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조씨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으나,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되었다. 과연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조정의 출사 전부터 사림의 영수로 인정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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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의 잘못을 청산하는 유신 정치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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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개혁의 열망,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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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날카롭고 급진적이었던 개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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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성리학자
당성(唐城)서씨 서경덕 : 1489(성종 20)~ 1546(명종 1).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했다.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
할아버지는 순경(順卿), 아버지는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호번(好蕃)이다.
송도(松都:지금의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을 부쳐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30세인 1519년 한양조씨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42세에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51세에 1540년 의성김씨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55세에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이해에 병이 깊어지자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선배들의 주석이 있는 것을 다시 거듭 말할 필요가 없고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글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제 병이 이처럼 중해졌으니 나의 말을 남기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 太虛說〉·〈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대상복제(大喪服制)에 대한 상소를 하여,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3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
서경덕의 철학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하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데 특징이 있다. 격물을 중시했던 그의 학문방법은 독창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시원을 허(虛) 또는 태허(太虛)라고 보았으며, 이를 선천설(先天說)로 설명했다.
"태허는 말끔하여 형체가 없다. 이를 선천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끝이 없고 과거에 시초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한끝을 모른다. 말끔하게 허하고 고요한 것이 기의 시원이다. 끝없이 넓은 우주에 꽉 들어차서 빈틈이 없고 털끝 하나도 드나들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당기려면 허하고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실은 차 있으니 없다고 할 수 없다.
한계가 없는 것을 태허라 하고 시초가 없는 것을 기라고 하니 허가 바로 기이다.
허가 본래 무궁하고 기 역시 무궁하니 기의 근원은 처음부터 하나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한 태허는 곧 물질적인 기이며 기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물의 근원을 기로 설명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정신, 지각까지도 포함한 천지만물은 기의 취산(聚散)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담연청허하면서 보편타당한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둘을 함유하여 낳고 둘은 그 자체의 능력으로 변화의 작용을 한다. 둘은 곧 음양·동정(動靜)·감리(坎離) 등을 가리킨다. 둘을 낳는 하나는 곧 그 음양이나 감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담연주일(淡然周一)한 기이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 음양이 될 때 양이 변화를 극한 것이 하늘이 되고 음이 모이고 응결한 것의 극이 땅이 된다. 또 양의 정수가 맺혀 해가 되고 음의 정수가 맺혀 달이 된다. 나머지 기운들이 하늘에서는 별이 되고 땅에서는 물과 불이 된다. 그는 이런 과정을 선천에 대해서 후천(後天)이라고 했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기의 운동이다.
그런데 그는 이 기의 운동이 다른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 능히 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를 '기자이'(機自爾)라고 표현했다.
한편 그는 기의 취산에 따라 무형의 기와 유형의 기로 구별하여 보았다. 시원적인 기로서의 태허는 감각할 수 없는 무형의 기이며 천지만물을 형성하는 기는 유형의 기라고 했다. 즉 기가 쌓이면 유형의 기가 되고 흩어지면 무형의 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전개했다.
물질적인 기는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따라서 창조도 소멸도 없다는 전제로부터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는 흩어질 뿐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이를 기에 선행하는 1차적 존재라고 주장한 주희의 견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사생귀신은 오직 기의 취산에 불과하며, 그 취산은 결코 유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환의 과정임을 설명했다.
한편 인성론에서는 전통적인 성선설을 주장하고,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주정(主靜)을 제시했다.
또한 현실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대상복제에 대해 올린 상소에서 왕릉이나 기타 묘지가 무분별하게 지정되고 확장되는 데 따른 폐단과 왕릉의 축조를 위한 채석의 노역동원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학설은 당시 주조를 이루었던 정주학의 이론과는 다른 독창적인 부분이 많았으므로, 이황·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진보(眞寶)이씨 이황은 정주의 학설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으므로, 서경덕의 기론에 대해 그가 이를 잘못 풀이했다고 비판했다.
이황은 "그의 견해는 별달리 정밀하지 못하다. 그의 학설을 보면 1편도 병통이 없는 것이 없다"고까지 비판했다.
덕수이씨 이이도 "퇴계는 모방을 주로 하여 매끄럽게 꿰뚫는 맛이 없는 반면, 화담은 총명이 지나쳐서 스스로 얻은 견해가 많지만, 그 자득의 견은 더 향상이 되지 못하고 그 위에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일절(一節)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것은 방만하기 쉬워 잃는 바가 있으므로 차라리 이황의 모방을 본받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妙)를 분명하게 터득한 것으로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칭송했다. 더욱이 이이는 서경덕의 기자이설을 취하여 이를 형식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 학파에 이어져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대표하게 되었다.
서경덕의 학설은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최초로 기일원론의 체계적인 전개를 시도한 것이었으며, 이이 등 주기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문하에서 박주(朴洲)·박순(朴淳)·허엽(許曄)·남언경(南彦經)·민순(閔純)·이지함(李之?)·이구(李球)·박민헌(朴民獻)·홍인우(洪仁祐)·장가순(張可順)·이중호(李仲虎)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었다.
1567년(명종 22) 호조좌랑에, 1575년(선조 8)에는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진보(眞寶)이씨 이황 : 1501(연산군 7) 경북 안동~ 1570(선조 3).
이동설(理動說)·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 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27세인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33세인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울산김씨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34세인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43세인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46세인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48세인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중 전임군수 상주주씨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52세인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68세인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을 진강(進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창녕조씨 조식 : 1501(연산군 7)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일대) 토동~ 1572(선조 5).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 어머니는 인주이씨이다.
김우옹·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사위이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창녕성씨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3년에는 경상감사 여주이씨 이언적이 만나기를 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1551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 1559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551년 오건(吳健)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북인 서산정씨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66세인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 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571년에는 선조가 식물(食物)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72세로 죽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산서원(德山書院)을 세운 뒤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晦峴書院)을 세웠고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되었다. 또한 조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이 생존했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정도로 사화가 자주 일어난 때로 훈척정치(勳戚政治)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다. 그는 성년기에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보았다.
기묘사화 때는 숙부 언경(彦卿)이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성우(成遇)·송인수(宋麟壽) 등 많은 친구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그는 1, 2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곧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인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 색인 : 남명학).
그가 늘 지니고 있던 검명(劍銘)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고 새겨놓았듯이 그의 철학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나간다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한 것이었다.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한 본심(本心)의 함양에 주력하게 되는 반면 '의'는 외적 행위의 단재(斷裁)를 통한 사욕(私欲)의 제거에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일체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했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그는 초학자에게 〈심경 心經〉·〈태극도설 太極圖說〉·〈서명 西銘〉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 방법을 비판하고,
〈소학〉·〈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이황과 기대승 등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했다(→ 색인 : 사단칠정논쟁).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기록 곳곳에 당시 폐정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준엄한 비판과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난세(亂世)에는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을 투철히 하여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식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의식을 보여주었다.
