어지기까지 그 책이 사람과 천사들 앞에서 읽혀질 때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에 계시도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역사 전체를 통하여 볼 때 이것이 사실임과 마찬가지로 작은 사건에서도 그러하므로 당신 자신의 운명에도 역시 이 진리를 적용하기를 당신은 기쁘게 생각할 것입니다. 설혹 당신의 모든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불이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분명 거기 계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운 좋은 형편을 만나 당신이 흥왕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거기 계셨으며, 또한 역경을 만나 당신에게 재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분명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며, 친히 배치하시며, 감독하신 일 외에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사건도 발생된 적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큰 나라와 큰 사건만을 염두에 두어두고 당신 자신의 적은 일 따위는 잊어 먹은 일이 없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천사들을 보호하시며 지키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디작은 한 마리의 모기의 생명을 주관하시며, 높은 산 위에서 힘차게 굴러 내리는 눈덩어리를 다스리심같이 나뭇잎 사이사이로 기어 다니는 작은 진딧물까지 친히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지금 당신이 처한 환경 속에 거하신단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 속에 그 효력을 나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정녕,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도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진리가 더욱 확실한 방법으로 적용되는 세 번째의 왕국~ 곧, 은혜의 왕국에 도달하였습니다. 심령이 완악한 자들이 회오의 눈물을 흘리고 인자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던 교만한 사람들이 그의 발아래 끓어 엎드려 노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는 저 건너 회오의 경지에, 또 바위같이 철석같이 굳은 양심이 마침내 흔들리기 시작하며, 완고하여 굳어 버린 어쩔 수 없던 죄인들이 끝끝내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고 마는 곳에 하나님은 계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을 것 같으면 거룩한 감정의 물결이 출렁일 수 없으며, 다음과 같이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또 저기 태양이 밝게 빛나는 곳에, 죄인들이 그 굴레를 벗어 버리고 눌렸던 자들이 짐을 벗게 되어 환희의 새 노래를 부르는 곳에,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큰 빛을 보게 되는 거기에 ~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이 정녕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면 믿음이 오지 않으며, 소망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거룩한 제사로 제단 위에 바치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자신을 미워하고 부인하며, 오직 그리스도만 존재케 하는 거기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피부가 검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고자 가족과 친지들을 떠나는 선교사가 있는 그곳에 과연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 화려한 미래의 꿈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자 하는 그곳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고된 일을 해야 하는 소녀들이 자신의 영혼을 팔아 가며 안락을 누리기보다는 힘들어도 깨끗한 한 조각의 빵을 얻기 위해 밤낮 땀 흘려 수고하는 그곳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집권자들의 불의의 요구에 거절하며 양심의 소리에 따라 꿋꿋이 일어나는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환란을 당하는 성도들이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따르고자 애쓰며, "그가 나를 죽이실 찌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고 부르짖는 그곳에 정녕 하나님은 계신단 말입니다. 모든 것을 두루 살피는 눈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거기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한숨 소리가 높아지는 곳에, 눈물이 쉴 사이 없이 흘러내리는 곳에, 찬미의 소리 높은 곳에, 욕망이 끓어오르는 곳에, 사랑이 불붙으며, 소망이 앞을 내어다 보고, 믿음이 거하고, 기쁨이 넘치고, 인내가 있으며, 열심히 충천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람의 마음의 성전에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기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세 가지의 왕국에서 동일하게 "하나님이 여기 계심"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기 쉽기 때문에 이 점을 명백히 나타낸 후에 다른 점에 대해서 언급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비유적인 말씀을 기억하시겠지요?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라." 아마 여러분은 이집트의 폐허가 된 사원 안에 있는 조각들이 머리를 구름 위에 내어 놓고 있는 그림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키보다 그 발이 더 높은 조상들이 장엄한 보좌에 그대로 앉아서 하늘 높이 솟아 있습니다. 이 모양을 머릿속에 한번 상상 해보면 거대한 하나님의 형상이 여러분의 마음에 비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고 여기에 그가 앉아 계십니다. 땅이 그의 발등상이므로 여기에 그의 발이 닿아 있습니다. 모든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머리는 천사들이 날아오를 수 없는 높은 곳에 위치합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우리에게 시사해 주시는 만큼은 깨달을 수 있겠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표현법을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므로 이 묘사를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크기보다도 더 크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만 해도 하늘보다 더 크고 그의 발은 저 깊은 지옥의 밑바닥보다도 더 깊이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그의 발등상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그의 보좌입니다. 그런즉 잠시라도 그가 이곳에 계시지 않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합시다. 만약 그의 얼굴이 하늘에 보일 것 같으면 그의 옷깃이 땅에 끌릴 터이니 추호도 의심하지 맙시다.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어디를 가든지 계십니다. 여러분과 함께, 그리고 나로 더불어, 어느 때이든지, 어떠한 환경이든지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진리를 더 분명히 말할 재간이 없으니, 둘째 대지를 통하여서도 계속 이 점을 언급토록 하겠습니다.
