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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쟁기를 잡고 / 왕상 19:15-21, 눅 9:51-6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되는 사람에 대한, 다시 말해 제자도에 대한 아주 심각한 교훈의 말씀이다. 제자들에게 엄격한 성찰 속에서 비상한 각오를 요구하시는 말씀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앞만 보고 가야할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잘못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제자직의 본질을 말씀한 것이면서 제자됨의 성격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에는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뜻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나? 오늘날도 보면, 예수 믿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산주의 세계나 이슬람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나라가 그렇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하고 나서는 순간에 이에 따라 많은 손해가 따른다. 직장에서 쫓겨난다. 좋은 직장을 빼앗기게 된다. 이혼을 당하가도 한다. 때로는 가정에서 떠나가게 된다. 유산을 못받는 경우도 있다. 어떤 때는 그 마을에 살지 못하고 쫓겨나기까지 한다. 재산을 빼앗기기도 한다. 지금도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생명까지 빼앗기는 사회가 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도 그랬고,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다. 초대교회 시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일로 인하여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했나? 그런데 요즘에는 순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순교적으로 사는 것이다. 순교적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에,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 오는 모든 불이익을 다 받아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순교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참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순교적으로 살지 않는다면 예수 믿는 참 맛, 참기쁨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참행복,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는 위대한 용기와 평안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 믿는다는 것의 뜻이 무엇이며,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다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름에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장사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노동하는 사람 할 것없이 다 자세가 중요하다. 기본자세를 바로해야 한다. 운동도 그렇다. 믾은 시간을 운동을 해도 기본자세가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좋은 성과를 얻을 수가 없다. 특별히 예수 믿는데도 처음부터 바른 자세로 출발해야 한다. 처음 예수를 영접했을 때의 그 감격, 그 느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세여야 한다. 시작과 끝이 같아야 한다. 처음에는 잘믿는 것 같다가 날이 갈수록 시원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시작했다 하면 끝까지 끈기있게 나아가는 사람은 정말 칭찬받아 마땅하다. 사람은 이래야 한다. 더 나아가 합당한 결단이 필요하다. 하나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 하나를 얻기 위하여 아홉을 버릴 수도 있다. 그리스도 하나를 얻기 위하여 전체를 다 버릴 수도 있다. 어쨌든 버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 버리지 않고 다 얻겠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시는대로 공부를 하려면 놀지 못한다. 진실하려면 거짓되지 못한다. 성실하게 살려면 손해를 본다. 각오해야 한다. 이런 각오가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조금 더 어려운 말로 한다면 이렇다. 종말론적 시간은 과거와 철저하게 결별하는 결단을 요구한다. 결혼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결혼을 했으면 그날부터는 그전의 일을 말끔히 잊어버려야 한다. 애인이 열이 있었든 백이 있었든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깨끗이 잊어버려야 한다. 뒤를 돌아다 보지 않아야 한다. 종말론적 시간에는 현재와 미래가 있을 뿐 과거는 없다. 과거와의 완전하 결별이 요구된다. 딱 끊어버릴 것이 요구된다. 과거가 좋았든 나빴든 상관없다. 과거가 부끄럽건 자랑스럽건 문제삼지 않는다. 예수 믿는 오늘부터는 종말론적 생을 사는 것이다. 오늘과 약속된 미래가 있을 뿐이다. 과거는 망각 속에 묻어야 한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결단이 필요하다. 본문에 나타나는 사람을 보니 모두가 뒤를 돌아봄으로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인가? 가정에 애착이 있는 사람들이다. 가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수님의 제자됨이 더 중요하다. 결단의 순간에 가서는 가정보다 예수님을 택할 수밖에 없다. 너무 가정적인 사람은 신앙생활이 소홀해지기 쉽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보면 가정생활에 소홀해 진다. 가정적이다. 참 좋은 말이지만, 가정이 목적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종말론적 시간 앞에서는 때로 가정에 원수도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말씀을 드리다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주기철 목사님 사모께서 일찍 돌아가셨다. 그래서 후처를 맞았다. 이분은 변호사 출시이다. 그런데도 주기철 목사님을 위해서 전처의 아이가 셋이나 딸린 목사님의 부인이 된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절하자 목사님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래서 자기가 낳은 것도 아닌 자녀들을 홀로 키우게 되는데, 조금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목사님들은 다 신사참배 하면서 적당히 넘어가는데 당신은 왜 감옥에 갇혀가지고 내가 낳지도 않은 자식들을 나한테 맡겨 이 고생을 시키는 거요?’ 하고 불평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부인은 그렇지 않았다. 철저횄다. 목사님이 감옥에서 너무도 어렵게 고생을 하시므로 장로님들이 돈을 모아 교섭을 해서 목사님을 잠시 병보석을 받게 되었다. 밤중이었다. 집에 돌아와 문을 두드린다. 사모님이 나와 문을 연다. 보니 목사님이 서 있다. 반색을 할 사모님이 뜻밖에도 냉정하다. ‘웬일이오?’ 차갑게 묻는다. ‘모르겠어. 