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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에 대해 자주 나오는 질문(FAQ)
문: 하지만 이러한 ‘합의과정’이 결국에는 전부 암묵적이거나 드러나지 않은 지도부에 의해 놀아나게 되는 거 아닌가요?
답: 아무런 규칙도 없이 합의에 따라 운영한다면 그렇죠. 당연하게 암묵적인 리더십이 등장할 겁니다. 최소한 그룹 내 인원이 8, 9명 이상이 되는 순간에요. 작가이자 활동가인 조 프리먼Jo Freeman이 1970년대 페미니스트 운동 초기에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합의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프리먼이 쓴 비평의 결과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촉진자의 역할이 그 완벽한 예입니다. 당신이 처리하고 있는 과정이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를 가장 쉽게 파악하려면, 회의 운영과 제안을 누가 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모든 수평적 그룹들은 촉진자 스스로 어떤 제안도 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이해가 깔려 있습니다. 그는 그저 그곳에 있으면서 이야기를 듣고 그 그룹이 생각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됩니다. 사실 보통은 촉진자의 역할이 몇몇 사람에게 분산되어 있기도 합니다. 한 사람은 실제로 회의를 운영하고, 다른 사람은 스택(발언하려는 사람들의 수)을 집계하고, 또 다른 사람은 시간을 확인하고, 또 다른 사람은 분위기가 처지거나 누구라도 배제되지 않도록 확인하는 분위기 감시자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촉진자 한 사람이 무심코라도 토론을 조작하기가 훨씬 어려워집니다. 촉진자 역할은 돌아가면서 맡는데, 그럼으로써 그룹은 스택에서나 촉진자들 사이에서나 균형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특히 큰 규모의 그룹에서 파벌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거나, 어떤 사람이 남들보다 더 영향력 있게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 하나의 진정한 해결책은 그룹 자체 내에서 파벌이 형성되는 것을 계속해서 경계하는 겁니다.
문: 하지만 그런 영향력 있는 파벌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는데요, 실제로 지도자들이 있고 공식적인 지도구조를 갖는 것이 최소한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고 책임도지지 않는 리더십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답: 사실은 낫지 않습니다. 지도구조를 갖는다는 것은 특정한 사람이 특권적인 정보를 더 많이 가진다는 애깁니다. 이게 진짜 문제입니다. 모든 평등주의적 그룹에서 정보는 제한된 자원이 되기 쉽습니다. 계층구조들이 발달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정보에 대한 특권적 접근을 가진 사람들을 ‘리더’라고 선언하고 이를 공식화해버리면 문제가 개선되는 게 아니라 악화될 뿐입니다. 이 그룹이 실제로 의도하지 않은 경우일지라도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기 시작한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할 단 하나의 방법은 정보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 있게 하는 메커니즘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모든 활동가 구성원들에게 공식적인 지도구조는 없으며, 누구도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뿐입니다.
비슷한 얘기로, 권력이 없는 비공식적인 지도부의 구성원들을 ‘조정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선언하더라도 그들 외에 모든 이들이 6개월 정도마다 그들을 재임명할지를 결정할 수 있게 한다고 해서 종종 거론되는 것처럼(모든 경험과는 반대로) 그들이 ‘더 책임감 있게’ 되지는 않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책임감이 더 없어집니다. 왜 그 반대로는 생각해보지 않는지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사실 그 이유는 자유주의 정치 이론에서 유래한 것으로, ‘자의적 권력’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반대하는 널리 퍼져 있는 편견을 상기시킨다. 최소한 1세기 동안 정부가 자국 국민을 향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그것이 명백하고 제대로 발표된 규칙들을 따르지 않는 경우에만 권력남용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권력을 행사하는 어떤 방식이라도-그것이 어떤 영향에 의한 것일지라도-공식적으로 인정받지 않았고 그 권력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 결과, 비공식적 권력(그것이 비폭력적일지라도)은 심지어 폭력 그 자체보다 인간의 자유에 더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결국 이것은 일종의 유토피아니즘이다. 사실 모든 정치적 활동을 망라하는 확실하고 분명한 규칙들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문: 모두가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작은 그룹이나 동네, 공동체에서는 합의가 충분히 잘 돌아간다는 건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초반의 신뢰 기반이 없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큰 규모의 그룹에서는 어떻게 돌아가나요?
