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레이션: (전쟁살육 동영상), 기원전 711년, 주 유왕의 죽음과 함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됩니다. 기존의 가치는 무너지고 전쟁이 일상화 하면서 약자의 삶이 철저히 짓밟히는 절망적인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지만 절망과 어둠은 오히려 새로운 생각의 밑 걸음이 됩니다. 절망적이기에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희망을 찾아나선 이들, 세상의 고통에서 눈 돌리지 않고 짓밟히는 이들의 편에서 새로운 생활을 꿈꾼 사람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생각의 폭발을 보여준 그들을 우리는 제자백가 라고 부릅니다.
내레이션1: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고니라 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은 붕이었습니다. 그 등의 길이가 몇 천리에 이르는지 알 수 없었고 한번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씨는 하늘의 구름 같았습니다. 붕이 남쪽 깊은 바다로 옮길 때 파도는 삼천리나 솟구치고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 오르니 구만리 장천을 날았습니다. 春秋戰國時代는 亂世였습니다. 난세란 어떤 세상일까요. 아마도 폭풍우치는 바다 같은 세월일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있고자 하여도 세상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혼란과 고통이 우리를 잡고 흔들어댑니다. 그저 가만히 숨 죽이고 있는 일 조차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배가 폭풍우를 만나면 불필요한 짐은 버려야 합니다. 내게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아낌 없이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로저 에임스/하와이대 철학과 교수: 급변하는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은 이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흐름을 따릅니다. 자동차의 방향을 따라 이동하면서 차를 따라가는 것처럼 말이죠.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배 안의 물건을 버리는 비유처럼 난세에는 가벼운 것은 살아남고 무거운 것은 가라 앉습니다.
내레이션: 이렇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인간은 누구나 철학적 질문에 마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삶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莊子는 당신이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입니다. 春秋時代 말기 중국 월 나라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왕의 계승자인 수가 왕좌를 버리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왕자 수는 왜 모두가 차지하고 싶어하는 왕위를 버리고 달아나려는 것일까요. 당시 월 나라 왕실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왕실 내부의 骨肉相殘으로 앞선 세 사람의 왕은 모두 비명에 죽고 말았죠.
류 샤오간/홍콩중문대 철학과 교수: 실제로 당시에 관직에 오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위에서 오는 위험과 동시에 아래에서 오는 위험, 예를 들면 자식이 아버지를 죽인다거나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그런 일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실제로 한 나라의 임금이 연달아 세 명이나 살해 당하기도 했습니다.
내레이션: 결국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던 왕자 수에게 까지 왕의 자리가 돌아온 것입니다. 왕자도 도망을 칩니다.
신정근/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왕자 수가 생각 하기에 지금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자신이 평소에 가졌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내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위험이라고 나의 자연적인 수명이 80세지만 왕의 자리에 오르면 40이나 50세에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왕자 수는 왕 위에 오르는 것보다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내레이션: 왕자 수는 산 속의 동굴에 몸을 숨기고 세상과 인연을 끊습니다.
빅터 메이어/펜실베니아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눈에 띄지 마십시오. 자신을 숨기세요. 완벽하게 숨을 수는 없겠지만 이 혼란과 위험 속에서 함께 하자고 누가 찾아온다면 재빨리 피하세요. 그게 바로 살아남아 행복하고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도 말이죠. (동굴 속의 왕자 수),
류샤오간: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왕자 수가 왕 위에 오르기 싫어한 이유는 왕 위에 오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그가 생각하기에 사실 왕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왕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스스로 알아서 살 수 있다는 거죠.
내레이션: 도가적인 삶의 자세를 완성한 장자도 평생에 걸쳐 물질적 이득보다 생명을 우선시 하는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장자의 원래의 이름은 장주, 전국 시대의 한 복판인 기원전 300년 전후의 시대를 살았죠.
빅터 메이어: 장자는 기원전 4세기 중반 369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옻 나무 정원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였습니다. 하지만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것 외에 그에 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 언어에 관심이 많고 언변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로저 에임스: 장자는 자신의 자유를 정치 권력이나 돈, 영향력으로 바꾸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연스러운 삶을 원했습니다. 이렇게 평생 자유를 즐기며 살던 장자에게도 출세할 기회가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장자가 복수라는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자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들은 초 나라의 유 왕이 대부 두 사람을 보내 장자를 초 나라의 재상으로 삼겠다는 뜻을 전한 것입니다.
류사오간: 장자는 가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아주 귀한 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 소의 털은 전부 다 같은 색인데 이런 소를 희우(犧牛)라고 합니다.. 이 소는 아주 좋은 대우를 받습니다. 먹이도 좋은 걸 먹이고 기르다가 죽여서 태묘, 즉 왕실의 종묘에 제물로 바칩니다. 이 때는 굉장히 아름다운 비단 옷을 입히고 제단에 올려 태묘에 제물로 바칩니다. 장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해 동안 이렇게 좋은 대우를 받다가 제물로 바쳐지게 될 때가 돼서야 한 마리 돼지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소. 마찬가지로, 내가 관직에 오르면 마치 지위가 높아진 듯 하지만 사실상 감시 당하는 거나 다름 없으니 겉 보기엔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자유를 잃어버려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소. 그러니 더 이상 내게 이런 말씀 마십시오.
