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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기우제(祈雨祭)
정의
가뭄이 들었을 때 비 오기를 빌기 위하여 지낸 제사.
개설
기우제는 오례의(五禮儀) 체제에서 기고제(祈告祭)에 속하는 비정기(非定期) 제사였다. 시기적으로는 대개 4월에서 6월에 집중되었는데, 비가 올 때까지 3~4일 간격으로 계속 지냈다. 기우제는 그 필요성이 절박하였기 때문에, 도교·불교·무속 등의 제반 의례를 유교의 틀 안에 포섭하려고 노력한 조선시대 사전(祀典) 중에서 무속적인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
연원 및 변천
기우제는 고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393년(태조 2)에 처음으로 지냈다. 그 뒤 1474년(성종 5)에 예조(禮曹)에서 기우 의례 9조목을 정리하여 올렸다. 1704년(숙종 30)에는 기우제의 12단계 차례를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고종 때까지 기우제의 정식 절차로 유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1474년 예조에서 올린 기우 의례 9조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종묘(宗廟)·사직(社稷)·북교(北郊)·한강(漢江)·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우사단(雩祀壇)에 제사한다. ② 태일(太一)과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에 초제(醮祭)를 설행한다. ③ 한강 두 나루에서는 침호두(沈虎頭)를 시행하며, 도교의 무리로 하여금 「용왕경(龍王經)」을 읽게 하고, 박연(朴淵)에서 침호두를 시행한다. ④ 경성의 각호(各戶)에서는 문(門)에 제사하고 분향한다. ⑤ 모화관(慕華館) 연못가에서 석척(蜥蜴)을 써서 기우한다. ⑥ 동방에는 청룡, 남방에는 적룡, 중앙에는 황룡, 서방에는 백룡, 북방에는 흑룡을 만들어 기우제를 지낸다. ⑦ 저자도(楮子島)에서 화룡제를 지낸다. ⑧ 북문을 열고 남문을 닫는다. ⑨ 북을 치지 않는다[『성종실록』 5년 윤6월 10일].
이 기록을 통해, 조선전기의 기우 의식에는 유교적인 기고제(祈告祭) 외에도 도교와 연관된 제사나 용신과 관련된 무속적인 제례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방식도 신에 대한 강요 의례의 형식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숙종대에 만들어진 기우 12제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삼각산, 목멱산, 한강에 3품관을 보낸다. ② 용산강(龍山江), 저자도에 재신(宰臣)을 보낸다. ③ 풍운뇌우단·산천단·우사단에 재신을 보낸다. ④ 북교에 재신을 보내고 사직에 중신(重臣)을 보낸다. ⑤ 종묘에 중신을 보낸다. ⑥ 삼각산·목멱산·한강에 근시(近侍)를 보내고 침호두를 시행한다. ⑦ 용산강·저자도에 중신을 보낸다. ⑧ 풍운뇌우단·산천단·우사단에 중신을 보낸다. ⑨ 북교에 중신을 보내고 모화관 연못가에 무관(武官)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석척동자(蜥蜴童子)로 보내 기우하고, 여염에서는 병류(屛柳)를 행한다. ⑩ 대신을 보내 사직에 제사하고 경회루 연못가에 무관 가선대부를 석척동자로 보내 기우한다. ⑪ 대신을 종묘에 보내고, 무관 가선대부를 춘당대 연못가에 석척동자로 보내 기우하고,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며, 시장을 옮긴다. ⑫ 오방토룡제(五方土龍祭)를 지내고, 양진(楊津)·덕진(德津)·오관산(五冠山)·감악(紺岳)·송악(松岳)·관악(冠岳)·박연·화적연(禾積淵)·도미진(渡迷津)·진암(辰巖)에서 분시(焚柴)하던 것을 모두 본도(本道)에서 설행한다[『숙종실록』 30년 6월 26일].