Ⅱ.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항상 이것을 느끼게 하는 그 영은 또한 무엇인지요? 전기의 존재란 도체들에 의해서 곧 발견이 됩니다. 또 그릇 속에 있는 쇠붙이는 자석 바늘로 곧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조금도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이들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떠들어대지만 실상 그들의 본성 속에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없어서 하나님을 전혀 깨닫지 못하므로 나는 이런 점에 놀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신다면, 분명히 여러분의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 속에 양자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 성질이 거룩함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실재를 곧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천국이 되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여기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우리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도의 성화에 이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실재를 더욱 확실히 느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들판이나, 길거리들이나, 주민들이나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하나의 꿈과 같이 지나가는 장면같이 여기게 되고, 가장 확실하며 유일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곧 자신의 새로워진 마음이 알게 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사람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며, 감성으로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의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인식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절대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영혼의 안식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날 밤 도착한 그곳에는 벌써 하나님께서 와 계시는 곳이었건만, 그의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미처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심히 근심에 쌓여 있었으며, 초조하였으며, 그 마음이 매우 심란하였습니다. 마침내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그의 꿈이 그를 고요하게 해주었습니다. 불안케 만들던 상념들은 사라져 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고요한 음성이 귓가에 속삭여 왔습니다.
"내 마음이 큰 고요 속에 잠길 때
거기서 나의 하나님과 하늘을 바라보노라."
비록 신령한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면 고요하며 평화로운 안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야곱에게는 이와 같은 평정한 심령 외에도 그리스도엔 관한 계시가 있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야곱이 본 그 사닥다리는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예시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다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찾아 갈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에서 자연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발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무모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알프스 산꼭대기에서 하늘에 이르려고 무척 애를 써 왔습니다. 하지만 자연적인 인간의 마음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자연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자연에서 발견하려 하기 전에 먼저 화육하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산간벽지에 들어가서 수도 생활을 해 왔지만, 신령한 마음가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들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말들을 들어보았지만 그 속에 아무런 진리가 없었습니다. 원래 빈 깡통이 요란한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이런 자연적인 종교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너무나 넓기 때문에 피조물들의 지혜로써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새롭고 산길을 보게 되며, 나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는 분명하고도 즐거운 것입니다. 나는 즉시 나의 하나님께로 오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또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약속을 받고서 그 믿음을 통하여 이 약속의 성취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인지할 수는 없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도 이런 말씀을 들어 보셨느냐? 시편 23편이야말로 당신의 믿음의 노래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친구들이 당신을 버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 곁에 서 계심을 당신은 정녕 알 수 있습니까! 당신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 사람과 중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지요?
"근심의 먹구름이 나를 에워싸며 천둥소리 높게 으르렁거려도
주께서 항상 내 곁에 계시니 한없는 그의 사랑에 나는 즐거워하노라."
