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은 길고도 깊습니다. 밤을 넘긴 새벽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걷어내야 할 이불은 유난히 무겁습니다. 겨울숲 바라보기는 겨울 새벽의 느림과 무거움을 극복하고 털어내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은 오대산-선자령 탐방가는 날. 여느 때보다 일찍 부지런을 떨어 찬 새벽공기를 맞습니다. 설레임에 배낭의 무게와 새벽의 냉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서둘러 겨울산행 버스의 탑승성지로 향합니다. 성지에는 이미 겨울산에 빠진 산꾼들로 넘쳐납니다. 인파와 줄지어 서 있는 버스에 놀라움과 익숙함이 교차하고 어둠 속에서 부르는 동기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반갑습니다. 인원파악, 점호, 탑승, 안내, 휴식, 늦은 아침식사가 물흐르듯 이어지고, 이윽고 눈을 그득 품은 모습으로 환영해주는 오대산 산자락에 들어섭니다. 상원사 입구에서 본격 수업이 시작됩니다.
오대산-선자령 탐방은 알자, 놀자, 날자반 통합 수업. 반별, 조별로 눈덮힌 오대산의 품안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깁니다. 여전히 입구는 부산합니다. 어떤 조는 기념 촬영부터 시작하고, 근처의 또 다른조는 입구에 오대산을 지키는 산대장처럼 떡 버티고 서있는 잎갈나무를 올려보며 입산허락을 구합니다. 느긋하게 입구에 머물러 있던 팀은 두아름은 족히 넘어보이는 거목 앞에서 영화촬영이 한창입니다. 나무를 끌어안고 손깍지를 하는 연인 장면이 연출되고, 쏟아지는 짓궂은 농담에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측정도구 없이 나무둘레를 재는 생활의 지혜를 배우는 중입니다.
각기 다른 방식의 통과의례를 마치고 눈덮힌 샛길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관찰이 시작됩니다. 예닐곱개의 관찰수종이 10여미터 인근에 몰려 있어 나무마다 둘러싸고 겨울눈과 눈맞춤합니다. “와! 겨울눈이 너무 예쁘다” 여기저기에서 감탄이 들립니다. 청시닥나무, 시닥나무, 산겨릅나무 등 단풍나무과의 겨울눈입니다. 잡티없이 매끈하게 뻗은 붉은가지에 달걀형으로 붙어 있는 겨울눈이 하얀 눈과 대비되며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 예쁜 것들의 다름을 찾아내야 합니다. 가지가 푸른색을 띠는 청시닥나무의 어린가지와 겨울눈엔 짧은 털이 있고, 시닥나무는 털이 없으며, 산겨릅나무는 눈자루가 길다는 동정 포인트를 기록해둡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외롭게 자리잡고 있는 복자기의 겨울눈은 상대적으로 지저분해보입니다.
관찰수종 모두 빠짐없이 관찰하려면 겨울눈의 미모(?)에 빠져 있을 틈이 없습니다. 미덥지 못한 자신의 기억력을 속는 셈치고 또 한번 믿어보고 기록지에 서둘러 메모한 후 방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른 팀의 관찰이 끝났다 싶으면 재빨리 옮겨야 합니다. 물참대 자리가 먼저 비었습니다. 껍질이 벗겨진 어린가지와 가지끝의 가짜끝눈도 기억해둡니다. 떨기나무인 까치밥나무와도 만납니다. 강사님은 남한산성에서 관찰했던 반상록성 까마귀밥나무와 혼동하지 말라고 강조하는데 자신없습니다. 관찰수종의 겨울눈 이미지를 기억해두라고 하는데 뚜렷한 특징이 없는 경우 이미지화가 쉽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기록으로 남겨놓는 게 현재로선 최선입니다. 잠시 틈을 타 거목 앞에서 열받기 시작한 머리도 식힐겸 인증사진을 남깁니다.
등산로 쪽으로 옮겨 새로운 나무들을 만납니다. 이번에 만나는 겨울눈은 분위기가 이전에 봤던 것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이전에 봤던 나무들의 겨울눈이 호리호리 늘씬한 미인이라고 한다면 요번 나무의 겨울눈은 우락부락, 부리부리한게 마초 남성으로 비유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큼지막한 잎자국 안에 반구형의 비늘눈이 오뚝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굴참나무, 개살구나무와 함께 코르크가 발달한 3대 나무로 꼽히는 황벽나무의 겨울눈입니다. 특이하고 인상적이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바로 옆 나무의 겨울눈은 얼핏 까맣게 보입니다. 들메나무입니다. 약간 모가 진 어린가지와 짙은 갈색의 겨울눈을 확인하고, 단지가 발달하는 나무라는 것도 추가로 기록해둡니다. 관찰수종은 아니지만 가래나무의 겨울눈도 살펴봅니다. 겨울눈이 동물얼굴을 떠오르게 하는데, 낙타얼굴같기도하고 원숭이얼굴이라고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동물 얼굴을 닮은 겨울눈이 제법 있는 듯합니다.