조선시대에 국가적으로 시행한 기우제 가운데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등재되지 않은 것들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음사(淫祀)’에 가까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조선왕조실록』에는 주로 사전(祀典)에 포함된 국행 기우제와 관련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무당을 동원한 무속 국행 기우제도 있었으며[『광해군일기』 10년 윤4월 21일], 조선초에는 불교 승려들을 동원하여 비 오기를 빌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3년 7월 2일].
참고문헌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작과비평사, 2009.
최종성, 『『기우제등록』과 기후의례-기우제·기청제·기설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오인택, 「숙종대 국행 기우제에 나타난 한재 대응방식의 정치성」, 『역사학연구』29, 2007.
이욱, 「조선전기 유교국가의 성립과 국가제사의 변화」, 『한국사연구』118, 2002.
길례(吉禮)
정의
오례(五禮)의 하나로 상례(喪禮)와 장례(葬禮) 등의 흉례(凶禮)를 제외한 모든 제사 의식.
개설
『주례(周禮)』「대종백(大宗伯)」에 “길례로써 나라의 귀신을 제사하고, 흉례로써 나라의 상사(喪事)를 슬퍼하고, 빈례(賓禮)로써 다른 나라들과 친하고, 군례(軍禮)로써 나라들을 화동(和同)하며, 가례(嘉禮)로써 만백성을 친한다.”라고 했는데, 제사는 대상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천신(天神)에게 지내는 제사를 사(祀), 지기(地祇)에게 지내는 제사를 제(祭), 인귀(人鬼)에게 지내는 제사를 향(享), 문선왕(文宣王)공자(孔子)에게 지내는 제사를 석전(釋奠)이라 하였다.
공가(公家)의 길례, 즉 왕가 혹은 국가적인 의미의 길례에 대한 규정과 내용은 『세종실록』 「오례」, 『국조오례의』,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대한예전(大韓禮典)』, 『춘관통고(春官通考)』, 『대전회통(大典會通)』 등 법전류와 『종묘의궤(宗廟儀軌)』,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등 의궤류에 자세히 나온다.
길례는 크게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된다. 대사는 희생으로 소·양·돼지를 바치는 대뢰(大牢)로 지내는 것이다. 소사는 양만을 쓰는 소뢰(小牢)로 지내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는 대사로 원구(圓丘)·방택(方澤)·사직(社稷)·태묘(太廟)·별묘(別廟)·제릉(諸陵)·경령전(景靈殿)을 들었다. 그러나 『국조오례의』에 오면 원구·방택·경령전은 제외되고 별묘나 제릉은 중사나 소사가 된다.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에는 대사로 사직·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중사에는 풍운뇌우(風雲雷雨)·악해독(嶽海瀆)·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문선왕·역대 시조가 있고, 소사에는 영성(靈星)·노인성(老人星)·마조(馬祖)·명산대천·사한(司寒)·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마제(禡祭)·영제(禜祭)·포제(酺祭)·칠사(七祀)·둑제[纛祭]·여제(厲祭)가 있다. 사직·종묘·풍운뇌우·악해독·명산대천·우사에 지내는 기우제는 모두 소사이다. 속제(俗祭)로 지내는 문소전(文昭殿)·진전(眞殿)·의묘(懿廟)·산릉(山陵)은 모두 소사이고, 주현(州縣)의 사직·문선왕·포제·여제·영제도 모두 소사이다.
1705년(숙종 31) 대보단(大報壇)이 생겨 대사로 된다.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창덕궁 금원(禁苑) 옆에 설치하였다[『숙종실록』30년 12월 21일]. 처음에는 신종의 위패만 존치하여 제사지냈으나, 영조 때에 명나라 태조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까지 합사(合祀)하였다.
대한제국이 되면서 환구단(圜丘壇)이 생겨 대사로 된다. 경모궁(景慕宮)·관왕묘(關王廟)와 역대 군왕이 중사가 된다. 경모궁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모신 곳이다. 1776년(정조 즉위) 8월에 경모궁이라 하고 정조가 현판 글씨를 썼다. 관왕묘는 관우(關羽)를 신앙하기 위하여 건립된 묘당(廟堂)으로 관성묘(關聖廟)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일반 서민에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고, 숙종 때에 관왕묘 참배 의절이 만들어졌다.
