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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본 한국개신교회의 당면한 과제
(2016년 11월 10일)
by
장 경 현
목 차
들어가는 말
1. 구원과 믿음
2. 중층기술: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
A. 사유방식 (A Way of Thinking)
B. 삼위일체(三位一體), 지평(Paradigms)으로 읽기
3. 구원-한국개신교회의 당면한 과제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구원’은 기독교(종교)의 핵심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개신교회의 일반적 교리(가르침)이다. 그런가? ‘오직 믿음’을 모토로 하는 개신교회의 시작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내용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이다.
500년 전,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항 논제>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에 붙인 것이 종교개혁의 부싯돌이 되었다. 그 이후 불붙듯이 온 유럽을 강타하며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여기저기서 프로테스탄드, 개신교회가 세워졌다. 그 핵심은 ‘오직 믿음’이다. ‘(선한)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다. 한국개신교회도 여지 없이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 아래 선교 120여년의 역사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한국개신교회는 깊게 병이 들었다. 혹 ‘구원은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가르침)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1장, <구원과 믿음>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개신교회의 교리-가르침을 살펴본다. 이를 위해,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의 논제>, 루터의 사상이 깊게 배어있고 루터교회가 받아들인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개혁교회가 받아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그리고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25개 조항> 중에서 구원과 관련된 ‘믿음’과 ‘행위’의 대목을 살펴 본다. 결국은 ‘행위’는 곁다리이고,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이지만.
2장, <중층기술[1]: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2]>에서는 ‘삼위일체’를 믿는 방식에 대해서 논한다. 믿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3]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던진 후, 중층기술, 곧 삼위를 지평(paradigms)으로 이해하면서 일체를 찾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논한다. 이는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으로 표현되는 바, 이를 위해, A. ‘사유방식’ (A Way of Thinking)과 B. ‘삼위일체(三位一體), 지평(Paradigms)으로 읽기’로 나누어 생각해 본다.
3장, <구원-한국개신교회의 당면한 문제>에서는 2장에서 논한 방법론의 틀, 곧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의 방법을 가지고 성경 내용을 중심으로 ‘구원’에 대하여 생각한다. 개신교회의 모토 가운데,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외에도 ‘오직 성경’이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가는 말에서는 전체 요약과 함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구원’에 대한 중층기술에 기초한 한국개신교회의 ‘구원’에 관한 새로운 교리의 탄생을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
1. 구원과 믿음
개신교회의 시작은 500년 전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이다. 그의 종교개혁의 핵심은 구원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인) ‘선행의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에 근거한다는데 있다. 루터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철저히 부정한다.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행 은총에 따른 것이다. 인간은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의 표현대로 “우리는 모두 걸인이다”[4] 이는 루터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로마서 1:17절에 근거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루터는 95개 조항에서도 면죄부를 사는 행위가 구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주장한다.[5] 예를 들면,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부를 샀다고 해서 사람이 모든 징벌에서 해방 받고 행복해 진다고 말하는 면죄부 판매 권유자는 그릇된 것이다.” (21), “헌금궤에 떨어진 돈이 쩌렁 소리를 내자마자 연옥에서 영혼들이 올라온다고 하는 사람들의 사람은 교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27), “그들이 산 면죄부 증서로써 행복을 확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교사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 것이다.” (32)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행복해지리라 믿는 것은 헛된 신앙이다. 교황 자신이 자기의 영혼을 걸고 보증을 하려 한대도 그렇다.” (52)
등등이 있다.
루터의 신앙을 잘 보여주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6] 1530>에서 믿음과 행위에 관련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믿음과 관련하여,
제4조 (칭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와 행위 및 보상 행위로써는 죄의 용서를 받거나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며, 자신의 공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로움과 영생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우리가 믿을 때, 이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의로워진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3:21~26과 4:5에서 말한 대로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간주하시고 인정하시기 때문이다.”[7]
선행과 관련하여,
제6조 (새로운 순종), “우리는 또한 이렇게 가르친다. 이러한 믿음은 선한 결실과 선한 행위를 낳아야 하며, 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러한 온갖 선행을 하나님을 위하여 행해야 하되,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죄 사함과 의로움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기 때문이다. ‘너희가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10)
그러므로 교부들도 또한 그렇게 가르쳤다. 암브로시우스가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니, 행위로써가 아니고 오직 믿음을 통하여, 공로 없이, 죄 사함을 받는다.’”[8]
더 나아가 제20조에서는 믿음과 선행이라는 주제아래 칭의 교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막는다는 비난에 대하여 변증하면서 다음과 같이 길게 적고 있다.