답: 우리는 공동체를 이상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평생을 시골 마을에서 함께 모여 산 사람들은 인격성이 배제된 거대한 대도시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관점을 공유하기가 더 쉬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골 사람들은 서로 물고 뜯기가 더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것은 공동선을 위해 증오를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낯선 사람들끼리의 회의에 대해 말하자면, 만약 길에서 무작위로 사람들을 데려와서 모아두고는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회의에 참석하라고 했다면, 아마도 처음에 그들은 서로 간에 공통 기반을 찾지 못할 겁니다.(탈출 계획을 세울 때 외에는). 회의에서 뭔가 얻고자 하는 것, 거기 모인 모두가 이루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가 없는데도 제 발로 회의에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딴 데로 새지 않고 공동의 목표를 찾아 자신들이 거기에 모인 이유를 계속 마음에 새긴다면, 대개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문: 만약 더 큰 규모의 회의에서 66% 혹은 75%, 심지어 90% 다수결을 이용하게 될 때, 왜 이것을 ‘제한적 합의’라고 부르나요? 그냥 압도적 다수결 체제 아닌가요? 왜 그냥 있는 그대로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겁니까?
답: 사실 그건 같은 게 아닙니다. 합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통합의 과정, 즉 가능한 한 가장 많은 비율의 참가자들이 만족하고 가장 적은 참가자들이 반대하는 방향으로 제안들을 재작업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때로 큰 규모의 단체들에서는 누군가 블록을 하면, 그 블록이 단체의 기본 원칙들에 대한 진정한 표현인지에 대해 의견들이 근본적으로 불일치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투표로 갈 것인지의 선택권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를테면 2/3 다수결에 기반을 둔 회의에서 내내 자리를 지킨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식으로 그저 투표로 바로 넘어가게 되면 그 역동성 전체가 달라질 겁니다. 모든 사람의 관점은 동등하게 가치가 있다는 전제가 전혀 깔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의에 온 사람들의 1/3 미만을 대변한다고 보이는 관점들은 간단히 무시될 수 있습니다.
문: 사람들이 체제를 오용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민주적인 집회에 참여하기에는 정상이 아니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참여는 할 수 있는데 방해가 되거나 까다롭고 계속 주의를 요구해서 그런 사람들을 만족시키려면 그들의 생각이나 기분에 맞추는 시간이 단체 안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들고, 그래서 모두의 생각과 감정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원칙을 깎아먹게 되기도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지장을 준다면, 그 사람을 나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거부하는 경우, 그다음 단계는 보통 그 사람의 지인이나 지지자들에게 그를 설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선의 방법은 집단적 결정을 통해 그런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무시하는 겁니다.
문: 합의를 고집하면 창의성이나 개성을 억누르게 되지 않나요? 합의가 단조롭게 순응하는 것을 조장하지 않나요?
답: 제대로 안 되면 그렇죠. 어떤 일이라도 제대로 안 될 수 있습니다. 합의과정은 정말 제대로 안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개 우리 중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직 합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닥에서부터 민주주의 문화를 효과적으로 잘 만들어냈습니다. 제대로만 된다면 개성과 창의성을 이보다 더 잘 받쳐줄 수 있는 과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합의는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관점에 맞게 완전히 바꾸려고 시도조차 하면 안 되며, 공동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장애기 되는 것이 아니라 높이 평가받아야 할 공통 자원이라는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짜 문제는 이미 분명히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거나 (그것을 인지하고 있든지 아니든지 간에), 이미 순응주의 문화를 가진 단체들이 합의를 결정 과정으로 마무리할 때입니다. 극단적인 예로 일본 기업이나 심지어 할리데이비슨 같은 미국 기업 내에서 합의가 실행되는 방식입니다. 이런 경우들에서 사용되는 합의라는 용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합의가 아니라 오히려 강요된 만장일치에 더 가깝습니다. 이런 경우는 ‘합의’를 요구하면 이 모든 것이 오히려 더 악화될 것이 뻔합니다. 이런 민주적인 절차들은 급진적인 가능성을 망가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이 실제로는 합의한 것이 아니면서 마치 그 절차들을 이용해 합의한 것처럼 굴게 만듭니다.