조식과 그의 문인들(북인)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남인)과 더불어 영남유학의 두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었으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흥 등 조식의 문인들이 광해군 때 대북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참여한 탓에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조식에 대한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그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남명집〉과 독서를 하다가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 學記類編〉이 있다.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증(贈) 이조판서 문민공(文愍公) 준(遵)의 조카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22세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기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소윤 파평윤씨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31세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 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40세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이듬해 대사성에 올랐다. 1570년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기준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이황과 정지운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지나치게 〈주자어류 朱子語類〉와 운봉호씨설(雲峰胡氏說)에만 근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색인 : 사단칠정논쟁). "자사(子思)와 맹자가 말하는 바가 같지 아니하므로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여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하여 선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와 기를 양물(兩物)로 삼는 것이니, 이는 칠정이 성(性)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사단이 기를 타지[乘] 않는다"는 것이다(→ 색인 : 이기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할 때에는 혹 이와 같은 설이 옳을지 모르나 사단·칠정은 이처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견해에 반대했다(→ 색인 : 인심도심설).
이어서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입각한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성(性)과 정(情)은 미발(未發)·이발(已發)의 다름이 있을 뿐 불가분의 표리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 성(性)은 선(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정(情)도 그 성(性)이 발하여 된 것이므로 불선(不善)이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사단칠정을 이기(理氣)에 분속(分屬)시킨다면 이(理)와 기(氣)를 독립된 별물(別物)로 보게 되어 사단 속에 기(氣)가 없고 칠정(七情) 속에는 이가 없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사단과 칠정을 대설(對說)이 아닌 인설(因說)로 파악하는 것으로 결론짓게 된다.
그는 사단이 칠정 중의 사단인 것처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서의 순리(純理)도 겸기(兼氣)인 기질지성(氣質之性) 중의 것임을 의미한다고 하여 심성론적(心性論的)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요, 기는 이의 재료인 것이다. 이 둘은 본래 나누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물에 존재할 때는 본래 혼륜(混淪)되어 분개(分開)할 수 없다.
단 이약기강(理弱氣强)하고, 이는 조짐이 없으나 기는 흔적이 있으므로 그것이 유행(流行)·발견될 때 과불급의 차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칠정이 발할 때 혹은 선하고 혹은 악하여 성(性)의 본체도 혹 완전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기(理氣)는 논리적으로 구별되지만 실제에서는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심성론을 중심으로 사단과 칠정의 차이를 중절(中節)과 부중절(不中節)로써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은 태극도설에도 반영되었다. 태극(太極)은 이(理)로서 주재자요, 음양(陰陽)은 기(氣)로서 재료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民利)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民本政治)·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종과 선조에 대한 경연강의(經筵講義)에 담겨 있다.
〈논사록 論思錄〉에 제시된 거현론(擧賢論)·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은 왕도정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었다.
먼저 현자(賢者)의 등용을 중시하고, "현자를 등용하고자 한다면 먼저 시비를 분명히 하여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연후에야 현자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여 윤원형 등 당시 집권층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는 거현(擧賢)이야말로 양민(養民)하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현자들이 화를 입으면 소인배들이 득세하고, 그들의 사치와 사욕으로 말미암아 민재(民財)가 약탈되므로 민심이 흩어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임금은 재용(財用)을 선처하여 민생들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이재양민이 정치의 요체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국가정치의 일차적인 근본인 군덕(君德)의 증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덕치(德治)의 두 기둥인 존현(尊賢)과 이재(理財)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禮)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예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오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었다. 특히 예는 "천명(天命)의 성(性)에서 나왔으므로 범인(凡人)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성인(聖人)만이 이를 안다. 그리하여 예법을 만들어 일세(一世)를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임금이 지성으로 현자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현자 또한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 오직 임금의 현자를 쓰려는 성의가 있느냐에 있을 따름이다"라 하여 신하의 상향적인 예뿐만 아니라 임금의 신하에 대한 예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그는 "언로(言路)는 국가의 대사(大事)이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는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는 위태롭다"라고 하여 임금이 언로를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시비(是非)를 명확히 가려 소인배의 득세를 방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景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논사록〉·〈주자문록 朱子文錄〉·〈고봉집〉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창녕성씨 성혼 :1535(중종 30)~ 1598(선조 31).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색인 : 성리학).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
아버지는 조광조의 문인인 수침(守琛)이다. 10세 때, 기묘사화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를 따라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다.
17세 1551년(명종 6)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梁)의 딸과 결혼했다. 같은 해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는 응하지 않았고,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 들어가 〈상서 尙書〉 등을 배웠다. 20세에 한 살 아래의 이이와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을 만났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내섬시첨정, 1583년 이조참판,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50세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노론 연일정씨 정철(鄭澈)에게 구원해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1591년 〈율곡집〉을 평정(評定)했다.
54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어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에 임명되었다.
56세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유성룡·이정암(李廷?)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이에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듬해 파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평산신씨(申氏)이다. 어려서는 주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했다. 19세인 1554년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그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스스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8년 23세 되던 해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李滉)을 방문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왕복문변(往復問辨)했다.
29세 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31세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다시 청주목사로 복직했고, 다음해 다시 해주로 낙향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48세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죽었다.
이이의 이기론(理氣論)이 가지는 특색은 다음과 같다(→ 색인 : 성리학, 주기론).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며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이다.
즉 이는 이념적 존재이므로 시공을 초월한 형이상적(形而上的) 원리로서 만물에 공통적인 것이며, 기는 질료적(質料的)·작위적(作爲的) 존재로서 시공의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이하적(形而下的) 기재로 국한적인 것이다.
이이는 이와 같이 무형과 유형의 차이로 이통(理通)과 기국(氣局)을 설명하고, 유위와 무위의 차이로 기발(氣發)과 이승(理乘)을 설명했다(→ 색인 : 이통기국론). 이처럼 이이는 이존론(理尊論)을 주장하는 이황과 달리 이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이기의 부잡(不雜)보다는 불리(不離)를 강조했다.
즉 이기가 서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묘합(妙合)한 가운데 이는 이이고 기는 기여서 서로 협잡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일물(一物)이 아닌 것이며, 이는 이이고 기는 기라고 하더라도 이와 기는 혼륜무간(渾淪無間)해서 선후와 이합이 없기 때문에 이물(二物)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따라서 이와 기는 서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이와 기의 성질을 구분하여 형이상·형이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색인 : 기발이승일도설).