내레이션: 결국 초나라 유왕의 초대는 무산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의 불행은 단지 목숨을 잃은 게 아닙니다. 소의 진정한 불행은 자유를 잃은 것입니다. 자유를 빼앗겼기에 자신의 목숨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목숨 마저 잃은 것이죠. (장자사/안휘성 박수 시 몽성 현), 장자는 소의 비유를 통해 단지 생명의 소중함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자유이니까요. 장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澤雉(택치) 못가의 꿩 한 마리
十步一돈 열 걸음에 한 입 쪼고
百步一飮 백 걸음에 물 한 모금
不단畜乎분中 갇혀서 얻어먹기 그토록 싫어함은
神추王不善也 양 같은 대접에도 신이 나지 않기 때문 [장자] 양생주 중에서
그래서 장자는 당시로서는 지식인들의 유일한 취업기회였던 정부 요직을 멀리 했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가난이 주는 자유를 즐겼죠.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가난을 감수하고 세상을 벗어나려 해도 세상의 올가미가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물은 사방으로 펼쳐지고 온갖 올가미들이 옥죄어 옵니다. 왕자 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자 수 찾는 동영상), 이 이야기에는 다시 더 흥미로운 후반부가 있습니다. 왕자가 사라지자 월 나라에는 난리가 났습니다. 왕이 될 사람이 없어졌으니까요. 곧 왕자 수를 찾아 전국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죠. 그리고는 결국 그가 숨어 있는 동굴을 찾아 냅니다.
류샤오간: 백성들은 왕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아 갔습니다. 이 사람이 왕이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왕자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왕자가 단호히 거절하자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굴 앞에서 연기를 피워 그가 밖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연기 때문에 밖에 나온 왕자는 왜 기어이 저더러 왕이 되라고 하십니까? 라고 탄식합니다. 그는 정말로 왕이 되기 싫었던 것입니다.
내레이션: 우스꽝스럽지만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서 왕을 시킨 거죠. 왕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합니다. 임금이라니~ 임금이라니~ 어째서 나를 가만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인가. 왕자 수의 절규가 꼭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겁니다. 세상이라는 올가미는 정말 끈질깁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쉽게 놓아주지 않습니다. 왕자 수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하물며 현대사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국가와 사회가 의무라는 이름으로 쳐놓은 그물은 촘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은둔이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해결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절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도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방법을 장자가 알려드릴 것입니다. 어느 날 장자가 밤나무 숲 근처를 산책하다가 이상한 까치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까치는 장자가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의 눈 앞을 스쳐 나무에 앉았습니다. 장자는 생각합니다. 저 놈은 어떤 새인가? 저렇게 큰 날개를 갖고도 멀리 날지 못하고 저렇게 큰 눈을 갖고도 잘 보질 못하니~
류샤오간: 따라가서 보니 새가 사마귀 한 마리를 쫓고 있었습니다. 사마귀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고 새는 사마귀를 잡아 먹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사마귀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사마귀 앞에 매미 한 마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귀 보다 더 작은 동물이죠. 사마귀는 매미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았으나 새가 뒤에서 노리고 있더라 (螳螂捕蝉 黃省雀在后)는 성어가 바로 이렇게 생겨난 겁니다. 이 광경을 본 장자는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새는 사마귀를 잡아먹으려 하고 사마귀는 앞에 있는 매미를 잡으려 하는데 나는 이 새를 쫓고 있으니 모두가 하나의 사슬로 엮여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남을 해하고 자기 잇속만 차리려 하지만 정작 자기 뒤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을 해하기 위해 노리고 있음을 모르는구나.
내레이션: 두려움을 느낀 장자가 일어서려는 순간 밤나무 숲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장자를 도둑으로 오인하고 쫓아옵니다. 장자 조차 눈 앞에 까치에 취해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죠.
신정근: 장자가 이 우화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뭔가 하면 이 당시 사람들이 한쪽 방향으로 가는데 그 한쪽 방향이 과연 선이냐 지금 이 우화에서 보면 죽음이잖아요. 내가 앞을 바라보면서 사냥의 목표물을 얻을 것처럼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사냥물을 잡는 순간 나도 사냥물이 바로 되어 버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장자가 그 우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들 앞만 보고 특정 방향으로 가면서 그게 선이고 살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게 죽음의 길일 수도 있다는 거죠.
내레이션: 이처럼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물질적 성공에 눈이 머는 것입니다. 매미와 사마귀와 까치, 그리고 장자의 경우처럼 성공에 눈이 멀면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감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것이 물질적인 성공만은 아닙니다. (경극 동영상), 하루는 오 나라 왕이 강에 배를 띄우고 원숭이 산에 올랐습니다. 원숭이들은 그를 달아나 깊은 가시나무 숲으로 도망을 쳤죠.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거만하게 왕에게 재주를 뽑내며 놀려댑니다. 화가 난 왕은 화살을 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원숭이는 민첩하게 화살을 피하기 까지 했죠. 화가 극에 달한 왕은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한꺼번에 쏴라! 결국 원숭이는 화살에 맞은 채 죽고 맙니다.
