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각 활동단체(학생회, 청년회, 어머니회, 신우회)의 부흥
무릇 모든 조직체에 있어서 그것이 생물이든 아니든 간에 허리와 손발의 기능을 하는 기관의 역할은 그 조직체의 운동성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거대한 조직이라도 그 허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며, 또 아무리 튼튼한 조직체라 하더라도 막상 손발이 없으면 그 조직체는 스스로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화석화된 조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병천교회에 있어서 70년대 중반에 들어 또 하나의 특징은 교회의 허리와 손발의 역할을 하는 학생, 청년들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 해방 후 6.25동란을 거쳐 60년대, 70년대 초반까지는 교인 수도 적고 그 활동도 미미한 교회의 침체기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부터는 갑자기 지역 내의 중고생들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천 그레고리(광길) 신부님과 원 요나단(성호) 신부님의 학생, 청년들을 위한 적극적인 프로그램 개발이었다.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천 신부님은 교회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까지 지역 합창단을 조직할 정도로 그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래서 매주 한 차례 이상씩 아우내중학교 강당에 모여 노래 연습을 하였으며, 또 각종 합창대회에 나가 수상하기도 하였다. 당시 합창단원의 수가 40-50명에 달했다고 하니, 작은 농촌 지역에서의 합창단 규모로는 결코 작지 않은 것이었다.
천 신부님의 교회 밖에서의 이런 사적인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신자들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런 적극적인 외부 선교활동을 통해서 성공회의 위상을 알리고 또 그 활동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으므로 교회 성장에 득이 될 수 있었다.
또 천 신부님이나 원 신부님은 성령운동을 통해 교인들에게 신앙훈련을 시켰다. 그 일환으로 교회에서 정기적인 신앙 강좌를 개최하였는데, 그 강사로는 대천덕 신부님 등 성공회 내부에서는 물론 외부의 유명 목사들이 초빙되었다고 한다. 이 때 지역의 젊은 새 신자들이 많이 몰려들어 신앙 강좌가 열리는 날에는 교회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둘째, 그 시대 상황이 젊은이들을 교회로 몰리게끔 했다. 아무리 가난한 농촌 지역이라도 부모들의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은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도 자식들만큼은 고등학교까지 다 보냈으며, 그 중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부모들이 빚을 얻어서라도 도시로 진학을 시켰다. 그러다 보니 고등교육을 받은 자식들은 부모들 세대처럼 농촌에 정착하여 고된 농사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로 학업을 위해, 혹은 직장을 얻어 나가거나 아니면 그러기 위해 집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농촌인 병천 지역에 남아 있는 젊은이들은 대학에 진학을 못했거나 직장을 얻지 못한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또는 남자인 경우 군대를 가기 위해 영장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들도 꽤 있었다. 이들은 좁은 지역 내에서 딱히 갈 곳이 없었고, 자연히 불편한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모일 수 있는 곳인 교회로 모이게 되었다. 이들의 모임이 신앙적인 모임이라고는 결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교회에 모여 불투명한 자신들의 앞날을 함께 걱정하고, 또 노느니 교회의 궂은일을 돕기도 하였는데, 그러면서 자연히 바른 신앙의 길로 접어든 젊은이도 나오게 되었다.
이 당시 교회에는 탁구대와 또 다른 곳에서는 엄두도 못 낼 두 개의 정구 코트가 지금의 주차장 자리에 있었다. 놀거리가 없던 이곳에서 자연히 학생들과 청년들은 교회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남녀교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많은 커플들이 교회활동을 매개로 하여 결혼에 이른 경우도 많았다. 반면에 교회 내에서의 남녀교제로 인한 불미스러운 일이 염려되어 사제와 어른 교인들이 걱정하는 일이 있기도 하였다. 하여간 이러한 활발한 학생, 청년들의 활동의 열매는 세 명의 성직자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전재명(프란시스), 전경석(크리스핀), 박미현(도미니카) 사제가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모두 한 살 터울로서 97년, 99년 2002년에 각각 사제 서품을 받았다.