공자를 모시는 문묘(文廟) 이외에 공자·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啓聖祠), 관학 학생으로 절의가 있었던 4현을 모시는 사현사(四賢祠), 단종에게 충신이 되었던 사람들을 모시는 영월의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 등이 소사에 첨가된다. 그리고 여제·둑제 이외에 성황(城隍)이 소사로 첨가된다.
내용 및 특징
1) 사직
사직(社稷)은 종묘와 함께 국가의 상징으로, 사(祀)는 토지신을, 직(稷)은 곡신(穀神)을 의미한다. 농업을 기본으로 하던 조선시대에 토지와 곡식의 중요성은 다른 것에 우선시되었다. 따라서 사직에 대한 제사도 우선적으로 강조되었다. 사직에 대한 의식과 관련해서 『국조오례의』에서는 춘추급납제사직의(春秋及臘祭社稷儀), 춘추급납제사직섭사의(春秋及臘祭社稷攝事儀), 기고사직의(祈告社稷儀), 주현춘추사직의(州縣春秋社稷儀), 주현기고사직의(州縣祈告社稷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는 풍년을 비는 기곡사직의(祈穀社稷儀)가 대사로 첨가되었다. 이는 황제가 지내는 것이라 논란이 많았으나 백성을 위한다는 의미로 지냈다. 영조대에는 기곡사직섭사의도 소사에서 대사로 승격되었다.
이밖에도 광의의 사직제로 볼 수 있는 여러 제사 의식이 마련되었다. 특정한 산이나 강에 대한 의식으로 제삼각산의(祭三角山儀), 제목멱의(祭木覓儀), 제한강의(祭漢江儀), 제주현명산대천의(祭州縣名山大川儀) 등을 비롯해 신농씨(神農氏)에게 드리는 제사인 향선농의(享先農儀), 양잠과 관련된 향선잠의(享先蠶儀), 풍우의 순조로움을 비는 사풍운뇌우의(祀風雲雷雨儀), 우사의(雩祀儀) 등의 의식이 마련되었다.
2) 종묘
사직과 함께 길례 중 중요한 것이 종묘에 대한 제사이다. 역대 왕과 왕후, 추존 왕과 왕비 등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 드리는 제사는 대사의 하나이다.
종묘에 드리는 제사는 체(禘)·협(祫)이라 하여, 천자는 5년에 한 번 체제(禘祭)를, 제후는 3년에 한 번 협제(祫祭)를 지냈다. 『국조오례의』에는 종묘에 드리는 제사와 관련해서, 사시급납향종묘의(四時及臘享宗廟儀), 친향기고종묘의(親享祈告宗廟儀), 사시급납향종묘섭사의(四時及臘享宗廟攝事儀), 속절급삭망향종묘의(俗節及朔望享宗廟儀), 천신종묘의(薦新宗廟儀) 등이 규정되었다.
그런데 1421년(세종 3) 목조를 조천(祧遷)하면서 영녕전(永寧殿)을 세우고 매년 봄가을로 제사 지내게 되니, 3년에 한 번 조천한 조상을 모두 모시고 지내는 협제를 지낼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없던 춘추향영녕전의(春秋享永寧殿儀)가 『세종실록』 「오례」에 처음 생겨 『국조오례의』에서 정식 제사가 되었다.
조선후기 숙종대에는 묘현의(廟見儀)라 하여 가례를 올린 후에 왕비와 왕세자빈이 종묘와 영녕전을 배알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원래 여자는 종묘에 출입할 수 없었는데 묘현의를 시행하느라 숙종 비 인현왕후(仁顯王后)와 당시 세자빈이 처음 종묘에 알현하였다. 이에 따라 왕세자·왕세제·왕세손, 그리고 왕세자빈·왕세제빈·왕세손빈이 종묘와 영녕전에 배알하는 의식이 생기고, 『국조속오례의』에는 왕비알종묘영녕전의(王妃謁宗廟永寧殿儀)와 왕세자빈알종묘영녕전의(王世子嬪謁宗廟永寧殿儀)가 추가되었다.