빅터 메이어: 공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싸우지 마십시오. 많은 이들은 남보다 우월해 지려고 합니다. 남을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왕이나 통치자가 되고자 합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 싸웁니다. 하지만 장자는 이런 방식을 원치 않습니다.
류샤오간: 이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자신의 재주를 너무 믿고 이 사회에서 우쭐거리고 잘난 척하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지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내레이션: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물질적 욕망에 휩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남들에게 존경받고 싶다는 욕망에서도 자유로운 삶이라면 과연 어떤 것일까요? 지리소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턱이 배꼽에 와 닿고 어깨는 목보다 높으며 목뼈는 하늘을 향하고 오장의 위치가 머리보다 위에 있으며 두 넓적 다리가 옆구리에 와있는 그런 곱사등이었다고 합니다.
빅터 메이어: 저는 지리소(支離疏)를 사방으로 흩어진 자로 번역했습니다. 그의 신체 각 부분들은 전부 흩어져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장자에는 장애를 가진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살면서 곤란한 일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내레이션: 곱사등이로 등이 휘어있기 때문에 바느질이나 빨래를 하는 데는 안성맞춤으로 사방에서 데려다 일을 시키는지라 먹고 지내는 데는 아무 걱정이 없었습니다. 또 키로 곡식과 겨를 까부는 일이라면 가족을 넉넉히 먹여 살릴 만했다고 합니다. 더욱 결정적인 장점은 전쟁이 빈발하던 난세에 전쟁터에 끌려갈 걱정이 없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나라에서 군대를 징발할 때도 두 팔을 내저으며 그곳을 지날 수 있고 큰 공사판으로 부역꾼을 마구 끌고 갈 때에도 지리소만은 끌려가는 일이 없었죠. 그런데도 나라에서 빈민구제가 있을 때면 생긴 모습 덕분에 쌀 석정에 장작 열 단은 꼭 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저 에임스: 이 비유에서는 장애를 가진 이의 몸과 마음을 장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지리소는 이런 조건들을 조합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습니다. 목재로는 쓸모가 없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나무를 베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살아남았고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를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 합니다. 쓸모 없는 것의 큰 쓰임이라는 뜻입니다.
내레이션: 사실 물질적 욕망과 성공에 대한 욕망을 버린 인간은 사회적으로 쓸모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쓸모 없는 존재가 됨으로써 인간은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죠. 쓸모 없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일이 없으며 쓸모 있어지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고통스럽게 괴롭히지 않습니다.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고 남들 보다 앞서 나가려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장자는 자신의 발자욱과 그림자를 싫어하는 인간의 이야기에서 비웃고 있습니다.
로저 에임스: 자기 그림자를 피해 계속 달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발자국에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빨리 달립니다. 하지만 자기 그림자와 발자국 보다 더 빨리 갈 수는 없습니다. 장자는 그가 그저 나무 밑에 누웠더라면 훨씬 좋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나무 아래서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으니까요. 누워서 쉬면 발자국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즉 여유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자연을 즐기고 이 순간을 즐기세요. 아마도 이 중국 고전에서 얻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지금 현재를 살라는 것입니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 마세요. 미래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레이션: 그런데 말입니다. 돈과 명예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버림으로써 평화로운 삶을 얻을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또 다른 욕망이 남아 있습니다. 아니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오히려 어색한 것이죠. 공자나 묵자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돈이나 명예 때문에 그토록 고된 삶을 살고 죽음의 위기를 수없이 넘겨야 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숭고한 이상이 있었습니다. 亂世를 바로 잡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 말입니다. 하지만 장자는 숭고한 이상에 대해서도 신랄한 평가를 남깁니다. 도척이라는 흉악한 도적이 있었습니다. 9천 명에 이르는 졸개를 거느리고 다녔죠. 집을 부수고 들어가 남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약탈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습니다. 한 마디로 떼 강도인 셈입니다. 하루는 도척의 부하가 도척에게 물었습니다. 도적질에도 道가 있습니까? 도척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어디엔들 도가 없겠느냐. 무릇 남의 집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마음대로 알아 맞추는 것이 聖이다. 남보다 앞장서 들어가는 것이 勇이다. 나올 때는 남보다 나중에 나오는 것이 義다. 도둑질을 해도 안전한지 가부를 판단해 아는 것이 知이며, 고루 나누어 갖는 것이 仁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못하고서 큰 도둑이 된 자는 천하에 없느니라.