이러한 그의 이기관은 그대로 인간관에 반영된다. 먼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칠정은 사단을 포괄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본래 하나의 성으로 여기고, 이만을 지칭할 때에는 본연지성이라 하고 이와 기를 서로 관련시켜 파악할 때에는 기질지성이라 한다고 했다.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인간의 모든 감정을 총괄하여 말하면 칠정이고 그중에서 특히 선일변(善一邊)만을 지칭하면 사단으로서,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사단과 칠정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단은 도심이라 할 수 있고,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총괄해서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심에는 천리(天理)도 있고 인욕(人欲)도 있어서 인심과 도심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은 다만 도의(道義)를 위해서 발했는가, 육체적 욕망을 위해서 발했는가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인욕을 천리에 배치된다고 보는 기존의 천리인욕설과는 대비되며,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초보적인 욕구를 당연시함으로써 생산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긍정하는 견해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이이는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고 여겼다. 그는 변화의 기초에 음양에 구비되어 있는 동(動)과 정(靜)의 속성과 그 음양을 동정하게 하는 법칙성이 작용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운동변화의 원인을 기 자체의 속성 대신 소이연(所以然)으로 설명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변화에 대한 이해를 사회현상에 적용한 것이다. 그의 변법사상의 기초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가 중쇠기(中衰期)로서, 오랫동안 도학(道學)이 행해지지 않아 시폐(時弊)가 쌓여 있으므로 이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때 시폐는 공물납부와 진상의 폐해, 군역의 불균, 관리들의 부정 등이었다. 이에 그는 공물분정을 공평하게 하고 진상을 경감할 것을 주장했으며, 나아가 잡다한 일체의 공물을 폐기하고 전답의 면적에 따라 쌀을 징수하는 수결수미법(隨結收米法)을 전국에 시행할 것을 제안했다.
호조의 관리로 하여금 전국의 한정(閑丁)을 조사·색출하여 이들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한편 변장(邊將)들이 군졸들을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을 그 지방의 창고곡식으로 보장해주는 방안과 군졸들이 휴식할 수 있도록 병역교대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진전개간(陳田開墾)을 장려하기 위해 휴한지나 황무지를 개간할 경우 실제 경작면적에 따라 세를 부과할 것을 주장했으며, 파산상태에 빠져 있는 국가재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것과 관료기구를 간소화하고 낭비를 근절하여 국가재산의 손실을 방지할 것을 제안했다.
이이는 이러한 제반 시폐의 개혁은 시세(時勢)가 마련되어야 실현될 수 있으며, 그 실현여부는 군주의 개혁하려는 입지(立志)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현신(賢臣)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렸다고 여겼다. 특히 가장 이상적인 통치형태로서 도학이 행해지는 삼대지치(三代之治)의 회복은 군주 일인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때 도학이란 격치(格致)로써 선(善)을 밝히고 성정(誠正)으로써 몸을 닦아 몸에 쌓이면 덕(德)이 되고 그것을 정사에 베풀면 왕도(王道)가 되는 학문이다. 이처럼 이이는 개인의 윤리도덕규범·가치규범이 그대로 확충되어 통치규범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이는 성학(聖學)의 이름으로 군주를 교도하여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군주개조론인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그리고 시폐의 개혁은 단지 시폐의 혁거(革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통해 양민(養民)에 이르는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백성을 주자학적 질서에 순응하도록 교화시키고자 했다. 결국 그의 개혁론은 시폐의 개혁, 양민, 그리고 백성의 교화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의 개혁안의 시행여부를 결정하는 개혁기구인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자는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실정에서 향약은 그의 개혁사상을 실천하는 한 방도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파주향약의 서문(序文)을 짓고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향약(社倉契鄕約)·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 등을 만들었다. 이 향약의 사회적 기능은 지방사족의 주도로 농업생산층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 향촌사회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적 윤리 및 가치관 등을 향촌민에게 주입시켜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이의 개혁사상은 16세기 사회발전의 진전에 따라 동요하는 사회체제와 신분질서를 다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고정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이이는 점진적으로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향촌질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이는 붕당(朋黨)을 국가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요소로서가 아니라 소인이 무리를 이루듯, 뜻을 같이 하는 군자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불가피한 정치의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주자의 붕당론에 근거한 군자소인변(君子小人辨) 위주의 붕당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붕당긍정론에서 출발하여 군자당·소인당의 엄격한 분별과 진퇴를 강조함에 의해 군자당으로 자부하는 사림의 정치활동을 정당화해주는 논리였다.
그러나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 사이의 시비로 인하여 분붕(分朋)의 조짐을 보이던 1575년 이후 이이는 그 해소에 진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붕당론을 수정하게 된다.
이이는 동인·서인이 모두 사류(士類)이며 그 분열은 의견의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입장인 군자소인변은 적용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동서를 타파하는 방법으로 양시양비설(兩是兩非說)과 보합조제론(保合調劑論)을 제시하게 된다.
먼저 동인·서인 명목 성립의 기초가 된 이른바 심의겸·김효원 시비에 대해 양시양비론을 적용하여 비생산적인 논쟁을 마무리짓고, 함께 조정에 나와 보다 막중한 국사와 민생문제에 중지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583년 자신을 소인으로 공격하는 삼사의 언관에 대해서 엄정한 시비분별을 요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논쟁에서 양시양비론을 적용시킨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동인과 서인에 군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인도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당론 위주의 인사정책에 반대하고 당색에 구애되지 않는 조용(調用)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청탁(淸濁)을 분별한 것이었고, 집권세력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보합조제론은 수십 년에 걸친 훈척과의 투쟁에서 체득한, 집권당을 견제할 수 있는 상대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사류의 중지를 모아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이이의 사상은 17세기 이후 그의 문인들로 형성된 서인 노론계에 의해 계승되어 이들의 정치사상·정국운영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 격렬하게 진행되던 봉건사회 해체 양상에 신진관료·지주 중심의 정치사회 운영론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이의 사상이 주자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것임을 밝히는 데 주력하는 한편, 이황이나 조식(曺植) 등의 사상을 계승한 학파·정파를 배제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17~18세기의 격변기에 광산김씨 김장생(金長生)-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청주한씨 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이이학파는 이같은 작업에 토대를 놓음으로써 이후 정치·사상계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했다.
저서로는 〈성학집요〉·〈격몽요결〉·〈소학집주개본 小學集注改本〉·〈중용토석 中庸吐釋〉·〈경연일기 經筵日記〉 등이 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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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 양천허씨 허엽 1517(중종 12)~ 1580(선조 13).
30세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51년 부교리를 거쳐, 37세155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장령으로 재직중 재물을 탐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사성·지제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46세 1562년 경연(經筵)에서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윤근수(尹根壽)·구수담(具壽聃)·허자(許磁) 등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다시 파직당했다. 52세1568년(선조 1)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부제학·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59세 1575년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본격화될 때 김효원(金孝元) 등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었다. 그후 병으로 인해 동지중추부사로 옮겼다가 상주에서 객사했다. 관직에 있는 동안 도산서원의 건립을 지원하고 향약(鄕約)의 실시를 건의하는 등 주자학의 보급에 힘썼고,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편 警民篇〉의 보완과 〈삼강이륜행실도〉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청백리에 등록되었고,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초당집〉·〈전언왕행록 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붕당의 시작> 서인: 청송심씨 심의겸/ 동인:선산김씨 김효원
<1> 서인 : 노론, 소론, 벽파,시파 계열
충주박씨 박순 1523(중종18)-1589(선조22)
본관은 충주.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아버지는 한성부 좌윤 우(祐)이다.