당신이 여기에 공감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인지하는데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계심을 이와 같이 실재적으로 느끼면, 아침에 눈을 뜰 때 찬미 소리와 함께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 저녁 잠자리에 들어 눈을 스스로 감을 적에 그의 사랑의 날개 아래 편히 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옛날의 청교도들의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명상하며, 항상 유기물질이나 사물에 대해서 토론하곤 합니다만, 그들에게는 하나님뿐이었습니다. 또 우리들은 비 때문에 청우계를 바라보지만, 그들은 이런 문제로 인해서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며, 하늘에 있는 병을 멈추게 하거나, 혹은 메마른 땅에 만물을 소생케 하는 단비를 내려 주시기를 기원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인력을 발견하고서는 이것을 굉장한 것으로 말합니다만 퓨리턴들은 도리어 이 법칙보다는 이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입니다. 자연계의 힘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자,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인지하도록 합시다. 큰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일어설 때나 누울 때나, 또는 밖으로 나 갈 때이든지 안으로 들어올 때이든지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제껏 하나님 안에서 살며, 또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거하심을 알고 느끼면서 사는 이의 영혼보다 더 아름답고 복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Ⅲ. 하나님의 편재성의 교의를 충분히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영혼의 실재적인 결과에 대하여 나는 한두 가지의 결론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첫째로는 터무니없는 경솔함을 시정하는 것이겠습니다. 즐거워함은 하나의 미덕이요, 반면 경솔한 것은 하나의 악이 됩니다. "정녕 하나님이 여기 계시도다." ~ 이 말씀대로 믿는다면 어리석은 토론이나 쓸데없는 농담이나 지껄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전심전력했다고 합시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깨끗하고 순결한 즐거움이 아니라 더럽고 악한 종류의 쾌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때 "과연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도다."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의 형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즐기는 레크리에이션 역시 죄로부터 먼 청결한 놀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오락도 하나님께서 친히 보시는 가운데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계심을 느낀다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야기를 나누게 되겠습니까? 오늘 오후에는 여러분은 주로 어떠한 화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시렵니까? 주일 오후의 대화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아주 어려움을 느끼는 듯합니다. 즉 이들은 세상적인 일에 관해서는 피하고 교역자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이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인즉 교역자에 관한 이야기를 영적인 것으로 오해한 데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교역자에 관해서 수군거리는 것은 사단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나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들이 교회들의 사자에 대해서 비 신앙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차라리 악마에 관하여 신앙적 견지에서 말하기를 나는 원하는 바입니다. 여러 교역자에 대한 수군거림이 결국 아무런 덕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이들이,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도다."라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면, 이에 부합한 대화를 나누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장차 개인적인 큰 위험과 파면에 직면하게 될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형제 여러분, 만약 폭풍 가운데서, 혹은 질병 온 아픔 가운데서, "정녕 하나님이 여기 계시도다."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면 당신은 완전히 평안한 상태에 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다면 분노의 분위기는 말갛게 변화될 것입니다. 번갯불이 이 축복을 깨뜨려 버리려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므로, 폭풍우가 부스러뜨릴 수 없고, 깊은 굶주림이 이것을 삼킬 수 없습니다. 언제이든 당신이 두려워해야 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영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난처일진대, 당신의 신경질은 한갓 죄악밖에 더 되겠습니까! 자기의 하나님의 손에 있는 무기를 보고 놀라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아버지를 불신임하며 무한한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나는 또한 극심한 경제적 불황을 만나 사람에게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이 지금 곧장 집으로 돌아가시면 당신의 방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당신이 앉을 자리는 닳아 헤어졌고, 테이블도 보잘 것 없습니다. 이런 정황을 보고도, "이래도 좋단 말이야. 정녕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니깐." 이라고 당신은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당신이 식탁에 앉아 감사 기도를 드릴 적에 옛날의 성도의 외침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로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낌 없이 이 세상 최고의 진미를 즐기는 것보다 차라리 초라할망정 이런 마음가짐이 더 귀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걱정거리들이 있다고 합시다. 어떤 가정에 믿지 않는 남편을 가진 한 여신도가 있습니다. 혹은 골치 아픈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집에 들어가기를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현관에 들어설 때에, "정녕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도다."라고 외쳐 보십시오. 존?u48264 ?연이 베드포오드 감옥의 토굴 입구에 들어갈 적에 거기서 12년간 옥살이하면서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쓸 것을 진작 알았었더라면 아마 그는 거기서, "정녕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도다."라고 말했으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역시 존?u48264 ?연과 같은 일을 당하여, "정녕 하나님이 여기 계시도다."라고 말하면, 곧 그곳은 천국으로 화하게 될 것입니다. 혹은 여러분 중에 상당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당신은 언제 끝날는지 알 수 없는 일의 과정에 서 있습니다. 당신은 큰 실망 중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거기 계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가운데 들어가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가 함께 한 것처럼 당신이 시련의 불 가운데 있을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곳에 계실 터이므로 하늘의 발자국이 거기에 보일 것입니다. 혹은 여러분께서 오늘 특수한 사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는 듯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임무를 완수하러 가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이 정녕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혹은 당신이 오늘 처음으로 여기서 회의를 소집해야 합니다. 걱정 말고 곧 실행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며,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팔에 기댈 적에 하나님의 팔은 오므라들지 않으며, 당신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린대도 여러분 대다수의 형편을 다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 진리를 직접 당신에게 적용시키는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영과 또한 당신 자신에게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것이 맑고 투명한 생명의 물이 솟아나는 위안의 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도다."