류샤오간: 유가 사회에서는 도덕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도덕에는 옳은 것에 대한 기준과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맞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틀린 것인지가 매우 명확합니다.하지만 노장 사상은 이처럼 명확하고 또렷한 옳고 그름의 개념을 타파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옳고 그름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구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고착화된 방법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레이션: 침어낙안(沈魚落雁) 이란 말이 있습니다. 전설적인 미녀인 서씨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인데요. 서씨의 아름다움에 취해 물고기들이 가라앉고 날아가던 기러기가 떨어졌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럴 리가 없겠죠. 오히려 서씨가 다가오면 기러기들은 날아서 달아나고 물고기들은 물 풀 속에 숨을 것입니다. 장자는 이런 발상이 지극히 오만한 인간의 입장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류샤오간: 이 일화는 표면적으로는 동물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서로 다른 동물들은 살기 좋은 곳, 맛 있는 음식,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른데 인간도 마찬 가지로 아름다움, 맛 있는 음식, 듣기 좋은 소리, 살기 편한 곳 등에 대한 기준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획일적인 기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나아가 어떠한 사회나 국가도 유일하고 단일한 기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로저 에임스: 이 일화는 모든 형태의 독단주의는 지혜에 반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좋은 생각이 내일의 나쁜 생각이 됩니다. 인간의 경험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연해야 합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인간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가 굳어지면 독단이 됩니다. 억압하고 변화를 방해하면 파시즘, 전체주의가 됩니다.
내레이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반대하는 이들만 사라지면 천국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으니까요.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지옥으로 끝났죠. 힛틀러가 그랬고 일본제국이 그랬으며 킬링 필드를 낳은 폴 포트정권이 그랬습니다.
빅터 메이어: 장자는 모든 것이 이쪽과 저쪽, 옳고 그름, 참과 거짓으로 나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가능성의 범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찬반이 양쪽으로 나뉠 때도 있지만 대개 절대적인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물(齊物)은 모든 여러가지 가능성을 고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것도 궁극적인 진실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진실도 그 범위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레이션: 돈, 명예, 이데올로기 같은 세상이 강요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행복해 질 것입니다. 내려 놓으면 내려놓을수록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이 가능한 것이죠. 하지만 이런 삶조차도 우리의 불안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장자묘/하남성 상구 시 민권 현),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자는 사물의 본성에 대해 깊은 통찰을 얻는다면 이러한 두려움도 줄어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장자의 아내가 죽자 친구인 해시가 조문을 갔습니다. 장자는 마침 땅 바닥에 주저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죠. 해시는 기가 막혀서 말합니다. 아내가 죽었으면 슬퍼 곡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자네는 오히려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류샤오간: 장자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모르고 있어, 나도 처음에는 슬퍼했네. 그러나 나중에 생각을 해보니 이 세상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지 않은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호하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무엇인지도 알 수 없던 세상에 기(氣)가 생겨났고 기가 생기고 나서 형상이 생겨났지. 형상이 생기고 나서야 풀과 나무, 돌 등 생명체들이 생겨났고 그러고 나서야 사람이 생기고 내 아내가 생겨났네. 지금 내 아내가 죽었으니 다시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서 잠을 자는 거지. 그런데 만약 내가 슬퍼한다면 이런 이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자묘/하남성 상구 시 민권 현),
내레이션: 스피노자의 변을 빌리자면 모든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한 우리의 마음은 그 영향력부터 덜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죽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죽음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인다면 그 숙명으로 인한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피할 수는 없어도 받아드릴 수는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장자의 더 깊은 통찰이 녹아 있습니다.
로저 에임스: 장자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서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개별적 존재란 추상적 관념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나라는 사람은 내 피부나 나의 가족 나의 시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아득한 우주와 닿아 있습니다. 나는 변화 과정의 일부분입니다. 나의 정체성이 변화의 전 과정과 함께 한다면 나는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계속 됩니다. 모든 순간이 죽음이고 모든 순간이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계속 살아갈 뿐입니다. 하지만 죽음과 관계없이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죽음을 보완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빅터 메이어: 두러워 하지 마십시오.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들이 나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느끼지 마세요.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자연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위협을 느끼고 걱정되고 불안할 때 우리는 병이 나고 이상한 일을 벌이고 미쳐 버립니다.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른다면 말입니다. 장자는 좋은 삶을 원한다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어쨌든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내레이션: 장자란 이름으로 알려진 장자의 책은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장자의 죽음이 다가오자 제자들은 스승의 장례를 어찌 치를 지를 놓고 논의를 합니다. 평생을 세속적 욕망과 무관하게 자유로운 삶을 살아온 장자에게 어울리는 장례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제자들은 그래도 존경하는 스승인지라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의견을 장자에게 말합니다. 그냥 벌판에 버린다면 새와 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할까 두렵다고도 말하죠.
로저 에임스: 이 이야기를 들은 장자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하늘이 나의 무덤이다. 자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 나의 무덤이다. 나를 땅 위에 묻으면 새가 나를 먹을 것이고 땅 아래에 묻으면 벌레가 나를 먹을 것이다. 무슨 차이가 있느냐? 내가 죽거든 자연의 일부분이 되게 하여라. 나를 배부른 돼지처럼 꾸미지 말아라.