문: 사람들이 14시간씩 계속해서 회의하기를 기대하는 게 합리적인가요?
답: 아뇨, 그런 걸 기대하는 건 말이 안 되죠. 분명히 어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회의에 참여하도록 강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덕적 압박에 의해서일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단체가 장시간 회의에 참여할 만한 시간이 있는 지도자 계층과 주요 결정에는 결코 관여하지 않을 추종자 계층으로 나눠지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수세기 동안 합의를 실행해온 전통사회에서의 일반적인 해결방법은 회의를 재미있게 만드는 겁니다. 유머, 음악, 시 등을 도입하여 사람들이 실제로 미묘한 수사학 게임과 참가자 드라마를 보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인 마다가스카르를 소개한다. 그곳에서는 회의에서 쓰는 수사법들이 제대로 인정받아서, 특히 기교가 좋은 연설자들이 음악 축제에서 록 밴드들 사이에 나와 오락의 한 형태로 연설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무론 이런 사회의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적 여유가 많은(물론 산만하게 하는 TV나 사회적 미디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의 도시적 맥락에서는 참여한다는 것 자체에 모두가 신이 나 있을 때도 별 감흥이 없는 사람에게 최선의 해결책이란 그냥 14시간짜리 회의는 하지 않는 겁니다. 이 사안을 논의하는 데 10분, 저것에 5분, 각 발언자에게 최대 30초까지 시간을 할당하는 등 시간 제한에 신경 쓰세요. 발언자가 다른 사람이 한 말은 반복하지 말도록 끊임없이 상기 시키세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실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큰 그룹에는 제안을 들고 오지 말라는 겁니다. 이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사실 이것이 너무 중요해서 나는 다음 섹션 전체에서 이것만 다루려고 합니다.(245-251)
그래야 할 확실한 이유가 없다면 합의해야 할 제안을 내지 말 것
합의과정은 급진적인 탈중심화의 원칙과 함께 갈 때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하지 않다. 공식 합의과정의 어려운 본질에 그나마 어떤 희망이라도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모두에게 긴급하고 중요한 제안의 경우가 아니라면 총회나 대변인협의회, 기타 다른 대규모 그룹에는 제안을 내지 않는 것이 좋다. 가능하면 워킹그룹, 동호회, 모임 등 더 작은 그룹 범위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항상 더 낫다. 발의는 아래로부터 일어나야 한다. 제안을 내지 않아서 더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가 아닌 이상 말이다. 심지어 (모두를 가리키는) 총회를 포함한 다른 누구로부터도 권위와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보자.
톰킨스 스퀘어 공원에 모여 있었고 실제 점거는 시작되지 않았을 무렵, 대외활동 그룹이 총동원에서 거의 그만둘 뻔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플라이어에 사용하겠다며 월가 점거 단체의 성격과 목적을 두 줄로 써달라고 제안했으나 총회에서 블록을 당했던 것이다. 그 당시 아웃리치Outreach의 중심 인물이었던 여성은 분노를 숨기지 못했고, 마침내 나를 찾아와서는−나를 과정 전문가라고 생각하고−중재할 방법이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물었다.
“글쎄요. 애초에 그 문건을 그룹에 왜 상정한 건가요?”
