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몸치의 댄스일기18 (왈츠 첫 시범)
(2003.6.29.)
댄스에 입문하고서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어느 날이 바로 2003. 6. 29. 일요일. 정신이 없어서 날씨는 모르겠다.
댄사모 창립3주년 기념파티.
난 이날을 댄스를 그만둘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엉망진창이었던 날로 또한 억울하고 아쉬운 날로.
이날 밤에 동호회원 한 분과 맥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어귀 공원에서 나 혼자 울었다.
연습할 때는 그런대로 될 것 같던 왈츠의 기초 루틴이 왜 고작 100여명의 관중들 앞에서는 그렇게 안 되고 스텝이 엉켜버리고 다음 동작이 생각이 안 나고 음악도 귀에 안 들리고. 내가 할 수 있었던 걸 시범이란 타이틀로 대중 앞에 섰을 때 그렇게 꼬여버린 게 너무 아쉽고 억울해서. 글구 무엇보다 댄스계 선배이신 아름다운 파트너를 스타일 구기게 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일요일이 파티 날인데 금요일에 결정하고서 동호회의 선배 되시는 여성 회원님께 사정을 얘기하고 파티날 시범 파트너로 부탁드리고. 금요일과 토요일에 두 번에 걸친 파트너와 호흡 맞추기.
연습 시간과 파트너와 호흡 맞추는 시간이 너무 짧고 촉박했지만 겁 없이 공식적인 첫 도전장을 날린 나라는 인간이 지금 생각하니 너무 무모하고 겁 없는 결정이었다.
그 전날 밤잠도 설치면서 우려했던 일들. 스텝이 생각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음악을 못 맞추면 어쩌나. 파트너와 발이 맞지 않으면 어떡하나. 사람들이 비웃으면 쪽 팔려서 어떡하지 하는 것들이 어떻게 다음날 실전에서 하나도 안 틀리고 그대로 현실로 재연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좋은 일들은 내 생각대로 상상한 대로 한 번도 안 맞아 떨어지구. 예를 들면 내가 로또복권에 당첨되면 짜놓았던 계획들은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데... 꼭 나쁜 방향의 예견과 상상은 빈틈없이 맞아 떨어지구. 그것도 상상보다 그 이상으로...
필라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파티 시작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안을 들여다보니 수리중이라 어수선해서 도저히 미리 연습을 해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디어댄스의 선배 회원님이신 숙녀 분을 파트너로 부탁드려서 그 분도 일찍 나와 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동호회 활동을 시작하고 처음 맞이하는 파티여서 약간은 생소하고 긴장이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발표해야할 시범이 머릿속에서 계속 압박감을 주었다. 더군다나 깜짝 이벤트로 진행할 계획이어서 진행자 이외에는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순서가 돌아올 시간동안도 내내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망치면 어떡하지 잘 안되면 어떡하나.
우리 김정현 선생님께서 이왕 하는 거 최선을 다해서 제대로 하라며 엔딩부까지 짜주셨는데...
시간이 되어서 4시쯤에 드디어 순서가 돌아왔다.
제너널 타임을 즐기던 모든 커플들이 자리로 돌아가시고 홀을 비어주셨다.
평소에 연습할 때는 별 것 아니던 필라의 그 홀이 그 시간은 왜 그렇게 덩그렇게 넓게 보였을까.
파트너로 봉사해주기로 한 디어댄스의 아름다운 숙녀님과 참석자들에게 양편을 돌아가며 인사를 하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대로 된 편이었다.
스타트를 위해 딱 서는 순간부터 난 얼어 버렸다. 체인징파트너 음악이 시작되었는데도 난 당황해서 바로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 음악도 댄사모 회장님이 직접 나를 위해 시디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때부터 다시 한 번 더 돌리고 이미 나의 시범은 꼬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시작된 것이었다.
어찌어찌 첫 내추럴 턴을 시작하고 저쪽 모퉁이 구석까지는 갔는데, 그 이후부터 다음에 연결해야할 동작이 생각나지 않았다.
거기서 앞을 보는 순간 수많은 눈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난 그 눈빛들과 마주치는 순간 그만...
갑자기 머릿속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고 음악도 안 들리고, 난 무엇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도 파트너가 당황하지 않고 다음 동작을 억지로 끌고 나가 주었다. 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단 한 가지 이젠 망쳤구나 하는 것만 뇌리를 스쳤다. 그 이후부터는 내 정신으로 한 게 아니었다. 파트너였던 숙녀님이 고목나무 붙들고 씨름하듯 나를 끌고 겨우 음악을 끝낼 수 있었다.
엠병할...
선생님이 짜주신 멋있는 엔딩부는 한 번 써먹어보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음악이 끝나자마자 그때서야 아이구 이제 살았다 싶은 생각으로 도망치듯 의자 쪽으로 나와 버렸다.
파트너였던 숙녀님께서 그나마 경력이 좀 있어서 그 정도로라도 마무리를 지었지, 아니었으면 난 하는 중간에 포기해야할 상황이었던 기억.
지금도 그것만 생각하면 창피스럽고 쪽 팔리고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왜 연습할 때처럼 그 정도도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후회감이 자꾸 든다.
혼자서 할 때는 그런 대로 흉내를 낼 정도는 되었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10분의 1도 못 한 것 같은 아쉬움 때문에 자책감이 든다.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는 하다. 그게 바로 경력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노련미와 경력이 붙는다는 사실은 댄스에도 여지없이 실감했다.
혼자서 아무리 연습을 한다고 했지만 실전에서 써먹지 못하는 건 실력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배들 앞에서 까불면 절대 안 된다는 사실도 거의 진리나 다름없는 것 같다.