조선전기에는 문소전이라는 원묘(原廟)를 만들어 국왕의 가묘(家廟) 같은 형태로 태조와 직계 4대를 제사지냈다. 이외에 연은전(延恩殿)이라 하여 성종 아버지 덕종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이중묘라는 혐의가 있어 중종대부터 폐지가 주장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폐지되었다. 『국조오례의』에 문소전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인 사시급속절향문소전의(四時及俗節享文昭殿儀)·삭망문소전의(朔望文昭殿儀)·친향의묘의(親享懿廟儀) 등이 있다.
3) 능침
길례에는 이 밖에도 국왕과 왕후의 능침에 제사 혹은 참배의식인 친향제릉의(親享諸陵儀), 기신친향제릉의(忌晨親享諸陵儀), 사시급속절삭망향제릉의(四時及俗節朔望享諸陵儀), 배릉의(拜陵儀) 또는 행릉의(幸陵儀)와 왕세자가 능침을 참배하는 의식인 왕세자배릉의(王世子拜陵儀) 등이 있다. 또한 공자 및 유학에서 사표가 되는 인물들의 위패를 모신 문묘에 대한 제사 의식인 춘추석전문선왕의(春秋釋奠文宣王儀), 문선왕삭망전의(文宣王朔望奠儀) 등이 있다.
4) 묘
조선후기 숙종대에 계성사와 사현사가 생겨 제사가 행해졌다. 계성사는 중국의 5성(聖)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사당으로 공자의 아버지 제국공(齊國公) 공숙량흘(孔叔梁紇), 안자의 아버지 곡부후(曲阜侯) 안무유(顔無繇), 증자의 아버지 내무후(萊蕪侯) 증점(曾點), 자사의 아버지 사수후(泗水侯) 공리(孔鯉), 맹자의 아버지 주국공(邾國公) 맹격(孟激)이다.
사현사는 중국 진(晉)나라의 태학생 동양(董養), 당나라의 태학생 하번(何蕃), 송나라의 태학생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는 학행일치를 추구하는 심학화(心學化)된 조선 성리학을 공부하는 태학생들에게 학행일치를 실천했던 태학생들을 모델로 제시하는 사당이었다.
변천
조선시대 길례는 조선전기에는 주자성리학으로, 조선후기에는 조선성리학으로 체계화시키면서 변천하여 갔다. 종묘에서는 영녕전, 정전이 되는 태묘와 왕실 가묘 같은 원묘인 문소전으로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문소전은 이중묘라 하여 없어지고 종묘를 왕실 가묘로 정립하였다. 이는 혼례 후에 왕비나 세자빈이 종묘에서 묘현례를 하는 것으로 정립되었다.
사직에서는 조선전기에는 사직 대제를 정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사직 기곡제가 중요한 대사로 정립되는 것으로 변천해 갔다. 이와 더불어 대보단이 설치되어 조선 중화 의식을 대표하는 대사로 정립되었다. 이는 문묘에서 계성사, 사현사 등이 행해지면서 학행일치를 추구하는 조선후기 조선성리학의 의례를 반영하고 있었다.
의의
조선시대 길례는 제사의 형태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운영하는 의례였다. 국가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지내는 제사로 국가 공동체를, 학교에서는 문묘·향교·서원 등에 지내는 제사로 학문 공동체를, 지역에서는 산천·성황에 지내는 제사로, 집안에서는 문중·집안의 제사로 친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운영하였다. 이러한 의례는 조선전기에는 주자성리학으로, 조선후기에는 조선성리학으로 체계화시키면서 시대에 알맞게 정립하여 갔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대한예전(大韓禮典)』
『춘관통고(春官通考)』
『문헌비고(文獻備考)』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제사』, 국립민속박물관, 2003.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납제(臘祭)
정의
납일에 거행하는 제사.