류샤오간: 장자는 사람의 생을 대자연의 순환 가운데 하나의 단계라고 여겼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죽은 뒤 까마귀나 새가 먹든 개미나 땅 강아지가 먹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생명의 순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통해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던 세상에 기(氣)가 생겨나고 형상이 생겨나고 생명이 생겨나고 그러고 나서야 아내가 생겨났습니다. 아내가 죽은 것은 다시 대자연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삶과 죽음은 인생 전반의 순환과정이지만 단지 인생의 순환 과정일 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인생의 순환이라고 하면 불교 사상과 비슷할 텐데요. 그는 인간의 생명, 인간의 육체, 인간의 세상은 대자연과 함께 동일한 하나의 순환, 발전, 변천 과정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살아 있음에 기뻐할 필요도 없고 죽음을 슬퍼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내레이션: 옛적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습니다. 팔랑 팔랑 경쾌하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스스로 유쾌하고 뜻에 만족스러워 자신이 장자인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장자의 꿈에 장자가 나비가 된 것일까요. 나비의 꿈에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일까요. 끝. (EBS 다큐프라임 절망을 이기는 철학: 제자백가 1440회 장자, 불안을 견딜 수 없을 때 에서 정리)
① 기원전 711년, 주 유왕의 죽음과 함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기존의 가치는 무너지고 전쟁이 일상화 하면서 약자의 삶이 철저히 짓밟히는 절망적인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절망과 어둠은 오히려 새로운 생각의 밑 걸음이 되었다. 절망적이기에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희망을 찾아나선 이들, 세상의 고통에서 눈 돌리지 않고 짓밟히는 이들의 편에서 새로운 생활을 꿈꾼 사람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생각의 폭발을 보여준 그들을 우리는 諸子百家 라고 부른다.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고니라 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은 붕이었다. 그 등의 길이가 몇 천리에 이르는지 알 수 없었고 한번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씨는 하늘의 구름 같았다. 붕이 남쪽 깊은 바다로 옮길 때 파도는 삼천리나 솟구치고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 오르니 구만리 장천을 날았다. 春秋戰國時代는 亂世였다. 난세란 어떤 세상일까. 아마도 폭풍우치는 바다 같은 세월일 것이다. 내가 가만히 있고자 하여도 세상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혼란과 고통이 우리를 잡고 흔들어댄다. 그저 가만히 숨 죽이고 있는 일 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배가 폭풍우를 만나면 불필요한 짐은 버려야 한다. 내게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아낌 없이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② 급변하는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은 이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흐름을 따른다. 자동차의 방향을 따라 이동하면서 차를 따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배 안의 물건을 버리는 비유처럼 난세에는 가벼운 것은 살아남고 무거운 것은 가라 앉는다. 이렇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인간은 누구나 철학적 질문에 마주 할 수 밖에 없다. 내 삶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莊子는 당신이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春秋時代 말기 중국 월 나라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왕의 계승자인 수가 왕좌를 버리고 도망을 친 것이다. 왕자 수는 왜 모두가 차지하고 싶어하는 왕위를 버리고 달아나려는 것일까. 당시 월 나라 왕실은 혼돈 그 자체였다. 왕실 내부의 骨肉相殘으로 앞선 세 사람의 왕은 모두 비명에 죽고 말았다. 실제로 당시에 관직에 오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위에서 오는 위험과 동시에 아래에서 오는 위험, 예를 들면 자식이 아버지를 죽인다거나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그런 일들이 굉장히 많았다. 실제로 한 나라의 임금이 연달아 세 명이나 살해 당하기도 했다. 결국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던 왕자 수에게 까지 왕의 자리가 돌아온 것이다. 왕자도 도망을 쳤다.
③ 왕자 수가 생각 하기에 지금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자신이 평소에 가졌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내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위험이라고 나의 자연적인 수명이 80세지만 왕의 자리에 오르면 40이나 50세에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왕자 수는 왕 위에 오르는 것보다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왕자 수는 산 속의 동굴에 몸을 숨기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눈에 띄지 마라. 자신을 숨기라. 완벽하게 숨을 수는 없겠지만 이 혼란과 위험 속에서 함께 하자고 누가 찾아온다면 재빨리 피하라. 그게 바로 살아남아 행복하고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도 말이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왕자 수가 왕 위에 오르기 싫어한 이유는 왕 위에 오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그가 생각하기에 사실 왕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왕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스스로 알아서 살 수 있다. 도가적인 삶의 자세를 완성한 장자도 평생에 걸쳐 물질적 이득보다 생명을 우선시 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④ 장자의 원래의 이름은 장주, 전국 시대의 한 복판인 기원전 300년 전후의 시대를 살았다. 장자는 기원전 4세기 중반 369년에 태어났다. 그는 옻 나무 정원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였다. 하지만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것 외에 그에 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 언어에 관심이 많고 언변이 뛰어났다. 장자는 자신의 자유를 정치 권력이나 돈, 영향력으로 바꾸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러운 삶을 원했다. 이렇게 평생 자유를 즐기며 살던 장자에게도 출세할 기회가 찾아왔다. 하루는 장자가 복수라는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자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들은 초 나라의 유 왕이 대부 두 사람을 보내 장자를 초 나라의 재상으로 삼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장자는 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아주 귀한 소 한 마리가 있다. 이 소의 털은 전부 다 같은 색인데 이런 소를 희우(犧牛)라고 한다. 이 소는 아주 좋은 대우를 받는다. 먹이도 좋은 걸 먹이고 기르다가 죽여서 태묘, 즉 왕실의 종묘에 제물로 바친다. 이 때는 굉장히 아름다운 비단 옷을 입히고 제단에 올려 태묘에 제물로 바친다.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몇 해 동안 이렇게 좋은 대우를 받다가 제물로 바쳐지게 될 때가 돼서야 한 마리 돼지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관직에 오르면 마치 지위가 높아진 듯 하지만 사실상 감시 당하는 거나 다름 없으니 겉 보기엔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자유를 잃어버려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 그러니 더 이상 내게 이런 말씀 마라. 결국 초나라 유왕의 초대는 무산 되었다.
