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도시유적전시관 및 기타 주변 유적>
이전 서울 골목길을 원형 그대로 전시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및 주변의 옛조선일보사옥, 민형환자결터, 삼일독립선언문낭독터, 서울중심점표지석 등을 둘러본다.
1. 관람지대강
명칭 :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위치 :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26 지하1층
입장료 : 없음
관람일 : 2024.3.5.
2. 둘러보기
2015년 공평동 도시환경정비사업 중 온전하게 발굴된 서울 골목길을 원래 위치에 보존하여 전시관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최고 번화가이면서 시전인 중심지역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고, 거기서 발굴된 유물 또한 살펴볼 수 있어서 현장감과 역사성을 아울러 체험할 수 있다.
다른 박물관에서 거의 접할 수 없었던 유물인 진단구를 관람한 것은 커다란 성과라 생각된다. 많은 의문을 던져준 진단구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다. 아마도 개화기 일본 건축 풍속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이에 관한 특별한 설명은 없다.
종각역 주변은 로마같은 지역이다. 몇 걸음 안에 크고작은 유적과 유물이 있다.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곳을 오늘은 관심을 갖고 돌아본다.
2-1.소개
2015년 공평1·2·4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 한양에서 근대 경성에 이르는 역사도시 서울의 골목길과 건물터가 온전하게 발굴되었습니다. 이에 서울시는 도시유적과 기억을 원래 위치에 전면적으로 보존하고자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조성하여 2018년 9월 12일 개관하였습니다. 도심정비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원 위치 전면 보존’한다는 ‘공평동 룰’을 적용한 첫 사례이기도 합니다.
공평동 룰은 도심정비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원 위치 전면 보존’한다는 원칙입니다. 이에 따라 사업 추진시 매장문화재에 대한 전면 보존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매장문화재를 고려한 건축설계를 하고 매장문화재 보존 면적에 따른 용적율 인센티브를 부여해서 사업시행자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였습니다. 아울러 유적전시관 조성에 따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서울시 총괄건축가와 협의를 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성된 전시관은 서울시에서 운영합니다.
2014~15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 초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총 108개 동 건물지와 중로, 골목길 등의 유구와 1,000여 점이 넘는 생활유물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중 유구의 상태가 가장 온전히 남아있는 16~17세기 Ⅳ문화층 유구를 전시관 내부로 이전하여 복원하였습니다.
이중 전동 큰 집, 골목길 ㅁ자 집, 이문안길 작은 집의 3개 건물지가 핵심 콘텐츠로 각 건물지별로 1/10 축소 모형, 가상현실인 VR체험, 출토된 유구 위에 1:1 복원 모형 등 다양한 전시기법을 통해 16~17세기 한양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사용했던 골목길이 확인되어 이문안길과 전동 골목길을 직접 걸으면서 조선시대에 와 있는 느낌을 직접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홈피 전재)
센트로폴리스빌딩 지하 1층에 있다. 입구는 이쪽이 아니고 반대쪽이다. 어마어마한 최신 빌딩의 지하에 서울의 골목길이 잠들고 있다니 그 자체로만도 놀라운 일이다. 이처럼 보존해서 보여주는 관계자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전시관 입구
전동 골목길
천장
ちんだんぐ [鎮壇具]
地鎮法 등의 법회에서 堂塔伽藍 지하에 묻어 보관해 둔 일곱 가지 보물‧무기‧그릇 등의 종류
地鎮法じちんほう 등의 법회에서 堂塔伽藍(どうとうがらん, 사원의 당과 탑과 가람(본당‧승당 등의 절의 큰 건물)) 지하에 묻어 보관해 둔 일곱 가지 보물‧무기‧그릇 등의 종류. 奈良なら~平安へいあん 시대의 것이 많이 출토된다.(일본어사전)
고후쿠지(興福寺) 절 금당진단구(金堂鎮壇具)는 1874년 절 경내의 중금당(中金堂) 기단에서 출토된 것으로 고후쿠지 절을 창건할 때 지신(地神)을 진무하기 위해 파묻었던 장신구들이다. 출토된 장신구는 전부 30종류 1,400여 점에 달한다. 나라시대 이전의 사원 진단구는 가와라데라(川原寺) 절 탑과 도다이지(東大寺) 절의 금당(金堂, 大仏殿) 밑에서도 출토된 사례가 있으나 이처럼 다채롭고 방대한 양이 출토된 적은 없다.(도쿄국립박물관 전시품 해설)
일본에 있었던, 불교와 지신을 위로하던 민간풍습의 결합으로 나타난 풍습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발굴된 도기에서는 항아리 안에 다른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조기의 이석. 당시 조기를 서울에서 얼마나 소비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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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조선일보 사옥
민영환 자결 터
민영환이 을사늑약에 항거하다 자결하여 순국한 곳이다. 조선말의 충신 민영환은 을사늑약의 폐기를 궁궐 앞에서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의 강제해산으로 실패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에 청지기의 집에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순국 후 피 묻은 옷과 칼을 산청 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산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룻바닥과 피 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절죽이라 하였다. 종로구 인사동 하나빌딩 앞 민영환의 자결터에 김충헌이 글씨를 쓰고 백문기가 조각한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 조형물에는 그의 충정이 나타났다고 하는 혈죽을 상징하는 대나무와 창호문이 조각되어 있고 자결할 때 사용한 단검과 유서 등을 배치했다.(대한민국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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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독립선언유적지
위치 :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27
소개 : 삼일독립선언유적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9년 3월1일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의 임금 중종이 딸 순화공주를 위해 지은 순화궁 터였으나 매국노 이완용이 자신의 별장으로 꾸몄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할 당시 이 조약에 찬성한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을 비롯해 이토 히로부미가 드나들면서 매국의 근거지로 변했다. 이후 이완용은 이 별장을 요릿집 명월관 분점인 ‘태화관’으로 바꿨다.
이승훈·손병희·한용운 등 민족 대표들은 매국 대신들이 맺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무효화한다는 의미로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 경찰들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모두 잡혀갔다." (서울경제신문, 2019.2.24.)
서울중심점 표지석
위치 :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5 하나로빌딩 1층 로비
소개 :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은 조선 말기인 1896년 한양(서울)의 중심 지점을 나타내기 위해 설치한 표지석이다. 이듬해 ‘대한제국’이 선포되는데 그 정지작업 중 하나였다. 표지석은 사각형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가로·세로 59㎝, 높이 50㎝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4개의 팔각기둥은 각각 가로·세로 21.5㎝, 팔각 한 변의 길이는 9㎝다. 구성은 가운데 돌이 한양의 중심을 나타내고 주위 4개 돌은 각각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 등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동서남북 내사산을 의미한다. 원래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5의 하나로빌딩 바깥 서쪽 화단에 놓여 있었다. 현재는 하나로빌딩 1층 로비 안으로 옮겨 보존 관리하고 있다.(서울경제신문, 2017.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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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