31세 1553년(명종 8)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전적·수찬·사인 등을 지냈다. 1555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한산 군수·직제학·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거쳤다.
33세 1565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척신 윤원형을 탄핵하여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뒤 대제학·우의정·좌의정을 거쳐 50세1572년(선조 5)부터 약 15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동서당쟁이 심할 때 이이·성혼 등을 편들어 상소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았다. 그뒤 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했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천지(天地)의 생성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 태허설(太虛說)을 주장했다. 또한 정치의 도(道)는 충과 효라면서, 자신으로 보면 집안이 먼저이고 나라는 뒤이지만 예(禮)로써 보면 나라가 존귀하고 집안은 낮다고 했다.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능했으며, 시는 당시풍(唐詩風)을 따랐다. 저서인 〈사암집〉은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싹틀 선조 당시의 주변 실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광주 월봉서원(月峰書院),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영평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광산김씨 김계휘 1526(중종 21)~ 1582(선조 15).
본관은 광산.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현감 호(鎬)의 아들이며, 장생(長生)의 아버지이다.
24세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그뒤 여러 해 동안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사관(史官)·부수찬·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32세 1557년 소윤(윤원형)파 의성김씨 김여부(金汝孚)와 안동김씨 김홍도(金弘度)의 반목으로 옥사가 일어났을 때, 김홍도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
37세 1562년 이조정랑으로 복직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중이어서 나가지 않고, 3년상을 마치고 관직에 나가 사간·집의·응교·직제학 등을 역임했다.
41세 1566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50세 1575년(선조 8) 동인·서인이 나누어질 때 서인에 속했다가, 당쟁 완화를 위한 조정의 조정책으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581년 종계변무주청사로 중국에 갔다온 뒤, 예조참판에 올라 경연관이 되었다.
경서와 사서 등을 폭넓게 읽었으며, 우리나라의 산천·마을·도로·성지 등의 형세와 전술적인 문제점, 농작물의 생산현황, 각 지명의 전통·연혁·씨족원류 등을 파악하여 기록으로 남겼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능성구씨 구사맹 1531(중종 26)~ 1604(선조 37).
아버지는 영의정 순(淳)이며, 딸이 인헌왕후(仁獻王后; 조선 정원군 : 원종 (元宗:추존)의 비. 능성구씨(綾城具氏)로 인조의 어머니이다.)
유희춘(柳希春)·이황(李滉)의 문인이다.
28세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사간·정언 등을 거쳤다. 1563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왔다.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39세 1569년(선조 2)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 있을 때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76년 다시 기용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좌부승지로 있다가 다시 대간의 탄핵으로 남양부사로 나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자를 호종하여 의주로 갔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왕자와 후궁을 따라 성천에 피난했다. 그뒤 좌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으나,
72세 1602년 아들 구굉(宏)이 유배되자 사직했다. 죽은 뒤 1632년 사위인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이 원종(元宗)으로, 다섯째 딸이 인헌왕후로 추숭되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신진사류들의 뜻을 따르지 않아 자주 탄핵당했으나, 청렴하고 시문에 뛰어났다. 저서에 〈팔곡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동인>선산김씨 김효원 : 1532(중종 27)~ 1590(선조 23).
본관은 선산.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庵). 아버지는 현감 홍우(弘遇)이다.
조식(曺植)·이황(李滉) 등에게 배웠다.
33세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고, 1565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지내고,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41세 1572년 오건(吳健)이 이조전랑(吏曹銓郞)으로 추천했다. 이조전랑은 비록 그 지위는 낮으나 관리의 임면(任免)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로 반드시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어 그 임명은 이조판서라도 참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沈義謙)이 명종 때 공무로 영의정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다가 그곳에 김효원의 침구가 있는 것을 보고, 문명(文名)이 있는 자가 권문(權門)에 아첨한다고 멸시하고 있다가 이때 김효원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권신(權臣) 윤형원의 문객이었다 하여 거부했다.
그러나 43세 1574년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이조전랑이 되었다.
그후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충겸(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충겸이 명종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임을 들어, 전랑의 관직은 척신(戚臣)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반대하고 광산이씨 이발(李潑)을 추천했다.
이에 심의겸은 "외척(外戚)이 원흉(윤원형)의 문객에게 지겠느냐"하여 더욱 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 이조전랑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사림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낙산(駱山) 밑 건천동(乾川洞)에 있다고 하여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동인이라고 불렀으며, 심의겸의 집이 서울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으로 불렀다.
동인은 주로 신진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도 관계가 있었다. 이들의 대립이 심해지자 대윤 우의정 광주노씨 노수신(盧守愼)과 부제학 덕수이씨 이이(李珥)가 사림의 분쟁을 우려하여 이를 완화시키고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외직으로 내보내도록 상소했다.
그후 김효원은 경흥·부령·삼척부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사간(司諫)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중앙의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계속 지방에 머물렀다. 당쟁이 심화되면서 안악군수로 자청해나갔으며 당쟁에 책임을 느끼고 시사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뒤에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중에 죽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성암집〉이 있다.
서인 해평윤씨 윤두수 1533(중종 28)~ 1601(선조 34).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변(?)이며, 동생이 우찬성 근수(根壽)이다.
성수침(成守琛)·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 등에게 배웠다.
26세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저작 등을 지냈다.
31세 1563년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청송심씨의 외삼촌으로 권세를 누리던 이조판서 전주이씨 이량(李樑)이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대사헌 우계이씨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났다.
같은 해 이량이 반대파 사림의 숙청을 꾀하다가 유배됨에 따라 다시 기용되어 수찬이 되었다. 그뒤 이조참의·장령·사복시정·부응교·우승지 등을 지냈고,
44세 1576년(선조 9) 대사간이 되었다. 1577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도승지로 있다가 이종동생 이수(李銖)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1579년 연안부사로 복직되었다. 이때 구황(救荒)의 공으로 선조로부터 옷 1벌을 상으로 받았다. 이어 한성부좌윤·형조참판을 거쳐 1587년 전라도관찰사, 1589년 평안감사를 지냈다.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해원군(海原君)으로 봉해졌다.
57세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대사헌·호조판서를 지냈다.
59세 1591년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하다가 유배를 당할 때 함께 파직되어 회령·홍원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60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기용되어 선조를 호종(扈從),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평양에서 좌의정에 올랐다. 평양에 있을 때 명(明)나라에 대한 원병 요청을 반대하고 평양성의 사수를 주장했으며, 함흥피난론을 물리치고 의주행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함흥이 함락된 뒤에도 선조가 무사하게 했다. 의주에서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랴오둥[遼東] 피난을 막았다.