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소의 불행은 단지 목숨을 잃은 게 아니다. 소의 진정한 불행은 자유를 잃은 것이다. 자유를 빼앗겼기에 자신의 목숨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목숨 마저 잃은 것이다. 장자는 소의 비유를 통해 단지 생명의 소중함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를 이야기 하고 있다. 생명의 본질은 자유다. 장자는 당시로서는 지식인들의 유일한 취업기회였던 정부 요직을 멀리 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가난이 주는 자유를 즐겼다.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가난을 감수하고 세상을 벗어나려 해도 세상의 올가미가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물은 사방으로 펼쳐지고 온갖 올가미들이 옥죄어 온다. 왕자 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야기에는 다시 더 흥미로운 후반부가 있다. 왕자가 사라지자 월 나라에는 난리가 났다. 왕이 될 사람이 없어졌다. 곧 왕자 수를 찾아 전국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결국 그가 숨어 있는 동굴을 찾아 냈다. 백성들은 왕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찾아 갔다. 이 사람이 왕이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자는 단호히 거절했다. 왕자가 단호히 거절하자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굴 앞에서 연기를 피워 그가 밖으로 나오게 했다. 연기 때문에 밖에 나온 왕자는 왜 기어이 저더러 왕이 되라고 하십니까? 라고 탄식한다. 그는 정말로 왕이 되기 싫었다. 우스꽝스럽지만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서 왕을 시킨 거다. 왕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한다. 임금이라니~ 임금이라니~ 어째서 나를 가만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인가. 왕자 수의 절규가 꼭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세상이라는 올가미는 정말 끈질기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왕자 수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물며 현대사회는 더욱 그렇다. 국가와 사회가 의무라는 이름으로 쳐놓은 그물은 촘촘하기 이를 데 없다. 은둔이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해결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절망하실 필요는 없다. 이제부터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도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방법을 장자가 알려드릴 것이다.
⑥ 어느 날 장자가 밤나무 숲 근처를 산책하다가 이상한 까치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까치는 장자가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의 눈 앞을 스쳐 나무에 앉았다. 장자는 생각한다. 저 놈은 어떤 새인가? 저렇게 큰 날개를 갖고도 멀리 날지 못하고 저렇게 큰 눈을 갖고도 잘 보질 못하니~ 따라가서 보니 새가 사마귀 한 마리를 쫓고 있었다. 사마귀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고 새는 사마귀를 잡아 먹으려 하고 있었다. 사마귀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사마귀 앞에 매미 한 마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귀 보다 더 작은 동물, 사마귀는 매미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았으나 새가 뒤에서 노리고 있다. 당랑포선 황성작재후(螳螂捕蝉 黃省雀在后) 라는 성어가 바로 이렇게 생겨났다. 이 광경을 본 장자는 갑자기 깨달았다. 새는 사마귀를 잡아먹으려 하고 사마귀는 앞에 있는 매미를 잡으려 하는데 나는 이 새를 쫓고 있으니 모두가 하나의 사슬로 엮여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남을 해하고 자기 잇속만 차리려 하지만 정작 자기 뒤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을 해하기 위해 노리고 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장자가 일어서려는 순간 밤나무 숲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장자를 도둑으로 오인하고 쫓아온다. 장자 조차 눈 앞에 까치에 취해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⑦ 장자가 이 우화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뭔가 하면 이 당시 사람들이 한쪽 방향으로 가는데 그 한쪽 방향이 과연 선이냐 지금 이 우화에서 보면 죽음이다. 내가 앞을 바라보면서 사냥의 목표물을 얻을 것처럼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사냥물을 잡는 순간 나도 사냥물이 바로 되어 버리는 거다. 그래서 장자가 그 우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들 앞만 보고 특정 방향으로 가면서 그게 선이고 살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게 죽음의 길일 수도 있다. 이처럼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물질적 성공에 눈이 머는 것이다. 매미와 사마귀와 까치, 그리고 장자의 경우처럼 성공에 눈이 멀면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감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것이 물질적인 성공만은 아니다. 하루는 오 나라 왕이 강에 배를 띄우고 원숭이 산에 올랐다. 원숭이들은 그를 달아나 깊은 가시나무 숲으로 도망을 쳤디.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거만하게 왕에게 재주를 뽑내며 놀려댄다. 화가 난 왕은 화살을 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원숭이는 민첩하게 화살을 피하기 까지 했다. 화가 극에 달한 왕은 신하들에게 말한다. 한꺼번에 쏴라! 결국 원숭이는 화살에 맞은 채 죽고 만다. 공격적이어서는 안 된다. 싸우지 마시라. 많은 이들은 남보다 우월해 지려고 한다. 남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왕이나 통치자가 되고자 한다. 최고가 되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장자는 이런 방식을 원치 않는다. 이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자신의 재주를 너무 믿고 이 사회에서 우쭐거리고 잘난 척하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지한 행위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물질적 욕망에 휩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남들에게 존경받고 싶다는 욕망에서도 자유로운 삶이라면 과연 어떤 것일까. 지리소(支離疏)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턱이 배꼽에 와 닿고 어깨는 목보다 높으며 목뼈는 하늘을 향하고 오장의 위치가 머리보다 위에 있으며 두 넓적 다리가 옆구리에 와있는 그런 곱사등이었다. 지리소를 사방으로 흩어진 자로 번역했다. 그의 신체 각 부분들은 전부 흩어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겼다. 장자에는 장애를 가진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불행하지 않았다. 살면서 곤란한 일에 휘말리지 않았다.