“… 우리는 또한 선한 일을 반드시 힘써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은혜를 얻기 위하여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은혜와 죄 사함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성령을 받을 수 있으며, 마음이 감동을 받아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
그러므로 믿음에 관한 이 교훈은 선행을 금하는 것이 아니고, 선한 일을 하도록 가르치며, 어떻게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는지 도움을 주는 일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 그리스도 밖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능력은 너무 허약하여 선한 일을 하거나 하나님께 불러 아뢸 수 없으며, 고난을 견디거나 이웃을 사랑하거나 임명을 받은 직책을 열심히 수행하거나 순종할 수 없고, 악한 정욕을 피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그래서 교회는 노래한다. ‘주의 능력이 없이는 우리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고 무능할 뿐입니다.’[9]
개혁교회가 받아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도 믿음과 행위에 관하여는 별반 다르지 않다.[10] 믿음에 관하여, 문21과 문61을 보자.
문21: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계시하신 모든 것을 참이라고 확실히 믿는 인식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죄의 용서와 영원한 의와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오직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믿는 신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뢰는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내 안에 일하심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문61: 왜 그대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합니까?
나의 믿음이 무슨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속죄하심과 의로우심과 거룩하심만이 하나님 앞에 나의 의가 될 뿐입니다. 나는 거저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여 내 것으로 삼을 뿐입니다.
선행과 관련하여 문62-64를 보자.
문 62: 왜 우리의 선행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아니면 부분적으로라도 의롭게 해 주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완전해야 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전적으로 합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최선의 선행도 불완전하고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문 63: 우리의 선행이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와 내세에서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공로가 있어서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비하시기 때문에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문64: 이러한 교리가 사람들을 무분별하고 방자하게 만들지는 않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사람은 감사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감리교회의 장정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3】 제9조 사람을 의롭게 하심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
【24】 제10조 선행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 하심을 따라 오는 것이로되 능히 우리의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고 기뻐하시는 바요, 참되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모든 교리-가르침의 결론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선행은 어떻게든 구색을 갖추려고는 하지만 어쨌든 구원의 조건에는 들지 못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2. 중층기술: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
오직 믿음이다. 그렇다면, 뭘 믿는가? 신론, 그리스도론의 세세한 부분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타나시고, 그 삼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삼위를 어떻게 믿을까? 믿는 방식에 대해서 문제가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11] 그런데 ‘스스로 계신 분’을(출 3:12) 인간이 어찌 믿을 수 있을까, 해서 삼위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믿는다.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조금 더 나아가서, 사실, 같은 이야기지만, 성자 하나님의 양성론, 곧 예수 그리스도는 참 신이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라고 믿는다. (칼케돈신경, 451) 이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바, 사도신경[12]과 니케아 신경(325)[13],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신경(381)[14]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의 삼위(三位)로 일체(一體)이시다”는 고백과 칼케돈 신경[15]에서 나타난 “성자 예수는 참 신(神)이면서 참 인간(人間)이다”라는 두 믿음의 고백이, 비록 세세한 부분에 들어가면 약간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믿음의 근간이 된다. 여타 다른 세세한 부분에 있어 비록 차이[16]가 있을지라도 핵심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나타나시고, 그 삼위는 일체라는 것,’과 ‘예수는 참 신이며, 참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를 비교적 자세하게 표현한 것이 <아타나시우스 신경, 500년경>이다. 이를 읽어 보자.
…
보편적인 신앙은 이러하다: 우리는 삼위(三位)로 한 하나님이시며, 한 하나님 안에 삼위이신 하나님, 삼위가 혼동되거나 본질이 분리됨이 없는 한 하나님께 예배한다. 성부(聖父)의 위(位=인격)가 계시고 성자(聖子)의 위가 계시며, 성령의 위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한 신성(Godhead, Gottheit)을 가졌으며, 그 영광과 위엄이 동일하시다.
성자와 성령께서는 성부와 동일하시다. 성부께서 창조함을 받지 않은 것 같이 성자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다.
성부께서 영원하시고, 성자께서도 영원하시며, 성령께서도 영원하시다. 성부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다. 성부께서 영원하시고, 성자께서도 영원하시며, 성령께서도 영원하시다. 그러나 세 영원하신 분이 아니시고 한 영원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세 창조함을 받은 분이시거나 세 측량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고, 하나의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요, 한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다. 성부께서 전능하신 것과 같이 성자께서도 전능하시고 성령께서도 전능하시다.
그렇다고 세 전능하신 분들이 아니고 한 전능하신 분이시다. 성부께서 하나님이신 것처럼 성자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세 하나님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성부께서 주님이시고, 성자께서도 주님이시며, 성령께서도 주님이시다. 역시 세 주님이 아니고 한 주님이시다.