이제 마지막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편재해 계심을 믿을 것 같으면, 하나님의 집에 거하든지, 혹은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위한 부름을 받고 가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대체로 우리들은 성도들의 모임 중에서 그만큼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떤 장소를 두고 우리는 거룩하다 할 수 없습니다. 즉 거룩이란 도덕적이고 지성적인 존재에 관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바위나 거룩한 돌이란 있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일은 도무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거하십니다. 분명 그리스도는 이곳에 임재해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행히 많은 사람들이 그저 형식과 외식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에 나오면서 자신이 입을 옷에만 신경을 쓰면서, 무엇을 들을 것인지,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 아무런 옷이든지 입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니 또 다른 핀을 꽂고 매무새를 다듬고자 지체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옷은 잘 단장되었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집에 나오기에 아무런 준비 없이 벌거벗은 채로 나올 때가 많으니 당신의 영혼까지 단장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또 교회에 와서 앉아 있을 때는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는지요! 어떤 상업하시는 분들은 이 자리에 앉아서 장사를 합니다! 어떤 이는 가정을 염려하며, 어떤 이는 가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집에선 주일이 되면 가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영혼까지 문을 꼭 닫아 두시기를 나는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들에 나가서 농작물들을 보살피지 않지만 그 농작물을 하나님의 집으로 들여다 놓고서 여기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혹은 지금 여러분이 원장을 끄집어내어 결산을 하지는 않지만(실제로 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당신의 머릿속에 원장이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사업에 마음이 쏠리고 있습니다. 또 다른 폐단들이 있습니다. 이 교회와 같이 커다란 교회들에는 좌석을 안내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들 가운데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저 분주하게 일에만 정신을 팔고 실상 그 마음속에 경건히 예배하는 심정이 없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안내하는 분들은 결코 회심의 경험이 없는 분을 써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일에만 매여서 도무지 회심의 기회를 갖지 못하겠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좌석을 안내하는 사람이 이 일을 맞고서 회심하게 되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집 바깥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집 안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외형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핵심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덤을 파주는 사람이나, 혹은 장의사의 일꾼들 같이 가장 지각이 부족하고, 주의력이 없는 사람과 같이 교회의 제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종종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오, 우리는 기억합시다. "과연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말씀을! 하나님의 임재를 문득 느낄 때에 우리는 참으로 경이로울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믿고 마음에 간직할 때에 세상의 죄악을 멀리하는데 좋은 방파제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자기 아들을 데리고 이웃집의 물건을 훔치러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도둑은 자기 아들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습니다. "누군가 네 아버지를 보는 사람이 없는지 잘 살펴보렴." 그러나 그 아이는 성경을 읽고 또 아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또 묻습니다. "얘, 너는 빈틈없이 잘 지켜보았니?" 그 소년이 대답합니다. "아뇨, 아버지, 우리를 보고 있는 분이 계셔요." "그게 누구냐?"라고 그 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 아이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 위로 쳐다보시지는 않았어요. 거기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를 내려다 본 걸요." 이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이여, 여러분이 주위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으니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 아버지는 마음속에 살의를 품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인적이 드문 골목길 속으로 자기의 아들을 이끌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목도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이것을 바라보는 사역자들을 거느리고 계신단 말입니다. 여러분, 이 땅 어디에나 살피는 눈이 있습니다. 바로 이 자연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사진사여서 당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촬영하고 있습니다. 아니,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당신의 얼굴의 모든 표정까지도 남김없이 기록 해가고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이 되면 당신의 모든 활동 사항이 기록된 것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주께서 벽을 향하여 명하시면 그것이 당신의 한 바 모든 말을 반복할 것이고, 당신이 행한 착한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항상 주시되고 있습니다. 많은 눈들이 당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짙은 어두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으로 파송하는 영들이 당신 가까이 있어서 바로 그가 당신 곁에 계시는 것입니다. 자, 누구든지 용기가 있으시면 하나님의 면전에서 범죄해 보십시오. 용기가 있으면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 악담을 퍼부어 보십시오. 그가 살피시는 앞에서 용기가 있거든 가서 안식일의 계명을 파해 보십시오. 누구든지 심판관 앞에서 범행을 저지르지는 못합니다! 율법을 세우신 이 앞에서 율법을 감히 범하려고는 아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여러분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