70년대 후반서부터 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학생, 청년들의 수가 80여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비좁은 성당에서 주일에 함께 미사를 드릴 수가 없어서 학생들만 따로 모아 토요일 오후에 별도의 미사를 드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많은 청년들이 군대를 가기 위해, 또는 일자리를 찾아서, 또는 여학생의 경우 결혼 등의 이유로 고향을 떠남으로서 자연히 학생, 청년들의 수는 급감하였다. 그래서 1985년 황정기 신부님이 부임하면서 학생들만을 위한 토요일 미사를 없앴으며, 이어 관리가 안 되어 잡초만 무성한 정구 코트를 없애고 거기에 지금의 잔디밭을 조성하였다. 황신부님은 학생, 청년들의 활동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1988년 식목일을 며칠 앞둔 주보에 보면 황정기 신부님과 교회 청년, 학생들이 모여서 식목 행사를 하고 잔디밭을 조성했으며 정원을 가꾸었다는 광고 내용이 있으며, 또한 88년 9월 25일 주보에 따르면 청년들을 위해서 매주 목요일 밤 9시에 ‘청년목요성서공부’를 시작한다는 내용도 나와 있다. 이러한 노력은 그 결실을 맺어 그 다음해 1월 9일부터 토요일 저녁 때 드리는 학생회 미사가 많은 학생들의 참여로 다시 부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대 조류 변화인지 젊은이들의 속성인지 병천에서의 청년들과 학생들은 일을 찾아 또는 학업을 위해 도시로 나갔고 얼마 남지 않은 학생들도 입시준비를 하느라 교회에서의 활동에 소극적이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학생회, 청년회 활동은 또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90년대 초반 몇몇 군대를 다녀온 청년들이 교회를 찾아와 과거의 청년회를 부활해 보려고 시도해보았으나 한번 떠난 청년들이 다시 교회로 모이기에는 여러 가지 여건이 미흡하였다. 당시 청년회의 주축을 이루었던 많은 청년들이 다른 곳으로 떠난 상태였으며, 일부 병천 지역에 남아 있는 청년들 또한 이미 가정을 이루어 가장으로서 또 직장인으로서 바쁜 생활을 꾸려가느라 주일성수를 지키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하여간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약 십여 년 동안 병천 지역의 모든 젊은이들이 우리 병천교회에서 활동했었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는데, 이들 중 현재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은 열 명 남짓이다. 물론 서울 등 타 지역에 거주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을 포함한다 해도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비단 우리 병천교회 뿐만 아니라 아마 모든 기독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일 것이며 특히 농어촌 지역에 위치한 교회일수록 그 심각성이 더하다.
이렇듯 1970-80년대의 병천교회의 특징은 지역에서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것이다. 교회가 단지 미사를 드리고 예배를 보기 위한 하느님의 집, 성전으로서의 신성하고 경건한 장소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놀 곳이 마땅치 않은 학생들의 놀이터로서, 그리고 갈 곳이 없는 젊은이들의 사랑방으로서의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교회가 사람들을 향했다고 할 수 있겠다.
혹자는 교회 안에서, 또는 그 주변에서 교회로부터 이런저런 혜택을 받은 사람들을 교인으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겠으나 하느님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지 않으신다. 교인이든 아니든, 교회를 떠났든 아니든 하느님은 그들을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항상 공평하신 분이시다.
그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럴 때 하느님의 사랑이 복음이고, 그들과 함께 사랑하며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교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0-80년대의 우리 교회가 활발하게 활동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몸소 실천하는 교회였기에 가능했다.
어머니회는 우리 교회가 설립되고 발전하는데 가장 많이 공헌한 활동단체이다. 1910년대 일제의 강점 아래에서의 힘든 시절에 한 가정의 주부로서 그 일을 감당하기에도 벅찼을 터인데 초창기 교회와 진명학교의 초석을 놓느라 그들은 눈물겨운 노력을 하였다. 당시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가르치고 돌보아주는 진명학교의 교사들을 위한 수고비와 학교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대기 위하여 성미(誠米)를 모았다고 한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한 양식도 부족했을 터인데 그것을 한 숟가락씩 아껴두었다가 주일에 가져와서 함께 모았다고 하니 그 정성이 대단하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궂은일은 다 도맡아서 하는 등 항상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그것을 감당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들이었다.
이런 어머니들의 모임을 더욱 조직적으로 하기 위하여 1989년도부터는 45세 이하의 젊은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한 마리아회와 46세 이상 나이 드신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한 마르다회로 구분하여 활동하였다. 2007년 현재는 마리아회, 마르다회 구분하여 활동하지는 않고 있다.
또한 80년대 중반부터는 교회 내 결혼한 남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우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회원들 간의 친목과 더불어 교회 내는 물론 지역의 크고 작은 일들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도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는 신자가 아닌 회원들도 약간 명 포함되어 있는 등 그 문을 지역 내 기혼 남자들로 개방함으로써 지역 내 친목단체로 성장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3쌍의 부부가 한 조가 되어 상호 신앙생활에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부부간 모임인 삼발이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2003년 8월에는 관할사제인 우덕기(마가) 신부의 주도 아래 교회 내 신자와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이 함께 ‘병천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지역 내의학생들 중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이 모임의 회원들은 장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매달 일정회비를 냈으며 각 가정에서 동전을 모은 저금통을 가져오는 등 정성을 모았다. 이렇게 어렵게 모아진 장학금으로 매달 일정금액(100,000원, 70,000원, 50,000원)을 학생들 통장으로 입금시켜주는 등 수혜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제도를 통해 약 3년 동안 총 4명의 학생에게 약 6백만원의 장학금이 지급되었다. 또한 이 모임에서는 의사를 초빙하여 지역 내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무료진료를 3회 실시하였고 또 이들을 위하여 빵과 음식을 그들의 숙소로 배달해주는 푸드뱅크사업도 실시하였다. 이밖에도 격주로 지역 환경정리를 위한 거리청소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지역을 위해 정말 실질적인 활동을 했던 이 뜻 깊은 모임은 그러나 장학기금의 고갈과 회원들 참여도 부족으로 현재 활동을 중단한 상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