⑧ 지리소는 곱사등이로 등이 휘어있기 때문에 바느질이나 빨래를 하는 데는 안성맞춤으로 사방에서 데려다 일을 시키는지라 먹고 지내는 데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또 키로 곡식과 겨를 까부는 일이라면 가족을 넉넉히 먹여 살릴 만했다. 더욱 결정적인 장점은 전쟁이 빈발하던 난세에 전쟁터에 끌려갈 걱정이 없다. 때문에 나라에서 군대를 징발할 때도 두 팔을 내저으며 그곳을 지날 수 있고 큰 공사판으로 부역꾼을 마구 끌고 갈 때에도 지리소만은 끌려가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라에서 빈민구제가 있을 때면 생긴 모습 덕분에 쌀 석정에 장작 열 단은 꼭 받을 수 있었다. 이 비유에서는 장애를 가진 이의 몸과 마음을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지리소는 이런 조건들을 조합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목재로는 쓸모가 없는 나무가 있었다. 아무도 그 나무를 베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는 살아남았고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를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 한다. 쓸모 없는 것의 큰 쓰임이라는 뜻이다. 사실 물질적 욕망과 성공에 대한 욕망을 버린 인간은 사회적으로 쓸모 없는 존재다. 하지만 이렇게 쓸모 없는 존재가 됨으로써 인간은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다. 쓸모 없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일이 없으며 쓸모 있어지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고통스럽게 괴롭히지 않는다.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고 남들 보다 앞서 나가려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장자는 자신의 발자욱과 그림자를 싫어하는 인간의 이야기에서 비웃고 있다.
⑨ 자기 그림자를 피해 계속 달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자기 발자국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빨리 달린다. 하지만 자기 그림자와 발자국 보다 더 빨리 갈 수는 없다. 장자는 그가 그저 나무 밑에 누웠더라면 훨씬 좋았을 거라고 말한다. 나무 아래서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으니까. 누워서 쉬면 발자국도 생기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즉 여유를 가지라는 말이다. 자연을 즐기고 이 순간을 즐기라. 아마도 이 중국 고전에서 얻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지금 현재를 살라는 것이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 마라. 미래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말이다. 돈과 명예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버림으로써 평화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또 다른 욕망이 남아 있다. 아니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오히려 어색하다. 공자나 묵자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돈이나 명예 때문에 그토록 고된 삶을 살고 죽음의 위기를 수없이 넘겨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숭고한 이상이 있었다. 亂世를 바로 잡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 말이다.
⑩ 하지만 장자는 숭고한 이상에 대해서도 신랄한 평가를 남긴다. 도척이라는 흉악한 도적이 있었다. 9천 명에 이르는 졸개를 거느리고 다녔다. 집을 부수고 들어가 남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약탈하며 천하를 돌아다녔다. 한 마디로 떼 강도인 셈이다. 하루는 도척의 부하가 도척에게 물었다. 도적질에도 道가 있습니까. 도척의 대답이 걸작이다. 어디엔들 도가 없겠느냐. 무릇 남의 집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마음대로 알아 맞추는 것이 聖이다. 남보다 앞장서 들어가는 것이 勇이다. 나올 때는 남보다 나중에 나오는 것이 義다. 도둑질을 해도 안전한지 가부를 판단해 아는 것이 知이며, 고루 나누어 갖는 것이 仁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못하고서 큰 도둑이 된 자는 천하에 없다. 유가 사회에서는 도덕을 굉장히 강조한다. 도덕에는 옳은 것에 대한 기준과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이 있다. 어떻게 하면 맞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틀린 것인지가 매우 명확하다. 하지만 노장 사상은 이처럼 명확하고 또렷한 옳고 그름의 개념을 타파하고자 한다. 실제로 옳고 그름은 상대적인 것이다. 옳고 그름의 구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고착화된 방법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다.