62세 1594년 세자를 따라 남하하여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판중추부사로 왕비를 해주로 시종하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67세1599년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나 문징명체(文徵明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었다. 저서로는 〈오음유고 梧陰遺稿〉·〈성인록 成仁錄〉, 편서로는 〈기자지 箕子志〉·〈평양지 平壤志〉·〈연안지 延安志〉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남인 경주김씨 김명원 1534(중종 29)~ 1602(선조 35).
본관은 경주.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 아버지는 대사헌 김만균(萬鈞)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현감 안준의(遵義)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5세 1558년(명종 13) 사마시, 28세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헌납·지평·교리·수찬 등을 지냈다. 1569년(선조 2) 이래 종성부사·형조참의·평안병사·전라감사·병조참판·도총관 등을 두루 지냈다.
54세1587년 왜구가 녹도(鹿島)를 침범하자 도순찰사로 이를 격퇴시켰다. 이어 형조판서·경기감사를 거쳐 좌참찬으로 지의금부사를 겸했다. 56세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수습의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어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59세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수로 한강 및 임진강 방어에 임했으나 막아내지 못했다. 평양 함락 후 순안(順安)에 주둔, 선조 거처를 경비했다. 명(明)의 원군이 오자 명 장수들의 자문에 응했다. 임진왜란 후 호조·예조·공조의 판서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시 병조판서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했고, 좌찬성·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68세 1601년 부원군에 봉해지면서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서인 청송심씨 심의겸 :1535(중종 30)~ 1587(선조 20).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연원(連源)이며,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이다. 홍(泓)에게 입양되었다.
인순왕후 청송심씨 (仁順王后 : 명종의 妃)의 동생이다.
28세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당시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小尹)이 문정대비 파평윤씨 (文定大妃)를 배경으로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명종은 1563년 전주이씨 이량(李樑)을 이조판서로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량이 횡렴을 일삼고 사림을 탄압하여 사림으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었다. 척신(戚臣)이기는 했으나 척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사림을 옹호했던 그는 국왕의 밀지(密旨)를 받고 대제학 기대항(奇大恒)으로 하여금 상소케 하여 외숙부인 이량 일파를 탄핵했다.
1564년 지평·검상, 1565년 사간·부응교, 1566년 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어 1569년(선조 2)에 좌부승지·대사간, 38세 1572년에 이조참의를 지내면서 전배(前輩) 사류와 교유가 많았다.
명종대 소윤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전배들은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등장한 김효원(金孝元) 등의 후배(後輩)들은 급진적으로 척신정치의 유제를 척결하고자 했으므로 전배들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때 이조정랑 오건(吳健)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신진사류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던 김효원을 천거하자, 심의겸은 그가 일찍이 윤원형의 집에 기거하면서 아부했다고 하여 임명을 반대했다.
결국 1574년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었는데 1575년에 심의겸의 아우 충겸(忠謙)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이번에는 거꾸로 김효원이 반대했다.
이같은 대립은 전·후배 사이의 대립으로 확대되었으며, 결국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사림은 2개의 당파로 나누어졌다.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었던 까닭에 심의겸파를 서인으로 불렀으며, 김효원의 집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김효원파를 동인이라고 불렀다.
그해에 동서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것을 우려한 이이(李珥)의 상소로 김효원과 더불어 외직으로 밀려나, 개성유수·전라감사를 지냈다. 그뒤 사직하고 파산(破山)에 내려가 있다가 1580년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판과 함경감사 등을 지냈다.
북인 서산정씨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았을 때 이이의 변호로 무사했으나, 이이가 죽은 뒤 1584년 동인의 득세로 파직당했다. 청양군(靑陽君)에 봉해졌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북인(대북) 서산정씨 정인홍 1535(중종 30) 합천~ 1623(인조 1).
산림(山林)으로서 선조·광해군 대에 북인·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며 정국을 주도했다.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菴).
아버지는 윤(倫)이다.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우옹(金宇?) 등과 함께 조식에게 수학하고 그의 수제자로서 학통을 이어받았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과거를 포기했다. 39세 1573년(선조 6) 김우옹의 천거로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 황간현감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고 1581년 장령이 되었으나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를 축으로 한 서인계에 밀려 50세1584년에 낙향했다.
55세1589년 기축옥사로 최영경·이발(李潑) 등 조식학파가 탄압을 받으면서 이황학파와 결별하고 북인을 형성했다.
58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문 수학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 등과 함께 성주·고령·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퇴, 경상우도를 방어했으며, 이를 계기로 조식학파는 경상우도에서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고 중앙정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68세 1602년 대사헌을 제수받았으나 기축옥사를 일으켰던 서인과 이를 방관했던 남인을 배제하고자 이들과 치열히 다투다가 수개월 후 낙향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산림으로서 영향력만 행사했다.
74세1608년 영창대군과 광해군을 둘러싼 후사문제로 북인이 대북·소북으로 대립하게 되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했다가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듬해 영변에 유배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유배가 풀린 후 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 대북의 정권 주도를 지원하고 대북의 고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후 조식과 조식학파의 학문적 위상 강화작업을 활발히 추진하여 조식의 문묘종사를 추진하는 한편,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학문을 비판하고 이들의 문묘종사를 저지했다. 이 일로 8도의 유생들에게 탄핵을 받고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되는 등 큰 파문을 일으켰다.
79세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지원하는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주장했으나 영창대군의 축출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84세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논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사임했다.
89세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서인에게로 넘어간 후 광해군 정권의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
창녕성씨 성혼 : 1535(중종 30)~ 1598(선조 31)
덕수이씨 이율곡: 1536(중종 31)~ 1584(선조 17)
연일정씨 정철: 1536(중종 31)~ 1593(선조 26) 경기 강화.
국문학사에서 해남윤씨 윤선도· 밀양박씨 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이다.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연일정씨가 된 누이를 보러 동궁(東宮)에 자주 드나들어 명종(明宗)과 친했다.
10세 때인 1545년(인종 1)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부친은 유배를 당했다가 1551년(명종 6)에 풀려났다. 이후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았다.
양응정·임석천·김인후·송순·기대승 등에게 수학하고, 이이·성혼·송익필 등과 교유했다.
27세 1562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명종으로부터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으나 처남을 살해한 경양군(景陽君)의 처벌문제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자세를 고집하여 명종의 뜻을 거슬려 말직에 머무르다 32세 1567년에 지평이 되었다. 이어 곧 북관어사가 되었으며
33세 1568년에는 이이와 같이 독서당(讀書堂)에 피선되고 수찬·좌랑·종사관·교리·호남어사 등을 지냈다.
36세 1571년 부친상을, 1574년 모친상을 당하고 주로 경기도 고양에서 지냈다.