개설
납제(臘祭)는 납향(臘享)이라고도 부른다. 납제와 납향을 구별하자면, 납제는 납일에 지기(地祇)에게 거행하는 제사인 반면, 납향은 인귀(人鬼)에게 지내는 제향이다. 그러나 납제와 납향은 서로 혼용되었고, 납향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특징
고대 주(周)나라에서는 세말(世末)에 한 해의 농사를 도와준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제(蜡祭)와, 선조에게 제사 지내는 납향이 있었다. 진한(秦漢) 이후 납향으로 통칭하였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맹동(孟冬)에 선조와 오사(五祀)에게 납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납향은 사냥[獵]으로 잡은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초기에는 사냥한 고기를 납향에 바치기도 하였지만[『태종실록』 9년 12월 10일], 이러한 관습은 곧 폐지되었다[『태종실록』 14년 11월 11일].
납일을 정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대개 동지부터 세 번째 오는 술일(戍日)이나 진일(辰日)을 납일로 정하지만, 조선에서는 동지를 지난 후 세 번째로 오는 미일(未日)을 납일로 정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사시제(四時祭)와 납향은 1년의 제사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에는 사시제와 납향을 합쳐 ‘시향(時享)’ 또는 ‘오향(五享)’이라 불렀다. 그리고 송(宋), 명(明), 고려 등에서도 사시제와 납향을 종묘의 대제(大祭)로 간주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사시제와 납향을 오향대제(五享大祭)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종묘에서 납제를 거행할 때에는 선왕과 선후 외에 배향공신(配享功臣)과 칠사(七祀)에게도 함께 제사지냈다. 그 밖에 사직, 경모궁, 영희전 등에서도 납향제를 거행하였다. 육상궁 등 생모(生母)를 위한 궁에서는 정조, 한식, 단오, 추석에 거행하는 사명일(四名日) 절제가 있지만 동지와 납향은 없다. 조선전기에 왕릉에서는 납향제를 거행하였지만 조선후기에는 폐지하였다.
참고문헌
이욱,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정제와 속제의 변용-』,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내무부사(內務府事)
정의
고종대 개화·자강(自强) 정책 추진 기구인 내무부 관서의 당상관급의 총칭.
개설
내무부는 갑신정변 이후 갑오개혁 이전까지 존속한 기관이다. 내무부에서는 왕이 주도하는 정국 운영과 개화·자강 정책을 비롯한 국가의 기무(機務)를 총괄하여 살폈다. 내무부는 궁내(宮內) 사무를 관장했던 최고의 국정 의결 기구였다. 내무부에는 당상관급으로 총리, 독판, 협판, 참의를 두어 내무부에 소속된 7사(司)를 관장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내무부사(內務府事)라 하였다. 각각 총리내무부사, 독판내무부사, 협판내무부사, 참의내무부사로 불렸다.
담당 직무
내무부는 총리대신을 수반으로 해서 정·종1품의 독판, 정·종2품의 협판, 정3품 당상(堂上)의 참의 등과, 배경에 구애 없이 선발된 주사(主事)와 부주사 등의 당하관(堂下官), 그리고 하위 관리직(管理職)으로 구성되었다.
1) 총리내무부사
총리대신은 당상관에게 각 사(司)의 사무를 보고받아 중요 사안을 결정·처리하는 내무부의 최고위직이다. 대체로 의정부의 정승이 총리대신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총리대신은 내무부의 명목상 총괄자로서 왕의 정책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이었다.
2) 독판내무부사
독판은 내무부 소속 7사의 업무를 총괄하는 실무 책임자였다. 각종 개화·자강 정책 추진 기구들이 내무부 소속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독판의 수가 늘어나 결국 각 사에 1명씩 배치되었다. 그 수는 변동이 있었으나 대체로 7명 전후였고, 1893~1894년에는 9~14명까지 확대되기도 하였다. 독판은 1887년(고종 24) 이후 민응식, 민영익, 민영환, 민영준 등 민씨 척족들이 차지하면서 군사와 재정 관련 부서의 직임을 겸직하였다. 내무부 독판직에 임명되었던 관리는 총 19명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여흥민씨를 비롯한 명문 양반 가문 출신이었고, 과거 통리기무아문과 통리군국사무아문 등에 근무한 경력자가 많았다.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일본과 미국의 근대 문물을 접해보지 못하였고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제에 대한 개혁 의지가 약한 보수적 관료들이었다.