기독교의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각 위가 각기 하나님이시요, 주님이심을 고백하도록 하는 것과 같이 보편적인 신앙은 세 하나님이나 세 주님으로 언급하는 것을 금한다.
성부께서는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창조되시거나 나시지 않으셨다. 성자께서는 만들어지거나 창조되지 않으셨으나 나셨다. 성령께서는 만들어지거나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procedens). 그러므로 한 성부이시며 세 성부가 아니시고 한 성자이시지 세 성자가 아니시고, 한 성령이시지 세 성령이 아니시다. 성 삼위 안에 먼저 되시거나 나중 되신 분이 있지 않고, 크고 작은 분도 없으시며, 삼위께서는 서로 동일하시며 동등하셔서,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 안에 계신 세 위께서, 그리고 세 위로 계신 한 하나님께서는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영원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신 것을 옳게 믿어야 한다. 그에 대한 올바른 신앙은 이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이심을 믿고 고백한다. 그는 만세 전에 성부의 본질에서 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성모 마리아의 본질에서 이 세상에 나신 사람이시다. 완전한 사람이시며 또한 이성(理性) 있는 영혼과 육신을 가진 완전한 사람이시다. 신성으로 말하면, 그는 성부와 동등하시고, 인성으로 말하면, 성부보다 낮으시다. 그는 하나님이시요 또한 사람이시지만, 두 분이 아닌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신성이 육신으로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한 분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성을 맞아들이심으로써 한 분이 되신 것이다. 그분은 본질의 혼합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인격을 통일로 말미암아 완전한 한 분이시다. 사람이 이성적인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듯이,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은 몸으로 부활할 것이며 그들이 행한 바가 고변될 것이다. 선을 행한 자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나 악을 행한 자들은 영원한 불로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곧 보편적인 신앙이다. 이를 올바로 굳게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17]
삼위일체나 양성론을 믿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즉, ‘온전히 다른 것(성부와 성자와 성령; 참-신과 참 인간;)이 온전히 같다(성부, 성자, 성령은 일체다; 참-인간이며 참 신이다)’를 읽어 낼 수 있는 ‘사유의 방식’이 있어야 하고, 그 자체가 삼위일체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믿음’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삼위일체 안에서, 사유방식 곧 지평으로서의 삼위를 읽어내라고 하는 해석학적 요청까지 하고 계시는 것이다.
A. 사유방식 (A Way of Thinking)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에는 보통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 하나는 헤겔 류의 ‘both-and’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킬케골 류의 ‘either-or’ 방식이다. ‘both-and’ 방식은 ‘이것도 저것도’ 모두 보면서 제 삼의 합을 찾아 가는 방식이고 ‘either-or’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방식이다. 헤겔은 ‘both-and’ 라는 변증법적 사유 방식을 가지고 ‘역사’를 읽었고 킬케골은 ‘either-or’라는 실존론적 사유 방식을 가지고 ‘신앙’을 읽었다. 여기서 역사를 읽는 것은 (역사는 자아와 타아의 만남이므로) 외재적인 요소이고 실존이라 함은 (스스로에 대한) 내재적인 요소가 될 것인데, 내재적 실존을 읽는 데는 ‘either-or’ 방식이 그리고 외재적 삶의 역사를 읽는 데는 ‘both-and’ 방식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내재적, 외재적 요인을 모두 안고 있기에, 위의 두 사유방식 중에 어느 하나만을 택할 수는 없다. 외적으로는 ‘both-and’ 그리고 내적으로는 ‘either-or’의 사유 방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사유 방식을 아우를 수 있는 사유 방식은 무엇이 있을까?
한때, 김지하는 ‘아니다-그렇다’라는 논리를 이야기했었다. 그는 ‘아니다-그렇다’의 논리를 동학 사상에서, 최제우의 불연기연(不然其然) 곧,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의 논리에서 찾는데,[18] 이는 김지하나 최제우의 독특한 사유방식은 아니고 동북 아시아 지역의 문화에 팽배해 있는 음양(陰陽)의 사유방식에서 오는 논리이다.
