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에게 변증법은 사유의 ‘동일화’에 맞선 ‘비동일성에 대한 철저한 의식’이다. 아도르노는 ‘적합성’(adäquatio)의 원칙에 근거하여 개념과 대상의 일치를 이루어냈다고 믿는 동일성의 가상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사유가 대상에 적합하다고 믿는 개념은 대상으로부터의 추상일 뿐이기 때문에 그 대상을 완전하게 포착할 수 없다.
그리고 개념으로 완전히 추상될 수 없는 개별자와 특수자 사이에 존재 하는 모순은 바로 동일화하는 사유를 통해 생겨나고 또 동시에 밀려난 ‘비동일자’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동일성 철학은 보편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보편성의 추구는 개별자를 배제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 자체가 안고 있는 결함을 해소하기 위해 아도르노가 제시하는 ‘짜임관계(Konstellation)’*는 인식자체의 불완전성을 자각하고 자체 내에 안주하지 않는 사유방식이다. 짜임관계만이 내부에서 개념이 잘라내 버린 것, 즉 개념이 될 수는 없지만 또한 그만큼 되고자 원하는 것, 개념 이상의 것을 외부로부터 표현한다.
개념들은 인식되어야 할 사물의 주위에 모임으로써 잠재적으로 그 사물의 내적 요소를 규정하며, 또 사유가 필연적으로 자체로부터 배제해 버린 바에 사유로써 도달한다. 테리 이글턴은 아도르노의 ‘짜임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저 하늘에 빛나는 별은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위치에서 자신만의 색과 밝기로 그곳에 존재한다. 그 별들을 하나하나 각각 떨어트려 놓고 볼 때 그것은 무질서한 군성을 이룰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별자리로서 이름을 붙여준다. 별자리 형상으로 우리는 쉽게 찾고자 하는 별을 찾고 방향과 길을 찾을 수 있다. 하나의 별로서 독자적으로 빛나면서도 다른 별들과 함께 별자리를 구성함으로써 의미를 지니는 것, 이것이 바로 개별과 총체가 동시에 강조되는 성좌(Konstellation)의 의미이다. 개념을 폐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념을 사물화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한 근본 작업은 개념을 총체성이란 체계 속에 다시 집어넣는 것이며, 이때의 총체성이란 성좌적 총체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그런 체계나 전체가 될 것이다”**
아도르노의 ‘짜임관계’는 사유에 불가피한 동일성을 행하면서도 비동일자를 잘라내지 않을 수 있는 사유, 다시 말해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개별자를 배제하지 않을 수 있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짜임관계’를 통해서 아도르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다. 그래서 ‘동일성 사유’는 일면적이고 비동일자들에 억압적이기 때문에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동일자’와 ‘짜임관계’를 통해 대상을 철저히 사유하려는 아도르노의 반성적 태도에 대해 실천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는 사유는 곧 “행동(Verhalten)으로서 실천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ND, 243) 또한 아도르노는 “변화하고자 하는 실천은 이론 없이 변화될 수 없을 것”(ND, 146f)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도 실천’이라거나 ‘이론 없이 실천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실천”에 기여하지 않기 위해서, 실천에의 관심(Interesse von Praxis)을 위해서 이론이 자신의 독자성을 다시 획득해야 한다(ND, 146f)는 주장이다.(2011.12.10. 영진)
*'Konstellation'의 사전적 의미는 ’별자리‘다. ’짜임관계‘라는 번역은 홍승용 역, [부정변증법 Negative Dialektik]에 따른 것이며, ’성좌‘라는 번역은 방대원 역, [미학사상]에 따른 것이다.
** T. 이글턴: 『미학사상』, 방대원 역, 한신문화사 1995. 392-39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