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냐시오(Ignatius)-신부, 설립자
축 일-7월 31일
교회 쇄신 이끈 성인 생가엔 ‘회심’의 자취 생생
- 로욜라 지역 생가 성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웅장한 성 이냐시오 대성당과 마주할 수 있다. 성당 뒤편으로 예수회 모원이 이어지며, 성당 왼편으로 성인 생가가 자리한다.
물질만능으로 일그러진 현대사회에 쇄신의 길을 내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그의 행보에서는 예수회 출신으로서 관상하고 실천해온 영성이 묻어난다.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이끌고 교회의 내적 복음화를 더욱 활발히 이끄는 이 영성은 바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1491~1556)의 회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냐시오 성인의 회심, 그 내적 쇄신은 16세기 세속화 등으로 위기에 처했던 가톨릭교회를 변화시켰고, 성인이 거쳐 온 곳을 성지로 바꿨다. 이번 호에서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 성지를 순례하며 기적과도 같은 회심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 성 이냐시오 대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글귀가 새겨진 책을 들고 있는 성인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주교회의 미디어부 제공)
이냐시오 영성의 시작점, 로욜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450여 km 거리에 위치한 로욜라. 한국 신자들에게도 이젠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다. 로욜라에 자리한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와 ‘성 이냐시오 대성당’, 영성센터 등을 방문하는 한국인 순례객은 연평균 4000여 명을 넘어섰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 생가 성지 홍보담당 아이노아 빌라(Ainhoa Vila)씨는 “한 해 순례객이 10만여 명 정도지만, 가톨릭신자 비율을 볼 때 한국인 순례객들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고 설명한다. 아시아 선교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예수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영향으로, 아시아인 순례객들도 꽤 많은 편이라고 말한다.
생가 성지와 이어지는 건물은 예수회 모원이다. 성 이냐시오 대성당을 시작으로 도서관과 고문서 보관소, 영성센터 등을 갖췄다. 이곳에서는 현재 55명의 회원이 생활 중이다. 영성센터는 60여 명의 민간인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보다 원활히 운영되고 있다. 한번에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성센터는 일 년 내내 비는 시간이 없다. 영신수련을 하고자 하는 신자들과 예수회 관련 지도자 및 영신수련 전문가 양성 과정 참가자들이 넘쳐나는 덕분이다.
로욜라에서의 첫 발걸음은 ‘성 이냐시오 대성당’에서부터 시작했다.
대성당의 어두움에 익숙해질 즈음 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 세워진 이냐시오 성인의 청동조각상이 시야를 채운다. 흐릿한 조명에 비춰진 모습, 그의 손에 들린 책에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 이냐시오 성인이 생전에 머물던 4층 방은 생가 성지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회심의 소성당’으로 모습을 바꿨다.
연이어 예수회 모원으로 들어서면 먼저 중정 거실을 빽빽하게 채운 예수회 초기 선교사들의 초상화들도 볼 수 있다. 봉쇄수도원의 생활 형태를 엿보게 하는 옛 식당도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生家)는 500여 년 전 성인이 생활했던 시절의 모습도 생생히 엿보게 한다.
생가는 우선 외벽부터 눈길을 끈다. 한눈에도 위아래 층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가 단단한 돌로 지어진데다 사격용 구멍이 뚫려있는 아래층은 일반 집이 아니라 군사 요새로 지어진 집임을 짐작케 한다. 그 위로 올려진 층은 아라베스크 양식의 리본 무늬로 장식된 훌륭한 대저택의 면모를 보인다.
요새에서 대저택으로 변화됐던 이 집은 이제 매일 순례객들로 채워지는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생가 성지 곳곳에는 순례객들을 위한 자동 안내기가 설치돼 순례의 편의성을 더한다. 18개 국어로 안내하는 예수회 회원의 목소리가 이냐시오 성인이 이 집에서 어떤 회심의 과정을 겪었는지 보다 쉽게 알려준다. 1991년부터는 한국어 안내도 하고 있다.
탑집에서 성지로, 이냐시오 성인 생가
“왜 살아야 하는가”
포탄이 다리뼈를 부서뜨렸다. 용맹한 군인으로 살고 싶었던, 화려한 면모의 궁정 신하로 살고 싶었던 꿈도 부서뜨렸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푼 가슴을 안고 로욜라를 떠났던 이냐시오는 이제 고통에 짓눌린 부상병의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고통과 절망은 삶의 의미를 잃어가게 했다.
- 수차례의 다리 수술 후 이냐시오 성인은 많은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 ‘회심의 소성당’ 한켠에는 책을 읽던 성인이 눈을 들어 벽에 걸린 나무 성모상을 바라보는 모습을 재현한 조각상이 있다.
탑집 입구 왼쪽에 있는 청동상은 팜플로냐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이냐시오가 생가에 도착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팜플로냐 전투는 나바라 왕국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프랑스왕 프란치스코 1세에 대항해 펼친 싸움이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이냐시오가 과연 살아날 수 있을지, 설사 살아난다 해도 군인으로, 궁정 신하로 살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몸과 마음의 상태는 끝을 모르고 나락으로 치달았다.