예를 들어 ‘낮이다’라고 했을 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낮이 아니고, ‘밤이다’가 되는 것이고, ‘아이다’라고 했을 때 10년이고 20년이고 ‘시간’이 지나면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다’가 된다. ‘낮이다’ 혹은 ‘아이다’ 라는 명제는 ‘시간’(kairos)에 따라서 객관성을 잃게 된다. 결국 참 명제는 ‘낮이면서 낮이 아니다’ 혹은 ‘아이이면서 아이가 아니다’가 된다. 혹은 ‘지금’이라는 ‘어떤 시간의 조건 하’에서 ‘낮이다’ 혹은 ‘아이이다’라는 명제가 객관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시간’(kairos) 뿐만 아니라 ‘장소’ (topos)에 따라서도 명제는 달라질 수 있다. ‘솥뚜껑이다’라고 하는 명제는 (솥뚜껑을 거꾸로 놓고 불판으로 쓰는) 어떤 식당(topos)에 가면 ‘불판이다’라고 하는 명제가 더 맞다. ‘시간’(kairos)과 ‘장소’ (topos) 뿐 아니라 ‘목적’ (telos)에 따라서도 명제는 달라진다. 밥이 식사용일 때는 밥이지만, 우표를 붙이기 위해서 쓰일 때는 밥이 아니라 밥풀이 된다. 이렇듯이 ‘시간’(kairos)과 ‘장소’ (topos)와 ‘목적’ (telos)에 따라서 어떤 명제가 ‘일 수 있고/아닐 수 있고’가 된다. 이것이 ‘아니다-그렇다’의 논리이며 음양의 논리이다. Taylor 라고 하는 해체주의자 (deconstructionist)는 이를 ‘/’를 이용하여 ‘A/the theology’라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사유방식에서 우리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 됨과 일체 됨을 이해할 수 있다. 곧, 성부/성자/성령은 서로 다르면서 같고, 서로 같으면서 다르다고 하는 ‘/’로서 말이다. 이는 어떤 조건(시간, kairos; 장소, topos; 목적, telos)에 따라서 ‘객관’ 혹은 ‘절대’를 주장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고, 또한 반대로 어떤 조건(시간, kairos; 장소, topos; 목적, telos)에 따라서 ‘주관’ 혹은 ‘상대’를 주장할 수 있는 단초도 제공하기에, ‘참 신/참 인간’인 예수의 양성론도 비로소 이 지평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유방식 속에서 본다면, ‘믿음과 행함’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사유의 방식에서 읽혀져야 한다. 믿음/행함! 참 신은 믿는 것이고, 참 인간은 행하는 것이다.
B. 삼위일체(三位一體), 지평(Paradigms)으로 읽기
인생(-삶)은 온전함, 곧, 하나님을 찾아가는 순례의 길에 있다. 우리의 고백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은 삼위(三位).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 삼위(三位)의 일체(一體)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삼위의 하나-됨’을 (삼위의 일체를) 찾아감이 하나님을 찾는 방식이다.
삼위는 온전하며; 인격적인 개념일 뿐 아니라, 각각의 한 지평(paradigm)으로 볼 수 있다. 진선미(眞善美)로 이야기하면. 성부의 지평은 진, 성자의 지평은 선, 성령의 지평은 그 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미가 된다. 성부는 옳음의 온전함, 성자는 사랑의 온전함, 성령은 옳음과 사랑을 온전히 하나로 묶는 거룩함, 이것이 아름다움(美)의 온전함이다.
성부와 성자는 서로 대척적인 관계에 있고 ('반대'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와 너, 여름과 겨울, 남자와 여자 등등과 같은 대척), 성령으로 인해 그 둘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혹은 성령으로 인해 이상적인 그 둘의 관계가 정립된다. 신과 사람이, 무한과 유한이 대척하지만, 우리는 성령에 의해, 신이 사람이 되고(무한이 유한으로), 사람이 신으로(유한이 무한으로)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외 없이 창조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창조하신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온전하다. 창조된 모든 것은 종류별로 (주제별로) 살펴 볼 수 있다 (-밖에 없다). 우주, 인간, 자연, 식사, 계절, 예술, 그림, 음악, 시간, 공간, 하루, 한 주, 한 달, 1년, 지구, 정치, 경제, 문화, 영화, 학문, 종교, 시장, 스포츠, 등산, 축구, 독서, 차, 등등 그 어떤 것이든지 예외 없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람은 모든 사물들에서 신을 찾아내어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통찰은 정확하다. 한 종류(혹은 한 주제)의 온전함에는 삼위(三位)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성이 (숨기어) 담겨 있으니, 이를 지평(paradigms)으로 삼아 시중(時中), 곧 그 일체(一體)됨을 찾는 것이, 그 종류(주제)를 두껍게 읽는 것이고, 전체를 보는 것이고, 온전한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온전하시듯이.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1-삼위일체(三位一體)
삼위(三位)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이 셋은 한 하나님의 세 이름이다. "모든(all)" 것은 이 세가지 지평(paradigms) 안에서 움직인다. 인간에게 삼위의 움직임이 다르게 보이지만, 신(神)에게는 이 셋의 움직임이 “같음”이다. 곧 삼위일체(三位一體)이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3-진선미(眞善美)
성부하나님 속성은 진(眞)이며, 성자 하나님 속성은 선(善)이고, 성령 하나님 속성은 미(美)이다. 참된 것, 옳은 것, 곧, 진(眞)은 성부하나님의 속성이요, 그 참됨이, 옳음이 그대로/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을 일컬어 선(善)이라 하니, 이는 성자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리하는 자리는 언제나 아름다움이니, 미(美)는 곧 성령하나님의 속성이 된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7-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곧, 천(天)과 지(地)와 인(人)에 대한 이야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관한 이야기이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5-세 기둥
인류 문명을 이끌어 온 세 기둥, 주지주의(主知主義, Intellectualism),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 주정주의 (主情主義, Emotionalism)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175-거룩하라, 온전하라, 사랑하라
‘너희는 거룩하라’[19]는 성령을 닮으라는 (성부의) 말씀이고, ‘너희는 온전하라’[20]는 성부를 닮으라는 (성자의) 말씀이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21]는 성자를 닮으라는 (성령의) 말씀으로, 성서가 명령하는 세 가지 명령이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10-오행1
차가워서 떨어지는 것은(水, 金)은 성부의 속성이고, 뜨거워서 올라가는 것은(火, 木) 성자의 속성이다.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조율하는 것(土)은 성령의 속성이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9-시간
