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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우리 주여
2017. 6. 25(주일낮예배) 시편 8:1-9
가거도 출신 테너 가수 조용갑씨에게는 간증이 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께 물려주신 것이 빚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빚을 갚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그 삶이 너무 힘들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 온 동네가 시끄럽게 싸움하고, 또 엄마와 가족들을 무차별로 때렸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조용갑씨는 정말 죽고 싶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하는 그 해에 서울로 상경하여서 권투를 배우기 시작했다. 마음의 분노와 삶의 고통 속에 조용갑씨는 열심히 권투를 했다. 그래서 한국프로복서 7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조용갑씨가 권투를 하면서 자기 몸의 콤플렉스를 알게 되었다. 권투경기를 하면 다른 선수들에 비하여 조용갑씨는 얼굴을 너무 많이 맞았다. 그리고 상대방과 똑같이 주먹을 내었는데 상대방은 맞지 않고, 자기만 맞는 것이었다. 왜 그럴까? 생각한 조용갑씨는 너무 쉽게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조용갑씨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얼굴이 굉장히 컸다. 그리고 키가 작고 몸이 탄탄했던 조용갑씨는 팔이 짧았기 때문에 같이 주먹을 내면 맞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께 왜 제 얼굴을 이렇게 크게 낳았느냐?고 불평을 했더니 어머니는 야 이놈아 네가 너의 큰 얼굴 때문에 더 고생했다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사진 조용갑>
이렇게 얼굴 크고 팔이 짧은 조용갑씨는 권투를 그만 두고 27살에 성악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답답한 마음에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편하고 좋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기타치면서 노래를 불렀더니 사람들이 성악을 해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조용갑씨는 성악을 배우기 위하여 이태리로 유학가서 오페라 가수가 되었다. 그런데 오페라 가수가 되었을 때 조용갑씨는 큰 얼굴과 짧은 팔에 굶은 몸매를 주신 어머니께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오페라의 주연은 테너가 차지하는데, 조용갑씨의 키작고 탄탄한 몸은 테너하기에 제일 좋았다. 그리고 오페라 무대에 많은 사람이 서는데, 그때 멀리서도 얼굴표정이 가장 잘 보이는 사람이 바로 조용갑씨였다. 얼굴이 너무 커서 모든 사람들의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용갑씨는 오페라를 할 때 주연이 되어서 여자 주인공과 손도 잡고, 또 부둥켜 안기도 하면서 모든 주목을 다 받게 된 것이다. 조용갑씨는 권투할 때는 콤플렉스였던 그 큰 얼굴과 몸매가 오페라를 를 할 때는 최고의 장점이 되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장점이 극대화 된 곳에 서 있는가? 제가 대학다닐 때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창세기 1:2절이었다. 창세기 1:1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천지를 창조하는 내용은 3절부터 나온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는 말씀은 2절이 아니라, 3절인 것이다. 그리고 2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하면서 땅의 상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많은 의문점을 가졌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1절에서 천지만물을 지으셨는데, 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말씀이 나올까? 하는 질문도 하였고, 또 3절을 중심으로 해석을 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의 창조인데 이미 하나님이 창조하기 전에 혼돈하고 공허한 세상이 있었단 말인가? 하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 답을 찾았는데 고려신학대학원 기동연교수가 제가 발견한 것과 같은 해석을 해 주었다. 기동연교수는 창세기 1:1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심이 지구에 집중되었는데, 그때 지구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이 지구에 빛을 주시고, 궁창을 나누시고, 땅과 바다를 나누시면서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해석이다.
그런데 이번에 창세기 1:2을 묵상하면서 제 눈에 들어온 구절이 혼돈, 공허, 흑암이었다. 왜냐하면 현재의 삶이 아무 것도 정리가 되지 않은 것같고, 또 살아온 날을 보면 내가 뭐하고 살았지? 하는 공허함이 가득하다. 그리고 살아갈 날을 보면 눈앞이 캄캄하여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이 아닌가? 그런 분은 이제 창세기 1:2을 읽어보기 바란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운행하다는 단어인 므라헤페트(מְרַחֶ֖פֶת)는 신명기 32:11에도 나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광야 40년의 삶을 살았던 모세가 죽음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그때 모세는 11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독수리가 둥지에 있는 새끼를 깨우고, 그 새끼가 둥지에서 떨어질 것에 대비하여 날개를 너풀거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 새끼가 떨어지면 독수리는 날아서 그 새끼를 받아 다시 둥지로 올려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독수리가 새끼가 둥지에서 떨어지면 받기 위하여 날개를 너풀거리는 그 모습이 므라헤페트이다. 그런데 창세기 1:2을 보면 하나님은 혼돈, 공허, 흑암으로 정의되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그 위에 독수리가 날개를 너풀거리며 보호하는 것처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혼돈, 공허, 흑암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날개를 펼치고 지금도 너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여서 우리 삶에 흑암을 물리쳐 주시고, 또 혼돈된 내 삶에 궁창을 명령하시고, 땅과 바다를 만드시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를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소망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 저는 교회가 사택을 구입해 주어서 7월 6일에 동부산훼미리 3차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 그래서 지금 아내와 함께 짐을 정리하면서 처음에 자여교회 부임할 때를 생각하였다. 저희 가정은 자여교회에 부임하기 전까지는 부산과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양정제일교회에서 전도사시절을 보내었고, 부산동교회에서 강도사시절을 보내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 부목사를 시작하였고, 창원한빛교회에서 4년동안 훈련을 받았다. 그러므로 저희 집 주소에는 동이 들어갔다. 그런데 자여교회 부임하면서 처음으로 창원시 의창구 동읍이라는 주소를 가지게 되었다. 첫 담임사역지이고 첫 시골의 삶이었는데, 여기서 내가 목회를 잘 하고, 또 목회도 잘할 수 있을까? 긴장하며 자여마을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오늘 우리 자녀들을 생각해 보았다. 홍보에 관심이 많은 주남이는 작년에는 스포츠 마케팅을 통하여 열심히 살았고, 또 올 해 대학생산학연계광고창작경연대회와 교내 프리젠테이션 경연대회로 바쁘게 살고 있다. 그리고 가을에는 프랑스에 교환학생으로 가는 길이 열려서 그 준비하고 있다. 또 대학교 2학년인 주혜는 학교에서 꾸준히 성적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고 있고, 막내 주현이는 새벽까지 공부하면서 수능을 준비하고 있다. 10년을 살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산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녀들을 건강하게 잘 키워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 저희 가정만 그랬겠는가? 