생가 2층으로 올라가면 또 다른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이냐시오가 가족들과 둘러앉아 지내던 거실이다. 가족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대대로 이어져오는 가훈을 깊이 새겨왔다. 가장 먼저 굳은 신앙을 지키라는 당부, 이어 맹세나 충절을 지키고, 명예심과 용감함을 갖추고, 흠없는 생활방식을 유지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거실의 벽난로를 지나치면 로욜라 집안을 소개하는 자료들도 볼 수 있다.
이냐시오는 기질적으로 모험과 성취에 대한 갈증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15살 나이에 로욜라를 떠나, 왕국 재무관의 집에서 궁정 신하가 될 야망을 키우고 부유한 삶을 누렸다. 방탕하고 오만한 젊은이로 커 간 때였다. 그러나 후견인의 몰락과 함께 그의 야망은 산산조각 났고 이후 나바라 총독의 시종으로 들어가게 됐다.
팜플로냐 전투 후, 으스러진 뼈를 맞추는 수술을 몇 차례나 겪으며 그는 오랫동안 끔찍한 고통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이냐시오는 뒤죽박죽이 된 삶과 흩어진 영혼을 추스를 기회를 얻는다.
생가 성지 3층, 이냐시오 가족들의 거주공간을 지나면 철책으로 막힌 기도방과 마주한다. 이 기도실 제단 위에는 고딕 양식으로 된 장식장이 있고, 장식장 상단에는 피에타상이 세워져있다. 아래는 수태고지 목판화로 꾸며져있다. 이냐시오는 다리를 치료하는 동안 이 성상 앞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회복기를 보내는 이냐시오에게 특별한 위안이 된 것은 책읽기였다. 특히 이냐시오 성인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들의 꽃」이라는 책을 읽으며 자신도 성인들처럼 살고 싶다는 원의를 품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생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물론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이냐시오는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한다.
이른바 생가 성지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회심의 소성당’은 4층에 위치해있다. 이 방은 이냐시오가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 천장에는 “로욜라의 이냐시오, 하느님께 의탁하다”라는 말이 쓰여 있다.
소성당 한쪽 모퉁이에는 한손엔 책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이냐시오의 조각상이 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작은 나무 성모상이 걸려있다. 예수회 설립 후 이냐시오 성인은 “나는 자주 오랫동안 창문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우리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강한 충동이 일어났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소성당 한쪽에는 아란자의 성모화가 걸려있다. 이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순례의 통회와 순례의 길을 떠난 이냐시오가 아란자에서 밤을 새며 기도했던 시간을 기억하게 한다.
모든 죄를 뒤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선 이냐시오는 드디어 순례를 시작했다. 우선 성인들을 본받아 참회를 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하고 남은 삶을 그곳에서 보내겠다는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회심은 1521년 6월에서 1522년 2월 사이에 일어났다.
- 생가에서 예수회 모원으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이냐시오 성인 삶의 주요 장면 등이 담긴 그림과 스테인드글
라스로 꾸며져 있다.
소성당에 관한 자동 안내 목소리는 마지막으로 잠시 묵상할 것을 권한다. 이내 소성당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잠시 침묵 속에서 이냐시오가 겪은 회심의 순간들을 되새긴다.
그러자 몬세라트로 발걸음을 옮기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급해진다. 긴 칼을 내려놓고 순례자의 지팡이를 짚어든 곳, 그리스도의 기사가 될 결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곳이 바로 몬세라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영신수련」의 초안이 되는 글을 쓴 동굴도 몬세라트 인근 만레사에 자리한다. [가톨릭신문, 2015년 7월 19일, 스페인 로욜라 주정아 기자]
[쇄신의 리더, 스페인 영성가들을 찾아서] (4) 로욜라의 이냐시오 (하)
동굴서의 11개월 고행, 깨달음… 기록으로 남기다
- 마을에서 올려다본 이냐시오 성인의 동굴 성당 전경. 옛 동굴 위에 성당과 예수회 국제 영성센터 등을 지어
올렸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상류사회의 달콤한 생활에 빠져들 수 있었다. 전도유망한 지위를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냐시오는 외로운 ‘순례자’의 길을 택했다.
오랜 회복기를 보낸 이냐시오는 예루살렘까지 순례를 하고, 남은 일생을 그곳에서 보낼 계획을 세웠다. 1522년 봄,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그가 처음 도착한 순례지는 ‘산타 마리아 데 몬세라트 수도원’(Santa Maria de Montserrat)이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당시에도 영적 중심지였다. 특히 수도원 대성당에 모신 ‘검은 성모상’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이냐시오 성인의 회심은 이 성모상 앞에서 더욱 굳은 상징으로 드러났다. 자신의 화려한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갑옷’을 입은 것이다.
- 이냐시오 성인은 몬세라트 수도원 ‘검은 성모상’ 앞에 칼을 풀어놓고 대신 순례자의 지팡이를 짚었다.
‘그리스도의 기사’로 변모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60여㎞ 거리에 위치한 몬세라트 수도원 대성당 입구 왼쪽에는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다. 검을 풀면서 지팡이를 짚는 모습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냐시오는 ‘값 비싸고 아름답고 세련미 넘치는 군복 모양 옷을 걸치고 수도원에 도착했다.’
