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마와 관계된 자신의 사업에 대해 구상하면서 줄곧 잡지를 읽고 있었던 다니엘은 로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아주 좋은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그녀가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쩐지 지적인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다니엘은 갑자기 옆자리의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자신에 대해 매우 놀랐다. 다니엘은 사실 지금까지 여자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니엘이 독신주의자인 것은 아니었다. 금욕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매력에 이끌려 청혼을 해 오기도 했지만 결혼에 대해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모습이 다니엘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무슨 재미있는 기사라도 있나요?"
로라가 먼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다니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뉴욕 타임즈>를 덮으면서 로라를 바라보았다.
"지난 16년 동안 스물세 명의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 있군요."
다니엘의 말에 로라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굉장한 살인마로군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꼭 그렇게 살인마라고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의 충동과 파괴의 속성을 지니고 살아가니까요."
다니엘은 살인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그 대답이 너무나 태연했기 때문에 로라는 다니엘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건 무슨 말이죠?"
"그 사람은 이 사회에서 대학 교육을 마친 인텔리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이 범행을 저지른 수법도 또한 매우 지능적이었지요."
"대학까지 졸업한 지능적인 살인자라고 해서 살인마가 아니라는 건가요?"
로라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경우에는 살인마라고 부르기보다는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를 것 같군요. 그는 지금 시골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사상에 대해 집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그 사람이 <뉴욕 타임즈>에 보낸 편지가 여기 실려 있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살해한 사람들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밝힌 살인 행위에 대한 이유들이 매우 논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매우 논리적으로 자신의 살인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의 논리를 쉽게 깨뜨리지는 못하고 있지요."
다니엘은 로라의 눈을 로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로라는 다니엘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로라의 머리 속으로 이 삶은 확실히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다니엘은 로라의 눈을 정면에서 똑 바로 응시하면서 매우 설득력 있게 그 살인자의 논리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살인은 살인이고 죄는 죄이며 타인의 목숨을 앗아간 행위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은 너무 머리가 똑똑해서 미쳐 버린 것 같군요. 그 사람은 자신을 변호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회피하려 하고 있어요."
"글쎄요, 미친 사람은 그가 아닐지도 모르지요."
"무슨 뜻이죠?"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미친 사람이고 그 사람 혼자만이 정상인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럴 경우에 그를 단죄하는 것은 다수의 미친 사람들이 만들어낸 악법이 되겠지요."
"그건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군요."
"우리가 이 사회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와 각 개인들의 존재 가치는 과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또 우리는 이 사회에서 악이라고 말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들은 왜 악이고 우리는 왜 선이 되는 걸까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독립기념일에 수소폭탄을 개발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발표하는 국가에 대해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정상인으로 대우를 받는 시대가 지금이 아닌가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폭탄의 제조를 저지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거기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다니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로라는 일단 말문이 막혔다. 무엇인가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마땅히 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로라는 결국 화제를 돌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가 보죠?"
"아닙니다. 물론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그것이 직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사업을 하고 있나요?"
로라는 일부러 모른 체하면서 물어 보았다.
"뉴욕에 본사를 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참, 인사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로라는 드디어 상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로라는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로라 해리슨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런데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낯설지 않군요. 혹시 <월 스트리트 저널>의 유명인사 동정란에 자주 등장하는 그 다니엘 씨가 아닌가요?"
"제가 유명인사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습니다."
다니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로라의 표정에는 이 사람이 다니엘 블레이크 총수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엿보였다.
"사실이군요. 만나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다니엘씨."
정말로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사실을 확인한 로라는 이번에는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다. 다니엘은 그녀의 손등에 가벼운 키스를 보냈다.
"당신에 대한 평가는 정말로 굉장해요. 언제인가 기회가 닿으면 당신의 경영방식을 꼭 들어보고 싶어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미인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어쩔줄을 모르겠군요. 기회가 닿는다면 꼭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당신은 어디로 가세요?"
"바하마의 롱 비치 해변으로 갑니다."
"어머, 잘 되었군요. 저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거든요. 그런데 바하마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죠?"
"사업상 일이 있어서 가는 길입니다. 그곳에는 과거에 저에게 무척 잘 대해 주던 친구분이 호텔을 운영하고 계시죠. 그분을 만난 지도 무척 오래 되어서 찾아가는 겁니다."
"어떤 분이시죠?"
"그분의 이름은 메드닉 해리슨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라는 다니엘의 입에서 메드닉 해리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군요. 저도 그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메드닉 해리슨 씨는 세계 도처에 유명한 호텔을 많이 소유하고 계시죠. 전 바하마에 있는 그분의 호텔에서 며칠동안 머무를 계획이에요."
"당신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하마를 방문하는 거군요."
로라 해리슨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마침 잘 되었군요. 호텔에 도착하면 제가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군요. 어떠신지요?"
"정말 영광이겠어요."
"아닙니다. 저도 이렇게 훌륭한 미인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로라는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라는 창밖을 내다 보면서 어떤 말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다니엘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가 가장 먼저 첫발을 내딛은 곳이 바로 이곳 바하마였다는 사실을 혹시 알고 계세요?"
로라의 질문에 다니엘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 당시에 그가 신고 있던 신발이 아마 나이키였다지요?"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로라는 다니엘의 재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로라는 갑자기 그의 유머에 한 가지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가 나이키를 신고 최고급 호텔에서 며칠 밤을 묵었다지요?"
두 사람은 또다시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미보셤과 같은 사람에게 물어 봐야 할 겁니다."
다니엘의 재치가 로라의 관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 사람이 바하마에서 호텔업이라도 했었나 보죠?"
"맞아요, 로라. 그 사람이 바로 바하마에 처음으로 호텔을 지은 사람이에요."
다니엘은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기라도 하듯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라구요? 아미보셤이 말인가요?"
"그렇다니까요."
"다니엘 씨,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은 책에 등장하는 해적인 걸요?"
로라의 말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래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하마에 처음으로 호텔을 지은 사람이에요. 바로 그 해적이 말입니다."
"어머나, 세상에!"
로라는 매우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니엘은 아미보셤 호텔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로라, 그런 상식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배워야 할 겁니다. 어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니엘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로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니엘 씨. 그리고 그 아미보셤이 지은 호텔보다 더 훌륭한 호텔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지을 수 없을 거에요."
"혹시 그 호텔이 지어진 이유를 알고 있나요? 아미보셤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그 호텔을 지었어요. 그건 아주 낭만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미보셤은 세계를 통틀어서 나 다음으로 멋을 아는 남자일 겁니다."
다니엘이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그래요. 제 생각에도 아미보셤은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 다음으로 아름다웠던 그녀를 말이에요."
로라 해리슨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라의 재치있는 언변에 다니엘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은 그런 식으로 한층 높은 유머를 구사하는 로라가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귀여운 소녀를 만나고 있는 것처럼, 로라를 바라보고 있으면 다정하고 따스한 감정이 저절로 솟아났다.
무엇보다도 다니엘의 가슴을 뛰게 만든 것은 로라로부터 풍겨나오는 향기였다. 로라에게는 세상에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체취가 풍겼다.
잠시 동안의 대화 속에서 다니엘은 로라가 매우 지적이고 냉철하면서도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하마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화려한 외모에 내적인 면모까지 갖추고 있는 여자를 만난 것은 어쩌면 커다란 행운이라는 생각이 다니엘의 머리를 스치면서 지나갔다.
비행기는 잠시 후에 바하마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바하마 인근의 해변은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모래사장 위로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그 뒤로는 울창한 열대림이 우거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