시간... 과거는 성부, 현재는 성령, 미래는 성자의 지평이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44-도덕경에서
도덕경 제42장...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가 하나를 낳으며,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는다. 그리고 셋에서 뭇 만물이 나온다.) ... 을 써 놓고, 성부, 성자, 성령을 묵상하고... 삼생만물이라, 모든 것이 삼위(의 일체)에서 나온다는 말씀에... 므흣~ 미소로 화답하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27-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성부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성자하나님은 야곱을, 성령하나님은 이삭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그 분은 한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로 불리우기도 했다.[22]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291-그리스도
마가는 주는 그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데[23]… 마태는 이에 덧붙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고,[24] 누가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고백하고,[25] 요한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26]라고 고백한다. 마태는 성부, 누가는 성자, 요한은 성령에 잠시 취했음에 틀림없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270-예수의 세 번 오심과 비극적 신화의 회복[27]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탄일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주현일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령강림일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 성탄일에 오신 예수는 첫 번째 신화, 아벨과 카인의 그 비극적인 이야기를 회복시키시고 (카인의 살인 vs. 눅 2:15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주현일에 오신 예수는 두 번째 신화, 노아 방주와 물 심판, 그 비극적인 이야기를 회복시키시고 (물의 심판 vs. 마 3:16 “물에서 올라 오실새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성령강림일에 오신 예수는 세 번째 신화, 바벨탑 불통의 그 비극적인 이야기를 회복시키신다. (불통된 언어 vs. ref. 행 2:1-13, 소통시키는 방언)
사람에게서도 그 지평을 찾아 볼 수 있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293-모세의 등장: 지팡이, 아론, 할례[28]
성부는 모세의 지팡이에 능력을 더 해 주시고, 성령은 모세에게 아론이라는 인물을 붙여주시고, 성자는 모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다. 비로소,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달리 말하면, 삼위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할 인간 모세가 준비가 되었음이다. 지팡이와, 아론과, 할례로!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168-다윗의 등장
다윗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성서는 따로 독립된 이야기로 세 가지를 전해 주고 있다. 첫째로, 사무엘이 찾아가 기름을 부어주어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 다윗의 이야기[29], 둘째로 악한 영 때문에 생긴 사울의 두통을 치료하기 위한 뮤지션으로서의 다윗의 이야기,[30] 셋째로, 블레셋의 거인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는 용사로서의 다윗의 이야기[31] 이다. 성서는 왜 이 세 가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첫째 이야기는 성부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이야기이고, 셋째 이야기는 성자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이야기이고, 둘째 이야기는 성령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이야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야기,’ 그 세 이야기를 전해 주면서 사무엘서의 기자는 주인공 다윗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통하는 세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통하는 세계의 주인공이 되라고![32]
위의 시중묵상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삼위로 드러내심과 같이, ‘모든 것’은 삼위의 세 가지 지평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관계(만남)를 모두 통찰함에 비로소 온전함을 찾을 수 있다. 곧 ‘성부/성자/성령’의 ‘지평’(paradigms) 속에서 그 일체 됨이 통찰될 때에 비로소 온전함이 확보되는 것이다.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3. 구원-한국개신교회의 당면한 과제
구원이 뭘까? 구원을 어떻게 정의할까? 위의 사유방식에 따라서, 삼위로, 두껍게, 중층기술(thick description)로 정의한다면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생명/진리/사랑’이라고 본다. 구원? 천국… 천당… 낙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낙원, 타락하기 이전의 에덴동산이 구원이고, 그곳에 처음부터 있던 것은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진리/생명/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말씀)로 ‘생명’을 창조하셨고, ‘사랑’ 가운데 살게 하셨다. 그곳에 ‘생명/진리/사랑’이 있었다. 타락한 이후 들어 온 것은,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과, 사랑을 거스르는 미움과, 생명을 거스르는 죽음이었다.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자.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292-에덴동산
낙원(에덴동산) 안에는 단지 세 가지만 있다. 하나님의 뜻(섭리)인 ‘진리,’ 그(진리)로 만들어진 ‘생명,’ 그리고 그들에게(생명) 주어진 ‘사랑’이다. 죄로(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진리 아닌 ‘거짓’이, 생명 아닌 ‘죽음’이, 사랑 아닌 ‘미움’이 들어왔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진리이시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생명이다. 삼위는 일체이다. 거짓이 성부와 대적하고, 미움이 성자와 대적하고, 죽음이 성령과 대적하려고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구원은 그러한 것이다. 믿음으로 진리를 찾아 나서고, 행위로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써 생명이 사는 것이다. 이 중 어느 것 하나만 없어도 구원은 부질없는 것이 된다.