- 스페인 로욜라에 자리한 이냐시오 성인 생가 벽에 걸려있는 순례자의 지팡이.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먼저 이냐시오는 자신의 긴 칼과 단검을 검은 성모상 앞에 풀어놨다. 자신의 옷은 가난한 이에게 벗어줬다. 대신 그가 구입한 것은 감자 푸대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거친 직물이었다. 이 거칠고 낡은 푸대로 만든 순례자의 옷은 그에겐 튼튼한 그리스도의 갑옷이었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그때가 1522년 3월 24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전날 밤이었다.
밤새 성모 제단 앞에서 기도하던 이냐시오가 걸음을 옮긴 곳은 바르셀로나가 아닌, 몬세라트에서 15㎞ 남짓 떨어진 만레사(Manresa)라는 마을이었다.
세속을 떠나 동굴 생활
이냐시오는 만레사 카르도네르 강변의 한 동굴에 정착한다. 동굴은 세속을 떠나 하느님을 찾는 생활을 하는 상징적이자 실제적인 장소이다.
만레사 ‘성 이냐시오 동굴’(La Cava de sant Ignasi)은 이냐시오 성인이 머물렀던 동굴을 경당으로 꾸민 성지와 성당, 예수회 국제 영성센터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해마다 평균 4만 4000여 명 순례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입구를 지나 성화와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꾸며진 경당 앞 홀(Avantcova)을 거쳐 가면 경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작은 제대와 의자 8개, 장궤틀 3개가 들어가자 꽉 차는 규모의 작은 동굴경당이었다. 이 경당에는 옛 동굴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한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는 벽을 세웠지만, 원래 동굴 왼쪽 벽은 뚫린 공간이었다. 이냐시오는 이곳에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글을 쓰다 종종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강과 마을을 내려다봤다고 한다. 경당 정면 벽에 조각된 부조도 이냐시오가 글을 쓰다 마을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곳에서 이냐시오는 약 11개월 동안 극도의 고행과 단식을 실천했다. 물론 단식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며 단식을 하면서 그는 내면을 더욱 깊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동굴경당에서는 매일 오전 7시30분에 미사가 봉헌된다. 7월 31일 이냐시오 성인 축일 미사도 특별히 이곳에서 기념미사가 봉헌될 예정이다.
- 동굴경당은 「영신수련」의 초안이 완성된 의미깊은 장소다. 이냐시오 성인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은수생활을 했던 곳으로 현재 경당으로 꾸며져 있다.
동굴 벽을 따라 나와 성당으로 이어지는 홀에 서면 유독 눈에 띄는 유물이 있다. 높이 약 10cm, 가로 직경 약 12cm 크기로 올리브 나무를 깎아 만든 자그마한 탁발통이다. 이냐시오는 이 통을 들고 직접 탁발한 음식만 조금씩 먹으며 생활했다.
- 이냐시오 성인이 실제 사용했던 탁발통. 스페인 만레사 동굴경당 앞 홀에 전시돼 있다.
세상을 변화시킨 책, 영신수련
만레사에서 지낸 처음 몇 달. 이냐시오는 영적 위로를 체험, 내적 평화와 깊고 충만한 기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내적 투쟁이 시작됐다. 내적 공허, 낙담, 고독, 지루함, 영혼의 무감각, 절망, 우울 등으로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자살 충동까지 느낄 정도였다. 이 시기를 견뎌내자 이냐시오는 다시 평온과 큰 위로를 되찾는다. 명예와 허영에 사로잡혀 살던 한 기사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 된 것이다.
이냐시오는 극심한 고행 속에서 깨달은 영적 통찰을 매일 써내려갔다. 이 기록들은 훗날 「영신수련」이라는, 영성생활에 실제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안내서로 엮어진다.
‘영신수련’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관상하도록 이끈다. 단순히 복음 묵상이 아니라 예수를 체험하도록 이끄는 영적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이 과정은 각자가 삶의 의미를 알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는 바에 비춰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냐시오는 자신이 쓴 책에서 “양심을 성찰하고 묵상하고 관상하며, 말과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적 수행을 하는 모든 방법을 영신수련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한다. 모든 무질서한 애착 그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 영혼을 준비하고 정돈하는 모든 방법, 그리고 애착이 제거된 다음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활을 정돈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것을 영신수련”이라고 말한다.
영적 식별은 악의 영향을 떨쳐 버리고 그리스도의 빛에 따라, 올바른 생활양식과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찾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즉 영적 식별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기에 근본 배경으로 기도가 강조된다.
발간 이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신수련」은 예수회뿐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의 영성생활에도 큰 등대가 되어왔다. 일반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책을 꼽을 때도 「영신수련」은 빠지지 않는다.
회심을 통해 교회 쇄신의 빛이 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 그는 시대의 어둠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가 곳곳에 불을 밝혔다. 그의 거대한 소명과 영성은 ‘활동하는 관상가’라 불리는 예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더욱 폭넓게 확산, 실천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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