⑪ 침어낙안(沈魚落雁) 이란 말이 있다. 전설적인 미녀인 서씨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서씨의 아름다움에 취해 물고기들이 가라앉고 날아가던 기러기가 떨어졌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럴 리가 없겠다. 오히려 서씨가 다가오면 기러기들은 날아서 달아나고 물고기들은 물 풀 속에 숨을 것이다. 장자는 이런 발상이 지극히 오만한 인간의 입장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 일화는 표면적으로는 동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 다른 동물들은 살기 좋은 곳, 맛 있는 음식,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른데 인간도 마찬 가지로 아름다움, 맛 있는 음식, 듣기 좋은 소리, 살기 편한 곳 등에 대한 기준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획일적인 기준에서 벗어나게 된다. 나아가 어떠한 사회나 국가도 유일하고 단일한 기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모든 형태의 독단주의는 지혜에 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좋은 생각이 내일의 나쁜 생각이 된다. 인간의 경험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유연해야 한다. 다양한 관점에서 인간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가지가 굳어지면 독단이 된다. 억압하고 변화를 방해하면 파시즘, 전체주의가 된다.
⑫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반대하는 이들만 사라지면 천국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지옥으로 끝났다. 힛틀러가 그랬고 일본제국이 그랬으며 킬링 필드를 낳은 폴 포트정권이 그랬다. 장자는 모든 것이 이쪽과 저쪽, 옳고 그름, 참과 거짓으로 나뉜다고 보지 않았다. 가능성의 범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찬반이 양쪽으로 나뉠 때도 있지만 대개 절대적인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물(齊物)은 모든 여러가지 가능성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것도 궁극적인 진실을 대변하지 않는다. 진실도 그 범위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돈, 명예, 이데올로기 같은 세상이 강요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행복해 질 것이다. 내려 놓으면 내려놓을수록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조차도 우리의 불안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자는 사물의 본성에 대해 깊은 통찰을 얻는다면 이러한 두려움도 줄어들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날 장자의 아내가 죽자 친구인 해시가 조문을 갔다. 장자는 마침 땅 바닥에 주저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시는 기가 막혀서 말한다. 아내가 죽었으면 슬퍼 곡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자네는 오히려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모르고 있다, 나도 처음에는 슬퍼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을 해보니 이 세상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호하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무엇인지도 알 수 없던 세상에 기(氣)가 생겨났고 기가 생기고 나서 형상이 생겨났다. 형상이 생기고 나서야 풀과 나무, 돌 등 생명체들이 생겨났고 그러고 나서야 사람이 생기고 내 아내가 생겨났다. 지금 내 아내가 죽었으니 다시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서 잠을 자는 거다. 그런데 만약 내가 슬퍼한다면 이런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⑬ 스피노자의 변을 빌리자면 모든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한 우리의 마음은 그 영향력부터 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죽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인다면 그 숙명으로 인한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다. 피할 수는 없어도 받아드릴 수는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장자의 더 깊은 통찰이 녹아 있다. 장자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서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개별적 존재란 추상적 관념일 뿐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나라는 사람은 내 피부나 나의 가족 나의 시간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이 아득한 우주와 닿아 있다. 나는 변화 과정의 일부분이다. 나의 정체성이 변화의 전 과정과 함께 한다면 나는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계속 된다. 모든 순간이 죽음이고 모든 순간이 생명으로 이어진다. 나는 계속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죽음과 관계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매 순간 죽음을 보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두러워 하지 마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들이 나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느끼지 마라.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자연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위협을 느끼고 걱정되고 불안할 때 우리는 병이 나고 이상한 일을 벌이고 미쳐 버린다.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른다면 말이다. 장자는 좋은 삶을 원한다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어쨌든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⑭ 장자란 이름으로 알려진 장자의 책은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장자의 죽음이 다가오자 제자들은 스승의 장례를 어찌 치를 지를 놓고 논의한다. 평생을 세속적 욕망과 무관하게 자유로운 삶을 살아온 장자에게 어울리는 장례는 과연 어떤 것일까. 제자들은 그래도 존경하는 스승인지라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의견을 장자에게 말한다. 그냥 벌판에 버린다면 새와 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할까 두렵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장자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늘이 나의 무덤이고 자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 나의 무덤이다. 나를 땅 위에 묻으면 새가 나를 먹을 것이고 땅 아래에 묻으면 벌레가 나를 먹을 것이다. 무슨 차이가 있냐. 내가 죽거든 자연의 일부분이 되게 하여라. 나를 배부른 돼지처럼 꾸미지 말아라. 장자는 사람의 생을 대자연의 순환 가운데 하나의 단계라고 여겼다. 때문에 자신이 죽은 뒤 까마귀나 새가 먹든 개미나 땅 강아지가 먹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생명의 순환이라고 생각했다.
⑮ 아내의 죽음을 통해 그는 깨달았다. 아무 것도 없던 세상에 기(氣)가 생겨나고 형상이 생겨나고 생명이 생겨나고 그러고 나서야 아내가 생겨났다. 아내가 죽은 것은 다시 대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삶과 죽음은 인생 전반의 순환과정이지만 단지 인생의 순환과정일 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인생의 순환이라고 하면 불교 사상과 비슷하다. 그는 인간의 생명, 인간의 육체, 인간의 세상은 대자연과 함께 동일한 하나의 순환, 발전, 변천과정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살아 있음에 기뻐할 필요도 없고 죽음을 슬퍼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옛적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팔랑 팔랑 경쾌하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스스로 유쾌하고 뜻에 만족스러워 자신이 장자인 것도 알지 못했다. 장자의 꿈에 장자가 나비가 된 것일까. 나비의 꿈에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