하나님께서 제 사역에 은혜를 더하여 주심으로 인하여 교회당을 건축하게 하시고, 또 그 교회당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불러주셔서 함께 예배하고 아름답게 교제하는 건강한 자여교회 또 사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였는데, 하나님은 너풀거리는 날개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여서 제 입에서 감사가 나오도록 하여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떻게 제가 10년의 사역을 감사로 고백할 수 있었는가? 사실 제 삶에도 어렵고 힘들고 아픈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 아픔을 위로하시며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발견할 때 감사를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먼저 발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인 시편 8편은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칠 때가 아니면 훗날 다윗이 들에서 양치던 때를 생각하며 지은 시라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이 들에서 양치던 때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윗이 기쁨과 감격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2대 왕을 세우기 위하여 이새의 집으로 왔다. 그때 다윗의 일곱형제는 있었는데, 다윗만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 그래서 7명의 아들을 다 자기 앞으로 지나가게 한 사무엘은 이새에게 다른 아들이 없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다윗이 오기까지 식사자리에 앉지도 않겠다고 하면서 다윗을 기다리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왜 이새는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기 위하여 왔는데 다윗은 집으로 부르지 않았겠는가? 이새의 생각에 키도 크고 준수하게 생긴 엘리압은 왕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압만큼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른 6명의 형제는 왕이 될 수 있지만, 다윗은 결코 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무엘이 왕을 세우기 위하여 집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다윗은 형님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가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때 이새는 형님들이 전쟁터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그 안부를 알기 위하여 다윗을 보내었다. 그래서 다윗이 전쟁터에서 골리앗을 보고 싸우러 나가려 할 때 다윗을 무시하면 잘난 체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바로 다윗의 형제들이었다.
이렇게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했던 다윗이 오늘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것이다. 낮에는 하루 종일 양을 푸른초장으로 또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그 양들이 다 잠들었을 때에 다윗은 양을 지키기 위하여 피곤한 눈을 비비며 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행동을 하겠는가? 왜 나만 이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하나? 하면서 불평과 한숨을 쉬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윗은 기쁨과 감격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두신 달과 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지금 다윗의 이 고백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저는 지난주에 마종기시인의 며루치는 국물만 내면 끝장인가? 하는 시를 읽었다. 그 시를 먼저 들어보기 바란다.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
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
(며루치는 비명을 쳤겠지. 뜨겁다고, 숨차다고, 아프다고, 어둡다고.)
떼거리로 잡혀 생으로 말려서 온몸이 여위고
비틀어진 며루치 때의 비명을 들으면.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
(남해의 연한 물살,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치떼를 생각하자. 드디어 그 긴 겨울도 지나고 있다.)
국물 우려낸 멸치꼬락서니..의 그들..아니 우리들..
행복해야 할텐데..
마종기시인의 이 시는 연극 아버지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외판원이었던 아버지는 나이가 들면서 그 일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때 아버지의 눈에 들어온 것이 일용직으로 전전긍긍하며 사는 30대의 아들이었다. 힘들게 살면서 아들 키웠는데 그 아들은 일용직으로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기대를 다 걸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기에 갈등관계 속에서 여러번 싸워야 했다. 그런데 딸도 아버지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다. 월급 100만원도 벌지 못하는 비정규직으로 힘들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러한 자녀들을 위하여 교통사고를 가장하여 죽음을 맞이하면서 가족들에게 보험금 2억 3천만원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을 다 바쳐서 가족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사랑을 받았겠는가? 끝없는 희생의 삶을 살았지만,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또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며루치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연극 아버지는 마종기시인의 며루치는 국물만 내면 끝장인가? 하는 싯구를 통하여 아버지의 삶을 좀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시편 8편은 마종기시인의 며루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사실 다윗의 삶도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다윗은 아버지와 형님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다윗은 혼자 캄캄한 밤에 양떼를 지키켜 피곤한 눈을 비벼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누가 나를 좀 알아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윗은 그냥 기쁨과 감격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어떻게 다윗이 기쁨과 감격으로 노래할 수 있었겠는가? 먼저 시편 8편 4절을 읽어보기 바란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기서 사람(에노쉬)은 아주 약하고 미세한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자(벤-아담)는 흙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과 인자는 모두 작고 초라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약하고 초라한 자신을 하나님이 생각하고, 또 권고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부족하고 못난 나를 하나님이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종기 시인이 말하는 며루치는 자기의 희생과 노력을 먼저 발견하였다. 그랬던 마종기시인의 며루치는 그냥 불쌍한 한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의 희생과 노력을 발견하지 않고, 희생과 노력을 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기를 생각하고 권고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다. 그때 다윗은 참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는 인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삶에서 무엇을 먼저 찾고 있는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이 발견되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날들을 보면서 내 수고와 노력이 보여져서 억울해 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날들 속에 권고하여 주신 하나님을 발견하여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를 노래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