39세 1575년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일로부터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분쟁에서 서인의 편에 가담했다. 분쟁에 휘말려 고향인 전라도 창평에 내려와 있다가 42세 1578년에 조정에 다시 나와 장악원정·직제학·승지 등을 지냈다.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행뢰사건(行賂事件)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탄핵을 입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44세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강원도에 1년 동안 머무르면서 〈관동별곡〉과 시조 16수를 지었다. 1581년에 병조참지·대사성을 지내다 노수신에의 비답(批答)이 논핵(論劾)에 가깝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 창평으로 돌아갔으나 곧 전라도관찰사를 제수받아 1582년까지 1년간 역임했다. 도승지·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그곳의 시폐(時幣)를 상소로 올렸다.
47세 1583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기주실의'(嗜酒失儀)하고 '강편기극지인'(剛偏忌克之人)이라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가 올려지는 등 논핵을 당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584년에 대사헌을 제수받고 총마(寵馬)를 하사받아 총마어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49세 1585년 양사(兩司)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했다.
이후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면서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53세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특배되어 최영경의 옥사를 다스렸다. 1590년(선조 23) 좌의정이 되고, 인성부군(寅城府君)이 되었다.
55세 1591년 이산해의 배후책동에 빠져 건저(建儲)를 하려 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리고 '대신으로서 주색(酒色)에 빠졌으니 국사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가 빗발쳐 파직된 뒤에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유배생활을 했다.
56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석방논의를 해 5월에 풀려났다. 평양에 있는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했다. 관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다가 1593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강화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주 근처 관동(寬洞)에 산소와 사당이 있다.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남양홍씨 홍성민 1536(중종 31)~ 1594(선조 27).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에게 수학했다.
26세 1561년(명종 16) 진사시에 합격했고, 29세 156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교리를 지냈다.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대사간·호조참판·부제학·예조판서·대사헌을 역임했다. 1575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가 종계변무(宗系辨誣)의 노력을 했고, 1588년 종계변무가 이루어지자 1590년 그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의 거두 정철(鄭澈)이 실각하자 이해수(李海壽) 등과 함께 파직당해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사로 풀려나 대제학·호조판서를 역임하다가 전란중 병사했다.
저서로 〈졸옹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서인 해평윤씨 윤근수 1537(중종 32)~ 1616(광해군 8).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변(?)이며, 형은 영의정 두수(斗壽)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22세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에 뽑힌 뒤, 주서·봉상시주부·연천군수 등을 지냈다. 1562년 부수찬으로 있으면서 조광조(趙光祖)의 복권을 상소했다가 과천현감으로 밀려났다.
이듬해 형 윤두수가 소윤파 권신(權臣) 전주이씨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에 반대한 일로 함께 파직되었다.
1565년 부교리로 재기용되었고, 이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1566년 교리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사인·집의·응교·동부승지·대사성 등을 지냈다. 1573년(선조 6)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하고 돌아온 뒤, 부제학·대사헌·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42세 1578년 뇌물을 받았다는 동인(東人) 계열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강릉부사·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을 지냈다. 1589년 공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제(明帝)로부터 종계(宗系)를 수정한 〈대명회전 大明會典〉을 받아왔다. 귀국한 뒤 형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55세 1591년 우찬성에 올랐으나,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하다가 유배되자 형 두수와 함께 파면되었다.
56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재기용되어 왕을 호종(扈從)했으며, 문안사(問安使)·원접사(遠接使)·주청사 등에 임명되어 여러 차례 명나라를 왕래하며 명과의 외교를 맡았다. 1595년 좌찬성에 오르고, 1597년에는 왕비를 수안(遂安)으로 시종한 뒤 판의금부사를 겸했다. 1604년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64세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廟號)를 조(祖)라고 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황·조식(曺植)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성혼(成渾)·이이(李珥) 등과 사귀면서 주자의 학문을 깊이 연구했으며, 당시 명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양명학에 대해서 유해무익한 것으로 배척하고,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거장(巨匠)으로 손꼽혔으며, 특히 그의 글씨는 영화체(永和體)라 하여 격찬을 받았다. 저서로는 〈월정집〉·〈월정만필 月汀漫筆〉·〈사서토석 四書吐釋〉·〈마한사초 馬韓史抄〉·〈한문질의 漢文質疑〉·〈송도지 松都志〉·〈조천록 朝天錄〉·〈조경창수 朝京唱酬〉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양주의 〈이판서윤경묘비 李判書潤慶墓碑〉, 상주의 〈윤연령부인박씨갈 尹延齡夫人朴氏碣〉 등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남인 의성김씨 김성일 1538(중종 33)~ 1593(선조 26).
본관은 의성.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아버지는 김진(璡)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27세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31세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검열·대교 등을 거쳤다.
그뒤 부수찬·정언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40세 1577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했다. 그뒤 함경도순무어사·사간·황해도순무어사를 지냈으며, 나주목사로 있을 때는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조광조·이황 등을 제향했다.
53세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이듬해 돌아왔다. 이때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경고했으나, 동인인 그는 일본의 침략 우려가 없다고 보고하여 당시의 동인정권은 그의 견해를 채택했다.
55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잘못 보고한 책임으로 처벌이 논의되었으나 동인인 유성룡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에 임명되었다. 그뒤 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 진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학문적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저서에 〈상례고증 喪禮考證〉·〈해사록 海錄〉·〈학봉집〉이 있으며,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했다.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대북 : 육북>한산이씨 이산해 1539(중종 34)~ 1609(광해군 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이색(李穡)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之蕃)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산해'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산해관(山海關)에서 그의 잉태를 꿈꾸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之?)에게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장안의 명인들이 그의 글씨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하며 명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
7세 1545년 을사사화 때 친지들이 화를 입자 보령으로 이주했다.
23세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경복궁 대액(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병조좌랑·수찬을 역임했으며, 27세 1565년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이조정랑·직제학·동부승지·대사성·도승지 등을 지냈다.
40세 1578년(선조 11) 대사간으로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어 대사헌·형조판서·이조판서·우찬성 등을 지냈다.
50세 1588년 우의정이 되었는데, 이무렵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했다. 일찍이 그는 남사고(南師古)와 송송정(宋松亭)에 앉아 서쪽으로 안령(鞍嶺)과 동쪽으로 낙봉(駱峯)을 가리키며 뒷날 조정에 반드시 동서의 당(黨)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이는 그가 실제로 동서분당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51세 158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이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3세 1591년 아들 이경전(慶全)을 시켜 정철(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강계로 유배시키고, 그밖의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시키거나 귀양 보내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했다.
54세 1592년 왜적이 침입하도록 했다는 탄핵을 받아 평해에 유배되었다가
57세 1595년에 영돈녕부사로 복직되었다. 이후 대북파의 영수로서 61세 1599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63세 1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환배(還拜)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문장에 능하여 선조대 문장8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김시습(金時習)의 문집 서문을 썼으며, 평해 유배시절에는 수많은 시문을 지었다. 선조가 죽은 후에는 선조의 지문(誌文)을 지었다.
