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치
2022년 4월 21일 어금니를 뺐다. 치아는 벌레가 흠을 낸 흔적이 전혀 없는 건강한 상태이지만 잇몸이 약하다 보니 결국 발치(拔齒) 해야 했다. 충치(蟲齒)는 이래저래 땜질해서 사용할 수 있는데 잇몸에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건강한 치아라도 이런 극단의 선택은 불가피하다. 평소에 잇몸 관리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 주요인이었다. 바르지 못한 양치 습관이 결국 이런 아픔을 겪게 된 듯하다. 발치는 이빨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가능하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어릴 때 바르지 못한 습관이 이런 엄청난 일을 초래한 것 같다. 세 살 때 들여놓은 버릇이 여든까지 건강하게 한다는 속담이 새롭게 들린다. 평생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수고한 이놈과의 이별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어금니는 50년 동안 어두운 구혈(口穴)에서 말없이 저작(咀嚼)의 직무에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주인 건강의 최일선에서 온몸으로 헌신한 공로자다. 딱딱한 물건이 입고되면 그것 처리하느라 상처를 감수했다. 쇠심줄같이 질긴 물건이 들어오면 미처 분쇄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위장(胃臟)에게 떠넘기면서 미안했던 적도 있다. 보통 다른 이빨들은 하루에 세 번만 일하면 되는데 간식을 즐기는 주인을 만나면 낮이고 밤이고 시도 때도 없이 이것 처리하느라 쉴 시간도 없다. 어느 날부터 먹거리가 풍부해지니까 더욱 바빠져 연장 근무도 불가피하여 정상 근무 시간보다 5배 이상을 노동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주인이 좋아하는 음식만 들여보내니까 정작 치아 건강에 좋은 영양소는 제대로 보충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근무 여건도 열악했고, 처우도 형편없이 고단한 사역을 감당한 것이다. 그러다가 잇몸이 쇠약하여 결국 자기의 자리까지 빼앗기고 말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주인은 이렇게 떠나보내야 하는 어금니를 개인 보관하여 마지막 주인을 위하여 수고한 종에게 최고의 예우를 다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몸의 척출물(剔出物)은 개인 소장이 법으로 금지되어 전문가가 안전하게 처리하도록 규정되었다면서 그나마도 불가능했다. 마지막 근무지를 떠나는 그놈은 결국 주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수고의 보상도, 칭찬이나 격려도 듣지 못하고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주의 직분을 받고 충성스럽게 일하는 사람이다. 일하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품꾼이고, 품삯을 받아야 일하는 사람이다. 대가가 없으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다. 또 대가가 있어도 시간만 때우는 불성실함도 있다. 이 품꾼은 대가가 적으면 주인에게 따지며 대든다. 불평불만의 소리가 그 입을 떠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 품꾼 이야기가 있다. 아침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꾼을 부르고, 주인은 일에 약속한 대로 대가를 지불했다. 그런데 오후 늦게 와서 일한 일꾼과 동일한 품삯을 받게 되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사실 그는 계약대로 일한 대가를 받았음에도 자기보다 일을 적게 한 사람이 자기와 동등하게 대가를 받은 것이 불만이었다. 오직 품삯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꾼이다. 이 사람은 주인을 보고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는 성실하게 감당한다. 누가 보든지 아니든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는 사람이다. 일이 완성되면 그보다 기쁜 일 없다. 일이 끝난 후 주인이 그에게 어떻게 처우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무런 대가를 보상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일꾼은 이미 주인에게 받은 바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주인은 종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준 바가 있었다. 그런 사실 때문에 그는 주인이 일을 맡기면 성실하게 일하고 꾀를 부리지 않는다. 별도의 대가가 지불되지 않아도 기쁘게 감당하면서 기뻐한다. 품꾼과 일꾼의 차이는 분명하다. 품꾼은 돈 때문에 일하고, 일꾼은 주인 때문에 일한다. 품꾼은 계약서를 작성한 후 일하고, 일꾼은 계약서 없이 일한다. 품꾼의 일은 노동이고, 일꾼의 일은 봉사다. 품꾼은 땅만 쳐다보지만 일꾼은 하늘을 바라보며 일한다. 품꾼은 돈을 받아야 일이 끝나고 일꾼은 주어진 일이 완성되어야 일이 끝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한 일꾼이었다. 자신을 복음의 일꾼이요 교회의 일꾼(골 1:23, 25)이라고 소개했다. 복음과 교회의 일꾼은 세분하면 일에 차이가 있겠지만 주인이 맡긴 일은 교회든, 복음이든 충성스럽게 감당한다. 주인이 교회를 맡겨서 교회의 일꾼이고, 복음을 맡겨서 복음의 일꾼인 셈이다. 일꾼은 항상 주인이 중심이다. 그래서 일꾼 바울은 주를 위하여 일하다가 손해도 많이 보았어도 이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자신의 기득권을 배설물로 여겼다(빌 3:8). 일하다가 매 맞고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겪었다(고후 11:25). 자신에게 닥칠 고난이 명약관화(明若觀火) 해도 주인의 뜻이라면 꿋꿋이 그 길을 걸어갔다(행 20:24). 그러다가 죽임을 당했을 때는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다고 기뻐했다(빌 1:20). 이것이 일꾼으로 살았던 사도의 진면목이다. 발치 하면서 문득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평생 나를 위하여 냄새나고 청결하지 못한 입안 컴컴하고 열악한 근무환경인데도 아무런 불평 없이 일하다가 뽑혀버린 어금니가 아니던가? 잘했다고 주인의 칭찬마저 사치라고 여긴 것인지 그냥 사라진 어금니 신세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이빨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금니를 발치 하면서 주의 일꾼이 감당할 사역의 기본자세를 배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리라(마태복음 25: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