나가라고 하기에 나왔지 뭐.’ 목사님이 대답한다. 그러자 부인이 말한다. ‘살아 돌아오면 당신은 내 남편이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꼼짝을 못하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순교해야 할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면 내 남편이 아니다. 이 말을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인가? 주기철 목사님의 일생을 영화로 만들 때, 사모님이 이런 말하는 대목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너무나 비인도적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일반적으로는 이해를 못하니까 이 장면을 그대로 살리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고 해서란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어느 결정적인 시간에 가서는 가정도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지상정을 끊어야 하는 것이다. 사사로운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에 절대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 오늘도 보면 그렇지 않은가?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은 가정을 일일이 돌아볼 수가 없다. 이런 사람도 있다. 결혼한 후 고시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가정은 완전히 남이다. 부인이 알아서 다 꾸려간다. 가정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하고 환경도 중요하다.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마는 종말론적 순간에 와서는 그리스도께 우선을 두어야 한다. 미온적인 신앙, 미결단적인 신앙, 분명하지 않은 신앙, 또는 뒤로 미루려고 하는 소극적인 신앙, 이런 신앙은 좋지 않다. 이것이 성서가 말씀하는 바이다. 본문에 나타난 세가지 유형의 사람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 사람은 충동형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은 것을 보고, 또 그 능력이 굉장한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을 보고, 따라가면 괜찮겠구나 싶어서 충동적으로 말한다. 57절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일시적 감정으로 이렇게 말한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즉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네가 부잣집 아들인 모양인데 나 따라오면 고생한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심이다. 이런 충동성 신앙은 문제가 있다. 조금만 박해가 있으면 뒤로 물러가게 된다. 바람직하지 못한 신앙이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앙에 있어서는 좀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신앙에는 으레 문제가 따른다. 꾸준해야 한다. 별로 많이 남지 않은 생을 살면서, 비상한 결심으로 출발해야 한다.
두 번째 사람은 갈등형이다.
59절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대목을 두고 교회에서는 두가지의 해석을 한다. 그 하나는 당장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장례식이나 치르고 따르겠다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그럴듯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는 부모에 대한 사명을 다하게 해달라는 청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맏아들이니까 부모님을 모시고 있으니만큼 부모님 세상 떠날 때까지 책임을 다하고 나서 따르겠다는 것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아프리카의 어느 똑똑한 청년에게 장학금을 주겠으니 와서 공부하라고 청했다. 그런데 답신이 왔는데,. ‘아버님 장레식을 치르고 가겠습니다’ 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나이가 몇이냐?’ 하고 물었더니 ‘40입니다’ 하더란다. 그러면 이 사람은 과연 몇 살이 되어야 학교에 올 것 같나? 부모를 모시고 효도를 다하고 장례를 치른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 좋은 이야기 같지만 반드시 옳은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야 무슨 일을 하겠나?
이 사람은 관습에 매인 사람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히브리 사람 나름의 관습이 있다. 장자는 부모를 모셔야 한다, 부모님 모시는 한에는 곁눈을 팔 수 없다는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의 인습을 보아도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십리 밖을 못나가게 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전화도 없고 교통도 불편했으니까 멀리 출장을 다니면 안되었다. 항상 부모님 가까이에서 살아야 한다. 부모님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효성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효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 인습이다 효도다 하고 가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한 다음에 언제 주님을 따르겠나? 그런 사람은 순교할 길이 있다하더라도 ‘내가 죽으면 부모님은 누가 모시나?’ 하는 걱정으로 순교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이런 목사님이 계셨다. 옛날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홀로 계시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서 기피를 했다. 그 바람에 그는 이리저리 숨어다니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렇게 끝내 군대를 가지 않고 목사가 되었다. 그분이 제일 어려워하는 것이 뭐냐하면 청년들이 입대하면서 기도 해달라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군에 안가려고 도망다니던 사람이 그런 기도를 해주자니 하도 괴로원서 고민하던 나머지 결국은 사표를 내고 이민을 가버렸다. 부모에 대한 의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것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겠다, 따를 마음이 있습니다마는 부모를 장사한 다음에 따르겠다.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 되니 어떻하면 좋을까 하고 갈등을 겪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렇게 확실한 결단이 없는 분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은 첫째고, 저것은 둘째고, 그것은 셋째다 하고 뚜렷이 선을 그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 가정의 일, 나의 일 해서 이 일이 먼저냐 저 일이 먼저냐 하고 갈팡질팡하다 보면 이 일도 안되고 저 일도 안되는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은 용의주도형이다.