서화는 초서(草書)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으며, 산수묵도(山水墨圖)에도 뛰어났다. 안강의 이언적신도비명(李彦迪神道碑銘)과 영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를 썼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령김씨 김면 1541(중종 36)~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고령.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庵). 아버지는 경원부사 김세문(世文)이다. 일찍이 조식(曺植)에게 사사하고,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명종 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선조 즉위초에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조종도(趙宗道)·곽준(郭?)·문위(文緯) 등과 함께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牛旨)에서 대치하다가 지례(知禮)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역습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고, 또 무계(茂溪)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11월에 의병대장의 호를 받았다.
53세 1593년 1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에 진주하여 선산(善山)의 적을 격퇴할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병에 걸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07년 이조판서가 더해졌다. 고령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송암실기〉가 있다.
남인 풍산유씨 유성룡 1542(중종 37)~ 1607(선조 40).
임진왜란중 민정(民政)·군정(軍政)의 최고관직을 지내면서 전시 조정을 이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를 재정비·강화하기 위한 응급책으로서 각종 시무책(時務策)을 제기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운암(雲巖).
할아버지는 군수 유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승지 유중영(仲?)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3세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에 올랐고, 25세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대교, 전적을 거쳐 28세 1569년(선조 2) 공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29세 1570년 부수찬·수찬을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오르고, 30세 1571년 병조좌랑, 34세 1575년 부교리·이조정랑·헌납, 36세 1577년 검상·사인·응교, 38세 1579년 직제학·이조참의·동부승지 등을 두루 지냈다. 40세 1581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무빙차십조 無氷箚十條〉를 올리고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초진(抄進)했다. 이듬해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대사헌 등을 지내고, 42세 1583년 왕명으로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대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1584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다음해 〈포은연보 圃隱年譜〉를 교정하고 45세 1586년에는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했다. 그뒤 형조판서·대제학·병조판서 등을 거쳐 49세1590년 우의정에 오르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책록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하는 한편 〈제승방략 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예전처럼 진관제도(鎭管制度)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한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했다.
51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책을 맡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의 피난길에 따라갔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다시 등용되어 왕명으로 명(明)의 장수 임세록(林世祿)을 접대하고, 의주에서는 2차례 계(啓)를 올려 군사모집, 화포제조, 난민(亂民)의 초무(招撫) 등을 건의했다.
평안도도체찰사에 부임하여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이듬해 호서·호남·영남의 3도도체찰사에 올랐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한 뒤 일본군과 화의를 모색하자 이에 반대, 화기제조·성곽수축 등 군비확충과 군사양성을 주장했다. 환도한 뒤에는 훈련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53세 1594년 〈청훈련군병계 請訓練軍兵啓〉·〈청광취인재계 請廣取人才啓〉·〈전수기의십조 戰守機宜十條〉 등을 올려 전시대책과 시무책을 건의하고, 훈련도감의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했다.
그뒤에도 4도도체찰사가 되어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군병을 교련하는 등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군비보완에 힘썼다.
56세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했다 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당했다.
59세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63세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사회·경제 시책은 대부분이 임진왜란 과정에서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과 전후수습에 동원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되었다. 그중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민심수습책으로 그는 임란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신분에 따라 수관(授官)·면천(免賤)·면역(免役)·부과(赴科) 등 파격적인 포상제를 실시하고, 군사비 이외의 기출을 최대한 억제하여 공물(貢物)·진상(進上) 등을 경감해주는 등 백성에게 실제 혜택이 있게 하여 파탄·와해된 민심을 수습해야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제 아래 문벌에 관계없이 각 방면의 인재를 등용하며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병력을 확보하는 등 인적 자원을 동원할 것을 제시했다. 또한 공물·둔전에서 나오는 양곡(糧穀), 노비의 신공(身貢) 등을 미곡으로 대납(代納)하게 하고, 파격적인 포상을 대가로 모속(募粟)을 행하며, 소금을 구워 곡물로 바꾸거나 중강개시(中江開市)를 통해 중국의 곡물을 사들이는 등의 방법을 통해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를 확보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전시군량확보를 위한 응급책으로서의 성격을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16세기 이래의 공물제(貢物制)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중 그가 제기한 국방대책은 민심수습과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을 위한 사회·경제 시책 속에서 구상되었다. 그는 중앙군으로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정병을 양성하는 한편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 아래 거주지 촌락단위로 지방군인 속오군을 편성하는 등의 군사기구 개편을 주장했다. 이 구상은 난민·유민(流民)을 구제하기 위한 둔전론(屯田論)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즉 훈련도감의 경우 정병으로 양성하기 위한 군인 외에 서울에서 1만 명을 더 모집하여 5영(五營)을 두고, 각 영에 2,000명을 배치하여 해마다 반수는 성중(城中)에 남아 연습하고 나머지는 성외에서 빈 땅을 골라 둔전을 만들고 윤번으로 교대시켜 군량공급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종전의 양민만이 아니라 양반과 천인(賤人)까지도 편입시키는 속오군도 둔전의 설치와 표리관계에 있었다. 그가 제시한 둔전책은 전란으로 동요하고 있는 농민을 안정시켜 무농경작(務農耕作)하게 하는 방안으로 유리민이나 일본군 점령하의 농민을 둔전 가능지역에 모아 정부에서 소·종자·농기구 등을 지급하고 둔전을 경작시켜 궁극적으로는 주민보호·군량확보·기민구제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는 스승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다. 또한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그는 이황처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이기로 분석하지 않았지만, 도심을 한결같이 지켜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일찍부터 양명학을 연구했으나 정통 성리학자로서 이를 수용하지는 않았으며, 양명학이 불교의 선학(禪學)에서 연유한 것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비판했다.
유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지(知)로,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을 행(行)으로 병립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어느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서애집〉·〈징비록 懲毖錄〉을 비롯하여 〈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운암잡기〉 등이 있으며, 편서로 〈대학연의초〉·〈포은집〉·〈퇴계선생연보〉·〈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 精忠錄〉·〈효경대의 孝經大義〉 등이 있다.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병산서원(屛山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군위 남계서원(南溪書院), 용궁 삼강서원(三江書院), 의성 빙산서원(氷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남인 단양우씨 우성전 1542(중종 37) 서울~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 아버지는 현령 우언겸(彦謙)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김성일(金誠日)·이봉춘(李逢春)·정사성(鄭士誠) 등과 교유했다.
27세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봉교·수찬을 거쳐 35세1576년 수원현감을 지냈다. 40세 1581년 한때 파직되었다가 장령·사옹원정·응교·의정부사인 등을 역임했다.
동서분당(東西分黨) 때에는 김효원(金孝元)·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동인을 대표했으며, 그뒤 이발(李潑)과 사이가 벌어져 그는 남산(南山)에 살아서 남인으로, 이발은 북악(北岳)에 살았기 때문에 북인으로 나누어졌다.
50세 1591년 정철(鄭澈)의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했다.