3) 협판내무부사
협판은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독판의 직무를 보좌하는 기능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이 내무부에서 다수를 차지하여 사실상 내무부 업무를 관장하는 실세였다. 당초 11명이었던 협판의 수는 1885년 말에 12명, 1886년 13~18명, 1887년에 16~19명, 1888년에 14~20명, 1889년에 15~22명으로 점차 증원되어 1894년까지 이 숫자를 유지하였고, 대체로 각 사에 2명씩 배정되었다.
내무부가 존재했던 기간 중에 협판에 임명된 관리는 총 58명으로 여흥민씨를 위시하여 과거의 문·무과 출신 관리들이었다. 통리기무아문 계통의 신설 기구에 종사하거나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비교적 국제 정세에 밝고 개화·자강 사업의 실무 능력을 구비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내무부 산하의 전환국(典圜局)·기기국(機器局)·광무국(鑛務局)·연무공원(鍊武公院)·육영공원(育英公院) 등 자강 정책 추진 기구와 외국의 공사 관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일무 부관은 왕의 두터운 신임 속에 중앙과 지방 군영의 책임을 맡았다.
이외에도 데니([德尼], Denny, O.N.), 르장드르([李善得], LeGendre, C.W.), 그레이트하우스([具禮], Greathouse, C. R.) 등 미국인 고문관이 내무부 협판으로 기용되었다. 이들은 원세개(袁世凱)의 조선 내정 간섭이 심해지는 가운데 이를 견제하면서 고종의 반청(反淸) 정책 추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4) 참의내무부사
참의는 협판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한 관리였다. 내무부 창설 당시에는 4명에서 출발하였지만 대체로 1887년부터는 각 사에 1명씩 배치되었다. 참의를 역임한 인물은 1894년까지 모두 31명으로 통리기무아문이나 통리군국사무아문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나중에 협판으로 승진하였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독판이나 협판과 달리 서자(庶子)·중인(中人) 혹은 변방의 토반(土班) 출신으로 과거를 통해 선발되지는 않았지만 외국어에 능통하거나 개화 추진 능력을 인정받아 기기국·전환국 등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정치·사회 제도에 대한 개혁 의지와 반청 사상이 강하여 내무부 예하의 개화·자강 정책 추진 기구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반청·친미·친일 외교를 펼쳐나가는 데 앞장섰다.
내무부사는 상피(相避) 제도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중앙 관직과 지방의 경기감사나 4도(都)의 유수직을 겸임할 수 있었다. 또 군사와 재정을 관할하는 병조 판서와 중앙 군영의 지휘관인 영사(營事), 호조 판서와 선혜청 당상 등이 으레 내무부사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승정원의 도승지(都承旨)도 내무부사를 겸직하도록 하여 왕의 국정 운영 주도권을 뒷받침하였다.
내무부는 소속 각 사를 당초 7국(局)으로 나누었다가 곧바로 7사로 개편하였다. 7사는 직제사(職制司)·수문사(修文司)·지리사(地理司)·농무사(農務司)·군무사(軍務司)·전헌사(典憲司)·공작사(工作사)였다.
내무부사의 직무는 소속 당시 내무부가 왕에게 올린 계문(啓聞)을 보면 알 수 있다. 내무부에서는 ① 군수·군영의 설치, 군사훈련과 군사교육, 기타 군정 일반 업무를 포함하여 군사 관계 업무 총괄 ② 내무부와 관할 관서뿐만 아니라 지방관과 외교관까지 관리에 대한 인사 고과 업무 ③ 수세(收稅)·전운(轉運) 등 재정 관련 업무 ④ 국경·도서(島嶼) 등 변경 지역에 관한 업무 ⑤ 농업·상업·광업에 관한 진흥·관리 업무 ⑥ 도적의 체포와 사건 조사·형벌에 관한 업무 일부 ⑦ 교육에 관한 업무 ⑧ 왕실 재정과 관련된 업무 ⑨ 교섭통상사무아문의 업무에 대한 관여·통제 등에 대해 왕에게 보고하였다.