“자신들이 외부에 어떻게 소개될지를 모두가 아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우리가 무슨 소리를 쓰든지, 얼마나 간단히 쓰든지 상관없이 누군가는 반대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그건 진짜로 우리가 생각해낸 받아들일 만한 문구였다고요!”
“당신이 그 안을 대외활동 그룹에서 결정해 가져왔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 그들이 믿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
“왜 그러겠어요?”
“그럼, 좋아요.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죠. 당신들은 대외활동 그룹이에요. 당신들은 총회로부터 대외활동의 권한을 받아 일하는 그룹이죠. 그렇다면 제 생각에 당신들이 대외활동을 할 권한을 받았다면 대외활동에 필요한 일들을 할 권한도 받은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말하자면, 그룹을 설명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문제도 그래요. 제 말은 당신들이 그룹의 승인을 요청해야 될 실질적인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엄청나게 논란거리인 부분이 있어서 여러분이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요. 저는 거기 없었기 때문에 그러는데, 그 내용이 논란의 소지가 있었나요?”
“아니요. 문제가 있다면 사실 너무 밋밋해서라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바로 무엇을 할 때마다 승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대화가 끝난 후 나는 블록을 건 사람을 찾아내어 그가 내 평가에 완전하게 동의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가 블록한 이유는 워킹그룹들이 그런 문제들은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자리잡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된 문제는 과정에 대한 차이가 아니었던 것이 된다. 블록을 건 사람이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던 것이다.)
일반적인 경험 규칙에 따르면 결정은 가능한 한 가장 작은 규모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EU 내에서는 이 원칙이 끔찍한 용어인 ‘보충성 원리(subsidiarity)로 불린다. 내가 알기로 그보다 나은 말은 없지만, 차마 그 용어는 사용하지 못하겠다.) 긴급한 필요가 없다면 위쪽의 승인을 요청하지 말라. 하지만 언제가 긴급하게 필요한 때일까? 그리고 누가 긴급한 문제에 관여해 승인을 결정하는 걸까?
이렇게 보면 많은 급진 사상의 역사−특히 급진적 민주주의 사상의 역사−가 바로 이 질문에 달려 있다. 누가 결정을 하게 되며, 왜 그런가? 이는 대체로 두 가지 원칙 간의 논쟁의 형태를 취한다. 하나는 대게 ‘노동자 자주조직’ 또는 단순히 ‘노동자 자주관리’라고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직접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노동자 자주관리의 개념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작업장의 조직에 가장 많이 적용되었으나, 기본 원칙으로서 어디에나 쓰일 수 있다. 기본 원칙의 본질은 어떤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누구라도 그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로 요약될 수 있다. 이를테면 이것은 이론가 마이클 앨버트Michael Albert가 제안한 참여경제 체제(즉, 파레콘parecon)에 깔려 있는 원칙이며, 어떤 형식의 작업장 조직이 진짜 민주적인 작업장을 만들 것인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의 대답은 “균형 잡힌 노동 분담 체계”, 즉 그 안에서 모두가 일정 분량의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행정적 노동을 해야 하는 조직이다. 노동자 자주관리의 기본 아이디어는 만약 당신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있어서 동등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253-254)
두 번째 원칙은 직접민주주의 원칙으로, 어떤 활동 프로젝트에서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실행되는 방식에 대해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여기서는 함축하는 바가 꽤 다르다. 만약 그런 생각이 공식화됐더라면, 그 결과 일종의 민주적인 공동집회들이 있어서 그 프로젝트에 이익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뭐든 그렇게 공식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공식화되지 않는 편이 중요할 수도 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합의로 운영해왔는데, ‘포콘올로나fokonolona’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대중집회’라고 번역되지만 때로는 그냥 ‘모두’를 뜻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포콘올로나가 현지 정부 기관들이어서 프랑스 행정부의 연장선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후에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종종 포콘올로나를 지역 민주주의의 풀뿌리 세포 조직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런 시도들은 결코 통하지 않았다. 주된 이유는 포콘올로나는 공식적인 단체가 아니라 분쟁 해결, 관개 농수 배분, 도로 건설 여부 결정 등 어떤 특정 문제가 있을 때 소집되며, 거기서 일어날 결정에 자기 삶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누구라도 모이는 집회이기 때문이다.(우리254-255)