앞보다도 뒤에 있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주저를 한다. 이래서 문제가 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것도 주저해서 였다. 확실한 결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멀찍이서 따라갔기 때문이다. 주저주저하다가 어려운 시험에 들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이들 세 유형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첫번째 사람은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낮은 처우에 대하여, 예수님과 더불어 고생하는 일에 대하여 감수할 각오가 필요했는데, 예수를 믿어서 더 잘살려하고 더 명예롭게 될려고만 했지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지 앟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현실적인 이익이 올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의 의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를 믿음으로 오는 이해득실을 헤아릴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재자가 된 것으로 충분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족한 것이다. 달리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야 바로 믿는 사람이다. 집이 있다면 천국이 집이요, 평안함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모신 기쁨으로 평안하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사람을 보면,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해야 될 일도 있다 이런 경우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싶은 일 쪽으로 따라갈 수는 없다.
세 번째 사람에 대해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하고 이 사람은 말한다.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한다. 떠나는 마당이니 가족에게 작벽인사라고 하겠다는 ‘인지상정’에 대하여 예수님은 참 박절도 하다 싶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하실 뿐이다. 그토록 비상한 결단을 요구하신다. 심리학적으로 이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공처가였던 것 같다. 집에 인사하러 갔다가는 못빠져나올 위인이었던 것 같다. 의지가 박약해서 아내가 붙들고 늘어지먄 그대로 주저앉을 위인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런 점을 알고 계셨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인사하러 가지 마라, 너 인사하러 갔다가는 못돌아 나온다 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자기 의지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나약한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 합당하지 않다. 결단은 혼자의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을 누구하고 의논하나?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을 누구하고 의논할 것인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해결할 문제이다. 의논할 것이 없다. 목사님들 가운데도 공처가가 있다. 어느 목사님은 미국에 유학을 가는데 반대하는 아내를 겨우 설득해서 2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약속하여 건너갔지만, 공부를 해보니 2-3년 더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한테 더 참아달라고 편지를 했더니 답장이 오기를 ‘누굴 죽이려고 그래요?’ 하고 당장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은 결국 공부도 못다하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문제는 의논이 필요없다. 의논을 기대하지도 말 것이다. 의논을 한다면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묻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탱크처럼 밀어붙일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 집에 돌아가서 인사하겠다고 한다. 그를 보고 에수님게서 비유로 말씀하신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농사짓는 것과 이스라엘에서 농사짓는 것이 비슷하다. 자도 쟁기질을 꼭 한번, 그것도 잠깐 해봤다. 쟁기가 무겁기도 하지만 소걸음이 얼마나 느린가? 그런데 쟁기를 땅에 대고보니 쟁기가 어떻게나 빨리 나가는지 혼났다. 그리고 땅이 잘파졌는가 뒤를 돌아보니 쟁기가 자꾸 하늘을 향하여 들리기만 했다. 앞을 바라보아야 들리지도 않고 깊게 팔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우리의 이상은 항상 저 앞에 있어야 한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 왜 돌아보느냐?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지금까지 제대로 해왔는지 궁금한 것이다. 내 과거가 제대로 되었는지 궁금해서 뒤돌아보는 순간에도 쟁기는 계속 앞으로 가고 있다. 중단없이 가고 있다. 소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다. 딱 멈추어 놓고 돌아보면 모르거니와 쟁기를 잡고 내 고개를 뒤로 돌리면 현재를 망치는 것이다. 현재를 망치면 미래도 망치는 것이다. 과거는 과거이다. 잘되었든 못되었든 끊어버려야 한다. 완전히 결별해 버리고 오늘과 내일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미래는 누구 손에 있느냐? 이것은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위탁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의 미래는 과거와의 연결이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느냐가 상관없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이제부터의 운명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예수님만 쳐다보면 되는데 과거를 왜 보나? 과거를 왜 의식하나?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왕년에 뭣 못해본 사람있나? 과거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거기에 있다. 미래가 중요하고, 앞만 보면 된다는 것이다. 앞에는 그리스도가 계신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된 모습이다. 예수님의 제자된 본질이다. 이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갈 것이다. 뒤돌아보지 마라. 앞으로 가는 사람이면 뒤를 돌아보지 마라. 국민학교 운동회 할 때 보면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즉시 막뛰는 아이가 있는 반면에 어떤 아이는 엄마가 어디 있나 둘러보면서 뛰다가 꼴지를 한다. 지금 앞만 보고 달려도 모자랄 판인데 엄마는 왜 바라보나?
예수 믿는 사람은 뒤돌아 보면 안된다. 과거에 잘한 것도 볼 것 없고, 잘못한 것도 볼 것 없다. 내 운명은 그리스도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천국에 합당한 사람, 미래지향적인 사람, 그리스도만 목표로 하는 사람, 결단이 있는 사람, 그리스도께 전 운명을 위탁한 사람, 그리고 적극적인 사람, 하나님의 역사를 최우선적으로 하고 모든 것을 다 그 위에 두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주님 나라에, 주님의 제자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1996-027)