51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추의군(秋義軍)이라 칭하고, 강화도에 들어가 김천일(金千鎰) 등과 합세했다. 병선을 이끌고 적의 진로를 차단했으며, 행주에서는 권율(權慄)을 지원하기도 했다. 전공으로 대사성에 기용된 뒤 남하하는 왜적을 경상남도 의령까지 추격했으나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으로 후송된 뒤 죽었다.
역상(易象)과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퇴계선생언행록 退溪先生言行錄〉·〈역설 易說〉·〈이기설 理氣說〉·〈계갑일록 癸甲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서인 배천조씨 조헌 1544(중종 39) 경기 김포~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의병장.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다. 정치적으로는 기호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을 사숙했고, 김황(金滉)·이지함(李之?)에게도 배웠다.
22세 1565년(명종 20) 성균관에 입학했다. 24세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가 되었다. 28세 1571년(선조 4) 홍주목교수(洪州牧敎授)에 임명되었는데, 이 시절부터 이지함과 교유하고 그의 권유에 따라 성혼과 이이를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았다.
1572년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궁중불사(宮中佛寺)의 봉향(封香)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삭직되었고, 이듬해 교서관저작이 되어 다시 같은 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1574년 5월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을 따라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11월 귀국하여 시무(時務)에 관한 '8조소'(八條疏)를 올렸다. 1575년 교서관박사에 오르고 이어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쳤다. 그뒤 통진현감이 되었으나, 내노(內奴)의 작폐를 다스리다 장살(杖殺)한 죄로 탄핵을 받아 34세 1577년 부평으로 귀양갔다. 1580년 풀려나 이듬해 공조좌랑·전라도도사에 임명되었고, 1582년 보은현감이 되었다.
41세 1584년 대간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옥천의 밤티(栗峙)에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1586년 다시 공주목교수 겸 제독관(公州牧敎授兼提督官)에 임명되었으나, 정여립(鄭汝立)이 나라를 그르치고 있음을 주장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는 등 5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려 받아들여지지 않자 옥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46세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동인의 전횡과 시폐를 지적하다가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으나, 그해 11월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빌미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났다.
1591년 조선에 온 겐소[玄蘇] 등의 일본사신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청하여 조선침략의 속셈을 드러내자, 일본사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하고 영·호남의 왜적방비책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9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아 차령(車嶺)에서 문인 김절(金節) 등과 함께 왜군을 물리쳤다.
그후 다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과 같이 청주성을 수복했다. 이어 왜적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으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과의 의견대립과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 색인 : 금산전투).
이들을 이끌고 금산으로 가서 8월 18일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인원과 무기의 열세로 모두 전사했다.
그는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로서, 평생을 강의(强毅)와 직언(直言)으로 일관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론보다도 실행(實行)과 실공(實功)을 지향했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대체로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여 이(理)의 일차성을 인정하면서도 기(氣)의 존재를 중시했다.
한편 그는 국내외의 형세를 명확히 판단하고 그에 대한 절실한 대응책을 강구하여 여러 가지 경세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행적은 조선 후기 서인계 학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리사상으로 전개되어,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金尙憲)이나 송시열(宋時烈), 그리고 한말의 최익현(崔益鉉) 등이 모두 그를 숭상했다.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4충신으로 불린다.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고,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었다. 옥천 표충사(表忠祠), 배천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저서로는 〈중봉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함, 호는 동암(東菴), 본관은 광산이다. 동인 강경파의 영수였다.
정여립의 옥사에 연루시켜 그의 80대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사살하여 동인들의 서인에 대한 분노, 원한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는 동인의 남북 분당으로 이어진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동인에 가담한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정랑에 오른 후 당상관이 되어 부제학, 대사간을 역임하며 동인 강경파의 영수가 되었다.
정여립의 옥사에 연루되자 대사간직을 스스로 사퇴, 대죄하다가 그가 관련이 있어서 사퇴한 것이라는 서인의 날조와 탄핵으로 의금부로 하옥되었다. 이때 국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이때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장살되어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악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동인 중진 문신 윤의중의 사위로 고산 윤선도의 고모부였다. 정여립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음에도 연루되어 온 가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에 그의 처조카 윤선도는 서인에 대한 뿌리깊은 원한과 불신을 품게 되었다.
그와 동시대에 동명이인인 또다른 이발이라는 인물도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정여립의 옥사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여산송씨 송익필이라는 설이 있다
전주이씨 이준 1545(인종 1)~ 1624(인조 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평숙(平叔), 호는 뇌진자(懶眞子)·서파(西坡). 아버지는 이유정(惟貞)이다.
24세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29세 1573년 주서로 있을 때 한어(漢語)의 해독에 능통했다. 그후 정언·헌납 등을 거쳐 43세 1587년 의주목사로 재직중 명의 사신을 영접할 때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45세 1589년 승지로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의 죄인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으로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48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로서 역참(驛站)과 군량의 조달 등을 담당했고, 50세 1594년 한성부좌윤을 거쳐 춘천부사·예조참판·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56세 1600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남양홍씨 홍여순(洪汝諄)의 당파라고 하여 파직되었다. 안동부사를 거쳐 60세 1604년 부경사신(赴京使臣)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경주부윤·공조판서·개성유수·좌참찬 등을 지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동래정씨 정여립 1546(명종 1)~ 1589(선조 22).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과 같은 당시로는 혁신적인 사상을 표방했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
아버지는 첨정(僉正) 정희증(希曾)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22세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고, 25세1570년(선조 2)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38세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에 올랐다.
처음에는 서인으로서 이이와 성혼(成渾)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면서 이이·성혼·박순(朴淳)을 비판했다. 이에 따라 서인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고 선조의 눈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1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1587년에는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44세 1589년 한강이 언 틈을 타서 입경, 대장 신립(申砬) 등을 죽이고 병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의 고변(告變)으로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고 그도 관군에게 쫓기게 되었다.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했으나, 포위망이 좁혀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실제로 그가 대동계를 이용하여 반란을 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서는 조작설과 역모설의 양설이 있다.
정철(鄭澈) 등 서인의 주도로 사건이 조사되면서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최영경(崔永慶) 등 동인의 주요인물이 거의 연루·제거되었으며 이때 숙청된 인사는 1,000여 명에 달했다. 이 기축옥사로 동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고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전하는 언동을 통해 볼 때 조선왕조를 지탱하고 있던 주자학적 가치관과는 적지않은 차이를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라는 주장과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이를 보여준다. 또한 민중군경(民重君輕)하기 때문에 왕위계승은 혈통보다는 자격여부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 요(堯)·순(舜)·우(禹)로 이어지는 왕위의 선양(禪讓)을 이상적인 모범으로 간주했다.
이는 봉건왕조의 기본적 가치관의 하나인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그의 '모반'이 조작된 것이라면 동인과 서인 사이의 정쟁뿐만 아니라 이처럼 '위험한' 사상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후대 실학자들의 민권사상에 계승되었다.
남인 전주이씨 이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