성서의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33]는 생명을 사랑해서, 바로의 잘못된 가르침(거짓진리)을 바로잡는다(생명+사랑=진리). (아기를 죽이라는 거짓-)진리는 바로 잡는 것이지 놓치는 것(관련 없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놓치면 구원에서 멀어진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의 일련의 이야기는 생명이 진리를 쫓음으로 면죄부와 같은 거짓 사랑을 바로 잡는다(생명+진리=사랑). (면죄부의 거짓-)사랑은 바로 잡는 것이지 놓치는 것(관련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랑(행위)을 놓치면 구원에서 멀어진다. 십자가 상의 예수는 진리와 사랑 때문에 죽었고 그렇기 때문에 거짓 생명(죽음)을 바로 잡는다(부활-생명). (진리+사랑=생명) (죄로 말미암은 거짓-)생명은 바로 잡는 것이지 놓치는 것 (관련 없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놓치면 구원이 멀어진다.
이러한 중층(thick)의 구원 세계를 그저 ‘믿음’이라고 하는 하나의 교리만을 가지고 엷은(thin) 눈으로 보려 하니 그 폐해가 적지 않은 것이다. 이면의 세계를 보지 못하니, 믿지 않는 남을 정죄하고, 다른 종교를 비방하고, 십자가의 섬김보다는 탐욕을 쫓아가는 것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단지 기초기술(thin description)에 근거함으로 ‘구원’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굳이, 바울을 빌려, 구원에 믿음을 이야기 하려면, 그 믿음은 ‘믿음/사랑/소망’이 함께 통찰되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혹은 의에 이른다는 것, 선행이라는 것은 구원, 의와 상관이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엷은 해석이다. 두꺼운 중층기술(thick description)이 요청된다. 사실 우리 신앙은 이미 충분히 두껍다. 믿음의 대상, 삼위일체 하나님을, 삼위를 지평으로 삼아 일체를 찾아가는 사유 방식으로 넓혀 통찰해 본다면 말이다.
삼위일체를 사유방식으로 삼아, 지평으로써 삼위을 읽으며, 구원에 대한 두꺼움을 더해 보자.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55-구원과 하나님 나라 (믿음/행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행위로 ‘하나님 나라’를 얻는다. ‘구원’은 성부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는 성자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이다. 이는 성령하나님의 말씀이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289-구원 (전체성, 긴장성, 현재성)
성부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 (구원의 전체성, 딤전 2:4[34]/ 겔 33:11[35]) 성자께서는 구원받기 위한 숙제들을 각 사람의 형편에(제자, 율법학자, 부자, 병자-죄인, 어린 아이 등) 맞게 내어 주신다. (구원의 긴장성; 제자-눅 14:26[36]/ 율법학자-요3:5[37]/ 부자-마 19:21[38]/ 세리.창녀-마 21:31b[39]/ 어린 아이-막 10:14[40]) 성령께서는 지금 구원을 누리고 있냐고 묻고 계신다. (구원의 현재성, 겔 33:18-19[41])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269-하나님 나라 들여보내기 (마 21:31b, 막 10:15, 요 3:5)[42]
성자께서는 ‘세리와 창기’같이 ‘마음이 가난한 자’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여보내시고, 성부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드는 자’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여 보내시고, 성령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하나님 나라에 들여보내신다. 세리와 창기와 같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만함이 없고 (가난함이 있고), 어린 아이에게는 거짓이 없고 (진실이 있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이는 자아가 없으니 (하나님이 계시니), 그저 거룩할 뿐이다.
