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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8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다. 合力で万事が益となる。
본문: 로마서 8장 26절~30절
롬 8: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9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0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26. 同様に、霊も弱いわたし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わたしたちはどう祈るべきかを知りませんが、霊自らが、言葉に表せないうめきをもって執り成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27. 人の心を見抜く方は、霊の思いが何であるかを知っておられます。霊は、神の御心に従って、聖なる者たちのために執り成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28. 神を愛する者たち、つまり、御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者たちには、万事が益となるように共に働くということを、わたしたちは知っています。29. 神は前もって知っておられた者たちを、御子の姿に似たものにしようとあらかじめ定められました。それは、御子が多くの兄弟の中で長子となられるためです。30. 神は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者たちを召し出し、召し出した者たちを義とし、義とされた者たちに栄光をお与えになったのです。
오늘 본문의 시작은 우리의 약함을 성령님께서 돕고 계신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약함이란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의 ‘단점’이나 ‘약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약함’이란 내면의 상태가 육신적인 것으로 충만한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새벽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할 때에는 미리 준비한 메시지보다 강단에 섰을 때 생각나게 하시는 메시지가 더욱 분명한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요즘에는 민수기의 말씀을 받고 있는데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을 위한 과정을 통해 신앙생활의 메시지를 받고 있습니다. 며칠 전엔 성도의 고난에 대해서 기도회를 인도하는 도중에 정리해 주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생각하는 고난과 성도들이 생각하는 고난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은 말 그대로 물질의 부족함, 몸의 질병, 그리고 순조롭지 못한 일상생활과 같은 ‘고생하는 것, 수고스러운 일’ 자체를 ‘고난, 불행’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러한 ‘고생’을 고난이라고 오해하는 태도와 자세를 고난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복음을 믿음으로 복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고난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생스러운 일은 생깁니다. 이 세상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고생스러운 일로 가득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고생스러운 일은 우리를 불편하게 할 뿐 불행이나 고난은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오히려 고생스러운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지키며 사는 일상의 유익한 디딤돌이 됩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고생’ 자체를 고난으로 생각하지요. 이처럼 고생하는 것이 곧 고난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육신의 생각)으로 내면이 채워져 있는 상태가 고난인 것이지요. 그럼 고생스러운 일을 피하려고 하여, 하나님의 복을 체감하는 기회를 잃게 되어 버립니다. // 고난에 대한 생각이 바뀌시길 바랍니다.
26절의 약함이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고난받고 있는 상태, 수고스럽고 고생스런 일을 고난이라고 여기게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채워진 내면 상태를 또한 약하다고 말씀하신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정리하면 성도의 고난(고생에 대한 오해)은 성도의 약함(육신의 가치관으로 채워진 상태)으로 초래되는 것이지요.
불신자들은 대부분 이 약함을 단점이나 약점이라고 여기고 숨기려고만 합니다. 혹은 약함의 문제를 어떻게 든 해결해 보려고 하지요. 약함을 ‘고난’ 혹은 ‘문제’로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약한 것을 고난으로 여기는 것이 고난이기 때문에, 약함은 해결할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약함을 이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약함을 이용할 수 있는 지혜는 오로지 성령님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는 분이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고 성경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약함은 ‘고생하는 일’에 대한 오해를 일으킵니다. 따라서 우리의 약함을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닥친 고생스런 일에 대하여 도망하고 피할 기회가 아닌, 적극 이용하고 하나님의 복을 실감나게 체감할 기회로 삼을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걸림돌과 같은 고생과 수고를 디딤돌로 삼는 기적적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27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성령님의 생각을 알고 계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말씀은 성령님께서도 하나님의 생각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각을 공유하고 계시지요. 마치 요즘 클라우드 기술에서 공유 폴더에 파일들을 올리면 폴더를 공유하는 이들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함께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며 보고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드리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기도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유익함이나 자신에게만 유리한 것을 구하는 기도는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명분도 없습니다. 단지 중언부언하며 기원하는 이방인의 실없는 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없지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기도의 백미는 바로 28절의 고백을 통해 나타납니다. 개역성경의 표현으로 말해 보자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아멘!)”