변천
내무부를 통해 국정 전반의 운영을 주도했던 고종과 민씨 척족 세력은 청나라가 조선의 내·외정을 간섭하는 가운데 권력 보존의 근간이 되는 재정·군사권을 장악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러나 의정부 대신들이 강한 비판을 제기하는 등 왕 주도의 자강 정책 추진 방법을 두고 고종과 대신들은 상당한 갈등을 보였다. 그 중심에 내무부사가 있었던 셈이었다. 이들 내무부사는 1890년대에 이르러 동학 농민군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지원군을 청하는 등 친청(親淸)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결국 당시 조선에 필요했던 개화·자강 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894년 7월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군국기무처가 내정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내무부가 폐지되고 내무부사도 사라졌다.
참고문헌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 1~9』, 국회도서관, 1970~1972.
김필동, 「갑오경장 이전 조선의 근대적 관제 개혁의 추이와 새로운 관료 기구의 성격」, 『사회와 역사』 33, 1992.
은정태, 「고종 친정 이후 정치 체제 개혁과 정치 세력의 동향」, 『한국사론』 40, 1998.
한철호, 「민씨 척족 정권기(1885~1894) 내무부의 조직과 기능」, 『한국사연구』 90, 1995.
한철호, 「민씨 척족 정권기(1885~1894) 내무부 관료 연구」, 『아시아문화』 12, 1996.
뇌사(耒耜)
정의
조선시대에 적전(籍田)에서 친경례(親耕禮)를 행할 때, 밭을 가는 데 사용하던 청색 쟁기.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과, 신하 중에서 선발된 종경제신(從耕諸臣)이 직접 적전을 경작하며 농사일을 권장하고 국가 제사에 사용할 곡식을 기르는 정성을 보였는데, 이를 친경례라고 한다. 이 의식에서 왕과 신하들은 각각 품계에 따라 차례로 쟁기를 5차례, 7차례, 9차례 밀었는데, 뇌사는 이때 사용한 쟁기를 말한다.
연원 및 변천
뇌사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이자 농업의 신인 신농씨(神農氏)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나무를 깎아 땅을 일구는 ‘사(耜)’를 만들고, 나무를 휘어 ‘사’의 손잡이인 ‘뢰(耒)’를 만들었다고 한다. 친경례에서 사용하는 뇌사는 의례용이므로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는 실제 뇌사보다는 가볍게 만들었으며, 청색으로 칠을 하였다. 이는 오행(五行)의 원리에 따라 청색이 봄과 동쪽을 상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철(鐵)이 사용되면서 땅에 닿는 사의 날은 철로 씌웠다.
형태
‘사’는 흙을 일으키는 부분으로 나무를 깎아 만들었으며, 자루에 해당하는 ‘뢰’는 나무를 구부려서 만들었다. 『국조속오례의서례(國朝續五禮儀序例)』에서는 중국의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인용하여, ‘뢰’와 이를 담아 두는 집은 청색으로 장식하여 청색 보자기로 덮어 두고, 쇠로 날을 만들어 ‘사’의 끝에 끼운다고 하였다.
뇌사는 의례를 거행하기 전에 봉상시(奉常寺)의 담당관이 해당 관청의 관원을 거느리고 준비해 두었다가, 행사 당일에 경근거(耕根車)에 실어 적전까지 날랐다. 왕이 사용하는 뇌사는 다른 것과 구분하여 어뢰사(御耒耜)라고 하였다[『성종실록』 6년 1월 14일].
참고문헌
『국조속오례의서례(國朝續五禮儀序例)』
『춘관통고(春官通考)』
『주역(周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