입구에서 2백여미터 남짓 움직였을 뿐인데 시간이 제법 지체됐습니다. 약속시간 안에 원점 회귀하려면 이제는 발걸음에 속도를 내야합니다. 회나무, 난티나무, 피나무, 거제수나무를 잇따라 만나지만 길게 눈마주치며 인사나눌 겨를이 없습니다. 간단한 소개와 주요 특징만을 간추리고 속도를 냅니다.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가파른 데크 계단 길 아래서 단풍나무과 부게꽃과 마주칩니다. 이전에 봤던 예쁜 겨울눈을 기대했다간 실망입니다. 겨울눈도 털이 있어 그다지 깔끔하지 않은데 가지와 수피는 너덜너덜 벗겨져 있습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울 것 같은 뉘앙스의 나무이름과 달리 반전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마나 올랐을까? 눈밭에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네댓개 가지를 힘차게 뻗은 어린나무가 보입니다. 관찰대상인 나래회나무입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허공을 향해 쭉 뻗은 가지에 끝의 날카로운 겨울눈이 기세등등합니다.
다시 힘을 내 계단을 오릅니다. 데크를 밟는 발소리는 둔탁해지고 배낭도 점점 무거워지는 듯 합니다. 내맘을 아는 듯 쉬었으면 할 즈음이면 새로운 나무가 눈속에서 “저, 여기 있어요”하며 맞아줍니다. 강사님은 이 나무는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나무라며 가지부터 살펴보라 합니다. 서둘러 루페를 들이댑니다. 어린 가지에 오톨도톨한 껍질눈이 다닥다닥 돋아 있어 징그러울 정도입니다. 노박덩굴과의 회목나무, 겨울눈도 적잖게 개성있지만 가지만큼은 단연코 강렬한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산앵도는 회목나무와는 대조적으로 털이나 피목없이 매끈한 가지가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납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시닥나무 겨울눈 복습을 끝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상원사에서 오대산의 정기를 듬뿍마시고 월정사 전나무숲 산책하며 겨울숲, 겨울나무, 겨울눈 관찰에 피곤해진 심신을 정화합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듯 오대산 – 선자령 탐방의 진짜 수업은 오대산에 밤이 내려앉은 시간에 진행되는 방과후 수업, 이른바 친교의 시간에서 이루어집니다. 서먹함은 진즉 없어졌지만 아직까지 남은 어색함을 훌훌 날려버리고 겨울숲을 사랑하는 동료로 거듭나는 시간입니다. 오가는 술잔에 정이 담기고, 격려와 칭찬, 덕담이 푸짐한 안주로 차려집니다. 다시 한번 차례로 소개하며 확실하게 눈도장 찍고, 열린 마음 탓에 벌칙 수행에 따른 한마디 농담, 소소한 몸짓에도 폭소가 터집니다. 이어지는 겨울숲 퀴즈 시간, 선물교환권이 걸려서였을까요? 경쟁은 언제나 진지하고 치열합니다. 예정했던 시간을 훨씬 넘겨 아쉬움을 삼키고 마무리합니다. 너나 없이 한가족처럼 가까워졌음을 느낍니다. 그렇게 오대산의 밤은 흘러갑니다.
첫댓글 오대산, 선자령 잊지 못할 설경이었습니다.
바람, 묵묵히 겨울을 이겨내는 깊고 깊은 산속의 나무를 보며
우리도 멋진 봄을 기다려봅니다.
모두 안전하고, 멋진 일정이였습니다.
인솔해주신 강사님들의 열정과 정성 머리숙여 감사 인사올립니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겨울숲바라보기 모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名文입니다
감탄또 감탄!!!
역쉬~~
날밤 세워가며 카페를 풍성하게 해주심에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
👍 최고 👍 최고 👍 💕 😍
이십니다~~^^
다시 한번 오대산을 다녀 온것 마냥 생생하고 사실적인 후기 감사합니다
기억에서 지워질 무렵 후기를 읽고 다시 공부할 용기를 갖게 됩니다
김성철부강사님 존경합니다
후기가 더 재밌는거 맞나요?ㅎ
글도 선생님을 닮아 재치있고 부드러움이 넘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기 구독은 어떻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