오늘 말씀의 핵심적인 구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그 사랑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30절에는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인생 최고의 복입니다. 마찬가지 그러한 사랑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인생 최고의 복입니다. 이런 사랑을 체감하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순종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고생스러운 일과 수고스러운 일이 발생하지요. 하지만, 그 수고와 고생을 고난이라고 여겨서 낙심하거나 삶을 포기하게 된다면 엄청난 오해를 하는 것이지요.
옛날 옛날에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선정을 베푸는 성품이 좋고 인자한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들 왕자가 있었습니다. 부전자전이라고 그 왕과 왕자는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하루는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길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천사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이었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첫째 고민이었습니다. 둘째는 신분의 격차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합니다. 신분의 격차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배우고 못배우고, 가난하고 부하고가 문제 안됩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는데..... 그리고 세째로, 잘되고 못되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든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네째로, 어떻게 하면 그녀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것을 고민했습니다. 물론 연구도 했습니다. 주변의 의견도 구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을 하나 세 얻고 목수가 됩니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풍습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박한 생활 속에 엄청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과 부지런히 사귀었습니다. 마침내는 그 여인하고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다"라고...
비로소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습니다.”(인용 인터넷 블로그...)
이 우화는 덴마크의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비유로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성도를 통해, 그리고 우리와 함께 힘을 모아 이 세상에 완성하시려는 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마치 왕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왕후로 삼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왕자가 자신의 지위를 잠시 내려놓고 시골 마을의 목수가 되는 고생과 수고를 택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후가 될 여인에게 왕후가 될 수 있는 교육을 시키기 보다는 왕자가 스스로 시골마을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생활습관을 배우는 수고와 고생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는 것이지요. 고생과 수고였지만, 그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여인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십자가의 고생, 그리고 그 아픔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아는 우리들은,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합해져서 하나님의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정말 모든 것입니다. 좋은 일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일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가는 일에 쓰임받고 있습니다.
29절부터 30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에게 이루어질 ‘선’의 구체적인 과정과 결과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 그리고 미리 정하신 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들은 바로 이 세상에 살았고, 지금 살아가고, 앞으로 살아갈 모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류를 뜻하는 것인데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사람들 가운데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이들이 있지요. 그들은 결국 안타깝게도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분하고 속상한 일인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지막 심판의 날이 지금까지 미뤄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마지막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 즉 자녀들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29절에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말씀은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시작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부활의 열매로 맺어지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부활과 영생은 아직 보이지 않은 약속이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이며 우리의 영원한 소망인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0절에 정하신 이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이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숙명을 ‘영생하는 삶’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예정된 은혜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반드시 그 정하신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정되어 있는 은혜라도 순종으로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영적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약되어 있는 식당에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그 날짜에 자기 몸을 움직여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준비된 식사를 먹을 수 없는 것이지요.
유명한 성경 속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천국, 즉 하늘나라에 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마 22:14 에는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부르신 이들 중에 그 부르심에 응한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의롭게 하신 이들을 결국 영화롭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현재 신앙생활은 이 영화로운 삶을 위한 준비 기간입니다. 따라서 이 영광스러운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모두 이루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결단하시고 완성하실 그 때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유다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이들의 자세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1)”
그렇습니다.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서두에 여러분과 함께 나눈 것처럼 우리의 고생이나 수고를 고난으로 착각하게 하는 생각이 자신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도록 자기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오염된 생각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생각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마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을 지키려면 우리 몸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기도는 단순한 기원을 포함하여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진솔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 모든 것을 말해 보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성령님을 통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공감해 주십니다. 공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데 주어지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평생 자신의 얼굴도 직접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신 분(마 10:30)이시며, 우리의 세포가 형성되던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나를 만드시고, 지켜보고 계신 분(시 139:13)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광스러운 영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의지하는 생활이 이미 넘치는 복을 받은 인생입니다. 사랑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을 고난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우리 삶의 사소한 고생이나 수고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최고의 훈장입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고난으로 착각하게 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충만하고 넉넉하게 하십니다. 일상의 하나하나에 말씀과 기도를 채우는 사람의 인생은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아래에 영광스러운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목표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지만, 그렇지 못하여 낙심할 법한 일이라도 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세속의 가치관으로 절어 있는 나의 자아는 죽고, 영화로운 약속으로 가득한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복음의 삶은 긍정적인 삶과 부정적인 삶의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선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그 날까지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영화로운 날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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