*.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249-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첫째는, 성자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이들로, 심판을 피한 그리스도인이고, 둘째는 성부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이들로, 심판을 이겨낸 그리스도인이고, 셋째는 성령하나님께서 구원할 이들로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다. 첫째는 어린 양이 있는 시온 산[43]에서 찬양하고, 둘째는 유리 바다[44]에서 찬양하고, 세 번째는 아직 바벨론[45](죄)에 머물러 있다. 성자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는 시온 산에 서 있는 이들이고, 성부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는 유리 바다에 서 있는 이들이다. 성령하나님께서는 아직 죄(바벨론) 가운데 서 있는 이들에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부르고 계신다.
삼위(三位)의 시중(時中)묵상273-믿음의 사람, 영의 사람, 사랑의 사람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자 한다면, 성부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 하시고, 성자는 ‘사랑의 사람’이 되라 하시고, 성령은 ‘영의 사람’이 되라 하신다. 믿음의 사람은 손전등으로 어둠을 밝히는 사람이고 (믿음의 충만함은 배터리의 강함이다), 영의 사람은 불로 죄를 태워 버리는 사람이며 (제 아무리 큰 죄라도 작은 불씨 하나면 족할 터), 사랑의 사람은 일주(一株), 곧 불이(不二)의 사람이다 (도대체 죄가 뭐지? 도대체 어둠이 뭐지? 하면서 그냥 어린 아이 같은).
‘구원’(생명/진리/사랑)에 관하여, 성경은 이러한 삼위의 중층 이야기들로 가득한데, ‘오직 믿음’이라는 한 축에 갇혀서, (혹은 마틴 루터로 촉발된 개신 교회의 500년 전통, 그 역사의 교리-가르침의 권위에 눌려서) 다른 두 위의 지평을 살피지 못한다면,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결국은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잃고, 독단적 교리주의라는 깊은 병든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런 교리 어떠한가?
‘구원’은 (공간적으로 하늘 위든 이 땅이든, 시간적으로 죽음 후이든, 그 전이든) ‘생명/진리/사랑’이다. ‘생명/진리/사랑’은 믿음으로 ‘진리’를 찾아 수호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며, ‘생명’에 소망을 갖는 것이다. (믿음 사랑 소망이니--진리를 쫓는 믿음은 성부께서 도우시고, 사랑의 행위는 성자께서 함께 하시고, 생명에 소망을 넣어 주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나가는 말
기독교(종교)의 핵심은 구원에 있다. 개신교회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한다. 엷어도 너무 엷다. 500년 전 그 상황의 위중함 속에 그리 말해야 했음이 당시에는 적절했을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개신교회가, 근대화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책임적으로 구원에 대한 답을 주기에는 너무 엷다. 구원도 믿음도 다 중층기술(thick description)이 필요할 터인데, 그 두꺼움은 삼위를 믿음의 대상뿐 아니라, 지평으로서 사유의 방식으로 그 관계를 읽어나갈 때 비로서 열릴 것이다.
중층기술, 삼위의 사유방식이 이면을 보는 해석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해도, 결국에는 구체적 교리(가르침)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제 아무리 좋은 생각과 사상이라고 해도, 교리로 자리를 잡지 못하면 그 영향력은 크게 감소하기 때문이다. 사실 감리교회의 경우, 행위에 대한 많은 좋은 가르침[46]이 있다. 다만 ‘교리’의 권위를 얻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47] 500년 내려 온 구원의 교리, ‘오직 믿음으로 구원…’ 이제, 다시 세워야 하지 않을까!
[1] ‘중층기술’(thick description)이라는 말은 길버트 라일(Gilbert Ryle)의 개념을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그의 문화인류학을 전개하면서 발전시킨 것이다. 1차적인 개념인 기초기술(thin description)로는 문화의 현상 자체를 볼 뿐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데, 현상의 깊은 곳까지 살피는 두꺼운 의미의 해석, 곧 중층기술(thick description)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 이는 필자의 -관(觀), 곧 사유방식이다.
[3] 예수가 ‘참 신이며 참 인간’이라는 ‘양성론’도 결국은 같은 마찬가지이다.
[4] 이 말은 마틴 루터가 그의 노트에 남긴 마지막 말이다.
[5] 루터는, 당시의 ‘행위’가 잘못된 행위라면, 그 ‘행위가 구원과 관련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그 ‘행위는 구원에서 멀어지는 행위이다’라고… ‘행위가 구원과 관련 있음’을 어쨌든 주장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믿음도 잘못 믿는 경우가 있듯이 행위도 잘못 행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6] 이 신앙고백은 마틴 루터의 동역자, 멜랑흐톤이 작성하였으며, 구원에 관하여 언급한 루터의 입장을 잘 대변해 준다.
[7] 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90.
[8] 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91.