이런 직접민주주의와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두 가지 원칙을 대조적인 선택의 문제로 나타내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이 둘의 결합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작은 마을에 제지공장이 있다면, 그 공장에 어떻게든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 공장의 휴가 정책에 관여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또 마을 사람들은 그 공장에서 지역의 강에 무엇을 흘려보내는지 알고 싶어 할 이유도 충분하다.(우리255)
활동가 그룹의 경우에 이런 문제를 물어본다는 것은 실제 워킹그룹들의 역할을 묻고 있는 것이다. 모든 점거 총회에는 이러한 워킹그룹들이 있다. 2011년 11월, 뉴욕 총회New York City General Assembly에는 이미 30개가 넘는 워킹그룹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언론, 촉진, 주거, 회계, 직업행동 워킹 그룹과 같이 지속성을 갖은 분야 중심이었고, 또 다른 어떤 것들은 대안 은행, 생태, 트랜스젠더 사안 같이 지속성을 지닌 주제 중심적이었다. 저당 잡힌 집 점거와 오클랜드 연대 행진처럼 어떤 것들은 특정한 행동이나 캠페인이 있을 때 조직되어 지속적일 수도 일시적일 수도 있었다. 활동가 워킹그룹들은 그 자체 내에 언론, 대외활동, 교통 등 구조적인 워킹그룹을 가질 수도 있다.(우리255)
워킹그룹은 특정한 임무를 이루거나 어떤 종류의 실무를 수행하기 위해 총회나 더 큰 그룹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조사, 교육 등 그게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때로는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필요에 의해 생기기도 하고(“캠프의 위생 문제를 맡을 사람 있나요?”), 때로는 일단의 사람들에게 아이디어가 있어서 생기기도 한다(“우리 몇몇이서 평등주의적 사회에서 위생 체제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그룹을 만들려고 합니다.”). 뉴욕 총회는 누구라도 워킹그룹을 만들고자 한다면 최소 다섯 명의 초기 구성원을 모으고 총회에 요청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어떤 요청의 경우에는 블록되었다.(우리255-256)
누구라도 마음껏 회의실에서 모이거나 원하는 것을 토론할 수 있다. 총회가 워킹그룹을 승인하면서 그 워킹그룹이 총회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자동으로 부여받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각 워킹그룹이 대표성을 지닌 대표자의 한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가 수직적인 계층구조를 만들지 않는 것은 워킹그룹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총회나 행동기획회의가 회의 도중에 워킹그룹들로 쪼개지는 것은 동시에 하나 이상의 워킹그룹에 참가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누구도 지나치게 많은 영향력을 갖지 않도록 하기 우한 실제적인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워킹그룹에 소속되면 연락 담당에 자원한 주요 인물의 경우라도 교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변인협의회에서는 각 워킹그룹에서 한 명의 ‘대변인’만이 공식 토론에 참여할 수 있으며(다른 구성원들은 회의에 참석해서 그 사람의 귀에 대고 속삭이거나 조용히 상담할 수 있다), 누구도 같은 워킹그룹을 대표해서 연속으로 두 번 발언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업무가 분담되고 나면, 혹은 기존 그룹이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하도록 인가를 받고 나면 얼마나 자주 다시 만나서 점검해야 하는지 등의 승인이 필요한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에 대한 일반 원칙은 확인해야 하는 미심쩍은 어떤 이유가 있고 다른 조처를 하지 않으면 잘못될 것이라는 게 분명할 때만 한다. 그러나 확인하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간다면 아마도 확인하지 못할 것이다.(우리256)
[출처]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
THE DEMOCRACY PROJECT(2013)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호영 옮김, 이책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