끝나고 나서 조금후 에 내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다시 한 번 한다면 실수를 않고 잘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두 번 다시는 이런 시범 같은 데는 안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괜히 까불고 나가서 이번처럼 개망신 당하지 말구 하는 생각.
우리 디어댄스에서도 격려차 이소라님과 모나리자님 글구 아돈님까지 어려운 시간을 내서 응원하러 와주셨는데. 잘 하는 꼴을 못 보여주고 또 처음 입문했을 때 강습장에서처럼 헤매고 버벅대는 꼴을 보였으니 그것도 대중앞에서...
일부러 와주신 그분들께도 면목이 없었다.
두 번 다시 이런 파티같은 데서 시범 같은 건 안 나가려고 했는데 하루 지나고 가만 생각해보니까 이번 일이 억울해서라도 차라리 앞으로는 그런 기회가 있으면 더 적극적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뀐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도 더 꾸준한 연습을 열중하고 기량을 쌓아 나가야 할 테니까.
그리고 이번처럼 실패하지 말고 성공적으로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자신이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될 정도의 성적이 나올 때까지는 시범 같은 데 오히려 참여하는 게 댄스 기량 향상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려구 해도 문제가 한 가지 있는 것 같다. 파트너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매번 이번처럼 시간이 촉박해서 구걸하듯이 부탁할 수는 없을 것 같구. 커플댄스의 한계가 이것이 또 문젯거리인 것 같다.
하루가 지난 지금 생각해도 난 그 시범에 참가한 게 후회스럽기만 하구 별로 내게 도움이 된 건 없는 것 같다.
공연히 파트너로 와주신 숙녀님께만 스타일 구기게 해서 누를 끼쳤고 고생만 시켜드려서 미안하고 면목도 없고 앞으로는 그 분 앞에서 고개를 못 들것만 같구.
이제 당분간은 더 이상 시건방 떨지 말구 나 하던 스타일대로 연습이나 계속 해야겠다.
가장 비참했던 날의 일기 끝.
2003. 6. 30
[댄사모] 댓글
데니스
정말 침착하게 잘 하셨는데요, 뭘! 첫 공연 축하드립니다^^. 03.06.30 14:32
답글 줄리엣
누구나 그런 경험이 한번쯤 있나봐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니 좋은 추억으로 남더라구요. 그때 만약 창피하다고 그만두었다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비참한 추억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잘 읽었습니다. 03.06.30 15:40
답글 팬지
음악이 엄청 길게 느껴지지 않던가요. 돌고 또 돌아도 음악은 멈추질 않아....ㅎㅎㅎ 힘내세요. 두번째는 훨씬 수월할꺼예요. 03.06.30 16:29
답글 유리
저두 그런 경험 있습니다. 다음 동작은 생각 안 나고... 음악은 길게만 느껴지구... 어찌할 바를 몰랐을 때가...그 런 기억들도 다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강변마을님 이번 경험을 계기로 더욱 힘내시구요.. 파이팅 하세요! 03.07.0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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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1. 21 다음카페 [사즐모]에 “예전글”이란 제목으로 재탕으로 올렸던 댓글.
댓글
겨울나그네 07.01.21 12:50 첫댓글
쓰라린 경험이 고수를 낳는가 봅니다요....ㅎㅎㅎㅎ
송내기 07.01.21 12:54
정상이 높으면 계곡도 깊은법. 어찌 정상에 그냥가리요. 숱한 아픔과 고난이 동반하는 것을..
바리바리 07.01.21 16:25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과정이지요. 저도 처음 파티에 왈츠는 음악하곤 상관없이 추었고, 탱고는 씨름을 하였죠(파트너가 안 되것는 지 루틴대로 추라는데 루틴이 생각이 나야지). 그 다음해 파티 때는 식사시간에 나온 와인을 혼자 다 비우고 나갔는데 긴장도 풀리고 한번 경험이 있어선지 크게 실수는 안 하더라구요.
이별없는세상 07.01.22 09:12
왈츠를 배우는 학생으로써 참 험난한 길을 가고 있구나 생각 드옵니다... 머리 비우고 열심히 연마하는수밖에요~~~~~
눈동자2 07.01.22 09:15
청노루님께도 그런 어려운 경험도 있으셨군요. 특히 왈츠는 할수록 부족함을 느낍니다. 왜 이렇게 바디 세우기가 어려운지 ....청노루님 연습장소에서 눈팅이라도 해야 할텐데요. 글 읽으며 청노루님의 조각같은 정자세 흉내 한 번 내 봅니다. 다음 글 기대하며 즐거운 날 보내세요*^&^*
보라매 07.01.22 09:19
머피의 법칙이 통했나보군요. 산전수전 경험이 오늘의 백전노장!!!
신나는세상 07.01.22 14:15
대회에 처음 출전하는 선수들도 그런 경험한대요.... 머리 속이 하얗게 빈대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폭포수처럼 07.01.22 14:29
지금에 청노루님이 위 같은 과정을 격지 않으셨다면?? 너무 열쓈 공부하시는 것 존경스럽고 저도 연습할 때 노루님 글 생각하며 열씸내볼라꼬 하는데 아이구 한 시간은 고사하구 십분도 연습하기가 쉽지 않네요. 글도 단 일이 분이라두 연습 삼매경에 빠져 베이직 늘콰볼라꼬 애쓰는 중임다. 정말 노루님 땐스 존경스러울뿐!!!
아인 07.01.22 15:39
댄스인치고 이런 곤경을 껶어 보지않은 이가 있을까요. 특히 내성적인 남자에겐 더욱더.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도 역시 시범이나 시합은 떨리게 마련이죠. 경력이 쌓이면 다만 틀렸을 때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해결하는 정도가 아닐까요. 재미있게 경험담 읽었습니다.
khd703007.01.24 13:36
^^ 처음부터 잘 되는건 없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