[9] 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92.
[10] 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165.
[11] 우리가 믿는 믿음의 고백들은 역사를 통해서 신조들로 정리되어 왔다. 감리회 <교리와 장정>은 개신교회가 유산으로 받은 신앙의 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신조들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 콘스탄티노플신조, 칼케돈신조,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그리고 영국 성공회의 39개조를 25개조로 줄인 감리회 종교강령 (1784).
[12] <사도신경 새 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13] <니케아신경, 325년>: 전능하신 아버지시요, 가시적(可視的)이거나 불가시적인 만물의 창조주이신 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으며 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독생자로 나셨으니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으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나신 분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하늘과 땅 위에 존재하는 만물을 있게 하신 아버지와 한 본질이심을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원하여, 이 땅에 내려오셔서 육신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셨으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말하거나 그분이 나시기 이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다른 실체자 본질에서 유래되었다든지 창조되었다든지 변모하고 변질된다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인 사도적 교회가 정죄한다. (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49-50)
[14]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 381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요, 천지와 가시적이며 불가시적인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으며,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빛에서 나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요, 나셨으며, 창조되지 않으셨고 만물을 있게 하신 아버지와 동본질(호모우시오스)이심을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이 되고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가운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와 찬송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세례를 고백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을 믿습니다. (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55-6)
[15] <칼케돈신경>: “그러므로 교부들을 따라 우리는 모두가 한 분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완전하시고 사람으로서도 완전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몸을 가진 참 사람이시다. 그분은 신성으로 말하면, 아버지와 동질이시고 인성으로 말하면 우리와 동질이신데,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다. 그분은 신성으로 말하면, 시간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으로 말하면,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동정녀이시며 하나님을 낳으신 이,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우리는 성자이시며, 주님이시요, 독생자이신 유일하신 한 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분은 두 본성으로 인식된다. 두 본성이 혼합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으며 분할되거나 분리되지도 않음을 인정한다. 인격적인 통일을 이룬다고 하여 양성의 구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양성은 각 본성의 특이성을 보유하면서 하나의 인격과 자질로 연합되어 있다. 우리는 두 인격으로 분열되거나 분리된 한 분을 고백하지 않고, 한 분이시며 동일한 독생자이신 성자, 하나님의 로고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미리 알려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으며, 교부들이 우리에게 그와 같이 가르쳤을 뿐 아니라, 교부들이 우리에게 전수한 신앙고백에서도 역시 그렇게 가르친다. (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63)
[16]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엷은 해석으로 한 쪽만 보았다. ‘안디옥’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을 분리시켜 ‘인성’을 강조한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을 혼합시켰다. 초기 교회는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배척하고 이들이 주장하는 기본요소만 진리로 수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을 기독교의 교리로 선포하였다.(451년 칼케톤 신경에서 예수는 참-신 참-인간 vere deus, vere homo 라고 고백하였다)
[17] 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65-6.
[18] ref. <김지하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70-73 그리고 169-170.
[19] (레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20]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21] (요1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22] ref. 출애굽기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23] (막 8: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24]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25] (눅 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6] (요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27] Ref. 가인의 살인 (창 4:1-16) vs. 성탄일의 메시지 (눅 2:15) / 노아 방주의 물 심판 (창 7:1-24) vs. 주현일의 메시지 (마 3:16) / 바벨탑 불통 (창 11:1-9) vs. 성령강림일의 메시지 (행 2:1-13)
[28] (출 4:2-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출 4: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출 4:10-16,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 …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출 4:24-26,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29] 삼상 16:1-13.
[30] 삼상 16:14-23.
[31] 삼상 17:1-54.
[32] ref. 삼상 16장-17장.
[33] ref. 출 1:15-21,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34]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5] (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36]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37]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8]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39] (마 21:31b)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40] (막 10: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41] (겔 33:18-19)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42] (마 21:31b)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막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43] (계 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44] (계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45] (계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46] 사회신경(1997년) <개정>, “감리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구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 감리교인은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의 가정, 사회, 국가, 세계 그리고 생태적 환경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
*감리교 신앙의 강조점: 【40】 감리교의 신앙전통은 기독교의 참된 구원의 진리와 성서적 경건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서적인 구원의 길을 살아가는 것이며, 믿음과 사랑을 통해 성화와 완전으로 나아가는 실천적 제자의 도리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 칭의, 성화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충만하고 온전한 구원은 타락한 인간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와 새 창조의 경륜은 개인적 성화, 사회적 성화, 그리고 창조의 완성을 포함한다.
[47] 성의 차별에 반대해서, ‘창조주, 구세주, 인도주’라 한들, 교리로서의 권위를 가진 ‘성부, 성자, 성령’에 비할 바 못 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